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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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교육 현장에서 분투하는 교사들의 신앙 간증
    나는 한 번도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명을 감당하는 새로남교회 교인들의 생생한 간증이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는 서문에서 “대전에는 약 600개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안학교, 특수학교가 있고 19개의 대학 캠퍼스가 지정학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남교회에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많이 계십니다”라고 했다. 이들 중 총 18명의 교인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속해 있다. 평교사에서 교감, 교장, 교수, 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이 어떻게 교직에 발을 들였는지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과정까지 참으로 감동적으로 써나갔다. 이틀에 걸쳐 열심히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 책의 살아있는 신앙 간증을 통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신앙으로 교직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다. 그들은 새로남교회의 오정호 담임목사를 통해 든든한 신앙인으로 세워져 어려워도 교직을 잘 감당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오 목사는 남다른 교육철학으로(오정호 목사는 총신대학 기독교교육과 출신이다) 새로남기독학교 초, 중, 고 과정을 운영하며 믿음의 다음세대를 키우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우송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는 오덕성 장로는 담임목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94년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오정호 목사님께서 대전 새로남교회로 부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서대문교회 출신이었고 아내는 내수동교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 목사님이 부임하신 새로남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좋은 교회, 그리고 귀한 목회자와 만남의 축복이 이루어졌다. 제자 •사역훈련 1기로 신앙생활을 재정비하고 기초부터 점검하는 과정을 거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정도 목회의 철학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우리를 이끄시는 목사님을 만나고 이후 제자 • 사역훈련을 받고, 건축 위원장으로서 헌신하고 이단과 투쟁하는 현장에서 기도하며 목사님과 함께 훈련받은 대로 실천하였다. 장로로서 교회, 사회에서 선한 청지기 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삶의 기초를 단단히 세우는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p. 234). 읽기에 부담 없기에 모든 분의 일독을 강추한다. 그리고 묵묵히 교직을 감당하는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 교육자를 응원한다! 다음은 오정호 목사가 쓴 이 책의 서문이다. 교육자, 아이들의 눈망울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들 제가 섬기는 대전에는 약 600개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안학교, 특수학교가 있고 19개의 대학 캠퍼스가 지정학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남교회에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많이 계십니다. 지난 2022년 『과학자, 하나님을 만나다』, 2023년 『공직자, 하나님을 만나다』를 시리즈로 출간한 이후에 세 번째 후속편 『교육자, 하나님을 만나다』를 기획하여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습니다. 교육은 국가와 사회 발전의 초석이고 백 년 앞을 내다보는 큰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데 백 년이 걸리며 그 백 년은 앞으로의 백 년을 결정합니다. 다음 세대는 교육자로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참교육자를 통해 이뤄집니다. 외부의 압력이나 시스템의 한계에 굴하지 않으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정도를 걷는 교육자가 필요합니다. 이 책의 필진은 교육계에서 인정받는 분들로, 자신에게 주어진 교육자로서의 소임을 하나님의 사명으로 여기는 분들입니다. 신앙의 고백대로 정도를 걷고자 몸부림치는 열여덟 분의 글을 읽다 보면 하나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 교육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이십니다. 책 안에는 그들이 만난 하나님의 생생한 이야기로 즐비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남기독학교를 하나님의 은혜로 설립한 지 올해로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지금까지 옆도 뒤도 안 돌아보고 오로지 아이들의 눈망울만 바라보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열정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교육은 열정만으로는 안 되고 인적 자원, 물적 자원이라고 하는, 이른바 정신적 자본과 물적인 자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으로 인도해 주셨기에 학교를 세워 가는 일이 가능했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꾼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학교뿐만 아니라 일반학교와 대학에서 쓰임 받는 교육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고 계십니다. 성경 교사 바울이 존재했기에 디모데라는 탁월한 목회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헬렌 켈러(Helcon Adim Kdllor)를 가르쳤던 앤 설리번(Anne Sullivan Macy)의 스승은 로라(Laura)였습니다. 로라에게 받은 교육과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한 아이가 헬렌 켈러였습니다. 제2의 디모데와 앤 설리번을 만드는 것이 교육자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아침에 씨를 뿌려서 저녁에 거두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교육 현장을 내실화하는 것에 힘써야 하고 이를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육자와 학교가 심사숙고하여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때 교육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확고한 교육 철학과 이를 뒷받침하는 삶의 모본을 가슴으로 보일 수 있는 교육자 한 사람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무엇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사조와 비진리적인 가치와의 충돌, 동성애를 옹호하고 조장하는 교육, 악법의 제정 시도의 현관에 있는 우리의 미래 세대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미래 교육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시되는 현실입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교육자 지망생, 크리스천 교육자분들이 하나님의 손이 교육 현장을 이끌고 계심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교육 현장의 여러 어려움에서 지혜와 담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출생이라는 인구절벽의 위기 가운데 기도하는 교육자 한 사람을 통하여 반전과 역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소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앞장서서 수고해 주신 오용준님, 박태호님, 서광남님, 채은영님, 이태규님, 정창호님, 이석님의 노고를 기억합니다. 전체 시리즈의 기획과 책을 출간하기 위해 따뜻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귀한 열매로 만들어 주신 두란노서원에 감사드립니다. 교육자로서 고뇌와 기도로 진솔한 원고를 내어주신 집필진 모든 분들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늘 동행하기를 기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Soli Deo Gloria! 오정호 새로남교회 담임목사, 새로남기독학교 이사장 관련기사링크: 새로남교회새로남교회, 『교육자, 하나님을 만나다』 출간 감사예배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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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3
  • 【북토크】 나를 두 번 울린 책
    얼마 전 내가 속한 파이디온선교회 단톡에 김혜한 선배가 본인이 쓴 책을 소개했다(나는 총신 85학번이고, 김혜한 선배는 책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보면 82학번으로 보인다. 선교회 활동을 할 때 개인적으로 본 적은 없다). 최근 총신대학 총동창회 총회를 취재하러 갔는데 박성규 총장이 선물 받은 책 30권을 참석자들에게 나눠 준다고 해서 우연히 이 책을 받고 읽게 되었다. 사모로서 삶의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한 책을 읽다가 두 번 울었다. 그것도 지하철에서 말이다.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데 남이 보면 참 우스웠을 것이다. 중늙은이가 책을 보다 울고 있으니 말이다. 눈물이 난 대목은 다음과 같다. ①부르심을 점검하다 "사모님들을 섬기는 자리에 나를 부르신 것이 확실합니까? 하나님 이 나를 부르신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사역이 맞다면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도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여성 장로님이 떠올랐다. 사모축제도 끝나고 인사를 한번 드리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평소 연락드리는 것이 익숙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이 많았겠지만, 이날은 생각이 나자마자 바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장로님! 오늘 갑자기 장로님 얼굴이 떠오르네요.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로 보기 원하세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오후에 만나서 장로님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김혜한 선교사를 왜 만나야 하나요?