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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중앙회, 노숙자 위해 사랑의삼계탕 나눔행사
-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중앙회(이사장 이선구 목사)가 제20회 사랑의삼계탕 나눔행사를 7월 17일 서울역 인근 서울시립 따스한채움터에서 열었다. 이날 노숙인 250여명과 봉사자들 포함해서 300 그릇의 삼계탕으로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하며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인터내셔널 슈퍼퀸 모델협회 회원들과 세계한인여성협 회원들이 후원하고 배식 봉사했다. 사랑의삼계탕 나눔행사는 20년째 매년 복날 즈음에 시행하며 이전에는 2000명에서 5000명까지 식사했으나 코로나로 절반 가량 줄어 현재는 전체 2000여명이 식사한다. 강남 구룡 마을 등 500가구에도 삼계탕 나눔을 하며, 5개 장애시설에도 30년간 삼계탕을 지원하고 있고, 대한노인회 경로당 중 어려운 곳에도 삼계탕을 지원하고 있다.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사랑의빨간밥차 이사장 이선구 목사가 “무더운 여름에 정성껏 준비한 삼계탕을 드시고 모두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오늘 행사를 위해 협력하시고 후원하신 모든 분들과 배식을 위해 봉사한 분들에게 감사하다”라고 인사하고, “자립을 위해 서울시 복지재단을 찾아 희망플러스 통장에 가입해 혜택을 받으라”라고 당부했다. 이것은 이선구 이사장이 10년 전에 서울시와 협력해 만들었다. 이어 이선구 이사장이 식사기도하고 배식했다. 배식 봉사 및 식사 따스한채움터에서는 매일 점심, 저녁을 제공하는데, 사랑의빨간밥차는 매주 금요일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은 시립으로 서울시가 운영하고 적십자가 보조하며 다양한 곳의 후원으로 매일 점심과 저녁을 제공하고 있다. 식사는 개인 칸막이가 처진 1, 2층에서 하며 1층 뒤편에는 대기석이 있고, 설거지는 3층에서 한다. 이날 사랑의빨간밥차는 삼계탕과 아울러 빵과 과자를 선물로 제공했다. 사랑의빨간밥차는 7월 복날을 전후해 독거어르신, 장애자, 노숙인들에게 삼계탕을 대접하는데, 이날 서울역 따스한채움터를 끝으로 뜻깊은 2026년도 삼계탕 나눔행사가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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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선관위, 서울·서북지역 대상 선거규정 개정안 공청회
- 총회선거관리위원회(회장 김종혁 목사)가 주최한 ‘총회선거규정 개정안에 대한 공청회’가 서울·서북지역을 대상으로 7월 16일 오전 10시 30분 총회회관에서 열렸다. 선거규정 전면 개정의 방향과 주요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선거는 단순히 사람을 선출하는 절차가 아니라 총회의 미래와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따라서 선거는 공정성과 투명성, 그리고 교단 구성원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선거 환경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습니다. 통신기술의 발달과 다양한 홍보 수단의 등장, 선거 관련 분쟁의 증가, 선출직의 확대, 그리고 교단 구성원들의 높아진 공정성 요구는 기존 선거규정만으로는 충분히 대응하기 어려운 현실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규정의 해석과 적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선과 반복되는 논란은 선거 결과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고 선거관리위원회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어 왔습니다. 이에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개정소위원회를 조직하여 기존 규정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보다 명확하고 일관된 선거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번 개정안은 단순한 조문 정비를 넘어 선거관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고, 후보자 검증 절차를 체계화하며, 공명선거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개정안은 선거관리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기존 당연직 선거관리위원 제도를 폐지하는 방안을 포함하였습니다. 그동안 직전 총회장과 임원들이 당연직으로 선거관리에 참여해 온 것은 제도적 안정성이라는 장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선거관리기구의 독립성과 중립성에 대한 우려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 임원들이 스스로의 권한과 영향력을 내려놓고 선거관리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단을 담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특정인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선거관리위원회를 보다 독립적인 기구로 세우기 위한 제도적 개혁의 일환입니다. 첫째, 선거관리위원회의 독립성과 책임성을 강화하였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하고, 위원의 제척•회피•기피 제도를 신설하였으며, 위원에 대한 징계와 해임 절차를 마련하여 선거관리의 공정성을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둘째, 후보자 검증 체계를 강화하였습니다. 단독후보나 정임원 추대 대상자라 하더라도 일반 후보와 동일한 자격심사와 검증 절차를 거치도록 하여 선거 과정의 형평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셋째. 선거운동의 범위와 제한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출마예정자, 예비후보등록자, 입후보예정자, 입후보자, 후보자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고 단계별 선거운동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을 최소화하고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였습니다. 넷째, 선거 관련 기록과 개인정보 관리 체계를 새롭게 정비하였습니다. 기록 작성, 보존, 열람, 파기, 비밀유지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여 선거관리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고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분쟁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섯째, 후보자 추천 과정의 투명성을 강화하였습니다. 후보자를 추천한 노회가 회의록과 정기회 요람을 일정 기간 내 제출하도록 하여 추천 절차의 적법성과 객관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섯째, 금품수수, 허위사실 유포, 비방과 같은 중대한 선거법 위반 행위에 대한 제재 기준을 강화하여 선거의 거룩성과 공공성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번 선거규정 전면 개정은 특정인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총회 전체의 신뢰를 회복하고 건강한 선거문화를 정착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아울러 이번 개정안에는 선거관리위원회의 규정 개정만으로 시행할 수 없는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구성방식 변경, 기관장 선출제도 개선, 일부 선출직 자격요건 조정, 당연직 선거관리위원 제도 폐지 등은 총회규칙의 개정이 선행되거나 병행되어야 하는 사안들입니다. 따라서 이번 개정안은 선거관리위원회만의 노력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총회 임원회와 규칙부, 각 상비부와 기관, 그리고 전국 노회들의 이해와 협력이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실질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개정안에 포함된 여러 내용들은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관행과 기득권을 내려놓고 총회 전체의 공익과 미래를 우선하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선거규정 개정 소위원회는 이번 개정안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다 공정한 선거, 보다 투명한 선거, 보다 독립적인 선거관리, 그리고 총회 구성원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향한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아무쪼록 총회의 지혜와 규칙부의 면밀한 검토, 그리고 전국 노회와 총대 여러분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력을 부탁드리며, 이번 개정안이 우리 총회의 건강한 선거문화와 제도 발전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위원장 김형곤 장로가 선거규정 개정안에 대한 개요를 설명하고 참석자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 이민호 장로가 기도하고 마무리했다. 앞서 예배는 조상래 목사의 인도로 이창원 장로가 기도, 현광욱 장로가 롬 11:23-24를 봉독, 김종철 목사가 ‘하나님의 접붙임의 능력’이란 제목으로 "이 세상에서 사회법을 잘 지키듯이 교회법, 선거법을 잘 지켜 행하자."라고 설교하고, 안성국 목사가 광고 후 최찬용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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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 이리노회 재판국 이진 목사 판결...."무효 판결"
- 총회 특별재판국의 북일교회 이 진 담임목사의 직무정지와 면직판결이 무효된 것에 이어 이리노회 재판국의 제명출교 무기정직 판결에 대한 무효확인 소송에서도 판결이 무효됐다. 2026가합50024노회판결무효등확인의소 - 승소 2025가합50164노회재판국판결무효등확인 - 승소 2026가합50019노회위임청빙결의무효확인청구 - 패소(원고 김00 진00 조00 국00 노00) 이로써 이 진 담임목사에 대한 전방위적인 불법 재판들이 사회 법원에서 모두 무효가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향후 소송비용과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됨에 따라 이리노회가 어떻게 감당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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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재판국 소송비용... 개인대납 의혹 불거져
- 총회가 소송을 당하게 될 때 소송비용을 대납하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교회간 분쟁이 생겼을 때, 총회가 소송을 당하게 되면, 총회가 손을 들어준 교회에 소송비용을 담당하도록 떠넘기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총회 특별재판국(국장 이은철)이 불법재판을 하여 소송을 당했는데 소송비용을 개인에게 대납하여 진행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회 특별재판국은 구성과정에서의 하자가 있기는 했지만 총회의 결의로 총회가 사건을 수임케 한 총회 조직체이다. 그러므로 소송 당사자도 총회가 되는 것인데, 소송비용을 왜 개인이 부담하도록 했는지 의구심이 증폭되는 것이다. 이는 소송비용을 대납하면서까지 이 사건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여론이 비등하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게 한다. 총회 현장에서 총회 재판국이 보고도 하지 않았는데 특별재판국으로 보내도록 제안을 한 것 만으로도 정상적이지 않은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특별재판국 국장도 아님에도 소송비용을 대납하면서 개입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사건의 배후로 의심을 사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제 세상에서는 불법으로 치리하는 교단의 행태에 손해배상까지 선고하는 상황에서 특별재판국의 불법 재판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본인이 책임질지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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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토크425】 죽을 때가 되면 연명하지 말고 죽자
- 《장수 지옥》은 결론적으로 웰 다잉을 위해 웰 리빙을 실천해야 함을 알려주는 책이다. ‘크로와상 증후군’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을 만큼, 여성 및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은 책을 발표해온 마쓰바라 준코가, 일본의 초고령사회를 ‘장수 지옥’에 비유하면서, 연명치료의 양면성 및 재택 의료, 유료노인홈, 특별양호노인홈, 일본존엄사협회, 네덜란드 안락사협회 등 복지 현실 및 장수의 실상을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장수의 현실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진지하게 담아냈다. 회복이 불가능하고 음식 섭취가 불가능할 때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연명치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미리 결정하는 리빙 윌, 더 이상 희망이 없는 환자를 본인의 희망에 따라 고통이 적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안락사, 과도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며 목숨을 끊는 존엄사까지 죽음을 선택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저자의 솔직한 생각이 담겨 있다. 저자는 독거노인이 증가하는 일본에서 끝을 알 수 없는 장수 인생은 그야말로 지옥이라고 한다. 초고령사회로 돌입한 지금이야말로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고 겸허하게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자신의 좋은 죽음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가족을 따뜻하게 배웅하기 위해서라도 삶의 끝을 병원이나 의사에게 맡기지 말고 자기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라는 저자의 현실적인 조언을 만나볼 수 있다.-교보문고. 장수지옥 시대가 됐다. 건강하게 살다 죽어야 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치료가 아니다. 죽을 생명을 죽지 못하게 할 뿐이다. 중환자실에서 온갖 약물처방과 치료, 수술을 받다가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 그 때를 잘 준비하다가 때가 되면 잘 떠나야겠다. 60대라면 누구나 치매가 두렵다. 나도 예외가 아니며 치매로 판단력을 잃는 것은 암 선고보다 두렵다. 이렇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암으로 죽고 싶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왜냐하면 암에 걸리면 대략 수명을 알 수 있어서 정신이 온전한 동안에 임종을 준비할 수 있다. 젊다면 암을 이겨낼 수도 있지만 환갑이 지나서까지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계속 산다는 건 너무나 끔찍하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치매는 무섭지 않아.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걸?"이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이 말을 주워 담고 싶다. 여기서 확실히 말해두고 싶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 자신을 잃는 게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내 절친은 환갑이 되기 몇 개월 전에 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마는 본인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일상생활을 잠식해갔다. 친구는 어느 날 허리가 아파서 구급차에 실려 가 병원에 입원했다. 이메일로 압박골절인 듯하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얼마 후 휴대전화로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가족에게 연락했더니 말기 암 판정으로 시(p. 28)한부 진단을 받았고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퇴하면 같이 놀러 다니다가 노후에는 함께 살자" 고 할 정도로 친한 친구였는데,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불과 얼마 전에 같이 밥도 먹었는데, 그게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친구라 본인이 가장 허무하겠지만, 너무 좋은 친구였기에 이렇게 황망히 떠나다니 신이 원망스러웠다.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한동안 힘든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70세까지 산 지금 그 친구를 생각하면, 환갑은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오래 고생하지 않고 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 마음이 복잡하다(p. 29). 서구권에는 없는 위루관 수술 일본에서는 위루관 수술이 표준적인 조치로 인식되지만 서구권에서는 일반적으로 잘 하지 않는 수술이 다. 2015년에 네덜란드로 고령자 주택 등을 시찰하러 갔을 때 그곳에는 '연명치료'라는 개념조차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식도에 문제가 있는 환자에게 일시적으로 위루관 수술을 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회복을 위한 일시적인 조치이며 고령자의 연명을 위해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 위루관 수술을 비롯한 연명치료가 일반적이지 않은 이유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서구인은 일본인과 다르게 어릴 때부터 생명과 죽음에 대해 배우기 때문에 자신만의 사생관이 명확하다. 일본인은 예전부터 죽음을 두려워하며 터부시해왔고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꺼려하며 애써 외면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이는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가족의 죽음에 대해 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부모가 위독하면 '살려주세요' 라고 의사에게 애원한다. 연명치료가 당사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p. 51) 생각하지 않고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가족으로서의 감정만 주장한다. 그리고 살리는 일이 애정이라고 착각한다. 위루관 수술이 만연한 배경에는 의사나 병원에도 문제가 있지만 가족들의 바람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좀 심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가족이 무지하기 때문이다. 연명치료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다. 일본인은 노인이 되면 침대 생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북유럽의 노인들에게는 침대 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다른 걸까? 물론 세상에는 훌륭한 병원도 있고 존경할 만한 의사도 많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든 의사에게 맡기는 건 문제가 있다. 고령자라면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 문에 연명치료에 대해서는 반드시 생각해둬야 한다. 그렇 지 않으면 자신도 가족도 불행해진다. 건강할 때 올바른 지식을 익혀둬야 나중에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지킬 수 있다. 자녀들 또한 부모를 사랑한다면 "살려주세요"라며 의사의 팔을 붙들지 말고 올바른 지식을 갖추도록 하자. 앞서 말한 것처럼 유럽에서는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p. 52)할 수 없는 고령자에게 위루관 수술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입으로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죽게 해주는 일'이 그들의 문화이고, 그런 가치관이 생활 속에 녹아 있다.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는 게 의사를 맹신하는 일본과 크게 다른 점이다. 다시 말해 일본인의 대부분은 사생관이 없기 때문에 의사라는 전문가에게 의존한다. 죽음에 이른 사람을 자연스럽게 죽게 둘 것인가? 아니면 연명치료로 죽지 않게 할 것인가? 당신이 건강한 바로 지금 연명치료에 대해 확실히 공부해두자(p. 53). 여담이지만 장의사에 따르면 연명치료를 받다가 죽은 사람은 자연사한 사람보다 무겁다고 한다. 연명치료로 인해 몸속에 수액이나 영양분 등 수분이 차기 때문이다. 또 연명치료를 받은 주검은 얼굴 표정도 험악해서 가족이 봐도 놀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정성스럽게 화장을 해야 한다고 한다. 장의사는 시신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자연사를 하면 시신의 얼굴도 온화한 표정이라고 한다(p. 57). 연명치료란 무엇인가? 대개 ‘연명치료’라고 하면 ‘인공호흡기’, '위루관' 등이 먼저 떠오른다. 연명치료란 '근본적인 치료나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임종기 환자가 생명을 유지하고 연명하도록 하는 치료(일본대백과전서)를 말한다. 따라서 실제 연명치료에는 다양한 의료 처치가 포함된다. • 연명치료 방법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사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데 다들 연명치료가 무엇인지 재대로 알고 거부하는 걸까? 연명치료와 관련된 의료 처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p. 76). 연명치료는 주로 다음과 같은 처치를 포함한다. ① 심폐소생 심장이나 호흡이 정지했을 때의 치료 수단. 심장 마사지, 전기 쇼크, 기관내 삽관 등이 있다. 뼈가 약한 고령자에게 심장 마사지는 갈비뼈골절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한번 심장이 멈추면 다시 뛰게 해도 뇌사나 식물인간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다. ② 기관절개 기도가 혀에 막혀 질식 상태거나 뇌사 상태일 때 목에 구멍을 뚫는 처치. ③ 인공호흡기 자가호흡이 불안정할 때 호흡을 돕는 장치. ④ 강제 인공영양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을 때 강제로 영양분을 공급하는 방법을 말하며 비위관, 위루관, 중심정맥영양 등이 있다. 튜브 삽입에 따른 불쾌감을 비롯해 회복 및(p. 77) 생활의 질(qualty of ife)을 고려해야 한다. ⑤ 수분 보급 입으로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탈수 상태에 이르므로 손이나 다리의 정맥에 수액 주사를 처치한다. 방법으로는 말초정맥수액, 대량피하주사 등이 있다. 나이가 들면 혈관이 약하기 때문에 주사 놓을 곳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대량피하주사의 경우 수액의 속도가 빠르면 통증을 유발하므로 가능한 한 속도를 줄여야 한다. ⑥ 인공투석 신장이 기능하지 않을 때 신장을 대신해 혈액을 정화하는 의료 행위로, 단시간에 체내 환경이 급변하므로 고령자에게는 큰 부담이다. 일단 한번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⑦ 수혈 피를 토하거나 혈변 증상이 있을 때는 수혈이 필요하다. 하지만 위나 장의 말기 암은 지혈이 어려워서 결국 의미 없는 수혈을 반복해야 한다(p. 78). ⑧ 강력한 항생제 사용 오연성 폐렴이 반복되어 일반적인 항생제로 처치가 안 될 때 한층 강한 항생제를 사용한다. • 장점과 단점 연명치료의 장점은 문자 그대로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부분 고통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완치할 수 없으므로 이전처럼 건강한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또 연명치료는 한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 사망할 수 있으므로 도중에 제거할 수 없다. 또 연명 치료로 오래 살면 살수록 의료비 부담이 커진다. 삶을 어떻게 마감할지는 오롯이 본인 혼자서 결정해야 한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건강할 때 충분히 생각해 두어야 한다(p. 79). 개인적으로는 고독사야말로 이상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죽음이 일상생활의 연장선상에 있기(p. 133) 때문이다. 고독사는 죽음의 공포를 의식하지 않고 생활 하다가 홀연히 저세상으로 떠날 수 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죽음인 것이다. 게다가 쓰러져도 구급차를 부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 이런 죽음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죽음이 아닐까? 지금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죽음이야말로 혼자 맞는 게 이상적이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나는 조용히 떠나고 싶다. 병원으로 실려 가서 온갖 검사와 치료를 받다가 고생하며 떠날까 봐 두렵다(p. 134).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테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잘 죽고 싶다면 잘 살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 신의 영역인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 서로 으르렁거리는 가정(p. 195)에서 자란 사람, 독신이지만 친구가 많은 사람, 독신은 아니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사람,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지나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할 때 곧장 달려와 주는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사람, 노인을 보면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 등 사람은 정말 로 다양하다. 삶이 평범하더라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지금을 즐기자(p.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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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토크424】 삶을 위한 지혜로운 작은 조언들
- 2013년에 출간한 『문요한의 마음청진기』의 개정판인 『내가 커지면 문제는 작아진다』는 〈에너지 플러스〉 중에서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94편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화마가 휩쓸어 재만 남은 산야에도 다시 수목이 자라고 기름으로 뒤덮인 바다도 스스로 정화되듯, 어떤 상황에서도 힘껏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쉰다고 말하며, 진정한 치유와 성장이란 바로 자신 안의 생명력과 만나는 것이라 정의한다. 독자 개개인이 심리 상담소에서 마음 상태를 진단받아 치유와 성장으로 나아가도록 이 책은 총 5세션으로 구성되었다. 자신의 진짜 마음을 바로 아는 단계인 “마음 뒤의 마음을 보라”, 삶의 어려움에도 정신적 맷집을 키우라는 “모든 생명은 힘껏 살아간다”, 문제해결력을 키우기 위한 “내가 커지면 문제는 작아진다”, 모든 일에 도전하라는 내용의 “실험하라, 인생은 당신 편이다”, 더불어 살기를 강조하는 “그래도 함께 가라”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원고지 7매 내외의 짧고 압축적인 글임에도 정신의학 및 심리학적 설명이 충분히 뒷받침되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진단할 수 있도록 했다. 작가는 감성 어린 글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해제하고 자신과 대면하게 하는 자기치유적인 메시지도 더했다. 이 책의 제목인 『내가 커지면 문제는 작아진다』도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안의 치유본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착안되었다. 심리적 고통이 클 때는 그 치유본능을 못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순간에도 자기 안에 생명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믿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또한 일러스트레이터 김인하의 감각적인 50컷의 그림도 빛을 발한다. 각 장의 말미에서는 ‘Dr. 문의 심리솔루션’을 통해 정신적 맷집을 키우고 문제를 당당하게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멘탈 트레이닝 비법도 전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순간순간마다 마치 실제 심리 상담소에서 주치의와 마주하고 솔루션을 제시받는 듯한 느낌을 생생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점점 자기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대. 우리는 문요한이 전하는 94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결국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 자신이 만난 문제를 대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고 인생의 고민 앞에서 한 발짝 내딛게 하는 힘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멘탈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류의 책을 정기적으로 읽을 필요를 느낀다. 살면서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한번 정리하는 기회를 가졌다. 고독은 삶을 채우는 시간 돌아보면 젊은 날들은 참 외로웠습니다. 외로워서 누군가를 찾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있고 싶어졌고, 혼자 있으면 다시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반복재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웠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서툴렀지만 사실은 자신을 마주하고 관계하는 것이 더 서툴렀던 때였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과 외로움을 같은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혼자 있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성이 부족하고 친구가 없는 사람으로 비춰질까 봐 식당에서 혼자 밥을(p. 28) 먹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렇다 보니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꾸 사람들 속으로만 파고들게 됩니다. 영어에는 혼자 있는 것과 관련된 두 단어가 있습니다. ‘고독solitude’ 과 ’외로움lonelines’ 입니다. 물론 둘 다 ‘홀로 있는’ 상황은 같습니다. 하지만 고독은 스스로 관계에서 물러나 자신을 벗 삼은 능동적인 홀로 있음입니다. 그에 비해 외로움은 타인과 단절되어 누군가를 갈구하는 공허한 감정입니다. 고독이 내적 충만이라면 외로움은 내적 공허인 셈이지요. 고독은 외로움도 아니고 도피도 아닙니다. 고독은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이며 삶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어쩔 수 없이 홀로 되면 외로워지지만 스스로 홀로 있음을 선택하면 삶이 충만해 집니다. 마치 나비가 되기 위해 스스로 실을 감아 고치가 되는 번데기처럼 자기실현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고독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창조와 자기완성은 고독의 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낯설고 깜깜하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은 이내 당신을 위로하고 당신을 채워줄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이 외롭게 시들어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에게는 고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홀로 있음을 선택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중에서(p. 29). 권태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꼭 스트레스가 많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트레스가 별로 없어서 오는 분도 있습니다. 이들은 큰 걱정이나 스트레스가 없는 반면, 삶이 너무 따분하고 멈춰 버린 느낌에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다고 호소합니다.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이들도 삶이 제자리에 고이면서 정체감이나 권태감에 휩싸인 것입니다. 이러한 권태나 정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탈이라고 하면 먼저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탈선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중년의 권태나 정체감을 중독이나 외도처럼 파괴적인 일탈로 해(p. 46)결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탈이란 꼭 부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들이 하나의 일탈입니다. 꽃구경을 가고 공연을 보고 색다른 음식을 먹어보는 등 삶에 새로운 자극을 선사하는 것 역시 모두 일탈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붓을 잡고, 카메라를 들고, 춤을 추고, 글을 쓰는 등 자신을 노래하거나 표현하는 창조적 활동은 생산적 일탈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산적인 일탈과 파괴적인 일탈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유목민의 시대인 21세기에는 파괴적인 일탈만큼 무일탈 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의 시대에 절대적인 안전지대란 있을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대니얼 레빈슨은 삶을 ‘정착과 이주의 연속’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삶이란 6~7년의 안정기와 4~5년의 전환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권태는 사실 정착 기간의 종료를 알리는 알람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입니다. 물이 웅덩이를 만나면 썩어가듯이 삶도 틀 안에 갇히면 죽어갑니다. 당신에게 권태감이 찾아왔나요? 그렇다면 삶을 다시 흐르게 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신호가 찾아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25살에 이미 죽어버리는데 장례식은 75살에 치른다." 벤자민 프랭클린(p. 47). 누군가 태클을 걸어올 때 교육학자인 몬테소리는 이탈리아 최초 여의사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최초라는 것은 영광만큼이나 고난 또한 몇 배 크게 마련입니다. 몬테소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였기 때문에 겪었던 차별과 최초였기 때문에 뚫고 나가야 했던 악습은 너무나 거대했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해부학 수업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남자 동료들과 시체를 함께 해부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깜깜한 저녁에 악취가 풍기는 실습실에서 혼자 시체에 칼을 대어야 했습니다. 차별과 비난은 그녀가 교육학자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계속되었습 니다. 보수적인 교육학자들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온갖 비(p. 86)판으로 그녀를 물어뜯으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몬테소리는 비평가들과 싸우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걸으며 영향력을 점점 넓혀갔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존경을 보냈지만 한편으로는 왜 당당하게 맞서 싸우지 않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그녀에게 왜 차별이나 편견에 대해 싸우지 않느냐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개 한 마리가 내 발꿈치를 물려고 한다면, 그때 내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개를 발로 차내든 아니면 더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는 더 높이 올라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 단지 무리에서 벗어났거나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가만히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일일이 싸우기보다 그들이 물어뜯을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삶의 방향이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들은 타인들의 왜곡된 평가나 시선에 의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야할 곳이 있기에 아무 곳에서나 힘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 더 높이 올라 갑니다. 합당한 이유 없이 당신에게 태클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나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 높이 올라갈 것인가요, 아니면 사다리에서 내려와 싸울 것인가요?(p. 87). 세상은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 혹시 레나 마리아라는 여성을 아시나요? 그녀는 스웨덴 태생의 가스펠 가수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은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레나 마리아는 부모의 도움으로 누구보다 활발한 활동을 하며 장애를 극복해 왔습니다. 요리, 운전, 자수, 피아노 등은 물론 세계 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 나가 여러 개의 금메달을 석권하기도 하였습니다. 절대적인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녀는 온몸으로 부딪혀 뛰어넘어온 것입니다. 그녀는 웃으면서 자신의 장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저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인생에서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p. 94)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람이란 누구든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험하다 보니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피해의식은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과 피해를 줄 것이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의식상태도 있습니다. 일명 '역 피해의식'입니다. 이는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이 결국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좋은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이나 그 모든 경험들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을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레나 마리아처럼 결코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는 마음가짐입니다. 맹자는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심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행하는 일마다 엉망으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고통을 참고 견디게 하여, 이전에는 해내지 못 한 일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는 역경이나 시련을 자신이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바라보고, 그 성장통을 피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에는 늘 예상치 못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 고통에 가장 좋은 치료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의미 찾기'입니다. 지금 겪는 이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의미를 주는 경험이라고 느낄 때, 우리는 고통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고통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고통스러운가요? 그렇다면 그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p. 95). 왜 하는지를 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1994년 11월 5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적인 헤비급 타이틀 매치가 펼쳐졌습니다. 마흔다섯의 늙은 도전자 조지 포먼과 스물아홉의 젊은 챔피언 마이클 무어가 맞붙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어의 승리를 낙관했습니다. 그러나 포먼은 무어에게 끌려가던 경기를 뒤집고 10회에 극적인 KO승을 거두었습니다. 권투 역사상 최고령 챔피언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포먼으로 하여금 할아버지 복서라는 조롱을 들으면서도 링에 오르게 했을까요? 어떻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 경기가 더욱 감동적인 이유는 그가 20년 전 아프리카 킨샤사에서 알리에게 당했던 패배를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p. 99). 시간은 거슬러 1971년으로 갑니다. 당시 포먼은 40연의 무패가도를 달리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헤비급 챔피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하다드 알리는 서른두 살의 늙은 도전자였죠. 사람들은 모두 포면의 승리를 점쳤습니다. 그러나 알리는 불리하게 진행되던 경기를 뒤집어 8회에 포먼을 눕히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이날 경기는 알리에게 킨샤사의 기적이 되었고, 포먼에게는 ‘킨샤사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포먼은 그날의 패배 이후 완전히 무너져서 결국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권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후 포먼은 고향에서 목사로 활동했습니다. 10년의 세월 동안 목회와 청소년 선도를 위해 애쓰던 포먼은 서른여덟 살이 되자 다시 링 위에 올라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빈민가의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어줄 청소년 센터의 운영자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청소년들을 위해 다시 글러브를 꼈습니다. 150킬로그램이라는 육중한 몸과 고령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이끌고 다시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재기를 준비하면서 뒤늦게 자신이 알리에게 진 진짜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알리는 싸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 펀치를 견딜 수 있었던 거야. 목적이 있으면 고통을 견딜 수 있어. 하지만 난 그때 목적이 없었던 거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링에 복귀했지만, 포먼은 젊은 챔피언 시절에는 없었던 사명과 목적의식으로 강하게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챔피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자원이었죠(p. 100).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다시 일어나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잘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포먼은 패배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위안을 줍니다. “패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패배는 인생에서 단 하루 벌어진 일일 뿐이므로 거기에 압도돼서는 안 된다. 내가 마음속으로 진정 원하는 바를 추구할 때에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p. 101). ~때문에, ~에도 불구하고, ~덕분에 정신과의사를 하면서 흔히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날마다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정말 힘들지 않나요?" 물론 힘든 이야기를 계속 듣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말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똑같이 힘든 이야기만 듣는다면 정말 스트레스가 크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찾아 오는 사람들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에 힘든 것 이상의 보람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처음 상담을 받으러 올 때에 사람들은 '~때문에'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부모 때문에, 어려운 환경 때문에, 지난 실패 때문에, 실연 때문에... 나의 인생이 불행해졌다고 느낍니다. 또한 바쁘기 때문에, 능력(p. 116)이 부족하기 때문에, 용기가 없기 때문에, 예전에도 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사나 합리화는 가장 쉽게 자신을 방어하도록 도와주지만 이를 통한 위안은 결국 문제나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자라나면 '~때문에'라는 마음이 줄어들고 ‘~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이 늘어납니다. 비록 과거에 상처나 실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다시 시작해 보겠다거나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불편함과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더욱 자라나면 ‘~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과 함께 ‘~덕분에’ 라는 마음이 늘어나게 됩니다. 과거의 가난이나 어려운 환경, 지난 실패와 고난 덕분에 자신이 겸손해질 수 있었거나 타인의 고통에 눈뜨게 되었거나 삶이 더욱 단단해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상처가 보석으로 바뀌는 놀라운 마음의 연금술이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사람을 정말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탁월한 재능이 아니라 바로 '~에도 불구하고'와 ‘~덕분에’ 같은 정신이 아닐까요?(p. 117). 열등감은 탁월함을 끌어내는 디딤돌 연예인이나 미스코리아인 사람들은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로 예쁜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기에 열등감이 더 크면 컸지 더 적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열등감을 느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만 사실 열등감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주위에서 보면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정작 자신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마련입니다. 체형과 외모, 학력, 집안, 운동 능력, 화술, 인간 관계, 성격, 재산 등 어떤 부분에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이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사람이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자신에게 없는 것(p. 190)을 욕망하기 때문에 이러한 약점은 열등감이라는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단점으로 인해 놀림을 받거나 수치심을 느낀 일이 있었다면 그 열등감은 보편적 수준을 넘어 병적으로 확대 됩니다. 즉, 자신이 한 부분에 부족함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근본적인 결함이 있고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 부분을 알면 자신을 무시하거나 싫어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열등감 자체가 꼭 삶에 해로운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보편적인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의 강점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병적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을 치명적인 것으로 느끼고, 어떻게든 단점을 감추거나 커버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느라 정작 자신이 원하는 삶이나 강점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걸림돌로 느껴져서 늘 거짓말을 하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불안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탁월함을 끌어내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허영만 화백이 그렇습니다. 그는 ‘고졸’이라는 열등감이 있었지만 이를 감추기보다는 '나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라는 구절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늘 공부하는 만화가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학력이 짧으니 실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메모광이 되었고 발로(p. 191) 뛰는 작가가 되어 이 시대 최고의 만화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열등감만이 탁월함의 밑바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탁일함의 밑바탕에는 크고 작은 열등감이 내재되어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진 열등감이나 부족함이란, 어떻게 보면 당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아니라 당신 안의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p. 192). 사람의 그릇 크기는 달라질 수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이 실제로 사용하는 근력은 잠재능력의 50~60퍼센트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은 잠재능력은 위기의 순간을 위해 비축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동차를 들어 올렸다거나 노인이 집에 불이 나자 패물이 든 장롱을 메고 뛰쳐나왔다는 식의 이야기는 다소 과장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1907년 르완다로 조사를 나갔던 독일의 한 인류학자는 투치족이라는 부족의 놀라운 점프력을 목격했습니다. 어떤 부족원은 자신의 키보다 더 높은 1.9미터 정도를 너무 쉽게 뛰어넘었습니다. 1912년도에 공 인된 남자 높이뛰기 세계신기록이 2미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프(p. 193)리카 오지의 원주민이 어느 정도의 실력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투치족은 점프력이 대단했을까요? 그 이유는 투치족의 전통에 있었습니다. 투치족 사람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 자신의 키만큼 높이 뛰어야 성인식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계속 높이뛰기를 연습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그릇 크기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그릇보다 더 많은 것을 담으려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이 말은 실패를 두려워하고 도전을 회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합리화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크기가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과연 나라는 사람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일까요? 사람이란 그 크기가 무한정 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그릇의 크기가 고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신체의 성장은 성장판이 닫히면 끝나지만 삶의 성장은 더 나아지려는 마음이 있는 한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보이는 모습만을 자신의 전부인 양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근력의 50~60퍼센트만을 발휘해 본 사람들이 그것이 신체적 한계라고 믿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올림픽마다 인간의 한계라고 일컬어졌던 기록이 계속 경신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도전과 노(p. 194)력, 방법적인 개선이 반복되면 인간의 능력 이란 계속 향상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자신을 크기가 고정된 그릇이라고 생각하면 그 크기 이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커질 수 있는 그릇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점점 확장할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보시나요?(p. 195). 개라지 테크놀로지 벤처스의 대표이자 신생 기업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가이 가와사키는 창업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준비물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는 창업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자본이나 기술 혹은 인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가와사키는 언제나 “가장 먼저 의미를 만들라”고 이야기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창업이 그저 돈이나 성공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일에 깊은 의미를 가진 창업가는 설사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일에 도전했다는 긍지로 다시 도전할 수 있지만, 단순히 돈을 벌려고 창업을 한 사람들은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도전하기(p. 213) 어려운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요. 그 질문을 들으면 나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설사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도전하는 그 일이 도전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에게 만족감을 주거나 의미 있는 일인가요? 그렇다면 시작하세요." 도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도전의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p. 214). 상담을 하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아 깊은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실망감과 좌절감을 훨씬 크게 느낍니다. 그러나 불확실함이 없는 믿음이란 맹신에 가까우며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여 삶을 위태롭게 합니다. 건강한 믿음이란 자신이 계획한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 때로는 혼돈과 불확실함 때문에 흔들리고 멈춰 서지만 결국 그 길의 끝에 자신이 원하는 삶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마음에 가깝습니다(p. 237). 예전에는 꼬이는 일도 많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로 인해서 인생이 참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생이 내 편이 아니라고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마흔이 되면서 인생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 했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지려면 때가 있고 지금까지 겪은 모든 경험과 방황들이 결국 내가 가야할 곳으로 나를 안내하는 이정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끌고 간다기보다 인생이 나를 필요한 곳으로 이끌어준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내가 인생에 선의를 가지고 대하면 인생 역시 나를 선의로 대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뜻대로 되지 않거나 누군가와의 관계가 삐걱거리게 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뜻대로 되는 일이든 아니든, 좋은 사람이든 좋지 않은 사람이든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경험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고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나를 이끌어줄 것이다. 그 믿음이 생기면서 성난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심연의 불안도 잠잠해졌고 인생을 끌고 가려고 버둥버둥거렸던 초조함도 많이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믿습니다. 나의 물음과 두드림에 꼭 응답이 있으리라는 것을, 내가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른다면 결국 나는 바다에 가 닿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당신도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른다면 바다에 가 닿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 섞이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p.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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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중앙회, 20회 사랑의삼계탕 나눔행사
-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중앙회(이사장 이선구 목사)가 제20회 사랑의삼계탕 나눔행사를 7월 14일 인천시 서구 서곶로에 소재한 한신교회(담임 주 신 목사)에서 열었다. 이 행사는 교회 주변 독거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사랑의빨간밥차가 주관하고 한신교회에서 협력했다. 사랑의삼계탕 나눔행사는 20년째 매년 복날 즈음에 시행하며 이전에는 2000명에서 5000명까지 식사했으나 코로나로 절반 가량 줄어 현재는 전체 2000여명이 식사한다. 강남 구룡 마을 등 500가구에도 삼계탕 나눔을 하며, 5개 장애시설에도 30년간 삼계탕을 지원하고 있고, 대한노인회 경로당 중 어려운 곳에도 삼계탕을 지원하고 있다.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사랑의빨간밥차 이사장 이선구 목사가 “무더운 여름에 정성껏 준비한 삼계탕을 드시고 모두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오늘 행사를 위해 협력하시고 후원하신 모든 분들과 무더위에 주방에서 수고하시는 한신교회 모든 교우들, 배식을 위한 봉산단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르신들이 모두 예수님 믿고 나누고 베풀며 살고, 신앙을 통해 천국 가시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배식 봉사 이 행사를 격려하기 위해 참석한 관계자들은 "삼계탕을 드시고 모두 무더위에 건강하시기를 기원"하고 직접 배식 봉사했다. 참석자들은 삼계탕 식사 후 준비한 여러 선물을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모임을 마쳤다. 사랑의삼계탕 나눔잔치는 이번주 계속해서 진행된다. 7월 15일(수) 주안역 7월 16일(목) 부평역 7월 17일(금) 서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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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지역장로협의회, “한마음·한비전·한걸음” 워크샵 개최
- 서북지역장로협의회(대표회장 김성대 장로)가 서북장로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확인하고, 더 나은 발전을 도모하는 워크샵을 “복음통일을 향한 믿음의 동행”이란 주제로 7월 13일 오전 11시 예우림교회(유병희 목사 시무)에서 가졌다. 대표회장 김성대 장로가 “무더운 날씨에 협의회의 발전에 관심을 갖고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설교해 주시고, 장소를 제공해 주신 목사님들께 더욱 감사드린다.”라고 인사말했다. 총회부서기 유병희 목사가 “안에 있는 것이 좋아야 밖으로 좋은 것이 나온다. 서북장로회가 잘 떠오르기를 바란다. 그럴려면 그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올바르게 뜰 수 있다. 저는 총회 부서기로 바르게 할려고 한다. 여러 장로님들도 바르게 하고 힘을 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기 바란다.”라고 축사했다. 총회 부회계 안수연 장로가 “서북협은 북한선교를 감당하고 있는데, 앞으로 더 잘 감당할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인사말했다. 1부 예배는 대표회장 김성대 장로의 인도로 다같이 “서북지역장로협의회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배려하며 격려함으로 하나되어 복음으로 북녘을 품고 기도로 통일을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한다.”라는 사명선언문 고백, 실무회장 전병철 장로가 기도, 서기 윤장섭 장로가 느 2:17~20을 봉독, 자문위원장 오윤택 장로가 특송했다. 대한교회 윤영민 목사가 ‘다시, 서북입니다’란 제목으로 “서북협은 북한땅을 향해야 한다. 그곳은 복음 들고 다시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서북은 사명이다. 전쟁으로 남하했을 때 노회 이름을 갖고 왔다. 반드시 돌아갈 것을 다짐한 것이다. 그러면서 70년을 감당해 왔다. 우리는 서북의 신앙을 이어받은 후예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보고 고향을 떠올리며 울고 결단했다. 서북이 우리 신앙의 뿌리로서 여기서 노회, 총회, 총신대학 등이 뻗어나갔다. 그러므로 북한을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다시 서북이다. 우리는 뿌리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북한을 잊지 말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서북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 성벽은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에 의해 세워졌다. 북한교회도 기도하는 신자들에 의해 재건된다. 그래서 미래의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도로, 탈북민 사역으로, 북한교회 재건으로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북한을 포기하지 않으셨기에 우리에게 서북협의회를 주신 것이다.”라고 설교했다. 회계 김원식 장로가 헌금기도, 사무총장 김기현 장로가 광고 후 유병희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주제발표 2부 워크샵은 상임회장 백장현 장로의 사회로 자기소개 및 상견례 후 ‘서북장로회 출범과정’이란 제목으로 대외협력위원장 주홍동 장로가 “우여곡절 끝에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서북협으로서 하나님께 맡은 귀한 사명이 있다.”라고, ‘서북장로회 정체성’이란 제목으로 증경회장 양호영 장로가 “우리는 보수개혁주의 계승자라는 정체성, 하나됨의 연합체를 갖고 있다. 우리는 북한선교, 교회재건 준비, 통일 선교 전략 준비 / 총회 화합과 교단 발전 도모 / 영성회복, 차세대 양육을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말씀과 기도 위에 서야한다. 또한 봉사 공동체가 되며, 화합과 일치를 이루고, 다음 세대를 세우고 복음 공동체를 이루며 기도하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 내년은 평양대부흥 120주년이다. 기도로 준비하자.”라고, ‘서북장로회 방향성’이란 제목으로 증경회장 현광욱 장로가 “우리 안에도 이 협의회에 대해 마음이 하나로 하지 않는 분들이 있어 아쉬움이 있는데, 위상을 높이는 일에 한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라고, ‘서북장로회 문제점 및 해결방안’이란 제목으로 명예회장 김완겸 장로가 “우리 협의회 확장성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서북에는 42개 노회 4000여개의 교회가 있는데 참여율이 저조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울서북지역협의회와 함께 가야한다. 또한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어 결속력이 부족한 것 같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사명을 일깨우고 함께하는 모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장연에서도 우리의 위치를 가져야 한다.”라고 발표했다. 자유토론 이어 자유토론 때 전국남전도회연합회 증경회장 배원식 장로가 “우리의 정체성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이 관심 갖고 장로님들을 보내주셔야 한다. 서북장로협수련회 때에도 많이 참석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적인 헌신이 필요하다.”라고, 소래노회 장로회장 신용철 장로가 “서북장로협에서 자유롭게 열심히 활동하도록 하겠다”라고, 전병철 장로가 “서북장로협의회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많다. 이 협의회에 대해 많이 알려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교회에 목사님에게도 설명해 알려야 한다.”라고, 함북노회 장승수 장로가 “오늘 서북협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목사님들이 이 협의회에 장로들을 많이 보낼 수 있도록 홍보해야 한다.”라고 발언 후 고문 이광복 장로가 마침기도 및 식사기도 하고 예우림교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광고 1. 오늘 임원 워크샵을 예우림교회에서 갖게 된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2. 설교해주신 대한교회 윤영민 목사님과 축사와 축도해 주신 유병희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3. 특송으로 섬겨주신 자문위원장 오윤택 장로님께 감사합니다. 4. 오늘 워크샵에 함께 해주신 모른 장로님들께 감사드리며, 특히 고문님, 자문님 감사합니다. 5. 서북지역장로협의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원활한 사역을 위해 분담금 납부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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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7-15 09:50
특별재판국 소송비용... 개인대납 의혹 불거져
