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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40년 戀歌
취재가 있어 총신대학에 왔다. 학교 앞 버스에서 내리며 교문을 보니 입학한 지 40년이 된 게 떠올랐다. 나는 1985년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날은 2025년 1월 20일이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며 입학했는데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총신 캠퍼스는 많이 변했다. 이전 종합관이 사라지고 새로운 종합관이 들어섰다. 주로 수업을 들었던 신관은 리모델링해서 완전 새로운 건물이 됐다. 그리고 교련 수업을 받았던 뒷동산에는 제2종합관이 들어섰다. 4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를 떠난 후 다시 올 일이 없었는데 15년 담임 목회를 중단하고 교계 기자로 전업(?) 했기에 취재차 모교를 종종 방문한다. 40년 세월 속에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입학 동기 중에는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럿 있고,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도 있다. 그때 신학과에 100명이 입학했으니 참 적은 숫자였고, 총회적으로 활동하는 동기는 거의 없다. 앞으로도 취재차 총신에 올 일이 있겠지만 올 때마다 재학시절이 떠오르고 추억도 떠오를 것이다. 그 당시 학교 교수진에 대한 불만, 학내 문제, 총회 문제로 인한 수강 거부 등등 총신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르니 모교에 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나 때와 달리 자유분방한 학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다. 더 이상의 혼란이 없이 모교 총신이 늘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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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울의 예배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울 왕은 다급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는데, 전세는 기울었고 병사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이제 곧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흩어지는 병사들을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줄 하나님께 엎드렸다. 하지만 사무엘은 책망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버리셨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새로운 백성의 지도자로 삼기로 하셨다고 선언하였다. 사울에게 있어서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아니었다. 사울에게 있어서의 우상은 “성공”이었을 뿐이다. 그 성공이라는 우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에겐 하나님도 수단이었을 뿐이다. 위급할 때 적절하게 사용해 먹을 수 있는 수단 말이다. 다급할 때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삼상 28:7-11). 사울에게는 무당이든 우상이든 상관없었다.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찾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도 그렇게 찾아갈 수 있는 수단이었을 뿐이지, 예배의 대상은 아니었다. 사울이 드린 제사는 예배가 아니라, 제3계명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었다.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화해버리고 모독하는 일이었다.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린다고 할 때, 그것이 예배인 줄 알고 도와준다. 나무도 가져와서 불을 피울 수 있게 도와준다. 옆에서 짐승도 잡아준다. 그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 4:23). 하지만 예배란 방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뿐이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늘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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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은 힘이 쎄다
무속(巫俗)은 “무당과 관련된 풍속”이라고 설명한다. 모처럼 버스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갔다. 좌우를 보니 여전히 무당집이 건재하다. 나는 동성중학교를 다녔다. 이상하게 동네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버스를 타야 하는 먼 곳으로 배정됐다. 버스를 타고 오가며 미아리 고개를 넘는 동안 3년간 지겹게 점집들을 봤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초기부터 무속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니고 한때 목사가 되기를 꿈꿨던 윤석열 후보는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등장했다. 구약 성경을 다 외운다는 김건희 씨는 무속에 심취해 있다는 말이 돌았다. 웬만한 무당보다 자기가 쎄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천공, 건진법사 등등이 등장하고, 여론 조작에 앞장선 명태균은 자기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계엄령을 주도한 전직 장성 중에는 점집을 운영한 사람도 있었다.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에 이런 무속인들이 난리를 치니 어지럽다. 이 시국에 한국교회와 목사, 장로, 신자들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결코 변하지 않을 각자의 신념과 생각이 있으니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그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오롯이 자신과 무고한 후대가 져야 할 것이기에 심히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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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진리를 위해 싸우라!
