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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재미로 하는 독서가 행복을 준다
전직 판사 문유석 작가의 독서에 대한 책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독서가 쾌락이었다고 했다. 동감이다. 공부할 때는 억지로 읽어야 하는 책들도 있지만 나만해도 이제는 재미로 읽는다. 재미있는 게 많은데 굳이 재미 없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고역일 것이다. 내게 독서가 재미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쯤 되니 독서를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한 나 자신이 무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도대체 『책은 도끼다』 같은 책은 어떻게 쓰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 폭포수 쏟아지듯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당최 그 정(p. 83)도로 섬세한 감성이라고는 타고나지 못한 시큰둥한 나 자신을 잠시 원망해보았지만, 뭐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독서도 이런 독서도 있고 저런 독서도 있는 거다. 카프카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쳐서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는 거냐며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일갈했지만, 수사법은 수사법일 뿐, 책은 도끼일 수도 있고 심심풀이 땅콩일 수도 있고 잠을 재워주는 수면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책마다 사람마다 다양한 용법이 있기 마련이다. 심심풀이 땅콩 얘기를 하고 보니 내가 청소년기에 길고 긴 소설을 좋아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릴수록, 젊을수록 하루도 길고 일 년도 길고 남아 있는 살아갈 나날은 끝도 없어 보였다. 시간은 언제나 무한정 남아도는 백사장의 모래알 같은 것이었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재미있는 소설 하나를 발견하면 "우와, 한동안 재미있겠다!" 하며 신이 났고, 게다가 그 소설이 열 권 스무 권 밑도 끝도 없이 길기까지 하면 두고두고 퍼먹을 꿀단지라도 발견한 기분이였던 것 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달라져버렸다. 대하소설은커녕 조금만(p. 84) 두꺼운 책 앞에서도 멈칫거린다. 사실 읽자면 지금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텐데 지레 겁을 먹게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루도 짧고 일 년도 휙휙 지나가고 남아 있는 나날이 벌써 손에 잡히는 것만 같다. 내일이 없는 사람마냥 여가가 생겨도 그저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먼저 이리저리 찾다가 오 히려 아무 재미도 없이 흘려보내고 말 때가 많다. 열 권 스무 권짜리 책을 잔뜩 쌓아놓고 마루를 뒹굴거리며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던, 해가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던 8월 여름방학의 나날들이 그립다(p. 85). 편식 독서법 책 수다도 많이 떨고 여기저기 독후감도 올리고 하다보니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나의 답은 '대충 읽는다' '내가 재미를 느끼는 부분 위주로 읽는다'다. 편식 독서법이랄까. 엄마가 억지로 먹으라는 토란국은 국물만 몇 수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소시지야채볶음은 소시지만 쏙쏙 골라 먹는데, 운좋게 킹 크랩을 먹게 되면 마지막 다릿살 하나까지 꼼꼼히 발라먹기 마련이다. 모든 음식을 똑같이 정성스럽게 먹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부분만 먹고는 다음 음식으로 넘어간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부위는 천차만별. 난 내(p. 167) 취향의 책을 골라서, 그 책 중에서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휙휙 넘기며 읽는다. 어떨 때에는 한 책에서 단 한 장면, 단 한 구절만 맛있을 수도 있고, 기적같이 한 문장 한 문장 전부를 꼭꼭 씹어 먹으며 맛있어할 수도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계속해보겠습니다』, 『아랑은 왜』 『청춘의 문장들』이 쫀쫀하게 모두 맛있는 책들이다. 다만 내 취향의 '편식 독서'라도 많이 하다보면 점점 그와 연관된 다른 메뉴들도 찾게 되는 것 같다. 음식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같은 이치로 읽어봐도 선뜻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 책은 잘 읽지 않는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책도 백 번, 천 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 순간 뜻이 스스로 통한다고 믿었다는데,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랬던 것 은 아닐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지식과 정보가 쏟아져나오는 시대다. 꼭 그 책이 아니어도 비슷한 내용을 더 쉽게 설명하는 다른 책들이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책을 백 번 천 번 읽고 있는 사이에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세상 자체가 달라져버린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 원전 읽기'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에 회의적이다. 지금의 세계를 이루는 사상적 기틀인 『국부론』, 『자유론』, 『법의 정신』, 『통치론』 같은 명저들도 결국 그 책들이 쓰(p. 168)인 시대의 과제를 그 시대의 언어와 감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명저라도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고 그 시대에만 의미 있었던 부분도 많다. 우리가 취할 것은 그중에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진 몇몇 부분들인데, 그런 부분들은 실상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우리가 수업시간에 졸아서 그렇지 이미 다 배운 '상식'인 것이다. 그보다는 더 깊이 있게 알고 싶다면 현대의 연구자들이 고전의 핵심들을 알기 쉽게 현대의 언어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서들도 얼마든지 많다. 유시민 작가가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고 규정하는데,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왜 소비자들이 직접 도매상, 심지어 공장까지 가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물건을 떼와야 하나? 내 아이 밥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올리기 위해 직접 도축장에서 고기를 해체해야 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원전 목록이 아니라 그중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하지만 왜곡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지식 소매상들의 목록이다. 소매상일수록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잘 골라야 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도 필요하긴 하다. 그렇다고 소매상은 미덥지 않으니 소비자들이 직접 원산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무리한 이야기다(p. 169). 외국어 학습법에도 이런 이론이 있다. C.I.와 M.I.가 중요하다는 이론이다. C.I.는 Comprehensible Input, 즉 자기 수준에서 슥 읽어서 70~80퍼센트 쉽게 이해되는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면 나머지 모르는 20~30퍼센트는 뇌 속에서 유추가 가능하므로 학습이 되는데, 절반만 이해되는 걸 읽으면 정보 부족으로 나머지 유추가 불가능하여 아무것도 머리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서도 같은 원리 아닐까. 문돌이인 내가 갑자기 유체역학 책을 읽으면 아무런 '인풋'이 되지 않는다. M.I.란 Meaningful Interaction, 즉 유의미한 상호작용이다. 언어란 암기 등 단순 인풋만으로는 내 것이 되지 않고 그 걸 써먹어야 내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과도 연관 있을 것 같다. 책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몇 가지를 글로 적어보거나 남과 수다를 떨어보는 거다. 나는 페이스북에 독서노트 삼아 짤막한 독후감을 끄적끄적 올리곤 해왔는데 결국 그 책에서 내가 내 것으로 흡수한 것은 달랑 그게 전부인 것이다. 그거면 내겐 충분하기도 하고. 다시 요약하자면, 남들이 무슨 대단하고 있어 보이는 어려운 책을 읽든 신경쓸 필요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는 게 엄청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렵다. → 고민 말고 바로(p. 170)『피케티 쉽게 읽기』, 그것도 안 되면 『초딩도 읽는 피케티』 또는 『만화 피케티』를 읽는다. 능력도 안 되는데 『21세기 자본』 원전을 꾸역꾸역 읽은 사람은 노동만 했을 뿐 아무것도 기억 못하지만 『만화 피케티』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은 그중 몇 대목만큼은 기억하고 써먹을 수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유명하다고 해서 집었는데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공감이 안 된다. 자괴감 느낄 필요 없이 좀더 재미있고 수월해 보이는 딴 책을 집어 읽어본다. 한 50페이지까지만. → 그래도 진도가 안 나간다. → 표지가 만화 같은 『미스 함무라비』를 집어든다. 이건 초딩도 읽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나름 재밌네. → 유의미한 상호작용으로 기억에 남기기 위해 완독 후 독후감을 인스타에 올린다. 뭐 이런 얘기....(p. 171). 티브이, 인터넷과 책의 차이 독서에 관한 책을 쓰다보니 자괴감이 든다. 솔직히 어린 시절과 달리 책이 최우선순위가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여유 시간이 생길 때 뭘 제일 먼저 집어 드는지 스스로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1번이 스마트폰, 2번이 티브이. 책은 3번이다. 예열이 필요 없는 순서,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순서다. 티브이로 영화 하나 보려고 해도 백 분 정도 몰입해야 한다. 그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는지, 그 정도로 재미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예능 프로 다시보기를 틀게 된다. 이건 처음이든 중간이든 아무데나 틀어서 보다가 재미없(p. 172)으면 바로 다른 것으로 넘기면 그만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자막이 어디서 웃어야 할지를 대치동 강사처럼 딱딱 짚어주기 때문에 웃기 위해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 그보다 더 간단한 것이 스마트폰 집어들기다. 아무 생각 없이 엄지를 휙휙 움직이다보면 타임 워프라도 일어난 듯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버린다. 문제는 자괴감이다. 포털 기사 댓글이나 소셜미디어에서의 끝도 없는 그악스러운 말싸움을 보다보면 인류에 대한 마지막 애정도 식어버린다. 그걸 굳이 읽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만 남는다.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생활태도를 갖고 있는 나인데도 요즘 나의 이런 모습에 대해 고민이 많다. 이 나이를 먹고도 말이다. 고민하는 이유는 비생산적이어서가 아니라, 결국은 즐겁지조차 않아서다. 티브이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얼마 동안은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콘텐츠는 언제나 부족하고, 눈은 피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중독자처럼 끊임없이 다른 걸로 다른 걸로 넘기고 넘기고 넘기게 된다. 무한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인 것이다. 내가 무슨 권독사도 아니고 책이 다른 미디어에 비해 우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쓰레기 같은 내용의 책(p. 173)도 얼마든지 있고, 티브이나 인터넷으로도 훌륭한 콘텐츠를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래도 몇 가지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선 책은 단편적인 영상이나 인터넷 게시물보다 가볍게 시작하기 어려운 대신, 별 내용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단지 습관적으로, 중독적으로 계속 보게 되지는 않는다. 종이책은 두께와 무게라는 물리적 실체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무한정 넋 놓고 보게 되지는 않는다. 무한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적절한 순간에 멈추게 만드는 피로감도 필요한 것이다. 더 중요한 장점은 보다가 딴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티브이는 기본적으로 몰입해서 보는 매체다. 콘텐츠가 좋으면 좋을수록 더욱 몰입하게 된다. 나의 속도에 맞춰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콘텐츠의 속도에 내가 맞춰 수용해야 한다. 인터넷은 그렇지는 않지만 실시간으로 쏟아져나오는 무수한 게시글과 댓글들의 속도가 수용자를 수동적으로 만들기 쉽다. '웹서핑web surfing' 이라는 표현 그대로 링크를 타고 여기저기를 아무 생각 없이 둥둥 떠다니며 표류할 때가 많다. 이와 달리 책은 수용하는 속도를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자극받는다. 내 경우, 좋은 책을 읽(p. 174)을 때면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귀퉁이를 접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바로 이 멈추었던 순간들이 독서 경험의 핵심이다. 수동적으로 내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마는 것들은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 것이 된다. 단지 텍스트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기도 하다. 3D를 넘어 4D까지 제공하는 영상매체는 오감을 압도하는 정보를 쏟아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만도 벅차다. 여백이 없는 것이다. 책은 빈 공간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끊임없이 여백을 보충하게 만든다. 상상력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만든다. 트란 안 홍 감독이 영상화한 〈상실의 시대〉를 보며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원작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내 머릿속 이미지들이 훨씬 아름답고 풍성했던 것이다. 즉각적인 반응이 특징인 뉴미디어 시대에 멈추어 생각하게 만드는 독서의 특징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일단 유보하고, 의심하고,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는 지성적 사고의 훈련은 독서에서 출발하는 것이 여전히 정도라(p. 175)고 본다. 스마트폰의 보급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며 흥분하는 이들이 있는데, 자극적인 기사 몇 줄만 읽고 바로 화르르 불타올라 십자군전쟁에라도 나선 기사가 된 양 개인 신상을 털고 '집단 다구리'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래가 두려워질 뿐이다. 하긴 십자군전쟁도 대중의 열정을 악용한 사기에 가까웠으니 인간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남용하는 이들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나치 시대의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과연 집단 지성이 발동했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성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야만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의 직접민주주의란 공포일 뿐이다. 이야기가 좀 거창해졌지만,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충일감에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루종일 티브이를 본 날,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 날, 하루종일 책을 읽은 날의 느낌은 다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책의 우선순위를 높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하루의 시작인 출근길에 단 십 분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고, 내 주변 어디든 책을 흩어놓기도 한다. 집에도, 사무실에(p. 176)도. 노력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다. 티브이나 인터넷의 무수한 선택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수시로 서점에 들러 다양한 책을 구입해놓는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은 책꽂이에 꽂지 않고 보기에 너저분할 정도로 표지가 쉽게 눈에 띄게 눕혀놓는다. 서점에서도 서가에 꽂힌 책과 평대에 누워 있는 책의 생명력은 천양지차다. 책은 고이 모셔놓기 위한 물건이 아니다. 그 좋아하던 책을 읽기 위해 이런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의 라이벌들은 막강하다. 책 중독자였던 어린 시절 정도까지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책씨, 분발해주길 바라(p. 177). 그럴 만큼 책을 쓴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굳이 쓸 리 없다. 그 재미 중 첫번째는 의외성이다. 글 이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끝으로, 또는 엉덩이로 쓰는 것 같다. 머릿속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을 옮겨(p. 180)적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아이디어 조금만 있는 상태에서, 때로는 그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자판을 두들기다보면 스스로도 생각 못했던 표현이나 명제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가끔 정말 뿌듯한 똥이 나오는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 스스로는 대견하게 느껴지는 구절이 튀어나올 때면 등골 이 짜릿하다. 그 맛에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두번째는 내 글에 반응하는 타인들을 발견하는 신기함이다. 나는 철저히 내가 좋아하는 글만 쓴다. 쓰기 싫은 글은 쓰지 않는다. 내 삶의 태도는 어릴 적부터 '재수없음'으로 요약 할 수 있다. 내가 왜?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난 그렇게 절박하지 않아. 구차하게 그렇게까지? 아님 말구. 너 아니어도 많아. 그래서 욕도 많이 먹어봤지만, 그게 나를 지키기 위한 자기암시이기도 했다. 스스로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게 차단하는 것이다. 보다 많은 것을 욕심내려면 타고난 그릇이 엄청나게 크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바꾸어 세상에 맞춰야 한다. 언제나 나 자신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덕에 내 그릇은 내가 잘 안다. 외부에서 요구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숨어버리는 체질이다. 죄송한데요, 제가 거리에 좀 민감해서요. 책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쓰면 보다 많은 이들의(p. 181)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내 셀링 포인트를 살려서 어떤 책을 쓰면 더 구매 욕구를 자극할지 출판기획자의 마인드로 생각해보면 여러 선택지가 나오지만, 우선 내가 쓰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쓰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잘 알면서도 그저 내 취향대로 쓴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묘한 친근감을 느낀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다.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굳이 사랑받고 싶지 않다. 무서운 사람도 많고 싫은 사람도 많거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편해서 좋은데, 그들로부터도 사랑까지는 부담스러우니 호감 정도 받으면 충분하다. 책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려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내가 쓰는 글을 좋아하는 취향의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님들아, 번식해라. 세번째는 스스로 책을 쓰다보면 책의 저자들이 어떻게 책을 쓰는지 그 신비의 베일 뒤에 가려진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짐작 되는 것들은 생긴다. 무엇보다, 글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건 속단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자학 취미가 있지 않고서야 숨기고 싶은 자기 위선과 추악한 치부 위주로 글을 쓸 사람은 없(p. 182)다. 어차피 글쓰기도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인스타에 셀카 올리기, 수컷 공작새의 꼬리 펼치기와 다를 바 없을 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기 장점을 어필하여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자원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인정욕구와 결부되지 않은 표현 욕구란 없다. 다른 점이라면 그걸 어느 정도로 노골적으로 하느냐, 세련되게 감추며 하느냐가 있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자기가 지금 잘난 척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는 있느냐,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바보냐 정도일 것이다. 다시 한번 겸손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고 싶기에 『판사유감』 때부터 언제나 일종의 경고문처럼 나는 원래 이기적이고 찌질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에 불과하고, 책에 나오는 글은 그런 나조차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때때로 느끼게 되는 기특한 생각들에 불과함을 밝히고 있다. 글이란 쓰는 이의 내면을 스쳐가는 그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공감을 받을 만한 조각들의 모음이다. 나는 그래서 책이 좋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이다. 그것도 쓴 사람 본인이 열심히 고르고 고른. 그게 싫고 인간들의 비열함과 어리석음, 그악스러움을 보는 게 좋다면 굳이 돈 들여서 책을 살 필요가 있나? 인터넷에만 접속해도 공짜로 무수한(p. 183)샘플을 구할 수 있는데. 그건 공기와도 같이 이미 세상에 가득차 있다. 글재주 좀 있는 자들이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걸 읽으라는 얘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구차한 자기 포장들도 있지만 아, 이건 진짜구나, 싶은 이야기들도 있다. 신기하게도 어떤 거창하고 화려한 이야기보다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시시하고 소박한 이야기더라도 말이다. 글이란 뛰어난 문장만으로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글은 결국 삶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장 하나하나가 비슷하게 뛰어나더라도 어떤 글은 공허하고,어떤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삶은 글보다 훨씬 크다. 열심히 살든 되는대로 살든 인간은 어떻게든 각자 살아야 한다. 되는 대로 살 때 더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저 솔직히 자기 얘기를 계속 쓰는 것 정도가 글쓰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그중 어떤 얘기는 좋은 글이 될 것이고 어떤 얘기는 시시한 글이 될 것이다. 그건 쓰는 이가 의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좋은 이야기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걸 더 잘 전달할 가능성이 높아질(p. 184) 뿐이다. 물론 그건 대단한 차이를 낳지만 그렇다고 돌멩이를 금덩어리로 바꾸는 연금술은 아닌 것이다(p. 185). 나는 간접경험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책을 통해 타인을 발견하고 세상을 발견해왔다. 직접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어릴 적부터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방인들 사이에 던져진 고립된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해왔다. 타인들이 성 큼 내게 다가오면 불쑥 겁부터 난다. 그것이 나의 한계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책이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이었다. 책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고통, 욕망을 배워왔다. 판사가 된 이후의 삶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 법정에서 재현되는 것은(p. 189) 실제 삶이 아니다. 재판 기록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삶이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읽고 바라보며 살아온 것 이다. 간접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 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공감이 기존의 세계를 부숴버릴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읽었던 순간, 1980년 광주에서 이른바 국가가 시민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 다. 나는 그때까지 '지금, 여기'가 아닌 먼 곳들에 대한 이야기만 읽어왔었다. 먼 옛날에 이미 시민혁명이 이루어졌고,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말이다. 교과서에서도 그게 인류 역사라고 배웠다. 그래서 난 그게 '상식'인 줄 알았다. 그 모든 믿음이 한순간에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난 그래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한다. 교과서에 몇 줄 추가된 설명만으로는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p. 190) 무서운 피물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 같아서다. 대학에 들어 간 후 접하게 된 대부분의 책들은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인간 세상이란 원래 그런 곳이 아니라는 책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그런 세상을 바꾸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책들에 대해서는 섣불리 믿음을 가질 수 없었지만(애초에 '믿음'과는 거리가 먼 체질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냉엄하게 존재하는 부조리와 타인들의 고통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점에 틀어박혀 교과서와 다른 실제 세계에 대한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내게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사당동 더하기 25』나 『힐빌리의 노래』처럼 빈곤이 가정과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책들, 『인구 쇼크』 같이 지구 곳곳에서 인구 집단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그 배경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알려 주는 책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같이 저성장시대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책들을 읽는다. 세상은 갈수록 빠르게 변화하고 복잡하게 분화되어가기 때문에(p. 191) 읽어도 읽어도 그 속도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이런 독서를 '쾌락'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의무감만으로 읽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본능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걷고 싶지는 않다는 생존 본능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몰라서 남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는 최소한의 윤리의식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잠시라도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게 해주는 책들은 나를 '눈 먼자들의 도시'에서 구원해준다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 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의 실체였다.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병균에 감염된다고 진심으로 믿은 미국 남부의 숙녀들,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 맡은 바 행정절차일 뿐 이라고 믿은 독일 공무원들, 미국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은 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킬킬대며 지껄이는 사람들, 여자의 '노'는 '예스'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믿는 남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p. 192)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말을 들으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무지는 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모든 언어가 소음으로만 들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느껴진다. 소음과 위협, 공포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불행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의외로 타협하고 수용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도 평화를 준다.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더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귀를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 나 빼고는 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p. 193) 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 '아파....' '억울해...'