총회가 소송을 당하게 될 때 소송비용을 대납하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교회간 분쟁이 생겼을 때, 총회가 소송을 당하게 되면, 총회가 손을 들어준 교회에 소송비용을 담당하도록 떠넘기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총회 특별재판국(국장 이은철)이 불법재판을 하여 소송을 당했는데 소송비용을 개인에게 대납하여 진행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회 특별재판국은 구성과정에서의 하자가 있기는 했지만 총회의 결의로 총회가 사건을 수임케 한 총회 조직체이다. 그러므로 소송 당사자도 총회가 되는 것인데, 소송비용을 왜 개인이 부담하도록 했는지 의구심이 증폭되는 것이다. 이는 소송비용을 대납하면서까지 이 사건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여론이 비등하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게 한다. 총회 현장에서 총회 재판국이 보고도 하지 않았는데 특별재판국으로 보내도록 제안을 한 것 만으로도 정상적이지 않은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특별재판국 국장도 아님에도 소송비용을 대납하면서 개입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사건의 배후로 의심을 사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제 세상에서는 불법으로 치리하는 교단의 행태에 손해배상까지 선고하는 상황에서 특별재판국의 불법 재판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본인이 책임질지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
김병중(Th.D) 07-08 15:48
북일교회 이진 목사...법원, 특별재판국 면직 무효 판결
총회에서 불법으로 구성된 특별재판국(국장 이은철)이 이리노회 북일교회 이진 목사에 대해 내렸던 직무 정지 결의와 면직 판결이 무효인 것으로 선고됐다. 7월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5민사부는 이진 목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직무정지 결의 및 면직판결 모두가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선고했다. 이로 인해 총회 특별재판국의 불법성에 대한 법적 대응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는 소송비용을 총회가 부담하도록 하였는데, 소송 비용에 대한 책임소재가 어떻게 귀결될지도 귀추가 주목된다. -
김병중(Th.D) 07-02 10:06
전장연, "총회 임원선거 러닝메이트 제도 도입" 강력 반대
55회기 전국장로회연합회(회장 이해중 장로) 하기부부수련회가 “본질에 충실한 장로가 되자”란 주제로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홍천 소노캄 비발디파크에서 열렸다. 예년처럼 폐회예배 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올해는 결의문 작성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해 사전에 충분히 논의하고 7개 사항을 주장했다. 하나, 우리는 성경과 총회 헌법과 장로회 정치 신경과 교의를 수호하기로 굳게 다짐하고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정치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헌법 개정 절차법을 준수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하나, 우리는 여성강도사제도 헌법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하나, 우리는 항존직 정년연장 헌법 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하나, 우리는 총회 모든 조직에 목사 장로를 동수로 구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하나, 우리는 총회 임원선거에 러닝메이트(Running Mate) 제도 도입을 강력히 반대한다. 하나, 우리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전장연은 여성강도사제도에서 불거진 헌법 개정 절차 위반에 대해 지적했다. 실제로 부부수련회 기간에 여성강도사제도 반대에 앞장 선 인사들에 대해 시상하기도 했다. 항존직 정년 연장 반대와 총회 조직에 목사·장로 동수 요구는 매년 있었던 주장이다. 결의문 내용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총회 임원선거에 러닝메이트(Running Mate) 제도 도입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총대들이 후보를 선별적으로 선택할 기본권인 주권이 박탈되고 선거 과열과 계파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라고 했다. 현재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규정 개정안에 대해 공청회를 하고 있는데 개정 안 중에 러닝메이트(Running Mate) 제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장로회는 적극 반대하고 있어 앞으로 남은 2번의 공청회에서 어떤 의견들이 오갈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장로들은 목사와 함께 총회를 구성하는 한 축으로서 총회에 자신들의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보장받기 원한다. 이에 대해 목사 총대들은 귀를 기울이고 더 많은 협력과 협조를 이끌어 상생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결의문 전문이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제55회기 하기부부수련회에 참석한 3,000여 회원들은, 2026년 6월 30일부터 3일간 홍천 소노캄 비발디파크에서 "본질에 충실한 장로가 되자"(벧전 5:3)라는 주제를 가슴에 깊이 새기며, 중지를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성경과 총회 헌법과 장로회 정치 신경과 교의를 수호하기로 굳게 다짐하고 결의한다. 성경과 총회헌법, 칼빈주의 개혁 보수신학과 대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예배모범, 장로회 정치교리와 신조를 굳게 지킬 것을 강력히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정치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헌법 개정 절차법을 준수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정치부가 직접 법 개정 절차법을 위반하여 헌법을 본회에 상정하여 투표하는 것은 위헌되고 불법이 되므로 법과 원칙에 따라 헌법 개정 절차법을 준수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정치 제23장) 하나, 우리는 여성강도사제도 헌법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성경에 위배되고 칼빈주의 신학 정체성에 부합하지 아니하는 '여성강도사제도 헌법 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정치 제3장 제2조 교회 항존직) (딤전 2:11-14, 딤전 3:2, 고전 14:34-35, 1:6) 하나, 우리는 항존직 정년연장 헌법 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급변하는 AI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젊고 유능한 열정적인 목사가 필요한 시대에 항존직 70세 정년연장 헌법 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하나, 우리는 총회 모든 조직에 목사 장로를 동수로 구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총회가 목사, 장로 동수로 구성하는 것이 헌법사항이므로 중요 부서와 위원회 등 모든 조직에 헌법대로 목사 장로를 동수로 구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정치 제5장 제2조, 제8장 제2조, 제12장 제2조-제3조) 하나, 우리는 총회 임원선거에 러닝메이트(Running Mate) 제도 도입을 강력히 반대한다. 총대들이 후보를 선별적으로 선택할 기본권인 주권이 박탈되고 선거 과열과 계파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선거법 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하나, 우리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되며 성경말씀에 반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국회의 동성애법 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2026. 7. 2. 대한예수교장로회 전국장로회연합회 제55회기 하기부부수련회 참가자 일동 -
김병중(Th.D) 06-29 10:26
함께하는 정책총회를 위한 제4차 정책협의회
함께하는 정책총회를 위한 제4차 정책협의회가 정책협의회운영위원회 주관으로 6월 29일 오전 10시 혜성교회 언더우드기념관(정명호 목사 시무)에서 열려 분과 조직, 부서별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배는 정책협의회 운영위원회 총무 김신근 목사의 인도로 정책협의회 운영위원 이상화 목사가 기도, 정책협의회 운영위원회 서기 정명호 목사가 요 1:3을 봉독, 정책협의회 운영위원 김대훈 목사가 ‘그 분이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란 제목으로 “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형태를 만들어 가셨다. 천지창조를 볼 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아울러 지혜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총회를 위해 구조를 만드는 일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실 때 우리는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다.”라고 설교 후 정책협의회 운영위원장 윤두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 팀별 토론 시간을 갖고, 분과별로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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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12-15 18:00
한기총 임시총회...정관 · 실행위원회 구성 개정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제36-1차 임시총회를 12월 15일 오후 2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아가페홀에서 개최해 정관을 개정하고 실행위원회 제출 안건을 가결했다. 정관 개정의 건: 가결 제19조(임원의 선출과 임기) 1. 대표회장 나. 임기는 1년,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36조(사무총장) - 삭제 37조(실, 국 및 직원) - 1. 필요에 따라 대표회장의 결재로 사무처에 실, 국을 둘 수 있다. 2. 직원은 대표회장이 임명하되, 공채를 원칙으로 한다. 제38조(정관개정) - 2. 정관개정은 실행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총회에서 출석 총회대의원 2/3이상의 찬성으로 가결하되 반드시 무기명 비밀투표로 한다. 제41조(운영 세칙 및 제반규정) - 2. 2. 실행위원회에서 출석위원 2/3의 찬성으로 가결하되 반드시 무기명 비밀투표로 한다. 실행위원회 제출 안건: 가결 공인회계사 1인 더 선정은 대표회장에게 위임키로, 인사위원회 구성은 인사위원 3명 · 증경회장 3명 · 명예회장 3명 이내로 하는 것으로 임시총회는 대표회장 고경환 목사의 사회로 서기 이용운 목사가 회원 점명, 전 회의록 채택, 경과 및 사업 보고 후 안건을 처리하고 증경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의 기도로 폐회했다. 앞서, 예배는 명예회장 박승주 목사의 인도로 공동회장 서기원 목사가 기도, 명예회장 박홍자 장로가 성경봉독, 증경대표회장 엄기호 목사가 설교, 비서실장 이의현 목사가 광고 후 증경대표회장 엄신형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
김병중(Th.D) 11-18 19:31
한장총 정기총회, 이 선목사 대표회장·강대석목사 상임회장 선출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정기총회가 11월 18일 오전 10시 30분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개최해 이 선 목사를 대표회장으로, 목사를 강대석 목사를 상임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전임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가 “43회기가 잘 진행하도록 42회기가 길을 닦았다. 한국장로교회는 복을 받았다. 뿌리가 같은 장로교가 연합해 부흥해야 한다. 장로교의 부흥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라고 이임사, 대표회장 이 선 목사가 “뽑아 주셔서 감사하다. 한장총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최선 다해 섬기겠다.”라고, 상임회장 강대석 목사가 “대표회장을 도와 한장총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취임 인사말했다. 개회예배는 상임회장 이 선 목사의 인도로 공동회장 신용현 목사가 기도, 공동회장 김동기 목사가 롬 11:36-12:2을 봉독했다.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가 ‘장로교여 부흥하라!’란 제목으로 “한국장로교회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부흥했다. 하나님의 부흥은 변방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탈종교화, 저출산, 반성경적 사상, 교회 안의 문제, 잘못된 영성 등으로 인해 유럽 교회처럼 순식간에 무너질 위기 가운데 있다. 그럼에도 한국장로교는 회개와 기도를 통해 계속해 부흥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 신앙으로 부흥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왔다는 주권신앙을 가져야 한다.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한 예배자의 삶으로 부흥해야 한다.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해 선교로 부흥해야 한다. 성령께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셨으니 이 사명을 감당하자.”라고 설교 후 공동회장 김성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총무 강동규 목사가 광고했다. 총회는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의 사회로 서기 장인호 목사가 회원 127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공동회장 안상운 목사가 개회기도, 회록서기 조세영 목사가 전회의록 낭독, 서기 장인호 목사가 회의 보고, 총무 강동규 목사가 사업 보고, 감사위원 이홍섭 장로가 감사 보고, 회계 김재선 장로가 결산 보고, 임원 선거, 신구임원 교체, 공로패·감사패 증정, 상임위원장 및 특별위원장 임명, 이사장 및 신임 이사 인준, 기타 안건 심의 후 신임 대표회장의 기도로 폐회했다. -
김병중(Th.D) 11-18 19:06
한기총 (직전)사무총장 김정환 목사, 긴급 기자회견 가져
한기총 (직전)사무총장이었던 김정환 목사가 11월 18일 오후 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대강당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에 대한 의혹인 ‘재정문제’, ‘월급 셀프 인상’, ‘변00 목사 건’에 대해 반박하고, 한기총 운영과 개혁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다. 다음은 기자회견 전문이다. 안녕하십니까? 한기총 전 사무총장 김정환 목사 입니다. 최근 한기총을 둘러싼 여러 잡음과 특히 저와 관련한 여러 이슈로 많은 궁금증과 오해가 있을 줄 압니다. 그동안 저는 불법 부당하게 사무총장에서 면직된 이후에도, 상황이 정상화 되기를 기다리며 공식적인 입장을 자제해 왔습니다. 허나 최근 한기총이 저를 사무총장에서 면직한 것도 모자라 회원에서도 제명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에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되기에 이렇게 기자님들을 모시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을 결심하기까지 매우 큰 고민과 기도가 있었고. 나 하나가 침묵하면 그저 한기총이 잘될 수 있을까 갈등도 했지만, 저의 피해가 선례가 되어 그 후에도 자신들의 구미에 맞춰 집단 권력으로 한기총을 좌지우지 할 수 있기에 부끄러운 마음을 무릅쓰고 이렇게 기자회견 자리에 섰습니다. 먼저 이유를 막론하고 한국교회 앞에 저의 문제로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사죄드립니다. 저는 한기총 사무총장으로 재임한 지난 시간동안 한기총의 정상화와 발전만을 위해 노력해 왔으나. 저의 부족함으로 이런 논란이 생긴 것 같아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사실을 바로 잡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한기총 사무총장 뿐 아니라 목회자로 살아왔던 지난 삶에 대한 명예를 지키는 것이기에 이 자리에서 한 치의 거짓없는 사실만을 밝히겠습니다. 1. 재정 문제 일각에서는 한기총 사무총장에 무슨 큰 재정비리가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일방적으로 이를 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기총 사무총장 면직 사유를 재정 문제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대체 제가 한기총 사무총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어떠한 비리가 있었습니까? 저는 하나님께 맹세코 한기총 재정을 단 1도 사사로이 쓴 적 없고. 그 어떤 비리도 저지른 적 없습니다. 오히려 한기총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외부로부터 수많은 부당한 유혹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이에 응하지 않고. 단호히 비리를 배격해 왔습니다. 본래 한기총은 이전까지 관례적으로 사무총장이 모든 위원회 회의에 배석하고, 그에 따른 회의비를 수령해 왔습니다. 저 역시 재임 1년여 동안 관례에 따라 회의에 참석하고 회의비를 수령했으나, 이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판단에 1년 후 이를 스스로 모두 한기총에 반납하고. 이후 한기총 사무총장은 회의비를 받지 않기로 스스로 선을 그었습니다. 그런 제게 도대체 어떠한 재정 비리를 묻는 것입니까? 재정비리를 거론하는 자들은 현재 아무런 실체 없이 재정비리만 운운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비리가 있다면 정확히 무엇이 비리인지 밝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당당합니다. 단 1원도 유용한 적 없고, 내 주머니에 담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사무총장이 돈을 횡령하거나 유용한 비리 사실이 없다면, 대표회장은 즉시 사과하고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2. 월급 셀프인상 가장 논란이 되는 것 중 하나인 '월급 셀프인상'과 관련해, 단언컨대 저는 스스로 월급을 올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재임하기 전 직전 사무총장의 월급은 500만원이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당연히 월급을 500만원으로 그대로 이어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허나 그 당시 전광훈 목사 사건 등으로 한기총이 큰 혼란이 있었고, 임시대표회장으로 온 김현성 변호사의 신변에 위협이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어 비서실장을 두어 임시대표회장을 보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기총의 재정은 파탄 상태였기에 비서실장을 고용할 여력이 안되어. 부득이 사무총장 월급 500만원을 쪼개어 사무총장 300만원, 비서실장 200만원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후 정서영 목사님이 대표회장으로 오시면서 한기총의 정상화가 시작되어 정 목사님께 보고하고 사무총장 월급을 정상적으로 복구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정서영 대표회장님께서는 해당 내용을 보고 받고 이를 허락했으며, 관례대로 모든 재정 관리를 사무총장에게 일임하셨습니다. 월급 인상은 대표회장님의 일임하에 이뤄진 것이며 사무총장 뿐 아니라 전 직원의 월급이 인상 되었습니다. 이 역시 결코 부당치 않은 것은 한기총이 과거 너무도 힘든 상황을 지나올 당시 직원들이 월급 인상이 전혀 없이 이를 버텨줬기 때문입니다. 2019년 1월부터 전혀 월급이 인상되지 않다가 2023년에 7% 인상해줬고. 이후에도 한기총이 재 정적 어려움으로 상여금 400%를 지급하지 못해. 2024년에 기본급을 8% 인상해 줬습니다. 고경환 대표회장님 임기였던 올해 3월에 월급을 인상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한기총은 그간 다른 직원과 달리 사무총장만 4대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지 난 2025년 1월 8일, 정서영 대표회장 임기 당시 총무국장에 기본급 인상없는 4대 보험 가입을 지시했고, 그 적용이 3월에서야 이뤄졌습니다. 더욱이 사무총장 월급을 2025년 2월부터 받지 못했기에, 보험 가입 이후의 월급은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3. 00 목사 건 한기총 재정은 사무총장 취임 후 단 한 번도 온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적자운영이었고, 늘 쪼들렸습니다. 정서영 대표회장님은 늘 한기총의 인건비와 월세 운영비를 마련키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고, 저 역시 이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 늘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실제 한기총이 재정 파탄으로 경매에 넘어갈 뻔 했던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도 미안하게도 직원들 월급은 제때 주지 못했던 적이 더 많았고, 제 월급은 수 개월 밀리는 것은 기 본이었습니다.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직원들에게 미안해 제 사비를 털어 일단 직원들 월급을 준 적도 다반사입니다. 그런 중에 사무총장은 한기총 운영을 위해 회원들에 한기총 후원금을 늘상 요청해 왔습니다. 운영비 뿐 아니라 행사비 등 연간 수 억원 이상이 필요한 한기총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당시는 한기총 재정을 충당키 위해 전국을 안간 곳 없고, 무릎만 안 꿇었지 만나는 분들에게 빌다시피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후원을 얻는 방식에는 개별 차이가 있지만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한기총을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얻은 후원금 중 단 1월도 제가 취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 한기총의 운영비로 활용됐고, 그것이 바로 현재 한기총이 경매에 넘어가지 않고 직원들이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가 됐습니다. 지난 2년 간 정서영 대표회장님께서는 정말 자기 재산을 헌신하셔서 한기총을 운영하셨습니다. 회원들께서 반드시 아셔야 할 것은 한기총이 돈이 결코 많아서 현재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경환 대표회장님께서 하시는 개혁도 이런 치열한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시도조차 못했을 겁니다. 허나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틀린가요? 00 목사 건은 이미 수년이 지난 일로 당시 이것이 한기총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모든 회원들이 다 알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AI'를 운운하며, 이를 다시 꺼내 저를 죽이는데 사용하나요? 한기총 회원들께 묻고 싶습니다. 한기총의 험난했던 지난 날 저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한기총을 지켜내기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온 몸을 불살랐던 것을 잊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한기총을 얼마나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지 기억하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이 당시의 제가 진정 잘못된 것이라면 제게 차라리 돌을 던지십시오. 4. 한기총 운영과 개혁에 대해 저는 고경환 대표회장님께서 추진하는 개혁에 대해 원론적으로 지지합니다. 저 역시 한기종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당장 오늘 내일을 버티는 게 능사가 아닌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그런면에서 한기총의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고경환 대표회장님의 결단을 지지합니다. 허나 그 개혁 과정에서 불의한 희생이나 정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적법한 절차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불법이 지배하는 개혁은 결코 그 결과가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올해 한기총에서는 사무총장과 회계 면직이라는 매우 큰 이슈가 있었습니다. 허나 이 과정에 어떠한 설명도 무엇보다 당사자에 대한 소명의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마녀사냥하듯이 여론을 몰아 단두대에 목을 치는 행태였습니다. 회계였던 박지숙 목사는 심지어 임원회에 단 한 번도 출석치 않다는 거짓 증언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음 임원회에서 당사자의 강력한 항의로 복귀되는 헤프닝도 있었습니다. 저는 단 한마디 소명할 시간도 없이 고경환 대표회장님의 한 마디로 면직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면직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직원인 사무총장에게 대표인 고경환 목사님은 어떠한 사유도 고지하지 않고, 말 한마디로 해고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입니까? 한편에서는 사무총장을 직원이 아닌 종교인이라 하는데, 사단법인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직원이 아닙니까? 심지어 고경환 목사님 스스로도 사무총장을 상근 직원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한기총 임원회는 올해들어 결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임원회가 안건을 다루고, 이를 결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회장이 아무도 수임하지 않은 안건을 스스로 들고 나와 이를 임원회에 결의를 강요하는게 다반사였습니다. 특히 대표회장 본인이 임원회의 허락이나 위임없이 특정 사안들을 변호사에 법적 해석을 받아오며 이를 '강력한 변호사'라며 임원회에서 무조건 받으라고 강요하고는 했습니다. 허나 변호사의 해석은 각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의뢰인의 구미에 맞춰 해석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면직되던 임원회 당시 대표회장은 제게 공동회장과 사무총장 둘 중 하나를 내려놓도록 종용했습니다. 두 가지를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결국 석연치 않았지만, 공동회장을 내려 놨고 그로부터 30분 후 사무총장에서 면직됐습니다. 이것이 과연 의도된 것이 아닙니까? 반대로 대표회장님 본인은 정작 자기 교회 정치를 한기총에서 구현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본인 교회의 모 장로님은 현재 명예회장이자 한기총의 가장 요직이라 할 수 있는 질서위원회에 속해 있습니다. 또한 고 대표회장이 기존 감사를 낙마시키고, 새롭게 임명한 감사는 바로 해당 교회의 소속 목사이자 변호사입니다. 자신을 가장 충성스럽게 따르는 최측근들이 질서위에서 철퇴를 휘두르고 감사권을 쥐고 있다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입니까? 법은 평등히 적용되고, 절차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기총에 이러한 것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부족한 탓이 큽니다. 그간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제가 생각했던 옳고 그름이 반드시 정답은 아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저는 한기총을 위해 아무 사심없이 최선을 다해 일했고. 그 안에 어떠한 사익도 비리도 없었습니다. 질서위가 최근에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임원회 회의 방해와 경찰 출동 사태에 대해 해명하라고 말입니다. 임원회 회의는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방해했고, 경찰은 한기총에서 불렀는데 왜 제게 해명을 요구 합니까? 이것이 바로 한기총이 처한 모순의 단면입니다. 고경환 대표회장님의 개혁 추진은 적극 지지하지만,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는 이러한 불법과 편법, 모순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한기총을 사랑합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자부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진정으로 한기총을 사랑하는 김정환 목사의 진심이 전해졌기를 바랍니다. -
김병중(Th.D) 07-09 11:26
한기총도 외면하는 전광훈을 계속 추종하는 합동측 인사들
최근 기독교연합회관 15층에 있는 한기총 사무실에 가보니 대표회장을 역임했던 전광훈의 사진이 없어졌다. 사무실 입구에 역대 대표회장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전광훈만 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2020년 대표회장에서 사퇴했었다. 보수주의 단체인 한기총 입장에서도 전광훈은 지우고 싶은 흑역사(黑歷史,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이다. 그럼에도 합동측에는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있다. 예장합동교단은 2021년 106회 총회에서 전광훈과 관련해 집회 참여 금지를 결의했었다. "발언 내용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까지 신앙적 집회 참여 금지를 촉구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전광훈을 추종하는 자들을 어찌해야할 것인가? 오죽했으면 보수 연합단체인 한기총이 왜 전광훈과 절연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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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7-14 15:55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중앙회, 20회 사랑의삼계탕 나눔행사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중앙회(이사장 이선구 목사)가 제20회 사랑의삼계탕 나눔행사를 7월 14일 인천시 서구 서곶로에 소재한 한신교회(담임 주 신 목사)에서 열었다. 이 행사는 교회 주변 독거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사랑의빨간밥차가 주관하고 한신교회에서 협력했다. 사랑의삼계탕 나눔행사는 20년째 매년 복날 즈음에 시행하며 이전에는 2000명에서 5000명까지 식사했으나 코로나로 절반 가량 줄어 현재는 전체 2000여명이 식사한다. 강남 구룡 마을 등 500가구에도 삼계탕 나눔을 하며, 5개 장애시설에도 30년간 삼계탕을 지원하고 있고, 대한노인회 경로당 중 어려운 곳에도 삼계탕을 지원하고 있다.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사랑의빨간밥차 이사장 이선구 목사가 “무더운 여름에 정성껏 준비한 삼계탕을 드시고 모두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오늘 행사를 위해 협력하시고 후원하신 모든 분들과 무더위에 주방에서 수고하시는 한신교회 모든 교우들, 배식을 위한 봉산단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르신들이 모두 예수님 믿고 나누고 베풀며 살고, 신앙을 통해 천국 가시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배식 봉사 이 행사를 격려하기 위해 참석한 관계자들은 "삼계탕을 드시고 모두 무더위에 건강하시기를 기원"하고 직접 배식 봉사했다. 참석자들은 삼계탕 식사 후 준비한 여러 선물을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모임을 마쳤다. 사랑의삼계탕 나눔잔치는 이번주 계속해서 진행된다. 7월 15일(수) 주안역 7월 16일(목) 부평역 7월 17일(금) 서울역 -
김병중(Th.D) 07-13 14:24
서북지역장로협의회, “한마음·한비전·한걸음” 워크샵 개최
서북지역장로협의회(대표회장 김성대 장로)가 서북장로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확인하고, 더 나은 발전을 도모하는 워크샵을 “복음통일을 향한 믿음의 동행”이란 주제로 7월 13일 오전 11시 예우림교회(유병희 목사 시무)에서 가졌다. 대표회장 김성대 장로가 “무더운 날씨에 협의회의 발전에 관심을 갖고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설교해 주시고, 장소를 제공해 주신 목사님들께 더욱 감사드린다.”라고 인사말했다. 총회부서기 유병희 목사가 “안에 있는 것이 좋아야 밖으로 좋은 것이 나온다. 서북장로회가 잘 떠오르기를 바란다. 그럴려면 그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올바르게 뜰 수 있다. 저는 총회 부서기로 바르게 할려고 한다. 여러 장로님들도 바르게 하고 힘을 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기 바란다.”라고 축사했다. 총회 부회계 안수연 장로가 “서북협은 북한선교를 감당하고 있는데, 앞으로 더 잘 감당할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인사말했다. 1부 예배는 대표회장 김성대 장로의 인도로 다같이 “서북지역장로협의회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배려하며 격려함으로 하나되어 복음으로 북녘을 품고 기도로 통일을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한다.”라는 사명선언문 고백, 실무회장 전병철 장로가 기도, 서기 윤장섭 장로가 느 2:17~20을 봉독, 자문위원장 오윤택 장로가 특송했다. 대한교회 윤영민 목사가 ‘다시, 서북입니다’란 제목으로 “서북협은 북한땅을 향해야 한다. 그곳은 복음 들고 다시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서북은 사명이다. 전쟁으로 남하했을 때 노회 이름을 갖고 왔다. 반드시 돌아갈 것을 다짐한 것이다. 그러면서 70년을 감당해 왔다. 우리는 서북의 신앙을 이어받은 후예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보고 고향을 떠올리며 울고 결단했다. 서북이 우리 신앙의 뿌리로서 여기서 노회, 총회, 총신대학 등이 뻗어나갔다. 그러므로 북한을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다시 서북이다. 우리는 뿌리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북한을 잊지 말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서북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 성벽은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에 의해 세워졌다. 북한교회도 기도하는 신자들에 의해 재건된다. 그래서 미래의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도로, 탈북민 사역으로, 북한교회 재건으로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북한을 포기하지 않으셨기에 우리에게 서북협의회를 주신 것이다.”라고 설교했다. 회계 김원식 장로가 헌금기도, 사무총장 김기현 장로가 광고 후 유병희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주제발표 2부 워크샵은 상임회장 백장현 장로의 사회로 자기소개 및 상견례 후 ‘서북장로회 출범과정’이란 제목으로 대외협력위원장 주홍동 장로가 “우여곡절 끝에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서북협으로서 하나님께 맡은 귀한 사명이 있다.”라고, ‘서북장로회 정체성’이란 제목으로 증경회장 양호영 장로가 “우리는 보수개혁주의 계승자라는 정체성, 하나됨의 연합체를 갖고 있다. 우리는 북한선교, 교회재건 준비, 통일 선교 전략 준비 / 총회 화합과 교단 발전 도모 / 영성회복, 차세대 양육을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말씀과 기도 위에 서야한다. 또한 봉사 공동체가 되며, 화합과 일치를 이루고, 다음 세대를 세우고 복음 공동체를 이루며 기도하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 내년은 평양대부흥 120주년이다. 기도로 준비하자.”라고, ‘서북장로회 방향성’이란 제목으로 증경회장 현광욱 장로가 “우리 안에도 이 협의회에 대해 마음이 하나로 하지 않는 분들이 있어 아쉬움이 있는데, 위상을 높이는 일에 한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라고, ‘서북장로회 문제점 및 해결방안’이란 제목으로 명예회장 김완겸 장로가 “우리 협의회 확장성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서북에는 42개 노회 4000여개의 교회가 있는데 참여율이 저조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울서북지역협의회와 함께 가야한다. 또한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어 결속력이 부족한 것 같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사명을 일깨우고 함께하는 모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장연에서도 우리의 위치를 가져야 한다.”라고 발표했다. 자유토론 이어 자유토론 때 전국남전도회연합회 증경회장 배원식 장로가 “우리의 정체성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이 관심 갖고 장로님들을 보내주셔야 한다. 서북장로협수련회 때에도 많이 참석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적인 헌신이 필요하다.”라고, 소래노회 장로회장 신용철 장로가 “서북장로협에서 자유롭게 열심히 활동하도록 하겠다”라고, 전병철 장로가 “서북장로협의회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많다. 이 협의회에 대해 많이 알려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교회에 목사님에게도 설명해 알려야 한다.”라고, 함북노회 장승수 장로가 “오늘 서북협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목사님들이 이 협의회에 장로들을 많이 보낼 수 있도록 홍보해야 한다.”라고 발언 후 고문 이광복 장로가 마침기도 및 식사기도 하고 예우림교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광고 1. 오늘 임원 워크샵을 예우림교회에서 갖게 된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2. 설교해주신 대한교회 윤영민 목사님과 축사와 축도해 주신 유병희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3. 특송으로 섬겨주신 자문위원장 오윤택 장로님께 감사합니다. 4. 오늘 워크샵에 함께 해주신 모른 장로님들께 감사드리며, 특히 고문님, 자문님 감사합니다. 5. 서북지역장로협의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원활한 사역을 위해 분담금 납부를 부탁드립니다. -
김병중(Th.D) 07-12 15:41
제18회 한국장로교의 날,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제18회 한국장로교의 날 행사가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 선 목사) 주관으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란 주제로 7월 12일 오후 3시 인천시 계양구에 소재한 청운교회(강대석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대회장·대표회장 이 선 목사가 다음과 같이 대회사했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시대적 소명 제18회 한국장로교의 날을 허락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또한 한국 장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헌신해 오신 모든 교단과 교회, 그리고 성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지난 140여 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복음의 기초를 세우고, 말씀과 개혁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며 민족과 세계를 섬겨왔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개혁주의 신앙을 생명처럼 붙들고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앙을 새롭게 다짐하고자 합니다.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회복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대적 소명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분열과 갈등, 저출산과 다음세대의 위기, 윤리의 혼란과 영적 침체라는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한국 장로교회는 회개와 기도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가 먼저 거룩함을 회복하고,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다가오는 2027년 평양대부흥운동 120주년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성령의 역사를 사모합니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회개의 불길과 성령의 부흥이 오늘 한국교회와 민족 가운데 다시 타오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장로교회가 먼저 무릎 꿇고 회개하며, 한국교회의 연합과 영적 각성을 이끄는 거룩한 도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한국장로교총연합회는 앞으로도 장로교회의 연합을 더욱 굳건히 하고, 다음세대를 세우며, 한국교회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 세계선교와 복음통일의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18회 한국장로교의 날이 한국 장로교회가 하나 됨을 확인하고, 개혁신앙을 계승하며, 민족과 세계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선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오늘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 그리고 섬기시는 모든 사역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배는 준비위원장 강대석 목사(상임회장)의 인도로 깃발 입장(진행 : 맹상복 목사, 합동개혁 사무총장), 공동대회장 정정인 목사(대신 총회장)가 기도, 청운교회 글로리아성가대가 찬양, 공동대회장 권오삼 목사(보수 총회장)가 눅 19:41-44을 봉독했다. 한장총 증경대표회장 유만석 목사(수원명성교회)가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이란 제목으로 “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녀를 위해, 사명을 위해 울어야 한다.”라고 설교했다. 이어서 ‘한국교회의 회개와 영적부흥을 위해 힘쓰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되게 하소서’ 위해 공동대회장 가성현 목사(합동동신 총회장)가, ‘나라와 민족의 평안과 부흥, 복음적 통일을 위해 앞장서는 한장총 되게 하소서’ 위해 공동대회장 신동진 목사(고려개혁 총회장)가,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한장총 되게 하소서’ 위해 공동대회장 양은화 목사(개혁선교 총회장)가, ‘다음세대와 학원복음화,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일하는 한장총 되게 하소서’ 위해 공동대회장 우상용 목사(한영 총희장)가, ‘사명감당과 비전선포에 앞장서는 한장총 되게 하소서’ 위해 공동대회장 김안식 목사(웨신 총회장)가 주제기도했다. 공동대회장 안상운 목사(호현 총회장)의 집례로 성찬식 후 권순웅 목사(직전대표회장)의 축도로 마쳤다. 기념식은 공동대회장 신용현 목사(개혁개신 총회장)의 사회로 이 선 대표회장이 자랑스러운 장로교인상을 시상했다. 목회부문 - 강희윤 목사(여민교회 담임) / 선교부문 - 고정민 장로(복음의전함 이사장) / 신학부문 - 라영환 교수(총신대) / 복지부문 - 황형식 목사(성일복지원 대표) / 문화부문 - 금보성 이사장(금보성아트센터 관장)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 홍사진 목사, 한장총 증경대표회장단 회장 전병금 목사,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 오광섭 장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가 축사 후 비전선언 후 이승수 목사(백석 부총회장)가 파송의 기도하고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한장총 제18회 한국장로교의 날 비전선언문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한국장로교회는 세계 교회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급성장했고, 이 땅과 세계 열방을 향한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 왔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장로 교회는 내 · 외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오늘 ‘제18회 한국장로교의 날’을 맞아 겸허한 마음과 자세로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오늘의 우리 자신을 반성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더 밝은 미래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또 한국 교회와 사회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우리는 오직 성경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감으로써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고 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가정과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구현하는 장이 되도록 힘쓴다. 2.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믿고 전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과 소망이 되심을 믿고 거룩한 진리가 도전받는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시는 바른 복음을 전하며. 십자가로 하나 되게 하신 위대한 사랑을 본 받아 장로교회의 연합에 힘쓴다. 3. 우리는 오직 은혜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간다.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풍성한 은혜를 사모할 뿐 아니라 전쟁과 재앙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받은 조건 없는 사랑과 은혜를 흘려보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위로와 소망과 회복이 되길 힘쓴다. 4.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한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함을 알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힘씀으로써 사랑과 정의, 의와 자비를 실천하고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기를 힘쓴다. 5.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임을 알고 우리의 삶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이 사회와 창조세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에 힘쓴다. 2026년 7월 12일 한장총 제18회 한국장로교의 날 참석자 일동 -
김병중(Th.D) 07-09 20:31
12회기 서울·서북남전연, 2차 임원회의 및 실행위원회
제12회기 서울·서북지역남전도회연합회(회장 조성탄 장로) 제2차 임원회의 및 실행위원회가 7월 9일 오후 6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1층 그레이스홀에서 열려 예배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회장 조성탄 장로가 “하나님의 은혜와 회원들의 협력 가운데 한 회기를 마치게 되어 감사드린다. 부족한 제가 토마스 선교사 기념관 건립을 위한 공사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잘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부탁 인사말했다. 임원회의 1부 예배는 부회장 이희중 장로의 인도로 친교국장 최장기 집사가 표어제창, 전도위원장 송기덕 장로가 기도, 서기 정태남 장로가 고전 15:31을 봉독, 증경회장 배원식 장로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제목으로 “나를 날마다 죽이고 하나님과 동료를 살려야 한다. 모두가 함께 가야 한다. 이것이 연합이다. 연합은 손잡고 함께 가는 것이다. 잘 연합하고 헌신해 마무리를 잘하고 다음 회기에 넘겨주기 바란다. 앞으로는 헌신예배 때 교회 주변 전도활동도 했으면 좋겠다. 헌신과 희생을 통해 구령사역 할 때 가정, 공동체, 나라가 살아날 줄 믿는다.”라고 설교 후 주기도로 폐회했다. 2부 회의는 회장 조성탄 장로의 사회로 전도국차장 유희원 장로가 기도, 서기 정태남 장로가 회원 35명 참석 보고, 회의록서기 전병철 장로가 전회의록 낭독, 회계 김덕현 장로가 회계보고, 총무 하정민 장로가 안건상정했다. (1) 회원부부수련회 결산보고의 건 (2) 사업보고의 건 (3) 회계보고의 건 (4) 제 13회기 정기총회의 건(수석부회장 후보 인사: 임긍호 집사, 이수행 장로) (5) 기타안건 총무 하정민 장로가 광고 후 증경회장 문찬수 장로의 폐회기도로 임원회의를 마무리했다. 이어 모인 실행위원회 1부 예배는 수석부회장 남석필 장로의 인도로 전도국 차장 유희원 장로가 표어제창, 부회장 김철원 장로가 기도, 서기 정태남 장로가 창 39:23을 봉독했다. 서영교회 한수환 목사가 ‘형통하게 하셨더라!’란 제목으로 “형통은 첫째, 뭐든지 잘 되는 것. 둘째, 어려움으로 인해 신앙이 성장하는 것. 셋째, 요셉과 함께한 모든 곳이 형통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형통케 하시는 분이시다. 이 형통을 주신 이유는 요 20:19 평안을 받아 남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남전도회 회원들이 형통과 평안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바란다.”라고 설교 후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회의는 회장 조성탄 장로의 사회로 부회장 최동균 장로가 기도, 서기 정태남 장로가 회원 35명 참석 보고, 회의록서기 전병철 장로가 전회의록낭독, 회계 김덕현 장로가 회계보고 후 총무 하정민 장로가 안건상정했다. (1) 회원부부수련회 결산보고의 건 (2) 사업보고의 건 (3) 회계보고의 건 (4) 제13회기 정기총회의 건 (5) 기타안건 8월 8일 있는 정기총회 선거인 자격에 대해 논의 후 총무 하정민 장로가 광고하고 고문 김상윤 장로의 폐회기도로 실행위원회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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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7-03 08:33
【평택제일교회8】 정작 답해야 할 질문....“왜 재판국 이첩을 막았는가?”
• 총회 결의는 "재판국 이첩"을 명령했다. • 헌의부는 재판기관이 아니다. • 남수원노회 재판이 적법했다면 왜 상소를 두려워하는가? 남수원노회가 7월 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총회 행정의 불법성과 절차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기자회견 내내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끝내 외면했다. "왜 김태식 목사의 상소를 총회 재판국으로 보내지 않으려 하는가?" 만일 남수원노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재판이 적법하고 정당했다면, 오히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총회 재판국으로 사건을 신속히 이첩해 그 정당성을 확인받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상소 자체를 가로막기 위해 헌의부의 기각 결정을 옹호하고, 재심의와 재접수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총회는 이미 세 차례나 결의했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수원노회가 말하는 "상식"이 아니다. 총회의 공식 결의와 규칙이 무엇을 말하는가이다. 제106회 총회 결의 "하회에서 제출한 모든 재판 건은 총회규칙대로 재판국에 이첩시켜 화해 또는 판결토록 허락하기로 가결.“ 총회는 재판 사건은 원칙적으로 재판국에서 판단하도록 결의했다. 제107회 총회 결의 "헌의부가 총회규칙이 정한 권한을 벗어나 사건의 내용을 심사하거나, 총회헌법이 정한 교인의 기본권, 곧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함을 확인하다.“ 총회는 헌의부가 사건 내용을 판단하거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공식 확인했다. 제108회 규칙 개정 총회규칙은 헌의부의 권한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부당한 서류를 반려(반송)하거나 적당한 헌의를 총회에 제출할 수 있다." '기각'이라는 표현은 사라졌다. 헌의부는 행정적 검토기관이지 재판기관이 아니다. 즉, 이번 사건의 본질은 김태식 목사의 면직 여부가 아니라, 헌의부가 상소권 자체를 차단할 권한이 있는가의 문제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헌의부는 재판국이 아니다! 헌의부는 원고와 피고를 소환하지 않는다. 증거조사를 하지 않는다. 변론 절차가 없다. 방어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회소송시행세칙 위반, 패소확정, 교회질서 위반, 등의 실체적 판단을 하여 상소를 기각했다. 그렇다면 헌의부는 스스로 재판국 역할을 수행한 것이 된다. 총회 결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목이다. 남수원노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신청인의 노회 재판국의 판결이 합법이며 아무런 하자가 없다면 교단 총회에서 보장하는 상소권을 가로막는 이유를 오히려 밝혀야 했다.“ 또한, "김태식 목사의 면직 재판이 합법적이며 합당하다면, 교단 총회 재판국에 상소하는 일을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일이 합법적이라면 신청인 노회가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해 남수원노회는 아직 답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적법한 재판이었다면 왜 재판국 이첩을 막는가. 왜 헌의부 기각을 두둔하는가. 왜 총회 헌의부가 세 차례나 결의한 "재판받을 권리"를 문제 삼는가. 왜 상소인의 재판받을 권리보다 기각의 종결성만 강조하는가. 이번 사건의 본질은 단 하나다. 총회 헌법이 보장한 상소권을 헌의부가 차단할 권한이 있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남수원노회가 자신의 재판에 자신이 있다면 왜 총회 재판국의 판단을 두려워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이번 사건의 핵심이다. 총회가 만든 헌법과 규칙, 그리고 106회·107회·108회 총회 결의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재판은 재판국에서 하라!" 그 원칙이 무너진다면, 내일은 누구의 재판받을 권리가 박탈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
김병중(Th.D) 06-20 15:27
성남노회 장로회 주관, 제18회 성남노회 찬양제 개최
성남노회 장로회(회장 김태웅 장로)가 주관한 제18회 성남노회 찬양제가 6월 20일 오후 2시 영도교회(차은직 목사 시무)에서 개최됐다. 남·여전도회, 주일학교연합회가 후원했다. 장로회장 김태웅 장로가 “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기에 귀하게 쓰임 받았다. 예배에는 말씀과 예물, 찬양이 있어야 한다. 오늘 이 찬양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하고, 내빈 및 장로회 임원을 소개했다. 다음은 인사말 전문이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하나님(시 22:3). 그동안 찬양제가 우리 성남노회의 핵심 사역으로 든든히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노회의 아낌없는 지원과 선배 장로님들의 땀 어린 수고, 그리고 각 지교회의 뜨거운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 열리는 이 열여덟 번째 찬양제 또한 우리 성남노회 역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로 기록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양은 말씀, 기도와 함께 예배를 지탱하는 가장 소중한 기둥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찬양대가 축소되거나 사라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하나님(시 22:3)을 더욱 기억해야 합니다. 찬송은 하나님과 우리를 잇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곡조 있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그 임재의 감동을 경험합니다. 이번 찬양제가 단순히 노래하는 자리를 넘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대회를 위해 재정과 기도로 함께해 주신 노회와, 아름다운 예배당을 제공해 주신 영도교회 당회 및 성도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정성껏 준비하여 참가해 주신 9개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찬양 관계자분들, 그리고 대회를 위해 밤낮으로 애써주신 준비위원장 강주붕 장로님과 총무 김승용 장로님을 비롯한 장로회 모든 임원분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늘 9개 교회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하나님께는 큰 기쁨이 되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는 뜨거운 은혜와 회복의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제는 서용석 집사 · 윤미영 사모의 사회로 준비위원장 강주붕 장로가 개회기도했다. 노회장 안창순 목사가 “찬양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다. 개척한지 20년 되었다. 찬양하며 그 시기를 감당했다. 찬양은 영적인 강력한 무기이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는 분이시나 성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찬양할 때 큰 은혜를 누린다.”라고 축사, 영도교회 담임 차은직 목사가 “찬양제를 위해 교회 조명과 음향을 손봤다. 귀한 시간 되시기 바란다.”라고 환영사했다. 찬양 1부는 성남제일교회-연합찬양대가 “주의 동산으로”, “내 삶에 찬양되신 주”를, 금광교회-아이네오여성중창단이 “주의 사랑 세상 이기네(Amor vicit omnia)”, “아멘 아멘 아멘”을, 산성의빛교회-연합찬양대가 “찬양할지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를, 사랑과은혜교회-코람데오남성중창단이 “주 품에”, “충성하라”를, 만남의교회-가브리엘여성중창단이 “내 간절한 소원”,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를 찬양 후 특별 초대로 성남노회 목사부부합창단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하나”를 찬양했다. 성남제일교회-연합찬양대 “주의 동산으로”, “내 삶에 찬양되신 주” 금광교회-아이네오여성중창단 “주의 사랑 세상 이기네(Amor vicit omnia)”, “아멘 아멘 아멘” 산성의빛교회-연합찬양대 “찬양할지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사랑과은혜교회-코람데오남성중창단 “주 품에”, “충성하라” 만남의교회-가브리엘여성중창단 “내 간절한 소원”,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특별 초대-성남노회 목사부부합창단 “말씀 앞에서”, “우리는 하나” 찬양 2부는 한남교회-임마누엘성가대가 “주께 존귀와 영광을”, “마른 뼈들이”를, 광주사랑의교회-호산나찬양대가 “다윗의 노래”, “모퉁이 돌”을, 더사랑의교회-할렐루야찬양대가 “할렐루야 주찬양”, “프레이즈(Praise)”를, 영도교회-연합찬양대가 “기름 부으심”, 나를 사랑하는 주님 & 노래할 이유 있네“를 찬양 후 주기도문(지휘 : 영도교회 이은실 집사)을 전체 찬양했다. 한남교회-임마누엘성가대 “주께 존귀와 영광을”, “마른 뼈들이” 광주사랑의교회-호산나찬양대 “다윗의 노래”, “모퉁이 돌” 더사랑의교회-할렐루야찬양대 “할렐루야 주찬양”, “프레이즈(Praise)” 영도교회-연합찬양대 “기름 부으심”, 나를 사랑하는 주님 & 노래할 이유 있네“ 경품추첨 총무 김승용 장로가 광고, 수석부회장 김용직 장로의 폐회기도로 은혜로운 찬양제를 마무리하고, 즐거운 경품 추첨 후 내년을 기약하며 모임을 마쳤다. -
김병중(Th.D) 06-12 21:59
수도노회 주일학교연합회, 여름성경학교·수련회 교사강습회
수도노회 주일학교연합회(회장 장숙현 장로)가 주최한 여름성경학교·수련회 교사 강습회가 6월 12일부터 13일까지 왕십리교회(맹일형 목사 시무)에서 열려 예배하고, 기도하며,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수도노회 주일학교연합회 회장 장숙현 장로(왕십리교회)가 다음과 같이 수도주교 강습회 책자 발간사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6:8)" 1980년대 중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20여 명이 모이던 작은 개척교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심한 후, 제가 받은 첫 소명은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당시 개척교회에는 주일학교 교사가 없어, 꽃동산교회 원로목사이신 김종준 전도사님 시절 한국어린이교육선교회가 주최하는 교사강습회에 열심히 참석하였습니다. 오늘날 동대문성곽공원 자리에 있던 기독교 감리회 동대문교회에서 매년 열리던 교사강습회는 좁은 인도와 도로까지 가득 메운 교사들로 붐볐습니다. 무더운 6월, 강의실은 찜통 같았고, 자리가 없어 창문을 열고 복도 바닥에 앉아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녁 10시까지 이어진 찬양과 율동, 공과 공부, 레크리에이션, 성경 동화, 수련회 운영, 인형극 등 다양한 과목을 배우며 하나라도 더 얻고자 동분서주했습니다. 그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198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루었고, 오늘날 교회의 열매가 된 그루터기가 되었습니다. 교회 부흥의 중심은 바로 "어린이 전도", 그리고 그 기초는 교사 강습회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아이들이 없다"라고 아우성칩니다. 사실입니다. 1990년대 490만 명이던 어린이 수가 2025년에는 235만 명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천 명의 아이들이 모이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아이들이 "교회가 재미있고 좋다"라고 모여드는 교회들이 있으며, 그곳에는 어른 성도들도 함께 모입니다. 1990년대에는 부모님들이 생업에 바빠 아이들을 교회에 맡겼지만,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고 싶어 어른 성도들이 모여듭니다. 오늘날 교회 부흥 역시 "어린이 전도"에 달려 있습니다. 올해로 수도노회 주일학교연합회 교사강습회가 55회를 맞이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책자 제작에서 강사 섭외,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 준비까지 헌신하는 임. 역원님들과 교사님들을 격려하기 위해 많은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매년 참석하는 교사강습회지만, 올해도 새로운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열정을 품고 참여하여 배우고 기도하며 어린이 전도의 열매를 맺기를 소망합니다. 올해도 무더운 8월, 주일학교가 없는 미래 자립교회 아이들과 함께 열리는 연합여름성경학교에도 헌신해 주실 교사님들을 예수님과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사강습회를 통해 주일학교 교사의 소명을 새롭게 받고, 미래 자립교회의 주일학교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는 2026년 수도노회 주일학교연합회 교사강습회가 되기를 이 책자에 담아 소망합니다. 끝으로, 교사강습회 책자가 나오기까지 헌신해 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노회장 김대근 목사(양문교회)가 다음과 같이 권두언했다. 다시 소망의 키를 잡는 항해사들에게! 창밖으로 스며드는 뜨거운 여름의 열기 속에서도, 사랑의 수고로 믿음의 항해를 함께할 항해사로 자원해 주신 여러분과 함께 희망의 돛을 올리게 되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마주한 2026년의 교육 현장은 결코 평온한 바다가 아닙니다. 인공 지능(AI)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파도는 우리의 일상을 넘어, 아이들의 내면과 가치관까지 거세게 흔들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말씀보다 스마트폰 화면에 고개를 숙인 채, 디지털 세상의 파도에 표류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항해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파도가 높을 때가 아니라 방향을 잃었을 때”라는 말처럼, 우리의 영원한 방향이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바로 이곳에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완벽한 선장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합시다. 아이들은 우리의 흔들림 없는 믿음의 뒷모습을 통해 참된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거친 파도가 유능한 뱃사람을 만든다"는 영국 속담처럼, 이번 여름성경학교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다음 세대를 말씀과 기도로 한 뼘 더 자라게 하시는 은혜의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소망의 키를 붙잡고 믿음의 닻을 올릴 시간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품고, 선장이신 주님과 함께 다시 믿음의 바다로 힘차게 나아갑시다. 교육부장 김응렬 목사(푸른초장교회)가 다음과 같이 격려사했다. 교사들의 눈물의 기도와 영혼 사랑의 열매! 화이팅!!!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현재 국내외 165노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수도노회는 중심적인 역활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요, 둘째는 전국 지교회 교사들의 눈물의 기도와 노력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동안 국가의 난국 속에서도 복음 전도를 외치며 땀방울을 흘렸던 선배님들의 눈물과 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름방학이면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 앞으로 인도해 보겠다는 뜨거운 마음에 땀으로 옷을 적시며 메가폰과 피켓과 전단지를 들고 거리를 누비고 에어컨도 없던 시절 열기 속에서 말씀을 외쳤던 그날들의 열정과 합성, 지금도 그 시대의 그리움이 채색되어 가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였지만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전도를 모색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고무적입니다. 하나님의 씨(요일 3:9)가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노회가 총회 165개 노회의 중심적인 노회가 되어 앞으로도 조국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모범적인 노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금년 여름도 최고의 여름성경학교가 되도록 분발하는 교회와 교사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시고 하나님 앞에 칭찬받으시게 되길 주님의 존함으로 축복합니다. 개회 예배는 대회장 장숙현 장로의 인도로 부노회장 정봉기 목사가 기도, 노회 서기 구근호 목사가 출 20:16을 봉독, 길민수 교사(왕십리교회)가 찬양했다. 노회장 김대근 목사가 ‘말씀으로 다음 세대를 세우는 교회’란 제목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드려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다. 교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본을 보여야 한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말씀에 든든히 선 교회였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이것이 그들 안에 역사했다. 눅 5장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주일학교도 말씀에 의지하여 사역해야 한다.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말씀을 의지하자. 자라게 하실 하나님을 믿으며 아이들에게 말씀의 씨앗을 뿌리자.”라고 설교했다. 환영사 축사 노회 회계 최규운 장로가 헌금기도, 수도주교 임역원이 헌금특송, 왕십리교회 맹일형 목사가 “이틀간 강습회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환영사, 전국주교 회장 김충길 장로가 “강습회를 통해 잘 배우고 익혀 가르쳐 믿음의 다음세대를 세울 수 있기 바란다.”라고, 전국수도권협의회 회장 최순식 장로가 “인생에서 가치있는 일은 사회와 개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다. 디엘 무디를 말씀으로 양육한 교사처럼 그런 교사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했다. 집행위원장 성일국 장로가 광고 후 증경노회장 채이석 목사의 축도로 개회예배를 마쳤다. 이어 장소를 이동해 박성자 권사 지도로 영아·유치부, 이지선 집사의 지도로 유·초등부 찬양 율동을 배웠다. 첫날 마지막 순서로 찬양집회와 기도회는 N.A워십 후 노회 회록서기 권오진 목사가 기도, 다같이 삼상 17:45을 봉독, 구근호 목사가 ‘게임 체인저’란 제목으로 설교하고 기도회 인도, 증경노회장 박권익 목사가 축도, 집행위원장 성일국 장로가 광고하고 폐회했다. -
김병중(Th.D) 05-26 18:41
【평택제일교회2】 5월 28일 헌의부 결정을 주목한다!