옳든 그르든 담임목사로 인해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네 가지 반응이 있다. 찬성, 반대, 관망, 회피이다. 담임목사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매우 강하게 반대운동을 벌인다. 담임목사를 내쫓기 위해서이다. 이때 대부분의 성도는 어리둥절하다가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을 하면 분란에 대해 찬성, 반대, 관망, 회피하게 된다. 담임목사 반대자들에 대해 찬성하고 동조하거나, 반대자들에게 반대하고 각을 세우고 대립하거나, 사태를 관망하며 반대나 찬성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시끄러운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가거나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회피를 한다. 이때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찬성 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싸워야 한다. 물론 주먹다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 측의 주장에는 주장으로, 반대 측의 고함에는 같이 고함으로 맞대응해야 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알려 관망하거나 회피하려는 자들을 규합해 담임목사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 나도 2020년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나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맞대응해 주는 권사가 있어서 그나마 7개월의 갈등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권사는 나를 지지하고 반대자들이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일당백으로 싸워줬다. 그러나 더 이상 반대 교인들을 목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목회를 중단했고 그 권사도 다른 교회로 옮겼다. 내가 끝까지 싸우지 않아 여러 교인이 함께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틀리고 잘못됐다면 담임목사와 교회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기도하며 진리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지킬 수 있다. 반대자들은 과격할 수 있다. 그래서 맞대응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관망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반대자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이다.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이 반대자들의 전략이다.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이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 교회와 담임목사를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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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
목사가 나이가 들어 목회를 마무리하면 은퇴 목사가 되거나 원로 목사가 된다. 총회 헌법 4장 4조 “목사의 칭호”에 보면 은퇴 목사는 “목사가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며, 원로 목사는 “동일(同一)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가 연로(年老)하여 노회에 시무 사면을 제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생활비를 작정하여 원로 목사로 투표하여 과반수로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 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단, 정년이 지나면 노회의 언권만 있다”고 설명한다. 한평생의 목회를 마무리할 때 원로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다. 우선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장기 목회를 무난하게 했다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원로로 예우할 마음과 형편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원로 목사에 대한 부담으로 50대 이상을 담임으로 청빙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또한 목회가 20년이 되어갈 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임케 하는 교회들도 있다. 또한 교회가 여력이 없어 원로 예우를 못 하는 경우들도 많다. 예우는커녕 퇴직금도 없어 후임자가 전임자의 은퇴금을 갖고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교단지 기독신문 담임목사 청빙 광고에 전임자 퇴직금을 갖고 와야 한다는 노골적인 문구가 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장기 목회 후 월 생활비나 혹은 넉넉한 은퇴자금을 일시불로 받고 물러나며 원로 목사라는 칭호를 갖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원로 목사가 되었다고 해도 이후 삶이 덕스럽지 못하다면 원로 목사 “해임” 될 수 있다. 실제로 지방의 한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원로 목사가 해임됐다. 이처럼 원로 목사도 문제가 있을 때 해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원로가 되기 전 드러나지 않은 잘못이 이후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고, 원로로 추대된 이후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은퇴 목사야 원로가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원로 목사라는 명예와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원로 목사는 다르다. 그러므로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흠결이 있다면 시무 기한 조건이 된다 해도 본인 스스로 원로 목사가 안 되는 것이 유익하다. 이후 본인의 잘못이 드러나 원로 목사 “해임”되는 수치는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 목사가 되었다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죽는 날까지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원로 목사는 특권이지만 또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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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란 때라도 거짓말하지 말라
2020년 55살, 담임목회 15년 만에 위기가 왔다. 나를 반대하는 자들이 모여 나를 내보낼 모의를 했다. 이들을 설득해 보려고 7개월을 끌다 결국 목회를 접었다. 그 교회는 총회장을 역임한 원로목사가 있었는데 10여 년 만에 후임 담임목사 4명이 모두 중도 사임당했고, 나도 15년 만에 사임당했다. 이때 그들은 내가 나가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교회를 먹으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나는 그 당시 용산에 위치한 교회의 평수도 몰랐다. 이 일 이후 알아보니 대지가 300평이었다. 그 당시 공시지가가 평당 2천만 원이니 토지 가격은 60억이었고 실거래가로 하면 100억이 넘을 수도 있는 가격이었다. 무엇보다 목사인 내가 교회를 먹으려고 했다는 말에 대해 나는 지금도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나에 대해 온갖 모함을 하고 거짓말을 했다. 나를 내보내려고 별별 짓을 다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을 목회할 의욕이 나지 않아 옳고 그름을 떠나 주변 목사들의 만류에도 목회를 포기한 것이다. 십계명 중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교회 분란이 일어나면 거짓말이 판을 친다. 현재 분란을 겪고 있는 어느 교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대자들은 목사가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사용한다고 거짓말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은 “100억을 담임목사가 먹었다”고 거짓말하기도 하고, 교회 토지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유용하기 위해 “목사 명의로 통장을 만들었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버젓이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인가? 한 번의 거짓말이라도 들통나면 나머지 모든 주장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세상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된다. 분란이 일어나면 신앙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혈기를 부리고 고함을 치고 폭력을 행사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성경은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지상에 있는 교회는 불완전해서 원치 않는 분란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는다면 이미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며 마귀 짓을 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거짓말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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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40년 戀歌