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어떻게 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성난 눈으로 부모를 노려보는 아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말을, 감기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신호다. 열이 펄펄 끓는 것도 우리 몸이 열심히 병과 싸우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사람은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은 실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다. 국론 분열이 사회를 살리기도 한다. 중간자들이 제 역할을 다한다면.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p. 194)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 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p. 195). 셰익스피어가 흉악범을 교화시킬 수 있을까? 여기, 독방에 갇힌 무기수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우연찮게 한 영문학 교수를 만나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게 된다. 이후 십 년간 이어진 수업의 결과, 무기수는 삶의 구원을 얻는다. 실로 놀라운 이 얘긴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라는 책의 줄거리다.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25세이던 1983년, 시카고 소재 카운티 단기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자원봉사 삼아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봉사는 2010년까지 약 삼십 년간 여러 교도소로 이어졌다. 저자는 2003년 가장 위험한 죄수를 장기간 격리수용하는(p. 196) ‘감옥 안 감옥’ 슈퍼맥스supermacx서 독방에 갇힌 적수들에게 강의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십대에 살인죄를 저질러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는 무기수 래리 뉴턴을 만난다. 이후 십 년간 그에게 셰익스피어를 가르친다. 이 책은 법관으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묘한 저항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그럴듯한' 얘기 아닌가!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면 흉악범도 교화될 거야. 어쩌면 이 역시 지식인의 선입견에 불과할 수 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지? 영문학에서 그가 갖는 위상 때문에 막연히 선택된 것 아닐까? 더구나 무기수라면 비단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뭐가 됐든 '외부 세계와 자신을 이어주는 한 줄기 통로'인 교수의 관심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을까? 교수 역시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라도 '죄수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쪽으로 애써보려 할 것이다. 실제로 사형수와 지식인 간 미묘한 관계 형성 과정을 다룬 문학도 있다.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실제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범을 장기간 인터뷰해 쓴 걸작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 주연의 〈카포티〉로 영화화되기도 했다(p. 197). 의심 많은 성격을 탓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엔 문체에서 벽을 만났다.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인데 역시 난 너무 선하고 건전하며 훌륭한 글엔 금방 지친다. 독실한 종교인이나 진실한 상담 전문가, 열정에 불타는 사회운동가의 좋은 글을 접하면 박수는 치면서도 재밌게 읽진 못한다. 내 취향은 살짝 삐딱하고(이때 포인트는 '살짝'이다, '열심히' 삐딱하면 지루하다) 느긋하며 가끔 비루한 글이다. 그래도 분명 참고할 만한 내용이었으므로 죽 읽어나갔다. 그런데 중반 이후 이런 구절들이 정신을 번쩍 나게 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범죄에 빠져들게 될까?'에 대해 너무도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살인은 열정적으로 계획한 게 아닙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멍청하게 저지른 행동일 뿐이에요." "살인을 저지 른 사람들의 상당수가 약간의 영향만 있어도 다르게 행동했을 겁니다." 책 속 경찰관 살해범의 말이다. 이는 내 재판 경험에 비추어봐도 틀리지 않다. 특히 '멍청하게'란 표현은 정말 적절하다. 악마 같은 흉악범이 계획적으로 벌이는 살인은 드물다. 평범한 사람이 사소한 분쟁에 휘말려 순간 울컥해 저지르는 범행이 더 많다. 심지어 동네에서 막걸리 내기 윷놀이를 하던 오십대가 옆에서 자꾸 귀찮게 훈수하는 이웃을 때려 숨(p. 198)지게 한 경우도 봤다. 이 책엔 비행청소년이 많은 한 고등학교에서 십대 때 살인을 저지른 죄수들의 충고를 녹화한 동영상이 상영되자, 그 어떤 교사 애기도 듣지 않던 소년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일화 도 등장한다. 해당 동영상을 본 소년들의 반응은 이랬다. "형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어떤 교사도 그 말을 더 낫게 얘기하진 못할 것 같아요."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얼마나 신세를 망칠지 당신들이 얘기하고 있었다는 거죠. 당신들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면 난 잠을 잤을 거예요. 그래서 절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던, 막가는 소년들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엔 귀기울인다. 저자는 살인 등으로 종신형을 받은 소년 죄수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각색 작업을 맡겼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이들은 사랑 얘기가 아니라 (로미오처럼 착한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압박하는) '또래 집단의 압력'에 작업의 초점을 맞췄다. 이들의 각색 희곡은 로미오가 '티볼트'를 죽이고 경찰에 체포되는 걸로 끝난다. 이 희곡으로 연극을 공연한 후 소년수들은 말했다. "전 열네 살에 살인으로 교도소에 들어와 199년형을 살고 있습니다." "전 열일곱 살에 교도소에 들어와 가석방(p. 199)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습니다. 절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 다." "우린 여러분이 로미오의 잘못에서 뭔가 배우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잘못에서도." 래리 뉴턴은 베이츠 교수의 '교도소 제자'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고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영문학자들이 놀랄 정도로 셰익스피어에 관한 독창적 글을 많이 남겼다. 오랜 수업 끝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가 저지른 폭력 행위와 이 모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칭찬받고 싶은 사고방식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어요. (....) 이젠 남들에게 인상을 남기는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제 지적 능력이나 뭐 그런 걸로요." 소외 계층 청소년이 그리도 쉽게 범죄에 빠지는 이유 중에는 '내 소속 집단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가정과 사회에서 이들의 인정욕구를 충족시킬, 보다 나은 집단에의 소속감을 제공해주지 못한 결과가 범죄로 연결되기도 하는 것이다. 소년범들과 대화를 나누던 베이츠 교수는 그들의 범죄 경험이 대부분 7~8세 때 시작된다는 얘길 듣고 놀란다. 한 소년범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곱 살부터 열 살까지의 아이의 경험이 십대와 성인으로서의 행동을 결정해요." 교육 전문가나 심리학자의 말이 아니라, 소년범의 말이다(p. 200). 실제로 베이츠 교수가 가르치던 소년수 한 명은 전학을 자주 다니던 아이였는데 가벼운 장난 몇 건 때문에 교사의 미움을 샀다. 교사는 그를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세워둔 채 한 학기를 보내게 했다. 이후 소년은 거리로 나섰고 그의 인생은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 소년수는 말했다. "학생을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두면 그는 자라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 거예요." 베이츠 교수와의 셰익스피어 수업을 통해 놀라운 지적 성장을 이룬 래리 뉴턴이 한 학술지에 기고한 에세이가 있다. 그중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수많은 죄수들이 결국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 어떤 종류의 죄수가 여러분 옆에 살길 원하십니까? (...) 여러분에겐 그들이 좋은, 혹은 나쁜 이웃이 되도록 도와줄 힘이 있습니다. 교육만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과학입니다." 그렇다. 죄수들 중 대부분은 결국 사회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들을 모두 사형시키거나 무기 복역시키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이 점을 쉽게 잊곤 한다. 그래서 범죄자들에게 어떤 고통을 가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고,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일 때가 많다. 범죄자들은 선천적으로 위험한 괴물이고, 장기간 사회(p. 201)로부터 격리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범죄자가 구제불능의 괴물일까. 히스 형제의 책 『스위치』에 어린 자녀를 구타해 골절상을 입히는 등 아동학대 부모들을 대상으로 행동치료를 수행한 사례가 나온다. 처음 부모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녀와 매일 단 5분씩만 놀아주는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은 아이들에게 완전히 집중해야 한다. 전화도 받지 말고, 뭘 가르치려 들지도 말고, 아이들이 놀이를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부모들은 명령을 내려서도 안 되고, 비평을 해도 안 되고, 질문을 던져서도 안 된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면 부모도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 아이가 부모의 크레용을 빼앗으며 "나 이거 할래!" 하고 외치면 마음껏 쓰라고 내주고 다른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다. 아이가 심술궂게 또 부모가 쓰는 크레용을 못 쓰게 하면 그에 순순히 따른다. "네 말이 맞아. 이 색은 어울리지 않는구나." 아동학대 부모들에게 이 5분은 무척이나 힘든 시간이었다. 자기통제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동 중심 상호작용이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칭찬하는 법,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면서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법 등을 배우게 된다. 110명의 학대 부모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p. 202) 절반은 일반적인 분노조절 요법 치료를, 나머지는 위와 같은 부모-자녀 상호작용 치료를 받았다. 치료 후 3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전자의 60퍼센트가 다시 아동학대를 한 반면, 후자의 20퍼센트만이 다시 아동학대를 했다. 아동학대 부모 중 상당수는 선천적인 괴물이어서 아이를 때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너 살짜리 아이들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이 교육 방법에 대해 무지했다. 제대로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교육받자 그들 중 80퍼센트가 아동학대를 멈추였다. 내 재판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범죄자 중 다수는 가정과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교도소에서라도 이들이 제대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이들 모두를 영원히 가두어 둘 수는 없고, 이들 중 대부분은 언젠가는 이 사회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래리 뉴턴의 에세이는 정확히 이 지점을 포착하고 있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라는 첫 의문에 대해서도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갱스터 생활을 하던 소년수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목한 지점은 (내가 생각조차 하지 못 했던)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또래 집단의 압력'이었다. 뉴(p. 203)턴의 셰익스피어 해석이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도 당연하다. 그는 일반인과 다른 지점에서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다양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시대는 바뀌어도 인간의 욕망과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간들의 오욕칠정을 풍부하게 담아낸 고전은 거울이다. 그 앞에 서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마는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난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을 발견, 탐독하면서 현란한 언어유희의 묘미에 빠졌었다.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그 정도였다. 반면, 소년 시절에 폭력• 마약• 살인을 저질러 지하 독방에 갇힌 무기수들은 교육 수준에 관계없이 셰익스피어를 통해 천국에서 무간지옥 바닥까지 경험한 것이다(p. 204). 일자리를 빼앗기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 거라는 공포의 밑바탕에는 '노동' '쓸모' '일' 등에 관한 오래된 관념이 있다. 하지만 이런 관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인간이 바꾸어온 것 아닌가. 영국의 1833년 공장법이 9세 미만 아동 고용 및 18세 미만 소년의 야간노동을 금지하자 공장주들은 시장 경제에 대한 부당한 개입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이들이 지금 시대의 의무교육을 보면 어리둥절할게다. 어린 녀석들이 자기 밥벌이를 하기는커녕 세금으로 공짜로 공부를 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하고. 탄광 노동자들에게 하루 열몇 시간씩 석탄을 캐도록 시키던 이들이 오후 네시에 퇴근하는 현대 유럽의 사무직 노동자들을 보면 이 미친 시대에는 그냥 앉아서 잠깐 놀게 하고는 공짜로 돈을 준다고 놀라(p. 227) 자빠질 거다. 시대가 달라지면 관념 자체도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알파고 이후 쏟아진 온갖 요란한 기사들 보다 '멍때리기 대회' 기사가 더 혁명적인 함의가 있다고 느꼈다. '미래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지?'라는 질문만 하지 말고 그런데 우리는 꼭 일을 해야 되나? 그런데 일이라는 게 뭐지?'라는 질문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기계에게 일을 빼앗기는 상상만 할 뿐 기계에게 일을 시키고 우리는 노는 상상은 하지 못할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시대에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과거 시대 사람들 눈에는 그냥 쓸데없는 놀이나 미친 짓일 뿐일 거다. 혀와 배꼽에 피어싱해주는 직업, 프로 스케이트보더, 먹방 찍어 돈 버는 유튜 버들,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유행의 패션 산업... 인간이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유희의 축적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곤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여전히 동굴 생활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쾌락은 우리를 단조로운 동굴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모험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쾌락의 카탈로그를 늘리고 늘리며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재미도 없는 성공충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엔 즐기는 자들이 이길 것이다(p. 228). 미래는 결국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다. 자기실현적인 예언이다. 다수가 공유하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것이 곧 법이 되고, 도덕이 되고, 가치가 된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 발전도 인간들의 무수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패턴화해 모방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현재의 사회부터 바꾸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쓸모'가 없어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지 궁금하면 지금 이 사회가 탑골 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편의점 알바 청년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의 눈부신 과학 발전이 낳을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의 분배 구조를 보면 된다. 더 먼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그와 결합한 신인류가 평범한 인간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 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p. 229). 통근길의 고통을 반전시킨 계기는 전철 승객들의 분포도 및 승하차 패턴 학습, 그리고 어디서 내릴지 관상 보는 법에(p. 248)서 비롯되었다. 상당 구간에서 앉아 갈 수 있게 되자 매일 책 을 들고 다니며 읽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전철은 도서관이 되었고, 통근길은 견뎌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끝나가는 것이 아쉬운 즐거움이 되었다.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다. 한가한 휴일에 집에서 뒹굴 거릴 때는 등허리는 소파와, 손은 리모컨과 합체하는 폐인이 되는 주제에, 통근길 전철에서는 세상 다시없는 독서광으로 변신한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더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통근길 전철은 책이 유일한 도피 수단이던 소년기로 잠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었다. 하루 세 시간에 가까운 독서 시간이 강제로 확보되자 참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책들 중 대부분이 전철에 앉아 흔들거리며 읽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워런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 『싸울 기회』, 경제 학계 두 거목의 일대기 『케인스 하이에크』, 심지어 900쪽이 넘는 벽돌책 『빈 서판』까지 전철에 앉아 읽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진지하고 무거운 책은 지하철에서 읽고, 만화책은 조용한 곳에서 정독하곤 했다는 점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한 책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기 때문에 주변(p. 249)이 어수선해도 불편하지 않은 반면, 감각적• 정서적 체험이나 기억과 연관된 책들은 조용한 곳에서 봐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통근길 전철에서 책 읽기는 독서 시간 확보 외에도 장점이 있었다. '각인 효과'다. 오리 새끼가 갓 태어나서 사람을 보면 엄마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각인 효과처럼,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단 십 분이라도 책 읽기를 하면 뇌의 모드 설정이 그쪽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연스럽게 계속하게 되더라. 출근 때 책을 보면 퇴근 때도 보게 되고, 이어서 밤에도 뒤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되고. 반면 출근 때 페북질을 시작하면.... 이때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읽든 못 읽든 책을 들고 출근길에 나서려고 한다. 하루의 시작을 책과 함께한다는 것은 충실한 하루를 여는 좋은 방법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객차 안을 둘러 보아도 책을 들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엄청난 보물이라도 들어 있는 양 일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은 사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좀 무서운 모습이다. 사이비종교 의식 같기도 하고, 외계인이 전파로 사람들을 세뇌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을 보고 놀란 나머지 메모까지 해둔 일이 있다. 노량진에서 종합운동장 가는 9호선 안이었는데,(p. 250) 책 읽는 이가 무려 아홉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키위새나 갈라파고스땅거북을 떼로 만난 느낌이었다. 여덟 명이 사십대 정도의 양복 입은 남성이고 한 명은 영어회화책 보는 여학생. 책 제목은 『아프리카의 별』 『대장정」 『기업경영에 숨겨진 101 가지 진실』 등인데 객차 사이 통로에 서서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를 읽는 신사가 이채롭다. 아니 그거 지하철에 사린가스 살포하는 얘기.....(p. 251).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깊이 공감하는 구절을 만났다.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구아수폭포를 보고 싶다, 남극에 가보고 싶다 등 크고 강렬한 비일상적 경험을 소원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쾌락에 불과하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마치 동화 『파랑새』를 연상시키는 일견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은 굉장히 과학적인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복감에 관한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공통적으(p. 252)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어떤 '큰 것 한 방'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 생각을 확장해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 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 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멋진 몸매를 위해 굶고 운동하는 것이 유행이라 치자. 바뀌어 가는 몸매를 보는 기쁨이 이를 위한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맛집 찾아다니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 낫다. 남들 보기에 덜 번듯한 직장이더라도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을 내가(p. 253) 좋아하는 방식으로 꾸미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잘나가는 사람과 친해져보려 애쓰기보다 가족,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낫다. 습관처럼 내 곁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가 불행하면 내 삶 또한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끝에는 결국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좋아하는 책만 잔뜩 있다면 무인도에 있어도 행복할 것 같던 시절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욕심내면서 무엇에도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세상에는 크고 대단한 일을 이룬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가장 본받고 싶은 '습관이 행복한 사람'은 따로 있다. 한 세기,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고 계시면서도 아직도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분이다.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님이다. 언론은 교수님의 장수 비결에 관한 기사를 앞다투어 싣곤 한다. 사십 년째 매주 세 번은 꼭 수영을 하고, 아침식사로는 무엇 무엇을 드시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더 중요한 것들이 빠져 있는 것 같다. 교수님은 나의 처외조부 되신다. 내가 생각하는 교수님의 건강 비결은 먼저 '부지런함'이다. 이십 년째 댁에 갈 때마다 서재엔 언제나 읽고 계신 책이 있고, 쓰고 계신 새 원고가 있다. 사람들은 그동안 뭐하셨는지 묻지만 실은 언제나 똑같았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강연을(p. 254) 하셨다. 그중 어떤 것은 알려지고, 어떤 것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거리 두기'다. 총장이니 장관이니 남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탐내는 자리들에 한 점 관심조차 보인 적이 없다. 자식들 일도 그들이 묻기 전에는 먼저 말씀하지 않는다. 여기서 들은 얘기를 저기에 전하지도 않는다. 철없는 아들 걱정에 하소연을 늘어놓는 딸에게 그저 미소를 지으며 "네가 철이 나야 걔가 철이 들지" 한마디 하시더란다.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간섭하지 않는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지만 맹목적인 열정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교회나 목사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믿을 뿐이다. 뭔가에 열광하거나 뭔가에 분노해 소리를 질러대는 노인들이 가득한 시대에 그는 언성 한 번 높이는 일이 없다. 성공한 인생이라 아쉬운 게 없어 그럴 거라며 입을 삐죽일 이들을 위해 덧붙인다. 1947년 맨손으로 월남한 후 여섯 남매를 키우셨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부부싸움도 아이들이 못 듣게 방에 들어가서 하며 언제나 웃음으로 남편을 맞던 부인이 그의 기둥이었다. 그 기둥이 육십 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눈만 깜빡이며 이십 년 세 월을 자리에 누웠다. 그는 그런 부인을 차에 태워 돌아다니며(p. 255) 세상을 보여주고 맛난 음식을 입에 넣어주었다. 결국 부인을 떠나보낸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부인의 손때 묻은 낡은 집에서 홀로 지낸다. 하지만 아주 가끔 딸에게 울고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다. 정초에는 송추에 있는 이북 식당에 가서 평양냉면을 드시며 고향을 생각한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숭실학교를 다니던 고향이다. 어느 날 노교수는 딸에게 말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 감히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삶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이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습관이 행복한 사람, 인내할 줄 아는 사람, 마지막 순간까지 책과 함께하는 사람(p. 256). 에필로그 쓸데없음의 가치 내게는 큰 즐거움을 주었던 책들에 관한 기억을 신나게 써내려갔지만, 마칠 때가 되니 역시 읽을 분들의 책망이 두렵기도 하다. 독서에 관한 수많은 책들처럼 결국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책들을 소개해주겠지, 하고 기대했던 분들 말이다. 프롤로그에서도 밝혔듯이 언급한 책들은 그저 그 시기에 거기 있었기에 우연히 내게 의미가 있었다. 나는 단지 여러분에게도 그런 책들이 있을 것이니 스쳐 보내지 마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구체적으 로 책이 당신 인생에 무슨 쓸모가 있었다는 얘기냐고 묻는 분들께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p. 257).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야간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시간. 교수님이 처음에는 정해진 자료에 따라 강의하시다가 점점 관련 연구 이야기를 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에 간 구법승이 혜초 외에도 많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살아서 돌아왔는지가 궁금해졌단다. 그래서 온갖 고문헌을 추적하여 구법승들의 생환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 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 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 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p. 258). '인문학적 경영' 운운하며 문사철 공부하면 스티브 잡스같이 떼돈 벌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는 CEO들께는 죄송하지만, 잡스는 나중에 뭘 하려고 리드대학에 가서 인문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히피, 외톨이, 괴짜들과 어울려 쓸데없이 놀다가 한 학기 만에 중퇴한 후 예쁜 글씨 쓰기에 매료되어 서체학calligraphy 강좌를 청강했다. 대학 갈 때 써먹을 욕심에 논술학원 보내서 초등학생에게 어려운 책을 읽히고 있는 학부모들께 죄송하지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입시 때문에 마지못해 본 책은 한 줄도 기억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소설책,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보러 간 에로 영화는 방금 본 듯 생생하다. 글쓰기를 좋아하 여 책까지 내게 된 건 그 때문일 거다. 쓸데없이 노는 시간의 축적이 뒤늦게 화학 작용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 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물론, 슬프게도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언젠가 쓸모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실(p. 259)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또 긁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일을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면, 이 불확실한 삶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쓸모 있는 일을 이미 한 것 아닌가(p.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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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제대로 된 상담이 필요하다