라고 하나님께 질문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살림하다 아껴둔 비상금을 주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장로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물질을 지원한 적이 없기에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이어서 여쭙기를 "우수리는 뗄까요?"라고 물으셨다고 하신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니다. 우수리도 떼지 말고 다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다 들고 왔다고 마음을 나눠 주셨다(pp. 56-47). ②아버지 마음 지금도 그때 친구의 말을 생각하면 통곡이 터져 나오려 한다. 남편의 신장 이식을 위해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고, 그간 후원하던 분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정말 전화하기 싫었다. 작은 교회이다 보니 사례비가 나오지 못하는 때도 있었고, 앞으로 생활이 어떻게 될지 불안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환난이 오고 재정의 어려움이 오니 작은 물질도 포기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그럼에도 양심상 사역을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동기인 금신이에게 연락할 차례가 되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기독 동기 모임을 매달 가졌던 금신이는 동기 모임에서 매달 정한 금액을 전하는 회계 역할을 맡아 왔다. "금신아, 남편이 신장 이식을 해서 교회를 사임하게 됐어, 지금까지 후원해 줘서 고마워." 해야 할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전화선 저쪽에서 금신이의 대답이 들려왔고, 그 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니까 더 해야지." 나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끊었는지, 뭐라 말하고 끊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184-185). 왜 나는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울었던가? 내 마음에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말로 나는 목회를 중단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노회에서 사임 처리했다. 그리고 12월에 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갔다. 그동안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경력을 쌓아 담임으로 나갔는데 40살에 시작해 55살에 목회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사임키로 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그 나이에는 다른 교회로 부임하기 쉽지 않다. “사임한” 혹은 “사임당한” 목사라는 꼬리표가 있는 목사를 어느 교회가 청빙하겠는가? 이후 딱 한 군데 동네에 있는 교회에 지원을 해보고는 그만뒀다. 그리고 얼떨결에 기자가 됐고 지금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다. 사임 후 아내는 재정문제로 압박을 받았다. 군목 시절에 만난 아내는 이후 부목사, 담임 때 많지는 않아도 사례비로 생활했다. 정규직 인생이었다. 그러나 사임 후 나는 비정규직 인생이 됐다. 친구들은 마을버스 운전을 하라고도 했다. 나는 장애인 활동 보조인 교육도 받았다. 그러다 이제 언론인으로의 길을 가고 있다. 재정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굶주리지는 않는다. 총신대학에 500만 원 후원도 했다. 총신대 종합관 도너월에 보면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제는 5년 차 기자로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취재하러 가서 큰돈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매달 평타는 치면서 지내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때 하늘을 보며 울었던 기억도 있다. 교회 봉사를 할 때는 정규직으로 매달 생활비가 나왔으나 이제는 자영업자로 돌아다녀야 돈을 벌 수 있다.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이다. 그래도 그동안 군목으로, 부목으로, 담임으로 살았던 것은 특혜였다. 이제 비로소 돈벌이하는 성도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돈과 관련된 선배의 이야기를 보면서 5년간 겪었던 “서러움”이 떠올라 그렇게 울었는지도 모른다. “집돌이” 인생이 이제는 “떠돌이” 인생이 되어 사방팔방을 돌아다닌다. 지금, 이 글도 전남 영암 행사를 취재하고 올라가는 KTX에서 쓴다. 아침 6시 21분에 KTX 타고 내려와 이제 올라간다. 그럼에도 나 같은 기자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길을 간다. 신학박사까지 공부하고, 군목을 하고, 조직교회를 담임했던 기자는 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이력을 보는 사람들은 내가 기자 하는 것을 특이하게 생각한다. 40세에 담임으로 나가 정년 70의 30년 절반을 목회하고 남은 기간은 기자로 살아갈 것 같다. 이 길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제2의 인생 계획이라는 것을 믿고 하루하루 성실히 감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필요한 물질을 채우고 계신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필요한 사람들을 통해 굶지 않게 하신다. 내가 지금도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면 겪어보지 않았을 인생이다. 오늘도 사모들의 비빌 언덕이 되기 위한 사역을 위해 “사서 고생하시는” 선배의 인생을 응원한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깨어진 항아리 같은 선배의 인생에 물을 넘치게 부으실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다 깨어진 항아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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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1
  • 【북토크】 왜 글쓰기를 배워야 하는가?
    글쓰기가 약자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보여준다. 요즘 이 저자에 꽂혀 책을 찾아 읽고 있는데 독서량이 어마어마한 것을 느낀다. 만만치 않은 내공의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고 목적도 분명하다. “저는요. ‘나쁜 인간’을 응징하려고 써요” 이렇게 바로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 적절한 사회 생활 태도를 신경쓰는지라 '고상한' 말로 둘러대곤 한다. 그런데 급기야는 책 제목으로 정했다.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 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s),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글쓰기를 삶의 형태라고 할 때, 글을 쓰는 이유(자기 표현)는 인구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글은 몸의 형식(form)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재현의 양식이 다를 뿐이다. 다만, 글쓰기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만의 특징이 있다. 인간은 모차르트처럼 네 살부터 작곡을 하고, 강-약을 조절하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도 있는 존재다. 수많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처럼 유년 시절 부터 스케이트를 탈 수도 있다. 그러나 네 살부터 글을 쓰는 사람은 없다(낱말을 익힐 수는 있다). 글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 말이 생각으로 조직되고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요건은 적어도 10대가 되어야 가능하다. 고등학교 시절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들이 극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역시 1970년대 훈육 세대에서나 가능하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쥔 요즘 10대 청소년들은 '전통적인 글쓰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재현한다. 삼십 세를 이립(而立), 삶의 기초가 확립되는 때라고 하지만 그것은 공자의 생각이고, 현대 철학에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방황하는 존재다. 나는 서른 살에 어렴풋이 나 자신에 대해 알았 다. 나의 위치(position)를 깨달았다. 페미니즘 덕분이다. 특정한 사유나 사람 등 의미 있는 인생의 레퍼런스를 언제 어떻게 만나는가는 운에 달렸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 페미니즘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 가까이 있었다는 의미다. 나의 계급과 젠더, 건강과 나이, 심리적으로 취약한 개인적 캐릭터. 사회적 약자는 상대적 개념이지만, 당시 나는 서울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거의 모든 면에서 약자라고 생각했다. 한마 디로, 나는 '돈 없는+ 여자'였다. 나는 약자로서 먹고살 방도를 찾으면서도, 그 방법이 성차별 사회에서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나를 보호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답'은 금 방 나왔다. 글쓰기였다. 물론 지식인이었던 부모님의 영향, 제도 교육의 세례, 당시 이삼십 대의 몸, 그리고 기호 식품과 여행, 미팅, 소비 생활 등이 전무한 초간단 라이프 스타일로 인해 남들에 비해 무한히 많은 시간 같은 자원이 있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글쓰기라는 직업 훈련'은 다른 분야에 비해 비용이 덜 든다. 한때 외국 유학 준비를 위해 딱 한 달 학원에 다닌 것 외에는 나는 평생 사교육비를 쓴 적이 없다. 나는 걸어서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찾고 읽을 수 있었 다. 메모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메일로 전송했다. 문제는 '작가'가 다소 시끄러운 직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글쓰기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르고, 나의 관심사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온갖 논쟁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젠더 관련한 글은 여성도 남성도 불편하게 한다. 당파성이 뚜렷한 글이라 당파성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틀리면 틀리는 대로' 욕을 먹는다. 격려보다는 비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글쓰기와 관 런하여 가장 괴로운 경우는 두 가지다. 사회적 편견(무지), 난센스. 