남수원노회가 평택제일교회 담임목사를 면직한 건으로 총회가 시끄럽다. 남수원노회는 총회 산하 160여개 노회 중 하나인데 이들이 교단지 기독신문에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전면광고를 두 번이나 냈다. 덕분에 전 총회원들이 남수원노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게 됐다. "법리에 맞지 않는다", “도대체 노회가 지교회 문제에 대해 천만원이나 들여 광고를 할 필요가 있는가?”, “누워서 침뱉기 아닌가”하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24일 주일에는 남수원노회가 긴급기자회견까지 열었다. 사안이 얼마나 중하기에 ‘긴급’ 기자회견을 거룩한 주일에 했는지 모르겠다. 남수원노회는 ‘주일성수’개념이 있는지 모르겠다. 총회적으로 주일 오후에 임직식을 허용했다가 바로 다음 해에 취소할 정도로 우리 교단은 주일성수에 목숨을 걸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기독신문의 기사 내용을 보면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더 나간 것이 없다. 그런데 ‘긴급히’ 기자회견을 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28일에 있을 헌의부 모임을 의식한 것이 아닐까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남수원노회는 이 일로 이미 교계 기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했었다. 그 당시에는 8개의 언론사가 참여했는데 이번에는 3개 언론사가 동참하지 않았다. 왠일인지 본지 빛과소금뉴스는 두 번의 기자회견에 초청되지 않았다. 팩트는 단순하다. 노회가 지교회 목사를 면직했고, 억울한 목사는 총회 재판을 받기 위해 헌의부에 서류를 제출했다. 이때 노회 서기와 실랑이 가운데 합의해 밀봉해서 보냈는데, 헌의부가 서류가 밀봉된 것을 문제 삼아 다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다음에 밀봉하지 않고 보내면 하자가 없을 시 재판국에 넘긴다는 것이 그 당시 헌의부의 결정이었다. 이제 다가올 5월 28일에 헌의부가 이 문제를 다룬다. 헌의부는 서류에 하자가 없으면 넘기면 된다. 이 건과 관련해 ‘헌의부원 금품 로비설’이 회자되는 등 헌의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당일 서류에 하자가 없으면 받아주면 된다. 그러면 모든 뜬소문은 해소될 것이다. 과연 헌의부가 어떤 결정을 할지 당일 가서 취재할 예정이다. 헌의부가 총회의 핫 이슈인 이 일에 괜히 “덤탱이”를 쓸 일이 없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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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7-08 10:47
【평택제일교회14】 헌의부 내분...서기가 사회, 문제 없나?
지난 7월 7일 있었던 헌의부 실행위원회에서 심각한 내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평택제일교회 김태식 목사의 상소 건에 대해 문미식 부장은 재판국으로의 이첩을 주장했다. 그러나 위원들의 반대가 있자 이 건에 대해 사회를 맡지 았았다. 문 부장은 이전에도 일관되게 평택제일교회 건을 재판국으로 이첩하고자 했다. 그러나 4번째 심사에서도 반대가 심하자 이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호소했다. 결국 서기가 대리 사회를 하는 가운데 평택제일교회 상소 건은 다시금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이 건에 대해 헌의부원들은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부장이 사회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렇게 자중지란하는 헌의부의 결정을 과연 총회원들이 수긍할 수 있는가? 그리고 회장이 사회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 효력이 있는지 법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 건은 헌의부의 계속된 기각으로 헌의부의 손을 떠나게 됐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국 재판국에 넘겨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을 크게 확산하게 만들었고, 총회원들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서류를 심의해 각 부서로 이첩하는 기능을 하는 헌의부가 제대로 그 역할을 했는지는 계속해서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김병중(Th.D) 07-07 18:32
【평택제일교회13】 헌의부...김태식 목사 상소 건 또 기각
7월 7일 모인 총회 헌의부 실행위원회의에서 평택제일교회 김태식 목사에 대한 상소 건이 또다시 기각됐다. 참석자 일부는 재판국으로 이첩하기를 원했으나 다수 위원들의 반대로 결국 다시 기각했다는 후문이 들린다. 이미 몇 번 기각을 했기에 이것을 뒤집는 것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건은 추후 있을 총회 임원회에서 다루어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
김병중(Th.D) 07-07 07:58
【평택제일교회12】재판은 재판국에서 받으면 된다… 그런데 왜 유튜브가 더 바쁜가
요즘 남수원노회 사태를 지켜보는 교단 안팎에서는 이런 말이 자주 들린다. "또 영상이 올라왔네." "이제 몇 편째인지 모르겠다." "거의 매일 영상이 나온다.“ 실제로 모 목사 측 채널을 보면 거의 매일 새로운 영상이 게시된다. 어떤 날은 한 편, 어떤 날은 두 편, 심지어 하루에 네 편의 영상이 연달아 올라오기도 했다. 이 정도면 상소 대응인지, 콘텐츠 연재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다. 그런데 많은 노회원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영상의 내용이 아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는 점이다. 정말 재판을 잘했다면 가장 쉬운 길은 하나다! 모 목사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노회 재판은 적법했다. 절차는 완벽했다. 사회소송시행세칙도 위반했다. 김태식 목사는 면직되고도 남을 사람이다. 심지어 "즉결 면직도 가능했다"고까지 말한다. 좋다. 정말 그렇다면 가장 쉬운 길은 하나다. 총회 재판국으로 보내면 된다! 총회 재판국에서 "노회 재판은 정당하다", "면직은 적법하다"고 판단하면 모든 논란은 끝난다. 가장 빠른 길이다. 가장 확실한 길이다. 가장 장로교적인 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재판국으로 가는 길은 멈춰 있는데, 유튜브는 거의 매일 새 영상이 올라온다. 노회원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노회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반응이 나온다고 한다. "그렇게 재판을 잘했다면서 왜 재판국에 안 보내지?" "면직감이라면서 왜 자꾸 설명회를 하지?" "왜 이렇게 영상을 많이 만드는 거지?“ "이제는 피곤하다." "보내줘도 안 본다." 실제로 최근 영상들의 조회수를 보면 대부분 수십 회 수준이다. 교단 전체를 향한 절박한 외침치고는 의외로 조용하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더 이상 "다음 영상"에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재판 사건인가, 언론 프로젝트인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영상의 내용이다. 정작 상소의 적법성, 재판국 이첩의 필요성, 총회 결의의 취지보다는, 상대방의 도덕성, 과거 행적, 왜 면직감인지, 왜 문제가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이 길게 이어진다. 하지만 상소 사건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김태식 목사가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도덕적 평가의 문제도 아니다. 핵심은 단 하나다. 총회 헌법이 보장한 상소권을 왜 재판국에서 판단받지 못하게 하는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모 목사는 노회 서기이자 재판국 서기로서 상소장을 직접 접수했다. 상소서류를 확인했고, 노회 간사 연락처를 알려주었으며, 접수 영수증까지 발급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상소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상소언론대응위원회를 만들고, 그는 언론을 비판하면서 기자회견을 열고, 그는 교회문제대응연구소를 통해 거의 매일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또한 언론은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고, 총회 임원들과 직원들까지 잘못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취지의 주장도 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노회원들은 오히려 이렇게 묻는다. "자신이 접수한 상소라면 오히려 재판국으로 빨리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총회 결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제106회 총회는 하회에서 제출한 모든 재판 건을 총회 재판국에 이첩하도록 결의했다. 제107회 총회는 헌의부가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확인했다. 제108회 총회는 규칙을 개정하면서 '기각'이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반려'만 규정했다. 총회가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하나다. 재판은 재판국에서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교단이 보는 모습은 정반대다. 재판국 이첩보다 기자회견이 앞서고, 재판보다 유튜브가 앞서고, 판결보다 여론전이 먼저 진행되고 있다. 정말 자신 있다면 학생이 자신의 답안이 맞다고 확신하면 채점을 받는다. 운동선수가 자신이 이긴다고 확신하면 경기장에 들어간다. 재판도 마찬가지다. 정말 자신 있다면 재판을 받으면 된다. 정말 노회 재판이 적법했다면, 정말 사회소송시행세칙 위반이 명백하다면, 정말 면직이 정당하다면, 오히려 그는 총회 재판국에 이렇게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재판은 적법합니다. 총회 재판국으로 빨리 이첩해 주십시오." "면직이 정당하다면 재판국에서 확정받겠습니다." 교단이 기다리는 것은 다음 영상이 아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새로운 영상이 아니다. 새로운 썸네일도 아니다. 다음 기자회견도 아니다. 교단이 기다리는 것은 단 하나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왜 재판국으로 보내지 않는가.“ 그리고 많은 노회원들의 피로감과 의문도 결국 그 한 문장으로 모아진다. "재판국은 조용한데, 왜 유튜브만 이렇게 바쁜가.“ 어쩌면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재판보다 영상이 많고, 상소보다 설명이 길며, 재판국으로 가는 길보다 유튜브 업로드 버튼이 더 가까워 보인다는 점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헌의부가 모여 재심사한다니 결과를 관심 갖고 지켜볼 것이다! -
김병중(Th.D) 07-06 11:27
【평택제일교회11】"총회 행정은 헌법이 움직여야 한다"면서… 왜 유튜브와 기자회견으로 여론전을 벌이나?
한 상소 사건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원래 쟁점은 단순했다. "적법하게 제기된 상소를 헌의부가 재판국에 회부하지 않고 기각할 권한이 있는가?" 즉, 상소권과 헌의부의 권한 범위에 관한 법리적 문제였다. 그런데 남수원노회의 모 목사가 '교회문제대응연구소'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기자회견을 개최하면서, 논쟁의 중심이 법리에서 여론전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는 기자회견과 여러 영상에서 반복적으로 이렇게 주장했다. "총회 행정은 언론이 아니라 헌법이 움직여야 합니다.“ 이 주장 자체를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다. 교단 행정은 당연히 헌법과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교단 안에서는 곧바로 이런 질문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왜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는가? 왜 수십 개의 영상을 제작하고 있는가? 왜 기자회견까지 열어 여론전을 벌이는가? 왜 상소 사건을 언론과 유튜브의 문제로 확대하고 있는가? 한 교단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총회 행정은 헌법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유튜브와 기자회견을 통해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면, 스스로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총회 임원과 직원들이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다" 최근 남수원노회 기자회견에서 그 목사는 일부 언론 보도와 관련하여, "허위 언론이 총회 임원들과 직원들을 가스라이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표현 역시 논란이 되고 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조종하여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교단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총회 임원들과 직원들은 교단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언론 보도를 읽었다고 해서 곧바로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정치적인 프레임 아니냐." 또 다른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언론 보도가 잘못되었다면 사실과 법리로 반박하면 된다. 그런데 곧바로 '가스라이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총회 임원들과 직원들의 독립적 판단 능력 자체를 폄하하는 표현으로 들릴 수 있다." 기자회견에서 언급된 '1000만 원 후원’ 그는 기자회견에서 상소와 언론 대응 과정에서 약 1,000만 원의 후원금이 모였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이를 두고 교단 안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한 원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상소는 법리와 절차의 문제다. 그런데 유튜브, 기자회견, 후원금 모금, 언론 대응 조직까지 등장하면서 마치 정치적 캠페인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결국 남는 질문 이번 사건의 핵심은 특정 목사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가 아니다. 특정 언론이 마음에 드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핵심은 오직 세 가지다! 적법한 상소가 있었는가? 헌의부가 기각할 권한이 있는가? 재판국에 회부해야 하는가? 그런데 정작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보다는 상소인에 대한 비판, 특정 언론에 대한 공격, 총회 임원과 직원들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 유튜브와 기자회견을 통한 여론전 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교단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상소는 사람을 공격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법리로 답해야 한다. 사람이 아니라 헌법이 답해야 한다." 상소와 남수원노회를 둘러싼 논란은 이제 한 교회의 분쟁을 넘어, 교단이 정말 헌법으로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여론과 프레임으로 움직일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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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1-15 00:48
손원재장로, 근대기독교선교기지 세계유산등재 추진위원
제109회 총회 역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손원재 장로가 지난 1월 12일 근대기독교선교기지 세계유산등재 취진위원회(회장 한교총 대표회장 김정석 목사) 기획홍보 분과위원으로 위촉됐다. 이는 한국 기독교 역사 유적지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것으로 교단을 넘어 한국 기독교계의 연합으로 마침내 창립총회를 열고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불교와 천주교의 유적은 이미 세계유산으로 여러 곳이 등재되어 있지만, 한국·중국·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는 아직 단 한 곳의 기독교 역사 유적도 등재되지 못한 현실 앞에서, 늦었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광주의 오웬 기념각을 비롯한 5곳, 대구의 아담스 기념관 외 7곳, 전주의 마로덕 기념관 외 5곳 등,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앙의 발자취를 세계가 함께 기억하도록 세우는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한국 교회와 다음 세대, 더 나아가 인류의 영적 유산을 위한 거룩한 사명이다. 특히 오랜 시간 역사를 연구해 온 학자들과, 이 뜻을 품고 헌신을 결단한 12명의 추진위원들에게 이 일이 단순한 문화 사업이 아니라 믿음과 책임 그리고 시대를 향한 신앙의 고백이다. 타 종교보다 뒤늦게 시작한 이 작은 씨앗이 머지않아 세계가 함께 기념하는 믿음의 숲으로 자라나기를 소망한다. 이 일에 위원으로 위촉된 손원재 장로는, 한국 기독교 100년의 역사는 이제 역사에 평가받을 만한 귀한 역사이며, 불교처럼 한국 기독교의 사적지들도 지자체와 국가 문화재로 등재하여 보존되고, 나아가 유럽의 성지순례처럼 세계인이 찾는 신앙·역사 관광의 길이 열려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특히 광주·호남을 비롯한 이 땅의 순교와 헌신의 기독교 역사의 현장들이 그런 날을 맞게 되기를 소망해 왔다. 그래서 총회 역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지금까지 “총회 역사관설치”, “순교자기념주일지정”, “기독교 역사 사적지 지정”, “기독교 역사 학술대회” 등의 성과를 이루었다. 이제는 예장 합동 교단을 넘어 초교파적으로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해주신 훌륭하고 헌신적인 좋은 분들과 대한민국을 넘어 유네스코 등재라는 목표를 위하여 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앞으로는 학자들의 지혜도, 정치권과 지자체의 협력도, 중앙정부의 뒷받침도, 그리고 물질의 헌신도 절실히 필요하다. 2030년 유네스코 등재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니 학자들조차 “자료 준비와 검증만 해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고개를 흔들지만, 그럼에도 믿음으로, 기도로, 순종으로 함께 도전해 보기로 뜻을 모았다. 근대 기독교 선교기지 세계유산등재를 목표로 시작한 첫 걸음이 좋은 결과로 열매 맺기 위해서는 교계와 교회, 교인들의 관심이 절실하다. -
김병중(Th.D) 01-13 15:56
회의 사회의 달인, 전국장로회연합회 회장 이해중 장로
이해중 장로가 회장으로 있는 전국장로회연합회 제55회기 ‘실행위원회 및 신년기도회’를 취재하러 갔다. 회장으로 위원회 회무를 처리하는데 역시 깔끔하게 진행했다. 다시 한번 이해중 장로가 사회의 달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해중 장로가 전국주일학교연합회 회장, 서울·서북장로회연합회 회장 그리고 전국장로회연합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회의를 주재하는 것을 봤는데 어떤 안건에 대해 이견이 있더라도 잘 정리하면서 깔끔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고 노련하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민감해 보이는 안건이 있었지만 역시 잘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를 잘 보는 은사’를 타고난 것으로 보였다. 어떤 의견이라도 잘 경청하고 회원들의 의견을 듣고 합리적으로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회의 진행 강사로 나서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취재하러 가서 수많은 회의를 보는데 이해중 장로만큼 잘하는 목사나 장로를 본 적이 없다. 이전 단체에서도 회장직을 잘 수행했기에 올해 전장연도 잘 이끌어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이해중 장로를 사회의 달인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이해중 장로의 매끄러운 사회 덕분에 순서가 많았던 전장연 실행위원회 및 신년기도회가 제 시간에 끝나 식지 않은 점심을 먹게 된 것도 감사하다. -
김병중(Th.D) 01-01 10:17
정영교 부총회장, 새해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자
제110회 총회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가 “2026년 새해에는 이 세상에 거룩한 영향을 주는 교회와 총회가 되자”라고 다짐했다. 정 목사는 송구영신예배 설교에서 마 5:13-18을 본문으로 ‘거룩한 영향력’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정 목사는 “신자는 거룩해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국민 74%는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고, “이러한 가운데 총회와 교회가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원해서 늘 양복 윗도리에 교단 마크를 부착해 다니는데 이는 교단 소속 목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이 세상 속에 영향력을 미쳐야 비신자가 교회로 오게 된다.”라고 했다. 계속해서 “오늘날 교회 안에 역사(役事)와 능력이 소멸하고 있는데,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며 능력 받아 밖으로, 세상 속으로, 이웃에게로 나가야 한다.”라면서 “신자는 개인의 번영 신앙에서 벗어나 공적인 책임을 지고, 삶으로 신뢰를 증명해 신뢰를 되찾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자.”라고 설교했다. -
김병중(Th.D) 12-12 18:46
이승현 목사, 자랑스런 부흥사 상 수상
여러 부흥사 연합단체의 대표회장 등을 역임하며 부흥사 사역에 앞장서는 이승현 목사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자랑스런 부흥사 상을 수상했다. 재미재단 세계복음화협의회(세복협)가 제25차 국민대상 시상식을 12월 12일 오후 2시 서울한영대학교(총장 한영훈 목사) 7층 대강당에서 개최하고 이승현 목사에게 자랑스런 부흥사 상을 수여했다. 이날 자랑스러운 목회자 상에 장현승 목사, 자랑스러운 교육자 상에 최대해 박사, 자랑스러운 기업인 상에 윤승지 장로가 수상했다. 자랑스러운 부흥사 상 이승현 목사(한샘교회)가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다.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 설교를 하며 부흥사의 길로 들어서게 돼 25년이 됐다. 교회를 세우고 담임목사를 돕는 부흥사로 섬기고 있다. 부흥사인 것이 자랑스럽다. 사명 잘 감당하겠다. 목회자로 본을 보이신 아버님께 감사드리며 한샘교회 성도들에게도 감사드리며, 가족에게도 감사하다.”라고 수상소감했다. 본회 상임총재 한영훈 목사가 “세복협은 1988년 설립되어 그동안 많은 일을 해왔다. 피종진 대표총재님께서 오랜 세월 같이 해오는 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오범열 수석총재께서도 많이 협력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오늘 수상자들은 각 분야에서 큰 일을 하신 분들이시다. 앞으로 같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환영사했다. 본회 수석총재 오범열 목사가 “국민대상 25년 시상 가운데 오늘 4분이 수상하신다. 이분들은 각 분야에서 귀하신 분들이다. 수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기쁨을 선사하시기를 기원드린다.”라고 축사했다. 앞서, 1부 예배는 대표회장 임다윗 목사의 인도로 총재 민한근 장로가 기도, 회장 김다은 목사가 시 126:1-6을 봉독, 서울한영대학교 박일권 교수가 특송했다. 대표총재 피종진 목사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주님 안에 있어야 절로 열매를 맺게 된다. 주님과 함께하면 주의 일은 어렵지 않고 쉽다. 오늘 수상자는 앞으로 더 큰 일을 하실 분들이기에 시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설교했다. 이어 회장 김준호 목사가 봉헌기도 후 예장(한영글로벌)총회 당회장 이원해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 후 시상식은 실무총재 고영기 목사의 사회로 운영총재 장향희 목사가 장현승 목사(과천소망교회)에게 자랑스러운 목회자 상을, 실무총재 박승식 목사가 이승현 목사(한샘교회)에게 자랑스러운 부흥사 상을, 대표회장 임다윗 목사가 최대해 박사(대신대학교 총장)에게 자랑스러운 교육자 상을, 국민일보 김경호 사장이 윤승지 장로(규빗건축사사무소)에게 자랑스런 기업인 상 상패와 부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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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부총회장 선거 지역구도의 ‘이현령비현령’
제110회 총회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각 후보와 지지 세력들은 총대들의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고심하고 있다. 과연 어떤 선거 전략을 써야 자기에게 유리할지 방법을 찾고 있다. 인간이란 꽤나 합리적인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은 허당기가 있다. 지난 109회 목사 부총회장 선거 때 나온 말 중 하나는 “영남 독식론”이었다. 내리 영남인이 총회장을 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비영남인이 부총회장에 당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106회 총회장 배광식 목사,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 제108회 총회장 오정호 목사, 제109회 총회장 김종혁 목사는 모두 영남인이다. 그런데 109회 부총회장 선거 지역 구도는 서울·서북이었는데 서울지역의 장봉생 목사도 영남 출신이었다. 그래서 서북지역의 김동관 목사 캠프 측에서는 영남 출신의 독식을 막기 위해서라도 비영남인인 김동관 목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현재 총회 선거는 3구도로 돌아간다. 해당 지역의 노회에서 후보들이 나오는데 후보들의 고향은 지역과 상관없다. 그러다보니 지역이 순환됨에도 불구하고 다섯번이나 영남 출신 목사들이 총회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5번 중 2번은 영남 지역 구도였다. 나머지 3번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올해 부총회장 출마 지역은 중부·호남이다. 중부지역에서는 정영교 목사가, 호남지역에서는 고광석 목사가 출마했다. 그러자 “중부 지역에서 총회장이 두 분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호남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와야 된다”는 말이 돌고 있다. 중부 지역의 두 총회장은 제105회 소강석 목사와 제108회 오정호 목사이다. 그런데 출신 지역으로 보면 소강석 목사는 호남 출신이며 오정호 목사는 영남출신이다. 그러므로 5년간 내리 영남인이 총회장을 독식하고 있다는 “출신별” 주장에 따르면 소강석 목사는 비록 중부지역이지만 호남인으로 분류해야한다. 이처럼 지역으로 분류하느냐, 출신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됨을 이르는 말)이 되는 것이다. 정영교 목사는 중부지역에서 나왔지만 호남인이다. 전남 담양에서 출생해 조선대학교 공과대학을 나왔다. 고광석 목사는 전남 구례에서 출생했지만 서울에 있는 개신대학원대학교를 나왔다. 중부·호남 구도이지만 결국 같은 호남인이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단순히 “중부 지역에서 총회장이 두 분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호남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와야 된다”는 “우리가 남이가?”식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동안 영남인이 3지역구도에도 불구하고 내리 5년간 총회장을 했다는 것은 서울지역의 권순웅 목사와 중부지역의 오정호 목사, 서울지역의 장봉생 목사가 영남출신으로서 타지역에서 목회의 뿌리를 잘 내렸다는 것이다. 두 지역이 묶여 있는 서울·서북, 중부·호남은 어쩔 수 없이 경쟁해야 한다. 단순히 한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왔으니 다른 지역에서도 총회장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無논리이다. 물론 해당 지역에서 부총회장이 나오기를 다 원하겠지만 나머지 서울·서북, 영남 지역 총대들은 이들 지역과 큰 상관관계없이 투표한다. 그러므로 단지 지역민심에 호소하는 것은 표 확장성이 없어 보인다. 하필이면 두 후보 모두 호남출신이다보니 “신토불이 후보론”도 나온다. 호남지역에서 나고 자라 계속 호남에 있어야 “찐” 호남인이라는 것이다. 선거란 이처럼 합리도, 논리도 없는 구석이 있다. 그러므로 너무 지역 구도에 함몰되지 말아야 한다. 2026년 제111회 총회를 이끌어갈 교단 수장을 뽑는 예비 단계인 부총회장 선거에서 대표 자격이 있는 후보를 뽑아야 한다. 부총회장으로, 총회장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후보를 뽑는 투표가 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 구도 없이 전국구로 가자는 말이 나온지 이미 오래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합동 총회 부총회장 선거는 국가로 치면 지역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다. 선거 관련 기사 링크: 110회 총회 목사 부총회장 입후보자: 정영교 vs 고광석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660김병중(Th.D) 08-06 01:59 -
1027연합예배, 전광훈 재 뿌리거나 숟가락 얹거나 우려
기대 반 우려 반인 1027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가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이 행사를 한다고 했을 때 교계의 반응은 “필요하다”는 것과 “왜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양분된 견해는 여전하다. 예를 들어 내가 가입되어 있는 한 동창회 단톡에서는 누군가 내일 행사를 생중계하는 방송사를 소개하자 몇 명의 회원이 반발하고 탈퇴했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행사를 진행할 때 교계 기자들의 가장 큰 관심과 걱정은 이미 광화문 광장을 차지하고 있는 전광훈 측이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동화면세점 앞쪽을 매 주일 집회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인원이 모이고 있다. 그리고 이미 전 측은 일간지를 통해 10월 27일 오전 11시에는 예배를 하고, 오후 2시에는 “윤석열 대통령 지키기 국민대회”를 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결국 1027연합예배와 시간이 겹치고 장소도 겹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지난 10월 24일 있었던 기자간담회에서도 질의했을 때 “그들이 기도회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답했는데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기자는 전 측이 이 행사에 재를 뿌리거나 숟가락을 얹을 수 있다고 예견한다. 전 측의 입장에서 볼 때 이날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좋은 기회이며 먹을 게 많은 잔칫날이다. 전 측이 강력한 앰프를 사용하면 그 소음으로 1027행사를 진행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방해 받을 수 있다. 또한 저들이 저들의 시그니처인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기도회 집회 장소로 밀고 들어오면 1027행사는 결국 전 측의 모임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크다. 내가 전광훈이라도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순수한” 예배와 기도 집회는 전 측의 정치집회로 "오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 측 좋은 일만 시킬 것 같은 우려가 크다. 과연 1027 집회 측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며 우려스럽다.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내일 집회에 참석해야 할 것 같다. 내 예측이 기우로 끝나기를 바래본다.김병중(Th.D) 10-26 14:51 -
“목사 면직”, “노회 문제 제기”, "소송"....기자를 겁박하나?
한 통의 내용증명 문서를 받았다. 북일교회 사태에 관해 쓴 기사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글이었다. 상대방이 문제 제기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관련기사링크: 북일교회 담임 반대 측, 노회 수습처리위 지시 묵살 난동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100 그러면 기사에 대한 것만 언급해야지 기자인 내 신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선 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관련한 전문이다. 총신대학교 신대원 총동창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목사님께서는 H노회 소속의 동암교회를 사임하신 후에 J노회 소속의 C교회에 소속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관련하여 교단법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교단법은 목사님이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근거 규정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첫째, 목회자가 노회의 소속을 바꾸려면 타 노회 소속 교회의 청빙을 받아 이명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C교회의 청빙을 받으신 겁니까? 목사님이 C교회의 청빙을 받았다면 그 교회에서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둘째, 목사는 임직서약할 때 신자 목사'로 열심히 성도의 의무를 잘 감당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목사님이 현재 출석하시는 교회와 그 교회에 얼마의 헌금을 했는지의 근거 서류를 가지고 계십니까? 주일을 범하고 헌금을 포함한 성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 면직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말미에 민형사상 소송을 걸고 내 신분에 대해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했다. 이 무슨 겁박인가? 2024년 10월 31일까지 목사님의 답변이 없으시다면 저희는 민형사상 소송과 아울러서 목사님께서 교단 결의를 어기고 일방적으로 취재하여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키신 일과 목사님의 현재 신분에 대해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를 제기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2024년 10월 24일 북일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 드림 이처럼 “목사 면직 ”, “민형사상 소송 제기”,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 제기” 등등 다양하게 기자를 겁박하는 이들이 바로 ‘북일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정체인가? 저들이 궁금해하는 내 신상은 저들이 민형사상 소송을 하면 그때 밝히겠다. 그리고 그것은 목사 면직 사유가 아니니 그때 내가 그들을 “명예훼손, 협박”으로 맞 소송 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끝으로 나는 북일교회를 이미 2번 취재하러 갔었다는 것도 밝힌다.김병중(Th.D) 10-2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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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중부교회를 통한 교훈...“이권”에 개입하지 말라
최근 대전고등법원 제2민사부는 충남노회 재판국이 2022년 3월 31일 김종천 목사에게 내린 면직 및 수찬 정지 판결이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에 대해 반대 측이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지만 뒤집힐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제 김종천 목사의 재판은 8부 능선을 넘었다고 볼 수 있다. 긴 교회 분쟁에 많은 기사를 썼던 본지는 감회가 남다르다. 중간 결산하는 마음으로 천안중부교회 분란에 개입했던 인사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1) 고00 목사: 고00 목사의 7000만원 수수건에 대해 교인이 고발한 건을 기사화했을 때 고00 목사와 이00 목사는 본 기자를 명예훼손으로 민형사 고발했으나, 결국 무혐의 처리됐다. 고 목사는 7000만원 수수건으로 인해 야심차게 출마한 부총회장 선거에서 탈락됐다. 2) 서00 목사: 서00 목사는 전남노회 석상에서 벌인 난동으로 인해 면직됐고, 함께 동조한 박00 목사는 제명출교 처리됐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공론화 되지 않은 가운데 서00 목사는 선관위의 부실 검증으로 부서기에 당선됐고, 이후 그는 측근 박00 목사를 천안중부교회 임시당회장으로 보내고 곧 공동의회를 통해 위임청빙하더니 작년 12월 25일 성탄절 저녁에 여러 총회 임원들이 순서를 맡은 가운데 위임식을 했다. 3) 장00 목사, 안00 목사, 김00 목사: 제명출교 되어 자격 없는 박00 목사를 위임식하는 국장을 총회 임원 안00 목사가 맡았고, 장00 목사는 설교했고, 김00 목사는 축사했다. 이들은 고발되어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분쟁하는 교회에 개입했다는 것이며 그로인해 큰 댓가를 치뤘거나 치루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분쟁하는 교회에 개입하는가? 왜 위임된 권한을 가진 자들이 불법에 동조하고 앞장서는가? 이권에 직접 개입했거나, 이권에 연관된 자들에게 동조했기 때문이다. 이제 김종천 목사의 담임목사 지위가 최종 확정되면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연관된 자들은 목사로서의 명예가 짓밟힐 것이다. 작은 이익을 탐하다 더 큰 것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함부로 분쟁 교회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잘못된 편에 서서 이권을 챙겨서는 안 된다. 언젠가 모든 것이 정상화되면 다 드러나고 그 댓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분쟁 중인 북일교회도, 평택제일교회도 그렇게 될 것이다!김병중(Th.D) 06-26 12:10 -
【단상】 꼴보기 싫은 인간들
'꼴'은 주로 '사물의 모양새'나 '사람의 행동'을 뜻하며, 일상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살다보면 꼴보기 싫은 자들이 있다. 안 보고 사는 것이 상책이다. 똥은 무서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 피하는 것이다. 똥 묻지 않도록 꼴보기 싫은 자들을 멀리하며 살고자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참으로 똥같은 인간들이 많아 가끔은 똥물이 튀기도 한다.김병중(Th.D) 06-25 18:33 -
【단상】 외로움과 고독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
나이 먹을수록 고독하게 살아야 할 것 같아 AI에 “고독과 외로움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에 대해 물으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 외로움과 고독의 가장 큰 차이는 '자발성'과 '감정의 상태'에 있습니다. 철학자 폴 틸리히는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정의했습니다. 1. 비슷한 점 (공통점) ▲혼자라는 기반: 두 감정 모두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으로 타인과 분리되어 홀로 있는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보편적 인간 실존: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본질적인 감정입니다. ▲외형적 유사성: 제3자가 겉보기에 혼자 책을 읽거나 카페에 앉아 있는 행동은 외로움 때문인지, 고독을 즐기는 것인지 쉽게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2. 명확한 차이점 ▲자발성과 통제력: 외로움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을 때 느끼는 수동적인 아픔입니다. 반면 고독은 방해받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능동적인 상태입니다. ▲내면의 풍요로움: 외로움은 '내 존재의 결핍'을 느끼며 타인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하지만, 고독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정신적 에너지를 채워나갑니다. ▲환경의 영향: 외로움은 주변에 군중이 많아도 소통이 되지 않으면 깊어집니다. 반면 고독은 주변 환경과 관계없이 본인이 마음의 문을 닫고 자아와 대면하는 순간에 완성됩니다. 외로움이 타인과의 연결을 원하는 ‘결핍의 신호’라면, 고독은 나 자신과 깊어지는 ‘성장의 기회’입니다. 조사해 보니 위로가 된다. 살아갈수록 맘에 드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그런 사람들과 굳이 함께하거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내게 남은 인생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고독한 삶을 살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아직 내게는 가족, 특히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보여주어도 좋고, 서로 대화가 통하는 대상이 적어도 하나라도 있다는 것이 든든하다. 언젠가 사별하면 얼마나 막막할까? 그래서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죽을 것이다. 아내 없는 삶은 상상이 안 된다. 물론 아내도 자기가 나보다 먼저 죽겠다고 하고 때로는 같은 날 죽자고 한다. 아이고야. 서로 사별의 아픔을 겪지 않을려고 애쓴다. 나는 피동적으로 외롭지 않고, 능동적으로 고독할 뿐이다!! 결국, 인생은 독고다이다.김병중(Th.D) 06-2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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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10】 DMN의 시작
DMN(diaspora Mongolian network)의 시작 DMN은 2000년도에 한국에서 몽골인 사역을 담당하던 사역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당시에 몽골인 모임은 전국에 100여 곳이 되었다. 대부분이 한국교회 안에 있는 몽골인 모임이었다. 구정과 추석 명절에 몽골인 모임은 연합으로 수련회를 하였다. 2박 3일 동안 집회를 가지며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수련회를 마치고 사역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수련회를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몽골인선교를 위한 선교단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선교단체 이름을 DMN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DMN의 비젼은 "흩어진 몽골족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세운다."였다. 당시에 한국에는 많은 이주민들과 이들을 위한 선교단체가 있었지만 이주민들을 디아스포라선교의 관점으로 선교하게 하신 것은 몽골교회에 허락하신 크신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DMN은 초기부터 선교의 대상을 전 세계에 흩어진 몽골족으로 했다. 한국에 있는 몽골인, 내몽골과 브리야트 및 중앙 아시아에 있는 몽골인, 일본, 호주, 미국, 유럽에 있는 몽골족들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연합하여 예배를 드리며 제자훈련을 하고 선교훈련도 했다. 몽골교회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와 다른 많은 교재들을 만들어서 배포하였다. 당시에 많은 이주민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그 도움은 한국교회나 사회 기관에서 해결하게 하고 DMN은 오직 전도와 일꾼을 세워서 파송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모든 교회에서는 거듭나고 헌신된 목회자나 선교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결국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30여 교회를 세웠다. 또한 단기 선교사로 일본, 호주, 내몽골, 터어키, 미국, 유럽, 중앙 아시아에서 사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DMN을 세워주시고 귀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당시에 많은 이주민선교단체들은 DMN의 비젼을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DMN이 이주민선교를 디아스포라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구약과 신약의 선교, 그리고 현대의 선교까지 디아스포라 관점에서 이해하면 선교의 큰 흐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몽골선교를 하는 DMN에게 허락하신 것을 몽골교회들은 감사하고, 더욱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선교가 되기 위해서 더욱 힘써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서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언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김병중(Th.D) 07-11 09:39 -
【양대식 목사 칼럼26】좋은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인사가 만사다
좋은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 인사가 만사다 - (잠언 26:10) 어느 단체, 공동체에서 좋은 사람을 고용해야 합니다. 사람이 중요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여 일하십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는데, 의미는 사람을 채용하고 배치하는 일이 만 가지 일이라는 말로서,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써야 일이 잘 풀린다는 뜻입니다. 인사가 잘못되면, 망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돈을 더 주고서라도 사람을 잘 고용해야 합니다. 좋은 인재, 유능하고, 신실하고, 검증받은 자를 고용해야 합니다. 잠언 26: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 시 101:6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잠언 13:17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되느니라 전도서 3: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사람을 잘 만나야 되고, 잘 써야 공동체가 성장합니다. 사람 잘못 쓰고 고용하면 공동체, 교회, 회사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교회도 담임목사가 중요하기에 담임목사 청빙을 잘 해야 합니다. 회사도 사람을 잘 고용해야 합니다. 사람 잘못 쓰면 실패하고,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병원도 유능하고 좋은 의사를 고용해야 병원이 잘 되게 됩니다. 어떤 단체에서 사람 구할 때, 인정에 매여 아무나 쉽게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고용하는 데에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력서가 정확히 기록되었는지 확인해야 하고, 면접을 해서 말하는 태도나 행동을 살펴야 합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 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한 곳에서 잘했던 자면 다른 곳에 가서 잘할 확률이 큽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게 됩니다. 쉽게 쉽게 사람 구하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인내가 있었는가, 확인해야 합니다. 쉽게 쉽게 직장을 옮겨 다닌 자는 신뢰하기 힘듭니다. 한 곳에서 오래 견뎌본 인내심이 있는가, 확인해야 합니다. 고용하려는 자가 일했던 과거의 장소에 전화나 다른 방법으로 뒤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평판이 있는지, 소문이 있는지, 일을 어떻게 잘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인간은 정직하지 못하고, 속이는 존재이기에 뒤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철저히 검증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추천서도 중요합니다. 추천하는 자의 인격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추천도 믿을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추천을 받느냐가 중요 합니다. 인정받고, 신뢰받는 자를 고용해야 합니다. 사람의 인격도 중요하나, 가능하면 분야에 전문성이 있고, 실력이 있는 자를 고용해야 합니다. 가정생활, 가족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정생활 잘하는 자여야 합니다. 과거에 전과, 죄짓고 사고 쳤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고 친 자는 다른 곳에 가서도 사고를 치게 됩니다. 인간이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교육 배경도 알아보아야 합니다. 정상적으로 공부했는지, 학위를 제대로 받았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학위도 속이는 시대입니다. 진실성이 있는지, 거짓된지 알아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한데, 사람 잘못 쓰면 공동체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사람 잘 고용하면 공동체가 성장하고 부흥합니다. 인재, 천재, 실력있는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성공을 경험한 자를 고용해야 합니다. 전문가를 구하면, 더욱 좋은 현상입니다. 교회도 일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일꾼이 되는가에 따라 교회가 성장하기도 하고, 침체하기도 합니다. 책임감이 있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인간관계 잘하는 자를 구해야 합니다. 신뢰받는 자여야 합니다. 무책임하고, 실력이 없고, 게으르고, 약속 어기고, 변명 잘하는 자를 고용하면 큰일 나고, 문제가 생깁니다. 갈등 일으키고, 싸우기 좋아하고, 교만한 자는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시대, 사람은 많은데 실력 있고, 유능하고, 좋은 자 찾기 힘든 시대입니다. 잘하는 자보다 못하는 자, 성공하는 자보다 실패하는 자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은퇴하는 목사는 후임 목사를 잘 구해야 합니다. 인정에 매여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목회에 검증된 자, 평판이 좋고 인격이 뒷받침되고, 어느 사역지에서, 어떤 부서에서 성공을 경험한 자여야 합니다. 좋은 사람 만나고, 좋은 사람이 고용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을 고용하는 데도 어느 정도 원칙이 있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단체에서 사람이 누구인가가 너무 중요합니다. 훌륭한 인재를 구해야 하는데, 문제해결의 지혜와 능력을 가진 자를 구해야 합니다. 지혜가 있고, 아이디어가 좋은 인재를 구해야 합니다. 자기를 변화시키려 하고, 수용성이 있는 자, 지혜 있는 자를 구해야 합니다. 훌륭한 인재가 내 옆에 있을 정도의 인품과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인재를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훌륭한 사람, 인재로 만드는 일에 관심 가지고 투자해야 합니다. 모든 면에 교육과 훈련이 중요합니다. 좋은 멘토를 만나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쓰면 좋은 성과를 만들게 됩니다. 인정에 매여 자기의 마음에만 들면, 아무나 고용하려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후임자 구할 때, 나보다 더 유능하고 좋은 사람을 써야 합니다. 사람을 잘못 세우면 재앙이 임합니다.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에 좋은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사람이 많다고 일의 효과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통해 역사하기에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잘 구해야 합니다. 만남의 축복,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재 한 명이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은 인재를 구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김병중(Th.D) 07-04 12:17 -
박성규 총신대학 총장 논문: 총신 125년의 역사-감사, 기억, 도약
총신 125년의 역사 – 감사, 기억, 도약 박성규 총장 목차 들어가는 말 1. 감사 — 일곱 가지 감사의 내용 2. 기억 — 평양신학교로부터 총신대학교까지의 역사 3. 도약 — 다섯 가지 도약의 과제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역사를 아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오늘의 우리를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하게 하므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역사학자 스탠포드 리드(W. Stanford Reid, 1913-1996)는 다음과 같이 역사 연구 및 교육의 중요성을 말했다. “사람은 자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을 소유할 때 비로소 성장한다. 역사를 아는 것은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자기보다 앞서간 사람들이 성취해 놓은 것을 탐구할 때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들보다 더 전진할 수 있다.” 2026년 5월 15일은 총신 개교 125주년 기념일이다. 이에 지나온 125년간 우리 총신에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번 호 「신학지남」에서 우리 교수님들은 지나온 125년간 총신 신학교육의 역사를 분과별로 연구하여 게재하였다. 분과별 발전 과정을 연구하여 알려주신 교수님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총장으로서 저는 총신의 125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감사, 기억, 도약’이라는 주제로 총신 125년의 역사를 회고하고 전망하고자 한다. 총신 125주년 감사할 것으로는 일곱 가지 감사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기억해야 할 것으로는 평양신학교로부터 오늘의 총신대학교로 이어지는 신학교의 변천을 다루었다. 도약해야 할 것으로는 다섯 가지의 내용을 다루었다. 감사 총신 125년을 회고하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의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가 된다. 첫째, 개혁신학을 견지한 선교사가 평양신학교를 세운 것이다.설립자인 사무엘 마펫과 동료들은 대부분 역사적 칼빈주의를 가르치는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구약 성경 66권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토대 위에 평양신학교를 세웠다. 그 졸업생들이 한국 장로교회의 기초를 세운 것은 크게 감사할 일이다. 둘째, 부흥 운동을 경험한 선교사들이 평양신학교를 세운 것이다. 맥코믹신학교는 신학적으로는 프린스톤의 구학파 신학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시카고에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는 무디의 영향 아래서 부흥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이는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셋째, 겨레를 사랑하는 민족 지도자를 배출한 것이다.평양신학교 출신들은 3・1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민족 대표 33인 중 평양신학교 출신이 5명이나 되었다. 길선주(1907년 졸업, 1회), 양전백(1회), 유여대(1915년, 8회), 김병조(1917년, 10회), 이승훈(1915-1916년 재학)이 그들이다.강규찬(10회) 목사는 평양에서의 3·1운동을 주도했다. 그 외에도 지금까지 애국적 지도자들이 평양신학교와 그 전통을 이은 총신에서 많이 배출된 것에 감사드린다. 넷째,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에서 한국교회를 지켜낸 것이다. 1934년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는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는 설교를 했다.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 기념으로 감리교에서 발행하는 아빙돈 성경 주석 번역에 장로교의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이 참여했다. 아빙돈 성경 주석은 고등비평 방법을 채택한 미국 학자들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 책이었다. 이것을 분별하고 한국교회를 지킨 분이 박형룡 박사였다. 박형룡 박사는 1935년 제24회 총회에 이 문제를 보고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지킬 수 있었다.무엇보다도 자유주의 신학 문제가 발생한 1년 후인 1935년에는 불후의 명저 『기독교 근대 신학 난제 선평』을 발간했다. 무려 847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에서 박형룡 박사는 정통신학이 무엇인지 논증하며, 자유주의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 성서 고등비평, 마르크스주의, 신비주의, 무교회주의 등 다양한 잘못된 신학과 사조를 분석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지킬 수 있었다.박형룡 박사의 역할이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1934년부터 이미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에 물들었을 것이며 쇠락하는 서구 교회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 다섯째,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를 배출한 것이다.1936년에 한국천주교회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으며, 감리교회도 1937년에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선언했다.안타깝게도 끝까지 저항하던 장로교회도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에 제27회 총회를 개회한 후, 9월 10일 오전 11시 30분에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결의를 하고 말았다(장소: 서문외예배당, 홍택기 총회장[1924년 졸업, 18회], 김길창 부총회장[1922년, 16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기독교 신앙에 위반되지 않는 애국적 국가 의식으로 규정하고 신사참배를 결정했다.이 결정에 우리의 선배들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도 이렇게 변질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로 200여 교회가 문을 닫았고 2,000여 명의 성도가 투옥되었고 약 50명의 교역자가 순교한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특히 성경의 절대 권위를 주장하고 말씀의 실천을 표어로 삼은 평양신학교의 블레어(William N. Blair, 방위량) 이사장, 로버츠(Stacy L. Roberts, 라부열) 교장 등 모든 교수와 학생들은 신사참배 운동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였다.전국에서 가장 큰 노회인 평북노회가 제일 먼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1938년 2월) 평북노회 목사 후보생이었던 장홍련은 평양신학교 교정에 있던 평북노회장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버렸다. 이에 일경(日警)은 장홍련, 김양선, 안광국, 장윤성, 지형순, 조윤승 등 다수 학생과 김인준, 박형룡 교수를 불구속 입건했으며, 혐의가 전혀 없는 주기철 목사를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구속했다.주기철 목사(1925년 졸업, 19회)는 갖은 협박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신사참배 반대를 단호하게 천명했다. 주기철 목사는 1938년 2월에 처음으로 검속된 이후, 그해 가을에 2차로, 이듬해 8월에는 자신과 관련이 전혀 없는 ‘농우회’(農友會) 사건에 엮여 3차로 검속되었으며, 1940년 5월에는 4차, 즉 마지막으로 검속되어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교하기까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최선봉에 서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증경총회장 김선두 목사(1913년 졸업, 6회), 평북의 이기선 목사(1915년, 8회), 경남의 한상동 목사(1937년, 32회), 평남의 이주원 전도사와 뜻을 모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신사참배를 수용한 대다수와 달리 하나님만을 경외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동료 목사와 성도들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음으로써 허물어져 가는 한국교회를 지켜낸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여섯째, 하나님께서 평양신학교와 총신대학교를 세우는 헌신자들을 일으키신 것이다.평양신학교는 1901년에 마펫 교장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1908년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 언덕에 마련된 5,000평의 대지 위에 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던 마펫 교장은 맥코믹 여사(Mrs. McCormick)로부터 1만 1천 원에 해당하는 신학교 건축 기금을 얻었다. 1908년 5월에 기공하여 1909년에 완공되었다. 신학교 건물은 한식 2층이었다. 2층에는 중앙에 기도실과 교수실이 있었고 4, 5학년 교실이 있었다. 1층에는 1, 2, 3학년 교실, 창고, 수위실이 있었다. 각 학년을 위한 독립된 교실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신학교 건물을 완공한 이후에는 마펫 교장의 집에서 신축 건물로 이전했다. 맥코믹 여사의 지원은 계속되었다. 여사는 기숙사 2개 동 건축을 후원했으며, 이 건물은 맥코믹 기념관이라고 불렸다. 1922년에도 평양신학교의 새 건물의 건축을 위해 7만여 원의 거금을 후원했다.이처럼 맥코믹 여사의 후원은 평양신학교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59년 통합이 분열하여 나간 후 사당 캠퍼스가 조성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명신홍 박사와 백남조 장로다. 명신홍 박사는 직장암으로 네 차례 수술을 받아 투병 중임에도 도미하여 5만 불의 기부를 약속받아 그중 3만 불을 가지고 귀국했다. 암 환자였으나 그는 기금을 아끼기 위해서 항공편이 아니라 선편(船便)으로 귀국하는 목숨을 건 헌신을 하였다.백남조 장로는 작은 사업을 경영하면서 소원은, 어머니를 모실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당시 살고 있는 집은 판잣집이었다. 좋은 2층 양옥집을 지어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모은 돈을 바쳐 18,000평의 사당동 캠퍼스 부지를 기부했다. 1981년 양지 캠퍼스 조성에는 법인이사회 부이사장 이영수 목사의 역할이 컸다. 그는 미래 지향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가 대학에 대해 지방분산 정책을 편다는 것에 착안하여 부지를 물색하던 과정에서 현 양지 캠퍼스 부지의 주인이 당시 총신대학교 기획실장 박장하 장로와 알고 지내던 백화양조 강정중 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직접 군산으로 달려갔다. 이영수 목사는 시가 5억 원의 부지를 8천만 원을 깎아 4억 2천만 원에 구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강 사장을 설득해 학교에 5천만 원을 학교 건축비로 헌금하게 했다. 학교는 부지 안에 있는 1억 원이 넘는 관상수(정원 조성용 나무)도 무상으로 인수할 수 있었다. 결국 5억 원 상당의 225,329평의 땅을 3억 7천만 원(관상수 값을 제외하면 2억 7천만 원에 구입)에 구입했다. 일곱째, 수많은 동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신 것이다. 목회자와 선교사로 평신도 지도자로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 동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자랑스러운 총신을 세워오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린다. 2. 기억 이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를 회고하며 말씀드리고자 한다. 우리 대학의 이름이 왜 총신대학교가 되었는가를 살펴보면서 평양신학교 이후 오늘 총신대학교까지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한다. (1) 평양신학교(1901-1940) 평양신학교는 1901년에 개교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1940년에 폐교했다고 박용규 교수는 말한다. 1938년 9월 신사참배 문제로 개강을 연기하다가 1940년 폐교할 때까지 한국 장로교 목회자를 배출하는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로 한국 장로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한편, 한동수 교수는 공식적인 폐교는 1941년 3월 이사회 결의에 의한 교수회의 해체로 본다.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정체성은 역사적 칼빈주의, 즉 개혁신학이었다. (2) 후 평양신학교(1940-1950)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신학교가 개강을 연기하는 중 1938년 9월에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비극적인 총회는 신학교를 복구하기로 결정하고 1940년 4월에 채필근을 교장으로 신학교를 개교했다.이것을 ‘후(後) 평양신학교’라고 부른다. 총회 신학교육부 부장 조희염이 1940년 제29회 총회에 제출한 경과보고에 의하면, “평양신학교를 설립코자 인가 신청을 소화 14년(1939년) 10월 17일 평남도청에 제출하였던바 본년(1940년) 2월 9일에 조선 총독의 인가를 받아서 동 4월 11일에 개교식을 거행하였사오며”라고 했다.채필근은 진보주의자요 친일 인사였다. ‘후 평양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지 않은 친일 어용신학교였다. 심지어 채필근은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의 사택까지 가로챈 인물이었다. 1950년까지 존재하다 공산정권 아래 사라지고 말았다. (3) 조선신학교(1940-현재, 한신대학교) 1940년에 김재준을 중심으로 서울의 승동교회당에서 조선신학교가 시작되었다. 총독부의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조선신학교는 처음부터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할 수 없었다. 신학교 명칭마저 ‘조선신학원(朝鮮神學院)’에서 ‘조선신학원(朝鮮新學院)’으로 바꾸었다. 더 이상 조선신학원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아니었다.이 조선신학원이 오늘의 한신대학교이다. 1945년에 해방을 맞아 미군정이 시작되자 조선신학교는 미군정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았다. 송창근과 한경직은 전임교수로 조선신학교에서 가르쳤다. 조선신학교는 1946년 6월 12일 제1회 남부대회에서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받았다. 1947년 4월 12일 전문학교령에 의한 설립 인가받았다. 7월 12일에는 유지재단 인가와 정규대학 인가를 받아신학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대학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조선신학교 재학 중인 51인이 총회에 조선신학교의 신학 사상, 특별히 김재준의 신학 사상을 조사해 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했다.김재준은 문서설을 수용하고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노아 홍수와 바벨탑 기사의 역사성을 부인했다.총회 심사위원회에서 김재준의 신학 사상이 장로교 전통과 배치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준은 사과 성명서를 냈다. 그 후 51인에 조동진을 비롯한 10명이 가세하여 한국의 신학교육을 제대로 하기 위해 박형룡 박사 귀국 운동을 전개했다. (4) 고려신학교(1946-현, 고신대학교) 조선신학교의 51인 진정 사건에 앞서,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를 설립했으며 박윤선 목사를 교장 서리로 세웠다. 메이첸을 따르는 독립선교회 소속 선교사들과 메이첸이 세운 정통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교수진에 합류했다. 1947년에는 만주 봉천신학교에 가르치던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제1대 교장으로 취임했다.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한 후에는 조선신학교에 재학하던 51명 중 30명 정도가 고려신학교로 적을 옮겼다. 하지만 고려신학교는 총회의 인준을 받지 않았고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박형룡은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한 지 6개월 후 교장직을 사임했다.사임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박형룡은 고려신학교가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부만이 아니라 미국 남·북 장로교회 선교부와 호주장로교회 선교부와도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총회의 인준을 받아 전(全) 총회의 기도와 관심과 후원을 받아 전국교회의 학생들을 받아들여 목회자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 부산이 아니라 서울에서 신학교육을 해야 더 전국적으로 영향을 키우며 자유주의를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고려신학교의 입장과 달라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5) 장로회신학교(1948-1951) 총회 안에 보수적인 이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추진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948년 6월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조선신학교는 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총회가 마련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거부했다. 고려신학교는 총회의 인준을 받지 않았으며 인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제3의 신학교 설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48년 3월 15일 대전제일교회당에서 신학교 문제를 협의했으며, 1948년 5월 20일 창동교회에서 모여 신학교 설립을 결의했다. 이사장에 이정로 목사, 교장에 박형룡 박사를 세우기로 했으며, 6월 3일 서울 남산 성도교회를 임시교사로 개교했다. 우리는 총회 주도의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옛 평양장로회신학교 정신과 신학의 복구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박형룡 박사는 1948년 6월 9일 채플에서 열왕기상 6장 1-7절을 본문으로 ‘선지학교의 중건’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는데, 이때 나온 총신의 교훈인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는 다섯 가지 문구는 총신의 교훈이 되었다. 1949년 4월 19일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35회 총회(총회장 최재화)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6) 총회신학교(1951-1969) 1947년 51인 학생들의 진정 사건으로 시작된 김재준 교수의 신학 사상 문제는 1950년 4월에 열린 제36회 총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대립과 다툼으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어 1950년 9월 1일 속개하기로 하고 정회하였으나 6·25전쟁으로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제36회 총회가 속개되었다.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했으며, 총회가 직영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총회신학교라고 부르는 신학교를 대구에서 개교하기로 결의했다.여기서 총신대학교의 이름이 유래하게 된다. 1951년 9월 18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는 감부열(Archibald Campbell)을 교장으로 박형룡, 한경직, 권세열, 명신홍, 김치선을 교수로 대구 서문교회에서 개교했다. 1952년 6월 29일 대구에서 회집한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을 경기노회에 명하여 목사 면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의 죄목은 ‘성경의 축자 영감 부인’, ‘오경의 모세 저작 부인’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의 아성이었던 경기노회의 전필순, 유호준 등은 총회의 결의를 거부했다. 따라서 1953년 4월 24-29일 대구서문교회에서 회집된 제38회 총회(총회장 명신홍)는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 결의를 무시하고 성경유오설을 계속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목사직을 파면하고, 그 직분을 주 예수의 이름과 그의 직권으로 금하노라”라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조선신학교측은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 강당에 모였고 9개 노회 47명의 대표자가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를 결성했다. 한편 감부열 교장이 교장직을 사임하고 박형룡 박사가 교장에 취임했다. 1953년 9월 2일 오전 10시 30분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교장 취임식을 거행했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어 총회신학교는 1953년 10월 21일 서울 남산으로 학교를 옮겼다. 신학교 임시교사는 남산에 있는 기독교박물관(관장 김양선)이었다. 남산에서 수업받았기 때문에 총회신학교는 남산신학교로 널리 알려졌다. 총회신학교는 양극단인 조선신학교(기장)와 고려신학교(고려파)가 나간 상황에서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이 시대에 복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다졌다. 1959년에 WCC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통합측이 분열해 나갔다. 그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59년 9월 24일 대전중앙교회에서 개회한 44회 총회가 WCC에 관한 의견 충돌(경기노회 총대권: WCC 지지측과 반대측 총대 중 어느 측을 총대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진행이 어려워져서 총회 5일 차인 9월 28일 증경 총회장들에게 대책을 강구하여 오도록 오전 11시까지 정회하였고, 속개 후 증경총회장 일동의 다음의 보고를 채용하기로 가결하였다. “1. 현 총회의 정세 하에서는 회의를 원만히 진행하기 곤란하므로 동년 11월 25일 화요일까지 정회하고 그전까지 경기노회 총대는 개선하여 오도록 할 것(단, 계속 회의 장소는 새문안교회로 할 것) 2. 특별위원회를 원·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으로 구성하고 총회 당면한 문제를 수습하도록 하여주실 것.”이었다.총회는 이 보고를 받아 정회를 결의하고 정회하였는데, WCC 지지측 일부 총대들이 정회한 당일인 9월 28일 대전 미락식당에서 총회 속개 준비 회의를 마친 후 서울로 올라가 바로 다음 날 9월 29일에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총회 임원을 개선하였다. 이것은 정회 결의를 위반한 행동이었다. 이를 연동측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WCC를 반대하는 측은 증경 총회장단이 제안한 대로 11월 24일 오후 7시에 승동교회당에서 속개하여 새로운 임원을 개선하였다. 이를 승동측이라고 부른다. 연동측은 통합교단이 되었고 승동측은 합동교단이 되었다. 총신이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합동측이 증경 총회장단의 보고를 받아 정회를 결의한 시간을 지켜 총회를 속개했기 때문이다. 둘째, 교단이 나누어질 당시 문교부에 등록된 총회신학교 교장 대리는 합동측의 노진현 목사였기 때문이다. 셋째, 평양신학교 도서관의 책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신측이 1959년 11월 17일과 18일에 신학교를 기습하여 1만 권의 장서와 학교 집기류를 가져가려 하였으나 직원인 김정걸 집사가 목숨을 걸고 트럭 밑에 들어가 막아서는 헌신과 기숙사 학생들의 저지로 그들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한 직원의 변심으로 학적부를 장신측에 돈을 받고 넘긴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넷째, 평양신학교 때부터 내려오던 「신학지남」을 우리가 계속 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신측에서 발행하려고 했으나 발행인이 박형룡으로 등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다섯째,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정통성을 가진 교수였던 박형룡 박사가 계속 총신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신대학교는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총신의 연혁(沿革) 중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967년 5월 4일 총회신학교는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 인가를 받았다. 1967년 6월 12일 대학령에 준하는 각종학교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7)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1969-1975) 1969년 12월 24일 드디어 숙원이던 대학인가를 받았다. 인가받은 대학의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이었다. 이렇게 긴 이름을 가진 이유는 대학 인가를 받으려고 문교부에 서류를 제출할 때 교단 지도자들의 뜻을 따라 정한 것이었다. 신학대학은 총회가 직접 직영해야 한다는 총회의 집념이 총회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 총신대학(1975-1995) 대학 인가를 받음으로써 교수와 학생들의 기쁨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린 말 가운데 하나는 학교의 명칭이 너무 길다는 것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은 얼마나 긴 명칭인가? 이와 같은 긴 교명을 바꾸기로 한 것은 학교 인가를 받은 지 5개월이 경과한 후였다. 총신대학 이사회는 이 긴 이름을 줄여서 ‘총신대학’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교부에 교명 변경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것이 통과되어 1975년 12월 16일 학교명을 ‘총신대학’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다. (9) 총신대학교(1995-현재) 1995년에는 규모는 작으나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총신대학교’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학부의 학과, 신학대학원, 통합대학원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9년 대학인가 시 신학과 인가, 1973년 종교교육과(현, 기독교교육과), 종교음악과(현 교회음악과) 인가, 1978년 대학원 인가, 1980년 역사교육과, 영어교육과, 보육과(1984년 유아교육과로 변경) 인가, 이렇게 여러 학과를 인가받게 된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처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앞선 지도자들의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1980년 신학대학원 M.Div. 과정 인가, 1987년 대학원 박사 과정 인가, 1998년 아동학과 인가, 2001년 사회복지학과 인가, 2013년 중독상담학과 인가, 2012년 산업교육학부 계약학과의 인가를 받았다. 3. 도약 감사와 기억에 이어 우리는 미래를 향해 도약해야 한다. 미래를 위한 도약을 위해서 우리는 이 시대를 알아야 한다. 이 시대는 ‘VUCA 시대’라고 한다. ‘VUCA’는 Volatility(변동성), Uncertainty(불확실성), Complexity(복잡성), Ambiguity(모호성)의 머리글자를 딴 용어로, 군사 전략에서 시작되어 현재는 경영, 정책,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된다. 실제로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이제 ‘정답을 아는 인재’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하고 협업할 수 있는 인재’를 우선시한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총신의 교육은 이런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시대를 분별하며, 총신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목회와 선교, 평신도 지도자의 삶을 사는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 또한 방향을 잃은 교회와 사회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총신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건학 이념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도약할 수 있다. 우리 총신이 세워진 건학 이념을 모르거나 무시하면 우리는 존재할 이유를 잃어버린다. 우리의 건학 이념은 개혁신학이다. 개혁신학은 언약 신학에 기반해 성경의 절대 권위,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와 문화 변혁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우리의 사명은 개혁신학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지키는 것이다. 그 신학교육을 통해 개혁신학과 개혁신앙으로 무장된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건학 이념인 개혁신학이 생활화되어야 한다. 즉 개혁신학의 실천이다. 거기까지 나아가야 도약할 수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사람, 성경 말씀으로 통치하시기에 성경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을 만들 때 우리 대학은 도약할 수 있다. 또한 문화 변혁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 대학은 도약할 수 있다. 캠퍼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교수, 직원, 학생이 개혁신학, 개혁신앙, 개혁실천을 시행하고, 학생들은 졸업 후에 총신에서 배운 개혁신학, 개혁신앙, 개혁실천을 삶의 모든 현장에서 구현할 때, 우리 졸업생들이 가는 교회와 사회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는 놀라운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총신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총신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총신을 주권적으로 도약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바라시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전통은 계승하고 전통주의는 걸러내야 도약할 수 있다. 