정혜신이라는 정신과의사의 책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다. 저자는 책과 책상에서 벗어나 슬픔과 고통의 현장에서 상담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롭게 경험했다. 그래서 삶을 더 깊이 있게 보고, 더 공감적인 상담과 조언을 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책머리에 누군가의 깊은 속마음을 듣고 난 후엔 꼭 묻는다. "오늘 이야기를 하고 나니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그 질문을 통해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몇발자국 떨어져서 또다른 자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속마음 말하기의 핵심이다. 속마음 털어놓는 일을 1부라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한 후의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2부다. 2부가 없다면 1부에서 생애 최초로 자신의 순정한 마음을 꺼내놓고 이야기를 했더라도 치유 효과는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고통을 치유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내 상처의 내용 자체를 드러내는 데서 비롯하지 않는다. 드러낸 상처에 대 한 내 시선이나 태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치유가 결정(p. 5)된다. 상사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사람이 그날 상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 상사와 관계가 어땠는지, 상사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등 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치열한 전장의 병사처럼 말할 때 나는 모든 체중을 실어 그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공감할수록 그는 더 격정적으로 생생하게 말한다. 그후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물으면 "내가 모멸감을 얼마나 많이 느꼈는지 알았다"거나 "내가 너무 측은하다"거나 "나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등 등 전투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지휘관의 말을 한다. 마음의 지휘관 기능이 자극되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시선이 생기면 그 전투를 어떻게 정리하고 마감할지 결론을 수월하게 내릴 수 있다.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조언을 할 필요도 없다. 상담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삶을 제대로 사는 것(1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내가 제대로 살았다는 것을 조망하고 확인하는 행위(2부)다. 병 사로서 성공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p. 6)은 나의 전투가 훌륭했고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의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인정, 그 모든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충분했다는 확인과 인정을 지휘관으로서 인식하는 2부의 행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기까지 가야 온전하고 편안한 삶, 죽음에 대한 준비를 마친 삶에 다다를 수 있다. 얼마 전 남편이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쓰러지는 일을 겪었다. 그후 두달여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죽음을 경험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더욱 절감한 것이 삶에 있어서 2부 시간의 소중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급작스럽게 이별을 한 사람들의 남은 삶이 주체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은 상당 부분 삶에 대한 정리와 확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을 때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충분히 해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해서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삶이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p. 7).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상담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은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생전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들을 기도를 통해서 아이에게 말해주고 마음을 전하고 나눌 수 있어야 부모들이 나머지 생을 이어갈 수 있어서다. 유가족 엄마들 중에는 눈을 뜨고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로 보내는 이들도 있다. 그 기도의 일부는 아이와 미처 나누지 못했던 것들을 확인하고 다시금 전하고 인정하는 일이 기도하다.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벼락같은 이별을 한 이들의 삶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벼락처럼 잃고 홀로 남거나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이별의 인사조차 남기지 못한 채 떠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둘 중 하나가 우리의 삶이다. 그동안 나는 내 삶의 전투에 매일처럼 참전하는 전투병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정지를 겪은 두달 전부터는 지 휘관의 시선으로 나의 하루를 돌아보고 그 느낌을 매일(p. 8)밤 그와 나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밤마다 정리하고 작별하고 아침이면 다시 새롭게 만난다. 삶과 죽음이 홀가분하게 동거하는 삶을 사는 중이다. 그 삶은 뜻밖에도 암울하거나 우울하지 않고 사랑이 넘치고 자유롭다. 삶과 죽음이 동거하는 삶을 또렷이 인식하기 시작한 후, 나의 매일은 꽃다발 같은 시간이다(p. 9). 세월호 참사 직후 저희 부부는 안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치유공간 이웃(이후로는 '이웃'으로 표기)이라는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긴 시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여러 치유 활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2년여가 지난 어느날 남편과 저 두 사람 다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검사 며칠 후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암이 의심되는 징후가 있다더군요. 남편은 간과 다른 한곳에 암이 의심되는데 간에는 직경 5센티미터나 되는 종양 덩어리가 보여서 전이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게는 신장과 유방에 암이 의심(p. 18)된다며 정밀진단이 필요하다고 했고요. 그 전화의 내용을 남편에게 전했더니 남편이 1분쯤 가만히 있다가 제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여한이 없다고 했지?" 제가 그렇다고 말하니 남편도 "그럼 됐어, 나도 여한이 없어" 하더군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서로 웃었습니다. 사실 그날 명동성당에서 3시간 정도 세월호 민간 잠수사들과 집단상담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잠수사들의 고통에 집중해야 하는 날이었지요. 그래서 '왜 하필 전화가 이 순간에 왔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전화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져서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못 할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담을 다 마치 고서야 알았습니다. 잠수사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제가 한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저희 부부의 건강검진 결과가 저를 심란하게 만들지 않았던 겁니다. 제 죽음을 연상케 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이 제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였습니다(p. 19). 다른 사람들 보기에 우리가 이타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도 우리가 그 일을 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 일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었던 일이 당시에는 바로 그 일이었기 때문에 한 겁니다. 언제나 그랬어요. 잘할 수 없거나 끌리지 않는 일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고 절박해 보여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개입한 일은 오래 할 수가 없으니까요(p. 21). 세월호 피해자가 아니라도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p. 26)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비난과 막말에 자기들도 똑같이 상처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상처 입힌 말이나 30년 전 아기를 잃은 엄마의 가슴을 찌른 비수는 같습니다.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다들 이제 그만하라는 말 때문에 피해자인데도 오히려 죄의식을 느끼고 있어요. '그만해라, 그 정도 했으면 됐다'라는 말 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 슬픔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극단의 고립감을 부추기는 무서운 말입니다. 슬픔 그 자체보다 더 힘든 것이 슬픔을 슬퍼하지 못 하는 거예요. 충분히 슬퍼하지 못하면 결코 그 슬픔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를 가슴 속에 묻어뒀던 많은 분들이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울고 그들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에도 딱지가 앉는 치유를 경험했습니다(p. 27).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벼락같은 이별 앞에 목 놓아 울 수 있어야 나머지 생을 비틀리지 않고 살 수 있어요. 슬픔을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슬픔에 대처하는 법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살면서 한번은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는 삶의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그만큼 압도(p. 31)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울고 있는 내 곁에 이제 그만하라고 재촉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남은 가족을 생각해야지 같은 어쭙잖은 조언 대신 내 눈물이 마를 때까지, 떠난 사람에 대해 더는 할 이야기가 없을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때까지 내 곁에서 산처럼 묵묵하고 바다처럼 먹먹하게 버텨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 수 있고 웃고 싶을 땐 마음껏 웃을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가장 빠르고 단단하게 슬픔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이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치유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진짜 사회안전망입니다(p. 33).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는 시간이 간다고 옅어지지 않지만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 슬픔은 상처의 통증과 함께 고름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그 슬픔이 충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면, 벼락같은 고통이 다 사라지진 않아도 그 상처가 피눈물이나 꽉 찬 고름 같 은 형태가 아니라 뼈저린 그리움 같은 형태로 남아요. 둘 다 아프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고름이나 피눈물 같은 상처는 사람을 뒤틀어서 이후에 맺는 관계를 꼬아놓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뼈저린 그리움은 사람을 뒤틀지 않아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상처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관계를 파괴하지도 않지요(p. 34). 가족을 잃은 고통과 슬픔을 제대로 대면하거나 치유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를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박근혜씨입니다. 그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트라우마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부모의 비극적인 사망 후 그는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슬픔을 삼키며 세월 을 보냈습니다. 정치를 시작하기 전 18년간 썼다는 일기를 보면 박근혜씨는 두문불출 집에만 있으면서 혼자 요가에 몰두하며 지낸 것 같습니다. 요가를 하도 열심히 해서 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설 정도였다고 합니다. 세상과의 관계가 모두 끊긴 채 홀로 지냈던 18년 동안 그는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공감받고 치유받지도 못했(p. 53)습니다. 슬픔이나 그리움, 무력감 등을 통제하기 위해 요가에만 집중했다고 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 사람의 감정은 서서히 마비됩니다. 결국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 단계까지 가면 겉으로는 고통을 이겨낸 듯 초연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극복이나 초월 같은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마비된 병적인 상태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씨가 보인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상처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도 그는 세월호 피해자의 슬픔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국민들이 결정적으로 분노한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씨는 오랜 세월 감정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세월호 피해자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없었을 수 있습니다. 슬픔이 넘쳐나는 경험에서 슬픔을 떼어내고 나면 뭐가 남나요? 감정을 배제했으니 정확한 사실관계만 남는 걸까요? 아닙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살만 떼어가라(p. 54)는 주문이 불가능하듯 슬픔을 유발한 상황에서 슬픔을 소거하면 그 상황을 구성하던 사실의 절반 이상이 사라집니다. 그건 이미 사실이 아닙니다. 상황에 묻어 있는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 채 그 현실을 정확하게 감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접하는 모든 상황에는 사실과 정서가 함께 존재합니다. 감정 기능이 마비되어 정서를 느끼지 못하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그러면 소통이 제 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관계는 당연히 꼬이게 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다음 단추들도 잘못 끼울 수밖에 없듯 감정을 느끼는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 대인관계든 현실감각이든 그 사람이 내리는 모든 판단이나 해석들이 줄줄이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통제하는 버릇이 가져오는 감정마비는 굉장히 큰 문제를 야기하고 끔찍한 일들을 연쇄적으로 불러옵니다(p. 55). 사고로 가족을 여럿 잃은 분에게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지금도 제 슬픔은 자주 드러내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고 후 줄곧 제 평생 다시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가족을 잃는 순간 제 삶에서 온전한 기쁨은 다 사라졌어요. 적극적으로 내 기쁨을 찾을 수는 없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 기뻐요. 그래서 누군가를 위로하는 삶을 살기로 했어요." 가족을 잃은 죄책감 때문에 내 기쁨은 용납할 수 없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 위로받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깊은 지하 동굴에 갇힌 사람이 자기 힘으로 길을 찾아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본 것처럼 울컥했습니다(p. 63).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각자가 처한 환경과 기질, 심리적 상황에 따라 다 다르지만 대개의 자살자들이 목숨을 끊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직면하는 감정은 자기모멸감과 무력감입니다. 죽을 만큼 외롭거나 자기혐오가 심할 때, 절박하게 돈이 필요하거나 통제되지 않는 통증으로 힘들 때 자기모멸감과 무력감은 극대화됩니다. 그럴 때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껏 움츠러들고 쭈그러진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모멸감과 무력감을 더 증폭시키기 때문입니다. 통장 잔고가 충분한 사람은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돈을 빌릴 수 있지만 잔고가(p. 76) 바닥인 사람은 그러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누가 잔고를 확인하자고 하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자기모멸감과 무력감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이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낄 만한 일을 하기란 어렵습니다. 당당하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힘들게 말을 꺼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하고, 세상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채 끝을 맞게 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생을 유지하는 것보다 버리는 쪽이 자기가 지키려 하는 것을 더 잘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p. 77).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 부부의 일상에 미친 영향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는 저축을 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돈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십여년 전 그간 매달 부어왔던 보험들마저 모두 해지해버렸습니다. 세월호 참사 후 안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생계를 위해 하던 일들도 다 그만두면서 가입한 실손보험 하나가 우리 부부의 미래를 대비한 유일한 장치입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생생한 삶의 현실은 노후나 미래를 대비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인지도 모른다는 자각이었거든요. 매 순간 우리 삶에 가(p. 117)장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들숨과 날숨 사이마다 죽음이 어려 있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늘 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돈을 모으는 일은 우리 부부의 삶에서 가 창 불필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지금 여기'만을 삶으로 여기고 살자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영영 못 보는 상황이 될지라도 덜 아쉽고 덜 후회스러운 삶을 사는 것 외에 미래를 대비하는 다른 방도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만 집중합니다. 많이 웃고 많이 느끼고 많이 나눕니다. 평소에 저는 "나는 한 300년쯤 산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그건 아마도 제가 선택한 제 삶의 순간들을 최대치의 밀도로 채웠기 때문일 거라 느낍니다. 두달여 전 어느날, 집에서 함께 이야기하던 저의 연인이자 친구, 반려이자 영원한 배후인 그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정지로 쓰러졌습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날 그 순간 나와 그의 동(p. 118)선이 3분만 어긋났어도 지금 이 시간은 저와 그에게는 없는 시간입니다. 반사적인 CPR과 응급시술, 입원치료를 거쳐 남편은 극적으로 회생했고 그 덕분에 우리의 일상이 다시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두달은 죽음 곁에서 지낸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고 나니 확실해졌습니다. 남편의 심정지 이후 우리 둘은 삶과 죽음에 대한 명료한 결론 하나를 얻었습니다. 죽음을 위한 대비는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없다는 것을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됐습니다. 이번 일을 거치면서 우리 부부는 거의 동시에 "이제는 진짜 죽을 준비가 된 것 같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죽어도 특별한 회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별의 위협 속에서 둘이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을 샅샅이 훑어보니 사랑하고 사랑받은 시간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확인해서입니다. 그걸 확인하니(p. 119) 이제는 언제 헤어져도 준비가 됐다는 마음이 듭니다. 여한이 없다, 미련이나 아쉬운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공포까지 밀어낼 수 있는 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더 정교하게 말하자면 '사랑하고 사랑받았다'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은 삶을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진정한 대비인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여유롭게 자신의 삶을 통째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텐데, 우리는 이번 일을 겪으며 그 시간을 기적처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축복이었습니다(p. 120). 따돌림 피해로 아들을 잃은 엄마에게 주변 사람들이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합니다. Q: 저는 40대 평범한 주부입니다.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으로 중3 아들을 잃은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의 아들을 죽음까지 몰고 간 가해 학생 중 한명은 평소 집에 놀러 오기도 하고 친구가 차려준 밥도 먹고 갈 만큼 아들과 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아들을 잃고 고통과 절망에 빠진 제 친구에게 주위의 사람들 몇몇이 "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가해 학생인 아들 친구를 용서해줘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용서하면 친구가 조금이라도 더 편 안해질까요?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요? A: 우리는 보통 슬픔,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나쁘고 자제해야만 하는 것, 결국은 나를 상하게 만드는 것이(p. 124)라는 생각을 합니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립니다. 남을 해치는 분노도 있지만 나를 지키는 분노도 있습니다. 갑질을 일삼는 사람의 일상적 분노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상대방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일방적으로 자기 감정만 분출하는 행위, 그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심각하게 더럽히고 훼손하는 것이 남을 해치는 분노입니다. 이것은 감정 표현이 아니라 감정 배설이며 심리적 폭력이고 범죄입니다. 절대 하지 않아야 하는 나쁜 일이 맞습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를 지키는 분노는 표출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그 사람 자신이 병이 들거나 망가질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침범당했을 때나 인격적 모욕을 당했을 때의 분노는 표출하는 것이 건강한 행위입니다. 충분히 표출하도록 주변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그 사람의 내면이 훼손되지 않고 지켜집니다.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엄마가 가해자에게 갖는 분노는 정당합니다. 더할 수 없을 만큼 끝까지 분노하고 증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감정을 바닥까지 다 끄집어낼 수(p. 125)있도록 누군가 전적으로 공감하고 함께 분노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분노할 수 있으면 마침내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이 더 쉬워집니다. 그러나 그런 정당한 분노를 막으면서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이미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진 사람을 다시 짓밟는 일입니다. 슬픔에 잠긴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충분히 공감해주지도 못한 상태에서 가해자를 용서하는 숙제까지 안겨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가 당장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마음껏 분노하고 그 마음을 충분히 공감받는 날들이 켜켜이 쌓이면 어느날 가해 학생에 대한 연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줘야 합니다. 용서는 그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용서를 말하는 사람은 트라우마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입니다(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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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상담의 흥미로운 접근 방법, 문학상담