어처구니없는 이들과 싸워야 할 때, 그리고 간혹 독자나 출판 관계자로부터 내 글이 내가 가장 비판하는 다른 이들의 글과 비슷하다는 '평을 들을 때다. 지구를 탈출하고 싶을 정도로 노동 의욕이 사라진다. 약자가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말은 당연히 논쟁적이다. 나부터 의심스럽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선악과 시비, 승부는 누가 정하는가. 선악은 규범적이지만, 강약은 맥락적인 개념이다. 갑을 관계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세상은 갑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갑을에 속하지 않은, ‘병정무기경신임계’도 있다. 이는 본디 순서(위계)가 아니라 순환이다. 고정된 약자나 강자는 없다. 관계 속에서 약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무기를 찾아야 한다. 피터 패럴리 감독의 2018년작 영화의 제목 ‘그린 북(Green Book)’은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업소, 주유소, 식당 등을 지역별로 표시해놓은 ‘흑인 전용 여행 가 이드북’을 가리킨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노의 장면이 연속해서 펼쳐진다.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백인’, 비고 모텐슨 분)와 돈 셜리 박사(‘흑인’, 마허살라 알리 분)가 인종 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정반대이다. 극중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로 나오는 주인공은 말한다. “품위(dignity)만이 폭력을 이길 수 있어요.” 나는 이 대사가 좋았지만 동시에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정의는커녕 의리도 찾기 힘든 세상에서 품위라니? 나 역시, 토니처럼 '욱' 하는 성격에,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 한다. 결국 내 분노는 다시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방관자이고 싶지 않은 정의감(?)에 나섰다가 오히려 가해자로 몰린 적 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돈 설리 박사는 말한다. "나는 평생을 참고 사는데, 당신은 하루도 못 참냐."고. 그렇다.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 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가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pp.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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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3
  • 【기고】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 사역의 전망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 사역의 전망 1. 서론: 목회와 사회복지의 연관성 목회는 영적 돌봄과 신앙 공동체의 형성을 주된 사명으로 하며, 사회복지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한다. 이 두 분야는 인간의 내적, 외적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지역사회의 사회복지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목회 성장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를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그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 목회 성장의 현황과 과제 (1) 목회의 변화와 성장 동력 현대 목회는 기존의 예배 중심 사역에서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 사회적 책임 수행으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교회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성장 동력을 모색하고 있다. (2) 목회 성장의 주요 과제 ① 세대 간 단절 문제: 젊은 세대의 신앙 참여 감소로 교회의 지속 가능성에 위기가 제기되고 있다. ② 다양한 요구 충족: 교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예배와 설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심리적·사회적 지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③ 사회적 신뢰 회복: 일부 부정적 사건으로 인해 교회의 공공성이 약화된 상황에서, 신뢰 회복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3. 사회복지와 교회의 역할 (1) 교회의 사회복지 사역 전통 교회는 오랜 역사를 통해 병원 설립, 빈민구제, 교육 지원 등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수행해 왔다. 이는 복음의 실천적 표현으로, 교회가 지역사회와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는 기초가 되었다. (2) 현대 사회복지의 새로운 요구 현대 사회는 고령화, 빈부격차, 정신건강 문제 등 다양한 복지 필요가 증가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데 있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요구받고 있다. (3) 사회복지와 목회 간의 상호 보완성 사회복지는 교회의 목회 사역을 보완하며, 교회는 복지 활동을 통해 신앙적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보완성은 교회가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지역사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데 기여한다. 4.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의 통합적 전망 (1) 목회적 접근에서의 사회복지 통합 목회는 단순히 신앙 교육에 머물지 않고, 교인들과 지역사회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돌보는 방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 내 상담소 설치, 지역 사회를 위한 장학금 지원, 취약 계층을 위한 돌봄 사역 등이 있다. (2) 사회복지적 접근에서의 목회 성장 기회 교회가 사회복지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때, 지역사회와의 신뢰를 쌓고 교회의 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교인 수의 증가와 영적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3) 실천 방안 ① 협력적 네트워크 구축: 지역 사회복지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교회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 ② 교육과 훈련: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사회복지 관련 전문 지식을 제공하여 복지 사역의 효과를 높인다. ③ 통합 프로그램 개발: 신앙 교육과 복지 서비스를 통합한 프로그램을 설계하여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킨다. 5. 결론: 지속 가능한 목회와 사회복지의 동반 성장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며,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교회는 지역사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복지 사역을 통해 복음의 실천적 면모를 강화할 때 더 큰 성장 가능성을 갖게 된다. 현대 교회는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목회와 복지를 아우르는 새로운 사역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이는 신앙 공동체와 지역 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11-18
  •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진리를 위해 싸우라!
    옳든 그르든 담임목사로 인해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네 가지 반응이 있다. 찬성, 반대, 관망, 회피이다. 담임목사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매우 강하게 반대운동을 벌인다. 담임목사를 내쫓기 위해서이다. 이때 대부분의 성도는 어리둥절하다가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을 하면 분란에 대해 찬성, 반대, 관망, 회피하게 된다. 담임목사 반대자들에 대해 찬성하고 동조하거나, 반대자들에게 반대하고 각을 세우고 대립하거나, 사태를 관망하며 반대나 찬성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시끄러운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가거나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회피를 한다. 이때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찬성 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싸워야 한다. 물론 주먹다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 측의 주장에는 주장으로, 반대 측의 고함에는 같이 고함으로 맞대응해야 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알려 관망하거나 회피하려는 자들을 규합해 담임목사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 나도 2020년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나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맞대응해 주는 권사가 있어서 그나마 7개월의 갈등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권사는 나를 지지하고 반대자들이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일당백으로 싸워줬다. 그러나 더 이상 반대 교인들을 목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목회를 중단했고 그 권사도 다른 교회로 옮겼다. 내가 끝까지 싸우지 않아 여러 교인이 함께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틀리고 잘못됐다면 담임목사와 교회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기도하며 진리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지킬 수 있다. 반대자들은 과격할 수 있다. 그래서 맞대응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관망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반대자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이다.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이 반대자들의 전략이다.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이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 교회와 담임목사를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라!