둘째, 전통은 계승하고 전통주의는 걸러내야 도약할 수 있다. 전통과 전통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역사 신학자인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Jan Pelikan, 1923-2006) 박사는 『전통을 옹호함』(The Vindication of Tradition)이란 책에서 이런 중요한 말을 했다. “전통은 죽은 자의 산 신앙이며, 전통주의는 산 자의 죽은 신앙이다”(Tradition is the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the dead faith of the living).전통은 성경적 문화를 말한다. 전통주의는 비성경적인 문화를 말한다. 전통은 그것을 만든 돌아가신 분들이 오늘의 성도를 살린다. 왜냐하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주의는 오늘의 성도들을 죽인다. 왜냐하면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총신에 전통이라고 믿고 주장하는 것이 비성경적인 전통주의는 아닌지, 이 시간 하나님께 여쭈어보아야 한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비성경적인 문화라고 말씀하시면 그 전통주의를 과감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총신이 살아날 수 있다. 우리 총신에는 과거에 받은 상처들로 인해서 잠재된 성경적이지 않은 전통주의가 남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신학적 정체성인 개혁신학과 신앙, 그리고 실천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 있다. 이런 부분에까지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인다면 총신대학교는 세상에 없는 대학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총신대학교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차별성이 될 것이다. 총신대학교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사 그 아들의 피를 흘려 구원하신 총신의 동료를 사랑하고 선배를 사랑하고 후배를 사랑한다면, 총신은 놀라운 도약을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비밀병기는 성경적 가치관과 성경적 삶이다. 성경 말씀이 우리 삶에 녹아들 때 비로소 총신은 어떤 시대에도, 어떤 상황에도, 어떤 도전에도 도약하는 총신이 될 것이다. 총신의 도약을 위해 전통주의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나면 경건과 학문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셋째, 경건과 학문을 균형 있게 갖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해야 도약할 수 있다. 경건의 바탕이 없는 학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학문일 수 없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가장 높이 들고 나아가는 인재를 양성해야 총신대학교는 도약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1880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설립하며, 모든 학문과 삶의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신념을 교육의 기초에 두었다. 그는 지식의 축적만으로는 참된 교육이 완성될 수 없다고 보았다. 교육은 인간의 지성을 연마하는 과정에 머무르지 않고, 의지와 감정, 신앙을 아우르는 전인적 성숙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이퍼는 이를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며, 각 영역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돕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학은 직업인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세계를 섬길 수 있는 전인적 인격과 공적 책임을 지닌 시민을 길러내는 장이었다.이것이 다른 대학과 차별화된 총신대학교의 비밀병기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면서도 학문적인 탁월함을 가진 인재가 되도록 도와야 한다. 바울 사도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그는 경건의 능력과 더불어 학문의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성경을 13권이나 기록하며, 국제적인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경건과 학문의 균형을 갖춘 리더는 글로벌 리더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역량 있는 리더가 될 수 있다. 총신대학교의 학부와 신학대학원과 통합대학원(일반대학원, 목회신학전문대학원, 선교대학원, 교육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 상담대학원, 교회음악대학원, 통일개발대학원)에 들어오는 학생마다 경건과 학문을 겸비한 인재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을 더 넓고 깊게 감당하게 될 것이다. 경건과 학문을 겸비한 인재들은 자기 소명의 자리로 나아가 자신을 던져야 한다. 넷째, 소명의 자리로 나아가 자신을 던지는 인재들이 있을 때 도약할 수 있다. 칼빈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설립 목적은 교회의 목회자(pastors) 양성과 사회의 평신도 지도자(civil servants)를 세우는 것이었다. 또한 국제적 개혁신학의 센터를 세워 유럽 전체에 개혁신학을 확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사실 이 아카데미의 이념은 이미 1541년의 교회령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이 교회령에 의하면,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언어와 인문교육을 받아야만 목회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 목적을 위해서 대학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는 기본적으로 라틴어,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사학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제네바 아카데미를 살펴볼 때, 칼빈이 신학 공부에 있어서 인문학적 훈련을 매우 중요시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는 초·중등 과정으로서의 스콜라 프리바타(schola privata)와 고등 과정인 스콜라 푸블리카(schola publica)로 조직되어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한 후 유럽 전체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은 통나무를 보내주십시오. 우리는 불붙는 장작을 만들어 돌려보내겠습니다!”그리하여 이 제네바 아카데미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같은 많은 기독교 지성인들이 찾아와서 배우고, 자국으로 돌아가서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였다. 칼빈의 사상과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어 폴란드, 헝가리까지 전파되었고, 남서 독일에도 개혁교회가 확대되었다. 그의 약속대로 제네바 아카데미 출신은 유럽을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을 붙이는 역할을 감당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 1514-1572),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의 공동 저자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Kaspar Olevianus, 1536-1587),칼빈주의 5대 교리(TULIP)를 확립한 도르트 총회의 총회장 요하네스 보거만(Johannes Bogerman, 1576–1637)이 제네바 아카데미 출신 목회자이다. 한편, 평신도 지도자로는 외교관이요 학자이며 옥스퍼드 대학교의 보들레이안 도서관을 세운 토마스 보들리(Thomas Bodley, 1545-1613)등이 있다. 총신대학교가 이렇게 시대를 바꾸는 인재들이 자라나며 마침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부흥시키고 대한민국 사회와 지구촌 사회를 변혁시키는 열매가 나타나기를 개교 125주년에 기원한다. 다섯째, 신학자인 목회자, 목회자인 신학자를 키워내야 도약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자신을 목회자로만 또는 신학자로만 규정하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지만, 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자적인 목회자(scholarly pastor), 목회자적인 학자(the pastoral scholar)의 예가 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많은 청교도들, 에드워드, 스펄전, 로이드 존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사랑한 목회자였으며 탁월한 신학자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견고한 신학이 목회 사역의 실천을 방해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목회 사역의 실천이 신학에 대한 이해와 감사를 더욱 깊게 하고 높여 주는 것과 같다. 우리 시대 목사요 신학자이며, 신학자요 목사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베들레헴교회를 담임하는 존 파이퍼와 트리니티 신학교의 도널드 A. 카슨 교수이다. 파이퍼 목사는 신학적으로 잘 준비된 목사의 모델이 되어왔다. 카슨 교수는 목회적인 관심이 많은 학자로 모범이 되어 왔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고 말한다. 또한 목사와 교사는 잘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한다(딤전 3:2)고 말한다. 그들은 좋은 교사가 되어야만 한다. 목사가 잘 가르치는 효과적인 교사가 된다면, 그는 교회에 선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일은 성경을 잘 살피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여, 그것을 자기 성도들에게 이해할 수 있고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 목사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 D. A. 카슨은 여러 목사와 교수를 소개하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로, 공식적인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적 호기심과 엄밀함, 집중력과 인내력, 그리고 고독한 연구와 저술의 재능인데, 이러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둘째로, 이러한 재능 중 일부는 계발되고 함양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이러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모든 사람이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또 도달해야 한다는 듯이 임의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학자들은 결코 탁월한 목회적 은사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고, 어떤 목회자들은 결코 은사 있는 학자로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균형은 필요하다. 목사는 학자로서의 소양을 계발해야 하고 학자는 목사의 소양을 계발해야 한다. 목회자들에게는 지성적 삶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임할 것을 촉구하고, 학자들에게는 교회의 삶에 더욱 깊이 참여할 것을 도전하면서 데이비드 매티스(David Mathis)는 다음의 기도로 마무리한다. “우리의 모든 사려 깊은 목양과 모든 목회적 학문이 예수님에 관한 복음의 메시지가 우리 안에서와 우리 백성들 안에서 풍성히 거하게 하는(골 3:16) 위대한 목적을 위한 것이 되게 하소서. 영원토록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그분의 인격과 사역에 의해 점점 더 형성되고, 흠뻑 젖어가며, 변화되어 가게 하소서.” 총신의 근간은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이다. 우리의 학생들이 학자적인 소양을 충분히 갖추도록 앞서 살펴본 제네바 아카데미처럼 경건과 학문의 균형을 이루며, 학문에 있어서는 영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고 인문학의 토대가 놓여야 한다. 총신대학교 신학과가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신학대학원에 가서 더 깊은 신학을 배워갈 수 있고, 평생에 학자적인 소양을 가지고 목회할 수 있다. 또한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학자들은 현장 목회를 깊이 관찰하고, 참여하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진단해야 한다.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더욱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 성경의 기준에 근거해서 교단 교회를 관찰하고 정밀한 진단을 하여 개혁신학에 기반한 건강한 교회들을 세우는데, 더 깊이 헌신해야 한다. 1934년 일어났던 한국교회의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도전 앞에 박형룡 박사는 바로 그다음 해에 답을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1935년에 나온 『기독교 근대 신학 난제 선평』이다. 무려 847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에서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등 그 당시 신학적 이슈에 대한 개혁신학적 답을 내놓았고, 그것이 한국교회를 살린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교회는 1934년 이후부터 서서히 무너졌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내일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위해 이런 구조를 가져야 한다. ‘교회가 묻고 총신이 답하다.’ 또한 총신의 도약은 한국의 개혁신학의 세계화를 통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전 세계에서 개혁신학을 가진 신학교 중에 가장 역동적인 총신은, 우리의 개혁신학을 전 세계에 펼쳐감으로써 세계 개혁신학의 진영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세계교회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그 왕의 말씀의 권위를 최고로 높이며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 강력하게 확장되는 일에 총신이 헌신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나가는 말 총신의 125년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감사, 기억 도약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내용을 요약하고 나가고자 한다. 총신의 역사 125년을 회고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일이 참 많았다. 첫째, 개혁신학을 견지한 선교사가 평양신학교를 세운 것이 크게 감사할 일이다.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에 물든 선교사가 세웠다면 한국교회는 이렇게 부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부흥 운동을 경험한 선교사들이 평양신학교를 세운 것이 감사할 일이다. 부흥의 DNA를 경험한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 한국교회 부흥 운동에 큰 동인이 되었다. 셋째, 겨레를 사랑하는 민족 지도자를 배출한 것이 감사할 일이다. 어떤 대학교, 어떤 신학교가 3·1운동의 민족 대표에 다섯 명의 동문이 들어갔는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신학교와 겨레가 분리되지 않은 것이었다. 넷째,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에서 한국교회를 지켜내게 하신 것이 감사할 일이다. 여기에 마포삼열 박사와 박형룡 박사의 공로가 컸다. 다섯째,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를 배출하게 하신 것이 감사할 일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른 목사가 평양신학교 출신들이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 평양신학교와 총신대학교를 세우는 헌신자들을 일으키신 것이 감사할 일이다. 맥코믹 여사로부터 명신홍 박사와 백남조 장로 그리고 무명의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고결한 헌신은 오늘의 총신을 세웠다. 일곱째, 수많은 동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게 하신 것이다. 총신이 역사 125년을 회고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학교의 변천이 있다. 1. 「평양신학교」(1901-1940년) 한국교회 목회자 양성으로 한국교회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하였다. 2. 「후 평양신학교」(1940-1950년) 아픈 마음으로 기억해야 한다. 신사참배를 찬동한 사람들이 세운 신학교이다.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계승하지 않은 친일 어용신학교였다. 3.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1940-현재)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가르치는 신학교이다. 1947년 4월 51인의 조선신학교 재학생이 김재준 박사의 신학 사상을 조사해 달라는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하면서 문제가 확대되어 1953년 38회 총회에서 ‘성경의 축자 영감 부인’, ‘오경의 모세 저작 부인’ 등으로 목사직을 파면하자, 그해 기독교장로회 총회를 결성하여 분열하여 나갔다. 4.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1946-현재)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한상동 목사 등이 세운 신학교이다. 박형룡 박사가 초대 교장이 되었다가 6개월 만에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온 이유는 첫째, 고려신학교가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부만이 아니라, 미국 남·북 장로교회 선교부,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와도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총회의 인준을 받아서 전 장로교회의 기도, 관심 그리고 후원을 받아야 생각했다. 셋째, 부산이 아니라, 서울에서 신학교육을 해야 전국적인 영향력을 키우며 자유주의 신학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5. 「장로회신학교」(1948-1951년) 조선신학교는 신학적 문제가 있었고, 고려신학교는 총회 인준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를 이어가는 신학교를 세우기 위해서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1948년 6월 9일 채플에서 박형룡 박사가 열왕기상 6장 1-7절을 본문으로 ‘선지학교의 중건’이라는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의 내용에 총신의 교훈이 있다. 1949년 35회 총회에서 총회직영신학교가 되었다. 6. 「총회신학교」(1951-1969) 조신신학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장로회신학교까지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총회신학교라고 명칭을 정한 이유는 총회가 직영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951년 9월 18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개교했다. 그런데 1959년 WCC의 신학적 문제로 WCC를 지지하는 통합측이 분열하여 나가서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세웠고, 우리는 개혁신학을 지키면서 여전히 총회가 직영한다는 의미에서 총회신학교라고 불렀다. 7.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1969-1975) 1969년 12월 24일 대학 인가를 받았다. 대학의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이었다. 신학대학은 총회가 직접 직영해야 한다는 총회의 집념이 이렇게 긴 이름을 짓게 한 것이다. 8. 「총신대학」(1975-1995) 대학 인가를 받아서 기뻤지만, 학교명이 너무 길다는 학생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사회가 이름을 줄여서 학교명을 「총신대학」으로 바꾸었다. 9. 「총신대학교」(1995-현재) 1995년 규모는 크지 않지만,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총신대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총신은 미래를 향해 도약해야 한다. 첫째, 건학 이념을 기억하고 실천함으로써 도약해야 한다. 개혁신학을 배우고, 개혁신앙으로 믿고, 개혁실천으로 우리의 신학을 실현할 때 총신은 도약할 수 있다. 둘째, 전통은 계승하고 전통주의는 걸러내야 도약할 수 있다. 전통은 성경적인 문화이며, 전통주의는 비성경적인 문화이다. 셋째, 경건과 학문을 균형 있게 갖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해야 도약할 수 있다. 경건의 바탕이 없는 학문은 생명력이 없고, 학문의 역량이 부족한 인물은 확장성이 부족하다. 넷째, 소명의 자리로 나아가 자신을 던지는 인재들이 있을 때 도약할 수 있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생애를 던지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 다섯째, 신학자인 목회자, 목회자인 신학자를 키워내야 도약할 수 있다. 총신은 신학이 중심이다.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다. 신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바른 목회를 할 수 없다. 이제 글을 마치고 나가면서 총신을 오늘까지 인도하시고 앞으로도 인도하실 하나님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기원한다. 참고문헌 1. 국내 단행본 100년사 개정위원회. 『총신대학교 100년사』, 개정판.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23. 100년사 편찬위원회. 『총신대학교 100년사』, 제3권(자료편).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3. 김남식. 『해원 정규오 목사』. 서울: 새한기획출판부, 2007. 김남식 편저. 『이영수 목사, 그 삶과 꿈』.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2. 김선욱·박신순. 『마포삼열』. 서울: 숭실대학교출판국, 2017. 김요섭. 『존 녹스』. 서울: 익투스, 2019. 라은성. 『이것이 신앙고백이다: 돌드레히트 법규』. 서울: 페텔, 2023. 마키다 요시카즈. 『도르트총회, 기독교 신앙을 정의하다』. 이종전 역. 인천: 개혁파신학연구소, 2019.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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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nema, Donald, Christian Moser, Erik A. de Boer, and Herman J. Selderhuis, eds. The Convening of the Synod of Dordt.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23. Abstract 125 Years of Chongshin University: Gratitude, Memory, and Leap Forward Sung-kyu Park (President, Chongshin University) This study reviews the 125-year history of Chongshin University(founded 1901) under three themes: gratitude, memory, and a leap forward. The section on 「GRATITUDE」 identifies seven reasons to thank God. Missionaries grounded in Reformed theology founded the Pyongyang Theological Seminary, and their revival experiences shaped Korean church growth. The seminary produced national leaders central to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1919), protected the Korean church from liberal and neo-orthodox theology through figures such as Samuel A. Moffett and Hyung-nong Park, and raised up martyrs who refused Shinto shrine worship. God also raised devoted benefactors who sacrificially supported the institution, and countless alumni have expanded the Kingdom of God worldwide. The section on 「MEMORY」 traces nine institutional stages from the Pyongyang Theological Seminary (1901–1940) to the present Chongshin University (1948–present), demonstrating that Chongshin stands in legitimate theological continuity with the Pyongyang Seminary's Reformed heritage. The section on 「LEAP FORWARD」 presents five imperatives: practicing the founding ideology of Reformed theology; distinguishing living biblical tradition from dead traditionalism; producing leaders who balance piety and scholarship; cultivating those willing to lay down their lives for their calling, following Geneva Academy graduates such as John Knox, Johannes Bogerman, and Thomas Bodley; and training pastor-scholars and scholar-pastors in the tradition of Calvin, the Puritans, John Piper, and D. A. Carson. Chongshin University's 125-year history is a testament to God's sovereign grace, calling the institution forward in Reformed faithfulness, sacrificial heritage, and transformative leadership for the glory of God. Key Words: Chongshin University, Pyongyang Theological Seminary, Reformed Theology(Reformed Faith, Reformed Practice), Tradition and Traditionalism, Piety and Scholarship, The Pastor as Scholar, The Scholar as Pastor (각주는 생략되었습니다. 신학지남 2026년 여름호, 제93권 2집. 통권 제367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김병중(Th.D) 07-0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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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24】 삶을 위한 지혜로운 작은 조언들
2013년에 출간한 『문요한의 마음청진기』의 개정판인 『내가 커지면 문제는 작아진다』는 〈에너지 플러스〉 중에서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94편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화마가 휩쓸어 재만 남은 산야에도 다시 수목이 자라고 기름으로 뒤덮인 바다도 스스로 정화되듯, 어떤 상황에서도 힘껏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쉰다고 말하며, 진정한 치유와 성장이란 바로 자신 안의 생명력과 만나는 것이라 정의한다. 독자 개개인이 심리 상담소에서 마음 상태를 진단받아 치유와 성장으로 나아가도록 이 책은 총 5세션으로 구성되었다. 자신의 진짜 마음을 바로 아는 단계인 “마음 뒤의 마음을 보라”, 삶의 어려움에도 정신적 맷집을 키우라는 “모든 생명은 힘껏 살아간다”, 문제해결력을 키우기 위한 “내가 커지면 문제는 작아진다”, 모든 일에 도전하라는 내용의 “실험하라, 인생은 당신 편이다”, 더불어 살기를 강조하는 “그래도 함께 가라”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원고지 7매 내외의 짧고 압축적인 글임에도 정신의학 및 심리학적 설명이 충분히 뒷받침되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진단할 수 있도록 했다. 작가는 감성 어린 글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해제하고 자신과 대면하게 하는 자기치유적인 메시지도 더했다. 이 책의 제목인 『내가 커지면 문제는 작아진다』도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안의 치유본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착안되었다. 심리적 고통이 클 때는 그 치유본능을 못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순간에도 자기 안에 생명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믿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또한 일러스트레이터 김인하의 감각적인 50컷의 그림도 빛을 발한다. 각 장의 말미에서는 ‘Dr. 문의 심리솔루션’을 통해 정신적 맷집을 키우고 문제를 당당하게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멘탈 트레이닝 비법도 전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순간순간마다 마치 실제 심리 상담소에서 주치의와 마주하고 솔루션을 제시받는 듯한 느낌을 생생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점점 자기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대. 우리는 문요한이 전하는 94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결국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 자신이 만난 문제를 대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고 인생의 고민 앞에서 한 발짝 내딛게 하는 힘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멘탈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류의 책을 정기적으로 읽을 필요를 느낀다. 살면서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한번 정리하는 기회를 가졌다. 고독은 삶을 채우는 시간 돌아보면 젊은 날들은 참 외로웠습니다. 외로워서 누군가를 찾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있고 싶어졌고, 혼자 있으면 다시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반복재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웠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서툴렀지만 사실은 자신을 마주하고 관계하는 것이 더 서툴렀던 때였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과 외로움을 같은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혼자 있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성이 부족하고 친구가 없는 사람으로 비춰질까 봐 식당에서 혼자 밥을(p. 28) 먹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렇다 보니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꾸 사람들 속으로만 파고들게 됩니다. 영어에는 혼자 있는 것과 관련된 두 단어가 있습니다. ‘고독solitude’ 과 ’외로움lonelines’ 입니다. 물론 둘 다 ‘홀로 있는’ 상황은 같습니다. 하지만 고독은 스스로 관계에서 물러나 자신을 벗 삼은 능동적인 홀로 있음입니다. 그에 비해 외로움은 타인과 단절되어 누군가를 갈구하는 공허한 감정입니다. 고독이 내적 충만이라면 외로움은 내적 공허인 셈이지요. 고독은 외로움도 아니고 도피도 아닙니다. 고독은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이며 삶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어쩔 수 없이 홀로 되면 외로워지지만 스스로 홀로 있음을 선택하면 삶이 충만해 집니다. 마치 나비가 되기 위해 스스로 실을 감아 고치가 되는 번데기처럼 자기실현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고독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창조와 자기완성은 고독의 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낯설고 깜깜하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은 이내 당신을 위로하고 당신을 채워줄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이 외롭게 시들어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에게는 고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홀로 있음을 선택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중에서(p. 29). 권태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꼭 스트레스가 많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트레스가 별로 없어서 오는 분도 있습니다. 이들은 큰 걱정이나 스트레스가 없는 반면, 삶이 너무 따분하고 멈춰 버린 느낌에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다고 호소합니다.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이들도 삶이 제자리에 고이면서 정체감이나 권태감에 휩싸인 것입니다. 이러한 권태나 정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탈이라고 하면 먼저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탈선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중년의 권태나 정체감을 중독이나 외도처럼 파괴적인 일탈로 해(p. 46)결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탈이란 꼭 부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들이 하나의 일탈입니다. 꽃구경을 가고 공연을 보고 색다른 음식을 먹어보는 등 삶에 새로운 자극을 선사하는 것 역시 모두 일탈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붓을 잡고, 카메라를 들고, 춤을 추고, 글을 쓰는 등 자신을 노래하거나 표현하는 창조적 활동은 생산적 일탈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산적인 일탈과 파괴적인 일탈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유목민의 시대인 21세기에는 파괴적인 일탈만큼 무일탈 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의 시대에 절대적인 안전지대란 있을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대니얼 레빈슨은 삶을 ‘정착과 이주의 연속’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삶이란 6~7년의 안정기와 4~5년의 전환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권태는 사실 정착 기간의 종료를 알리는 알람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입니다. 물이 웅덩이를 만나면 썩어가듯이 삶도 틀 안에 갇히면 죽어갑니다. 당신에게 권태감이 찾아왔나요? 그렇다면 삶을 다시 흐르게 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신호가 찾아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25살에 이미 죽어버리는데 장례식은 75살에 치른다." 벤자민 프랭클린(p. 47). 누군가 태클을 걸어올 때 교육학자인 몬테소리는 이탈리아 최초 여의사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최초라는 것은 영광만큼이나 고난 또한 몇 배 크게 마련입니다. 몬테소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였기 때문에 겪었던 차별과 최초였기 때문에 뚫고 나가야 했던 악습은 너무나 거대했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해부학 수업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남자 동료들과 시체를 함께 해부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깜깜한 저녁에 악취가 풍기는 실습실에서 혼자 시체에 칼을 대어야 했습니다. 차별과 비난은 그녀가 교육학자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계속되었습 니다. 보수적인 교육학자들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온갖 비(p. 86)판으로 그녀를 물어뜯으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몬테소리는 비평가들과 싸우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걸으며 영향력을 점점 넓혀갔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존경을 보냈지만 한편으로는 왜 당당하게 맞서 싸우지 않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그녀에게 왜 차별이나 편견에 대해 싸우지 않느냐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개 한 마리가 내 발꿈치를 물려고 한다면, 그때 내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개를 발로 차내든 아니면 더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는 더 높이 올라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 단지 무리에서 벗어났거나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가만히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일일이 싸우기보다 그들이 물어뜯을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삶의 방향이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들은 타인들의 왜곡된 평가나 시선에 의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야할 곳이 있기에 아무 곳에서나 힘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 더 높이 올라 갑니다. 합당한 이유 없이 당신에게 태클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나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 높이 올라갈 것인가요, 아니면 사다리에서 내려와 싸울 것인가요?(p. 87). 세상은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 혹시 레나 마리아라는 여성을 아시나요? 그녀는 스웨덴 태생의 가스펠 가수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은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레나 마리아는 부모의 도움으로 누구보다 활발한 활동을 하며 장애를 극복해 왔습니다. 요리, 운전, 자수, 피아노 등은 물론 세계 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 나가 여러 개의 금메달을 석권하기도 하였습니다. 절대적인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녀는 온몸으로 부딪혀 뛰어넘어온 것입니다. 그녀는 웃으면서 자신의 장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저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인생에서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p. 94)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람이란 누구든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험하다 보니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피해의식은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과 피해를 줄 것이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의식상태도 있습니다. 일명 '역 피해의식'입니다. 이는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이 결국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좋은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이나 그 모든 경험들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을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레나 마리아처럼 결코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는 마음가짐입니다. 맹자는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심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행하는 일마다 엉망으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고통을 참고 견디게 하여, 이전에는 해내지 못 한 일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는 역경이나 시련을 자신이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바라보고, 그 성장통을 피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에는 늘 예상치 못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 고통에 가장 좋은 치료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의미 찾기'입니다. 지금 겪는 이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의미를 주는 경험이라고 느낄 때, 우리는 고통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고통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고통스러운가요? 그렇다면 그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p. 95). 왜 하는지를 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1994년 11월 5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적인 헤비급 타이틀 매치가 펼쳐졌습니다. 마흔다섯의 늙은 도전자 조지 포먼과 스물아홉의 젊은 챔피언 마이클 무어가 맞붙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어의 승리를 낙관했습니다. 그러나 포먼은 무어에게 끌려가던 경기를 뒤집고 10회에 극적인 KO승을 거두었습니다. 권투 역사상 최고령 챔피언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포먼으로 하여금 할아버지 복서라는 조롱을 들으면서도 링에 오르게 했을까요? 어떻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 경기가 더욱 감동적인 이유는 그가 20년 전 아프리카 킨샤사에서 알리에게 당했던 패배를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p. 99). 시간은 거슬러 1971년으로 갑니다. 당시 포먼은 40연의 무패가도를 달리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헤비급 챔피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하다드 알리는 서른두 살의 늙은 도전자였죠. 사람들은 모두 포면의 승리를 점쳤습니다. 그러나 알리는 불리하게 진행되던 경기를 뒤집어 8회에 포먼을 눕히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이날 경기는 알리에게 킨샤사의 기적이 되었고, 포먼에게는 ‘킨샤사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포먼은 그날의 패배 이후 완전히 무너져서 결국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권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후 포먼은 고향에서 목사로 활동했습니다. 10년의 세월 동안 목회와 청소년 선도를 위해 애쓰던 포먼은 서른여덟 살이 되자 다시 링 위에 올라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빈민가의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어줄 청소년 센터의 운영자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청소년들을 위해 다시 글러브를 꼈습니다. 150킬로그램이라는 육중한 몸과 고령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이끌고 다시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재기를 준비하면서 뒤늦게 자신이 알리에게 진 진짜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알리는 싸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 펀치를 견딜 수 있었던 거야. 목적이 있으면 고통을 견딜 수 있어. 하지만 난 그때 목적이 없었던 거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링에 복귀했지만, 포먼은 젊은 챔피언 시절에는 없었던 사명과 목적의식으로 강하게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챔피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자원이었죠(p. 100).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다시 일어나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잘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포먼은 패배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위안을 줍니다. “패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패배는 인생에서 단 하루 벌어진 일일 뿐이므로 거기에 압도돼서는 안 된다. 내가 마음속으로 진정 원하는 바를 추구할 때에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p. 101). ~때문에, ~에도 불구하고, ~덕분에 정신과의사를 하면서 흔히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날마다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정말 힘들지 않나요?" 물론 힘든 이야기를 계속 듣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말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똑같이 힘든 이야기만 듣는다면 정말 스트레스가 크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찾아 오는 사람들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에 힘든 것 이상의 보람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처음 상담을 받으러 올 때에 사람들은 '~때문에'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부모 때문에, 어려운 환경 때문에, 지난 실패 때문에, 실연 때문에... 나의 인생이 불행해졌다고 느낍니다. 또한 바쁘기 때문에, 능력(p. 116)이 부족하기 때문에, 용기가 없기 때문에, 예전에도 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사나 합리화는 가장 쉽게 자신을 방어하도록 도와주지만 이를 통한 위안은 결국 문제나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자라나면 '~때문에'라는 마음이 줄어들고 ‘~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이 늘어납니다. 비록 과거에 상처나 실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다시 시작해 보겠다거나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불편함과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더욱 자라나면 ‘~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과 함께 ‘~덕분에’ 라는 마음이 늘어나게 됩니다. 과거의 가난이나 어려운 환경, 지난 실패와 고난 덕분에 자신이 겸손해질 수 있었거나 타인의 고통에 눈뜨게 되었거나 삶이 더욱 단단해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상처가 보석으로 바뀌는 놀라운 마음의 연금술이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사람을 정말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탁월한 재능이 아니라 바로 '~에도 불구하고'와 ‘~덕분에’ 같은 정신이 아닐까요?(p. 117). 열등감은 탁월함을 끌어내는 디딤돌 연예인이나 미스코리아인 사람들은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로 예쁜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기에 열등감이 더 크면 컸지 더 적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열등감을 느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만 사실 열등감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주위에서 보면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정작 자신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마련입니다. 체형과 외모, 학력, 집안, 운동 능력, 화술, 인간 관계, 성격, 재산 등 어떤 부분에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이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사람이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자신에게 없는 것(p. 190)을 욕망하기 때문에 이러한 약점은 열등감이라는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단점으로 인해 놀림을 받거나 수치심을 느낀 일이 있었다면 그 열등감은 보편적 수준을 넘어 병적으로 확대 됩니다. 즉, 자신이 한 부분에 부족함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근본적인 결함이 있고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 부분을 알면 자신을 무시하거나 싫어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열등감 자체가 꼭 삶에 해로운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보편적인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의 강점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병적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을 치명적인 것으로 느끼고, 어떻게든 단점을 감추거나 커버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느라 정작 자신이 원하는 삶이나 강점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걸림돌로 느껴져서 늘 거짓말을 하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불안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탁월함을 끌어내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허영만 화백이 그렇습니다. 그는 ‘고졸’이라는 열등감이 있었지만 이를 감추기보다는 '나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라는 구절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늘 공부하는 만화가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학력이 짧으니 실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메모광이 되었고 발로(p. 191) 뛰는 작가가 되어 이 시대 최고의 만화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열등감만이 탁월함의 밑바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탁일함의 밑바탕에는 크고 작은 열등감이 내재되어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진 열등감이나 부족함이란, 어떻게 보면 당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아니라 당신 안의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p. 192). 사람의 그릇 크기는 달라질 수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이 실제로 사용하는 근력은 잠재능력의 50~60퍼센트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은 잠재능력은 위기의 순간을 위해 비축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동차를 들어 올렸다거나 노인이 집에 불이 나자 패물이 든 장롱을 메고 뛰쳐나왔다는 식의 이야기는 다소 과장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1907년 르완다로 조사를 나갔던 독일의 한 인류학자는 투치족이라는 부족의 놀라운 점프력을 목격했습니다. 어떤 부족원은 자신의 키보다 더 높은 1.9미터 정도를 너무 쉽게 뛰어넘었습니다. 1912년도에 공 인된 남자 높이뛰기 세계신기록이 2미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프(p. 193)리카 오지의 원주민이 어느 정도의 실력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투치족은 점프력이 대단했을까요? 그 이유는 투치족의 전통에 있었습니다. 투치족 사람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 자신의 키만큼 높이 뛰어야 성인식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계속 높이뛰기를 연습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그릇 크기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그릇보다 더 많은 것을 담으려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이 말은 실패를 두려워하고 도전을 회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합리화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크기가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과연 나라는 사람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일까요? 사람이란 그 크기가 무한정 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그릇의 크기가 고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신체의 성장은 성장판이 닫히면 끝나지만 삶의 성장은 더 나아지려는 마음이 있는 한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보이는 모습만을 자신의 전부인 양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근력의 50~60퍼센트만을 발휘해 본 사람들이 그것이 신체적 한계라고 믿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올림픽마다 인간의 한계라고 일컬어졌던 기록이 계속 경신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도전과 노(p. 194)력, 방법적인 개선이 반복되면 인간의 능력 이란 계속 향상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자신을 크기가 고정된 그릇이라고 생각하면 그 크기 이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커질 수 있는 그릇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점점 확장할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보시나요?(p. 195). 개라지 테크놀로지 벤처스의 대표이자 신생 기업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가이 가와사키는 창업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준비물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는 창업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자본이나 기술 혹은 인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가와사키는 언제나 “가장 먼저 의미를 만들라”고 이야기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창업이 그저 돈이나 성공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일에 깊은 의미를 가진 창업가는 설사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일에 도전했다는 긍지로 다시 도전할 수 있지만, 단순히 돈을 벌려고 창업을 한 사람들은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도전하기(p. 213) 어려운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요. 그 질문을 들으면 나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설사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도전하는 그 일이 도전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에게 만족감을 주거나 의미 있는 일인가요? 그렇다면 시작하세요." 도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도전의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p. 214). 상담을 하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아 깊은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실망감과 좌절감을 훨씬 크게 느낍니다. 그러나 불확실함이 없는 믿음이란 맹신에 가까우며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여 삶을 위태롭게 합니다. 건강한 믿음이란 자신이 계획한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 때로는 혼돈과 불확실함 때문에 흔들리고 멈춰 서지만 결국 그 길의 끝에 자신이 원하는 삶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마음에 가깝습니다(p. 237). 예전에는 꼬이는 일도 많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로 인해서 인생이 참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생이 내 편이 아니라고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마흔이 되면서 인생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 했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지려면 때가 있고 지금까지 겪은 모든 경험과 방황들이 결국 내가 가야할 곳으로 나를 안내하는 이정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끌고 간다기보다 인생이 나를 필요한 곳으로 이끌어준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내가 인생에 선의를 가지고 대하면 인생 역시 나를 선의로 대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뜻대로 되지 않거나 누군가와의 관계가 삐걱거리게 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뜻대로 되는 일이든 아니든, 좋은 사람이든 좋지 않은 사람이든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경험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고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나를 이끌어줄 것이다. 그 믿음이 생기면서 성난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심연의 불안도 잠잠해졌고 인생을 끌고 가려고 버둥버둥거렸던 초조함도 많이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믿습니다. 나의 물음과 두드림에 꼭 응답이 있으리라는 것을, 내가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른다면 결국 나는 바다에 가 닿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당신도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른다면 바다에 가 닿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 섞이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p. 238).김병중(Th.D) 07-14 16:57 -
【북토크423】 장례에 대해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 시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켜본 적은? 늙고 병든 몸이 요양원과 병원을 거쳐 시체가 되고, 영안실, 장례식장, 무덤과 화장터에 이르러 해체되는 과정은 모두 일상과 유리되어 있다. 다들 죽음에 관한 것은 멀리하지만, 젊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애쓴다. 운동과 식이요법, 기능성 식품을 부지런히 챙기는 것은 죽음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함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무방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쉽다. 그때가 되면 내가 원하는 나의 죽음은 어떤 형태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추모해야 할지 충분히 숙고할 새도 없이, 장례업계의 표준화된 프로세스를 따라가기에도 벅찬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죽음을 회피하는 것은 삶을 주체적으로 마무리할 권한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죽음을 직시할 것을 권하며, 저자는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신랄한 어조로 독자를 시체들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저자 케이틀린 도티는 20대에 여성 장의사로서 장례업계에 발을 들였다. 이 책에는 화장터에서 일하며 죽음과 함께한 경험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시체 한 구 한 구에 얽힌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함께, 시신을 운반하고 화장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와 함께 재로 가득한 화장장을 거니는 듯한 간접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문장 곳곳에 위트가 가득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유는 결코 가볍지 않다. 시카고 대학에서 중세사를 전공한 저자는 역사와 종교,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죽음을 다양한 맥락에서 사유한다. 백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장의사에게 물어보세요」의 운영자이기도 한 그는 유쾌하고도 깊이 있는 글쓰기로,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전한다. 매순간, 죽음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어떤 시신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시체 박스 확인부터 씻기고 화장하고 분쇄에 이르는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담아냈다. 유쾌한 태도 속에서도 진지함을 놓지 않는 내용의 깊이가 '더 나은 죽음'에 대한 고민을 이끈다. 현재의 죽음 의례는 과연 최선의 것인가?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런 고민들을 하며 읽는다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흥미로게 읽었다. 우리는 애써 죽음을 외면하고 있으나 피할 수는 없다. 내 가족이, 언젠가 내가 맞이할 죽음 이후 장례에 대해 많은 생각과 변화, 준비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미국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인 남북전쟁이 터진다. 1862년 9월 17일의 앤티텀 전투가 있었던 날은 남북전쟁(과 미국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날이라는 영예 아닌 영예를 지닌 하루다. 그날 하루에만 전장에서 2만 3000명이 죽었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그들의 시신은 마찬가지로 퉁퉁 불은 말과 노새 사체 틈에서 잔뜩 부어올랐다. 나흘 후 펜실베이니아 137연대가 와서, 연대장이 병사들에게 시체를 파묻을 때 독한 술을 마셔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 당시, 술에 취한 채 그 작업을 할 수 있게 허용한 주는 미국 전체에 꼭 한 주밖에 없었다. 남북이 4년간 싸우는 동안, 군인 가족 중 많은 사람들이 전장에서 죽은 아들과 남편을 찾아올 도리가 없었다. 시신들을 기차로 운송할 수야 있었지만, 며칠만 남부의 여름 더위에 노출되 면 망자들은 극심한 부패 단계에 들어갔다. 햇볕 속에 버려진 시체에서 나는 냄새는 그저 후각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연합군 소속 한 의사의 말에 따르면 "빅스버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남북 양측은 뜨거운 태양 아래 부패해가는 시신의 악취 때문에 짧은 휴전을 선포했다."고 한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수백 마일에 걸쳐 시체를 운송한다는 것은 열차 기관사들에게 악몽이었다. 철도청은 비싼 철제관에 담겨 밀봉된 시체 외에는 운송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가족들에게 이는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p. 123).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가족이 돈을 낼 수만 있다면 방부처리라고 알려진 새 보존 처리를 전장에서 바로 해주겠다는, 기업가적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을 찾아 소규모 분쟁과 전투마다 따라다녔으니, 이들이 미국 최초의 '앰블런스 쫓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경쟁이 치열한 나머지 서로의 천막을 불태운다는 얘기도 들리고, 지역 신문에 "우리가 손댄 시체는 절대 검게 변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를 싣기도 했다. 이들은 방부 처리 서비스의 효율성을 선전하기 위해, 무명의 용사 중에서 몇 구를 뽑아 실제로 보존 처리해서 이 시체들을 전시하곤 했다. 자신들의 재능을 좀 더 돋보이게 하려고 천막 밖에 양발이 보이게 시신을 괴어놓기도 했다. 전장에서 방부처리하는 천막들 속에는 종종 통 두 개 위에 나무 판대기 하나만 걸쳐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방부처리사들은 새로 죽은 사람의 동맥 시스템 속에 화학물질을 주입했다. 그 화학물질은 "비소, 염화아연, 염화수은Ⅱ, 알루미늄 염, 아세트산 납, 각종 염, 알칼리, 산"을 그들만의 비법으로 특별히 섞어 만든 것이었다. 장의업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직도 방부처리의 수호성인으로 취급받는 토머스 홈스 박사는 남북전쟁 기간 동안 본인이 4000구가 넘는 죽은 병사들을 구당 100달러를 받고 방부처리했다고 주장했다. 화학물질과 주입이라는 이 고상한 방법을 딱히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할인 행사도 있었으니, 이는 내장 기관들을 몽땅 들어내고 몸의 빈 구멍을 톱밥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시체를 더럽히는 짓은 신•구교 전통에(p. 124)서 모두 죄로 여겨졌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워낙 강하다 보니 그것이 종교적 이념을 이겨낼 때도 있었다(p. 125). 티베트 고산 지대에서는 땅에 바위가 너무 많아 매장을 하지 못하는 데다 나무마저 드물어 화장에 필요한 장작을 만들 수 없다. 티베트인들은 망자를 처리하는 색다른 방식을 발달시켰다. 직업적인 로규빠(시신을 부수는 사람)가 시신에서 살을 잘게 자르고, 남은 뼈는 보리 가루와 야크 버터와 함께 빻는다. 시체는 높고 평평한 바위 위에 놓아두어 독수리들이 먹도록 한다. 새들이 날아 들어 그 시체를 파먹고 하늘로 날아올라 사방팔방으로 실어 나른다. 이렇게 남은 살을 다른 짐승들이 먹도록 놔두는 것은 시체를 처리하는 너그러운 방식이다. 문화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충격적이고 우리의 개인적인 의미망에 도전하는 힘을 지닌 죽음 의례가 있다. 와리족이 동족의 살을 구워먹는 풍습부터 티베트 승려가 죽어서 독수리 부리에 갈기갈기 찢기는 것, 클리프의 긴 은빛 투관침으로 내장을 뚫는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와리족의 행동과 티베트인이 고인의 시신을 갖고 한 일을 브루스가 클리프에게 한 일과 비교해보면, 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믿음이다. 와리족은 신체를 온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티베트인들에게는 한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떠난 다음에는 그 몸이 다른 존재들을 지탱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북미 사람들은 시체에 방부처리를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어떤 믿음도 갖지 않는다. 그것(p. 130)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의례가 아니라, 장례 비용 청구서에 가욋돈 900달러를 얹는 짓일 뿐이다. 만약 브루스 같은 장사꾼이 자기 친어머니한테는 결코 하지 않을 짓이 방부처리라면, 왜 우리는 아무에게나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궁금했다(p. 131). 영아 화장은 성인 화장과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행해진다. 혹시 이름이 있다면, 우리는 아기들의 이름을 기입했다. 종종 아기들의 이름은 그저 '존슨네 아기' 혹은 '산체스네 아기' 이런 식으로 라벨이 붙여진다. 그들에게 완전한 이름이 있는데, 심지어 원래 이름인 'Caitine'을 잘못 적어 'KateLynne'으로 쓰는 식으로 뭔가 고약한 일이라도 있으면 더 슬프다. 완전한 이름을 보면, 아기가 태어나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그 부모들이 얼마나 바랐는지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아기들을 성인의 경우처럼 불타는 화장로에 깨끗하게 집어 넣을 만한 도구는 없다. 당신이 화장로를 작동시키는 직원이라면 그 속에 완벽히 던져야 한다. 당신 손을 떠나 레토르트 천장에서 쏟아지는 불길 속에 영원한 휴식을 취하러 오는 아기, 그 아기가 올바른 장소에 착륙하도록 확실하게 던져야만 한다. 연습을 하면 아주 잘할 수 있게 된다. 아기 화장은 보통 하루 일과가 끝나갈 때 한다. 그쯤 되면 화장하는 방에 죽 늘어선 벽돌들이 너무 뜨거워서 작은 아기들은(p. 141) 가만두어도 저절로 화장이 된다. 마이크가 내게 하루 일과가 끝 나기 전에 성인을 화장하는 대신 "아기를 두 명쯤 해치우라"고 요청하는 경우는 흔하다. 성인은 화장 자체와 냉각 과정을 포함하면 재가 되기까지 몇 시간이 걸린다. 아기들은 화장하는 데 20분이면 된다. 나는 어느새 이렇게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좋아, 케이틀린. 뭐라고? 지금 3시 15분이라고? 5시 전에 아기 다섯 명은 해치울 수 있을 거야. 자 해보자고, 5시 전에 다섯 명. 그 목표를 달성하는 거야!” 듣기 끔찍한가? 물론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태아 하나하나, 살고 싶었지만 그 작디작은 삶을 낭비해버린 아이를 두고 슬픔 속으로 빠져든다면, 그만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다 끝내 병원의 그 안전 요원같이 되고야 말 것이다. 유머는 없고 두려움만 가득 한 사람(p. 142). 내가 로스앤젤레스로 출발하기도 전에 어둠이 깔렸다. 서쪽으로 가는 I-10 고속도로의 네 차선은 팜스프링스를 지나가는 데, 차선마다 귀가하는 일요 행락객들의 차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맨 왼쪽 차선에서 시속 120킬로미터를 유지하며 폭스바겐을 몰(p. 306)고 있었다. 갑자기 차의 왼쪽 뒷부분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타이어에 바람 빠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나는 깜박이를 켜고 가운데 차선으로 들어가며 운도 지지리 나쁘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바람 빠진 타이어가 문제가 아니었다. 베어링이 헐거워졌고, 바퀴 전체가 축에서 벗어나 헛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볼트까지 뚝 부러져나가 차바퀴가 있던 곳에는 커다란 구멍만 남고 말았다. 세 바퀴만 달린 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차는 아무렇게나 굴러갔다. 네 차선을 가로질러 나선형을 그리며, 생금속이 아스팔트 바닥을 득득 긁자 흙먼지 스파크가 일었다. 폭스바겐이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죽음의 무도를 추는 동안,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했다. 차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우웅 울리는 정적만 있었다. 계속 달려오는 차들의 불빛이 주변의 흐릿한 풍경 속에 어지럽게 펼쳐졌다. 차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다가 마치 어떤 기적적인 완충제에 막혀 날 피한 듯했다. 내게는 통제력을 잃는 것보다, 현대 생활의 밀어닥치는 외로움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으니, 그건 아무 준비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불자들과 중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나쁜 죽음'이라 표현한 바로 그것 말이다. 현대에 들어 나쁜 죽음이란, 차체가 끔찍하게 찌그러지며 사람의 팔다리가 산산이 떨어져 나간 형상을 띤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그들을 열렬히 사랑하는 지도 말할 수 없다. 하던 일은 엉망진창이 된다. 고인이 어떻게 장 례를 치르길 원하는지도 알 수 없다(p. 307). 내가 굴러가며 두 손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핸들을 꽉 잡고 있어도, 마음은 뚝 떨어진 저편에 가 있었다. 처음엔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렇게 가는구나 싶었다. 그러더니 고요한 평화가 내려앉았다. 「월광 소나타」가 연주되고, 느리게 움직이는 영상이 시작되었다. 나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차가 빙글 도는 순간, 나는 '이것이 나쁜 죽음은 아니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시체와 그 시체에 집착하는 가족들과 함께 4년을 보낸 덕분에 그 순간이 초월적 경험이 되었다.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고, 격렬한 타격을 받아들이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격렬한 타격은 결코 오지 않았다. 고속도로 경계를 표시하는 쓰레기 언덕에 차가 박혔다. 교통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똑바로 앉아 생생하게 마주 보는 동안, 차들과 대형 트럭들이 아찔한 속도로 쌩하고 지나갔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아니면 여러 대가)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며 어지러운 여행을 하는 나를 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치지 않았다. 전에는 내 몸이 산산조각 난다는 생각을 하면 무서웠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혹시 산산조각 날까 하는 나의 두려움은 행여 통제력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여기에 궁극의 통제력 상실이 있었다.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내던져졌지만, 그 순간에는 오직 고요함만이 있을 뿐이었다(p. 308).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는 잘 죽는 데 장애물이 된다. 죽음에 관한 두려움과 거친 오해를 극복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지만, 얼마나 빨리 다른 문화적 편견들, 이를테면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가 최근 들어 무너지기 시작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죽음이 그 진실을 드러낼 적기이다. 불자들은 말한다. 생각들은 뇌에 맺힌 물방울들과 같다고. 같은 생각을 계속 강화하다 보면 그 생각으로 의식 속에 새로운 물길이 뚫린다. 마치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면 산의 한쪽 면이 침식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세속적 지혜를 과학자들이 확인해준다. 우리의 뉴런은 항상 기존의 연결을 깨고 새로운 길을 만든다. 당신이 설령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 하더라도, 그 특별한 길은 돌덩어리처럼 굳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는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고 새로운 마음의 회로를 만들 책임이 있다. 나는 하와이의 한 쇼핑몰에서 떨어져 죽은 소녀를 보고 충격 받은 아이로 살도록 영원히 운명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 죽음에 사로잡힌 삶에 항복하거나, 삼나무 숲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일보 직전인 여자가 되도록 영원히 운명 지어진 것도 아니었다. 예술과 문학을 통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과 정면 대결함으로써 나는 뇌의 회로를 조지프 캠벨이 "더욱 대담하고 깨끗하고 넓고 충만한 인생"이라 부른 것 쪽으로(p. 324) 바꾸어놓은 것이다(p. 325). 디테일에서는 이처럼 한국의 장례 풍습과 다른 바가 있지만 저자의 지론은 한 마디로 '죽음은 감춰야 할 일이 아니라,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정서 적 과정으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바다. 기존 장의사에 의해 우리는 "죽음과 실제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대면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자연스럽지 못한 자연스러움'이라는 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라. "사람들은 말한다. 돼지에게 입술연지를 발라놓아도 여전히 돼지는 돼지라고. 시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시신에 입술연지를 바르고서 시신 분장 놀이를 하는 것이다." 이는 시신 화장, 즉 시신 꾸미기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산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을 희생하고 예쁘게 꾸며서 살아 있는 모습에 가깝게 내보이는 것이다. 유가족도 그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길 원한다. 물론 이런 과정을 아예 안 보는 가족들도 있다. 참관은 삶과 죽음 중 어디까지나 삶이 중요하다고 보는 관행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한국에 이런 관행이 (아직은) 없다는 것이 다행으로 생각된다. 시신은 그 자체로서 존엄한 것이지, 산 자를 위한 '구경거리'가 아닌 것이다(p. 344).김병중(Th.D) 07-12 16:51 -
【북토크422】 뇌과학자가 겪은 뇌졸증