문학상담은 더 넓은 인문상담의 한 분야이다. 인문상담은 철학과 문학을 포함한다. 흥미롭게 읽었다. 상담과 문학,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됐다. 6년간 상담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인본주의 심리학과 인문학적인 토대 위에서 상담에 대한 신념을 구축하게 되었다. • 상담은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인간 능력이 도달할 수 있는 무한한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지향하는 인간들의 노력으로 성장하는 학문이다. • 상담의 기초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인간 전체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에 있다. • 상담이론의 근간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도움을 받으면 개인은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성장심리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 상담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인식하는 주(p. 37)체성을 확립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행자이며 격려자의 역할을 하는 전문가여야 한다. • 결론적으로 상담은 인간의 인간되기를 도와주는 노력 그 자체이다. 인간이 각각 천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독특한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존엄성과 가치를 극대화하면서 성숙한 삶을 이끌어 주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의 시작은 상담이다(p. 38). 나는 더 넓은 지평을 향하는 상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상담은 한정적이고 표면적인 다양한 병리적 증상의 치료와 사회적 적응에 국한하기보다 개인의 전인적 성장을 도모하고 통합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여 행복한 인간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다. • 상담은 개인의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하여 자기 성찰을 통한 자신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주체성을 구축하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넓은 지평을 열어 가야 한다. • 상담 과정에서는 용기를 잃고 좌절하는 사람에게 인문적 자기성찰을 통하여 그에게만 독특한 잠재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여 용기와 도전 정신을 일깨워 주고 격려하여야 한다. • 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선한 본성을 깨닫게 하여 잃어버렸던 자신의 언어와 정서를 찾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형식적이고 수량적인 기준에 얽매여 갈등을 겪는 사람에게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자기를 표현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 상담은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결과가 서서히, 막연하게, 특이하게 나타나는 학문이다. 상담자는 상담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과 사유의 힘을 길러주고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문학적인 통찰력과 표현력을 쌓아 가도록 내담자(p. 53)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상담에 대한 나의 근본 신념과 상담의 특성을 종합하여 '나의 상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상담은 전문적 훈련을 받은 상담자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내담자와 상담 관계에서 상담 언어로 내담자로 하여금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도록 인간과 인간관계의 내면을 인문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다." 이 정의가 상담에 대한 나의 믿음을 잘 나타내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허한 말장난 같기도 해서 나는 나의 믿음대로 상담을 실천할 수 있는 학문적, 실질적 내공이 나에게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청소년대화의 광장 원장을 지낸 박성수 교수가 "상담은 20세기 인류 지성이 발전시킨 최고의 지적 결정이며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정밀하고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상담은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개발해내는 힘과 지혜와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고 표현한 말에서 큰 용기를 얻으면서 '나의 상담'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p. 54). 상담의 핵심목표 : 삶 속의 삶을 찾아서 그동안 상담과 관계되는 다양한 일을 해오면서 나는 '내담자들이 왜 상담을 받으러 오는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내담자들은 두 가지 이유로 상담을 받으러 온다고 확신한다. 첫째는 '되고 싶은 자기가 되기 위해서', 즉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싶어서 상(p. 56)담자를 찾는다. 둘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하고 싶기 때문에', 즉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하여 자기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인식하기 위하여 상담을 받으러 온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 '되고 싶은 자신'이 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상담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상담은 의미 있는 삶을 찾으려는 인간의 가치 지향적인 목적에서 출발하여 인문적 자기성찰 과정을 통해 그 목적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나아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본성과 잃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언어를 찾도록 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상담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천착하는 인문학의 기본 가치'를 토대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과정은 언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언어의 예술인 문학의 효율성'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급변하는 현대사회는 인간을 무한 경쟁의 세계로 몰아가면서 광속의 속도로 인간이 움직여 주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본인의 능력과는 관계도 없이 쓸데없는 열등감과 쓸데없는 우월감에 시달리고 고통받으면서 자신의 주체성이 흔들리고 타인과의 관계성은 메말라 가고 있다. 튜더는 한국인들은 엄청난 경쟁 속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고 있는 열등감과 우월감 속에서 기적을 이루(p. 57)기도 했고 그 경쟁 때문에 기쁨을 잃어 가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상담은 경쟁 세계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인문적 자기성찰을 통해 삶 속의 삶을 찾을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특별한 상담 관계를 통해서 내담자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재능을 인식하고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벗어나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고 자신의 언어를 찾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p. 58). 인문상담의 근본 핵심목표는 인문적 자기성찰을 통한 자기성장에(p. 68)있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상담의 근본이라고 믿고 있다. 상담자는 내 담자로 하여금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문적 자기성찰을 하도록 이끄는 안내자이며 격려자이며 동행자 역할을 하는 전문가이다. 그래서 나는 상담에 인문학을 접목하여 인간을 보다 입체적이고 다각적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상담의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인문상담'이라고 부른다. 인문상담은 각자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개인의 참자아를 탐색하고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담 과정이다. 인문상담은 개인의 다양한 병리적 심리 상태를 해소하고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존의 상담 수준을 넘어서 개인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문상담의 이러한 창의적인 상담 방법은 우리나라 상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인문상담의 대상은 다양한 이유로 일상생활에서의 적응이 어려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인존재의 의미와 가치, 죽음, 소외, 고독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통찰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인문상담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인문상담의 이러한 특성은 바로 인간은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무궁무진한 잠재능력과 인간만의 존엄성과 가치와 권리를(p. 69) 내부에 간직하고 있으며, 이 요소들을 찾아서 충분히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존중 상담의 원리, 목표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상담의 각 영역, 예컨대 발달단계별, 대상별, 주호소(증상)별로 실시하는 상담의 이론과 실제에 인문적인 정신, 곧 심리 문제보다 더 큰 인간 실존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을 근본 원리로 하여 진행하는 상담이 곧 인문상담이다(p. 70). '문학적인 상담'은 '문학적으로 상담을 한다'는 의미이다. 언어의 예술인 문학은 허구적인 삶의 다양한 형태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사람이 처한 환경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독자들의 예술적인 감동을 자아내고 그 은유의 빛으로 독자들이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는 예술이다. 언어를 매체로 하는 상담은 실제적인 삶 속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신체적, 심리적, 사회(p. 73)적 문제를 위시하여 삶과 죽음의 실존적인 문제까지 다루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찾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분야이다. 인간의 주체성 확립과 관계성의 회복을 주제로 하는 문학과 상담이 추구하는 목적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문학과 상담을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한다면 상담을 더욱 깊이 있고 차원을 높이며 상담의 지평을 넓혀주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의 내용에는 상담의 주제가 포함되어 있고 상담 과정과 내용에는 문학적인 특성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문학의 특성을 활용하는 상담을 '문학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p. 74). 그렇다면 문학은 상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문학은 상상의 이야기이고 상담은 실제 삶의 이야기인데 이 둘이 어떻게 서로 만날 수(상호보완) 있는가? 문학상담이 가능한 것은 문학작품 속에 상담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들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 가고자 하는 상담 과정의 내용이 문학작품 속에서는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다. 더 나아가 문학은 상담 과정에서 빠질 수 있는 경험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인생 체험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기술하는 문학은 구체적인 묘사로 우리의 몸과 감정, 정서를 건드리면서 우리의 체험을 일깨워 준다. 상담 과정에서는 상담 언어로 살아 있는 경험이나 구체적인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우리의 체험을 일깨워 준다. 문학상담에서는 상담 과정을 좀 더 깊이 있고 차원을 높이기 위한 매체로서 문학작품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문학감상이나 서평과는 다르다. 문학상담에서 문학작품을 활용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품의 내용에 반영되어 있는 저자 또는 주인공의 문학적 은유(p. 83)를 음미하고 문학적 담론을 상담적 담론으로 바꾸어서 자유로운 자기 성찰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상담의 접근은 문학적 사고와 표현력과 통찰력의 훈련을 위해서도 기능할 수 있다. 문학상담에서 '문학'이란 반드시 문학작품만을 뜻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학의 근본인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모든 언어활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김대행 교수는 그의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문학이란 일상이라고 설명하면서, 우리가 하는 말과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했다. 문학은 '우리가 쓰는 언어'를 쓰며, 문학 안에 담긴 삶은 '우리 삶', 즉 '일상적 삶'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보다 정교화되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문학상담은 그런 말과 이야기를 통해 상담을 하는 것이다(p. 84). 문학상담의 특성 문학상담의 특성은 상담의 과정과 내용에 있으며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설명한다. 첫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문학작품을 활용하는 것이지 문학작품을 비평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상담은 문학작품 속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내적인 갈등을 포함한 다양한 문제를 상담의 과정에 대입하여 문학작품의 은유를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는 상담의 모든 활동을 뜻한다. 둘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언어활동인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정교하게 문학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에서 언어활동을 활용하여 내재된 잠재력을 실현하며 성장하는 총체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돕는 모든 활동을 뜻한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로 구현되는 문학활동을 통해 한 인간의 자기서사(Self-narrative)를 재발견하고 재구성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세계-내-존재'로서의 의미를 새롭게 형성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p. 91). 셋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문학작품이나 언어활동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상담이다. 넷째, 문학상담은 문학작품을 매개로 자신의 감정과 신념이 녹아 있는 자기서사로 읽어내고 그 서사에 부여된 의미와 새롭게 부여할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 그리고 환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참자기를 찾는 것과 또한 위기와 갈등을 자기 됨의 필연적 부분으로 파악하고, 자기 자신을 언어화함으로써 삶의 부조화와 분열을 극복하도록 돕고 발달과 성숙을 통한 총체적 성장을 돕는 것이다. 다섯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내담자의 표면적인 증상을 뛰어넘어 실존 문제(죽음, 고독, 분노, 용서, 선택, 생의 의미 등)를 토의하고, 내담자를 '전체적인 인간'으로 대하면서 그 결과로 인생의 의미, 인간적인 성장, 자기다운 삶의 보람을 깨닫는 경험을 얻도록 한다. 내담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인간의 실존 문제를 고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문학상담은 인간중심상담이고 실존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적 수용, 공감, 명료화, 적극적 경청, 상호신뢰, 진정성, 한결 같음 등은 인간중심상담에서 추구하는 것을 문학정신으로 하는 것이다. 실존적 상담에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심리적 삶의 세계에 있는 추(p. 92)상적이고 철학적인 이슈들을 검토하고, 상담의 기술보다도 삶과 죽음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선호한다. 문학상담에서는 인간중심상담과 실존상담에서 추구하는 요소들을 융합하여 문학적으로 상담 과정과 내용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일곱째, 문학상담에는 특별한 매뉴얼이나 정해진 기술은 없으나 상담사례를 정확하게 기록하여서 문학상담의 효과를 검증한다. 문학상담의 과정을 통해서 내담자는 문학작품 속에서 얻은 '시간'과 '감정'과 '자기존재의 의미와 이해에 관한 새로운 지평'에 대한 '앎'을 '삶'의 현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학상담은 내담자에 따라 창의적인 방법으로 진행되며 결과는 다양하기 때문에 통계적 처리로는 그 결과를 측정할 수 없다(p.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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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의 지혜
이 책의 저자는 호스피스 의사이다. 수많은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일이 없는 것처럼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한다’는 것이 큰 울림을 줬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됐지만 찾아서 읽어볼만한 책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편안하게 삶을 끝내는 환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웰다잉 지도자 자격증도 보유하지 않았고, 입관 체험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전 의료 지시서나 유서 등으로 삶을 미리 정리해둔 사람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 가지는 '나쁜 소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고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한 가지는 '긍정적인 죽음관'이다. 죽음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죽음관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 보냈거나 죽음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자식을 앞세운 사람이나(p. 37) 장애인이 남들보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져서야 죽음에 대해 생각한 다. 긍정적인 죽음관도 나쁜 소식을 안 후에야 가질 수 있다. 나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죽음관도 없는 셈이다. 문제는 가족 사이의 정이 두터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쁜 소식을 알리는 걸 힘들어한다는 사실이다(p. 38). '나쁜 소식을 알면 빨리 죽는다'는 근거 없는 상식은 환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친다. 가족들은 자신의 병명을 모른 채 고통스럽게 떠나는 환자를 통해 죽음은 힘들고 무서운 것이라 인식하게 되고, 환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기회마저 놓 쳐버린다(p. 45). 죽음을 외면하는 진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등 뒤로 다가온 나쁜 소식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쁜 소식 그 자체가 불행은 아니다. 나쁜 소식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 않기 위해선 떠나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슬픔을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 머릿속이 하 얗게 화하는 것 같은 슬픔이 지나가면 평온이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떠날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에 서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응어리진 일에 관해 화해하며 서로의 슬픔을 애도하고 위로할 것이다. 그것이 진짜 해피엔딩이다(p. 49). 암 환자의 분노에 가장 좋은 대처 방법은 무조건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다. 분노가 사그라져야 삶도 보이고 죽음도 보인다. 그때 비로소 암(p. 75)성 통증도, 삶의 통증도 치유된다. 그래도 그에게 다가온 죽음을 내쫓아줄 수 없으니, 의사로서 나는 늘 미안할 뿐이다. "낫게 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아프지 않게 해드릴 자신은 있어요." "선생님이 미안해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 병이 원래 그런걸요. 아프지만 않으면 되죠." 환자는 미안해하는 의사를 도로 위로한다. 그들의 분노는 의료진을 향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향한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오면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멀어버리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그 한마디에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통찰력이 생기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오늘도 나는 나의 환자들에게 미안하다(p. 76).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어떤 경우라도 삶의 의미를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호스피스가 하는 일도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다. 사는 것이 서툴러 노숙자가 된 사람, 돌봐줄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 너무 일찍 찾아온 병마 때문에 생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사람.... 그가 누구든 어떤 삶을 살았든, 인생의 마지막은 석양처럼 눈부셔야 한다. 우리가 서로의 어둠에 물감이 될 때 마지막 남은 인생에 황금빛 석양이 비춰진다. 그때 컬러풀 호스피스가 완성될 것이다.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p. 129).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1964년에 발표한 《죽음의 춤》이라는 책에서 암과 싸우는 어머니의 고통을 차분하게 묘사했다. 마약성 진통제가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보부아르의 어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엄청난 통증과 맞서 싸워야 했다. 보부아르는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 며 "사람이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라고 썼다. 톱니바퀴로 배를 자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것은 보부아르의 말처럼 무엇으로도 정당(p. 173)화할 수 없는 폭력일 것이다. 나는 호스피스 의사로서 당부하고 싶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 모르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나는 신이 우리가 아프지 않게 죽어가기를, 그리하여 죽음의 맨얼굴을 응시 하기를 바랐을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죽음의 맨얼굴은 평화롭다. 다만 통증 때문에 죽음이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왜곡되었을 뿐이다.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p. 174). 과일에 씨가 들어 있듯 우리 안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죽음은 나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 함께 잉태된다. 그러나 철학적인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의학적인 죽음이 다가오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맥없이 휘말리고 만다. 흔적조차 없이 소멸될 육신, 흔 자 내던져진 듯한 외로움, 암성 통증의 공포, 돌아갈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향수.... 삶은 힘들고 암과 함께 가는 삶은 더 힘들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난 말 한마디, 따뜻한 스킨십이 환자의 절망감과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외로움을 치유해야 한다. 호스피스 활동은 우리가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고 타인의 외로움을 껴안는 방법이다. 우리가 내적 자아를 만날 때, 그리하여 스스로를 더 사랑할 때, 우리의 외로움과 타인의 외로움을 보듬어 안을 수 있다(p. 189). 돌이켜보면 참 극성스럽게 살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선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다그쳤다. 살다 보면 도움이 되려니 싶어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도 이것저것 배우게 했다.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여가며(p. 205)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끌고 다녔고, 애들이 피자나 햄버거를 먹고 있으면 당장 큰 병에라도 걸릴 것처럼 야단을 치며 현미 채식을 하게 했다. 내일 편하기 위해 오늘을 피곤하게 보내라고 강요했고, 내일 건강하기 위해 오늘 맛있는 음식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어리석은 엄마에게 모든 것의 초점은 내일이었다. 어쩌면 없을지 모르는 내일을 위해 지금 있는 오늘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는 집 안을 덜 쓸고 덜 닦는 대신 그 시간에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어도 영화를 보러 나간다. 아이들에게 성적표에 적힌 숫자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고 공부하는 동기에 대해 묻는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일을 줄인다.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일을 포기하면 뜨거운 오늘이 있다. 나중에 행복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게 아닐까. 오늘을 즐기는 사람은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삶도 즐길 수 있다. 이 순간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이다(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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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정신과 의사가 밝히는 ‘상담이란 무엇인가?’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때 정부가 이것을 어떻게 덮을려고 어떤 만행을 했는지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결국 박근혜는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탄핵됐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가한 집단과 인간 군상들이 있었다. 반면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아예 거처를 안산으로 옮긴 이 책 저자같은 정신과 의사도 있었다. 많이 동의하며 읽었다. 의사라는 절대적 권위가 보장된 곳에서 나는 사람에 대한 입체적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신과 진료실을 떠나고 한참 지나서야 그걸 알았다. 진료실에 있는 동안에는 사람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입체적인 탐구에 게을러도 그닥 불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신의학 지식과 약 물치료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상담도 잘하고 싶었고 어떤 사람의 핵심적인 문제를 빠르게 파악해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도 싶었다.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의 비대칭적 구도와 지나치게 의료(p. 10)적이고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한 인간의 핵심에 제대로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진료실의 환자는 의료적• 병리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철학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영적 존재이자 예술적 존재이고 물질적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정신과 진료실 구조 안에서 자신의 '환자'를 그렇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진료실 구조 안에 있을 때 나도 그랬다. 진료실은 내 의식과 인식을 제한했다. 물론 내담자도 제한당했을 것이다. 진료실 무용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진료실 안의 심리적 구도와 공기를 바꿔야만 그 안에 있는 의사나 환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극단적일 정도로 진료실 문제를 거론하는 건 진료실을 떠난 후 내가 정신의학 방면의 직업인으로서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그간의 경험 때문이다. 진료실이 아닌 세팅에서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면서 나는 삼십 대의 안개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섬세하고 더 과감한 상담도 가능해졌다. 그토록 원했던 상담 후의 개운(p. 11)함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내담자들이 느끼는 홀가분함도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고 피부로 느낀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용한 의사가 된 것 같다. 재벌 회장이나 대통령 후보인 정치인을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들을 때, 고문생존자나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서 촛농 눈물 같은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무차별하다. 한 개별적 인간에게만 집중한다. 그런 순간 나는 예전 진료실의 의사였을 때보다 유능하다. 나와 상담한 이들의 변화와 반응을 보면서 그 사실을 순간순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진료실 밖 현장은 나의 스승이다. 그런 스승들로부터 사사받고 있고 그래서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이제 나는 더 따뜻하고 더 편안하고 더 수월하게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정신과 후배들에게도 말하곤 한다. 진짜 실력을 키우려면 병원에 있지 말고 현장으로 나오라고. 흰 가운도 없고 전문가 아우라를 지켜주는 어떤 장치도 없는 곳에서 수평적인 관계의(p. 12) 개별적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는 이는 스승이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통찰이 생기는지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의사가 아니고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의사로서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람'이 될수록 탁월한 치유자는 절로 된다. 오랜 현장 치유자의 경험으로 가지게 된, 신념에 가까운 믿음이다. 나의 진짜 사람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공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p. 13). 상담이란 건 기본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 자기 고통에 집중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갖는 깊고 집요한 감정은 다름아닌 죄의식입니다. 내가 죽인 거다, 나 때문이다, 그런 감정과 생각에 마치 늪처럼 빠져들어요. 내가 수학여행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더 힘있는 부모였더라면, 내가 안산으로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 이런 끝도 없는 '내 탓'으로 초주검이 됩니다. 생존학생이나 유가족들 거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이죠. 그런 죄의식이 너무 크면 사람은 '자기처벌'을 합니다.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는 거죠. 자기를 보호하지도 않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심리상담도 하기 어렵고 몸이 아파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지요. 피해자들의 이런 어마어마한 죄의식을 심리적으로 잘 다루지 못한 상(p. 33)태에서는 심리치유가 한발짝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 점을 간과한 채로 이루어졌던 사고 초기의 심리치유 대책들은 그러니까 피해자 개인에게는 와닿지 않는 행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거죠(p. 35). 트라우마 피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트라우마 피해자는 '외부적 요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유지해오던 심적•물적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 처한 사람이에요. '심리내적 요인'(자기 상처 등)으로 인해 생긴 정신과적 질병을 가진 정신질환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퍽치기를 당해서 머리를 다쳐 중환자실에 입원(p. 42) 하게 된 사람이지 본래 고혈압 환자였다가 중풍으로 쓰러진 사람이 아니란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마치 원래부터 환자였던 사람 취급을 하면서 치료를 하려 들면 안 되는 거죠.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당장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상담을 받고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마음을 여는 행위는 당위적인 이유로 되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설득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환자화(化)하는 듯한 전문가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자아가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저는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봅니다. 