    • 오피니언
    • 칼럼
    2024-11-11
  • 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
    목사가 나이가 들어 목회를 마무리하면 은퇴 목사가 되거나 원로 목사가 된다. 총회 헌법 4장 4조 “목사의 칭호”에 보면 은퇴 목사는 “목사가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며, 원로 목사는 “동일(同一)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가 연로(年老)하여 노회에 시무 사면을 제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생활비를 작정하여 원로 목사로 투표하여 과반수로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 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단, 정년이 지나면 노회의 언권만 있다”고 설명한다. 한평생의 목회를 마무리할 때 원로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다. 우선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장기 목회를 무난하게 했다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원로로 예우할 마음과 형편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원로 목사에 대한 부담으로 50대 이상을 담임으로 청빙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또한 목회가 20년이 되어갈 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임케 하는 교회들도 있다. 또한 교회가 여력이 없어 원로 예우를 못 하는 경우들도 많다. 예우는커녕 퇴직금도 없어 후임자가 전임자의 은퇴금을 갖고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교단지 기독신문 담임목사 청빙 광고에 전임자 퇴직금을 갖고 와야 한다는 노골적인 문구가 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장기 목회 후 월 생활비나 혹은 넉넉한 은퇴자금을 일시불로 받고 물러나며 원로 목사라는 칭호를 갖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원로 목사가 되었다고 해도 이후 삶이 덕스럽지 못하다면 원로 목사 “해임” 될 수 있다. 실제로 지방의 한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원로 목사가 해임됐다. 이처럼 원로 목사도 문제가 있을 때 해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원로가 되기 전 드러나지 않은 잘못이 이후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고, 원로로 추대된 이후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은퇴 목사야 원로가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원로 목사라는 명예와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원로 목사는 다르다. 그러므로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흠결이 있다면 시무 기한 조건이 된다 해도 본인 스스로 원로 목사가 안 되는 것이 유익하다. 이후 본인의 잘못이 드러나 원로 목사 “해임”되는 수치는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 목사가 되었다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죽는 날까지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원로 목사는 특권이지만 또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자리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11-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북토크】 교육 현장에서 분투하는 교사들의 신앙 간증
    나는 한 번도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명을 감당하는 새로남교회 교인들의 생생한 간증이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는 서문에서 “대전에는 약 600개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안학교, 특수학교가 있고 19개의 대학 캠퍼스가 지정학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남교회에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많이 계십니다”라고 했다. 이들 중 총 18명의 교인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속해 있다. 평교사에서 교감, 교장, 교수, 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이 어떻게 교직에 발을 들였는지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과정까지 참으로 감동적으로 써나갔다. 이틀에 걸쳐 열심히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 책의 살아있는 신앙 간증을 통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신앙으로 교직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다. 그들은 새로남교회의 오정호 담임목사를 통해 든든한 신앙인으로 세워져 어려워도 교직을 잘 감당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오 목사는 남다른 교육철학으로(오정호 목사는 총신대학 기독교교육과 출신이다) 새로남기독학교 초, 중, 고 과정을 운영하며 믿음의 다음세대를 키우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우송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는 오덕성 장로는 담임목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94년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오정호 목사님께서 대전 새로남교회로 부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서대문교회 출신이었고 아내는 내수동교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 목사님이 부임하신 새로남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좋은 교회, 그리고 귀한 목회자와 만남의 축복이 이루어졌다. 제자 •사역훈련 1기로 신앙생활을 재정비하고 기초부터 점검하는 과정을 거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정도 목회의 철학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우리를 이끄시는 목사님을 만나고 이후 제자 • 사역훈련을 받고, 건축 위원장으로서 헌신하고 이단과 투쟁하는 현장에서 기도하며 목사님과 함께 훈련받은 대로 실천하였다. 장로로서 교회, 사회에서 선한 청지기 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삶의 기초를 단단히 세우는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p. 234). 읽기에 부담 없기에 모든 분의 일독을 강추한다. 그리고 묵묵히 교직을 감당하는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 교육자를 응원한다! 다음은 오정호 목사가 쓴 이 책의 서문이다. 교육자, 아이들의 눈망울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들 제가 섬기는 대전에는 약 600개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안학교, 특수학교가 있고 19개의 대학 캠퍼스가 지정학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남교회에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많이 계십니다. 지난 2022년 『과학자, 하나님을 만나다』, 2023년 『공직자, 하나님을 만나다』를 시리즈로 출간한 이후에 세 번째 후속편 『교육자, 하나님을 만나다』를 기획하여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습니다. 교육은 국가와 사회 발전의 초석이고 백 년 앞을 내다보는 큰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데 백 년이 걸리며 그 백 년은 앞으로의 백 년을 결정합니다. 다음 세대는 교육자로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참교육자를 통해 이뤄집니다. 외부의 압력이나 시스템의 한계에 굴하지 않으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정도를 걷는 교육자가 필요합니다. 이 책의 필진은 교육계에서 인정받는 분들로, 자신에게 주어진 교육자로서의 소임을 하나님의 사명으로 여기는 분들입니다. 신앙의 고백대로 정도를 걷고자 몸부림치는 열여덟 분의 글을 읽다 보면 하나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 교육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이십니다. 책 안에는 그들이 만난 하나님의 생생한 이야기로 즐비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남기독학교를 하나님의 은혜로 설립한 지 올해로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지금까지 옆도 뒤도 안 돌아보고 오로지 아이들의 눈망울만 바라보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열정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교육은 열정만으로는 안 되고 인적 자원, 물적 자원이라고 하는, 이른바 정신적 자본과 물적인 자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으로 인도해 주셨기에 학교를 세워 가는 일이 가능했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꾼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학교뿐만 아니라 일반학교와 대학에서 쓰임 받는 교육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고 계십니다. 성경 교사 바울이 존재했기에 디모데라는 탁월한 목회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헬렌 켈러(Helcon Adim Kdllor)를 가르쳤던 앤 설리번(Anne Sullivan Macy)의 스승은 로라(Laura)였습니다. 로라에게 받은 교육과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한 아이가 헬렌 켈러였습니다. 