하버드대 뇌과학자인 질 볼트 테일러. 어느 날 그는 찌르는 듯한 두통으로 아침을 맞는다. 일상적 활동을 하려 하지만 옷을 입기도, 목욕을 하기도, 전화를 걸기도 어렵다. 찾아온 건 중증 뇌출혈. 뇌가 무너지는 과정을 몸소 느껴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진행 과정을 꼼꼼히 관찰한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대수술을 받고 8년간 뇌의 기능을 되찾는 회복기를 거친다. 이 책은 그가 뇌과학자로서 뇌질환을 겪으며 자신이 느낀 것, 경험한 것, 새롭게 알게 된 것을 담백하게 써내려간 기록이다. 뇌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뇌가 지닌 힘을 역설한 그의 이야기는 TED 무대에 소개되어 500만 조회수 인기 강의가 되었고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소개되어 환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 큰 감동을 전했다. TIME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힌 그의 이야기는 ‘뇌에 대한 가장 과학적이고 경이로운 기록물’이자 ‘무너짐과 일어섬’을 겪은 한 사람의 투쟁기다. 우리가 알아야 할 뇌에 대한 진실을 담은 실화로, 미국은 물론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 프랑스 등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교보문고. 뇌와 뇌졸증에 대해 흥미롭게 읽었다. 뇌에 대한 책을 더 읽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 첫날, 내 상태는 점차 나아졌다.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부위에서 빠른 차도를 보였다. 이후 회복까지는 몇 년이 걸렸지만, 일부 뇌 부위는 말짱해서 현재 순간을 구성하는 수많은 자료들을 해석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뇌졸중 전후의 가장 큰 변화라면 머릿속에 인상적인 침묵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거나 예전처럼 생각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외부 세계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막혀버린 것이었다. 순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언어도 막혀버렸다. 그 대신 그림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생겼다. 또한 순간순간 들어오는 정보를 수집하고 그 경험에 대해서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p. 66). 넷째 날까지도 뇌가 가급적이면 자극을 피하려 했으므로 대부분의 시간을 잠을 자며 보냈다. 그렇다고 우울했다는 뜻은 아니다. 뇌가 감각의 과부하에 걸려 정신없이 밀려드는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p. 82) 못한 것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회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뇌라고 판단했다. 불행히도 뇌졸중 환자들은 대부분 원하는 만큼 잠을 푹 잘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하지만 내 경우 수면이야말로 뇌가 새로운 자극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나의 뇌는 물리적으로 손상된 상태여서 감각계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가 뒤죽박죽 섞여 혼란스러운 게 분명했다. 방금 경험한 일을 이해하려면 뇌가 조용히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 수면은 파일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파일을 제때 정리하지 않으면 사무실이 얼마나 뒤죽박죽이 되는지 다들 알 것이다. 뇌도 마찬가지였다. 매 순간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조직하고 처리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p. 83). 의사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 있다. '뇌졸중이 일어나고 6개월 안에 능력을 되찾지 못하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내 경우에는 뇌졸중 이후로 8년 동안 뇌의 학습 및 기능이 꾸준히 향상되었다. 8년이 지났을 때 몸과 마음이 완전히 회복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뇌는 외부 자극을 기반으로 세포의 연결 구조를 바꾸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이런 뇌의 '가소성'이 잃어버린 기능을 되찾게 하는 기본적인 힘이 된다. 나는 뇌가 꼬마들이 여럿 뛰어노는 놀이터라고 생각한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모두 여러분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애쓰고 있다. 놀이터를 보면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고, 정글짐에 원숭이처럼 매달린 아이들도 보인다. 모래로 장난치는 아이들도 있다. 각기 다르면서도 비슷한 일들을 하고 있다. 뇌의 서로 다른 세포 집단처럼 말이다. 정글짐을 없앤다고 거기서 놀던 아이들이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아이들과 섞여 또 다른 놀이를 계속한다. 뉴런도 마찬가지다.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뉴런의 기능을 지우면, 이 세포들은 자극이 없어서 죽거나 다른 할 일을 찾는다. 가령 시각의 경우, 한쪽 눈에 안대를 씌워 시각피질 세포로 들어오는 자극을 막으면, 이 세포들은 인접 세포들과 접촉하여 다른 할 일이 없는지 알아 본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뇌의 가소성을 믿고, 그것의 성장과 학습 및 회복의 능력을 믿어주기를 바랐다. 세포의 물리적 치유 과정에서, 충분한 수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는 뇌가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이 필(p. 108)요한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뇌의 에너지는 수면으로 채워졌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에너지 자극이 감각계로 쏟아져 들어왔다. 빛의 입자들이 망막 세포를 자극하고, 음파가 고막을 혼란스럽게 때려서 금세 기진맥진했다. 그러면 뉴런들은 뇌의 요구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들어오는 정보를 금방 놓쳐버리곤 했다. 자극은 정보를 처리할 만한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나의 뇌는 보호받아야 할 상태였다. 따라서 소음으로 들리는 불쾌한 감각 자극에서 멀어져야 했다. 뇌졸중을 겪은 후 여러 해 동안 뇌의 수면 욕구를 무시할 때마다 감각계에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러면 정신적 • 육체적 탈진이 이어졌다. 내가 만약 일반 재활 센터에 머물면서 리탈린(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처방약)을 복용하고, 종일 텔레비전을 보고, 다른 사람의 스케줄에 맞춰 재활 프로그램을 따라야 했다면, 아마 정신이 더 멍해져서 회복하려는 노력을 덜했을 것이다. 나의 경우 회복 과정에서 수면의 치유력이 정말로 중요했다. 전국의 재활 시설에서 다양한 방법이 실행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수면, 수면, 수면의 효과를 열렬히 옹호한다. 더군다나 학습하고 인지적 과제를 수행하는 기간에는 충분한 수면이 보장되어야 한다(p. 109). 몸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는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특정 과제를 수행하는 기분이 어떨지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뇌졸중 이후로 계단을 깡충깡충 뛰면서 오르는 상상을 매일 했던 것이다. 예전에 마음껏 계단을 오르내리던 때의 기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 장면을 계속 되돌려보며, 해당 회로를 깨어 있게 했다. 그 때문에 결국 내 몸과 마음 이 서로 협력해서 이를 실현할 수 있었다(p. 127). 뇌출혈이 안겨준 가장 큰 축복은 순수함과 내적 기쁨을 담당하는 신경 회로를 회복하고 강화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뇌졸중 덕분에 나는 다시 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세상을 마음껏 탐험할 수 있게 되었다. 절박한 위험이 없어서 세상을 안전하게 느꼈고, 마치 내 집 뒤뜰인 것처럼 걸었다. 오른쪽 뇌가 움직일 때 우리는 인류의 가능성이라는 직물을 이루고 있는 색실들이다. 삶은 축복이며, 우리 모두 현재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 내 우뇌의 성격은 모험심이 강하고, 풍요로움을 찬양하며, 사교에 능하다. 비언어적 소통에 탁월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정확하게 알아내 감정이입에 능숙하다. 또한 감정의 몰입이 일어나 우주와 하나됨을 느끼게 한다. 나의 종교적 마음이 머무는 곳도 우뇌에 있다. 덕분에 나는 현명한 관찰자가 된다. 직관과 고차원적 의식이 여기서 생긴(p. 141)다. 오른쪽 뇌는 항상 현재형이며 시간 감각이 없다. 우뇌의 타고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낡은 정보가 담긴 파일을 새롭게 업데이트할 수 있도록 매 순간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나는 유년기 내내 호박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우뇌 덕분에 기꺼이 호박에 재도전할 수 있었고, 지금은 호박을 아주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좌뇌로 판단을 내린 후에는 파일 업데이트를 위해 선뜻 오른쪽으로(우뇌의 의식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판단을 한번 내리고 나면 그 결정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깨닫기로 지배욕이 강한 좌뇌가 가장 싫어하는 일은 제한적인 두개골 공간을 개방적인 우뇌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오른쪽 뇌는 새로운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틀에서 벗어나 사고한다. 틀을 만든 장본인인 좌뇌가 세운 규칙과 규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창의력을 발휘해 새로운 일을 시도한다. 혼란이 창의적 과정의 첫 단계임을 잘 안다. 근운동 감각이 뛰어나고 기민하며, 육체가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사랑한다. 내 세포들이 직감이라는 통로를 통해 보내는 미묘한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며, 촉감과 경험을 통해 배운다. 내 우뇌는 자유를 찬양하며, 과거에 발목이 잡히거나 미래에 일어날 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삶과 세포들의 건강을 존중한다. 그리고 내 몸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회의 일원인 당신의 몸과 우리의 정신 건강을 염려하며, 이 땅의 모든 생명에 관심을 갖는다(p. 142). 내가 회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왼쪽 뇌의 부위가 있다. 비열하게 굴고 끊임없이 걱정하고 나 자신이나 남들에게 막말을 하는 경향이 있는 좌뇌의 성격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태도가 내 몸 안에 불러일으키는 생리적 느낌이 싫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혈압이 치솟고 이마가 부어올라 두통이 일어나는 현상 말이다. 아울러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자동으로 머릿속에 재생하는 오래된 감정 회로 도 되살리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고통에 사로잡혀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도 짧았다(p. 146). 회복 과정 중에 나는 고집스럽고 오만하고 비꼬기 좋아하고 질투심 많은 내 성격을 담당하는 부위가 상처받은 왼쪽 뇌의 자아 중추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부위는 나를 지독한 패배자로 만들고, 원한을 품고,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복수를 꾸미게 한다. 이런 성격을 되살리면 새롭게 찾은 우뇌의 순수함을 위협할 게 분명했다. 나는 이런 낡은 회로들을 그냥 내버려둔 채 좌뇌의 자아 중추를 회복 하려고 의식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p. 147). 집중하는 인간의 뇌보다 더 막강한 것은 세상에 없다. 언어를 통해 우리의 왼쪽 뇌는 몸의 치료와 회복을 지시(혹은 방해)할 수 있다. 언어와 자아를 담당하는 왼쪽 뇌는 50조 개의 분자적 지성을 한꺼번에 움직이는 응원단장과도 같다. 내가 세포들에게 주기적으로 '잘하고 있어!'라고 격려를 보내면, 세포들은 치료 환경을 강화하는 진동을 몸 속에서 만들어낸다. 세포들이 건강하고 행복할 때 나도 건강하고 행복하다. 그렇다고 정신질환자들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중증 정신병의 모든 징후에는 생물학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세포가 어떤 세포와 어떤 화학 물질을 얼마만큼 주고받는가가 정신질환 발병을 결정하는 것이다. 현재 뇌 연구는 정신병의 바탕이 되는 신경 회로의 이해에(p. 161)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의 지식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 건강을 효과적으로 돌보도록 도와줄 방법도 늘어날 것이다. 현재 우리가 가진 치료 방법에는 처방약을 통해 뇌세포를 화학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 전기 자극을 가하는 방법, 심리 치료를 통해 인지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다. 내가 볼 때 의료적 치료의 목적은 공통된 현실을 공유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불행히도 정신 분열증 진단을 받은 사람의 60퍼센트가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치료 방법을 찾지 않고 약물이나 음주를 통해 스스로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해 약이나 술을 찾는 경우에도 현실 공유 능력을 해치고, 건강에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과의 적극적인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다(p. 162). 추측하건대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나도 뇌졸중을 겪기 전에는 내 몸에 차오르는 감정에 대한 반응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지적 사고를 모니터하(p. 176)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 감정을 지각할 때 내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 생화학 물질이 나를 사로잡 다가 풀어주는 데 90초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런 각성이 내가 뇌졸중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선택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분노, 질투, 좌절 같은 강렬한 부정적 감정을 느낄 때 뇌에서 복잡한 회로가 적극적으로 돌아가는데, 그 느낌이 너무도 친숙하고 마치 우리가 강한 사람이 된 듯 느껴지는 데에 있다. 습관적으로 분노 회로를 가동하는 것만큼이나 행복 회로를 가동하는 것도 쉬운 일이다. 사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행복은 오른쪽 뇌의 자연스러운 존재 양태이다. 따라서 이 회로는 항상 돌아가고 있고 우리는 언제든 여기에 접속할 수 있다. 반면 분노 회로는 항상 돌아가지 않으며 우리가 위협을 느낄 때 활성화된다. 이 생리적 반응이 혈류에서 빠져나가면 곧바로 다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세포와 회로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서로 다른 회로가 몸 안에서 가동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파악하고 나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다. 공포와 불안이 내 몸 안에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정말 질색이다. 이런 감정이 나를 덮치면 소름 끼칠 만큼 불편하다. 생리적으로 이런 느낌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회로에 정기적으로 접속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 마음에 드는 공포의 정의는 '진짜처럼 보이는 그릇된 예상'이다(p. 177). 모든 생각이 그저 스쳐가는 생리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면, 내 이야기꾼이 흥분하여 공포 회로를 가동할 때 덜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내가 우주와 하나임을 기억하면 공포는 힘을 잃는다. 공포 • 분노 반응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되도록 공포 영화는 보지 않으며, 걸핏하면 분노 회로를 가동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나의 회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선택만 한다. 유쾌한 기분을 좋아하므로 나의 기쁨에 응해주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앞서 말했듯이 신체의 고통은 우리 몸 어딘가에 조직이 손상되었음을 뇌에 알려줘서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생리 현상이다. 우리는 고통의 감정 회로에 접속하지 않고도 신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아이들이 몹시 아플 때 얼마나 용감 해지는지 잘 안다. 부모들은 고통과 공포라는 감정 회로에 시달리지만, 아이들은 부모 같은 부정적 감정을 겪지 않고도 꿋꿋하게 병에 적응한다. 고통을 몸으로 겪는 것은 선택이 아니겠지만,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인지적 결정이기 때문이다. 아픈 아이들은 자신의 병을 견디는 것보다 부모가 슬퍼하는 광경을 보는 것이 더 힘들 때가 많다. 아픈 사람이 누구든 마찬가지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방문할 때는 여러분이 어떤 회로를 자극하는지 살피고 조심해야 한다. 죽음은 우리 모두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여러분의 오른쪽 뇌 깊은 곳에 영원한 평화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몸을 낮추고 평화로운 은혜의 상태로 돌아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매사에 고마워하면 당신의 삶은 정말 멋질 것이다!(p. 178). 옮긴이의 말. 이 책이 내게 안겨준 통찰 이 작은 책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도 그럴 것이 37세의 나이에 뇌졸중에 걸렸다가 8년의 회복 과정을 거쳐 마침내 신체적• 정신적 기능을 되찾은 사람이 쓴 기록이니까 말이다. 이 책을 집어든 독자들 중에는 뇌졸중에 걸린 환자를 가족으로 둔 사람이거나 앞으로 닥칠지 모를 뇌졸중의 위험에 대비해 정보를 구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뇌졸중을 겪고 이를 극복한 사람이 직접 쓴 책이니 만큼 무엇보다 믿을 만하다. 뇌졸중 증상은 어떤지,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치료해야 하는지, 주위에서 어떤 식으로 도와줘야 하는지 등등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화제가 되지는 못했을 터, 이 책의 저자인 질 볼트 테일러는 신경해부학을 전공한 뇌과학자이다. 어릴 때부터 정신분열증을 앓는 오빠를 보(p. 208)며 자라 뇌의 작용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전미정신질환자협회의 입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신질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고 뇌 기증 문화를 선도해왔다. 이렇듯 누구보다 뇌질환에 관심이 많고 뇌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녀가 정작 자신의 뇌가 속수무책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이걸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뇌졸중 발병으로 인해 인 력이 단계적으로 무너져 가는 과정을 과학자의 눈으로 추적하는 대목이다.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복잡한 신경 프로그램들이 하나하나 망가질 때마다 몸과 마음이 해체되면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뇌질환의 사례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신비를 소개하는 뇌과학 책들은 그동안 국내에도 꽤 소개되었지만,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몸소 체험한 사례를 소개하는 책은 이 책이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유아기로 돌아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배우는 발달 과정을 고스란히 반복해야 했다는 점이다. 걷는 법, 말하는 법, 읽는 법, 숫자 세는 법, 색깔 보는 법 등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을 그녀가 고통스럽게 배우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신경 차원에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질 볼트 테일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좌뇌와 우뇌의 차이다. 그녀는 좌뇌에 출혈이 일어나 언어 능력은 물론 기억 능력조차 잃었다. 순차적 사고도 불가능해져서 경험의 과거,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순간이 고립된 채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우뇌(p. 209)가 활개를 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평온하고 차분한 의식이 밀려들면서 열반과 같은 희열에 빠져들었다. 한 마디로 좌뇌의 '행하는' 의식이 밀려나고 우뇌의 '존재하는' 의식이 부각된 것이다. 회복 과정 중에 저자가 가장 힘들어한 것은 회복의 필요성을 끊임 없이 확인하는 일이었다. 세상과의 끈이 하나둘 풀리면서 거대한 희열과 영원한 우주의 흐름을 느끼자 그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다고 한다. 그만큼 마음의 평화는 유혹적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누구든 언제라도 이와 같은 깊은 마음의 평화에 접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발적으로 좌뇌의 재잘거림을 잠재우고 우뇌의 의식을 일깨우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을 것 이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고통스러운 회복 과정을 참아낼 수 있는 힘이었고, 이 책의 원제가 '뇌졸중이 내게 안겨준 통찰My Stroke of Insight' 인 이유다. 이렇듯 뇌졸중은 그녀에게 감정의 짐을 내려놓고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 역시 부정적인 회로를 잠재우고 기쁨의 회로에 접속하며 순간순간 만족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뇌의 신비를 소개 하는 책은 많지만 뇌를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는 뇌과학 책은 흔치 않다.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진 두 개의 뇌를 평화롭게 조화시키는 방법, 이것이 바로 마음의 건강을 누리는 지혜이자 '이 책이 내게 안겨준 통찰'이다. 이렇게 멋진 책을 번역할 기회를 준 윌북 식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장호연(p. 210).김병중(Th.D) 07-09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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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3-29 09:46
“감사로 채워지는 인생!”(살전 5:18)
우리 신앙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과 뜻과 목적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보다 훨씬 큰 능력과 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일에 감사함이 주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언급합니다. 뜻이란 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 목적이 이 감사에 담긴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의 수준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감사는 어떤 일이 만족을 주거나 소원을 충족할 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대한 감사는 어려울 때나 슬플 때에도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할 수 있는 내면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감사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감사보다 깊고 넓은 의미가 담깁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도라면 더 이해하고 누려야 할 감사에 대한 의미와 삶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런 깊은 감사를 체험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남겼던 감사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이 만나서 함께 즐거이 고백하고 노래했던 것이 시 136편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고백했던 것은 바로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을 뵙고 경배할 때 마다 선포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감사가 그들의 신앙 가운데 형성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알게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인자 인애와 자비가 풍성함을 넘어 영원합니다. 끝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착하다 순수하다 라는 개념으로만 알면 너무 적게 안 것입니다. 선하심은 그 존재가 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받으셔서 만족하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선으로서 그 분의 선하심은 피조물 안에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좋은 것, 즉 자연적, 도덕적, 영적 선의 원천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선은 윤리적으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윤리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를 위해 호의, 은혜를 베푸시며 관대하게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 분의 선함에서 흘러오는 자비와 긍휼, 사랑, 인애들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나옵니다. 영원하며 끝이 없으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예가 바로 모성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거나 규칙으로 정하여 윤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은혜가 나옵니다. 은혜란 호의와 구별되는데,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호의입니다. 그런데 받을 자격이 없는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고 사랑하여 주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긍휼이 나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모든 비참함과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시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내가 나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인내가 바로 하나님의 선한 성품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림 속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말할 수 없는 감사를 가져옵니다. 그 분의 선하심은 그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그들에게 정착할 곳으로 인도하시며 그 땅의 소산물을 수확하도록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절기를 통해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즐기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크고 놀랍습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옵니까? 하나님은 예수의 인격 안에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담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선하심을 따라 은혜와 진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즉 원수같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의 비참함에 거하는 우리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창기와 세리라도 영접하고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십자가를 통해 부어 주십니다. 가장 큰 사랑,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긍휼이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에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 흘러 나오는 사랑, 은혜, 긍휼, 자비를 담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받아들였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 안에서 하신 일과 행하실 일이 크고 놀랍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로 고백하며 살아갈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게 될 때 감사하는 인생을 만드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주 안에서 살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그 특성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넘치는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주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풍성한 사랑,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즉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해 한 해 우리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한해의 인생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한 없는 선하심과 자비를 담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현실의 가정과 일터, 직장, 그리고 삶의 터전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담아 우리를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이 땅의 소산물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한 결과 얻은 열매는 하나님이 능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견디게 하셔서 이룬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함께 하신 결과 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세례를 받고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하여 채워지는 것입니다. 한 살 더 먹고 한 해를 더 살아가는 것은 은혜의 삶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이 먹음에 대하여 한 해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일 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후회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삶의 내용가운데 포함된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는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치지 않는 사랑과 긍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서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지혜롭게 인생을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엡 5:18-20절을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함, 즉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 삶은 말씀과 찬송으로 예배하며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양과 감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송하는 것입니다. 감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 봉사 하는 것입니다. 감사 헌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더불어 감사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하심 아래 삶을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거대하고 커 보이는 일을 성취하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어렵고 힘든 것이 기다리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인도, 크고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 속에서 당신의 크나큰 은혜를 담습니다. 다른 꽃 길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벽한 곳에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실수하여 눈물짓는 우리의 삶 안에서 감사의 고백을 통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모든 일에 감사로 당신의 남은 인생을 채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고백을 당신의 삶에 채워야합니다. 좋은 일은 당연하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주어져도 감사함으로 그것을 행해야합니다.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받아야합니다. 이럴 때 때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기도 합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 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미네소타 주 주지사 필스버리(Pillsbury) 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 기도는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감사로 채워진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감사하는 감사촌 마을에 삽니다. 마치 아이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고마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함께 하는 존재로 함께 있는 것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즉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으로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 나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들어오니, 온 식구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 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통해 놀랍게도 예수와 함께 사랑의 띠로 묶어 주신 성령의 충만한 일하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인생을 감사로 채워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합시다. 항상 감사합시다. 매주 마다 감사의 고백으로 하나님과 기쁨을 나눕시다. 그리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인생을 꽉꽉 채워내어 감사의 인생을 수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
김병중 03-18 16:16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갈5:25 – 6:5)
신앙은 우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신앙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수준과 색감이 결정되고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합니다. 율법을 주신 중요한 이유도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르치고, 이웃 사랑의 수준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선명한 색감을 갖기 위함입니다. 본문 5장 19-21절의 ‘육체의 일’은 성적인 문란함(음행 더러운 것 호색)과 관계 속에서 분열(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로 알고 보면 모두 <관계의 죄>입니다. 이어서 기록된 5장 22-23절 성령의 9가지 열매 또한 대부분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23) 모두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위하여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거해야 할 거대한 지뢰가 하나 있습니다. 26절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kenodoxoi 헬라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빈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 안에서 빈 영광의 의미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서 의를 성취하려는 태도’를 우선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수준까지 누군가 갔으니 나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선 할례를 받고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겠다는 시도를 하는 태도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경고하며, 그러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서로 비교하고 공격하며 원치 않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복음은 경쟁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파이를 하나 놓고 빠른 사람이 먼저 먹어버리는 그런 성격의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높은 정상에 힘 있는 자가 빨리 올라가는 형태로 쟁취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복음을 크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앞서가고 성취하여 자신이 남보다 높아지고 인정 받으려는 모습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잘 지켜서 의를 이루려는 모습으로 살다보면 두 가지 치우친 현상을 겪게 됩니다. 먼저는, 서로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26절 prokaleomai 는 ‘화나게 하다. 누군가에게 싸우자고 도전하다’란 뜻으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이 강한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목표와 생각으로 상대에게 압력을 가하여 상대를 오히려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화나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보다 더 나은 경험과 수준이 있다고 자신을 이해하며 곁에 있는 이들을 얕잡아 보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문제를 주로 일으키는 이들이 놀랍게 아버지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엡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parorgizo) 말고 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아버지의 경험과 기준과 높은 생각이 어린 자녀에게 강요로 나타나면 자식을 때로는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노엽게 하다’라는 동사가 헬라어로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비슷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to provoke, to wrath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반대말은 행복 Happiness입니다. 지적하다가 둘 다 불편한 관계로 인해 불행해집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또 다른 모습은 투기하는 것입니다. phthoneo, envy 부러워하다 상대방을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보고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상대의 은사와 재능을 과대 평가하며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상대를 노엽게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방에게 간섭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경우 상대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가 어떠하든지 관계 없이 무관심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둘 다 헛된 영광에 집착한 모습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부분에서 노엽게 하고 시기하는 태도와 정반대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성령으로 행하려 애쓴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또한 보여 주신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어떻게 하든 그들을 섬길 기회를 찾는다. 요약하면, 기독교적 관계는 경쟁이 아닌 섬김에 의해 지배된다.” 노엽게 하거나 시기하는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첫 번째 방법은 1절,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십시오’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범죄하듯 잘못한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이들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보여준 두 가지 부작용은 너무 빠르고 강하게 비판하며, 부러워하여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고 온유한 심령으로 관계에 문제를 가지고 오는 이들을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엡5:23)입니다. 온유함의 반대는 우월감을 갖거나 자아도취에 빠진 교만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누군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어?’하지만 누구나 그런 현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1절하,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는지 되돌아 보고, 자신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앞으로 자신도 그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범죄한 이를 부드럽게 대하지만,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비복음적인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쟁적이며 문제를 만들어내고 교회를 어렵게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비복음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있을 뿐 미래에도 완전한 사람은 교회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비복음적인 행동을 바로잡아주고 십자가의 은혜와 보혈이 교회를 온전하게 하며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교회를 바로잡아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드럽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변화를 요청했습니다. 사도는 교회의 잘못을 간과하고 어떻게 해도 구원은 100% 보장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온유함으로 상대를 바로 잡으려는 마음으로 설득하고 호소하는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섬기는 모습으로.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대안을 제시하며.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신앙적인 자존감을 세워주며.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몬 1: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상대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두 번째 방법은, 2절 ‘너희가 짐(baros)을 서로 지라’ 헬라어 baros는 ‘무겁고 큰 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마다 다 짐이 있는데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짐을 잘 질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이들이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말씀이 좋고 매주 은혜를 받는다 해도 어느 시점에 가면 좌절할 수 있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생의 짐을 교회를 통해 서로 져주는 기능이 살아 있어야 가벼워질 수 있도록 교회는 설계되었는데, 계속 혼자 무거운 짐을 안고 있고,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견디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남의 짐을 져 주는 생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법을 몸소 실천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순종입니다. 10여년 사역 도중 시력이 많이 떨어져서 안식년 허락받아 이곳 저곳에 머물다가 지금은 제주도에서 두 달 쉬고 계신 목사님과 어제 통화를 했습니다. 매 주일 제주도에 개척된 약한 교회를 찾아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 익명으로 특별헌금을 보내주셔서, 지금은 주일마다 50만원씩 가져가 재정이 약한 교회에 헌금을 드리며 지원하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쉼에 초점을 모으고 목회 구상을 해도 충분한데, 목사님이 남의 짐을 져 주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머물고 계신 선교센터에는 중국인 신학생들이 머물던 곳인데, 목사님을 뵈러 온 지인 목회자가 상황을 보고 적지 않은 헌금을 드리고 안식년을 갖는 목사님도 헌금을 드리는 과정에서 그곳을 떠나려던 관리자인 선교사님이 그곳에 더 머물러 사역을 하기로 했다는 마음의 변화를 말해서 기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며 서로 돕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서로를 가장 잘 돕기 위해서는 자만심이나 열등감을 버리고 형제를 돕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두에게 고마운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으면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도울 수 있고 그렇게 서로를 돕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짐을 진 이들에게 볼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율법의 짐을 진 이들은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고 남을 판단하며 도움을 주기 보다는 어떤 원칙에 의해 살아가는 것으로도 숨이 가쁩니다. 그러나 남의 짐을 져 주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면서 자신도 행복하고 도움을 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의 짐 대신 남의 짐을 지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다시 한 번 헛된 영광을 따라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사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가운데,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와도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형제가 잘못할 때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모습으로 형제의 약점을 대신 짊어지는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연약한 형제의 약점을 사랑으로 대신 짊어지려면 정당한 자기 평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한국 교회를 자주 거론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늘 놓칩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놓치면서 형제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너무 예민하거나 무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 세 번째 방법은 4절 ‘자기의 일을 살피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상황과 다른 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상황과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나치게 남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3절이 자신의 존재가 어떤 상태인지 늘 점검하라는 말씀이라면, 4절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내가 할 일에 대해 주님 앞에 답변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주님이 우선 물으실 것이며 나는 그것을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내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은퇴목사님이 계신데, 늘 약한 이들을 도우며 시간을 쏟고 에너지를 집중하시다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큰 곤욕을 겪고 은퇴하신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교회 일을 등한히 하면서 목회자들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초점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 이 문장은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고 남에게는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서 남의 자랑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하면 각 사람은 자신의 자랑을 자신에게만 돌릴 것이지 다른 형제들에게 돌리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경쟁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을 살핀 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허풍떨지 않고 자신의 자랑을 자신의 것으로만 삼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하는데 나는 이 정도 밖에 못하는가? 아니면 내가 이렇게 하는데 누구는 왜 이 정도도 못하는가? 그런 생각과 비교의식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주시는 정말 중요한 말씀이 4절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4절, 새번역) 남들이 어떠하든, 내가 가는 길을 걸어갈 이유가 분명하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사는 이들은 늘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남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그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만족하며 살아갈 힘이 있습니다. 5절, ‘자기의 짐(phortion)을 질 것이라.’ 남의 짐은 내가 들어주어야 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만, 5절의 자기가 져야 할 짐은 헬라어로 작은 손가방 같이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 얼마나 힘들까 그런 마음을 갖고 누군가를 돕는 자리에 나아가야 하지만, 내 짐에 대해서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작은 짐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이 자기가 큰 짐을 들고 있고 아내가 작은 가방을 들고 걸어갈 때, 건강하고 사랑스런 남편은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아내가 든 가방을 달라 해서 들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어른은 임신한 며느리가 든 무거운 짐을 보면서도 작은 자신의 짐까지 맡기며 빈손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냥 빈손으로 걸어다니면서도 피곤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는 일이 너무 무겁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항상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 다음 세대가 우리가 하는 일을 잇는 문제, 점점 더 이기적으로 바뀌고 있는 사람들의 심성의 어려움 등 정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자들의 경쟁적이고 자기의 거룩을 드러내려는 끝없는 허영의 모습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의 시작은 놀랍게도 각각 자기의 크지 않은 짐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각자의 짐이 어마어마하게 크지 않습니다. 그냥 배낭 정도의 짐입니다. 그 짐이 크지 않은 이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서 져 주시는 은혜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을을 땀 흘려 보내야 하고 겨울을 밀어내며 봄이 올 모든 준비를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위치에서 우리가 할 일을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땀 흘려 두 달란트를 남기면 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잘못까지 거론하며 연대책임을 지라고 책망하지도 않으십니다. 때론 남의 짐을 져야 하지만, 모든 짐을 우리가 다 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5장 25절에 기록된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건강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범죄한 이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짐을 서로 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십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질 짐을 가볍게 하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고 함께 하시며 도우실 것을 성령은 믿게 하시고 어려움 속에서도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으로 형제들을 대하십시오. 겸손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사랑을 베풀면서, 자신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소원합니다. -
김병중 03-18 15:18
빈들에서의 감사(마태복음 14:13-21)
어느 날, 유대사회에 등장한 예수님의 행보는 매우 이례적이었고,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악을 행한 자들에게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의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따랐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은 각종 병든 이들을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달고 오묘한지 해가 중천을 지나 석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경청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때는 저물어 가는데 먹을 것이 없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때가 저물었습니다.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시지요?”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구에 거절하며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의외의 답을 들은 제자들은 난처해합니다. 이 많은 무리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준비한들 어디서 이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을 사오겠습니까? 바로 그때에 순진한 한 제자가 “예수님 여기 도시락 하나가 있습니다.”라고 내 밉니다. 그 도시락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아이가 1끼 먹을 수 있는 보리떡 5개와 작은 생선 2마리가 든 도시락이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의 도시락입니다. 예수님은 그 보잘 것은 도시락으로 그날 모든 자들이 배 불리 먹도록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날 그 기적을 맛본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날의 기적을 ‘오병이어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원동력일까요?어린 아이가 순진한 마음으로 내민 도시락일까요? 먹거리를 찾아 무리 가운데로 들어가 어린아이 도시락을 갖고 온 한 제자의 부지런함일까요?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열심일까요? 모든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19절 말씀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단어는 ‘축사’입니다. 축사란 무엇일까요?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감사기도’, NIV는 'thanks'입니다. 헬라어 ‘유로게오’(ευλογησεν)는 ‘감사를 드리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 도시락을 앞에 두고서 감사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기적의 원동력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감사기도가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행동이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곳은 빈들입니다. 빈들이란 광야요, 황량한 불모지요, 텅 빈곳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빈들에서는 절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들에서 감사했습니다. 오병이어는 아이 하나도 먹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곳에 모인 자들은 장정만 5천명이었습니다. 어린이, 여자들까지 합치면 어림잡아도 2만 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양식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빈들에서 감사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날의 기적으로 해피엔딩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앞에서도 감사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를 배부르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오늘 우리들의 삶이 마치 빈들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텅 빈 빈들 말입니다. 아무리 땀 흘리고 수고해도 먹고 살기가 참 힘든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워낙 가진 것이 없는 흙수저 인생이라 지금의 환경을 벗어나기란 요연해 보입니다. 언제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기약이 없어 보입니다.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수험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면서 시험을 준비했을 겁니다. 하지만 막상 시험을 치고 나면 생각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아 낙심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또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해도 취업이 잘 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취업 될 때까지 휴학하면서 대학생활을 마지못해 이어갑니다. 취업이 되어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꿈꾸는데 현실이 이런 꿈도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여 공시 생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건강에 각별한 신경을 썼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늘 기도하면서 소망하는 삶이 있지만 삶의 현장은 그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빈 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빈들이라고 불평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절망하면서, 남 탓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인상 쓰면서, 좌절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2. 빈들에서도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책임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옷이 낡아지지 않게 입혀주셨습니다. 신발이 해어지지 않도록 신겨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먹여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만큼 물질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뱅이가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내가 원했던 진로가 펼쳐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습관적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을 벗어버리십시오. 오히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습관부터 가지십시오. 빈들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이 감사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목회자로 살면서 수 없이 많은 자들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단 한명도 굶어 죽은 사람 보지 못했습니다. 입을 옷이 없어서 얼어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신을 신발이 없어서 발병이 나서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빈들과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100% 책임져 주시구나!’ 그래서 저는 제 자녀들에게 항상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걱정하지 말라고... 올해 우리 집 막내딸이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친 후에는 아쉬움이 남고 자신이 꿈꾸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걱정도 찾아옵니다. 저희 부부는 항상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딸! 하나님이 네 길을 여신다. 걱정하지 말고 항상 힘내라” 듣기 좋아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제 인생을 여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딸들의 길을 왜 여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어디 우리 가정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니 빈들과 같은 현실에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정말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놓고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감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인생을 주의 은혜로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아무리 믿으려 해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아무리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은 ‘감사’를 ‘구원’의 수준만큼이나 높이 생각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구원 받은 백성이라면 감사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고 늘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저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가 있다면 그게 행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면 내 삶에 행복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해서 감사 인생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
김병중 03-16 23:05
"하나님의 목적과 성공이 있는 삶"(여호수아 14:5-15)
여섯 살 된 남자 아이가 유치원에 처음 입학을 해서 수업을 듣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집에서 하던대로 "선생님, 오줌 마려워요!"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오줌'이라는 단어가 껄끄럽게 들린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얘, 여자 아이들도 있는데 그런 지저분한 단어를 쓰지 말고 다음부터 화장실 가고 싶으면 '선생님,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 후로 아이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배운대로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이 아이가 잠을 자다가는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잠을 깬 겁니다. 혼자 어두운데 나가는 게 무서워서 옆에 자고 있던 엄마를 깨웁니다. 엄마를 막 흔들어 깨우며 "엄마,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 엄마가 잠이 덜 깨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밤중에 휘파람 불면 뱀 나와요, 휘파람은 아침에 불고 지금은 그냥 자거라." 그런데 아 아이가 너무나 참기가 힘들어 다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나 지금 "나 도저히 못 참겠어요. 지금 휘파람을 불어야 되요." 그래, 엄마가 졸면서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럼 나가지 말고 엄마 귀에다 휘파람을 조용히 불어야 한다! 그 다음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래서 앞서 가는 선배들, 선생들, 지도자들이 잘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가 따라갈 귀한 지도자 갈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서 14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열 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장면입니다. 지금 20세 이상 된 사람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온 유일한 두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이고 갈렙의 나이가 85세인데 가나안 땅은 아직 싸워서 얻어야 될 땅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여호수아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좋은 땅, 이미 정복한 땅을 달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요구한 땅은 가장 정복하기 어렵고 힘든 땅입니다.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민수기에서 열 정탐꾼이 보고 놀란 사람들이 바로 거인족 아낙 자손이었습니다(골리앗의 조상). 이곳 이름이 기럇 아르바로 불렸는데 그 의미도 얼마나 힘센 거인이 살았는지 이름도 “거인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땅을 요구합니다. 왜 갈렙은 이곳을 요구했을까요? 저는 이 갈렙의 모습에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고 제가 받은 은혜를 나누려고합니다. 첫째, 갈렙은 끝까지 믿음의 비전을 놓치지 않은 지도자입니다. 갈렙은 민수기 14장 이후 광야를 떠도는 38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가나안 땅에 대한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의식이 분명한 지도자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꿈이 분명해졌고 이제는 목적지까지 확실히 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정한 보이지 않는 목표, 내 자신만을 위한 뜬 구름 잡는 목표는 바뀝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매일 이루어지지 않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불평하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지고 분명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마라톤의 세계 최고 기록은 독일 BMW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42.195㎞를 2시간 2분 57초에 완주하며 사상 처음으로 2시간 2분대에 진입한 데니스 키메토(30·케냐)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모릅니다. 마라톤 선수가 2시간 10분 안에 42.195킬로를 뛰려면 100미터를 평균 17-18초 사이를 계속 유지하며 뛰어야 합니다. 그럼 마라톤 선수들이 전반부에 더 잘 뛸까요? 반환점을 돈 후반부에 잘 뛸까요? 예! 상식적으로는 전반부에 힘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잘 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빨리 뛰는 것은 반환점을 돌고부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골인지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시간이 지날수록 골인지점인 가나안 땅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기대했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목적지를 분명히 알려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자기만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확신을 주고 같이 성공을 함께 나누어 갖습니다. 둘째로, 갈렙은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지도자였습니다. 갈렙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이유를 대라면 한두 가지, 하나님의 약속과 도우심 밖에는 없지만 정복할 수 없는 이유를 대라면 10가지도 넘을 것입니다. 지금 갈렙의 나이 85세입니다. 그 땅은 가장 강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또 골짜기입니다. 무기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전쟁을 해 본 사람도 없습니다! 등등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85세지만 40년 전과 똑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땅을 당연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정말 체력이 지금이나 그 때나 똑같습니까? 아니지요 다만 믿음이 똑같을 뿐입니다. 나중에 보면 이 땅을 정복한 후에 갈렙은 직접 전쟁을 하지 않고 자기 조카인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을 통해 다른 지파의 땅 정복을 도와줍니다. 이제는 체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만큼은 직접 정복합니다. 갈렙이 이렇게 직접 노년의 나이에 전쟁을 한 것은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이 40년 전 백성들이 포기한 땅이었는데 그 때 갈렙은 정복할 수 있다고 당당히 외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그 때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도 분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는 백성 전체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파별로 싸워야 합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다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제일 많은 갈렙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가장 어려운 땅을 정복하므로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하니 너희도 할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과 은혜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갈렙같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강한 군대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마치 갈렙은 이미 이 땅을 정복한 사람처럼 달라고 합니다. 또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로 마치 정복한 것처럼 이제 가지라고 허락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이 들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떡 줄 사람 생각하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신앙을 김칫국 신앙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김치국은 많이 마실수록 좋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도 이런 김칫국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믿음의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갈렙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씀이 8,9,14 절에 3번 나옵니다. 그런데 갈렙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이 나오는 본문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특징짓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 노아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 요셉은 형통한 신앙처럼 그 사람을 특징짓는 단어가 나오는데 한마디로 갈렙의 신앙 특징은 온전히 좇은 신앙입니다. 좇았다는 말의 히브리 원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하나는 만족시켰다는 뜻이고, 하나는 붙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의미 같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붙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믿음을 이렇게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찰떡 신앙, 주님께 찰떡처럼 달라붙어 만족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찰떡 신앙을 가진 사람이 김칫국 신앙, 곧 성공의 신앙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나안 정복이 천국에 들어가는 상징이면서 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을 이루는 성공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갈렙은 85세의 노인이지만 바로 우리의 모델이요 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후배와 자녀들에게 바로 이런 모델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렙처럼 살아가면 주님의 성공을 얻을 뿐 아니라 나의 성공도 같이 얻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 누가 가장 좋습니까? 예!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갈렙 자신과 유다 지파가 제일 좋은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성공도 이루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성공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성공은 이루어도 결코 하나님의 목적은 이룰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열심히 사는 교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이민을 오셨는데 목사님이 근황을 물어봅니다. 집사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요 요즘 미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그래요? 뭘 하시는데요? 저 요즘 청소 열심히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뭘 하십니까? 제가 요새는 미국을 누비고 다닙니다. 뭘 하시는데요? 제가 요새 봉제 공장에서 열심히 바지를 누비고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자리를 잡고 기술을 배운 겁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또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뭐하십니까? 제가 요즘은 미국을 주름잡고 다닙니다. 하루 종일 세탁소에 옷을 주름잡고 있습니다. 그 분이 이제 돈을 모으고 기술을 배워 사업을 하게 된 거지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쓸고 다니든 누비고 다니든 주름잡고 다니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미국 교포들뿐이겠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내가 왜 열심히 일하느냐?를 알고 사는 겁니다. 그 목적을 알고 살아야 올바른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잘 막고 잘 입고 잘 살고 돈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내가 사는 모습을 통하여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삶이 있어야 진정한 성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갈렙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참된 성공을 이루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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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8-10 00:23
복음주의와 개혁주의(2)