멀쩡했던 아이가 하루 아침에 그렇게 돼버렸고, 내 삶은 진흙탕 속으로 처박혀서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버렸어요. 세상이 다 무너졌는데, 정신과 환자가 되어서 나조차도 다 망가져버린 느낌(p. 43)을 가지는 것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나요.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명백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너졌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나는 정신과 환자가 아니다, 단지 힘든 상태에 처한 것일 뿐이다, 라고 느껴야 무너져내린 세상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치고 일어날 최소한의 힘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남아 있는 힘을 확인할 수 없으면 트라우마 치유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갑자기 자신을 정신과 환자 취급하는 전문가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저는 건강한 자아가 작동하는 증거로 봅니다. 세상이 무너졌는데 나까지 망가졌다고 느끼면 피해자는 더 버틸 기력이 없어요. 결국엔 삶을 놓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트라우마 피해자, 생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이들을 대하는 모든 치유행위의 전제가 되어야 해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트라우마 피해자를 정신과 환자로 취급하는 모든 행위는 피해자 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건강한 자아의 힘에 상처를 입히(p. 44)는 거예요. 그 사람이 치유과정 중에 발휘해야 하는 자기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아요. 고백 하건대 정신과 의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환자로 치환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키워진 전문가들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을 치유하는 데 이런 시각은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고 장애물입니다. 나는 이 질병에 대해서 다 알고 깨우친 자, 너는 병들고 모르는 자,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와라. 이건 명백하게 반치유적인 시각이에요. 의사가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쉽게 그렇게 됩니다.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시작한 일이 거꾸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는 거예요. 저도 여태 죽을힘을 다해서 저항하고 성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p. 45). 그렇다면 트라우마 피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유가족들에게 상담받으라고 등 떠밀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극도의 혼돈 속에 있는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껏 자기가 구축해온 모든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지만 나 자신까지 무너진 건 아니라는 걸 확인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심리적•물리적 폐허 속에서도 그 사실을 최소한의 기반으로 삼아서 일어날 수 있습니(p. 46)다. 그 힘이 있어야, 그게 살아 있어야 전문가의 도움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자기면역력이 전혀 없으면 의 사가 아무리 좋은 항생제를 투여해도 병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p. 47).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상황에 대한 자기주도권을 찾을 수 있고, 그래야만 비로소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이 생깁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문제에 대해 전문가와 상의할 수도 있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요. 불안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자기 의지가 그때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람이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울 때는 예측 불가능할 때 입니다. 혼돈과 불안이 극심해지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일어나고, 그에 압도되면 마침내 탈진하고 말아요. 무력한 상태로 추락하는 거지요. 이런 상황으로 치닫지 않 도록 막는 것이 트라우마 현장에 있는 전문가가 할 일입(p.48)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서는 제대로 된 치유는 시작도 할 수 없어요(p. 49). '상담이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내 전공은 무슨무슨 심리치료 기법이다'라며 상황보다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몰입이 더 강한 경우가 현장에서 심리상담이나 정신의학이라는 학문을 더 쓸모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이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전문지식이 현장에서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다면 그때의 전문가란 무엇일까요. 그가 그간 공부해왔던 공부는 그럼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본래 지니고 있는 무의식적 건강성, 온전함이 있습니다. 저는 병원 상담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던(p. 55) 시절보다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들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확신이 더 또렷해졌어요. 끝 간 데 없이 추락하다 벼랑 끝 나뭇가지에 간신히 걸린 듯한 아득한 존재들을 만나면서, 어쩌다 한순간에 지옥 같은 곳에 처박힌 삶들을 접하면서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확인했어요. 그것이 궁극적인 치유의 동력이자 치유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젠 한톨의 의심도 없이 확신합니다. 그래서 치유란 그 사람이 지닌 온전함을 자극 하는 것, 그것을 스스로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그 힘으로 결국 수렁에서 걸어나올 수 있도록 옆에서 돕 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거죠. 내가 가진 전문가로서의 역량이 있다면 오로지 그걸 하는 데 모두 쏟아야 한다고 느껴요. 내 지식, 내 힘, 내 명민함, 나의 분석과 계몽, 내가 배운 치유기법 등으로 사람이 구해지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고 기능적인 존재가 아니니까요(p. 56). 아무리 빼어난 이론이라도 이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그것이 가장 근원 적인 치유적 태도라 생각해요. 울어야 할 상황인데 울지 못하면서 생기는 복잡하고 초조한 마음, 자신에 대해 드는 이상한 생각들, 그런 것들을 알아주고 공감해줄 수 있 어야 편안하게 울 수 있어요. 울어야 한다고, 안 우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고 채근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면 저절로 울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론 너머의 이론이에요. 그런데 치유라는 것이 어떤 것이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 이론적인 틀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접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공부한 것 때문에 방해를 받는 거예요. 공부가 덫이 되는 거죠. 사람의 마음을 공부한 사람들, 그런 지식이 많은 사람(p. 72)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p. 73). 사람 마음에 대한 진짜 공부를 원한다면 우선 자격증에 대한 이상화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짜 공부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요. 사실 자격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상당 부분 이런 자격증 중시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격증이나 학위, 자기 실력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가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심리상담과 관련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도 별도의 수련 기간이 따로 있고요. 그 끝에 얻는 것이 관련 자격증입니다. 그런데 자격증이 있어도 직업적 전망이 매우 암울한 수준인 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손에 잡히는 뚜렷한 열매가 없는 길을 다른 분야보다 더(p. 122) 오래, 더 많은 비용을 들이며 공부하다보니 자기가 가진 자격증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그 학문이나 이론에 대한 보수화 경향이 더 강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는 것에 매우 심하게 저항할 수밖에요. 그러다보니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한 공부, 내 자격증의 효용성 자체에 더 많이 몰두하기 쉽습니다.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 대한 생생하고 뜨거운 집중과 주목 없이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요. 전문가 집단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건 그동안 현장에서 이런 모습들을 너무 많이 접했고 그러면서 깨달은 경험칙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진짜 공부가 하고 싶다면 너무 고생스럽게 학위를 따는 건 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게 의미없다는 게 아니고 자격증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p. 123) 봐왔습니다. 학문과 학위에 대한 이상화 또는 불필요한 거품을 걷어낼 수 있다면 진짜 공부에 접근하는 것이 더 수월할 거라 생각합니다(p. 124). Q. 세월호 참사와 같은 트라우마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심리적 문제와는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트라우마에 대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은 없을까요? A. 유가족 부모들이 아이가 떠났다는 걸 빨리 인정해야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도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많은 분들이 합니다. 그런 얘기들 때문에 유가족들이 계속 상처를 받고요. 그게 왜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지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기억이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억이란 끊어낸다고 해서 끊어지는 게 아니죠. 사고가 나서 다리나 팔을 절단한 사람이 수술 후 마취에서 막 깨어나면 절단해서 없어진 부분에 통증을 호소한다고 했잖아요. 이런 걸 '환상통'이라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없어졌어도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붙어 있는 거죠. 기(p. 134)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종료되었다고 마음에서도 딱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나 컴퓨터죠.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서 영화를 보여주는데 한 집단은 영화를 끝까지 다 보여주고 다른 한 집단은 결말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수개월 뒤에 이 두 집단에게 그때 봤던 영화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집단이 더 분명하게 기억할까요? 영화의 결말을 보지 못한 집단이 영화에 대해 더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 집단은 처음부터 결말 까지 다 보았기 때문에 완성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단은 완성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결말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는 거죠. 사람은 욕구가 충족되면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거기서 계속 멈춰 있게 되고요. 모든 인간은 완료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갑자기 자녀와의 관계가 뚝 끊어져버린 거예요(p. 135). 그러니 완료되지 않고 도중에 중단된 그 관계를 마음 안 에서 충분히 완료할 수 있도록 곁에서 심리적으로 도와줘야 해요. 그래야 이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도의 과정이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애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애도하려고 하면 불안해서 막아요. '이젠 그만 울어야지, 이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말해요. 어떻게 보면 유가족 입장에서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만큼 하고 싶은 얘기가 또 없어요. 그런데 누구하고도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으면 혼자 생각하고 곱씹고 또 곱씹게 되죠. 결국 평생 그 기억 언저리에서 배회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한 한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가족들이 아이에 대해 더 얘기하고, 더 많이 느끼게 해서 마음속에서 완료되지 않고 중단된 것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해요(p. 136). Q. 전공서적을 모두 정리하고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만 남겼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는 데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이 도움이 되나요? A. 그럼요. 심리학 공부를 하다보면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 그들이 주창한 개념과 틀을 중심으로 사람을 분석 하고 해석하게 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이론과 개념이 전부인 것처럼 절대화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사고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전문가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아무리 탁월하고 근본적인 이론이라 해도 어느 한 학자의 개념과 틀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이 얼마나 많고 깊은데요. 사람을 깊이 접하는 시간이 많아 질수록 그런 사례를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p. 143).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니 이해하고 접근하기가 막연하고 모호합니다. 어둠 속을 걸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지팡이가 있으면 그에 의지해서 주위를 천천히 더듬으면서 감을 잡고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할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둠 속에서 내 시력으로도 주위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면 지팡이 끝으로만 세상을 인지할 필요가 없잖아요. 내 눈을 통해서 내 주변이 어떠한지 통합적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끝'으로 더듬어 세상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도구가 심리학 지식이라면, '내 시력'으로 세상을 '통합적으로 인지하는' 강력한 도구가 문학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분적이기보다 통합적이고, 분석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입체적 입니다. 인간을 유형으로 말하지 않고 한 인간의 개별성에 끝까지 집중합니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인간에 대한 치유적 접근에 적합한 도구입니다. 심리학 공부는 지팡이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p. 144). 정신의학, 심리학 분야도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 중심, 학문과 학파 중심의 전문가가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 중심의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전문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걸 치료가 아닌 치유의 영역이라 명명했습니다. 치유의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이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죽기 전날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특급호텔의 요리를 꼽는 사람은 없습니다. 엄마가 해주었던 김치찌개나 어릴 때 외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같은 것을 떠올리겠지요. 전문가(p. 149)적 치료가 칠성급 호텔의 요리라면 엄마나 외할머니의 밥상이 치유입니다. 우리가 모두 요리사 자격증을 가질 수 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요리를 못 먹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집밥을 오래 못 먹으면 심리적으로 황폐해집니다. 전문가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삶에 그닥 관계없는 분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일상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삶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빛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다, 그걸 아는 게 사람 공부의 끝이고 그게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그게 사람 공부에 대한 제 결론입니다(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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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자기 주변 물건에 대한 사색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물건들과 함께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물건들과 인간 사이에는 서사가 생긴다. 저자도 책에서 밝힌대로 나이를 먹으니 물건을 덜 사게 된다. 사람과도 사물과도 관계 맺는 것이 번거롭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과 관계 맺지 않고 심플하게 살고 싶다. 고대 철학의 역사를 가볍게 풀어낸 책 《그리스 철학사 1》에서 저자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는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페피노 루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소 할아버지는 대학교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쓰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인생철학'은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고대의 물활론의 연장선에 있다. "공장에서 만들어 낸 모든 장난감이 즉시 영혼을 갖는 것은 아니오. 천만의 말씀이지. 그 순간에는 그저 단순한 물건일 뿐이오. 그런데 어떤 어린애가 인형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의 영혼이 플라스틱 사이에 스며들어 생명을 가진 물건으로 바뀌어 가는 거요. 그렇게 되면 비록 부서지고 상처 난 인형이라 하더라도 버릴 수 없는 생명체 로 바뀌는 거고 말이오" 나는 이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사람이 홀로(p. 20)선다는 것이 나를 아껴 준 사람의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라면 곧 나를 아껴 준 사람의 영혼과 작별하는 일일 터이다. 그래서 단번에 할 수 없고 세월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물건과 오랜 시간에 걸쳐 나날이 작별할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나라는 사람. 나는 그 아침, 이 가혹하고 부조리한 진실을 깨닫고 눈앞이 빙빙 돈 것인지도 모른다. 늘어나는 책들을 입주시키기 위해 어떤 책장을 마련할 것이냐 하는 고민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그 고민은 고스란히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과정 일터. 나는 책이 든 상자를 성급하게 풀지 않겠다(p. 21). 친구들의 하소연에서 시작된 비공식 탐구에서 나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바람을 얻었다. 엄마가 물려준 살림살이가 우리의 주방을, 아니 집 전체를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에서 영영 멀어지게 만들어도 딸들은 살림살이를 모으며 취향을 키우고 만족감을 느꼈을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엄마들은 그 귀한 살림살이를 당근에 내놓자고 설득하는 딸들을, 혹은 몰래 내다 파는 딸들을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 저 나름대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터이다(p. 48). 마음에 꼭 들지 않으면 사지 않기,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워지는 물건을 사기, 그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물건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남에게 주거나 버리기. 가만 보니 이 원칙은 새 인연을 만들 때도 쓸 수 있겠다. 특히 폐기가 쉽지 않은 인연을 맺으려는 사람들은 꼭 참고 바란다(p. 107). 한편 부모 잘 만난 번역 프리랜서가 뜨끈한 방구석 책상 머리에 앉아 맥이 어쩌고 윈도우가 저쩌고 인간성이 어쩌고 주체성이 저쩌고 할 때, 다른 한편에는 화장실에 갈 시(p. 140)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터에서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하루 일해도 하루 먹을 임금조차 주어 지지 않는다. 인간은 때가 되면 먹고 때가 되면 배설을 해야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기계에 끼이면 팔다리가 잘리고 높은 데서 떨어지면 죽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 취급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으려는 세력은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하고 우리와 남을 구분해서 착취를 합리화한다. 이는 인간 역사에서 무수히 되풀이되었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1세기가 되면 로봇이 반란을 일으킬 줄 알았건만 반란은커녕 기계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날은 요원하고 일단은 인간의 밥줄을 위협하는 중이다. 한쪽에서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고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의 디자인을 따지는 사람이 있으며 또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에 사람이 깔려 죽는 지금, 지금은 2022년이다(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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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재미로 하는 독서가 행복을 준다
- 전직 판사 문유석 작가의 독서에 대한 책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독서가 쾌락이었다고 했다. 동감이다. 공부할 때는 억지로 읽어야 하는 책들도 있지만 나만해도 이제는 재미로 읽는다. 재미있는 게 많은데 굳이 재미 없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고역일 것이다. 내게 독서가 재미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쯤 되니 독서를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한 나 자신이 무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도대체 『책은 도끼다』 같은 책은 어떻게 쓰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 폭포수 쏟아지듯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당최 그 정(p. 83)도로 섬세한 감성이라고는 타고나지 못한 시큰둥한 나 자신을 잠시 원망해보았지만, 뭐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독서도 이런 독서도 있고 저런 독서도 있는 거다. 카프카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쳐서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는 거냐며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일갈했지만, 수사법은 수사법일 뿐, 책은 도끼일 수도 있고 심심풀이 땅콩일 수도 있고 잠을 재워주는 수면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책마다 사람마다 다양한 용법이 있기 마련이다. 심심풀이 땅콩 얘기를 하고 보니 내가 청소년기에 길고 긴 소설을 좋아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릴수록, 젊을수록 하루도 길고 일 년도 길고 남아 있는 살아갈 나날은 끝도 없어 보였다. 시간은 언제나 무한정 남아도는 백사장의 모래알 같은 것이었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재미있는 소설 하나를 발견하면 "우와, 한동안 재미있겠다!" 하며 신이 났고, 게다가 그 소설이 열 권 스무 권 밑도 끝도 없이 길기까지 하면 두고두고 퍼먹을 꿀단지라도 발견한 기분이였던 것 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달라져버렸다. 대하소설은커녕 조금만(p. 84) 두꺼운 책 앞에서도 멈칫거린다. 사실 읽자면 지금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텐데 지레 겁을 먹게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루도 짧고 일 년도 휙휙 지나가고 남아 있는 나날이 벌써 손에 잡히는 것만 같다. 내일이 없는 사람마냥 여가가 생겨도 그저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먼저 이리저리 찾다가 오 히려 아무 재미도 없이 흘려보내고 말 때가 많다. 열 권 스무 권짜리 책을 잔뜩 쌓아놓고 마루를 뒹굴거리며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던, 해가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던 8월 여름방학의 나날들이 그립다(p. 85). 편식 독서법 책 수다도 많이 떨고 여기저기 독후감도 올리고 하다보니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나의 답은 '대충 읽는다' '내가 재미를 느끼는 부분 위주로 읽는다'다. 편식 독서법이랄까. 엄마가 억지로 먹으라는 토란국은 국물만 몇 수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소시지야채볶음은 소시지만 쏙쏙 골라 먹는데, 운좋게 킹 크랩을 먹게 되면 마지막 다릿살 하나까지 꼼꼼히 발라먹기 마련이다. 모든 음식을 똑같이 정성스럽게 먹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부분만 먹고는 다음 음식으로 넘어간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부위는 천차만별. 난 내(p. 167) 취향의 책을 골라서, 그 책 중에서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휙휙 넘기며 읽는다. 어떨 때에는 한 책에서 단 한 장면, 단 한 구절만 맛있을 수도 있고, 기적같이 한 문장 한 문장 전부를 꼭꼭 씹어 먹으며 맛있어할 수도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계속해보겠습니다』, 『아랑은 왜』 『청춘의 문장들』이 쫀쫀하게 모두 맛있는 책들이다. 다만 내 취향의 '편식 독서'라도 많이 하다보면 점점 그와 연관된 다른 메뉴들도 찾게 되는 것 같다. 음식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같은 이치로 읽어봐도 선뜻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 책은 잘 읽지 않는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책도 백 번, 천 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 순간 뜻이 스스로 통한다고 믿었다는데,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랬던 것 은 아닐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지식과 정보가 쏟아져나오는 시대다. 꼭 그 책이 아니어도 비슷한 내용을 더 쉽게 설명하는 다른 책들이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책을 백 번 천 번 읽고 있는 사이에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세상 자체가 달라져버린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 원전 읽기'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에 회의적이다. 지금의 세계를 이루는 사상적 기틀인 『국부론』, 『자유론』, 『법의 정신』, 『통치론』 같은 명저들도 결국 그 책들이 쓰(p. 168)인 시대의 과제를 그 시대의 언어와 감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명저라도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고 그 시대에만 의미 있었던 부분도 많다. 우리가 취할 것은 그중에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진 몇몇 부분들인데, 그런 부분들은 실상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우리가 수업시간에 졸아서 그렇지 이미 다 배운 '상식'인 것이다. 그보다는 더 깊이 있게 알고 싶다면 현대의 연구자들이 고전의 핵심들을 알기 쉽게 현대의 언어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서들도 얼마든지 많다. 유시민 작가가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고 규정하는데,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왜 소비자들이 직접 도매상, 심지어 공장까지 가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물건을 떼와야 하나? 내 아이 밥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올리기 위해 직접 도축장에서 고기를 해체해야 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원전 목록이 아니라 그중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하지만 왜곡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지식 소매상들의 목록이다. 