제2의 디모데와 앤 설리번을 만드는 것이 교육자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아침에 씨를 뿌려서 저녁에 거두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교육 현장을 내실화하는 것에 힘써야 하고 이를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육자와 학교가 심사숙고하여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때 교육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확고한 교육 철학과 이를 뒷받침하는 삶의 모본을 가슴으로 보일 수 있는 교육자 한 사람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무엇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사조와 비진리적인 가치와의 충돌, 동성애를 옹호하고 조장하는 교육, 악법의 제정 시도의 현관에 있는 우리의 미래 세대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미래 교육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시되는 현실입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교육자 지망생, 크리스천 교육자분들이 하나님의 손이 교육 현장을 이끌고 계심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교육 현장의 여러 어려움에서 지혜와 담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출생이라는 인구절벽의 위기 가운데 기도하는 교육자 한 사람을 통하여 반전과 역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소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앞장서서 수고해 주신 오용준님, 박태호님, 서광남님, 채은영님, 이태규님, 정창호님, 이석님의 노고를 기억합니다. 전체 시리즈의 기획과 책을 출간하기 위해 따뜻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귀한 열매로 만들어 주신 두란노서원에 감사드립니다. 교육자로서 고뇌와 기도로 진솔한 원고를 내어주신 집필진 모든 분들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늘 동행하기를 기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Soli Deo Gloria! 오정호 새로남교회 담임목사, 새로남기독학교 이사장 관련기사링크: 새로남교회새로남교회, 『교육자, 하나님을 만나다』 출간 감사예배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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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12-03
  • 【북토크】 나를 두 번 울린 책
    얼마 전 내가 속한 파이디온선교회 단톡에 김혜한 선배가 본인이 쓴 책을 소개했다(나는 총신 85학번이고, 김혜한 선배는 책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보면 82학번으로 보인다. 선교회 활동을 할 때 개인적으로 본 적은 없다). 최근 총신대학 총동창회 총회를 취재하러 갔는데 박성규 총장이 선물 받은 책 30권을 참석자들에게 나눠 준다고 해서 우연히 이 책을 받고 읽게 되었다. 사모로서 삶의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한 책을 읽다가 두 번 울었다. 그것도 지하철에서 말이다.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데 남이 보면 참 우스웠을 것이다. 중늙은이가 책을 보다 울고 있으니 말이다. 눈물이 난 대목은 다음과 같다. ①부르심을 점검하다 "사모님들을 섬기는 자리에 나를 부르신 것이 확실합니까? 하나님 이 나를 부르신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사역이 맞다면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도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여성 장로님이 떠올랐다. 사모축제도 끝나고 인사를 한번 드리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평소 연락드리는 것이 익숙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이 많았겠지만, 이날은 생각이 나자마자 바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장로님! 오늘 갑자기 장로님 얼굴이 떠오르네요.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로 보기 원하세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오후에 만나서 장로님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김혜한 선교사를 왜 만나야 하나요?라고 하나님께 질문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살림하다 아껴둔 비상금을 주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장로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물질을 지원한 적이 없기에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이어서 여쭙기를 "우수리는 뗄까요?"라고 물으셨다고 하신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니다. 우수리도 떼지 말고 다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다 들고 왔다고 마음을 나눠 주셨다(pp. 56-47). ②아버지 마음 지금도 그때 친구의 말을 생각하면 통곡이 터져 나오려 한다. 남편의 신장 이식을 위해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고, 그간 후원하던 분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정말 전화하기 싫었다. 작은 교회이다 보니 사례비가 나오지 못하는 때도 있었고, 앞으로 생활이 어떻게 될지 불안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환난이 오고 재정의 어려움이 오니 작은 물질도 포기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그럼에도 양심상 사역을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동기인 금신이에게 연락할 차례가 되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기독 동기 모임을 매달 가졌던 금신이는 동기 모임에서 매달 정한 금액을 전하는 회계 역할을 맡아 왔다. "금신아, 남편이 신장 이식을 해서 교회를 사임하게 됐어, 지금까지 후원해 줘서 고마워." 해야 할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전화선 저쪽에서 금신이의 대답이 들려왔고, 그 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니까 더 해야지." 나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끊었는지, 뭐라 말하고 끊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184-185). 왜 나는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울었던가? 내 마음에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말로 나는 목회를 중단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노회에서 사임 처리했다. 그리고 12월에 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갔다. 그동안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경력을 쌓아 담임으로 나갔는데 40살에 시작해 55살에 목회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사임키로 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그 나이에는 다른 교회로 부임하기 쉽지 않다. “사임한” 혹은 “사임당한” 목사라는 꼬리표가 있는 목사를 어느 교회가 청빙하겠는가? 이후 딱 한 군데 동네에 있는 교회에 지원을 해보고는 그만뒀다. 그리고 얼떨결에 기자가 됐고 지금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다. 사임 후 아내는 재정문제로 압박을 받았다. 군목 시절에 만난 아내는 이후 부목사, 담임 때 많지는 않아도 사례비로 생활했다. 정규직 인생이었다. 그러나 사임 후 나는 비정규직 인생이 됐다. 친구들은 마을버스 운전을 하라고도 했다. 나는 장애인 활동 보조인 교육도 받았다. 그러다 이제 언론인으로의 길을 가고 있다. 재정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굶주리지는 않는다. 총신대학에 500만 원 후원도 했다. 총신대 종합관 도너월에 보면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제는 5년 차 기자로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취재하러 가서 큰돈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매달 평타는 치면서 지내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때 하늘을 보며 울었던 기억도 있다. 교회 봉사를 할 때는 정규직으로 매달 생활비가 나왔으나 이제는 자영업자로 돌아다녀야 돈을 벌 수 있다.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이다. 그래도 그동안 군목으로, 부목으로, 담임으로 살았던 것은 특혜였다. 이제 비로소 돈벌이하는 성도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돈과 관련된 선배의 이야기를 보면서 5년간 겪었던 “서러움”이 떠올라 그렇게 울었는지도 모른다. “집돌이” 인생이 이제는 “떠돌이” 인생이 되어 사방팔방을 돌아다닌다. 지금, 이 글도 전남 영암 행사를 취재하고 올라가는 KTX에서 쓴다. 아침 6시 21분에 KTX 타고 내려와 이제 올라간다. 그럼에도 나 같은 기자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길을 간다. 신학박사까지 공부하고, 군목을 하고, 조직교회를 담임했던 기자는 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이력을 보는 사람들은 내가 기자 하는 것을 특이하게 생각한다. 40세에 담임으로 나가 정년 70의 30년 절반을 목회하고 남은 기간은 기자로 살아갈 것 같다. 이 길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제2의 인생 계획이라는 것을 믿고 하루하루 성실히 감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필요한 물질을 채우고 계신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필요한 사람들을 통해 굶지 않게 하신다. 내가 지금도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면 겪어보지 않았을 인생이다. 오늘도 사모들의 비빌 언덕이 되기 위한 사역을 위해 “사서 고생하시는” 선배의 인생을 응원한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깨어진 항아리 같은 선배의 인생에 물을 넘치게 부으실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다 깨어진 항아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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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12-01
  • 【북토크】 왜 글쓰기를 배워야 하는가?