II.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절단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개혁주의도 처음 사용된 의미에서 후에 범위가 확대되어 개념규정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개혁파와 개혁신학: 그 역사적 시작 본래 개혁신학은 천주교회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하자는 종교개혁 사상 중에 처음에는 루터파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성경적인 방향의 생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개 그 대변자인 쯔빙글리나 칼빈과 그와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의 생각을 지칭하여 개혁파(Reformed)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루터파와 영국 교회(성공회) 사상 일부와 개혁파에서 분리된 알미니안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런 방향을 지향해 나간 생각을 개혁파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개혁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의 신학과 실천을 개혁하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 중에서 한편으로는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례파와 견해를 달리하는, 그러다가 자신들의 입장도 개혁파로 인정해 달라는 (그리고 함의상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파 사상으로 삼자는) 항론파(the Remonstrants, 이를 후에 일반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언급하게 된다)에 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사상과 그런 교회를 지향해 가는 것을 개혁파라고 하며, 그런 사상을 가지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과 그들이 흩어진 유그노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전통을 개혁파라고 한다. 개혁파의 신학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이다.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라고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개혁파 운동 또는 (칼빈은 이런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을) 칼빈주의(Calvinism) 운동이라고도 표 현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지향하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하였고, 스코틀란드에서는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라는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Reformed Church in America나 Christian Reformed Church 같은) 개혁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교회가 따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신학과 사상은 근본적으로 개혁신학이기에, 이들 모두를 개혁파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의 한 분인 언드우드(Underwood)는 개혁파 교회(RCA)의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 출신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장로교의 선교 지원을 받아 장로교 선교사로 와서 우리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이므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은 원칙상 없다.1) 2.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잘못된 다양성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구의 교회와 그 신학의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성경에 충실해 가려는 좋은 의미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변화들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툴레틴(François Turrettini, 1623–1687) 이후 그의 아들 쟌-알퐁스 툴레틴(Jean- Alphonse Turrettini, 1671–1737)을 비롯한 제네바 교회의 변화와 같은 변화, 처음 성경에 충실한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모습, 비슷하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을 벗어난 스코틀란드 교회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파 교회 안에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자는 사람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 있지만 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해 나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분도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비판하지만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역동적 사상을 제창하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에게 찬동하는 분들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아주 소수파인 개혁파 교회 안에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가진 분과 슐라이어마허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과 본래 스위스 사람인 바르트의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게 되었다. 더 소수인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되었으나 정통 개혁파 사람들은 너무 소수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개혁파”하면 정통주의 개혁파가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2) 마찬가지로 개혁파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스위스 교회는 개혁파 교회인데, 그 안에 정통파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같이 있게 되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단으로 따지면 어디나 그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개혁파 교회들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잘못된 의미의 다양한 신학이 있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우리가 지향하는 정통파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루터파 입장을 지지한 분들이 17세기에 루터파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를 확립한 것과 비슷하게, 개혁파 입장을 드러낸 분들이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화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신학이나 동방정교회 신학과 다르고, 루터파 정통주의와는 다른 신학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언급한다. 이런 역사적 개혁파 정통신학과 연관하면서 17세기에 있는 그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16세기 개혁파 입장에 충실한 입장을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잘 체계화한 것과 같이 18세기에도 일부가 데까르트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비판적 태도로 카르테시안(Cartesian) 신학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19세기의 본격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분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성경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신학을 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20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입장을 유지한 분들이 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개혁파 정통신학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과 같이 대다수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점차 소수가 되어간다는 문제가 있고, 입장이 다른 분들과 대화하면서 일부 철저하지 못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분들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파 정통주의에 철저히 서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3) 4.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본적 주장4) 내용적으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철저한 “성경주의”(biblicism)를 뜻한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도 그러하고,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분들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렇게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들은 성경주의를 지향한다. 단지 우리가 어떤 이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우상 숭배하듯 하는 성경숭배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신학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신학은 ‘바른 신학’이라고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고 설명하면서 표현하기도 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사상에 충실한 신학을 하여 성경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철저히 따라 가되, 그 일을 우리의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룩한) 감정”과 “성령님을 따르는 의지”로 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인격적인 작업이고, 전생애적 작업이기에 이런 개혁신학적 작업은 항상 지속되어야 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 시대의 성경에 신실한 교회들의 모범을 따라서 계속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교회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일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경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가는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감당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하는 매우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동원되어 하는 매우 실천적 작업이다. 따라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후에 신학은 매우 이론적이며 동시에 매우 실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먼저 성경에 온전히 따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철저히 따르기 원하는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한 가르침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어떤 분들은 개혁파 사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대한 인정을 언급할 정도로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립하여 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선언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궁극적 권세도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반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 성경에 철저한 사상에서는 어디서나 “죄”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 을 어기고 자신을 주장해 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신학 중에서 개혁신학이 죄의 심각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자신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의 철저성에서도 그러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다른 건전한 신학과 함께 죄를 그저 “선의 결여”(privatio boni) 정도로 표현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방식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적 태도요 행위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켜 보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로서 그 어떤 형태의 죄도 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천주교회에서와 같이) 대죄(cardinal sins)와 소죄(가벼운 죄, venial sins)를 나누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생각해 보면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 가는 무시무시한 일이기에 죄인은 누구나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처음 죄”(the first sin) 때문에 있게 된 "본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과 "본래적인 부패성"(original corruption)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의식하는 사상도 철저히 성경을 따르려고 하는 개혁신학적 사상이었다. 물론 원죄는 천주교회도 말하고 루터파도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다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인식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죄를 부인하여 아담의 죄된 모범이 후대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된 모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의 부패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그것이 후대의 잘못된 신학사(新學史)를 만든 것이다.5)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하나님 주권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신학의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을 형성한다. (3)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우리 신학의 일차적, 근원적, 최종적 근거)과 구원 받은 우리의 경험(우리 신학의 간접적, 보충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 해야 한다. 즉,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구원 문제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신인협력주의[synergism] 사상을 지닌 천주교회에서처럼) 성경만을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좀 더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잘못되어 갈 수 있기에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반어적(反語的)인 상황의 하나는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가 나왔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요청 받은 제네바 유학 출신의 야곱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 10. 10– 1609. 10. 19)가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공식화 되게 된 “항론파”(Remonstrants)가 그의 이름으로, 즉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에서 보여 지듯이 이런 사상이 정형화 된 것에는 그의 내적인 공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개혁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증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가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잘 배운 후에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은 주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분 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그 믿음을 미리 보고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선행을 미리 보고서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위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알미니우스적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더 강화시킨 것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소위 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을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니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런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각기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아서 복음이 들려 오면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저항할 수 도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편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어도[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보편구원(universal salvation)은 아님] 는 것을 잘 의식하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혹시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야만 인간의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효과를 구원의 근거로만 만들고, 유효한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실제적인 구원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려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중생에 의해서 변화되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엡 2:1, 렘 17:5)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유효한 구속이 중생으로 이루어 여기서 나로 믿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에서 나온 이 믿음은 영원 전에(엡 1:3-5)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하신 선택을(로마서 9:11-13 참조)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선언한다. 이를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그런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한다. 이신칭의를 참으로 바르게 믿어야만 이런 구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배운 것 이기에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오직 성경”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산다. (4) 개혁주의적 삶에 대한 강조 구원에 대해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를 가진 개혁신학은 구원받은 성도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개혁주의가 (초기 근본주의와는 다른)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철저히 믿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와 같지만, (1)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형태로 드러나며,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고 오직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따라서 (3) 전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입장이다. 이런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철저히 믿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점을 중심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믿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를 성경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바른 대안이 역시 “개혁파 사상과 삶”(이것을 흔히 Calvinism이라고 한다)이 라고 할 수 있다.6) 이것은 과거의 개혁주의가 성경에 충실해서 이점에 있어서 좋은 입장을 잘 견지해 왔다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과연 개혁파인지를 판가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해서 강조해 왔고 또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힘써 나가는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이고 소위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게 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진정 개혁파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된다. 개혁파 성도는 그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믿으며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한다. 그 일상의 일의 상당 부분이 직장에서 하는 활동이고, 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사역의 무대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상당히 적대적이지만 바로 그 세상에서 그 세상의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에로 끌어 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보도록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개혁파적인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대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1)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하거나, 아니면 (2)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적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개혁파 성도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서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성도는 먼저, 우리들이 과연 자신들의 유익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혁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칼빈 때로부터, 철저한 자기 부인(self-denial)을 늘 강조해 왔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개혁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행하는 이 세상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세상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들을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려고 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의 직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파에서는 루터와 함께 우리의 직업을 “소명”(vocatio)으로 의식하면서 하나님 께서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을 가장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하여 가려고 애쓴다. 여기에 개혁파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5) 폭 넓은 문화 활동과 문화 변혁 활동에 대한 강조 지난 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개혁파 성도는 삶의 영역 전반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순종하려 고 하기에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그 활동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활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했다.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이 직업 활동에 드려지기에 직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않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 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의 대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직업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겨가야 한다. 그것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문화 활동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취미나 특기 등에 해당하는 활동이다. 또한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한다. 이 영역은 이 세상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점점 더 강조하여 가는 영역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서, 또는 건강을 위해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하여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들도 여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건강을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활동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여가 활동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한 활동의 한 부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문화 변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전문 분야로 하는 직업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업 이외의 관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 변혁은 주로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문가들만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실제적인 문화 활동의 유지나 변혁이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우리들의 비전문가적 참여도 전문가들의 활동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도 그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이나 건강 증진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의 목적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과연 어떤 문화가 주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교양인으로 문화생활에 폭 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문화 영역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의 한 영역을 택하여 지속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아마튜어로서의 연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닌 후에는 이런 분들도 웬만한 전문가의 식견에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상당수 모여서 전문가들의 활동을 누리고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집단이 되어 갈 때 이는 아주 강력한 문화 변혁 그룹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문화에 참여하여 나간다면 이 세상의 문화가 좀더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거나, 문화 영역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향유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영화를 선택하여 본다고 할 때 불신자의 영화 선택과 신자의 영화 선택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여가를 보내는 영역에서 참으로 성경적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파 성도들답게 사는 중요한 방식이다. 여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일중독자(workholic)로 사는 것이나, 여가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에서와는 달리 순전히 자아에 몰입하기 위해 여가 활동에 치중하는 것도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부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여가도 즐기되, 그 일이 이 세상의 문화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7) 그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이다. (6)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는 항상 이 땅 가운데 성경적 교회를 드러내는 일을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적 교회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첫째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적이려고 하려는 일에 큰 관심을 지닌다. 교회의 예배 나목회나 행정이나 교육이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따라서 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금도 통치하시니 하나님이 주관하여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성을 인정 함]. 셋째는, 그 하나님을 믿으니, 열심을 품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열심].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따른 개혁파적인 교회가 이 땅에 강력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 성도들이 나타낸 특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교회와 관련해서도 (1) 성경적이려고 해야 하고,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3) 누구보다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둘째와 세 번째 특성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하기에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잘 표현한대로, 열정 칼빈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도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주께서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열심히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 섬김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회 이해와 교회 섬김 이해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분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으니, 우리도 그 분들의 열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세워 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성경적 교회관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전”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해를 분명히 하여8) 다른 잘못된 교회 이해를 극복해야 한 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이 되게끔 하며,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 형식만 고친다고 되는 것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조금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이 전반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엄위에 부합한 경배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의를 가지고서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예배의 원칙을 잘 배워서, 진정 하나님께 적절한 성경적이며, 영적 예배를 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9) 우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리는 참된 개혁파적인 교회이기를 원한다. III. 나가면서: 복음주의의 개혁주의의 바른 관계성 따라서 우리가 말한바 정통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파나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개혁파가 아닌, 참으로 정통주의적 개혁파, 복음주의적 개혁파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신학과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가 배제한 바 있는 비복음주의적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복음주의 안에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를 그의 의도대로 철저히 따르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심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에 잘 표현된 이신칭의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런 믿음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웨슬리적 알미니안도 복음주의 안의 한 부분이다. 온 세상에 있어서 20세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다양한 오순절 교회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또한 미국의 바이블 벨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속하고 있는 세대주의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믿고 실천하며 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 우리는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1930-40년대에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때와는 달리 1970년대 이 후로 변화된 복음주의도 일단 이런 복음주의 현상 속에 있다. 코든 콘웰신학교의 데이비드 웰 스 교수께서 잘 분석한 바와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복음주의, 따라서 재구성된 복음주의, 무의식적으로 현대성(modernity)과 후-현대성(post-modernity)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두철미 실용주의로 옷 입은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근자의 복음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세속화와 현대성에 비판해 온 복음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문화에 완전히 잠식당한 모습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웰스가 잘 표현한 것과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지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10) 복음주의가 사실 복음주의 밖에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점을 잘 관찰한 웰스 교수의 탄식을 잘 듣고 그와 함께 탄식하면서, 복음주의가 새롭게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주의를 참된 복음주의답게 하는 일을 잘 해내 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와 그의 젊은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드 린츠는 철저한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를 버리고 개혁주의를 취하라고 하지 않고,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도록,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과거의 좋은 예를 제시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한다. 기본적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기의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웰스 교수의 외침은11)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려면 종교 개혁자들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즉 성경적 정통주의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한다.12)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준 진리를 고백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그리하였 듯이,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신학(historic Protestantism)이 필요하다고 한다.13) 이런 제안을 하는 웰스의 신학을 다음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철저힌 복음주의적이고, 결국 개혁파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되었음과 성경의 충족성을 온전히 주장하고,14) (2) 하나님의 거룩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변호하며,15) (3)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16)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against God) 범죄이기에 “가장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뒤틀림”이라고 하고,17)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18) 정확히 보는 성경적 죄 이해에 충실하다. 또한 그는 (4) 그리스도 사역의 충족성을 잘 드러내고, 유일하신 신인(神人, the God-man)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를 극치(極致)에 이르게 하실 분 이시라는 것을 잘 강조한다.19) (5)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손상 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Christ alone)을 잘 지적하면서,20) 이를 분명히 해야만 “오직 은혜”(sola garatia, grace alone)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21) (6) 만일에 “중생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 앞 에서 살 수 있는 역량도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22) (7) 교회를 구속받은 성도들이라고 하고,23) [어거스틴이나 개혁자들을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는 또한 (8) 교회의 표지를 개혁파의 3가지 표지로 명확하게 제시하고,25) (9) 완전한 사람과 교회는 이 땅에 없으나(pace perfectionism and pace Donatists)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은혜에 근거해서, 그저 사회적 교양의 태도(social niceness) 이상의 경건의 삶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26) (10)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고 권한다.27) 이처럼 웰스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신학자이다.28) 이를 보면 그가 참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지 아니한가? 복음주의를 철저한 복음주의가 되도록 외치고 이끄는 개혁파 신학자의 한 예가 여기 있다. 또한 고든 콘웰에서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즈 린츠도 복음주의 신학을 새롭게 하자고 복음주의 신학의 프로레고메논을 제시하면서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했던 구속사적 방법을 따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었다.29) 바로 이런 것이 정통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바른 관계라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웰스와 린츠가 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30) 이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개혁파 사람들이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한 복음주의자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참된 복음주의자들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핫지와 워필드가 막 세속화되기 시작하던 미국에서 했던 일, 20세기 말에 웰스와 리쳐드 린츠가 세속화된 미국에 서 했던 일을 우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자들로서 여기 이곳에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주 1) 화란 개혁파 교회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교회 운영상 사소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 소한 차이이지 그 두 교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르 트 회의와 같은 소위 International Calvinism을 드러내는 국제적 모임에서 다 같이 개혁신학의 이 름으로 같이 모인다. 2) 그래서 악상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좋은 정통 개혁파 신학교는 학교 이름을 개혁파 신학교(Reforemd Seminar)에서 얼마 전에 깔뱅 신학교(Calvin Seminar)로 고칠 정도가 되었다. 3) 상당히 다른 형태로 정리된 것이지만, 이전에 개혁주의의 특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필자의 시도로 다 음을 보라. 이승구, “개혁신학의 독특성” (1987),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 부, 1995), 91-135; idem,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특성들”(2005),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15-28. 4) 이하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당시 편집장이신 현창학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특성을 규장하기 위해 <합신은 말한다>에 여러 번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5)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에 이해하기 좋은 진술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 수룬, 1998), 최근판 (서울: 나눔과 섬김, 2015), 83-89.를 보라. 6)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역시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 애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교회와 문화」 33 (2014년 여름):119-46;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로교회와 신학」 12 (2015): 160-83. 또한 2021년 봄 개혁신학회에서 발제 한 박태현 교수의 논문도 보라. 7) 그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기독교적 문화변혁론”,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 울: SFC, 2007), 개정판 (서울: CCP, 2018), 361-84. 8)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1996), 개정판 (서울: 말씀과 언약, 2020)을 보라. 9) 여기서 말하는 바른 예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117을 보 라. 1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8. 11) Wells, Losing Our Virtue, 209;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 1994), 227. 1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 57f. 1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을 인용하면서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74 에서 했던 말이다. 1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75-84=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20-32. 웰스는 하워드 마샬의 성경관과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미지 중 일부는 받 아들일 수 없고, 과거에 그런 식의 계시를 주셨지만 “지금은 우리들은 거기서 해방시키신다”는 견해 (I. H.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4])와 성경이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 진리를 담고 있거나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견 해를 조롱하면서, 성경은 마치 마지막 막은 쓰지 않고 주신 대본 같아서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라이트의 견해(N. T. Wright,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5])를 비판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85-86=용기 있는 기독교, 133-34). 15)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m 199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24-33=용기 있는 기독교, 특히 187-200. 16)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8)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는 기독교, 352. 그는 이것은 어떤 테크닉을 동 원해도 고칠 수 없는 난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 는 기독교, 353). 19) Wells, The Person of Chris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4), 개정역, 기독론: 그 리스도는 누구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92-207=용 기 있는 기독교, 281-302. 2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1)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7=용기 있는 기독교, 342. 2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19=용기 있는 기독교, 317. 2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3=용기 있는 기독교, 350. 2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26-41=용기 있는 기독교, 327-48. 26) Cf.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9-41=용기 있는 기독교, 344-48. 2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6=용기 있는 기독교, 354f.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은신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28)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27-28. 29) Richard L.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30) 그런 시도와 제안들로 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42-52와 2001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 발제한 다음 논문을 보라. 이승구, “세계 신학계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신학의 제언: 사도적, 성경적, 종말 신학에 의 요청”,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339-46. 또한 장로교회의 방향을 위한 제안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열렸던 한국 장로교 신학회 제 1차 논문 발표회에서 발제했던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장로교회의 의미“,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201-37도 보라. -
김병중 08-09 23:49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인데 상황이 아주 복잡해져서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신학을 처음 하는 학우들이 늘 질문하는 문제의 하나로 “도대체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이번 학회에서 이 주제로 논의하기로 하였으니, 특히 신학을 처음으로 하는 학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논의하고, 개혁주의의 특성을 드러낸 후에,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I.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기원과 다양한 영향들 복음주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복음주의는 그저 종교적 운동으로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이해되야 한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 이해이다.1) 기본적으로 천주교회를 개혁하면서 루터가 이신칭의의 복음이 있는 곳은 참된 교회이고, 이신칭의가 드러나지 않는 곳은 잘못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운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런 입장이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때부터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일컬어 왔다. 루터파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Evangelishe Kirche)로 지칭된 것이다. 물론 후에 루터파 교회 안에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독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 교회(즉, 루터파 교회)가 모두 다 우리가 조금 후에 말하는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상황이 나타났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루터파 교회(에방겔리쉐 카르케)의 아이러니”라고 해보자. 일단 본래적 의미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이 복음주의였다. (계속해서 독일 상황을 말하자면) 천주교회에 반대하면서 이신칭의를 말하던 루터파 교회와 루터파 정통주의를 추구하던 이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가 좀 냉정해져서 엄밀한 루터파(Gnesio-Lutherans)라는 것을 강조하면서,2) 그 안에 복음적 열정이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을 죽은 정통(dead orthodoxy)으로 인식하면서, 이신칭의를 비롯한 개신교의 기본적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교리를 배제하면서 성경에만 충실하자고 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운동도3) 복음주의에 속하고, 후대의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4) 그러므로 독일 상황에서는 루터파 정통주의에 충실하면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루터파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독일적 경건주의 운동이 복음주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할레대학의 설립과 그 졸업생들의 선교적 노력, 또한 진젠도르프 백작과 함께한 이들, 즉 소위 모라비안 교도로 지칭되는 이들의 성경적 삶의 실천과 선교적 노력은 후대 복음주의 운동의 큰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역시 종교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과 개혁된 교회의 모습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청교도”라고 불렸다. 청교도는 기본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개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교도들은 고치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5) 그래서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청교도들 가운데 있었다. 이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후대의 용어로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와 21 세기에 언급되는 복음주의와 16세기 말과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청교도 운동이 이전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말을 사용한 일도 있다.6) 여기 청교도와 오늘날 복음주의의 특성이 다양성이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교도는 국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후에 국교회로부터 분리한 분리주의자들도7) 복음주의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영국에는 상당히 중도적이었던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1583) 같은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8) 국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교회 안에 있기를 원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c. 1535–1603)를 비롯한 상당수의 청교도들, 그리고 후에 어쩔 수 없이 국교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dissenters),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 1662년에 있었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662) 때문에 일어난 소위 “대축출”(the great ejection) 때에 밀려난 2,000여명의 목사들, 즉 소위 (당시 영 국 국교회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the Nonconformists), 그리고 의도적인 분리주의 자들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주의의 선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 타의반 자의반 분리되어 그들이 옥스퍼드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할 때부터 들었던 별명인 “법식주의자들”(methodists)라는 그 이름 그대로 교단이 된 웨슬리파 사람들인 감리교회(Methodist)의 초기도9) 후대 복음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휘필드나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힘을 합하여 복음주의적 운동을 했었다고 할 수 있다.10)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이들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마크 놀의 책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18세부터 20세기에도 영국 국교회 안에도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있었고, 국교회를 떠나게 된 감리교회는 처음에 강력한 복음주의적 모습을 드러내었다.11) 그들은 복음전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해외 선교를 강조하면서 <교회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만들고, <식민지와 대륙 교회 협회>(The 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 1838)를 결성하여 여러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 힘썼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경 우도 있다.12) 물론 그것이 16-17세기 청교도들과 연관된 저교회적 태도(low church attitude)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당시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1790년에서 1830년대에 영국 사회의 중요 인사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클래프햄 파(the Clapham Sect)에 속해 있었다. 그 들 중에 하원 의원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노예무역을 철폐하는 일을 위해 노력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성공회 안의 천주교적 유산을 강조하던 옥스퍼드 운동 (the Oxford Movement)에 반발하면서 오직 성경에 충실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결국 이들이 힘을 합해서 1846년에 런던에서 복음주의 연맹(The 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또한 리버플의 주교였던 존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1816–1900) 같은 이는 복음주의적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상황에서는 마틴 로이드-존스와 존 스토트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함께 주도했던 청교도 컨퍼런스(the Puritan Conference)와 같은 모임(1956-1969)이 중요했고,13) 학문적 운동으로는 1944년에 캠브리쥐에 세워진 틴델 하우스, 그보다 영향은 적었지만 옥스퍼드에 세워졌다가 경제적 문제로 지금은 라티머 트러스로로 축소되어 런던에 있는 옥크 힐 컬리쥐로 옮긴 라티머 하우스, 그런 것을 따라 스코틀랜드에 1981년에 논의를 따라 1983년에 세워진 에딘버러의 러더퍼드 하우스 또는 개혁신학을 위한 러더포드 센터(Rutherford Center for Reformed Theology)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4) 학교로는 영국의 옥크 힐 칼리쥐(Oak Hill Theological College), 2004년에 런던 신학교(Lond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꾼 1943년에 성경 통신 과정으로 시작된 런던 바이블 컬리쥐 등이 초교파적 복음주의의적 선교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지금은 에딘버러 신학교(Edinburgh Theological Seminary)로 이름을 바꾼 1843년 11월에 시작된 프리 쳐치 컬리쥐,15) 비교적 근자인 1994년에 Andrew McGowan과 Hector Morrison의 노력으로 세워진 하일랜드 신학교(Highland Theological College)가16) 스코틀랜드에서, 2016년에 연합 신학교(Uni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꾸고 젊고 활동성 있는 젊은 학자인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인도 하에 활동하고 있는 웨일즈 복음주의 신학교(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가 웨일즈에서, 그리고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러쥐,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 등이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57년에 이안 머레이와 잭 컬럼(Jack Column)이 세운 개혁파 출판사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이 그 여러 활동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 복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이안 머리(Ian Murray)의 큰 영향력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미국과 우리나라의 IVF에 해당하는 UCCF의 활발한 활동들과17) 복음주의 신학생 모임인 이전에 TSF이던 RTSF(the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ents Fellowship)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인 「떼멜리오스」(Themelios)는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부터 나오는 「에반젤리칼 타임즈 (Evangelical Times),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그리고 1929년부터 내고 있는 분기 별 저널인 「복음주의 퀄터리」(Evangelical Quarterly)도 영국 복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의 다양성 미국에서는 그 이전까지 이민온 집단의 교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19세기 초부터 사람들의 도시로의 이동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 사회를 변혁시킨 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18)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19)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시각이다. 이런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는 시대별로 다양성을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복음주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특히 이런 제목으로 편집된 책을 낸 북 침례교 신학교의 도날드 데이톤과 노뜨팍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의 로버트 존스톤이 편집한 책은 그야말로 다양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전천년주의와 관련한 복음주의자들, 오순절 전통의 복음주의, 북미 성결 운동과 관련된 복음주의자들, 흑인 종교와 복음주의 정체성, 그리스도 교회적 복음주의자들, 침례교적 복음주의자들, 자의식적 개혁파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루터파 복음주의자들.20) 심지어 로버트 웨버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연관되는 14개의 다양한 복음주의자들 그룹을 언급하기도 했다.21) 그런데 1960년대 이후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이보다 더한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가 1962년에 미국 여행을 하면서 강연한 강연 내용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낸 것과 같은 것이 이런 다양성의 대표적 양상이다.22) 버나드 램 (Bernard L. Ramm, 1916-1992) 같은 이는 복음주의 신학을 거의 바르트주의 신학으로 생각할 정도이고,23) 유럽에서는 아주 보수적인 그룹을 제외하고서는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의 이런 모습을 신정통주의의 위협이라는 말로 헌터는 표현한 일도 있다.24)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본다.25)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복음 주의의 절단선을 논하면서 논하기로 한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분위기를 철저히 의식하면서 그에 따라서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미 1993년에 나온 바 있다.26) 또한 이 제안을 했던 지금은 돌아가신 스탠리 그랜츠(Stanley J. Grenz, 1950–2005)가 그런 입장에서 새로운 조직신학을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포괄적인 조직신학 책을 내기도 했다.27) 많은 작업을 하던 그렌츠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연 이와 같이 복음주의가 수정되어도 좋은지를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는 너무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변모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사람들이 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 자에 포스트모던적 분위기에 잘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28) 3. 복음주의의 절단선(The Edge of Evangelicalism)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너무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기에 복음주의의 절단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너무 비평적 입장을 유지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29) 근자에는 리쳐드 라이스(Richard Rice),30) 윌리엄 하스커 (William Hasker),31) 클락 피녹(Clark Pinnock),32)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Boyd),33) 그들과 함께 데이비드 배신저(David Basinger),34) 존 샌더스(John Sanders)35) 등이 주장한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은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36) 물론 이런 선언들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을 넓게 유지하자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절단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며 특히 20세기 여러 신학적 논쟁이 드러난 상황을 생각하면 복음주의의 절단선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37) 첫째, 성경의 영감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 대개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연관시켜 신학적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성경의 권위는 상당히 높게 인정한다. 그러나 단지 성경의 권위를 말한다고해서 그런 모든 사람들이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말한 후에 결국 복잡한 논쟁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과 복음 주의 교회를 결국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 영감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감의 방식으로는 유기적 영감과 영감의 정도로는 축자영감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이 받아쓰기 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기계적 영감을 바른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바도 없고, 기본 사상이나 핵심만 영감 했다는 사상 영감은 복음주의의 영감론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모든 특성을 다 사용하셔서 인간 저자의 모든 기능이 다 사용되므로 인간 저자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인간적 오류가 스며들지 않게 하셨다는 ‘유기적 영감설’이 복음주의적 영감설이다. 또한 영감의 정도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인간 저자는 그저 도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 입장이 아니다. 또한 성경의 일부분만 영감하였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역동적 영감설은 주장하는 것도 복음주의 영감론이 아니다. 복음주의 영감론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므로, 결국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미치는 영감’[逐字靈感]을 말할 수밖에 없다.38) 이런 ‘유기적 축자 영감’을 말하므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믿는 바와 삶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 원칙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실질적으로는 제쳐 놓는 이들은 엄밀하게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모두 성경에서 찾아내고, 모든 결론을 성경에게 이끌어 낸다. 복음주의는 또한 실천의 모든 것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성경이 최종적 결론을 가지는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둘째로,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자들이 잘 제시하고 정리한 성경적 이신칭의 사상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이신 칭의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세관점을 이런 점에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이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정통적 교회였고, 이에서 벗어난 것을 이단으로 하였고, 종교 개혁 시기에 사도적 가르침을 회복해 낸 것이 개혁자들이었으므로 어느 시대든지 1세기 사도들이 가르친 그 가르침이 기준이다. 복음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에도 1세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이다.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것이나 그것을 성경이 가르친 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런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천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조차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미주 1) Cf.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available at: http://nationalhumanitiescenter.org/tserve/nineteen/nkeyinfo/nevansoc.htm: “Evangelicalism needs to be understood not only as a religious movement, but also as a social movement.” 2) 이 때 독일에서 비판받던 사람들이 필립 멜랑흐톤과 그를 따르는 소위 “은밀한 칼빈주의자들”(Crypto Calvinists)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Jürgen Diestelmann, “Philippism-Melanchthon and the Consequences: An Observation in the ‘Year of Melanchthon,’” LOGIA - A Journal of Lutheran Theology 6/4 (1996): 3-6, available at: https://web.archive.org/web/20060614173132/http://www.luther-in-bs.de/melaeng.htm. 3) 그런데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정 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더 나아가는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으로 나타 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란 교회사에서 1600년에서 1750년대를 “더 나아가는 종교개 혁”(Nadere Reformatie)의 시기로 언급하곤 한다. Cf. Willem J. van Asselt & Paul H. A. M. Abels, “The Further Reformation,” Herman Selderhuis, ed., Handbook of Dutch Church History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5), 338–41; https://en.wikipedia.org/wiki/Nadere_Reformatie; 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도 서출판 대서, 2011)도 보라.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잘 인정하듯이, 화란의 경건주의는 우리가 후론할 영국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Anthony Milton, “Puritanism and the Continental Reformed Church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ritanism, eds., John Coffey & Paul C. H. L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18– 19. 경건주의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을 잘 주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 면, 화란의 경우에는 전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경건주의를 대변하는 후티우스 (Voetius) 같은 인물이 동시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대변인 중의 하나인 것과 대조해서, 17-18세기 독 일 경우에는 경건주의의 대변인들인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663-1727) 등이 루터파 정통주의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4) 거의 모든 역사에서 경건주의가 복음주의의 한 기원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라. Cf. F. Ernest Stoeffler, ed., Continental Pietism and Early American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76); C. John Weborg, “Pietism: Theology in Service of Living Toward God,” in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161-83; Roger E. Olson, “The Roots of Evangelical Theology in Pietism,” in his The Westminster Handbook to Evangelical Theology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10-16. 5) 이점에 대한 지적으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2003),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최 근판 (서울: CCP, 2018), 65-66와 그에 인용된 여러 저자들을 보라. 6)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6. 7) 이런 사람들의 원조는 1567년부터 있었고, 특히 Robert Brown (1550?-1633)이 친구인 Robert Harrison과 함께 1581년에 놀위치에 독립회중(an independent gathered congregation)을 세운 것과1592년에 분리주의적 회중교회(Puritan Separatist)를 세운 것, 이 교회와 여러 회중교회가 암스 테르담으로 간 것, 라이덴으로 간 스크루비 회중교회, Gainsburgh에서 회중교회 목사가 된 John Smyth(1570?-1612)가 1908/1609년경 자신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물을 쏟아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화란 땅에서 형성되어 소위 General Baptist의 시조가 된 것, 라이덴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던 Henry Jacob 목사(1563-1624)가 1616년 영국으로 돌아와 Southwark에 세운 회중교회, 이 교회에서 1630 년대에 분리한 일부 신자들이 John Spilsbury를 목사로 세우고 형성된 Particular (or Calvinistic) Baptists 운동이 이런 분리주의적 청교도의 모습의 한 단면이다. 이에 대한 간단한 정리로 앞서 언급 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2-63을 보라. 8) Cf. Patrick Collinson, Archbishop Grindal, 1519-1583: The Struggle for a Reformed Church (J. Cape, 1979). 9)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감리교회가 복음주의적 성격을 버리고 가장 진보적인 교 단이 된 것은 “메토디스트의 아이러니”라고 지칭할 만한 이상한 일이다. 특히 미국 United Methodist Church의 모습이나 한국 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러니를 잘 생각하게 된다. 10) 이들의 사역에 대한 좋은 논구로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을 보라. 11) 이들을 잘 다룬 것이 스털링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시고, 우리 IVF에 해당하는 영국 UCCF 운동의 열심이신 데이비드 베빙턴 교수의 책이다. David 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the 1980s (London: Routledge, 1989). 이 귀한 책에 대 한 이은선 교수님의 번역을 보라. 영국의 복음주의 (서울: 한들, 2009).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복 음주의 역사를 잘 규정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 학자들의 다음 같은 책 제 목을 주목하여 보라. Crawford Gribben, Michael Haykin, Kenneth J. Stewart, eds. Continuities in Evangelical History: Interactions with David Bebbington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9). 12) 그렇게 표현한 대표적인 경우로 다음 고든 멜톤 교수의 글을 보라. J. Gordon Melton, “Anglican Evangelical,” in Encyclopaedia Britannica, available at: https://www.britannica.com/topic/Evangelical-church-Protestantism. 13) 이 때 발제된 글들의 모음으로 D. Martyn Lloyd-Jones & J. I. Packer, ed., Puritan Papers: 1956–1969, 5 vol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0–2005)을 보라.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의견 차이로 말미암은 복음주의자들의 분열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Ian H. Murray, Lloyd-Jones: Messenger of Grace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8), chapters 8-9. 이 분열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의견을 표현하는 저스틴 테일러의 다음 글 도 보라: Justin Taylor, “50 Years Ago Today: The Split Between John Stott and Martyn Lloyd-Jones,” TGC Blogs, posted on OCTOBER 18, 2016, available a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blogs/evangelical-history/50-years-ago-today-the-splitbetween-john-stott-and-martyn-lloyd-jones/ 14) https://www.rcrt.scot/ 1983년부터 10년 동안 초대 원감(Warden)을 하였던 Nigel Cameron 박 사는 주로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작업을 인도했고, 그 후에는 David Searle 목사가 2003년까지 원감 을 하다가, 소장(Director) 체제로 바꾸어 밥 피올 박사(the Rec. Dr. Bob Fyall)께서 4년 동안 소장 을 하였고, 2008년부터는 제이슨 컬티스 박사(Dr Jason Curtis)가 섬겼고, 한동안 소장 없이 지내다 가 지금은 2019년에 선임된 (하일랜드 신학교의) Andrew T. B. McGowan 교수가 소장으로 있다. 15) Cf. https://ets.ac.uk/about/history-and-heritage/ 16) https://www.htc.uhi.ac.uk/about-us/ 17) Cf. https://www.uccf.org.uk/ 18)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의 논의를 보라. 19) 1980년대 초까지의 미국 복음주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버지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James Davidson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the Quandary of Modernity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도 보라. 20)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이 책에서 심지어 1860년 미국 미시간 주 배틀 크릭 (Battle Creek)에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엘런 화이트(Ellen White),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존 앤드루스(John Andrews) 등에 의해 창립된 안식교회도 이 다양성 안에 넣dj 제시하고 있 다. 21) Robert E. Webber, Common Roots: A Call to Evangelical Maturity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2. 22)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3). 23) Bernard L. Ramm, After Fundamentalism: The Future of Evangelical Theolog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3). 24) James Davidson Hunter, Evangelica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5. 25) 특히 버나드 램에 대한 다음 학위 논문들을 보라: Robert L. Jones, “Scripture and Theology: An Analysis of Bernard Ramm's Proposal to Adopt Karl Barth's methodology,” Th. M. diss.,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1985; Kenny Regan Pulliam, “A Critique of Bernard Ramm's Doctrine of the Bible,” Ph. D. diss., Bob Jones University, 1986; 그리고 Simon Sze Wang Wat, “Bernard Ramm’s Reception of Karl Barth’s Doctrine of the Word of God,” Ph. D. diss., 2011. 또한 다양한 평가들에 대한 논의로 Phillip R. Thorne, Evangelicalism and Karl Barth: His Reception and Influence in North American Theology (Pittsburgh, PA: Pickwick Publications, 1995)도 보라. 26)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e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 (Downer Grove, IL: IVP, 1993). 27) Stanley J. Grenz,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94). 또 한 Renewing the Center: Evangelical Theology in a Post-Theological Era (Grand Rapids: Baker, 2000)과 John Franke와 함께 낸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도 보라. 28) 이 문제를 잘 분석하고 명료히 드러낸 데이비드 웰스의 논의를 보라. 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93), 115, 127; David Wells, Losing Our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8), 61f.; David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Grand Rapids: Eerdmans, 2008), 48f. 이를 언급하고 있는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서울: 말씀 과 언약, 2021), 58을 보라. 29) 그 대표적인 예로 1961년 브루스 지도하에 만체스터 대학교에서 학위를 하고(그 학위 논 문은 1967년에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8호인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Leiden: E. J. Brill., 1967]로 출간된었다), 1962년부터 싼타 바라라(Santa Barbara)에 있는 Westmont College의 신약과 희랍어 교수로 있던 로버트 건드리에 대한 노르만 가이슬러의 비판적 문제 제기 후에 1983년에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건드리가 탈퇴한 것을 들 수 있다. Cf. Leslie R. Keylock, "CT Classic: Evangelical Scholars Remove Robert Gundry for His Views on Matthew," Christianity Today (1984. 2. 3): 47, Available: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3/novemberweb-only/11-17-42.0.html. 본래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의 마태복음 주석을 쓰도록 되었던 Robert H. Gundry의 마 태복음 주석 내용을 편집 비평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Merrill C. Tenney와 James M. Boice가 받아 들이기 어려워하자, 결국 이 시리즈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MI: Eerdmans, 1982)으로 출판된 책에 대한 미 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평가였다. 30) Cf.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of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ennessee: Review & Herald, 1980). 31) William Hasker, God, Time, and Knowledge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Hasker, Providence, Evil, and the Openness of God (London: Routledge, 2004). 32) Clark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2); idem,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idem, Most Moved Mover: A Theology of God’s Openness (Grand Rapids: Baker, 2000). idem and Robert C Brow, Unbounded Love: A Good News Theolo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arlisle, UK: Paternoster &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33) Gregory Boyd, God at War: The Bible & Spiritu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7); idem, Satan and the Problem of Evil: Constructing a Trinitarian Warfare Theodic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1); idem, Is God to Blame? Beyond pat Answers to the Problem of Evil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3). 34) Clark Pinnock, Richard Rice, John Sanders, William Hasker & David Bassinger,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David Bassinger, The Case for Freewill Theism: A Philosophical Assess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35) Cf. John Sanders, The God who Risks: A Theology of Providenc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idem & Chris Hall, Does God have a Future? A Debate on Divine Providenc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3). 36)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는 2001년 11월 16일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될 모든 결정 들과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들의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든 사건들에 대 한 온전하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가지신다고 분명히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결의안을 밤 늦게까지의 토론을 걸쳐 41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253명의 찬성과 66명의 반대로 결의하였 다. 이로써 그 동안 복음주의 신학회 내의 몇 회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견해 (the “openness of God” view)는 복음주의적 확신 밖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 다. 이를 알리는 기사의 예로 Russell D. Moor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Rejects ‘Open Theism,’ Affirms God’s Foreknowledge,” Baptist Press, November 20, 2001, available at: https://www.baptistpress.com/resource-library/news/evangelical-theological-societyrejects-open-theism-affirms-gods-foreknowledge/ 이 사건 이후 왜 이렇게 결정해야 하 는 지를 밝힌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의 부르스 웨어의 글로 다음을 보라. Bruce A. Ware, “Defining Evangelicalism’s Boundaries Theologically: Is Open Theism Evangelical,“ JETS 45/2 (June 2002): 193–212.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 Garrett Ham, The Evangelical and The Open Theist: Can Open Theism Find Its Place Within the Evangelical Community? (B00L3ROPFA, 2014). 미국복음주의 신학회의 이런 결정에 동의하는 Nick Needham, “The Cutting Edge: Open Theism,” Evangelical Times (November 2002), available at: https://www.evangelical-times.org/articles/open-theism/ 37) 결국 의미는 같지만 복음주의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하나의 규범적 접근을 하면서 다음 세 가지 기 준을 제시한 적도 있다: (1) “복음주의는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성경관을 가진다. (2) 복음주의의 성 경 해석은 복음주의 성경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다. (3) 복음주의자들은 말씀의 뜻 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바른 실천을 하는 자들이다.”(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호,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수원: 합동신학원 출판부, 2012], 42-52에 재수록, 인용은 43에선 온 것임). 38) 이런 정통적 영감론의 대표적 진술로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8)을 보라. 이런 영감론에 대한 자세한 진술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정 통주의적 성경관에 따른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 이해: 특히 B. B. 워필드와 E. J. 영을 중심으로”, Origin Research Journal 1/1 (October 2021): 72-97; idem, “워필드 신학의 개혁신학적 특성”. 「교회와 문화」 29 (2012년 8월): 77-110. -