소매상일수록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잘 골라야 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도 필요하긴 하다. 그렇다고 소매상은 미덥지 않으니 소비자들이 직접 원산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무리한 이야기다(p. 169). 외국어 학습법에도 이런 이론이 있다. C.I.와 M.I.가 중요하다는 이론이다. C.I.는 Comprehensible Input, 즉 자기 수준에서 슥 읽어서 70~80퍼센트 쉽게 이해되는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면 나머지 모르는 20~30퍼센트는 뇌 속에서 유추가 가능하므로 학습이 되는데, 절반만 이해되는 걸 읽으면 정보 부족으로 나머지 유추가 불가능하여 아무것도 머리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서도 같은 원리 아닐까. 문돌이인 내가 갑자기 유체역학 책을 읽으면 아무런 '인풋'이 되지 않는다. M.I.란 Meaningful Interaction, 즉 유의미한 상호작용이다. 언어란 암기 등 단순 인풋만으로는 내 것이 되지 않고 그 걸 써먹어야 내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과도 연관 있을 것 같다. 책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몇 가지를 글로 적어보거나 남과 수다를 떨어보는 거다. 나는 페이스북에 독서노트 삼아 짤막한 독후감을 끄적끄적 올리곤 해왔는데 결국 그 책에서 내가 내 것으로 흡수한 것은 달랑 그게 전부인 것이다. 그거면 내겐 충분하기도 하고. 다시 요약하자면, 남들이 무슨 대단하고 있어 보이는 어려운 책을 읽든 신경쓸 필요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는 게 엄청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렵다. → 고민 말고 바로(p. 170)『피케티 쉽게 읽기』, 그것도 안 되면 『초딩도 읽는 피케티』 또는 『만화 피케티』를 읽는다. 능력도 안 되는데 『21세기 자본』 원전을 꾸역꾸역 읽은 사람은 노동만 했을 뿐 아무것도 기억 못하지만 『만화 피케티』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은 그중 몇 대목만큼은 기억하고 써먹을 수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유명하다고 해서 집었는데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공감이 안 된다. 자괴감 느낄 필요 없이 좀더 재미있고 수월해 보이는 딴 책을 집어 읽어본다. 한 50페이지까지만. → 그래도 진도가 안 나간다. → 표지가 만화 같은 『미스 함무라비』를 집어든다. 이건 초딩도 읽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나름 재밌네. → 유의미한 상호작용으로 기억에 남기기 위해 완독 후 독후감을 인스타에 올린다. 뭐 이런 얘기....(p. 171). 티브이, 인터넷과 책의 차이 독서에 관한 책을 쓰다보니 자괴감이 든다. 솔직히 어린 시절과 달리 책이 최우선순위가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여유 시간이 생길 때 뭘 제일 먼저 집어 드는지 스스로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1번이 스마트폰, 2번이 티브이. 책은 3번이다. 예열이 필요 없는 순서,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순서다. 티브이로 영화 하나 보려고 해도 백 분 정도 몰입해야 한다. 그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는지, 그 정도로 재미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예능 프로 다시보기를 틀게 된다. 이건 처음이든 중간이든 아무데나 틀어서 보다가 재미없(p. 172)으면 바로 다른 것으로 넘기면 그만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자막이 어디서 웃어야 할지를 대치동 강사처럼 딱딱 짚어주기 때문에 웃기 위해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 그보다 더 간단한 것이 스마트폰 집어들기다. 아무 생각 없이 엄지를 휙휙 움직이다보면 타임 워프라도 일어난 듯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버린다. 문제는 자괴감이다. 포털 기사 댓글이나 소셜미디어에서의 끝도 없는 그악스러운 말싸움을 보다보면 인류에 대한 마지막 애정도 식어버린다. 그걸 굳이 읽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만 남는다.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생활태도를 갖고 있는 나인데도 요즘 나의 이런 모습에 대해 고민이 많다. 이 나이를 먹고도 말이다. 고민하는 이유는 비생산적이어서가 아니라, 결국은 즐겁지조차 않아서다. 티브이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얼마 동안은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콘텐츠는 언제나 부족하고, 눈은 피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중독자처럼 끊임없이 다른 걸로 다른 걸로 넘기고 넘기고 넘기게 된다. 무한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인 것이다. 내가 무슨 권독사도 아니고 책이 다른 미디어에 비해 우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쓰레기 같은 내용의 책(p. 173)도 얼마든지 있고, 티브이나 인터넷으로도 훌륭한 콘텐츠를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래도 몇 가지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선 책은 단편적인 영상이나 인터넷 게시물보다 가볍게 시작하기 어려운 대신, 별 내용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단지 습관적으로, 중독적으로 계속 보게 되지는 않는다. 종이책은 두께와 무게라는 물리적 실체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무한정 넋 놓고 보게 되지는 않는다. 무한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적절한 순간에 멈추게 만드는 피로감도 필요한 것이다. 더 중요한 장점은 보다가 딴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티브이는 기본적으로 몰입해서 보는 매체다. 콘텐츠가 좋으면 좋을수록 더욱 몰입하게 된다. 나의 속도에 맞춰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콘텐츠의 속도에 내가 맞춰 수용해야 한다. 인터넷은 그렇지는 않지만 실시간으로 쏟아져나오는 무수한 게시글과 댓글들의 속도가 수용자를 수동적으로 만들기 쉽다. '웹서핑web surfing' 이라는 표현 그대로 링크를 타고 여기저기를 아무 생각 없이 둥둥 떠다니며 표류할 때가 많다. 이와 달리 책은 수용하는 속도를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자극받는다. 내 경우, 좋은 책을 읽(p. 174)을 때면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귀퉁이를 접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바로 이 멈추었던 순간들이 독서 경험의 핵심이다. 수동적으로 내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마는 것들은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 것이 된다. 단지 텍스트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기도 하다. 3D를 넘어 4D까지 제공하는 영상매체는 오감을 압도하는 정보를 쏟아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만도 벅차다. 여백이 없는 것이다. 책은 빈 공간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끊임없이 여백을 보충하게 만든다. 상상력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만든다. 트란 안 홍 감독이 영상화한 〈상실의 시대〉를 보며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원작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내 머릿속 이미지들이 훨씬 아름답고 풍성했던 것이다. 즉각적인 반응이 특징인 뉴미디어 시대에 멈추어 생각하게 만드는 독서의 특징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일단 유보하고, 의심하고,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는 지성적 사고의 훈련은 독서에서 출발하는 것이 여전히 정도라(p. 175)고 본다. 스마트폰의 보급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며 흥분하는 이들이 있는데, 자극적인 기사 몇 줄만 읽고 바로 화르르 불타올라 십자군전쟁에라도 나선 기사가 된 양 개인 신상을 털고 '집단 다구리'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래가 두려워질 뿐이다. 하긴 십자군전쟁도 대중의 열정을 악용한 사기에 가까웠으니 인간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남용하는 이들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나치 시대의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과연 집단 지성이 발동했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성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야만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의 직접민주주의란 공포일 뿐이다. 이야기가 좀 거창해졌지만,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충일감에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루종일 티브이를 본 날,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 날, 하루종일 책을 읽은 날의 느낌은 다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책의 우선순위를 높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하루의 시작인 출근길에 단 십 분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고, 내 주변 어디든 책을 흩어놓기도 한다. 집에도, 사무실에(p. 176)도. 노력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다. 티브이나 인터넷의 무수한 선택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수시로 서점에 들러 다양한 책을 구입해놓는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은 책꽂이에 꽂지 않고 보기에 너저분할 정도로 표지가 쉽게 눈에 띄게 눕혀놓는다. 서점에서도 서가에 꽂힌 책과 평대에 누워 있는 책의 생명력은 천양지차다. 책은 고이 모셔놓기 위한 물건이 아니다. 그 좋아하던 책을 읽기 위해 이런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의 라이벌들은 막강하다. 책 중독자였던 어린 시절 정도까지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책씨, 분발해주길 바라(p. 177). 그럴 만큼 책을 쓴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굳이 쓸 리 없다. 그 재미 중 첫번째는 의외성이다. 글 이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끝으로, 또는 엉덩이로 쓰는 것 같다. 머릿속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을 옮겨(p. 180)적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아이디어 조금만 있는 상태에서, 때로는 그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자판을 두들기다보면 스스로도 생각 못했던 표현이나 명제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가끔 정말 뿌듯한 똥이 나오는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 스스로는 대견하게 느껴지는 구절이 튀어나올 때면 등골 이 짜릿하다. 그 맛에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두번째는 내 글에 반응하는 타인들을 발견하는 신기함이다. 나는 철저히 내가 좋아하는 글만 쓴다. 쓰기 싫은 글은 쓰지 않는다. 내 삶의 태도는 어릴 적부터 '재수없음'으로 요약 할 수 있다. 내가 왜?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난 그렇게 절박하지 않아. 구차하게 그렇게까지? 아님 말구. 너 아니어도 많아. 그래서 욕도 많이 먹어봤지만, 그게 나를 지키기 위한 자기암시이기도 했다. 스스로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게 차단하는 것이다. 보다 많은 것을 욕심내려면 타고난 그릇이 엄청나게 크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바꾸어 세상에 맞춰야 한다. 언제나 나 자신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덕에 내 그릇은 내가 잘 안다. 외부에서 요구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숨어버리는 체질이다. 죄송한데요, 제가 거리에 좀 민감해서요. 책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쓰면 보다 많은 이들의(p. 181)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내 셀링 포인트를 살려서 어떤 책을 쓰면 더 구매 욕구를 자극할지 출판기획자의 마인드로 생각해보면 여러 선택지가 나오지만, 우선 내가 쓰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쓰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잘 알면서도 그저 내 취향대로 쓴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묘한 친근감을 느낀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다.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굳이 사랑받고 싶지 않다. 무서운 사람도 많고 싫은 사람도 많거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편해서 좋은데, 그들로부터도 사랑까지는 부담스러우니 호감 정도 받으면 충분하다. 책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려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내가 쓰는 글을 좋아하는 취향의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님들아, 번식해라. 세번째는 스스로 책을 쓰다보면 책의 저자들이 어떻게 책을 쓰는지 그 신비의 베일 뒤에 가려진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짐작 되는 것들은 생긴다. 무엇보다, 글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건 속단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자학 취미가 있지 않고서야 숨기고 싶은 자기 위선과 추악한 치부 위주로 글을 쓸 사람은 없(p. 182)다. 어차피 글쓰기도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인스타에 셀카 올리기, 수컷 공작새의 꼬리 펼치기와 다를 바 없을 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기 장점을 어필하여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자원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인정욕구와 결부되지 않은 표현 욕구란 없다. 다른 점이라면 그걸 어느 정도로 노골적으로 하느냐, 세련되게 감추며 하느냐가 있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자기가 지금 잘난 척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는 있느냐,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바보냐 정도일 것이다. 다시 한번 겸손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고 싶기에 『판사유감』 때부터 언제나 일종의 경고문처럼 나는 원래 이기적이고 찌질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에 불과하고, 책에 나오는 글은 그런 나조차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때때로 느끼게 되는 기특한 생각들에 불과함을 밝히고 있다. 글이란 쓰는 이의 내면을 스쳐가는 그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공감을 받을 만한 조각들의 모음이다. 나는 그래서 책이 좋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이다. 그것도 쓴 사람 본인이 열심히 고르고 고른. 그게 싫고 인간들의 비열함과 어리석음, 그악스러움을 보는 게 좋다면 굳이 돈 들여서 책을 살 필요가 있나? 인터넷에만 접속해도 공짜로 무수한(p. 183)샘플을 구할 수 있는데. 그건 공기와도 같이 이미 세상에 가득차 있다. 글재주 좀 있는 자들이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걸 읽으라는 얘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구차한 자기 포장들도 있지만 아, 이건 진짜구나, 싶은 이야기들도 있다. 신기하게도 어떤 거창하고 화려한 이야기보다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시시하고 소박한 이야기더라도 말이다. 글이란 뛰어난 문장만으로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글은 결국 삶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장 하나하나가 비슷하게 뛰어나더라도 어떤 글은 공허하고,어떤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삶은 글보다 훨씬 크다. 열심히 살든 되는대로 살든 인간은 어떻게든 각자 살아야 한다. 되는 대로 살 때 더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저 솔직히 자기 얘기를 계속 쓰는 것 정도가 글쓰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그중 어떤 얘기는 좋은 글이 될 것이고 어떤 얘기는 시시한 글이 될 것이다. 그건 쓰는 이가 의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좋은 이야기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걸 더 잘 전달할 가능성이 높아질(p. 184) 뿐이다. 물론 그건 대단한 차이를 낳지만 그렇다고 돌멩이를 금덩어리로 바꾸는 연금술은 아닌 것이다(p. 185). 나는 간접경험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책을 통해 타인을 발견하고 세상을 발견해왔다. 직접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어릴 적부터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방인들 사이에 던져진 고립된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해왔다. 타인들이 성 큼 내게 다가오면 불쑥 겁부터 난다. 그것이 나의 한계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책이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이었다. 책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고통, 욕망을 배워왔다. 판사가 된 이후의 삶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 법정에서 재현되는 것은(p. 189) 실제 삶이 아니다. 재판 기록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삶이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읽고 바라보며 살아온 것 이다. 간접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 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공감이 기존의 세계를 부숴버릴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읽었던 순간, 1980년 광주에서 이른바 국가가 시민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 다. 나는 그때까지 '지금, 여기'가 아닌 먼 곳들에 대한 이야기만 읽어왔었다. 먼 옛날에 이미 시민혁명이 이루어졌고,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말이다. 교과서에서도 그게 인류 역사라고 배웠다. 그래서 난 그게 '상식'인 줄 알았다. 그 모든 믿음이 한순간에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난 그래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한다. 교과서에 몇 줄 추가된 설명만으로는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p. 190) 무서운 피물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 같아서다. 대학에 들어 간 후 접하게 된 대부분의 책들은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인간 세상이란 원래 그런 곳이 아니라는 책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그런 세상을 바꾸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책들에 대해서는 섣불리 믿음을 가질 수 없었지만(애초에 '믿음'과는 거리가 먼 체질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냉엄하게 존재하는 부조리와 타인들의 고통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점에 틀어박혀 교과서와 다른 실제 세계에 대한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내게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사당동 더하기 25』나 『힐빌리의 노래』처럼 빈곤이 가정과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책들, 『인구 쇼크』 같이 지구 곳곳에서 인구 집단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그 배경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알려 주는 책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같이 저성장시대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책들을 읽는다. 세상은 갈수록 빠르게 변화하고 복잡하게 분화되어가기 때문에(p. 191) 읽어도 읽어도 그 속도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이런 독서를 '쾌락'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의무감만으로 읽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본능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걷고 싶지는 않다는 생존 본능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몰라서 남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는 최소한의 윤리의식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잠시라도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게 해주는 책들은 나를 '눈 먼자들의 도시'에서 구원해준다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 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의 실체였다.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병균에 감염된다고 진심으로 믿은 미국 남부의 숙녀들,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 맡은 바 행정절차일 뿐 이라고 믿은 독일 공무원들, 미국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은 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킬킬대며 지껄이는 사람들, 여자의 '노'는 '예스'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믿는 남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p. 192)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말을 들으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무지는 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모든 언어가 소음으로만 들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느껴진다. 소음과 위협, 공포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불행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의외로 타협하고 수용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도 평화를 준다.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더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귀를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 나 빼고는 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p. 193) 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 '아파....' '억울해...'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어떻게 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성난 눈으로 부모를 노려보는 아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말을, 감기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신호다. 열이 펄펄 끓는 것도 우리 몸이 열심히 병과 싸우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사람은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은 실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다. 국론 분열이 사회를 살리기도 한다. 중간자들이 제 역할을 다한다면.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p. 194)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 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p. 195). 셰익스피어가 흉악범을 교화시킬 수 있을까? 여기, 독방에 갇힌 무기수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우연찮게 한 영문학 교수를 만나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게 된다. 이후 십 년간 이어진 수업의 결과, 무기수는 삶의 구원을 얻는다. 실로 놀라운 이 얘긴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라는 책의 줄거리다.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25세이던 1983년, 시카고 소재 카운티 단기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자원봉사 삼아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봉사는 2010년까지 약 삼십 년간 여러 교도소로 이어졌다. 저자는 2003년 가장 위험한 죄수를 장기간 격리수용하는(p. 196) ‘감옥 안 감옥’ 슈퍼맥스supermacx서 독방에 갇힌 적수들에게 강의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십대에 살인죄를 저질러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는 무기수 래리 뉴턴을 만난다. 이후 십 년간 그에게 셰익스피어를 가르친다. 이 책은 법관으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묘한 저항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그럴듯한' 얘기 아닌가!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면 흉악범도 교화될 거야. 어쩌면 이 역시 지식인의 선입견에 불과할 수 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지? 영문학에서 그가 갖는 위상 때문에 막연히 선택된 것 아닐까? 더구나 무기수라면 비단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뭐가 됐든 '외부 세계와 자신을 이어주는 한 줄기 통로'인 교수의 관심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을까? 교수 역시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라도 '죄수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쪽으로 애써보려 할 것이다. 실제로 사형수와 지식인 간 미묘한 관계 형성 과정을 다룬 문학도 있다.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실제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범을 장기간 인터뷰해 쓴 걸작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 주연의 〈카포티〉로 영화화되기도 했다(p. 197). 의심 많은 성격을 탓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엔 문체에서 벽을 만났다.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인데 역시 난 너무 선하고 건전하며 훌륭한 글엔 금방 지친다. 독실한 종교인이나 진실한 상담 전문가, 열정에 불타는 사회운동가의 좋은 글을 접하면 박수는 치면서도 재밌게 읽진 못한다. 내 취향은 살짝 삐딱하고(이때 포인트는 '살짝'이다, '열심히' 삐딱하면 지루하다) 느긋하며 가끔 비루한 글이다. 그래도 분명 참고할 만한 내용이었으므로 죽 읽어나갔다. 그런데 중반 이후 이런 구절들이 정신을 번쩍 나게 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범죄에 빠져들게 될까?'에 대해 너무도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살인은 열정적으로 계획한 게 아닙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멍청하게 저지른 행동일 뿐이에요." "살인을 저지 른 사람들의 상당수가 약간의 영향만 있어도 다르게 행동했을 겁니다." 책 속 경찰관 살해범의 말이다. 이는 내 재판 경험에 비추어봐도 틀리지 않다. 특히 '멍청하게'란 표현은 정말 적절하다. 악마 같은 흉악범이 계획적으로 벌이는 살인은 드물다. 평범한 사람이 사소한 분쟁에 휘말려 순간 울컥해 저지르는 범행이 더 많다. 심지어 동네에서 막걸리 내기 윷놀이를 하던 오십대가 옆에서 자꾸 귀찮게 훈수하는 이웃을 때려 숨(p. 198)지게 한 경우도 봤다. 이 책엔 비행청소년이 많은 한 고등학교에서 십대 때 살인을 저지른 죄수들의 충고를 녹화한 동영상이 상영되자, 그 어떤 교사 애기도 듣지 않던 소년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일화 도 등장한다. 해당 동영상을 본 소년들의 반응은 이랬다. "형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어떤 교사도 그 말을 더 낫게 얘기하진 못할 것 같아요."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얼마나 신세를 망칠지 당신들이 얘기하고 있었다는 거죠. 당신들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면 난 잠을 잤을 거예요. 그래서 절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던, 막가는 소년들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엔 귀기울인다. 저자는 살인 등으로 종신형을 받은 소년 죄수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각색 작업을 맡겼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이들은 사랑 얘기가 아니라 (로미오처럼 착한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압박하는) '또래 집단의 압력'에 작업의 초점을 맞췄다. 이들의 각색 희곡은 로미오가 '티볼트'를 죽이고 경찰에 체포되는 걸로 끝난다. 이 희곡으로 연극을 공연한 후 소년수들은 말했다. "전 열네 살에 살인으로 교도소에 들어와 199년형을 살고 있습니다." "전 열일곱 살에 교도소에 들어와 가석방(p. 199)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습니다. 절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 다." "우린 여러분이 로미오의 잘못에서 뭔가 배우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잘못에서도." 래리 뉴턴은 베이츠 교수의 '교도소 제자'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고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영문학자들이 놀랄 정도로 셰익스피어에 관한 독창적 글을 많이 남겼다. 오랜 수업 끝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가 저지른 폭력 행위와 이 모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칭찬받고 싶은 사고방식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어요. (....) 