- 취재가 있어 총신대학에 왔다. 학교 앞 버스에서 내리며 교문을 보니 입학한 지 40년이 된 게 떠올랐다. 나는 1985년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날은 2025년 1월 20일이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며 입학했는데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총신 캠퍼스는 많이 변했다. 이전 종합관이 사라지고 새로운 종합관이 들어섰다. 주로 수업을 들었던 신관은 리모델링해서 완전 새로운 건물이 됐다. 그리고 교련 수업을 받았던 뒷동산에는 제2종합관이 들어섰다. 4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를 떠난 후 다시 올 일이 없었는데 15년 담임 목회를 중단하고 교계 기자로 전업(?) 했기에 취재차 모교를 종종 방문한다. 40년 세월 속에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입학 동기 중에는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럿 있고,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도 있다. 그때 신학과에 100명이 입학했으니 참 적은 숫자였고, 총회적으로 활동하는 동기는 거의 없다. 앞으로도 취재차 총신에 올 일이 있겠지만 올 때마다 재학시절이 떠오르고 추억도 떠오를 것이다. 그 당시 학교 교수진에 대한 불만, 학내 문제, 총회 문제로 인한 수강 거부 등등 총신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르니 모교에 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나 때와 달리 자유분방한 학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다. 더 이상의 혼란이 없이 모교 총신이 늘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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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40년 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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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울의 예배
-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울 왕은 다급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는데, 전세는 기울었고 병사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이제 곧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흩어지는 병사들을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줄 하나님께 엎드렸다. 하지만 사무엘은 책망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버리셨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새로운 백성의 지도자로 삼기로 하셨다고 선언하였다. 사울에게 있어서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아니었다. 사울에게 있어서의 우상은 “성공”이었을 뿐이다. 그 성공이라는 우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에겐 하나님도 수단이었을 뿐이다. 위급할 때 적절하게 사용해 먹을 수 있는 수단 말이다. 다급할 때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삼상 28:7-11). 사울에게는 무당이든 우상이든 상관없었다.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찾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도 그렇게 찾아갈 수 있는 수단이었을 뿐이지, 예배의 대상은 아니었다. 사울이 드린 제사는 예배가 아니라, 제3계명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었다.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화해버리고 모독하는 일이었다.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린다고 할 때, 그것이 예배인 줄 알고 도와준다. 나무도 가져와서 불을 피울 수 있게 도와준다. 옆에서 짐승도 잡아준다. 그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 4:23). 하지만 예배란 방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뿐이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늘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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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울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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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은 힘이 쎄다
- 무속(巫俗)은 “무당과 관련된 풍속”이라고 설명한다. 모처럼 버스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갔다. 좌우를 보니 여전히 무당집이 건재하다. 나는 동성중학교를 다녔다. 이상하게 동네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버스를 타야 하는 먼 곳으로 배정됐다. 버스를 타고 오가며 미아리 고개를 넘는 동안 3년간 지겹게 점집들을 봤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초기부터 무속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니고 한때 목사가 되기를 꿈꿨던 윤석열 후보는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등장했다. 구약 성경을 다 외운다는 김건희 씨는 무속에 심취해 있다는 말이 돌았다. 웬만한 무당보다 자기가 쎄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천공, 건진법사 등등이 등장하고, 여론 조작에 앞장선 명태균은 자기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계엄령을 주도한 전직 장성 중에는 점집을 운영한 사람도 있었다.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에 이런 무속인들이 난리를 치니 어지럽다. 이 시국에 한국교회와 목사, 장로, 신자들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결코 변하지 않을 각자의 신념과 생각이 있으니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그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오롯이 자신과 무고한 후대가 져야 할 것이기에 심히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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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은 힘이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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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진리를 위해 싸우라!
- 옳든 그르든 담임목사로 인해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네 가지 반응이 있다. 찬성, 반대, 관망, 회피이다. 담임목사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매우 강하게 반대운동을 벌인다. 담임목사를 내쫓기 위해서이다. 이때 대부분의 성도는 어리둥절하다가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을 하면 분란에 대해 찬성, 반대, 관망, 회피하게 된다. 담임목사 반대자들에 대해 찬성하고 동조하거나, 반대자들에게 반대하고 각을 세우고 대립하거나, 사태를 관망하며 반대나 찬성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시끄러운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가거나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회피를 한다. 이때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찬성 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싸워야 한다. 물론 주먹다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 측의 주장에는 주장으로, 반대 측의 고함에는 같이 고함으로 맞대응해야 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알려 관망하거나 회피하려는 자들을 규합해 담임목사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 나도 2020년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나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맞대응해 주는 권사가 있어서 그나마 7개월의 갈등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권사는 나를 지지하고 반대자들이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일당백으로 싸워줬다. 그러나 더 이상 반대 교인들을 목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목회를 중단했고 그 권사도 다른 교회로 옮겼다. 내가 끝까지 싸우지 않아 여러 교인이 함께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틀리고 잘못됐다면 담임목사와 교회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기도하며 진리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지킬 수 있다. 반대자들은 과격할 수 있다. 그래서 맞대응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관망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반대자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이다.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이 반대자들의 전략이다.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이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 교회와 담임목사를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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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진리를 위해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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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