김병중 03-18 17:55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 연구』
I. 들어가는 글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부흥과 성장이 주춤하더니 2020 년에 와서 코로나 19의 직격탄을 맞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방역을 이유로 정부로 부터 각종 소그룹 모임과 식사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가 금지당한 것은 물론이고, 정규 예배마저도 집합 인원이 제한당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는 신앙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다. 집합 제한 기간이 장기화함에 따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에 출석 교인 30% 정도가 교회로 복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우려스러운 통계도 나오고 있다.1) 실제로 10월 5일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16%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2) 과연 언제쯤이면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다시 소그룹 모임을 시작할 수 있을까? 2020년 5월 14일에 WHO는 COVID-19는 팬데믹(pandemic)을 넘어 엔데믹 (endemic)이 될 수 있다는 우울한 경고를 했다.3) 엔데믹이란 말라리아(Malaria)나 뎅기열(Dengue fever)처럼 지역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을 의미한다. 한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2021년 11월 초에는 위드 코로나(with COVID-19)를 시작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4) 이런 추세라면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머지 않아 다시 소그룹 모임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형외과적 치료 후에는 재활 치료가 꼭 필요하듯이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정체된 신앙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설교자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연구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부터 모색하려고 한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때 생명력 있는 설교와 설교 후의 말씀 나눔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활성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베뢰아의 성도들은 말씀을 받은 후에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이같은 성경적 모범을 따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해결책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둘째는 청중들도 받은 말씀을 서로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수준을 높이고 청중은 받은 말씀을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설교 비평의 근거와 기준, 그리고 실행 방법은 무엇인가? 1) 이 내용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코로나19 이후 2021년 한국교회 변화 추적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8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 트: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1847.2)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10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8335.3) 「중앙일보」 (2020년 5월 14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76686#home.4) 「KBS NEWS」 (2021년 10월 7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95884. 선포된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 활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론 정립과 방법론을 마련할 필 요가 있다. ⓵먼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이론적 근거를 확인하고 ⓶설교자의 설교를 더욱 발전시킬 방안을 마련한 후에 ⓷청중이 설교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청중의 자발적인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II. 펴는 글1.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비평 사례(事例) 1)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열정적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달한 설교자를 격려하고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청중 역시 그 말씀을 통해 성숙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근거는 독일의 설교학자 Rudolf Bohren(1920~2010)의 설명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다.5) Bohren은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열정적 공감을 유도하는 방안으로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Bohren은 설교에 관한 그의 역작 Predigtlehre 마지막 장(章)에서 설교 비평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力說)한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 비평이 설교의 추가 부록이 아니며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평(批評)이란 그 용어부터 부정적 느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Bohren이 교회 성숙에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Bohren이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청중이 설교를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다. Bohren이 생각 하는 설교 비평은 설교를 찬미하고 설교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마치 설교가 본문의 찬미인 것처럼 설교 비평은 설교 찬미를 목적으로 삼는다.6)다시 말하면, Bohren이 말하는 설교 비평이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음을 표현하는 열정적 공감이다. 그래서 Bohren은 설교 비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교 비평의 과제는 설교의 이해와 설교에 관한 기쁨을 재촉하는 일에 있다. 설교를 듣는 도움을 주려고 한다. 설교와 꼭같이 말씀에 봉사하는 길이다.”7) 5) Rudolf Bohren은 스위스 Grindelwald에서 태어난 스위스인 목사이지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University of Heidelberg) 등에서 교수 활동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독일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에서 사망했기에 독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박근원 옮김, 『설교학실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287.6) Rudolf Bohren, 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8.이처럼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은 비평에 노출된 설교자와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중 모두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Bohren은 설교 비평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설교자나 설교 비평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중은 말씀 안에서 성숙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한다. Bohren은 교회 안에서 설교 비평이 방해를 받는 동안에는 말씀의 진행도 방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본질이다. 다만, 설교 비평은 찬미가 목적이기 때문에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숙한 교회는 건전한 설교 비평을 통해 더욱 성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8) 2) 청중 참여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해서이다. 설교에서 청중은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Fred B. Craddock과 Lucy Atkinson Rose의 설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Craddock은 오늘날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되 설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교자에게 말하고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9)Rose 역시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Rose는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에서 설교학의 흐름을 전통적인 설교학과 케리그마 설교학, 그리고 신설교학으로 구분하여 각각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하였다. 그 후 신설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대화 설교(conversational preaching)를 제안하였다. 여기에서 Rose는 설교의 목적을 “교회의 중심적인 대화를 촉진시키고 강화하기 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 주위로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10) 설교의 목적이 ‘청중을 대화 테이블로 초대하는 것’이라면 대화 테이블로 모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모여서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Rose는 Dietrich Ritschl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설교자와 회중은 함께 만인 제사장의 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함께 공유하는 제사장적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해석해야 한다.”11) 더 나아가 Rose는 설교는 설교자만의 고유한 사역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사역이라는 Ritschl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Rose의 대화 테이블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아마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일 것이다.Rose는 Craddock을 잇는 신설교학자로서 설교의 목적이 진리를 전달하거나 하나 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9) Fred B. Craddock, , 이우제 옮김, 『크래독의 설교 레슨』 (서울: 대서, 2007), 37.이승진 옮김,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서울: 기독교10) Lucy Atkinson Rose, S 문서선교회, 2010), 190.11)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79-81. 님과의 만남을 중재하거나 회중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는 신설교학의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12)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Rose의 설교관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대화할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Rose의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설교 비평의 필요성은 설교의 적용이라는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Daniel M. Doriani는 적용의 네 가지 측면을 의무, 성품, 목표, 그리고 분별력으로 구분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청중의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다. ⓵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⓶나는 어떻게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⓷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가? ⓸우리는 어떻게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얻을 수 있는가?13)Doriani는 적용을 청중의 의무로 남겨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적용으로 청중을 데려갈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중을 적용까지 데려가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주체는 청중 자신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결심한 내용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 3)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설교 비평 사례이처럼 중요한 설교 비평은 성경 속에서, 그리고 교회사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그 사례를 확인해 볼 때 그 필요성에 대하여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모범적인 설교 비평의 사례가 있다. 성경 속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설교 비평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교회사에서는 청교도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의 바람직한 전통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설교 비평 사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로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와 그녀가 주를 본 사실과 예수님이 전하신 가슴 벅찬 말씀을 전하였다(요 20:18). 또 다른 예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후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달려와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달하였다(눅 24:35).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서로 나누는 모습은 설교 비평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한 일시적 현상인가? 사도행 12)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90.13) Daniel M. Doriani, Getting the message : a plan for interpreting and applying the Bible,정옥배 옮김,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1), 133.전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부활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이 아닌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뢰아에서도 이런 현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 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후에 그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하며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14) 그런가 하면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는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났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반감을 품도록 선동하였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는 기뻐하며 그 말씀으로 서로 대화하든지 혹은 반발하든지 어떤 종류의 반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이 조용히 귀가하고 잊어버린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다.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 들은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고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설교 비평의 사례는 교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을 강조했고 또 실천했다.15) 설교 비평(설교 나눔)은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가족들과 하는 것이 신명기 6장에 나타난 쉐마의 정신에 부합된다. 그런 정신에 입각하여 17세기의 영향력 있는 청교도 가운데 Lewis Bayly(1575~1631)는 그의 저서 The Practice of Piety를 통해 예배가 끝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들은 설교를 검사하고, 저녁에는 하나님의 하실 일을 묵상하면서 기도함으로 주일을 마치라고 권면했다.16) 이러한 Bayly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설교 비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의 제자들과 신실한 청교도 신앙인들이 설교를 들은 후에 서로 그 내용을 나누며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오늘날의 청중 역시 설교를 들은 후 서로 확인하고 내면화하여 순종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는 경우에는 그 한계점을 보완할 방안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설교를 나누는 것이다.17) 14) 사도행전 17:11에서 “상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ἀνακρίνω는 ‘조사하다’, ‘검토하다’, ‘심문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베뢰아 성도들의 모습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5) Nicholas Bownd, The True Doctrine of the Sabbath: or, Sabbatum Veteris Et Novi Testamenti(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5), 368, 370-75.16) 홍인택,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율법과 성화』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21), 273.17) 조광현, “코로나 시대, 영상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 학」 57 (2020): 203-204. 2. 설교 비평의 실태(實態)와 비평의 기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설교학적 이유와 또 성경적, 교회사적 근거로 볼 때 설교 비평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설교 비평이 지금까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강단의 성역화라는 장벽 때문이고 둘째는 설교 비평자의 자질 및 설교 비평의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먼저 설교 비평의 현주소를 살핀 후에 바람직한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성역화된 한국교회 강단설교는 정당성(validity)이 있는 성경해석을 통해 도출해 낸 메시지를 청중의 삶 에 적실성(relevancy)이 있도록 전달해주는 것이다.18) 그런데 일부 설교자의 설교에서는 정당성과 적실성 가운데 한쪽 혹은 양쪽 모두 확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설교자들이 어떠한 교정도 받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강단에 서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은 오래전부터 성역(聖域)으로 취급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신대학교 류응렬 교수는 2004년 10월 18일에 「기독교사상」이 발간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를 류응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19)첫째,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신학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을 자의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 채 개인주의 신앙으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셋째, 설교자들의 역사의식 결여를 지적한다. 그 결과 한국교회 강단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개인적 신앙생활에만 집중하게 된다.한국교회 강단의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사상」이 선정한 16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책에 선정되지 않은 설교자들에게 어쩌면 더 많은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그 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점들은 미해결의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올바른 기준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 강단은 왜 이처럼 평가 불가한 성역으로 인식 되었을까? 서울신학대학교 정인교 교수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거론 불가의 성역이었던 이유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있다고 본다. 이런 가 18) 정창균,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9. 19)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 186-88. 치관은 Martin Luther가 설교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Verkuendigtes Wort Gottes)으로 설명한 것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만 보면 설교 비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린다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이런 부담이 있음에도 정인교는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는 당위라고 주장한다.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자가 가진 속성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설교가 한계를 가진 인간 설교자를 매개로 청중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비록 설교자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내적 소명 ’(vocatio interna)과 신학 수업과 안수(按手)라는 ‘외적 소명’(vocatio externa), 그리고 교회의 부름이라는 ‘간접 소명’(vocatio mediata)을 받았더라도 설교자는 불완전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20)그러므로 정인교는 “이런 완전치 않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맡겨놓고 아무런 통제나 조정의 노력이 없다면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며, 120년(2007년 당시 기준) 한국 기독교 역사로 볼 때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21)그러므로 정인교는 정용섭의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 책을 통해, 설교자를 하나님의 진리의 완벽한 매개자로 신격화하는 것은 결국 설교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위험한 일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라고 설교 비평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22) 2)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실태와 문제점그렇다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 비평의 실태는 어떠한가?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은 2006년과 2007년에 정용섭에 의해 발간된 두 저서, 『속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를 통해 본격적인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류응렬은 설교 비평이라는 장르가 드디어 하나의 학문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한다. 류응렬은 정용섭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이 사라지고 간증 수준의 설교가 되어버린 사실을 지적하는 것과 설교자가 본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제멋대로 다루는 것을 지적한 사실을 중요하게 평가한다.23)하지만 류응렬은 한국교회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자신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류응렬에 의하면 올바른 설교 비평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설교 비평이란 설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 사람과 설교에 대한 정확한 20)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147-48.2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22)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5.23)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0-93. 이해력을 돕고,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며, 또한 설교하는 당사자에게는 이를 통해 설교의 발전을 꾀하여 결국 한국교회 강단을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24) 이에 비해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성경관의 문제이다. 정용섭은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믿는 설교자들이 미숙한 성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처럼 정용섭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 본문을 존중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일까?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신화적 요소까지 들어있다고 가정한다면 설교자들이 그런 성경 본문에 집중해서 무엇을 얻겠느냐고 류응렬은 반문한다.25)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성경에 관한 바른 관점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설교가 과연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출발했는지를 물어야 그 설교 비평이 올바르고 유익한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잘못된 성경관을 소유한 정용섭의 비평에는 여러 설교자에 대한 그릇된 평가가 다수 발견된다. 먼저 김상복의 설교에 대해 정용섭은 “김 목사는 축자영감설에 기초 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을 혼동하는 창조과학회 유의 방식으로 성서에 접근한다.”라면서 “김 목사가 이런 자기모순에 빠진 이유는 성서의 신화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종의 신화적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26)정용섭이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잘못된 성경관은 로이드 존스를 비평하는 것에도 드러난다. 그는 로이드 존스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로이드 존스는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 말을 할 생각은 없다.”라고 하면서도 축자영감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 구성에 다음 두 가지 오류를 끼쳤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그가 오늘날의 고고학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성서의 희화화이다.” 로이드 존스가 성경을 희화화했다는 말에 대하여 정용섭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인들의 우주론적 언어를 아 런 해석 없이 그대로 문자의 차원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서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격이다.”27) 정용섭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설교자를 향한 그의 태도이다. 정용섭은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우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김남준에 대해서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라고 했고 한국교회 다수가 존경하는 하용조에 대해서는 “근본주의적 강해 설교의 조급증”이라는 표제를 붙였다.28) 특히 박영선에 대해서 “그럴듯한 신학적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그 포즈의 뒤안길은 결코 신학적이지 못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당한 비평이 아니라 작정하고 비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29) 24)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76.25)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3-95.26)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28-29.27)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29-30.28)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63, 315.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에서 정용섭은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서보다 더욱 도발적인 용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김서택의 설교에 대해서는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이라고 했고, 이동원의 설교에 대해서는 “규범 설교의 역사 허무주의”라고 했다. 장경동의 설교에 대해서는 “허무주의 영성”이라고 간단히 말하는가 하면 정필도의 설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0) 이와 같은 정용섭의 태도는 비평이 아니라 비판이며, 깎아 세우기가 아니라 허물고 짓밟기에 불과하다. 정용섭은 자신의 저서 제목을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라고 붙였는데 정용섭이야말로 “비평과 선동 사이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 대해 정인교는 “이러한 접근은 설교 비평의 본질을 훼손하고 오도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라고 우려를 표현한다.31) 3) 바람직한 설교 비평의 기준신성욱 교수가 말한 대로 “한 편의 설교 속에는 그 사람의 성경관과 신학적인 지식과 인생 경험과 인격 모두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32) 그러므로 설교를 비평할 때는 설교자에 대하여 예를 갖추어 긍정적 평가 후에 아쉬운 점이나 보완점을 언급해야 한다. 또한,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은 설교자 못지않은 설교학적 기준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김창인의 설교를 평가한 신성욱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김대혁 교수 역시 설교 비평의 모범을 보여준다. 김대혁은 Abraham Kuruvilla의 설교 이론에 대하여 비평하면서 먼저 네 가지의 공헌을 나열한 후 세 가지 정도의 아쉬운 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다.33) 하지만 정용섭의 비평은 비평가의 자질과 비평 기준 확보의 시급성을 절감하게 했다. 정인교에 의하면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문제점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첫째, 비평자들의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가 부정적 비판 일변도인 것이 문제이다. 둘째, 작금의 설교 비평은 지나치리만큼 설교의 내용에만 치중함으로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다. 셋째, 설교 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넷째, 비평자의 입장이 설교 비평의 절대 기준이 되어 선택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로 몰 29)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145.30)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7, 129, 197, 243.3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7.32) 신성욱,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본 김창인 목사의 설교와 신학적 특징”,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60 (2021): 91.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82)33)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 과 실천신학」 60 (2021): 31-40.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11) 고 가는 것 역시 설교 비평을 왜곡시킬 수 있다. 다섯째, 비평자의 독선이 문제이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예의만이 아니라 회중에 대한 예의까지도 갖추어야 한다.34) 그렇다면 설교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은 무엇인가? 정인교가 제시하는 설교 비평의 합리적 기준은 다음의 일곱 가지이다. 첫째, 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설교된 내용의 조직신학적 배경에 관해 물어야 한다. 셋째, 어떻게 설교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는 무엇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넷째, 누구에 의해 설교가 행해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 및 설교의 목회적 차원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다섯째, 설교가 위치하는 삶의 정황에 관해 물어야 한다. 여섯째, 설교의 결과를 물어야 한다. 일곱째, 설교가 주로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35) 류응렬 역시 한국교회 강단이 말씀으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를 진리 위에 세우는 설교 비평을 위하여 다섯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첫째, 성경적인 설교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둘째,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은 설교자와 설교를 동시에 연구하는 것이 다. 셋째,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며 읽는 자세이다. 넷째, 설교 본문뿐 아니라 설교 전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예배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36)이상의 다섯 가지 제안 가운데 세 번째의 태도에 관한 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류응렬이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 대한 평가에서도 말했듯이 설교자의 의도와 다르게 비평가의 의도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한종호의 눈에 비치는 전병욱은 어떤 말을 해도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처럼 여겨진다.”라고 한 류응렬의 평가처럼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지 않으면 결코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이 될 수 없을 것이다.37) 그렇다면 설교 비평은 설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며 설교에 대한 찬미라고 하는 Rudolf Bohren의 기준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Bohren은 설교 분석의 기준을 먼저 “지, 정, 의” 세 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고 각 카테고리에 세부적인 가지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비평의 기준을 제시하였다.38) 설교 비평의 기준을 세 개로 구분하는 Bohren의 카테고리는 청중이 기억하기 좋은 장점도 있으며 그 속에는 정인교가 제안하는 일곱 가지 기준도 대부분 포함된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Bohren의 구분을 설교 비평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한편, 김지혁 교수에 의하면 설교의 적용은 마음의 결단 문제이며, 의지와 더불어 정서와 감정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마음의 감각을 통 34)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66.35)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8-71.36)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7-99.37)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84-86.3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0-298. 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39)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할 때는 지, 정, 의 삼 요소 가운데 감동을 가장 먼저 나누는 것이 좋다. (1) 감동 : 어떤 감동을 하였는가?설교자는 메시지를 전할 때 청중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그 설교가 청중의 마음을 붙잡았다는 사실은 메시지 전달이 성공했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청중이 자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때 설교자가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이처럼 청중에게 무엇인가가 들렸고, 청중이 그것을 이야기 하는 일은 바로 설교의 찬미이다. 이렇게 될 때 청중은 설교자의 편에 선 증인이 되 는 셈이다. (2) 내용 :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마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정서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설교의 근거와 내용도 함께 파악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a. 본문의 내용: 본문의 고유한 교훈은 무엇인지, 본문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 자는 무엇을 설교하였는지 나누는 것이다. b. 교리의 내용: 성경해석을 통해서 깨닫게 된 신앙 교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은혜를 나누고 그 깨달음과 전체 성경 및 조직신학적 조화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 c. 청중의 상황: 설교의 내용이 현재 시대와 교회의 상황과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와닿는지 나누는 것이다. 설교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주었는지 나누는 것이다. (3) 결단 : 어떤 결단을 하였는가?설교는 단순발화행위나 의미 수반 발화행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효과 수반 발화행위가 되어야 한다.40) 그렇다면 설교는 청중에게서 어떤 효과가 발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효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a. 개인에 대한 효과: 설교가 개인을 어디로 인도하려고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사고를 하도록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호소를 주는가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b. 교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교회의 미래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회의 미래 현상과 그 근거를 설교 가운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c. 사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비판적 정치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일깨워주는가? 예를 들어 최근에는 교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합법화를 막아내어야 하는 필요성이 39) 김지혁, “Jonathan Edwards의 마음의 감각과 그의 설교학적 미학”,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33 (2014): 43, 53.40) John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nd ed. by J. O. Urmson & Maria Sbis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2. 1975), 94-132. 있다. 이런 사회적 이슈들에 관하여 청중을 어떤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았는가? 3.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지금까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기준으로 설교의 발전과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하여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설교 비평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을 구분하는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 방법론을 제안한다. 한편, 모임 운영 방식 역시 대면과 비대면이라는 이중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이란 무엇이며 그 필요성은 무엇인가? 설교 비평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다. 왜냐하면 비평(批評, critique)이란 평가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41)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다른 사람의 설교를 평가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자신의 설교를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신앙과 인격 수준이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를 비평하도록 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들이 쏟아져 나올지는 예측 불허의 일이다. 그리고 설교 비평에 참여한 청중들 쪽에서도 이를 통해 반드시 개인의 경건은 깊어지고 신앙 공동체는 활성화된다고 보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Bohren은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42)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주체를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이중 노선으로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1)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먼저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이 성역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며 성역화의 첫째 이유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설교자가 하는 말은 어떤 이유와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Rudolf Bohren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Bohren이 말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41)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비평(批評)’을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 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해설하고 있다.42)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주실 뿐 아니라 첫 번째 설교자가 되어 주신다.43) 인간 설교자가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며 인간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맞는지 점검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이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 한계가 있는 존재이다. 또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부분에 실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설교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발전시키기 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들로 구성된 비평 그룹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에서 정용섭의 설교 비평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듯이 한 사람이 설교 비평을 독점하는 것은 균형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평가하고 점검하는 작업은 일정한 교육을 받고 준비가 된 설교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참여하는 것이 안전하다. 설교자들로 구성된 설교 비평 그룹은 매주 한 사람씩 순서를 정하여 설교를 비평하되 설교자의 개별성과 시간적, 공간적 상황성도 함께 고려하도록 사전에 설교 환경에 대한 설명을 들고 설교 영상을 시청한 후에 평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설교자들의 설교 비평 모임에 계속 참여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점점 정당성과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습관도 발견하여 개선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 비평 그룹에서 하는 일은 설교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과 더불어 설교의 내용과 전달 방법 등을 평가하며 그 설교자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설교에 대한 공감과 격려를 먼저 한 후에 발전 요소를 덧 붙여 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이러한 방향성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 그룹의 이름을 “설교 비평 모임”보다는 “설교 공감 모임”(설공모)이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설교 비평을 할 때의 기준은 앞에서 설명한 Bohren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이처럼 기준을 정해놓고 평가를 하게 되면,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그 기준을 의식하며 균형 있는 설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비평 활동에 참여 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일반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을 시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2)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이제 일반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Bohren은 자신이 열정을 다하여 즐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 스키를 타는 일, 나무를 찍어 넘어뜨리는 일, 그리고 설교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설교 43) Bohren, 『설교학실천론』, 119-20. 를 여가의 일종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가 설교하는 일에 그 만큼 열정을 다하며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44) 그러면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은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 (1) 설교자가 설교하는 일에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면 청중 역시 같은 열정으로 동참하도록 할 방안이 필요하다. 청중의 열정적 동참은 청중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설교자가 계속해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청중이 설교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먼저 설교가 선포되는 시간에 귀를 기울여 잘 듣는 것이다. 또한, 설교 후에 그 내용을 기억하고 개인의 가치관과 삶에 적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어떻게 하면 청중이 설교를 듣는 일과 적용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게 할 수 있을까? 예배가 끝나면 곧장 일상생활과 생업에 쫓기며 살아가는 청중은 제도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도록 권장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이런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은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고, 깨달은 교훈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설교 비평이다. 사람이란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정리되고 결심이 강화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순종의 결심을 서로 나누면서 책임감이 강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설교를 들은 후에 소그룹에서 서로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설교 나눔에 참여 하는 사람은 설교 시간에 더욱 집중해서 듣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2) 또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청중이 열정을 다하여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경청하는 것은 왜 하나님과 동역 하는 것인가? 이것은 Bohren이 말하는, 인간 설교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두 번째 이유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자가 강단에 설 때 인간 청중들에게 설교하기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 청중은 거기에 있는 어떤 청중보다 더욱 주목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청중들보다 더욱 소중한 청중이시다. 설교의 우선적인 목표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는 설교의 가치를 판단하는 분은 바로 이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다.45)그런데 설교 현장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청중이 되신다는 이 사실은 설교자의 설교를 정당하게 할 뿐 아니라 청중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도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가 행해질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듣고 계신다면 청중이 설교를 듣 44) Rudolf Bohren, Predigtlehre, 박근원 옮김, 『설교학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13. 45) Bohren, 『설교학실천론』, 151-52.는 것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설교를 듣는 행위만이 아니라 설교 이후에 그 설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과 들은 설교를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되다고 한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הָגָה)인데 ‘중얼거리다’, ‘묵상(명상)하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등의 뜻을 가진다. 이를 근거로 Bohren은 설교에 대해 명상하고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열정에 동참하는 것이며 설교를 찬미하는 것이라고 한다.46) (3) 이렇게 일반 청중을 중심으로 설교 비평 모임을 운영할 때는 설교자 그룹과는 다른 주의가 요구된다. 일반 청중은 설교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므 로 이 모임에서 설교자의 발전 요소를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은 설교에 대한 이해를 보완해주며 각자의 공감을 나누는 것, 그리고 각자의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다. 말하자면 청중 그룹의 설교 비평은 설교를 평가하기보다는 말씀을 공유하 고 내면화하는 방법으로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다. Bohren은 설교 비평은 설교의 찬미이며 설교를 해석하는 것이고 설교에 열정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47) 그런데 비평이라는 단어는 날카롭게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모임의 이름에는 ‘설교 비평’이라는 표현대신 서로 격의 없이 대화한다는 느낌을 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연구자가 설교 비평 모임의 이름으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We Talk)”을 제안한다. ‘위톡’ 46) Bohren, 『설교학실천론』, 286-87. 4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7-88. 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참석자들에게 위의 그림과 같은 양식(Form)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톡(We Talk) 모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를 세우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을 예로 들 수 있다. 평생의 목회를 통해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집중했던 옥한흠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평신도를 수동적인 존재로만 취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48) 옥한흠의 제자훈련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목적인데 평신도 지도자(순장)들의 사명은 각 다락방에서 순원들과 함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를 이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자훈련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持續)되어야 할 성경적 모델이다. (4) 이처럼 청중들이 설교를 서로 나누고 적용하게 할 때 여기에 ‘집단지성’이 발생 하는 유익이 있다. 집단 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한 세기 전까지는 필요성과 유익함을 생각하지 못하던 새로운 발견이다. Charles Leadbeater에 의하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출현한 대규모 기업들은 군대형 조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으면 작업 지시서를 보거나, 명령계통의 직속 상관의 지시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집단지성은 조직이 직면한 여러 가지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제공하는 대안적인 조직화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49)Leadbeater에 의하면 단독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훌륭한 협업활동가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소비자, 개발자, 공급자 사이에 공유될 때 혁신은 번성한다. 아이디어 창안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 누가 무슨 일을 했고, 따라서 누가 어느 만큼 소유하게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협업에 의한 혁신은 반드시 공동 소유권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50) 이처럼 발명과 생산의 아이디어 창출에서 협업을 통한 집단지성이 발생한다면 청중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이해와 깨달음 및 그 적용을 서로 나누는 동안에도 집단지성을 통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익함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장 먼저 활용하고 유익함을 누려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은 설교 비평을 위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모임을 통해서 적용할 수 있다. 48)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서울: 두란노, 1999), 43.49) Charles Leadbeater, We think : mass innovation, not mass production, 이순희 옮김,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파주: 북이십일, 2009), 131.50) Leadbeater,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137. 165. 3) 메타버스 시대의 청중 참여 방안그런데 ‘위톡’을 운영할 때는 대면 방식만이 아니라 비대면 방식까지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2020년에 한국교회는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사태에서 “대면 예배 전면금지 및 비대면 예배만 허용”이라는 전대미문의 행정 명령에 직면하였다. 처음에는 예배 및 설교를 촬영하고 송출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일부 목사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격언처럼 1년 이상 그런 상황을 지나오면서 이제는 목사마다 방송 전문가가 되었다. 청중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면 예배 전면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통해 일반 성도들이 가정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예배드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51) 소그룹 모 임을 금지당하자 영상으로 회의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신광철에 의하면 코로나 사태가 극복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코로나 19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52)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비대면 활동이었으나 이제 비대면 활동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방법과 목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기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동체 모임에는 비대면 활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역시 대면 모임과 비대면 모임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메타버스 세계에 살고 있다. 메타버스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메타버스(Metaverse)는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 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서 현실 세계와 다른 가상 공간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메타버스는 1992년 Neal Stephenson의 SF 소설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 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53) 기술연구단체인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는 메타버스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일상기록(Lifelogging), 거울 세계(Mirror Worlds), 가상세계(Virtual Worlds)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54)메타버스는 전 세대를 막론하고 문화와 예술, 교육과 각종 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메타버스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사람일지라도 인터넷 쇼핑을 한 번 이라도 해 보았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보았다면 그는 이미 메타버스의 거울 세계와 라이프로깅을 경험한 사람이다. 또한, 오늘날은 뉴미디어 생태계의 세상이다. 스마트폰, 태블릿PC, 스마트TV 등 51) 안덕원,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기독교 예배-전통적인 경계선 밖에서 드리는 대안 예배를 위한 제언”,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6 (2020): 48. (https://doi.org/10.25309/kept.2020.8.15.045)52) 신광철, “위드/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콘텐츠 교육의 방향”, 인문콘텐츠학회, 「인문콘텐츠」 59 (2020/12): 109.53) 한송이 · 김태종, “메타버스 뉴스 빅데이터 분석: 토픽 모델링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디지털콘텐츠 학회,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2/7 (2021/07): 1092.54) 김상균, 『메타버스』 (화성: 플랜비디자인, 2020), 23. 으로 IT 패러다임이 확산된 ICCT(Information, Communication, Contents Technology) 거버넌스(governance)에서의 미디어 환경은 콘텐츠(Contents), 플랫폼 (Platform),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디바이스(Device)의 네 가지 CPND가 상호 결합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55) 현대인들은 이러한 뉴미디어의 CPND를 통해서 온라인 쇼핑과 음식 주문, 영화감상과 은행 업무 등 온라인 전가 상거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노년층 인구들도 각종 SNS를 통해 의사소통과 희노애락을 나누고 있다.56)이렇게 뉴미디어의 CPND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특히 스마트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고 오늘날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57)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건, 내 몸에서 절대로 멀리 두지 않는 물건, 명품을 제외하고는 외출할 때 반드시 소지하는 물건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자신이 소지한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게 한 후 하나씩 버리는 실험을 해 보면 속옷을 제외하고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는 물건이 바로 스마트폰이다.58) 이렇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성균관대학교 기계공학부의 최재붕 교수에 의하면, “포노 사피엔스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교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이다.” 이 말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59) 최재붕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전 세계 50%의 인구가 선택한 인류의 운명(運命)이라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될 문명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60)이는 사도 시대에 복음이 전해진 로마의 도로망과 비교해 보더라도 당연한 이치 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로마 사회는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지하고자 제국 전역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어 ‘길은 로마로’ 통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프라를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로마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도로를 통해 복음은 급속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터넷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은 처음에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상업 용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61) 55) 최창현, “C-P-N-D 생태계와 ICCT”, 한국디지털정책학회, 「디지털융복합연구」 12/3 (2014): 7-8.56) 이승진, “뉴노멀 시대에 적실한 설교 사역에 관한 연구”, 한국설교학회, 「설교한국」 13 (2021 봄): 13.57) 박성환,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스마트폰을 활용한 어린이 설교”,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9 (2020): 199. (https://doi.org/10.25309/kept.2021.5.15.173)58) 김상균, 『메타버스』, 29.59)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파주: 쌤앤파커스, 2019), 25.60)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90-92.61) 김현철 · 조민철, 『메타버스 교회학교』 (서울: 꿈이있는미래, 2021), 41. 초대교회 시대에도 예배는 모여서 드렸지만 복음 전파와 양육에는 편지를 사용 하기도 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직접 전도했던 지역 교회는 양육하는 일에 편지를 활용하였고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도 편지로 복음을 전했다(롬 1:15).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유다도 편지로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 힘썼다. 이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예배는 대면 모임을 중시하더라도 전도와 성경공부 등의 소모임은 비대면을 활용 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의 주종훈 교수에 의하면 가상 공간의 모임에서도 성령께서 역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62)현실 세계와 메타버스를 병행하여 위톡 모임을 운영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1) 현실 세계는 한 주간에 두 번 이상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메타버스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교제하며 삶을 나눌 수 있다. (2) 혹 어떤 구성원이 대면 모임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정이 발생했을 경우 그 구성원을 위하여 대면 및 비대면 모임을 병행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장에 와 있는 구성원들 도 모두 영상회의 도구(Zoom, Meet 등)에 접속하여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 (3) 메타버스로 대화하면서 발생하는 아쉬움은 현실 세계의 대면 만남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어 준다. 그 결과 약속된 대면 모임을 더욱 귀히 여기며 사모하게 될 것이다. (4) 위톡 구성원들끼리의 대화방을 적절히 활용하면 지난주일 설교의 요지를 올려 주어서 기억을 되살려 주거나 각자가 결심한 실천 사항을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I. 나가는 글이상으로 연구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위드 코로나의 방법으로 소그룹 모임이 재개될 것을 기대하면서 대비할 필요성이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제안하였다. 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정당성과 적실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선포되는 경우가 있고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 비평은 자칫하면 설교 비판이라는 부정적 결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이런 우려는 실제로 설교 비평의 포문을 연 정용섭의 두 비평서에서도 드러났음을 류응렬과 정인교의 분석과 평가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시행하기 전에는 먼저 객관적이고 바람직한 비평의 기준을 마련하고 비평자의 자질도 잘 준 비해야 한다. 또한, 설교 비평을 시행할 때에는 설교 발전을 위한 설교자 비평 그룹 62) 주종훈, “디지털 예배의 목회적 신학적 고찰과 실천 방향”,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학」 60 (2021): 74.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45) 과 설교를 찬미하고 말씀을 드높이기 위한 일반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시행하는 것 이 좋다. 설교자 비평 그룹은 먼저 비평을 위한 충분한 준비 공부를 한 후에 시작하되 서로 예의를 갖추어 격려와 감사를 한 후에 발전을 위한 제언을 하는 “설교 공감 모임”으로 진행함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일반 청중의 경우에는 먼저 성숙한 리더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평 그룹의 명칭도 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이름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화의 내용은 “지, 정, 의”의 요소로 구분하여 설교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교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그리고 설교를 통해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를 나눔으로 신자 개인의 경건과 신앙 공동체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임을 감안(勘案)하면 현장에 직접 모이는 방식과 더불어 비대면으로 만나는 방식도 적절히 활용하여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대면 모임으로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김병중 03-16 23:19
『고난 중의 신자에 대한 설교자의 청중 이해』