이젠 남들에게 인상을 남기는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제 지적 능력이나 뭐 그런 걸로요." 소외 계층 청소년이 그리도 쉽게 범죄에 빠지는 이유 중에는 '내 소속 집단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가정과 사회에서 이들의 인정욕구를 충족시킬, 보다 나은 집단에의 소속감을 제공해주지 못한 결과가 범죄로 연결되기도 하는 것이다. 소년범들과 대화를 나누던 베이츠 교수는 그들의 범죄 경험이 대부분 7~8세 때 시작된다는 얘길 듣고 놀란다. 한 소년범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곱 살부터 열 살까지의 아이의 경험이 십대와 성인으로서의 행동을 결정해요." 교육 전문가나 심리학자의 말이 아니라, 소년범의 말이다(p. 200). 실제로 베이츠 교수가 가르치던 소년수 한 명은 전학을 자주 다니던 아이였는데 가벼운 장난 몇 건 때문에 교사의 미움을 샀다. 교사는 그를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세워둔 채 한 학기를 보내게 했다. 이후 소년은 거리로 나섰고 그의 인생은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 소년수는 말했다. "학생을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두면 그는 자라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 거예요." 베이츠 교수와의 셰익스피어 수업을 통해 놀라운 지적 성장을 이룬 래리 뉴턴이 한 학술지에 기고한 에세이가 있다. 그중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수많은 죄수들이 결국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 어떤 종류의 죄수가 여러분 옆에 살길 원하십니까? (...) 여러분에겐 그들이 좋은, 혹은 나쁜 이웃이 되도록 도와줄 힘이 있습니다. 교육만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과학입니다." 그렇다. 죄수들 중 대부분은 결국 사회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들을 모두 사형시키거나 무기 복역시키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이 점을 쉽게 잊곤 한다. 그래서 범죄자들에게 어떤 고통을 가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고,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일 때가 많다. 범죄자들은 선천적으로 위험한 괴물이고, 장기간 사회(p. 201)로부터 격리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범죄자가 구제불능의 괴물일까. 히스 형제의 책 『스위치』에 어린 자녀를 구타해 골절상을 입히는 등 아동학대 부모들을 대상으로 행동치료를 수행한 사례가 나온다. 처음 부모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녀와 매일 단 5분씩만 놀아주는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은 아이들에게 완전히 집중해야 한다. 전화도 받지 말고, 뭘 가르치려 들지도 말고, 아이들이 놀이를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부모들은 명령을 내려서도 안 되고, 비평을 해도 안 되고, 질문을 던져서도 안 된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면 부모도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 아이가 부모의 크레용을 빼앗으며 "나 이거 할래!" 하고 외치면 마음껏 쓰라고 내주고 다른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다. 아이가 심술궂게 또 부모가 쓰는 크레용을 못 쓰게 하면 그에 순순히 따른다. "네 말이 맞아. 이 색은 어울리지 않는구나." 아동학대 부모들에게 이 5분은 무척이나 힘든 시간이었다. 자기통제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동 중심 상호작용이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칭찬하는 법,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면서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법 등을 배우게 된다. 110명의 학대 부모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p. 202) 절반은 일반적인 분노조절 요법 치료를, 나머지는 위와 같은 부모-자녀 상호작용 치료를 받았다. 치료 후 3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전자의 60퍼센트가 다시 아동학대를 한 반면, 후자의 20퍼센트만이 다시 아동학대를 했다. 아동학대 부모 중 상당수는 선천적인 괴물이어서 아이를 때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너 살짜리 아이들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이 교육 방법에 대해 무지했다. 제대로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교육받자 그들 중 80퍼센트가 아동학대를 멈추였다. 내 재판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범죄자 중 다수는 가정과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교도소에서라도 이들이 제대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이들 모두를 영원히 가두어 둘 수는 없고, 이들 중 대부분은 언젠가는 이 사회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래리 뉴턴의 에세이는 정확히 이 지점을 포착하고 있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라는 첫 의문에 대해서도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갱스터 생활을 하던 소년수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목한 지점은 (내가 생각조차 하지 못 했던)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또래 집단의 압력'이었다. 뉴(p. 203)턴의 셰익스피어 해석이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도 당연하다. 그는 일반인과 다른 지점에서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다양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시대는 바뀌어도 인간의 욕망과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간들의 오욕칠정을 풍부하게 담아낸 고전은 거울이다. 그 앞에 서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마는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난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을 발견, 탐독하면서 현란한 언어유희의 묘미에 빠졌었다.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그 정도였다. 반면, 소년 시절에 폭력• 마약• 살인을 저질러 지하 독방에 갇힌 무기수들은 교육 수준에 관계없이 셰익스피어를 통해 천국에서 무간지옥 바닥까지 경험한 것이다(p. 204). 일자리를 빼앗기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 거라는 공포의 밑바탕에는 '노동' '쓸모' '일' 등에 관한 오래된 관념이 있다. 하지만 이런 관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인간이 바꾸어온 것 아닌가. 영국의 1833년 공장법이 9세 미만 아동 고용 및 18세 미만 소년의 야간노동을 금지하자 공장주들은 시장 경제에 대한 부당한 개입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이들이 지금 시대의 의무교육을 보면 어리둥절할게다. 어린 녀석들이 자기 밥벌이를 하기는커녕 세금으로 공짜로 공부를 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하고. 탄광 노동자들에게 하루 열몇 시간씩 석탄을 캐도록 시키던 이들이 오후 네시에 퇴근하는 현대 유럽의 사무직 노동자들을 보면 이 미친 시대에는 그냥 앉아서 잠깐 놀게 하고는 공짜로 돈을 준다고 놀라(p. 227) 자빠질 거다. 시대가 달라지면 관념 자체도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알파고 이후 쏟아진 온갖 요란한 기사들 보다 '멍때리기 대회' 기사가 더 혁명적인 함의가 있다고 느꼈다. '미래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지?'라는 질문만 하지 말고 그런데 우리는 꼭 일을 해야 되나? 그런데 일이라는 게 뭐지?'라는 질문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기계에게 일을 빼앗기는 상상만 할 뿐 기계에게 일을 시키고 우리는 노는 상상은 하지 못할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시대에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과거 시대 사람들 눈에는 그냥 쓸데없는 놀이나 미친 짓일 뿐일 거다. 혀와 배꼽에 피어싱해주는 직업, 프로 스케이트보더, 먹방 찍어 돈 버는 유튜 버들,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유행의 패션 산업... 인간이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유희의 축적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곤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여전히 동굴 생활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쾌락은 우리를 단조로운 동굴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모험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쾌락의 카탈로그를 늘리고 늘리며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재미도 없는 성공충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엔 즐기는 자들이 이길 것이다(p. 228). 미래는 결국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다. 자기실현적인 예언이다. 다수가 공유하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것이 곧 법이 되고, 도덕이 되고, 가치가 된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 발전도 인간들의 무수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패턴화해 모방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현재의 사회부터 바꾸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쓸모'가 없어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지 궁금하면 지금 이 사회가 탑골 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편의점 알바 청년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의 눈부신 과학 발전이 낳을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의 분배 구조를 보면 된다. 더 먼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그와 결합한 신인류가 평범한 인간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 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p. 229). 통근길의 고통을 반전시킨 계기는 전철 승객들의 분포도 및 승하차 패턴 학습, 그리고 어디서 내릴지 관상 보는 법에(p. 248)서 비롯되었다. 상당 구간에서 앉아 갈 수 있게 되자 매일 책 을 들고 다니며 읽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전철은 도서관이 되었고, 통근길은 견뎌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끝나가는 것이 아쉬운 즐거움이 되었다.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다. 한가한 휴일에 집에서 뒹굴 거릴 때는 등허리는 소파와, 손은 리모컨과 합체하는 폐인이 되는 주제에, 통근길 전철에서는 세상 다시없는 독서광으로 변신한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더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통근길 전철은 책이 유일한 도피 수단이던 소년기로 잠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었다. 하루 세 시간에 가까운 독서 시간이 강제로 확보되자 참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책들 중 대부분이 전철에 앉아 흔들거리며 읽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워런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 『싸울 기회』, 경제 학계 두 거목의 일대기 『케인스 하이에크』, 심지어 900쪽이 넘는 벽돌책 『빈 서판』까지 전철에 앉아 읽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진지하고 무거운 책은 지하철에서 읽고, 만화책은 조용한 곳에서 정독하곤 했다는 점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한 책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기 때문에 주변(p. 249)이 어수선해도 불편하지 않은 반면, 감각적• 정서적 체험이나 기억과 연관된 책들은 조용한 곳에서 봐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통근길 전철에서 책 읽기는 독서 시간 확보 외에도 장점이 있었다. '각인 효과'다. 오리 새끼가 갓 태어나서 사람을 보면 엄마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각인 효과처럼,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단 십 분이라도 책 읽기를 하면 뇌의 모드 설정이 그쪽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연스럽게 계속하게 되더라. 출근 때 책을 보면 퇴근 때도 보게 되고, 이어서 밤에도 뒤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되고. 반면 출근 때 페북질을 시작하면.... 이때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읽든 못 읽든 책을 들고 출근길에 나서려고 한다. 하루의 시작을 책과 함께한다는 것은 충실한 하루를 여는 좋은 방법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객차 안을 둘러 보아도 책을 들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엄청난 보물이라도 들어 있는 양 일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은 사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좀 무서운 모습이다. 사이비종교 의식 같기도 하고, 외계인이 전파로 사람들을 세뇌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을 보고 놀란 나머지 메모까지 해둔 일이 있다. 노량진에서 종합운동장 가는 9호선 안이었는데,(p. 250) 책 읽는 이가 무려 아홉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키위새나 갈라파고스땅거북을 떼로 만난 느낌이었다. 여덟 명이 사십대 정도의 양복 입은 남성이고 한 명은 영어회화책 보는 여학생. 책 제목은 『아프리카의 별』 『대장정」 『기업경영에 숨겨진 101 가지 진실』 등인데 객차 사이 통로에 서서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를 읽는 신사가 이채롭다. 아니 그거 지하철에 사린가스 살포하는 얘기.....(p. 251).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깊이 공감하는 구절을 만났다.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구아수폭포를 보고 싶다, 남극에 가보고 싶다 등 크고 강렬한 비일상적 경험을 소원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쾌락에 불과하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마치 동화 『파랑새』를 연상시키는 일견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은 굉장히 과학적인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복감에 관한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공통적으(p. 252)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어떤 '큰 것 한 방'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 생각을 확장해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 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 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멋진 몸매를 위해 굶고 운동하는 것이 유행이라 치자. 바뀌어 가는 몸매를 보는 기쁨이 이를 위한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맛집 찾아다니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 낫다. 남들 보기에 덜 번듯한 직장이더라도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을 내가(p. 253) 좋아하는 방식으로 꾸미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잘나가는 사람과 친해져보려 애쓰기보다 가족,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낫다. 습관처럼 내 곁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가 불행하면 내 삶 또한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끝에는 결국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좋아하는 책만 잔뜩 있다면 무인도에 있어도 행복할 것 같던 시절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욕심내면서 무엇에도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세상에는 크고 대단한 일을 이룬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가장 본받고 싶은 '습관이 행복한 사람'은 따로 있다. 한 세기,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고 계시면서도 아직도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분이다.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님이다. 언론은 교수님의 장수 비결에 관한 기사를 앞다투어 싣곤 한다. 사십 년째 매주 세 번은 꼭 수영을 하고, 아침식사로는 무엇 무엇을 드시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더 중요한 것들이 빠져 있는 것 같다. 교수님은 나의 처외조부 되신다. 내가 생각하는 교수님의 건강 비결은 먼저 '부지런함'이다. 이십 년째 댁에 갈 때마다 서재엔 언제나 읽고 계신 책이 있고, 쓰고 계신 새 원고가 있다. 사람들은 그동안 뭐하셨는지 묻지만 실은 언제나 똑같았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강연을(p. 254) 하셨다. 그중 어떤 것은 알려지고, 어떤 것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거리 두기'다. 총장이니 장관이니 남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탐내는 자리들에 한 점 관심조차 보인 적이 없다. 자식들 일도 그들이 묻기 전에는 먼저 말씀하지 않는다. 여기서 들은 얘기를 저기에 전하지도 않는다. 철없는 아들 걱정에 하소연을 늘어놓는 딸에게 그저 미소를 지으며 "네가 철이 나야 걔가 철이 들지" 한마디 하시더란다.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간섭하지 않는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지만 맹목적인 열정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교회나 목사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믿을 뿐이다. 뭔가에 열광하거나 뭔가에 분노해 소리를 질러대는 노인들이 가득한 시대에 그는 언성 한 번 높이는 일이 없다. 성공한 인생이라 아쉬운 게 없어 그럴 거라며 입을 삐죽일 이들을 위해 덧붙인다. 1947년 맨손으로 월남한 후 여섯 남매를 키우셨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부부싸움도 아이들이 못 듣게 방에 들어가서 하며 언제나 웃음으로 남편을 맞던 부인이 그의 기둥이었다. 그 기둥이 육십 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눈만 깜빡이며 이십 년 세 월을 자리에 누웠다. 그는 그런 부인을 차에 태워 돌아다니며(p. 255) 세상을 보여주고 맛난 음식을 입에 넣어주었다. 결국 부인을 떠나보낸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부인의 손때 묻은 낡은 집에서 홀로 지낸다. 하지만 아주 가끔 딸에게 울고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다. 정초에는 송추에 있는 이북 식당에 가서 평양냉면을 드시며 고향을 생각한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숭실학교를 다니던 고향이다. 어느 날 노교수는 딸에게 말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 감히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삶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이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습관이 행복한 사람, 인내할 줄 아는 사람, 마지막 순간까지 책과 함께하는 사람(p. 256). 에필로그 쓸데없음의 가치 내게는 큰 즐거움을 주었던 책들에 관한 기억을 신나게 써내려갔지만, 마칠 때가 되니 역시 읽을 분들의 책망이 두렵기도 하다. 독서에 관한 수많은 책들처럼 결국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책들을 소개해주겠지, 하고 기대했던 분들 말이다. 프롤로그에서도 밝혔듯이 언급한 책들은 그저 그 시기에 거기 있었기에 우연히 내게 의미가 있었다. 나는 단지 여러분에게도 그런 책들이 있을 것이니 스쳐 보내지 마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구체적으 로 책이 당신 인생에 무슨 쓸모가 있었다는 얘기냐고 묻는 분들께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p. 257).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야간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시간. 교수님이 처음에는 정해진 자료에 따라 강의하시다가 점점 관련 연구 이야기를 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에 간 구법승이 혜초 외에도 많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살아서 돌아왔는지가 궁금해졌단다. 그래서 온갖 고문헌을 추적하여 구법승들의 생환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 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 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 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p. 258). '인문학적 경영' 운운하며 문사철 공부하면 스티브 잡스같이 떼돈 벌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는 CEO들께는 죄송하지만, 잡스는 나중에 뭘 하려고 리드대학에 가서 인문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히피, 외톨이, 괴짜들과 어울려 쓸데없이 놀다가 한 학기 만에 중퇴한 후 예쁜 글씨 쓰기에 매료되어 서체학calligraphy 강좌를 청강했다. 대학 갈 때 써먹을 욕심에 논술학원 보내서 초등학생에게 어려운 책을 읽히고 있는 학부모들께 죄송하지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입시 때문에 마지못해 본 책은 한 줄도 기억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소설책,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보러 간 에로 영화는 방금 본 듯 생생하다. 글쓰기를 좋아하 여 책까지 내게 된 건 그 때문일 거다. 쓸데없이 노는 시간의 축적이 뒤늦게 화학 작용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 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물론, 슬프게도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언젠가 쓸모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실(p. 259)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또 긁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일을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면, 이 불확실한 삶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쓸모 있는 일을 이미 한 것 아닌가(p.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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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재미로 하는 독서가 행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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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제대로 된 상담이 필요하다
- 정혜신이라는 정신과의사의 책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다. 저자는 책과 책상에서 벗어나 슬픔과 고통의 현장에서 상담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롭게 경험했다. 그래서 삶을 더 깊이 있게 보고, 더 공감적인 상담과 조언을 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책머리에 누군가의 깊은 속마음을 듣고 난 후엔 꼭 묻는다. "오늘 이야기를 하고 나니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그 질문을 통해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몇발자국 떨어져서 또다른 자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속마음 말하기의 핵심이다. 속마음 털어놓는 일을 1부라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한 후의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2부다. 2부가 없다면 1부에서 생애 최초로 자신의 순정한 마음을 꺼내놓고 이야기를 했더라도 치유 효과는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고통을 치유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내 상처의 내용 자체를 드러내는 데서 비롯하지 않는다. 드러낸 상처에 대 한 내 시선이나 태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치유가 결정(p. 5)된다. 상사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사람이 그날 상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 상사와 관계가 어땠는지, 상사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등 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치열한 전장의 병사처럼 말할 때 나는 모든 체중을 실어 그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공감할수록 그는 더 격정적으로 생생하게 말한다. 그후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물으면 "내가 모멸감을 얼마나 많이 느꼈는지 알았다"거나 "내가 너무 측은하다"거나 "나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등 등 전투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지휘관의 말을 한다. 마음의 지휘관 기능이 자극되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시선이 생기면 그 전투를 어떻게 정리하고 마감할지 결론을 수월하게 내릴 수 있다.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조언을 할 필요도 없다. 상담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삶을 제대로 사는 것(1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내가 제대로 살았다는 것을 조망하고 확인하는 행위(2부)다. 병 사로서 성공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p. 6)은 나의 전투가 훌륭했고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의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인정, 그 모든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충분했다는 확인과 인정을 지휘관으로서 인식하는 2부의 행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기까지 가야 온전하고 편안한 삶, 죽음에 대한 준비를 마친 삶에 다다를 수 있다. 얼마 전 남편이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쓰러지는 일을 겪었다. 그후 두달여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죽음을 경험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더욱 절감한 것이 삶에 있어서 2부 시간의 소중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급작스럽게 이별을 한 사람들의 남은 삶이 주체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은 상당 부분 삶에 대한 정리와 확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을 때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충분히 해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해서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삶이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p. 7).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상담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은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생전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들을 기도를 통해서 아이에게 말해주고 마음을 전하고 나눌 수 있어야 부모들이 나머지 생을 이어갈 수 있어서다. 유가족 엄마들 중에는 눈을 뜨고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로 보내는 이들도 있다. 그 기도의 일부는 아이와 미처 나누지 못했던 것들을 확인하고 다시금 전하고 인정하는 일이 기도하다.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벼락같은 이별을 한 이들의 삶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벼락처럼 잃고 홀로 남거나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이별의 인사조차 남기지 못한 채 떠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둘 중 하나가 우리의 삶이다. 그동안 나는 내 삶의 전투에 매일처럼 참전하는 전투병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정지를 겪은 두달 전부터는 지 휘관의 시선으로 나의 하루를 돌아보고 그 느낌을 매일(p. 8)밤 그와 나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밤마다 정리하고 작별하고 아침이면 다시 새롭게 만난다. 삶과 죽음이 홀가분하게 동거하는 삶을 사는 중이다. 그 삶은 뜻밖에도 암울하거나 우울하지 않고 사랑이 넘치고 자유롭다. 삶과 죽음이 동거하는 삶을 또렷이 인식하기 시작한 후, 나의 매일은 꽃다발 같은 시간이다(p. 9). 세월호 참사 직후 저희 부부는 안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치유공간 이웃(이후로는 '이웃'으로 표기)이라는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긴 시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여러 치유 활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2년여가 지난 어느날 남편과 저 두 사람 다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검사 며칠 후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암이 의심되는 징후가 있다더군요. 남편은 간과 다른 한곳에 암이 의심되는데 간에는 직경 5센티미터나 되는 종양 덩어리가 보여서 전이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게는 신장과 유방에 암이 의심(p. 18)된다며 정밀진단이 필요하다고 했고요. 