- 목사가 나이가 들어 목회를 마무리하면 은퇴 목사가 되거나 원로 목사가 된다. 총회 헌법 4장 4조 “목사의 칭호”에 보면 은퇴 목사는 “목사가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며, 원로 목사는 “동일(同一)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가 연로(年老)하여 노회에 시무 사면을 제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생활비를 작정하여 원로 목사로 투표하여 과반수로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 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단, 정년이 지나면 노회의 언권만 있다”고 설명한다. 한평생의 목회를 마무리할 때 원로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다. 우선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장기 목회를 무난하게 했다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원로로 예우할 마음과 형편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원로 목사에 대한 부담으로 50대 이상을 담임으로 청빙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또한 목회가 20년이 되어갈 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임케 하는 교회들도 있다. 또한 교회가 여력이 없어 원로 예우를 못 하는 경우들도 많다. 예우는커녕 퇴직금도 없어 후임자가 전임자의 은퇴금을 갖고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교단지 기독신문 담임목사 청빙 광고에 전임자 퇴직금을 갖고 와야 한다는 노골적인 문구가 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장기 목회 후 월 생활비나 혹은 넉넉한 은퇴자금을 일시불로 받고 물러나며 원로 목사라는 칭호를 갖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원로 목사가 되었다고 해도 이후 삶이 덕스럽지 못하다면 원로 목사 “해임” 될 수 있다. 실제로 지방의 한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원로 목사가 해임됐다. 이처럼 원로 목사도 문제가 있을 때 해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원로가 되기 전 드러나지 않은 잘못이 이후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고, 원로로 추대된 이후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은퇴 목사야 원로가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원로 목사라는 명예와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원로 목사는 다르다. 그러므로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흠결이 있다면 시무 기한 조건이 된다 해도 본인 스스로 원로 목사가 안 되는 것이 유익하다. 이후 본인의 잘못이 드러나 원로 목사 “해임”되는 수치는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 목사가 되었다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죽는 날까지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원로 목사는 특권이지만 또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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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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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란 때라도 거짓말하지 말라
- 2020년 55살, 담임목회 15년 만에 위기가 왔다. 나를 반대하는 자들이 모여 나를 내보낼 모의를 했다. 이들을 설득해 보려고 7개월을 끌다 결국 목회를 접었다. 그 교회는 총회장을 역임한 원로목사가 있었는데 10여 년 만에 후임 담임목사 4명이 모두 중도 사임당했고, 나도 15년 만에 사임당했다. 이때 그들은 내가 나가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교회를 먹으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나는 그 당시 용산에 위치한 교회의 평수도 몰랐다. 이 일 이후 알아보니 대지가 300평이었다. 그 당시 공시지가가 평당 2천만 원이니 토지 가격은 60억이었고 실거래가로 하면 100억이 넘을 수도 있는 가격이었다. 무엇보다 목사인 내가 교회를 먹으려고 했다는 말에 대해 나는 지금도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나에 대해 온갖 모함을 하고 거짓말을 했다. 나를 내보내려고 별별 짓을 다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을 목회할 의욕이 나지 않아 옳고 그름을 떠나 주변 목사들의 만류에도 목회를 포기한 것이다. 십계명 중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교회 분란이 일어나면 거짓말이 판을 친다. 현재 분란을 겪고 있는 어느 교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대자들은 목사가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사용한다고 거짓말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은 “100억을 담임목사가 먹었다”고 거짓말하기도 하고, 교회 토지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유용하기 위해 “목사 명의로 통장을 만들었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버젓이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인가? 한 번의 거짓말이라도 들통나면 나머지 모든 주장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세상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된다. 분란이 일어나면 신앙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혈기를 부리고 고함을 치고 폭력을 행사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성경은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지상에 있는 교회는 불완전해서 원치 않는 분란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는다면 이미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며 마귀 짓을 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거짓말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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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란 때라도 거짓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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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40년 戀歌
- 취재가 있어 총신대학에 왔다. 학교 앞 버스에서 내리며 교문을 보니 입학한 지 40년이 된 게 떠올랐다. 나는 1985년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날은 2025년 1월 20일이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며 입학했는데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총신 캠퍼스는 많이 변했다. 이전 종합관이 사라지고 새로운 종합관이 들어섰다. 주로 수업을 들었던 신관은 리모델링해서 완전 새로운 건물이 됐다. 그리고 교련 수업을 받았던 뒷동산에는 제2종합관이 들어섰다. 4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를 떠난 후 다시 올 일이 없었는데 15년 담임 목회를 중단하고 교계 기자로 전업(?) 했기에 취재차 모교를 종종 방문한다. 40년 세월 속에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입학 동기 중에는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럿 있고,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도 있다. 그때 신학과에 100명이 입학했으니 참 적은 숫자였고, 총회적으로 활동하는 동기는 거의 없다. 앞으로도 취재차 총신에 올 일이 있겠지만 올 때마다 재학시절이 떠오르고 추억도 떠오를 것이다. 그 당시 학교 교수진에 대한 불만, 학내 문제, 총회 문제로 인한 수강 거부 등등 총신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르니 모교에 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나 때와 달리 자유분방한 학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다. 더 이상의 혼란이 없이 모교 총신이 늘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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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40년 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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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울의 예배