    글쓰기가 약자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보여준다. 요즘 이 저자에 꽂혀 책을 찾아 읽고 있는데 독서량이 어마어마한 것을 느낀다. 만만치 않은 내공의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고 목적도 분명하다. “저는요. ‘나쁜 인간’을 응징하려고 써요” 이렇게 바로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 적절한 사회 생활 태도를 신경쓰는지라 '고상한' 말로 둘러대곤 한다. 그런데 급기야는 책 제목으로 정했다.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 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s),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글쓰기를 삶의 형태라고 할 때, 글을 쓰는 이유(자기 표현)는 인구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글은 몸의 형식(form)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재현의 양식이 다를 뿐이다. 다만, 글쓰기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만의 특징이 있다. 인간은 모차르트처럼 네 살부터 작곡을 하고, 강-약을 조절하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도 있는 존재다. 수많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처럼 유년 시절 부터 스케이트를 탈 수도 있다. 그러나 네 살부터 글을 쓰는 사람은 없다(낱말을 익힐 수는 있다). 글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 말이 생각으로 조직되고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요건은 적어도 10대가 되어야 가능하다. 고등학교 시절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들이 극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역시 1970년대 훈육 세대에서나 가능하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쥔 요즘 10대 청소년들은 '전통적인 글쓰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재현한다. 삼십 세를 이립(而立), 삶의 기초가 확립되는 때라고 하지만 그것은 공자의 생각이고, 현대 철학에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방황하는 존재다. 나는 서른 살에 어렴풋이 나 자신에 대해 알았 다. 나의 위치(position)를 깨달았다. 페미니즘 덕분이다. 특정한 사유나 사람 등 의미 있는 인생의 레퍼런스를 언제 어떻게 만나는가는 운에 달렸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 페미니즘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 가까이 있었다는 의미다. 나의 계급과 젠더, 건강과 나이, 심리적으로 취약한 개인적 캐릭터. 사회적 약자는 상대적 개념이지만, 당시 나는 서울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거의 모든 면에서 약자라고 생각했다. 한마 디로, 나는 '돈 없는+ 여자'였다. 나는 약자로서 먹고살 방도를 찾으면서도, 그 방법이 성차별 사회에서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나를 보호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답'은 금 방 나왔다. 글쓰기였다. 물론 지식인이었던 부모님의 영향, 제도 교육의 세례, 당시 이삼십 대의 몸, 그리고 기호 식품과 여행, 미팅, 소비 생활 등이 전무한 초간단 라이프 스타일로 인해 남들에 비해 무한히 많은 시간 같은 자원이 있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글쓰기라는 직업 훈련'은 다른 분야에 비해 비용이 덜 든다. 한때 외국 유학 준비를 위해 딱 한 달 학원에 다닌 것 외에는 나는 평생 사교육비를 쓴 적이 없다. 나는 걸어서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찾고 읽을 수 있었 다. 메모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메일로 전송했다. 문제는 '작가'가 다소 시끄러운 직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글쓰기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르고, 나의 관심사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온갖 논쟁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젠더 관련한 글은 여성도 남성도 불편하게 한다. 당파성이 뚜렷한 글이라 당파성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틀리면 틀리는 대로' 욕을 먹는다. 격려보다는 비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글쓰기와 관 런하여 가장 괴로운 경우는 두 가지다. 사회적 편견(무지), 난센스. 어처구니없는 이들과 싸워야 할 때, 그리고 간혹 독자나 출판 관계자로부터 내 글이 내가 가장 비판하는 다른 이들의 글과 비슷하다는 '평을 들을 때다. 지구를 탈출하고 싶을 정도로 노동 의욕이 사라진다. 약자가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말은 당연히 논쟁적이다. 나부터 의심스럽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선악과 시비, 승부는 누가 정하는가. 선악은 규범적이지만, 강약은 맥락적인 개념이다. 갑을 관계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세상은 갑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갑을에 속하지 않은, ‘병정무기경신임계’도 있다. 이는 본디 순서(위계)가 아니라 순환이다. 고정된 약자나 강자는 없다. 관계 속에서 약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무기를 찾아야 한다. 피터 패럴리 감독의 2018년작 영화의 제목 ‘그린 북(Green Book)’은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업소, 주유소, 식당 등을 지역별로 표시해놓은 ‘흑인 전용 여행 가 이드북’을 가리킨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노의 장면이 연속해서 펼쳐진다.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백인’, 비고 모텐슨 분)와 돈 셜리 박사(‘흑인’, 마허살라 알리 분)가 인종 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정반대이다. 극중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로 나오는 주인공은 말한다. “품위(dignity)만이 폭력을 이길 수 있어요.” 나는 이 대사가 좋았지만 동시에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정의는커녕 의리도 찾기 힘든 세상에서 품위라니? 나 역시, 토니처럼 '욱' 하는 성격에,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 한다. 결국 내 분노는 다시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방관자이고 싶지 않은 정의감(?)에 나섰다가 오히려 가해자로 몰린 적 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돈 설리 박사는 말한다. "나는 평생을 참고 사는데, 당신은 하루도 못 참냐."고. 그렇다.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 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가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pp.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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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11-23
  • 【기고】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 사역의 전망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 사역의 전망 1. 서론: 목회와 사회복지의 연관성 목회는 영적 돌봄과 신앙 공동체의 형성을 주된 사명으로 하며, 사회복지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한다. 이 두 분야는 인간의 내적, 외적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지역사회의 사회복지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목회 성장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를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그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 목회 성장의 현황과 과제 (1) 목회의 변화와 성장 동력 현대 목회는 기존의 예배 중심 사역에서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 사회적 책임 수행으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교회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성장 동력을 모색하고 있다. (2) 목회 성장의 주요 과제 ① 세대 간 단절 문제: 젊은 세대의 신앙 참여 감소로 교회의 지속 가능성에 위기가 제기되고 있다. ② 다양한 요구 충족: 교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예배와 설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심리적·사회적 지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③ 사회적 신뢰 회복: 일부 부정적 사건으로 인해 교회의 공공성이 약화된 상황에서, 신뢰 회복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3. 사회복지와 교회의 역할 (1) 교회의 사회복지 사역 전통 교회는 오랜 역사를 통해 병원 설립, 빈민구제, 교육 지원 등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수행해 왔다. 이는 복음의 실천적 표현으로, 교회가 지역사회와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는 기초가 되었다. (2) 현대 사회복지의 새로운 요구 현대 사회는 고령화, 빈부격차, 정신건강 문제 등 다양한 복지 필요가 증가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데 있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요구받고 있다. (3) 사회복지와 목회 간의 상호 보완성 사회복지는 교회의 목회 사역을 보완하며, 교회는 복지 활동을 통해 신앙적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보완성은 교회가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지역사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데 기여한다. 4.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의 통합적 전망 (1) 목회적 접근에서의 사회복지 통합 목회는 단순히 신앙 교육에 머물지 않고, 교인들과 지역사회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돌보는 방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 내 상담소 설치, 지역 사회를 위한 장학금 지원, 취약 계층을 위한 돌봄 사역 등이 있다. (2) 사회복지적 접근에서의 목회 성장 기회 교회가 사회복지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때, 지역사회와의 신뢰를 쌓고 교회의 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교인 수의 증가와 영적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3) 실천 방안 ① 협력적 네트워크 구축: 지역 사회복지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교회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 ② 교육과 훈련: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사회복지 관련 전문 지식을 제공하여 복지 사역의 효과를 높인다. ③ 통합 프로그램 개발: 신앙 교육과 복지 서비스를 통합한 프로그램을 설계하여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킨다. 5. 결론: 지속 가능한 목회와 사회복지의 동반 성장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며,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교회는 지역사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복지 사역을 통해 복음의 실천적 면모를 강화할 때 더 큰 성장 가능성을 갖게 된다. 현대 교회는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목회와 복지를 아우르는 새로운 사역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이는 신앙 공동체와 지역 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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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11-18
  •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진리를 위해 싸우라!