ㅣ. 들어가는 말 청중은 하나님과 영생의 언약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존재이다.1) 청중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설교자의 설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청중은 종종 자신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맺은 언약 백성이라는 설교자의 설명에 따라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건이 자신이 들은 말씀과 모순되게 느끼는 현실 때문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까닭을 알 수 없고 감당 하기 어려운 고난을 경험할 때이다. 고난의 정체는 무엇인가? 팀 켈러는 고난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게 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 다가가게 된다고 한다.2) 그렇다면 여러 가지 까닭 모를 고난을 경험할 때 언약 백성인 청중은 그 고난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면 설교자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설명할 것인가? 고난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 만이 아니라 고난을 겪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설교자의 태도 역시 중요한데 설교자는 고난을 겪는 청중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를 발견하도록 돕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때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치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교자는 이런 상황에 관하여 어떻게 설교하여 신자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섭리 안에 있음을 설명할 것인가? 이 문제점에 대하여 연구자는 먼저 로고테라피 개념으로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본 다음,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각각의 모델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이승진,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신학」 6 (2003), 63.2) 팀 켈러/ 최종훈 옮김,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울: 두란노서원, 2018), 25, 16. 이어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 부닥친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을 제안 하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침묵과 로고테라피 1. 고통의 문제와 하나님의 침묵 20세기 최고의 문호(文豪) 가운데 한 사람인 C. S. 루이스(1898~1963)는 남달리 많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암으로 별세하였고 그 후 그의 형은 술을 위안으로 삼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을 겪은 루이스 자신도 대학에 진학한 후 신앙을 잃어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랜 방랑 후에는 다시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59세의 늦은 나이에 한 불행한 여인과 결혼하여 크나큰 행복을 느꼈으나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했으니 그의 부인은 3년 반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이런 많은 고통을 경험한 루이스는 자신만이 아니라 인류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었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민을 표출하였다.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는 자신의 피조물이 완전히 행복해지기를 소원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가 원하시는 무슨 일이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행복 하지 않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선이 부족하든지, 능력이 부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가 지 다 부족한 것이다.4)이렇게 의문을 던진 루이스는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하는 문제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사랑이라는 글자에 통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5)하지만 루이스는 “고난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하나님은 악한 인간들이 그 형제들을 그렇게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는지 의문을 제기한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6) 사람이란 타인의 고통보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크게 느끼는 존재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강정훈 목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은 남의 배에 커다랗게 남은 수술 흔적보다 내 손톱에 낀 가시 자국이 더 아프다고 한다.”7) 이처럼 청중은 각자가 누구보다 쓰라린 고통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고통에 대하여 루이스와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런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캔 가이어(Ken Gire)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그의 책에 The North Face of God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는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은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등반가가 가장 오르기 힘든 북쪽 능선(the north face)처럼 냉혹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캔 가이어에 의하면, 에베레스트산은 여러 개의 능선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북쪽 능선이 등반하기 가장 어렵다. 그런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북쪽 능선을 타고 등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8) 3) 홍치모, “C.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 루이스의 작품과 신념 세계,” 「신학지남」 65/3 (1998/09), 206-10.4) C.S. 루이스/ 김남식 옮김, 『고통의 문제』 (서울: 크리스천서적, 2001), 33.5) Ibid., 63.6) Ibid., 129.7)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서울: 두란노, 2021), 77. 성경 인물 가운데도 고통을 겪은 인물들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요셉이나 다윗은 긴 기간 동안 까닭도 모르고 그 끝도 모르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 까”라고 부르짖은 후에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탄식하였다. 모세는 요셉이나 다윗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버림받음’을 경험했다. 그 결과 모세는 자신의 꿈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찾아 왔을 때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소명을 거절할 정도였다. 캔 가이어의 말처럼, 성경 인물들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보다 그들이 당한 ‘하나님의 침묵’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9) 2. 언어의 기능과 설교자의 사명 하나님은 이처럼 청중이 당하는 고난의 상황에서 침묵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셔도 설교자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기에 설교자는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로 밝히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에게 언어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이며 설교 자가 부여받은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언어의 기능에 대하여는 발터 벤야민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 지으신 모든 것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말씀으로 만드는 대신 손수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드신 사람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그 말씀을 방출하심으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위임하셨다.10)하나님으로부터 말의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의 사명은 이 언어를 통해 ‘사물 언어’(language of things)를 ‘구술언어’(oral language)로 드러내는 것이다.11) 설교자의 사명은 우선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를 청중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청중이 경험하는 사건들과 고통 속에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의도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설교자의 중요한 사명이다. 이런 면에서 이승진 교수는 목회 사역의 핵심을 “구술언어와 사물 언어를 신자들 앞에서 서로 연결 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표현한다.12) 그렇다면 청중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설교자는 어떻게 해답을 줄 수 있을까? 내세에 천국의 영광을 누릴 성도가 현실에서는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청중에게 설교자는 무엇이라고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는 청중의 질문에 설교자는 어디에서 해답을 확보하여 청중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사람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해답을 성경에 담아 놓으셨기에 매번 새로운 말씀을 주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두 가지 이유로 그 해답에 접근하지 못한다. 우선, 고통이 없는 사람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에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팀 켈러의 말처럼 인간은 “고난이 닥치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제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13)그러다가 막상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 순간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리처드 아스머는 자신이 목사요 실천신학 교수이면서도 모친이 교통사고로 갑작 8) 캔 가이어/ 마영례 옮김, 『하나님의 침묵』 (서울: 디모데, 2006), 20-21.9) Ibid., 18.10)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서울: 길, 2008), 84.11) Ibid., 78.12) 이승진, “해석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설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신학」 54권 (2020), 223.13)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6. 스럽게 사망했을 때 몹시 당황하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스머는 고향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노라고 회고하고 있다.14) 아스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청중이 고통스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스스로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럴 때 성경적 관점 에서 고통을 설명해 주어 고통으로부터 다시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3. 고통의 의미와 로고테라피 까닭 모를 고통 속에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성도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설교자는 어떻게 해석해 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연구자는 우선 고통에도 값진 뜻이 있다고 한 옥한흠 목사로부터 해답의 실마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옥한흠 목사는 고난을 겪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고 한다. 덧붙여 고통은 거룩한 것이며 대단히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한다.15)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들어보자. 빅터 E. 프랭클은 유대인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악명 높은 나치(Nazi)의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의 생존자이다. 그는 가진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알몸 상태로 발가벗기는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말살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아무리 무서운 악몽일지 라도 그 수용소의 현실보다 더 나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16)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빅터 E. 프랭클은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라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라.”라고 한다.17) 빅터 E. 프랭클이 창안한 로고테라피(Logo theraphy) 개념에 따르면,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이런 노력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그래서 빅터 E. 프랭클은 고통이란 그 의미를 찾아내는 순간 절대 고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만나게 되었을 때조차도 삶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희생의 의미와 같은 어떤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절대 고통이 아니며 인간은 자신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면 기꺼이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존재이다.18) 그렇다면 언약의 말씀을 가진 존재인 청중은 고통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옥 한흠 목사는 고난을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의하면서 신자는 고난 배후에서 일 하시는 하나님과 만나라고 충고한다.19) 또한, 하나님께서 고난을 성도의 유익을 위해 선용하신다고 주장한다. 그 선용이란 첫째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데 선용하시며,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을 형성하는 데 고난이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20) 옥한흠 목사와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종합해 볼 때 고통에는 고통보다 더 큰 의미가 있고 성숙한 성도가 되어 가는 데 유익하다. 그러나 신자가 막상 고난을 겪을 때는 그 상황을 성경적 관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난을 경험할 때 청중은 고난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의 삶에서는 왜 실현되지 않는지 회의(懷疑)하게 된다. 그러므로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 상황을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14) 리처드 아스머/ 김현애 옮김, 『실천신학의 네 가지 중심 과제』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12), 40-41.15)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 234, 15-16.16) 빅터 E. 프랭클/ 정순희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제일출판사, 2000), 51.17) Ibid., 10.18)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147-48.19)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11, 16.20) Ibid., 18-19. 그렇다면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줄 것인가? III.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들 1. 재난을 바라보는 설교자의 관점 신자가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난도 있지만 때로는 온 국가적으로 함께 당하는 대재앙도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으로 여러 가지 정상(正常)이 비정상(非 正常)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비정상(Ab-normal)이었던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새로운 정상(New-normal)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장기간의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경제가 무너지며 코로나 우울증(Corona Blue)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를 해결하기 위한 백신(vaccine)에서조차 부작용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21) 이런 때에 신자들은 왜 이런 일이 왔으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묻고 싶어 한다. 코로나 팬 데믹 외에도 세상에는 종종 대재앙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에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며 설교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대재앙의 의미를 해석하여 설명하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리스본 대지진 사건 부터였다. 1755년,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대재앙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 많은 논의와 패러다임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특히 당시 대지진이 의인 욥이 당한 고난처럼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하게 살았던 도시 리스본을 중심으로 발생한 사건이기에 성경적 설명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러면 대재앙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설교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먼저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 사건과 2011년 동일본에 지진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설교 사례를 살펴보자.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슈마트라 북부에서 모멘트 규모 9.1의 해저 지진과 15미터 높이의 쓰나미 재앙이 발생하여 28만 명 이상의 사망 및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 발생 직후 한국 교회의 한 설교자는 성탄절과 주일이 연속되는 거룩한 날에 쾌락을 즐기러 간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징벌이 임했다는 관점으로 설교를 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관점의 설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는커녕 교계 안팎에서 많은 질타를 받게 되었다.22) 한편, 2011년 3월 11일에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에서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강남교회 김성광 목사가 지진의 원인이 일본 국민의 우상숭배와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설교해서 역시 파문이 일기도 했다.23)이 두 사례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결국 대재앙을 섣불리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들 그러면 대재앙에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른 관점인가? 이승진 교수는 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로서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 대속적인 고난 모델, 신비적인 합일 모델, 종말론적 전망 모델 등의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신자의 고난에 접근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4) 21) 곽성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1건’ 추가,” 「청년의사」 인터넷신문(2021.07.26.) 접속 2021.08.05.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293622)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29 (2013), 37.23)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문화」 21 (2012), 119.24)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35 (2015), 267-76. 1) 우선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의 관점은 고난의 중요한 원인을 당사자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도 이런 인과응보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집요하게 욥에게 회개를 요구했다. 물론 고통에 대한 이런 관점도 필요하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죄를 범하는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C. S. 루이스는 고통을 죽어 있는 세계를 깨우치는 하나님의 확성기로 본다. 루이스에 의하면 고통은 악인에게 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다.25) 그런데 오늘날 지성인들 가운데는 보응 사상이나 징벌 관념을 말소해 버리고 범인의 개과천선이나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모든 징벌을 부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26) 하지만 모든 고난을 징벌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모든 범죄에 대하여 합당하게 징벌하시기보다 심판을 유보하시면서 인간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며 그들이 당하는 재난 사건을 교훈 삼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징벌적 고난의 모델은 모든 고난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2) 징벌적 고난 모델이 형평성과 일관성에서 모순점을 보이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대안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이다. 이는 지금 당하는 고난을 반드시 자신의 죄악과 결부시킬 수는 없지만, 고난 저변(底邊)에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고난의 의미나 가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막연한 미래의 가치로 무책임하게 희석한다는 약점이 있다. 이런 방식의 설명은 청중의 불평을 막는 효과는 있겠지만 고난 중에 처 한 신자를 만족시키는 설명이라고는 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3) 징벌 모델과 섭리 모델의 한계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고난의 목적이 교육 혹은 연단을 위해서 라고 설명하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이 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신자는 고난을 통과함으로 신앙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런 연단 후에는 죄에 빠질 가능성도 줄어들어 그에 따른 징벌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는 효과까지 생겨난다. C. S. 루이스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평안을 얻고 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배울 것이며, 주님께 돌아가는 길을 망각하고 말 것이다.27)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영적인 훈련을 받음으로 천국 백성답게 성숙하여 간다는 이 설명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모델이다. 하지만 이 모델 역시 모든 고난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욥처럼 남달리 훌륭한 신자가 오히려 남보다 모진 고난을 받는 경우나, 고난을 통한 연단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 같은 유아들이 당하는 고난 등은 이 모델로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4) 대속적인 고난 모델은 모든 종류의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고하다가 희생을 당한 경우, 혹은 자발적으로 고난을 자취(自取)한 경우에 대한 설명에 동원된다. 예를 들면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이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던 사람이 오히려 사고를 당해 희생 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를 위해서, 베냐민을 대신하여 벌을 받겠다고 자청한 유다의 경우처럼(창 44:33)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경우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하지만 대속적 고난 모델은 다른 사람의 죄나 실수로 피해를 본 사람이 당하는 고난의 경우 이 모델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이 모델은 특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적절히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5) 신비적인 합일 모델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이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적인 합일 모델에 의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전능을 포기하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능을 포기하고 사랑을 택한 하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전능하시다는 것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고난과 십자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해서만 생각되어야 한다.28) 이러한 십자가 신학을 수용한 학자 가운데는 우선 본회퍼와 한스 요나스(Hans Jonas) 등이 있다. 본회퍼는 하나님을 전능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무력하게 고난당하는 분으로 설명한다.29) 한스 요나스 역시 하나님을 무능력한 하나님, 무저항의 하나님, 피조물로 인해 고통받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30) 팀 켈러 역시 다음과 같이 십자가 신학을 옹호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고통과 악의 근원을 쳐부술 칼과 권세를 움켜쥐셨다면 인간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정의를 실현하는 대신 악을 견뎌 내셨다.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으므로 언젠가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31)팀 켈러에 의하면 “크리스천들이 역경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앞장서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주님의 고난을 강조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거룩한 주권이라는 개념을 놓쳐 버리고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설명하는 신학자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라면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우려도 표명하고 있다.32)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신자가 고난을 겪을 때 거기에서 함께 고난을 겪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고난을 제거하기보다는 인간과 함께 고난을 겪으시면서 새 하늘 과 새 땅의 목적지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신다.33) 그러므로 인간은 우리와 함께 고난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합일을 이루는 신비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적 합일 모델의 설명이다. 이 모델은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신자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능하 심을 포기하고 무력하고 힘없는 하나님이시라면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며 구원할 수 있 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신비적 합일 모델은 고난 속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초월성을 배제해버린 약점이 있다. 6) 지금까지 시도한 고난에 대한 신학적인 해명들은 고난의 원인과 의미를 다 설명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신자의 모든 문제와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최후의 날에 일순간에 해결될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독일의 정치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 (Johann Baptist Metz)는 종말론적 전망 모델을 주장하였다. 이승진 교수는 메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28) 박영식,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8/1 (2013/07), 93.29) Ibid., 94.30) 박영범, “신정론과 하나님의 고난: 신정론 문제의 응답으로써 하나님 고난이 주는 의미,” 「한국조직신학논총」 33 (2012), 262.31)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96.32) Ibid., 233, 240.33)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274. 메츠에 따르면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츠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로부터 부활절의 아침으로 가볍게 넘어가는 것을 부정한다. 아직 인간의 세계는 십자가의 현실이 끝나지 않았기에 부활로 넘어가는 것을 승리자의 신화에 빠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34)하지만 종말론적 전망 모델로는, 현재의 고난을 통해 미래의 소망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유의미한 설명이지만, 고난 자체의 이유를 설명하거나 고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3. 고통의 불가피성과 고난의 유익 앞에서는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살펴보았는데 각각의 모델들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같이 한계점이 있는 설명이다. 고통을 당하는 청중은 개인마다 혹은 그들이 경험하는 사건마다 상황이 다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정황을 살펴서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모델로 고통의 의미를 적용함으로 청중이 지불한 고통이라는 대가보다 더 큰 유익을 누리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을 중심으로 고난의 유익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이런 관점은 우선 신약 저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으며 탁월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인 팀 켈러로부터도 동의를 받을 수 있다. 환난과 고통의 의미를 설명하는 신약 저자 가운데 우선 야고보를 생각해보자.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는 언제나(ὅταν, whenever)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은 신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약 1:2-3). 이와 같은 야고보의 설명에 따르면 신자가 온전하게 되는 데 있어 시련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베드로 역시 신자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을 당한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 즉 고난은 신자에게 없어야 하는 것인데 운 나쁘게 고난을 당한 일처럼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기고 즐거워하라고 한다(벧전 4:12-13). 한편, 사도 바울은 고난이 신자를 연단하여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유익 만이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해 준다고 설명한다. 그 영광을 생각하면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은 가벼운(혹은 견디기 쉬운 ἐλαφρός) 것이라고 표현했다(고후 4:17). 고난이 천국의 영광을 이룬다면 신자에게 있어 고난은 불가피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에 종교 개혁자와 설교자들 역시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역설(力說)하기 를 주저하지 않는다. 팀 켈러는, 고난이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는 루터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난에 맞서 이겨 내도록 도와줄 기쁨과 사랑을 얻기에 앞서, 고난은 우선 우리의 교만을 비워내게 해 준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면 주님은 거기서 아무것도 빚어내실 수 없다.”35) 그러므로 악과 고통이 존재함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부정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고난의 유익을 바라보아야 한다.36) 고난의 유익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팀 켈러가 소개하는 고난의 유익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37) 34)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53-54.35)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82-83.36) Ibid., 142.37) Ibid., 300-303. 1) 고난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는다.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은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 보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흠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2) 고난은 우리 삶의 여러 좋은 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그 결과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게 해 준다. 3) 고난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C. S. 루이스도 말했듯이 형통할 때 하나님은 속삭이시지만, 고난 속에 있을 때는 확성기로 소리치시기 때문이다. 4) 고난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 막다른 길로 우리를 몰아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단단히 붙는 경험을 통하여 상상을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과 기 쁨을 맛보게 된다. 5)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고통스러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없다.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면 고난을 당하는 자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몸소 고난을 경험하면서 고통당 하는 다른 사람에게 깊은 연민을 품게 된다. 이상으로 청중에게 설명할 고난의 의미와 유익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설교자에게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고통의 의미를 해석해 주는 것뿐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청중(신자)에게 접근하는 태도와 방식 또한 매우 중요하다. 청중이 고통당하는 때에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 청중이 그 설교자를 신뢰하고 그의 설교에 경청(傾聽)할 여부(與否)를 결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우선 신정론의 설명의 한계 점을 확인한 후에 그 대안을 마련해보기로 하겠다. IV. 신정론의 한계점과 타인의 얼굴 1. 신정론의 의의(意義)와 평가 앞에서 살펴본 고난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의 공통점은 고난에 대해 신정론(神正論 혹은 변신론 辯神論)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신정론으로 번역되는 theodicy는 헬라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θεός와 의로움을 뜻하는 δίκη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신정론은 때로 무고한 자의 까닭 모를 고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고 설명하려는 논리이다. 신정론의 관점으로 볼 때 고통은 선을 더 두드러지게 하고 더 큰 선에 이바지하므로, 부분으로서의 고통은 전체로서는 선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은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 혹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입장에서 신정론을 주장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어거스틴의 전통적인 입장에 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상의 세계”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에 고통과 불합리한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신정론을 피력하려고 노력하였다.38)선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음에도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라이 프니츠는 『변신론』에서 “악은 선의 허용된 결핍”이라는 해결책을 내어놓았다.39) 라이프니츠가 변신론에서 표방하는 것은 “고통과 죄악이 존재하는 세계와 최선의 조화와 행복으로 구성된 세계는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의 계산에 따르면 현존하는 악은 최선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40) 38) Gottfried Wilhelm Leibniz/ 이근세 옮김,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서울: 아카넷, 2014), 28-31, 441-50.39) 이상명, “라이프니츠: 변신론과 인간의 자유,” 「철학」 106 (2011/02), 55-56.40) Ibid., 62-63. 그러나 이런 변신론의 설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강영안은 “변신론의 맥락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실제로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취급되기보다는 신적 섭리와 계획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어 버렸다.”라고 지적하고 있다.41)프랑스의 한 비평가는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대해 ‘낙관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평가했다. 그런데 막상 그 ‘낙관주의’에 대해 의심하게 된 계기는 학술적인 토론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리스본 대지진 때문에 왔다.42) 2. 리스본 대지진과 신정론의 한계 리스본은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로 포르투갈의 최대 도시이며 수도(首都)이다. 15세기 리스본은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재화로 인해 대도시로 급성장하여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렸으며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리스본의 시가지와 건축물은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으로 6일간 도시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도시의 2/3가 파괴되어 사라지게 되었다.43)리스본 대지진 사건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 왜 다른 사람보다 더한 불행이 찾아오느냐 하는 의문과 함께 신정론이 비판에 직면하였다. 그 이유는 리스본이 여타의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시라디(Nicholas Shrady)는 당시 리스본의 경건함을 다음과 같이 묘하한다. 12세기에 지어진 주교좌성당 외에도 교구 성당이 40군데가 넘었고, 공소가 121곳, 수도 원이 90곳, 다양한 수도회들이 150곳이나 있었다.... 리스본에서는 한 걸음 뗄 때마다 성당이나 노변의 십자가, 성모마리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리스본 인구 25만 명 중 10퍼센트가 수도사였다.44)특히나 대지진이 발생한 1755년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로서 교회력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축일로 이날 하루 모든 경제활동은 중단되었다. 이날 아침 종소리가 울리자 미사를 위해 길을 나선 인파로 리스본 거리가 북적이고 있었다.45)이처럼 경건했던 도시가 오전 9시 30분경에 시작된 첫 지진에 이어 몇 차례의 여진이 발생하자 25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몇 세기에 걸쳐 건립된 리스본이 폐허로 변했다.46) 그리고 오전 11시경, 지진이 발생한 지 90분 뒤에 발생한 해일은 채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휩쓸어갔 다.47) 대지진 사건으로 한순간에 사망한 인구는 약 4만 명에서 6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48)리스본이 대지진 사건으로 충격적인 재난을 당한 이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던 볼테르까지도 생각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49) 이처럼 고난의 문제를 신정론만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다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4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 문화과지성사, 2005), 210.42) Nicholas Shrady/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서울: 에코의서재, 2009), 142.43) 이문원, “옛 해양대국의 자취가 남아 있는 리스본,” 「국토」 340 (2010/02), 71.44) Shrady, 『운명의 날』, 18-19.45) Ibid., 21,46)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122.47) Shrady, 『운명의 날』, 30.48) 민병원, “재난의 정치학: 리스본 대지진과 근대국가에 대한 21세기적 성찰,” 「평화연구」 28/2 (2020.10), 8.49) Ibid., 11-12. 3.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설교자는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다가갈 한 돌파구를 열어준다. 우선 한 개인의 경험을 통해 고통당하는 청중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강정훈 목사는 사랑하는 아내가 골수암으로 시작한 병이 난소암으로 악화되어 5년간 투병하다가 ‘죽기에는 많이 아까운’ 41세에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경험하였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마음을 정리해서 입을 연 강 정훈은 ‘아직도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전한다. 그가 슬픔에 빠졌을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이 와서 사모님이 좋은 데 갔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 준 것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너무나 비인간적인 태도였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울고 있는 미망인들에게 울지 말라고 비정하게 요구하는 것을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강정훈은 단호하게 말한다.50) 그러면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접근하는 바람직하고 성경적인 태도는 무엇인가? 프랑스의 유대교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년~1995년)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아우슈비 츠 대학살 등 비극적인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설명하려는 변신론은 그 설득력을 잃었다고 본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는 어떠한 쓸모도 없는 부정적인 경험에 불과하다. 레비 나스는 나의 고통이나 타자의 고통 자체는 쓸모없고 의미 없으며 타자의 고통을 위한 나의 고통만이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51)물론 고통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을 수 없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다소 과격한 면이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주장은 고통을 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교자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고통받는 자가 ‘외부의 폭력’에 무력하게 노출된 채 나에게 도덕적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윤리적 사건을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얼굴’은 존재 자체를 통해 나에게 호소하고 윤리적 의무를 일깨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고 부른다.52) 레비나스가 여기서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한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나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계시로 다가올 때 필요한 것은 대속의 고통을 나눌 의무가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나의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성이라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에게 질책하고 호소하는 타자의 저항을 대할 때, 나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며 나의 의무이기 때문 이다.”53)고통받는 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신음하고 울부짖게 되는데, 여기서 타인의 도움에 대한 근원적 요청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여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향유를 포기할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관계, 즉 인간 상호 간의 윤리적 전망이 열리게 된다. ‘나’는 이러한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를 환대해야 한다. 심지어 레비나스는 ‘나’는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먼 과거에 벌써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졌다고 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타인을 대신해서 타인의 자리에 세워지는 일을 레비 나스는 대속이라고 한다. 대속은 문자 그대로 ‘자리 바꿔 세움 받음’이다. 여기서 나의 위치가 수동 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54) 50)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78-80.5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227.52) Ibid., 148.53) Ibid., 152. 54) Ibid., 186. 이처럼 레비나스는 고통이 담긴 타인의 얼굴의 현현 앞에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수용함으로써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합리적인 추론에서 벗어나 인간 상호 간의 책임의 윤리적인 접근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레비나스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중요한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이상으로 고통당하는 청중을 위한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먼저 청중이 당하는 고통이 어떤 모델에 해당하는지 세심하게 분석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통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고통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유익을 청중이 놓치지 않도록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때 설교자는 욥의 친구들과 같이 훈계하는 자의 자리에 아닌 고통당하는 청중과 ‘자리바 꿈’의 과정을 통해 고통 중에 있는 청중을 체휼(體恤)하고 위로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청중이 고통을 통해 신앙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고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고통 없는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든든히 세우는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V. 나가는 말 이상으로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리고 그 고난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거나 장기화할 때, 다윗처럼 하나님이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하거나 모세처럼 소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라고 설교자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예컨대 아스머 교수가 경험했듯이 설교자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면 신자는 잠시 방황하던 자리에서 돌아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설교자가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해석하는 여러 모델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신자가 겪고 있는 개별적인 고난 사건을 설명하는데 어느 유형이 적절할지 잘 분별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당장은 고난이 아프고 힘들지만, 신자의 성숙에 고난이 불가피함과 결국에는 고난이 유익임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사역을 감당하는 설교자에게 고난을 설명하는 모델들을 잘 이해하는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태도이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신정론의 주장을 강조하느라 자칫 고난을 겪는 신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체휼(體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타인의 얼굴’이 ‘계시’라고 하는 레비나스의 설명은 설교자가 청중을 향해 체휼하는 마음을 가지는 데 요긴한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C.S.Lewis / 김남식 옮김. 『고통의 문제』. 서울: 크리스천서적, 200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 문화과지성사, 2005.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서울: 두란노, 2021.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이근세 옮김.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서울: 2014.곽성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1건’ 추가.” 「청년의사」 인터넷신문(2021.07.26.) 접속 2021.08.05. 니콜라스 시라디/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서울: 에코의 서재, 2009.리처드 아스머/ 김현애 옮김. 『실천신학의 네 가지 중심 과제』.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12.민병원. “재난의 정치학: 리스본 대지진과 근대국가에 대한 21세기적 성찰.” 「평화연구」 28/2 (2020.10). 5-38.박영범. “신정론과 하나님의 고난: 신정론 문제의 응답으로써 하나님 고난이 주는 의미.” 「한국조직신학논 총」 33 (2012), 243-279.박영식.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8/1 (2013/07). 85-112.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서울: 길, 2008. 빅터 E. 프랭클/ 정순희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제일출판사, 2000.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이문원. “옛 해양대국의 자취가 남아 있는 리스본.” 「국토」 340 (2010/02), 70-75. 이상명. “라이프니츠: 변신론과 인간의 자유.” 「철학」 106 (2011/02),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35 (2015), 70-75. _____.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29 (2013), 70-75. _____.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신학」 6 (2003), 60-86. _____. “해석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설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신학」 54권 (2020), 198-231.캔 가이어/ 마영례 옮김. 『하나님의 침묵』. 서울: 디모데, 2006.팀 켈러/ 최종훈 옮김.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울: 두란노서원, 2018.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문화」 21 (2012), 119-144.홍치모. “C.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 루이스의 작품과 신념 세계.” 「신학지남」 65/3 (1998/09), 20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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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6-14 15:02
선교동행예배-모잠비크 이희정·아마릴도 실라스 마아이아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 6월 14일 모임이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강00 선교사가 기도한 후 남성 선교사들이 중창했다. 이희정,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부부 선교사가 시 23:1-6을 본문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이희정 선교사가 "시23편이 제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이다. 말씀대로 매순간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셨다. 저희는 40대 중반의 부부로 결혼 10년차이다. 2011년도에 한국에 머물며 아들의 발달치료 과정을 밟았다. 아들은 중증 자폐성 장애가 있다. 남편도 성인병을 앓고 있어 한국에와 치료했고 저도 자궁, 유방 치료를 받았다. 저의 친가 외가는 모두 불신자 가정이었는데 아버지가 복음을 들어 믿게 됐다. 그러나 부모(할아버지, 할머니)의 반대로 교회를 가지 못하고 대신 자식들인 우리를 보냈다. 이후 아버지는 병을 얻고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됐다. 이 과정에 친가가 다 믿게 됐다. 그런데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10년간 교회를 떠났다. 이후 26살 때 기독교의 꼬투리를 잡을려고 돌아와 결국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됐다. 2008-9년 남아공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거기서 남편을 만나 전문인 선교사 훈련을 받고 3년 후 모잠비크로 가게 됐다. 모잠비크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선교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이다. 10년 사역하는 가운데 마을이 형성됐다. 지역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교회가 활성화됐다. 아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경험했다.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사역을 하게 됐다. 모잠비크는 9개월간 덥고 습하다. 곤충으로 인해 피부가 가렵고,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 불을 피워 밥을 먹고 사는 등 초기에 많이 고달펐다. 당시 한국 선교사들하고 교제하지 못해 외로웠다. 외국인 남편과 사는 것이기에 생기는 어려움도 있다. 여러가지로 힘들었는데 그것이 사역이고 삶이라고 생각하고 버틴 것 같다. 지금에야 그 당시에 ‘눈물의 골짜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은 믿음도 나약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인도하실 하나님을 붙잡고 살고 있다. 살고 있는 지역에 전기가 없어 많이 힘들었는데 작년에 비로소 전기가 들어왔고, 10년만에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믿음의 리더로 세워졌다. 감사한 사람으로는 남편이며 함께 교제를 했던 다른 선교사였다. 그 선교사도 현지인과 결혼한 여자 선교사였는데 많은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가 "기쁨의 눈물이 난다. 그동안의 사역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 시37:7말씀으로 살고 있다. 제 삶이 어려워 사역자가 될 상황이 아니었는데 어머니가 늘 신앙으로 인도했다. 과거 코미디언이었다. 그런데 보수를 술로 받아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 방송 코미디언이 될 기회가 왔는데 그때 남아공에서 신학을 공부할 기회도 왔기에 신학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후 어디로 갈지 모르고 가서 전도를 했다. 아버지는 사역을 반대했고 어머니는 지지했다. 열악했지만 열심히 전도했다. 3명의 아이가 자라 교회의 일꾼이 됐다. 이후 한 선교사님이 교회를 지을 수 있는 재료를 주어 건축비도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지어졌다. 현지인들은 교회를 통해 도움을 받을 마음으로 오게 된다. 그래서 교회를 짓다가 떠나기도했다. 하지만 사역의 열매는 마을 사람들이 이단을 떠나 신자가 됐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사역의 열매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저는 늘 주님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잠비크의 평안을 위해서(북부지역에 테러가 빈번함), 무슬림이 많은데 복음화를 위해서, 가족의 건강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서 간절히 합심기도 후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의 축도로 마치고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100여명의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
김병중(Th.D) 06-07 15:19
선교동행예배-루마니아 송정렬·전효정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가 6월 7일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김0애 선교사가 기도한 후 브라질 조경미 선교사가 특송했다. 루마니아 송정렬, 전효정 선교사 부부가 고후 2:12-14을 본문으로 ‘개선 행렬에 참가시켜 주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송정렬 선교사가 “2001년도에 튀르키예에 갔는데 2021년 초에 영구추방 당해 1년 6개월 안식년을 보내고 작년 9월에 루마니아로 가게 됐다. 1989년 군제대 후 중동 이슬람권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후 이슬람 선교를 준비했다. 최근 중국, 인도에서도 선교사들이 추방당했다. 선교지를 추방당하면 생활의 애환이 생긴다. 상실감이 들었다. 통상 추방 후 5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데 저는 영구추방을 당했다. 그래서 튀르키예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좀 더 조심했어야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국내에 들어와서도 충격을 받았다. 저는 다행히 파송 교회가 주거를 마련해 주었는데 때로 주거공간이 없는 경우도 있다. 거절감의 상처가 있는데 후원교회가 후원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가 추방된 선교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상처를 받기도 했는데 본문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추방으로 인해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 했지만 이후 그들이 바울이 보낸 편지로 회복했을 때 위로받고 감사하며 고린도후서를 쓰게 됐다. 현지에서 20년간 다음세대를 위해 사역했는데 이들이 다음세대 사역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위로가 됐다. 튀르키예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비잔틴을 중심으로 1000년간 기독교 문화가 꽃피웠다가 1071년 이슬람이 들어와 99.8%가 이슬람화 됐다. 그러나 다음세대 사역을 하며 신앙교재를 많이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여전히 선교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에 감사하다. 현재는 루마니아에서 디아스포라 튀르키예인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동유럽을 중심으로 2백만 명이 넘게 퍼져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로인해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희는 루마니아교회와 협력해 이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제야 추방당한 이유를 알게 됐다. 이슬람은 선행을 통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절반 이상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간다고 고백해 감사했다. 두 딸이 있는데 추방으로 인해 작은 딸이 충격 받아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것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려움을 겪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응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하시고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신다고 했다.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효정 선교사가 “남편 따라 튀르키예에 무작정 따라 갔다. 10년 후 한국에 오니 너무 좋아보였다. 그래서 한국에 있고 싶었다. 그때 하나님은 ‘선교지에 있는 것이 너에게 복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 열심히 사역했다. 이후 다음세대들이 자라 교회 사역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영구추방을 당해 너무나 상실감이 컸다. 그 동안 상담대학원 과정을 하며 국내에서 상담 사역을 하길 원했는데 남편과 함께 선교지 정탐을 가게됐는데 열학한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을 볼 때 ‘아이들을 위해 너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었다. 이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기로 했다. 50살이 되어 루마니아어를 배우는 데 언어가 어려워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제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을 오히려 남편에게 말하고 루마니아로 가게됐다. 어려웠지만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간절히 합심기도 후 송정렬 선교사의 축도로 모임을 마치고 2층에 올라가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사역소개 영상 -
김병중(Th.D) 04-26 11:04
인도선교편지 - 김계응 · 오금희 선교사
2020년 1월, 10년째 하는 마을 클럽 대항 축구 사역을 끝내고 잠시 쉬고 오려고 나간 태국에서 팬데믹을 맞았고 본의 아니게 긴 쉼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14년간의 사역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무지하고 부족해서 잘못한 것들이 많았고, 후회되는 것들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을까? 새로운 각오를 두고 곧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긴 시간을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현장에 없으니 편안한 환경이 가시방석 같고, 이러다가 솥에 서서히 삶아지면서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인도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연구했으나 비즈니스 비자와 학생비자 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1월 자다 풀 대학 방글라를 배우는 어학코스로 입학허가를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학생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처음 선교 떠날 때 붙잡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새 각오로 입국하였습니다. 이민국을 통과할 때 70 중반의 나이에 학생비자가 이해가 안 되는 이민국 직원이 모든 사람을 다 보내고 우리 부부만 남겨 놓고 수많은 질문 끝에 결국은 입국을 허락했습니다. 할렐루야 공항 문을 나서니 후끈한 찜통더위와 메케한 매연 냄새, 선명하게 들리는 방글라를 들으니 드디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고 하는 안도감과 한편 습기 100%인 더위와 매연과 벌레를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가구가 대강 있는 집을 구하게 되었는데 입주한 지 10일이 지나도록 가스가 연결되지 않아 컵라면을 원 없이 실컷 먹었습니다. 4월 6일 동역하는 최헌주 목사님이 입국하여 8일 사역지 람강가강에 함께 내려갔습니다. 부활절 예배에 1년 만에 성찬과 세례식을 하였습니다. 보노샴너골 섬 사역자로 키우는 "수깐도 다스"가 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간 동안 홀로 사는 70이 넘은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기도하러 매일 새벽예배에 나오다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4월 10일(월요일)부터 시작된 청년부 수련회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리자"라는 제목으로 3일간 진행되는 동안 40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하였는데 오전에는 성경 개관에 관한 강의와 오후에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부분 청년이 드르보바잘 교회의 초창기 때 5~6세부터 과외 학교에서 자라나서 지금은 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된 청년들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으로 잘 성장해서 도시에 직장을 가지면서 교회를 떠나든지 결혼해서 타지역으로 가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쁜 소식은 교회의 안수집사 "산토스 고로이"의 무남독녀 딸인 뿌스폰잘리가 켈커타에 있는 윌리엄 케리 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간은 드루보바잘 교회에서 전도사로 훈련받고 그다음 해 신학 대학원에 공부하러 갈 예정입니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계속 공부시켜 신학대 교수를 만들 계획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공부를 그만두고 건축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배우지 못한 한을 딸이 대신해 주어 산토스 집사의 큰 기쁨이 되는 졸업식이었습니다. 저희는 태국에서 올 때 다 버리고 옷가지와 양념 꼭 필요한 것 몇 개 가지고 왔는데 무게 때문에 된장 고추장을 못 가지고 와서 못내 아쉬웠지만 여기에 오니 마침 한국으로 철수하는 선교사 가정이 있어서 필요한 것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재적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또 경험하며 이곳에서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건강하여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우리 부부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이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가지고 기쁘게 살며, 지금까지의 사역을 잘 정리 정돈하여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저희를 위해 기도와 물질로 동행하여 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2023년 4월 인도 콜카타에서 김계은 오금희 선교사 올림 -
김병중(Th.D) 01-22 17:14
인도 선교 소식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67편 3절)) 세상이 온통 비대면이 일상화되고 디지털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나라 간의 왕래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선교의 길이 막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오묘한 뜻은 그 가운데서 막히지 아니하고 역사하고 계시는 람강가 현장을 보고 드립니다. 저희 부부는 8월 17일 인도 땅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지난 3월 켈커타 공항에서 사역지를 눈앞에 두고 입국거부를 당한 뒤, 늘 언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 염려하였지만, 이번에는 비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쉽게 받게 되었습니다. 여권에 지난번 입국거부 도장이 찍혀 있어서 이민국을 통과할 때 예상되는 모든 질문에 대답할 말을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질문도 없이 이민국을 너무 쉽게 통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민국 직원의 눈을 가려주신 것 같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사역지에 도착하여 보고싶은 얼굴들을 만나고 우리가 떠나 있었던 지난 2년 7개월 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우리 눈으로 보고 사역자들의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데보브로또 고로이 목사님이 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쉽게 잘 전하고 있고, 엄마들이 예배당 뒤편까지 그득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신기했습니다. 예배 중에 “내가 시작했다” 라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람강가 사역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겠구나 생각하니 감사의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2년 7개월의 시간속에서 교회학교 아동들이 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몰라보게 되었고 청년이 되어 각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잠 많은 시기인데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 인도도 하고, 어린이 예배에 사회를 보는 청년도 있고, 장년예배에 찬양팀을 만들어 예배인도도 하고, 교회 화장실 청소도 맡아서 깨끗하게 관리해 놓은 것을 보니 멀리서 나마 날마다 머리 박고 간이 절이도록 기도한 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아름답게 키우셨습니다. 18세 이상 된 청년들은 전도훈련 받고 마을에 새 소식반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5곳인데 해마다 늘려 나갈 계획이고 일년마다 장소를 바꾸어서 여러 곳에서 복음의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지난 10여년의 시간 속에서 자녀들을 통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엄마들의 믿음이 많이 자랐습니다. 산토스 안수집사의 지도아래 글자를 아는 엄마들을 주축으로 자기집을 오픈하고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 말씀과 찬양도 가르치면서 결속력을 다지고 있습니다. 지금 두 팀으로 약 30여명이 모이는데 계속 지도자를 세워 장소를 늘려 나갈 예정입니다. 거의 1년 전부터 새벽기도에 나오는 10여명의 엄마들이 매일 말씀과 기도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새벽예배에 나온 엄마들이 “다시는 죄악의 길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찬양을 힘차게 부르는 것을 보니 이 힌두 땅에서 하나님이 하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주일 장년 예배뿐만 아니라 아동예배를 맡아 성경비디오를 보여주며 말씀을 전하는데, 재미있는 것이 없는 시골에서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게 말씀을 배우고 있고 아동 부 예배에 40~50여명이 모이고 매주 새로 오는 아동들이 늘어나고 있어 소망이 보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보노샴너골 섬교회에 가보니 아직은 성도들이 많지는 않지만 초창기부터 어린자녀를 데리고 나오던 성도 몇 가정이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인도자도 없이 자기네들끼리 모여 새벽예배를 드리고 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던 “리야스리 사몬또”가 며칠전에 국립 간호대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시골에서 도시에 있는 국립간호대학교를 가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의대를 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졸업하면 국립병원에 취직이 되고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섬교회에서 한 명의 희망 샘플이 나옴으로 온 섬에 학부모와 아동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그 힌두 섬마을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역지에 들어가지 못해 모든 것이 정지될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으므로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3년 동안 교회 관리를 하지 못해 창문과 문들이 비와 바닷바람에 칠이 군데 군데 벗겨져서 흉측하게 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고, 공부 잘하는 아동들은 격려해서 전문직을 가지도록 대학을 보내줘야 하고,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잘하고 있는 가운데 격려하며 시너지 역할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번에는 여행비자로 들어갔지만 장기비자를 받기위해 자다푸르 대학 어학원에 11월에 학생등록을 신청하려 합니다. 내년 1월에 입학허가가 되면 학생비자를 받게 됩니다. 마음은 선교지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까지 생명을 다하려 합니다. 기도제목은 1,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함께 교회를 섬길 합당한 아내를 만나도록. 2,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3, 저희 부부가 장기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얻도록. 늘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시는 기도의 동역자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리며 김계응 오금희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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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9-03 13:53
【포토에세이】 철도길
철길이 길게 놓여 있다. 비록 끝이 보이지는 않으나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철길이 없으면 어떤 철도도 달리지 못하기에 같은 철길을 다양한 이동 수단들이 사용한다. 무궁화, 새마을 그리고 ktx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요금도, 소요 시간도 다르다. 이 철도길은 오늘 어떤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 줄 것인가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기차에 오른다 -
김병중(Th.D) 08-27 10:20
【포토에세이】 부추도 꽃이다
옥상 텃밭 한 구석에 어머니께서 동네 친구분에게 얻어오신 부추가 심겨 있다. 어느 날 장독대 대형 화분에 몇 포기 옮겨 심었다. 이전에는 꽃을 심었었다. 가끔 자라난 부추를 잘라 먹었다. 그러다 그것도 시들해져서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흐느적거리는 풀같았던 줄기가 꼿꼿이 세워지고 키가 자라 끝 쪽에 뭔가 맺히더니 작은 꽃을 피웠다. 참 요물이다. 잘라 먹을 때는 풀같았는데 그냥 내버려두니 계절을 따라 생존을 위해 꽃을 피운 하나의 꽃이 되더니 신기해 유심히 보는 사이 벌도 날아와 꽃을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추꽃은 처음 봤다. 늘 집이나 식당에서 음식 부재료로 먹던 풀 같은 것이 이렇게 작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하다. 도심 옥상에서 부추꽃을 보니 서울 촌놈이 행복하다. 식물은 번식을 위해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통해 수정한다. 그렇게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사람도 꽃이다! 화려한 장미, 매혹적인 목련도 꽃이지만 부추도 꽃이다. 우리 모두 각자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를 ..... -
김병중(Th.D) 08-23 11:34
【포토에세이】 안빈낙독은 안빈낙도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이란 말이다. 내겐 안빈낙독(安貧樂讀)이 있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독서한다”는 뜻이다. 교단 기자는 담임목사 때보다는 가난하다. 담임목사로서 보장되었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하나도 없다. 차량 유지비도, 통신비도 모두 교회가 부담했었다. 담임 부임 때 구입했던 트라제XG를 가져와 아주 가끔 사용하고 주로 세워둔다. 기자로 취재현장을 다닐 때 대중교통이 편하고, 취재비 받아서는 차를 운영할 수 없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함은 있으나 늘 책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취재가방에 언제나 책을 갖고 다닌다. 집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지만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은 책이 상당하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운전하는 것이 불편한다. 운전하느라 책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급적 운전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잠시 취재 갔다가 다음 취재까지 짬이 생겨 굳이 한 장소를 찾아 왔다. 종로쪽에 있는 저렴하고 넓직한 카페이다. 종로 쪽에 올 때 시간이 비면 와서 기사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내게 독서 취미가 있는 것이 너무 다행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었다. 다행히 지금도 독서가 좋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책을 읽으면 취재 현장까지 가는 것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비어도 좋다. 책 읽고 있으면 되니까. 모두 안빈낙독의 삶을 사시기를. 엉뚱한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책에서 삶의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래본다. -
김병중(Th.D) 11-04 19:37
3代의 감 따기
2020년 12월 담임목회 사임 후 부모님 댁에 얹혀 살면서 이듬해부터 가을에 감을 따고 있다. 올해도 감을 땄다. 20여 년 전 어머니께서 이 집을 사서 오신 후 종로 묘목상에게 어린 감나무를 사서 마당에 심었다가 아버지께서 집 밖 귀퉁이로 옮겨 심으셨다. 올해 4년째에는 이전처럼 감나무에 비료를 주지도 못하고 지냈는데 어머니가 막걸리 등 양분을 주셔서 그런지 깨끗하게 감이 열렸다. 이전에는 감 주위에 흰 것들이 붙어 있었는데 말이다. 이 감이 탐스러웠는지 동네 어떤 사람이 두 번이나 따는 것을 어머니 아는 분이 소리쳐 내쫓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손타기 전에 어머니, 아들과 함께 감을 땄다. 이사 올 때 감나무 잎 떨어지는 것이 지저분해 어머니는 잘라버리시려고 했는데 나는 살려 두자고 했다. 그 결과 서울에서 감을 따는 재미와 먹는 재미를 누리고 있다. 아버지도 침대에 누워계시면서 잘 익은 감을 맛있게 드시니 다행이다. 70여 개는 딴 것 같다. 대봉이라 익혀 먹어야 한다. 매년 감 따는 재미를 누리고 싶다. 단톡에 어떤 사람이 감의 효능에 대해 올려 공유해 본다. "감" 많이드세요! "감"만큼 다양한 치유력과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과일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놀라운 과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은 종합 영양제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과일이죠. 감 1개에는 사과 9.5개 분량의 비타민이 들어있는데 이는 최고의 천연 종합 비타민 과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비타민 A는 시각 유지에 필요한 로돕신을 만드는 영양소인데 이 비타민 A가 감 1개에 성인이 하루 섭취해야 할 양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눈을 많이 쓰는 수험생이나 노안으로 눈이 나빠지는 경우에 시력 보호용 과일로도 좋습니다. 감의 주성분은 당질(15~16%)인데 포도당과 과당의 함유량도 매우 높으며, 비타민 C와 A 그리고 탄닌, 칼륨, 마그네슘 등이 풍부하게 함유된 알칼리성 식품입니다. 감은 최상의 건강 과일이라 해도 지나침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최상의 건강 과일이 흔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무시하고 비싼 과일만 사드시고 있겠죠! 사과 10개 먹는 것보다 감 1개 먹는 것이 더 좋다고 증명하고 있어요. 잘 모르셨죠? 감은 자연 치유제로도 최상의 특급 과일이며 피부에도 최고랍니다. 심폐(心肺)를 녹여주며 갈증을 멈추고 폐위(肺痿)와 심열(心熱)을 치료합니다. 위의 열을 내리고 입이 마르는 것을 낫게 하며 토혈(吐血)을 멎게 해 주는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약입니다. 얼굴의 주근깨를 없애고 기침, 만성기관지염, 고혈압, 심장 질환 등에도 효능이 있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풍 예방약으로도 쓰입니다. 감만큼 다양한 치유력과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과일은 없다고 합니다. 감 많이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