-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울 왕은 다급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는데, 전세는 기울었고 병사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이제 곧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흩어지는 병사들을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줄 하나님께 엎드렸다. 하지만 사무엘은 책망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버리셨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새로운 백성의 지도자로 삼기로 하셨다고 선언하였다. 사울에게 있어서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아니었다. 사울에게 있어서의 우상은 “성공”이었을 뿐이다. 그 성공이라는 우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에겐 하나님도 수단이었을 뿐이다. 위급할 때 적절하게 사용해 먹을 수 있는 수단 말이다. 다급할 때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삼상 28:7-11). 사울에게는 무당이든 우상이든 상관없었다.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찾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도 그렇게 찾아갈 수 있는 수단이었을 뿐이지, 예배의 대상은 아니었다. 사울이 드린 제사는 예배가 아니라, 제3계명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었다.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화해버리고 모독하는 일이었다.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린다고 할 때, 그것이 예배인 줄 알고 도와준다. 나무도 가져와서 불을 피울 수 있게 도와준다. 옆에서 짐승도 잡아준다. 그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 4:23). 하지만 예배란 방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뿐이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늘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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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울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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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은 힘이 쎄다
- 무속(巫俗)은 “무당과 관련된 풍속”이라고 설명한다. 모처럼 버스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갔다. 좌우를 보니 여전히 무당집이 건재하다. 나는 동성중학교를 다녔다. 이상하게 동네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버스를 타야 하는 먼 곳으로 배정됐다. 버스를 타고 오가며 미아리 고개를 넘는 동안 3년간 지겹게 점집들을 봤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초기부터 무속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니고 한때 목사가 되기를 꿈꿨던 윤석열 후보는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등장했다. 구약 성경을 다 외운다는 김건희 씨는 무속에 심취해 있다는 말이 돌았다. 웬만한 무당보다 자기가 쎄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천공, 건진법사 등등이 등장하고, 여론 조작에 앞장선 명태균은 자기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계엄령을 주도한 전직 장성 중에는 점집을 운영한 사람도 있었다.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에 이런 무속인들이 난리를 치니 어지럽다. 이 시국에 한국교회와 목사, 장로, 신자들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결코 변하지 않을 각자의 신념과 생각이 있으니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그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오롯이 자신과 무고한 후대가 져야 할 것이기에 심히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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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은 힘이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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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진리를 위해 싸우라!
- 옳든 그르든 담임목사로 인해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네 가지 반응이 있다. 찬성, 반대, 관망, 회피이다. 담임목사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매우 강하게 반대운동을 벌인다. 담임목사를 내쫓기 위해서이다. 이때 대부분의 성도는 어리둥절하다가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을 하면 분란에 대해 찬성, 반대, 관망, 회피하게 된다. 담임목사 반대자들에 대해 찬성하고 동조하거나, 반대자들에게 반대하고 각을 세우고 대립하거나, 사태를 관망하며 반대나 찬성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시끄러운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가거나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회피를 한다. 이때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찬성 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싸워야 한다. 물론 주먹다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 측의 주장에는 주장으로, 반대 측의 고함에는 같이 고함으로 맞대응해야 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알려 관망하거나 회피하려는 자들을 규합해 담임목사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 나도 2020년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나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맞대응해 주는 권사가 있어서 그나마 7개월의 갈등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권사는 나를 지지하고 반대자들이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일당백으로 싸워줬다. 그러나 더 이상 반대 교인들을 목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목회를 중단했고 그 권사도 다른 교회로 옮겼다. 내가 끝까지 싸우지 않아 여러 교인이 함께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틀리고 잘못됐다면 담임목사와 교회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기도하며 진리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지킬 수 있다. 반대자들은 과격할 수 있다. 그래서 맞대응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관망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반대자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이다.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이 반대자들의 전략이다.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이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 교회와 담임목사를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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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진리를 위해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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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
- 목사가 나이가 들어 목회를 마무리하면 은퇴 목사가 되거나 원로 목사가 된다. 총회 헌법 4장 4조 “목사의 칭호”에 보면 은퇴 목사는 “목사가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며, 원로 목사는 “동일(同一)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가 연로(年老)하여 노회에 시무 사면을 제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생활비를 작정하여 원로 목사로 투표하여 과반수로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 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단, 정년이 지나면 노회의 언권만 있다”고 설명한다. 한평생의 목회를 마무리할 때 원로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다. 우선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장기 목회를 무난하게 했다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원로로 예우할 마음과 형편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원로 목사에 대한 부담으로 50대 이상을 담임으로 청빙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또한 목회가 20년이 되어갈 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임케 하는 교회들도 있다. 또한 교회가 여력이 없어 원로 예우를 못 하는 경우들도 많다. 예우는커녕 퇴직금도 없어 후임자가 전임자의 은퇴금을 갖고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교단지 기독신문 담임목사 청빙 광고에 전임자 퇴직금을 갖고 와야 한다는 노골적인 문구가 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장기 목회 후 월 생활비나 혹은 넉넉한 은퇴자금을 일시불로 받고 물러나며 원로 목사라는 칭호를 갖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원로 목사가 되었다고 해도 이후 삶이 덕스럽지 못하다면 원로 목사 “해임” 될 수 있다. 실제로 지방의 한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원로 목사가 해임됐다. 이처럼 원로 목사도 문제가 있을 때 해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원로가 되기 전 드러나지 않은 잘못이 이후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고, 원로로 추대된 이후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은퇴 목사야 원로가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원로 목사라는 명예와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원로 목사는 다르다. 그러므로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흠결이 있다면 시무 기한 조건이 된다 해도 본인 스스로 원로 목사가 안 되는 것이 유익하다. 이후 본인의 잘못이 드러나 원로 목사 “해임”되는 수치는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 목사가 되었다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죽는 날까지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원로 목사는 특권이지만 또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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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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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란 때라도 거짓말하지 말라