    옳든 그르든 담임목사로 인해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네 가지 반응이 있다. 찬성, 반대, 관망, 회피이다. 담임목사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매우 강하게 반대운동을 벌인다. 담임목사를 내쫓기 위해서이다. 이때 대부분의 성도는 어리둥절하다가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을 하면 분란에 대해 찬성, 반대, 관망, 회피하게 된다. 담임목사 반대자들에 대해 찬성하고 동조하거나, 반대자들에게 반대하고 각을 세우고 대립하거나, 사태를 관망하며 반대나 찬성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시끄러운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가거나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회피를 한다. 이때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찬성 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싸워야 한다. 물론 주먹다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 측의 주장에는 주장으로, 반대 측의 고함에는 같이 고함으로 맞대응해야 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알려 관망하거나 회피하려는 자들을 규합해 담임목사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 나도 2020년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나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맞대응해 주는 권사가 있어서 그나마 7개월의 갈등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권사는 나를 지지하고 반대자들이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일당백으로 싸워줬다. 그러나 더 이상 반대 교인들을 목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목회를 중단했고 그 권사도 다른 교회로 옮겼다. 내가 끝까지 싸우지 않아 여러 교인이 함께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틀리고 잘못됐다면 담임목사와 교회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기도하며 진리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지킬 수 있다. 반대자들은 과격할 수 있다. 그래서 맞대응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관망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반대자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이다.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이 반대자들의 전략이다.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이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 교회와 담임목사를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라!
    • 오피니언
    • 칼럼
    2024-11-11
  • 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
    목사가 나이가 들어 목회를 마무리하면 은퇴 목사가 되거나 원로 목사가 된다. 총회 헌법 4장 4조 “목사의 칭호”에 보면 은퇴 목사는 “목사가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며, 원로 목사는 “동일(同一)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가 연로(年老)하여 노회에 시무 사면을 제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생활비를 작정하여 원로 목사로 투표하여 과반수로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 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단, 정년이 지나면 노회의 언권만 있다”고 설명한다. 한평생의 목회를 마무리할 때 원로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다. 우선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장기 목회를 무난하게 했다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원로로 예우할 마음과 형편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원로 목사에 대한 부담으로 50대 이상을 담임으로 청빙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또한 목회가 20년이 되어갈 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임케 하는 교회들도 있다. 또한 교회가 여력이 없어 원로 예우를 못 하는 경우들도 많다. 예우는커녕 퇴직금도 없어 후임자가 전임자의 은퇴금을 갖고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교단지 기독신문 담임목사 청빙 광고에 전임자 퇴직금을 갖고 와야 한다는 노골적인 문구가 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장기 목회 후 월 생활비나 혹은 넉넉한 은퇴자금을 일시불로 받고 물러나며 원로 목사라는 칭호를 갖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원로 목사가 되었다고 해도 이후 삶이 덕스럽지 못하다면 원로 목사 “해임” 될 수 있다. 실제로 지방의 한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원로 목사가 해임됐다. 이처럼 원로 목사도 문제가 있을 때 해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원로가 되기 전 드러나지 않은 잘못이 이후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고, 원로로 추대된 이후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은퇴 목사야 원로가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원로 목사라는 명예와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원로 목사는 다르다. 그러므로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흠결이 있다면 시무 기한 조건이 된다 해도 본인 스스로 원로 목사가 안 되는 것이 유익하다. 이후 본인의 잘못이 드러나 원로 목사 “해임”되는 수치는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 목사가 되었다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죽는 날까지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원로 목사는 특권이지만 또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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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11-09
  • 【북토크】 글 감옥의 마력
    작가들이 책을 쓸 때 힘들어 하면서도 계속하는 것은 글쓰기의 마력때문인 것 같다. 마치 마라토너가 달릴 때 고통스러우면서도 희열이 있기에 계속 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알아야 하고, 쓸 소재가 있어야 하고, 잘 써야 한다. 고통 속에서도 좋은 책을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글쓰기와 마감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작가들이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은 왜일까. 모종의 피학 취미 때문일까. 작가 김초엽은 2020년 〈한겨레21>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마감이 닥쳐왔을 때 발휘되는 창의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로 똥줄이 타도록 마감에 쫓겼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문장이 떠 오르며 글이 술술 풀렸다는 작가들의 경험담을 종종 듣게 된다. 마감은 창작의 촉매요, 뮤즈로 구실하기도 하는 것이다. 2022년 4월 이웃 나라 일본에 문을 연 '원고 집필 카페'는 바로 마감이 강제하는 창의력에 기댄 공간이다. 이 카페는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있는 이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데, 입장할 때 접수처에 그날 써야 할 원고 양과 마감 시각을 적어내야 한다. 글을 쓰고 있으면 카페 직원이 한 시간마다 찾아와서 원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손님이 사전에 선택한 강도에 따라 마감을 독려하거나 다그치거나 한다. 카페 이용 요금은 시간당 300엔 (최초 삼십 분은 150엔)인데, 사전에 신고한 대로 원고를 끝내지 못하면 영업이 종료될 때까지 카페에서 나갈 수 없다. 일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집 《작가 소설》에 실린 「글 쓰는 기계」라는 단편을 보자. 출판사 편집장이 신진 소설가를 출판사 지하의 수상쩍은 방으로 안내하는데, '글 쓰는 기계'라는 이름이 붙은 그 방에서 작가는 모든 편의를 제공받으며 오로지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이곳에서 작가는 책상을 떠나지 못하도록 수갑이 채워진 채 안락한 의자에 앉혀지며, 글이 진행되지 않으면 작가가 앉은 의자가 조금씩 뒤로 밀려나 결국에는 깜깜한 구덩이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거꾸로, 글을 부지런히 쓰면 의자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야말로 쓰지 않으면 죽고, 써야만 살 수 있는 극한의 조건이다. 이런 장치가 현실에 있을 리는, 당연히, 만무하다. 그렇지만 비슷한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김승옥이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해 제1회 이상문학상을 받은 중편 〈서울의 달빛0장>은 잡지 《문학사상》을 발행하던 평론가 이어령이 김승옥을 강제로 호텔에 투숙시키고 편집자들이 옆방에 머무르며 감시하며 완성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아 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 3부작을 완성하느라 두문불출하며 글쓰기에만 일로매진한 이십 년 세월을 '글 감옥'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다 쓰고 나면 언제나 녹초가 된다. 쓰는 일만큼은 이제 당 분간은 거절하자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일주일쯤 아무것도 안 쓰고 있으면 적적해서 견딜 수 없다. 뭔가 쓰고 싶다. 그리하여 또 앞의 순서를 되풀이한다. 이래서는 죽을 때까지 천벌을 받을 성싶다." <작가의 마감〉에 실린 아쿠타가와의 고백이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학질을 떼는 심정으로 마감을 했음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의 시간이 다시 그리워져서는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작가에게 마감이란 마약과도 같은 것이 아닐지. 아쿠타가와는 비록 '천벌'이 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보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아채지 못할쏘냐. 그래서, 그 덕분에, 글쓰기는, 문학은 끊이지 않고 쭉 이어진다는 해피엔딩인 셈인가(pp. 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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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11-08