- 2020년 55살, 담임목회 15년 만에 위기가 왔다. 나를 반대하는 자들이 모여 나를 내보낼 모의를 했다. 이들을 설득해 보려고 7개월을 끌다 결국 목회를 접었다. 그 교회는 총회장을 역임한 원로목사가 있었는데 10여 년 만에 후임 담임목사 4명이 모두 중도 사임당했고, 나도 15년 만에 사임당했다. 이때 그들은 내가 나가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교회를 먹으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나는 그 당시 용산에 위치한 교회의 평수도 몰랐다. 이 일 이후 알아보니 대지가 300평이었다. 그 당시 공시지가가 평당 2천만 원이니 토지 가격은 60억이었고 실거래가로 하면 100억이 넘을 수도 있는 가격이었다. 무엇보다 목사인 내가 교회를 먹으려고 했다는 말에 대해 나는 지금도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나에 대해 온갖 모함을 하고 거짓말을 했다. 나를 내보내려고 별별 짓을 다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을 목회할 의욕이 나지 않아 옳고 그름을 떠나 주변 목사들의 만류에도 목회를 포기한 것이다. 십계명 중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교회 분란이 일어나면 거짓말이 판을 친다. 현재 분란을 겪고 있는 어느 교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대자들은 목사가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사용한다고 거짓말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은 “100억을 담임목사가 먹었다”고 거짓말하기도 하고, 교회 토지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유용하기 위해 “목사 명의로 통장을 만들었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버젓이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인가? 한 번의 거짓말이라도 들통나면 나머지 모든 주장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세상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된다. 분란이 일어나면 신앙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혈기를 부리고 고함을 치고 폭력을 행사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성경은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지상에 있는 교회는 불완전해서 원치 않는 분란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는다면 이미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며 마귀 짓을 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거짓말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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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란 때라도 거짓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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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쟁으로 고통받는 교인들에게...
-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고 영적 전투를 지속하기에 교회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게 되어 있다. 자신의 머리 위에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았던 광야의 이스라엘 공동체도 그러했고,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성령의 역사를 직접 확인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것을 이용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해 움직여지는 불순종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집요하게 도전하고 공격한다. 기자는 수없이 많은 분쟁하는 교회들을 경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간과 장소와 교회 규모가 다름에도 하는 짓이 비슷하다. 그들끼리는 한 번도 만나거나 의논한 적이 없는데도 참 많이 비슷하다. 치명적인 공통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리고 노회의 정치꾼들이 개입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집요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순하고 상대방처럼 악한 방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집에 강도가 들면 온 몸을 던져 강도를 막아내야 하는 것처럼, 정당하게 대응하여야 교회를 지켜낼 수 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연약한 성도들이 다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약한 성도들이 떨어져 나가도록 하고는 담임목사가 부임한 후 교회가 문제가 발생한 것처럼 호도하며 교회를 분란의 깊은 늪에 빠지게 한다.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연약한 성도들을 지킬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교회가 심각한 분쟁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자신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지키고 연약한 성도들을 잘 살펴서 위로와 격려를 통해 견고하게 붙잡아 주어야 한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단단하게 결집되어 행동한다. 그런데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되면 외부에서는 결집된 세력들이 교회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이 더 힘을 받는다. 따라서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도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예배 참석은 가장 중요한 것이고,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을 잘 가져야 한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아이들의 영혼이 다치는 것을 이용한다. 그래야 부모들이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옳고 그름을 떠나 교회의 분란이 그치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들의 영혼이 상처를 입고 다음세대가 교회를 등지는 결과를 낳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래서 믿음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교회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쳐야 하고, 교사들이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지키고 아이들에게도 교회를 잘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주어야 한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언제나 말을 먼저 하고 많이 한다. 그들은 그 말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일단 문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가 분란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고 감출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고하게 교회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영들의 전술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분란은 가능한 없어야 한다. 그러나 발생했다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교회를 지켜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야 한다. 견실하여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영적 전쟁이므로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하여야 한다. 힘들고 고단하고 귀찮고 두려워 피하면 교회는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에 의해 심각한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위로와 격려를 통해 함께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지켜야 한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견실하여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렇게 믿음으로 승리한 교회들은 분란을 딛고 더욱 견고하게 잘 세워져 하나님께 멋지게 쓰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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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쟁으로 고통받는 교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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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활동, 목사는 교회 돈으로 장로는 자기 돈으로?
- 총회에 여러 목사와 장로들이 드나든다. 총회를 섬기기 위해서다. 임원, 부장, 부원 등 직책이 다양하다. 총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여러 부대비용이 든다. 차비부터 식대, 혹은 임원 등록비 등 크고 작은 돈이 든다. 이때 대부분의 목사는 교회 돈으로 비용을 충당한다. 그런면에서 교회가 재정을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원해도 총회 정치를 하거나 총회를 섬길 수 없다. 반면 장로는 대부분 사업을 하기에 본인 돈으로 비용을 충당한다. 나는 노회 서기까지만 했기에 큰 비용이 들지 않았다. 교회 규모도 크지 않았기에 총회 정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장로들도 노회나 총회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에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총회 정치를 하고 있는 한 장로에게 “목사의 총회 활동 비용은 교회가 담당하고 장로의 총회 활동 비용은 본인 스스로 담당해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것이 맞다”고 답했다. 예전에 어느 교회에 분란이 일어났다. 담임목사와 장로 간의 알력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한 가지는 돈 문제였다. 장로는 자신이 총회 정치를 하는데 교회가 재정적으로 도와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회에서 거절했다. 그러자 다른 문제를 걸어 교회에 분란을 일으켰다. 어느 장로는 목사는 총회 정치를 할 때 교회 돈을 사용하는데 왜 장로는 교회 돈을 사용할 수 없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과연 총회 정치를 하는 장로를 위해서도 교회에서 비용을 지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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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활동, 목사는 교회 돈으로 장로는 자기 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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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쾌거...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의 폄하
-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전 세계인들이 축하하고 있는 가운데 극우 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은 대놓고 작가와 작품을 폄하하고 있다. 한강 작가가 광주 5.18과 제주 4.3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에 대해서는 좌와 우의 견해가 상극이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역사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한 미완의 사건이다. 이해 당사자들과 후손들이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 일부 보수 단체들은 “역사 왜곡 작가에게 노벨상을 줬다”고 주장하며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참으로 대단하다. 이런 일이 노벨문학상 수상 역사상 있었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좌우 이념에 사로잡히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한 증거이다. 목사와 장로 중에도 이념에 경도된 자들이 있다. 성경이 절대 기준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이념과 신념이 성경 위에 있다. 그래서 성경도 자기 이념의 눈으로 보고 해석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경기”하는 자들을 보면서 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의 모습이 측은하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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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쾌거...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의 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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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文解力)의 위기
- 문해력(文解力) 또는 독해력(讀解力)은 글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능력을 뜻한다. 즉 음성적 읽기를 넘어 의미적 읽기까지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최근 이 문해력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기사와 뉴스를 자주 접한다. 이에 대해 서울신문에 잘 쓴 기사가 있어 읽은 후 전문을 인용 소개한다. “쌤, 무슨 말이에요”… ‘불통’에 갇힌 교실[아이들의 문해력이 위험하다] “선생님, ‘완강하다’는 ‘완전 강하다’ 아닌가요?” 수도권 고등학교의 한 영어 교사는 최근 고교 3학년 수업에서 뜻밖의 질문을 들었다. ‘완강하다’가 ‘완전 강하다’의 줄임말인 줄 알았다는 학생들은 생소한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모색한다’는 ‘색깔을 따라 칠한다’는 뜻인가요?” 생각지 못한 질문에 이 교사는 “내가 영어 교사인지 국어 교사인지 헷갈릴 정도”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양한 글을 이해하고 창작할 수 있는 힘,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글을 읽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해석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서울신문이 학생들의 문해력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올 2학기가 시작된 8월 중순부터 지난 6일까지 전국 초중고교 교사 20명을 심층 인터뷰하고 학생 조사를 병행한 결과 교사들은 “수업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최근 2~3년 새 문해력이 낮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문해력이 떨어지면 자기표현과 소통까지 불편을 겪기에 더 문제라는 우려도 덧붙였다. 문해력 저하는 초등학생부터 발견된다. 