  • 교회 분란 때라도 거짓말하지 말라
    2020년 55살, 담임목회 15년 만에 위기가 왔다. 나를 반대하는 자들이 모여 나를 내보낼 모의를 했다. 이들을 설득해 보려고 7개월을 끌다 결국 목회를 접었다. 그 교회는 총회장을 역임한 원로목사가 있었는데 10여 년 만에 후임 담임목사 4명이 모두 중도 사임당했고, 나도 15년 만에 사임당했다. 이때 그들은 내가 나가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교회를 먹으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나는 그 당시 용산에 위치한 교회의 평수도 몰랐다. 이 일 이후 알아보니 대지가 300평이었다. 그 당시 공시지가가 평당 2천만 원이니 토지 가격은 60억이었고 실거래가로 하면 100억이 넘을 수도 있는 가격이었다. 무엇보다 목사인 내가 교회를 먹으려고 했다는 말에 대해 나는 지금도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나에 대해 온갖 모함을 하고 거짓말을 했다. 나를 내보내려고 별별 짓을 다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을 목회할 의욕이 나지 않아 옳고 그름을 떠나 주변 목사들의 만류에도 목회를 포기한 것이다. 십계명 중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교회 분란이 일어나면 거짓말이 판을 친다. 현재 분란을 겪고 있는 어느 교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대자들은 목사가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사용한다고 거짓말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은 “100억을 담임목사가 먹었다”고 거짓말하기도 하고, 교회 토지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유용하기 위해 “목사 명의로 통장을 만들었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버젓이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인가? 한 번의 거짓말이라도 들통나면 나머지 모든 주장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세상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된다. 분란이 일어나면 신앙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혈기를 부리고 고함을 치고 폭력을 행사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성경은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지상에 있는 교회는 불완전해서 원치 않는 분란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는다면 이미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며 마귀 짓을 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거짓말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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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11-04
  • 교회 분쟁으로 고통받는 교인들에게...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고 영적 전투를 지속하기에 교회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게 되어 있다. 자신의 머리 위에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았던 광야의 이스라엘 공동체도 그러했고,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성령의 역사를 직접 확인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것을 이용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해 움직여지는 불순종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집요하게 도전하고 공격한다. 기자는 수없이 많은 분쟁하는 교회들을 경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간과 장소와 교회 규모가 다름에도 하는 짓이 비슷하다. 그들끼리는 한 번도 만나거나 의논한 적이 없는데도 참 많이 비슷하다. 치명적인 공통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리고 노회의 정치꾼들이 개입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집요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순하고 상대방처럼 악한 방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집에 강도가 들면 온 몸을 던져 강도를 막아내야 하는 것처럼, 정당하게 대응하여야 교회를 지켜낼 수 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연약한 성도들이 다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약한 성도들이 떨어져 나가도록 하고는 담임목사가 부임한 후 교회가 문제가 발생한 것처럼 호도하며 교회를 분란의 깊은 늪에 빠지게 한다.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연약한 성도들을 지킬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교회가 심각한 분쟁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자신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지키고 연약한 성도들을 잘 살펴서 위로와 격려를 통해 견고하게 붙잡아 주어야 한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단단하게 결집되어 행동한다. 그런데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되면 외부에서는 결집된 세력들이 교회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이 더 힘을 받는다. 따라서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도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예배 참석은 가장 중요한 것이고,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을 잘 가져야 한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아이들의 영혼이 다치는 것을 이용한다. 그래야 부모들이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옳고 그름을 떠나 교회의 분란이 그치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들의 영혼이 상처를 입고 다음세대가 교회를 등지는 결과를 낳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래서 믿음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교회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쳐야 하고, 교사들이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지키고 아이들에게도 교회를 잘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주어야 한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언제나 말을 먼저 하고 많이 한다. 그들은 그 말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일단 문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가 분란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고 감출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고하게 교회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영들의 전술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분란은 가능한 없어야 한다. 그러나 발생했다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교회를 지켜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야 한다. 견실하여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영적 전쟁이므로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하여야 한다. 힘들고 고단하고 귀찮고 두려워 피하면 교회는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에 의해 심각한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위로와 격려를 통해 함께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지켜야 한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견실하여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렇게 믿음으로 승리한 교회들은 분란을 딛고 더욱 견고하게 잘 세워져 하나님께 멋지게 쓰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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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31
  • 총회활동, 목사는 교회 돈으로 장로는 자기 돈으로?
    총회에 여러 목사와 장로들이 드나든다. 총회를 섬기기 위해서다. 임원, 부장, 부원 등 직책이 다양하다. 총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여러 부대비용이 든다. 차비부터 식대, 혹은 임원 등록비 등 크고 작은 돈이 든다. 이때 대부분의 목사는 교회 돈으로 비용을 충당한다. 그런면에서 교회가 재정을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원해도 총회 정치를 하거나 총회를 섬길 수 없다. 반면 장로는 대부분 사업을 하기에 본인 돈으로 비용을 충당한다. 나는 노회 서기까지만 했기에 큰 비용이 들지 않았다. 교회 규모도 크지 않았기에 총회 정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장로들도 노회나 총회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에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총회 정치를 하고 있는 한 장로에게 “목사의 총회 활동 비용은 교회가 담당하고 장로의 총회 활동 비용은 본인 스스로 담당해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것이 맞다”고 답했다. 예전에 어느 교회에 분란이 일어났다. 담임목사와 장로 간의 알력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한 가지는 돈 문제였다. 장로는 자신이 총회 정치를 하는데 교회가 재정적으로 도와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회에서 거절했다. 그러자 다른 문제를 걸어 교회에 분란을 일으켰다. 어느 장로는 목사는 총회 정치를 할 때 교회 돈을 사용하는데 왜 장로는 교회 돈을 사용할 수 없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과연 총회 정치를 하는 장로를 위해서도 교회에서 비용을 지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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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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