조기 교육으로 한글을 뗀 덕에 글자는 술술 읽지만 단어와 문장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 김민중 대구 월배초 교사는 “고학년이 북한 이탈 주민에서 ‘이탈’의 뜻을 모른다든지 지진이나 홍수는 알아도 ‘재난’ 같은 상의어나 포괄어를 모르는 경우가 정말 많다”고 했다. ‘같이’를 ‘가치’로 쓰는 등 비교적 쉬운 맞춤법을 틀리거나 문장 주술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고학년도 쉽게 볼 수 있다. 교사들이 겪은 문해력 부족으로 인한 ‘불통’ 사례는 끝이 없다. 성교육 관련 조사를 위해 ‘성적 문제’에 관해 질문이 나오면, 공부 성적을 의미하는 거냐고 반문한다. 국어는 물론 수학·사회·과학 등 다른 교과 학습에도 걸림돌이다. 수학 계산 능력은 뛰어나지만 서술형 문제의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 손을 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조미숙 교사는 “‘대변’(마주 보는 변)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똥 아니냐고 한 적도 있다”며 “수학 개념은 단어와 직접 연결된 게 많다 보니 더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사회나 과학 교과를 가르칠 때도 기본 단어 설명에 수업 시간의 10~20분을 할애해야 한다. 시간은 부족하지만 단어를 모르면 진도를 나가기 버거워서다. ‘매질에 따른 빛의 굴절’을 설명하는데 왜 때리냐고 물어서 한참 설명하거나(초등 6학년 교사) ‘왕이 승하한다’는 표현을 몰라 역사 시험에서 오답이 속출(고교 1학년 교사)하다 보니, 교사들은 어휘 설명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글의 주제를 이해하는 능력도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조금만 글이 길어도 읽기를 피하거나 엉뚱한 주제를 적기도 한다. 예컨대 ‘환경 보호를 위해 주인공이 자전거 여행을 한다’는 글의 주제를 ‘자전거를 타고 싶다’로 답한다는 것이다. 황수진 인천 이음초 교사는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추출하고 의도를 알아내는 걸 어려워한다”며 “긴 글도 영상 요약본으로 접하니까 스스로 찾는 힘이 줄어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문해력이 떨어지면 표현력도 함께 떨어진다는 게 문제다. 독후감 숙제를 받은 아이들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요약 영상을 보거나 ‘챗GPT’ 같은 인공지능(AI)에게 물어본 결과를 적어낸다. 초중고교에서 공통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스스로 느낀 점을 적으라고 하면 단순 표현만 나열한다. 34년차 초등교사는 “요즘 아이들은 ‘재밌다’, ‘싫다’, ‘좋다’는 정도밖에 표현을 못 한다. 글로 풀어서 쓸 능력이 안 되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이연수 탕정중 국어 교사는 “친구들이나 부모님과도 메신저로 짧은 메시지만 주고받으니 대화를 통해 단어나 표현을 터득할 기회가 줄었다”며 “전반적으로 언어생활 자체가 단순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최저 수준 문맹률과 최고 수준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학생들의 문해력은 왜 하락한 걸까. 인터뷰에 응한 교사 20명 모두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와 영상 매체 이용 증가’를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15년차 이상 교사들은 스마트폰의 등장 전후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극명하게 느낀다고 한다. 유튜브 등 영상 플랫폼 노출이 급격히 늘고 최근에는 소셜미디어(SNS)와 메신저 사용 시간이 증가하면서 책을 읽거나 대화·토론할 시간이 부족해진 것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2년 10대 청소년 미디어 이용조사’를 보면 청소년의 인터넷 이용 시간은 하루 평균 약 8시간(479.6분)으로 2019년에 비해 1.8배 증가했다. 특히 청소년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동영상 플랫폼은 유튜브(97.3%)와 유튜브 쇼츠(68.9%), 인스타그램 릴스(47.6%), 틱톡(39.6%)으로 이용률 2~4위가 모두 쇼트폼 콘텐츠 플랫폼이었다. 교사들은 흥미와 자극 위주의 영상 시청이 글 읽기 방해의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15초 안팎의 짧은 길이에 언어도 거의 없는 ‘릴스’와 ‘쇼츠’에 익숙해지다 보니 호흡이 긴 글을 읽어내지 못한다. 배주호 초등교사는 “쇼트폼 콘텐츠가 많아지고 짧은 메시지로만 소통하면서 전반적인 주의 집중력이 부족해지는 현상”이라고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등교 공백도 주요한 문해력 저하 요인으로 꼽힌다. 교사 20명 중 13명은 문해력 저하가 코로나19로 인해 더 심화했다고 봤다. 경기도의 23년차 영어 교사는 “학교에 못 나오면서 전체적으로 학생들의 학습량이 감소했지만 상위권 아이들은 코로나 전후에 별 차이가 없다. 반면 중하위권은 어휘력이 떨어졌다”고 전했다. 교사의 절반 이상인 11명은 한자어와 어휘 교육의 감소도 문제라고 봤다. 우리말의 70%가 한자어이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려운 개념과 용어는 한자어로 돼 있어서다. 중학교 1학년 박모군은 “국어 교과서에 ‘민초’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민트초코’인 줄 알았다”며 “처음 보는 단어 중에도 한자어로 된 단어가 어렵다”고 했다. 이 때문에 기본적인 한자어는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민기식 서울 면일초 교사는 “한자어가 3학년 이후 교과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아이들은 정확한 뜻을 모른 채 대충 이해한다”며 “한자어 속뜻을 가르쳐 주면 이후 학습에서도 훨씬 쉽게 배운다”고 강조했다. 독서 교육이나 글쓰기 교육의 부족도 한 원인이다. 일기 쓰기가 인권 침해라는 논란이 나온 이후 주제 글쓰기 등 다른 방식의 교육을 도입하거나 독서 활동을 만든 학교들도 적지 않다. 안연규 구미 선산고 국어 교사는 “최근 문해력이 주목받자 문해력 문제를 푸는 기술을 연습하는 사교육도 생겼다”며 “학교에서 오래 생각하고 질문하고 글 쓰는 연습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김지예·김우진 기자. 2024-09-10 1면). 나는 오늘도 문해력의 퇴보를 막기 위해 재미난 유튜브를 끄고 다시 책을 집어 든다. 그러나 곧 다시 유튜브 세상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것을 안다. 중년인 나도 이런 판이니 젊고 어린 세대야 두말하면 잔소리라 앞으로가 걱정이다. 유튜브가 세상을 좌우하고 문해력은 날로 떨어지니 똑똑한 바보가 늘어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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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文解力)의 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