그 전화의 내용을 남편에게 전했더니 남편이 1분쯤 가만히 있다가 제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여한이 없다고 했지?" 제가 그렇다고 말하니 남편도 "그럼 됐어, 나도 여한이 없어" 하더군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서로 웃었습니다. 사실 그날 명동성당에서 3시간 정도 세월호 민간 잠수사들과 집단상담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잠수사들의 고통에 집중해야 하는 날이었지요. 그래서 '왜 하필 전화가 이 순간에 왔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전화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져서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못 할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담을 다 마치 고서야 알았습니다. 잠수사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제가 한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저희 부부의 건강검진 결과가 저를 심란하게 만들지 않았던 겁니다. 제 죽음을 연상케 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이 제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였습니다(p. 19). 다른 사람들 보기에 우리가 이타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도 우리가 그 일을 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 일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었던 일이 당시에는 바로 그 일이었기 때문에 한 겁니다. 언제나 그랬어요. 잘할 수 없거나 끌리지 않는 일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고 절박해 보여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개입한 일은 오래 할 수가 없으니까요(p. 21). 세월호 피해자가 아니라도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p. 26)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비난과 막말에 자기들도 똑같이 상처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상처 입힌 말이나 30년 전 아기를 잃은 엄마의 가슴을 찌른 비수는 같습니다.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다들 이제 그만하라는 말 때문에 피해자인데도 오히려 죄의식을 느끼고 있어요. '그만해라, 그 정도 했으면 됐다'라는 말 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 슬픔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극단의 고립감을 부추기는 무서운 말입니다. 슬픔 그 자체보다 더 힘든 것이 슬픔을 슬퍼하지 못 하는 거예요. 충분히 슬퍼하지 못하면 결코 그 슬픔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를 가슴 속에 묻어뒀던 많은 분들이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울고 그들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에도 딱지가 앉는 치유를 경험했습니다(p. 27).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벼락같은 이별 앞에 목 놓아 울 수 있어야 나머지 생을 비틀리지 않고 살 수 있어요. 슬픔을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슬픔에 대처하는 법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살면서 한번은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는 삶의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그만큼 압도(p. 31)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울고 있는 내 곁에 이제 그만하라고 재촉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남은 가족을 생각해야지 같은 어쭙잖은 조언 대신 내 눈물이 마를 때까지, 떠난 사람에 대해 더는 할 이야기가 없을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때까지 내 곁에서 산처럼 묵묵하고 바다처럼 먹먹하게 버텨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 수 있고 웃고 싶을 땐 마음껏 웃을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가장 빠르고 단단하게 슬픔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이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치유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진짜 사회안전망입니다(p. 33).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는 시간이 간다고 옅어지지 않지만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 슬픔은 상처의 통증과 함께 고름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그 슬픔이 충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면, 벼락같은 고통이 다 사라지진 않아도 그 상처가 피눈물이나 꽉 찬 고름 같 은 형태가 아니라 뼈저린 그리움 같은 형태로 남아요. 둘 다 아프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고름이나 피눈물 같은 상처는 사람을 뒤틀어서 이후에 맺는 관계를 꼬아놓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뼈저린 그리움은 사람을 뒤틀지 않아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상처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관계를 파괴하지도 않지요(p. 34). 가족을 잃은 고통과 슬픔을 제대로 대면하거나 치유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를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박근혜씨입니다. 그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트라우마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부모의 비극적인 사망 후 그는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슬픔을 삼키며 세월 을 보냈습니다. 정치를 시작하기 전 18년간 썼다는 일기를 보면 박근혜씨는 두문불출 집에만 있으면서 혼자 요가에 몰두하며 지낸 것 같습니다. 요가를 하도 열심히 해서 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설 정도였다고 합니다. 세상과의 관계가 모두 끊긴 채 홀로 지냈던 18년 동안 그는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공감받고 치유받지도 못했(p. 53)습니다. 슬픔이나 그리움, 무력감 등을 통제하기 위해 요가에만 집중했다고 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 사람의 감정은 서서히 마비됩니다. 결국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 단계까지 가면 겉으로는 고통을 이겨낸 듯 초연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극복이나 초월 같은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마비된 병적인 상태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씨가 보인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상처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도 그는 세월호 피해자의 슬픔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국민들이 결정적으로 분노한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씨는 오랜 세월 감정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세월호 피해자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없었을 수 있습니다. 슬픔이 넘쳐나는 경험에서 슬픔을 떼어내고 나면 뭐가 남나요? 감정을 배제했으니 정확한 사실관계만 남는 걸까요? 아닙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살만 떼어가라(p. 54)는 주문이 불가능하듯 슬픔을 유발한 상황에서 슬픔을 소거하면 그 상황을 구성하던 사실의 절반 이상이 사라집니다. 그건 이미 사실이 아닙니다. 상황에 묻어 있는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 채 그 현실을 정확하게 감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접하는 모든 상황에는 사실과 정서가 함께 존재합니다. 감정 기능이 마비되어 정서를 느끼지 못하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그러면 소통이 제 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관계는 당연히 꼬이게 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다음 단추들도 잘못 끼울 수밖에 없듯 감정을 느끼는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 대인관계든 현실감각이든 그 사람이 내리는 모든 판단이나 해석들이 줄줄이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통제하는 버릇이 가져오는 감정마비는 굉장히 큰 문제를 야기하고 끔찍한 일들을 연쇄적으로 불러옵니다(p. 55). 사고로 가족을 여럿 잃은 분에게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지금도 제 슬픔은 자주 드러내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고 후 줄곧 제 평생 다시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가족을 잃는 순간 제 삶에서 온전한 기쁨은 다 사라졌어요. 적극적으로 내 기쁨을 찾을 수는 없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 기뻐요. 그래서 누군가를 위로하는 삶을 살기로 했어요." 가족을 잃은 죄책감 때문에 내 기쁨은 용납할 수 없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 위로받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깊은 지하 동굴에 갇힌 사람이 자기 힘으로 길을 찾아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본 것처럼 울컥했습니다(p. 63).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각자가 처한 환경과 기질, 심리적 상황에 따라 다 다르지만 대개의 자살자들이 목숨을 끊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직면하는 감정은 자기모멸감과 무력감입니다. 죽을 만큼 외롭거나 자기혐오가 심할 때, 절박하게 돈이 필요하거나 통제되지 않는 통증으로 힘들 때 자기모멸감과 무력감은 극대화됩니다. 그럴 때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껏 움츠러들고 쭈그러진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모멸감과 무력감을 더 증폭시키기 때문입니다. 통장 잔고가 충분한 사람은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돈을 빌릴 수 있지만 잔고가(p. 76) 바닥인 사람은 그러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누가 잔고를 확인하자고 하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자기모멸감과 무력감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이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낄 만한 일을 하기란 어렵습니다. 당당하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힘들게 말을 꺼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하고, 세상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채 끝을 맞게 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생을 유지하는 것보다 버리는 쪽이 자기가 지키려 하는 것을 더 잘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p. 77).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 부부의 일상에 미친 영향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는 저축을 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돈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십여년 전 그간 매달 부어왔던 보험들마저 모두 해지해버렸습니다. 세월호 참사 후 안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생계를 위해 하던 일들도 다 그만두면서 가입한 실손보험 하나가 우리 부부의 미래를 대비한 유일한 장치입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생생한 삶의 현실은 노후나 미래를 대비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인지도 모른다는 자각이었거든요. 매 순간 우리 삶에 가(p. 117)장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들숨과 날숨 사이마다 죽음이 어려 있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늘 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돈을 모으는 일은 우리 부부의 삶에서 가 창 불필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지금 여기'만을 삶으로 여기고 살자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영영 못 보는 상황이 될지라도 덜 아쉽고 덜 후회스러운 삶을 사는 것 외에 미래를 대비하는 다른 방도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만 집중합니다. 많이 웃고 많이 느끼고 많이 나눕니다. 평소에 저는 "나는 한 300년쯤 산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그건 아마도 제가 선택한 제 삶의 순간들을 최대치의 밀도로 채웠기 때문일 거라 느낍니다. 두달여 전 어느날, 집에서 함께 이야기하던 저의 연인이자 친구, 반려이자 영원한 배후인 그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정지로 쓰러졌습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날 그 순간 나와 그의 동(p. 118)선이 3분만 어긋났어도 지금 이 시간은 저와 그에게는 없는 시간입니다. 반사적인 CPR과 응급시술, 입원치료를 거쳐 남편은 극적으로 회생했고 그 덕분에 우리의 일상이 다시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두달은 죽음 곁에서 지낸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고 나니 확실해졌습니다. 남편의 심정지 이후 우리 둘은 삶과 죽음에 대한 명료한 결론 하나를 얻었습니다. 죽음을 위한 대비는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없다는 것을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됐습니다. 이번 일을 거치면서 우리 부부는 거의 동시에 "이제는 진짜 죽을 준비가 된 것 같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죽어도 특별한 회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별의 위협 속에서 둘이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을 샅샅이 훑어보니 사랑하고 사랑받은 시간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확인해서입니다. 그걸 확인하니(p. 119) 이제는 언제 헤어져도 준비가 됐다는 마음이 듭니다. 여한이 없다, 미련이나 아쉬운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공포까지 밀어낼 수 있는 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더 정교하게 말하자면 '사랑하고 사랑받았다'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은 삶을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진정한 대비인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여유롭게 자신의 삶을 통째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텐데, 우리는 이번 일을 겪으며 그 시간을 기적처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축복이었습니다(p. 120). 따돌림 피해로 아들을 잃은 엄마에게 주변 사람들이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합니다. Q: 저는 40대 평범한 주부입니다.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으로 중3 아들을 잃은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의 아들을 죽음까지 몰고 간 가해 학생 중 한명은 평소 집에 놀러 오기도 하고 친구가 차려준 밥도 먹고 갈 만큼 아들과 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아들을 잃고 고통과 절망에 빠진 제 친구에게 주위의 사람들 몇몇이 "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가해 학생인 아들 친구를 용서해줘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용서하면 친구가 조금이라도 더 편 안해질까요?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요? A: 우리는 보통 슬픔,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나쁘고 자제해야만 하는 것, 결국은 나를 상하게 만드는 것이(p. 124)라는 생각을 합니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립니다. 남을 해치는 분노도 있지만 나를 지키는 분노도 있습니다. 갑질을 일삼는 사람의 일상적 분노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상대방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일방적으로 자기 감정만 분출하는 행위, 그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심각하게 더럽히고 훼손하는 것이 남을 해치는 분노입니다. 이것은 감정 표현이 아니라 감정 배설이며 심리적 폭력이고 범죄입니다. 절대 하지 않아야 하는 나쁜 일이 맞습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를 지키는 분노는 표출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그 사람 자신이 병이 들거나 망가질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침범당했을 때나 인격적 모욕을 당했을 때의 분노는 표출하는 것이 건강한 행위입니다. 충분히 표출하도록 주변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그 사람의 내면이 훼손되지 않고 지켜집니다.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엄마가 가해자에게 갖는 분노는 정당합니다. 더할 수 없을 만큼 끝까지 분노하고 증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감정을 바닥까지 다 끄집어낼 수(p. 125)있도록 누군가 전적으로 공감하고 함께 분노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분노할 수 있으면 마침내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이 더 쉬워집니다. 그러나 그런 정당한 분노를 막으면서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이미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진 사람을 다시 짓밟는 일입니다. 슬픔에 잠긴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충분히 공감해주지도 못한 상태에서 가해자를 용서하는 숙제까지 안겨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가 당장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마음껏 분노하고 그 마음을 충분히 공감받는 날들이 켜켜이 쌓이면 어느날 가해 학생에 대한 연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줘야 합니다. 용서는 그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용서를 말하는 사람은 트라우마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입니다(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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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제대로 된 상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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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상담의 흥미로운 접근 방법, 문학상담
- 문학상담은 더 넓은 인문상담의 한 분야이다. 인문상담은 철학과 문학을 포함한다. 흥미롭게 읽었다. 상담과 문학,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됐다. 6년간 상담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인본주의 심리학과 인문학적인 토대 위에서 상담에 대한 신념을 구축하게 되었다. • 상담은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인간 능력이 도달할 수 있는 무한한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지향하는 인간들의 노력으로 성장하는 학문이다. • 상담의 기초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인간 전체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에 있다. • 상담이론의 근간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도움을 받으면 개인은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성장심리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 상담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인식하는 주(p. 37)체성을 확립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행자이며 격려자의 역할을 하는 전문가여야 한다. • 결론적으로 상담은 인간의 인간되기를 도와주는 노력 그 자체이다. 인간이 각각 천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독특한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존엄성과 가치를 극대화하면서 성숙한 삶을 이끌어 주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의 시작은 상담이다(p. 38). 나는 더 넓은 지평을 향하는 상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상담은 한정적이고 표면적인 다양한 병리적 증상의 치료와 사회적 적응에 국한하기보다 개인의 전인적 성장을 도모하고 통합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여 행복한 인간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다. • 상담은 개인의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하여 자기 성찰을 통한 자신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주체성을 구축하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넓은 지평을 열어 가야 한다. • 상담 과정에서는 용기를 잃고 좌절하는 사람에게 인문적 자기성찰을 통하여 그에게만 독특한 잠재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여 용기와 도전 정신을 일깨워 주고 격려하여야 한다. • 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선한 본성을 깨닫게 하여 잃어버렸던 자신의 언어와 정서를 찾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형식적이고 수량적인 기준에 얽매여 갈등을 겪는 사람에게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자기를 표현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 상담은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결과가 서서히, 막연하게, 특이하게 나타나는 학문이다. 상담자는 상담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과 사유의 힘을 길러주고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문학적인 통찰력과 표현력을 쌓아 가도록 내담자(p. 53)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상담에 대한 나의 근본 신념과 상담의 특성을 종합하여 '나의 상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상담은 전문적 훈련을 받은 상담자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내담자와 상담 관계에서 상담 언어로 내담자로 하여금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도록 인간과 인간관계의 내면을 인문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다." 이 정의가 상담에 대한 나의 믿음을 잘 나타내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허한 말장난 같기도 해서 나는 나의 믿음대로 상담을 실천할 수 있는 학문적, 실질적 내공이 나에게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청소년대화의 광장 원장을 지낸 박성수 교수가 "상담은 20세기 인류 지성이 발전시킨 최고의 지적 결정이며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정밀하고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상담은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개발해내는 힘과 지혜와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고 표현한 말에서 큰 용기를 얻으면서 '나의 상담'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p. 54). 상담의 핵심목표 : 삶 속의 삶을 찾아서 그동안 상담과 관계되는 다양한 일을 해오면서 나는 '내담자들이 왜 상담을 받으러 오는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내담자들은 두 가지 이유로 상담을 받으러 온다고 확신한다. 첫째는 '되고 싶은 자기가 되기 위해서', 즉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싶어서 상(p. 56)담자를 찾는다. 둘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하고 싶기 때문에', 즉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하여 자기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인식하기 위하여 상담을 받으러 온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 '되고 싶은 자신'이 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상담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상담은 의미 있는 삶을 찾으려는 인간의 가치 지향적인 목적에서 출발하여 인문적 자기성찰 과정을 통해 그 목적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나아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본성과 잃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언어를 찾도록 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상담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천착하는 인문학의 기본 가치'를 토대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과정은 언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언어의 예술인 문학의 효율성'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급변하는 현대사회는 인간을 무한 경쟁의 세계로 몰아가면서 광속의 속도로 인간이 움직여 주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본인의 능력과는 관계도 없이 쓸데없는 열등감과 쓸데없는 우월감에 시달리고 고통받으면서 자신의 주체성이 흔들리고 타인과의 관계성은 메말라 가고 있다. 튜더는 한국인들은 엄청난 경쟁 속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고 있는 열등감과 우월감 속에서 기적을 이루(p. 57)기도 했고 그 경쟁 때문에 기쁨을 잃어 가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상담은 경쟁 세계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인문적 자기성찰을 통해 삶 속의 삶을 찾을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특별한 상담 관계를 통해서 내담자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재능을 인식하고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벗어나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고 자신의 언어를 찾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p. 58). 인문상담의 근본 핵심목표는 인문적 자기성찰을 통한 자기성장에(p. 68)있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상담의 근본이라고 믿고 있다. 상담자는 내 담자로 하여금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문적 자기성찰을 하도록 이끄는 안내자이며 격려자이며 동행자 역할을 하는 전문가이다. 그래서 나는 상담에 인문학을 접목하여 인간을 보다 입체적이고 다각적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상담의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인문상담'이라고 부른다. 인문상담은 각자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개인의 참자아를 탐색하고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담 과정이다. 인문상담은 개인의 다양한 병리적 심리 상태를 해소하고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존의 상담 수준을 넘어서 개인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문상담의 이러한 창의적인 상담 방법은 우리나라 상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인문상담의 대상은 다양한 이유로 일상생활에서의 적응이 어려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인존재의 의미와 가치, 죽음, 소외, 고독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통찰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인문상담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인문상담의 이러한 특성은 바로 인간은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무궁무진한 잠재능력과 인간만의 존엄성과 가치와 권리를(p. 69) 내부에 간직하고 있으며, 이 요소들을 찾아서 충분히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존중 상담의 원리, 목표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상담의 각 영역, 예컨대 발달단계별, 대상별, 주호소(증상)별로 실시하는 상담의 이론과 실제에 인문적인 정신, 곧 심리 문제보다 더 큰 인간 실존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을 근본 원리로 하여 진행하는 상담이 곧 인문상담이다(p. 70). '문학적인 상담'은 '문학적으로 상담을 한다'는 의미이다. 언어의 예술인 문학은 허구적인 삶의 다양한 형태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사람이 처한 환경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독자들의 예술적인 감동을 자아내고 그 은유의 빛으로 독자들이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는 예술이다. 언어를 매체로 하는 상담은 실제적인 삶 속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신체적, 심리적, 사회(p. 73)적 문제를 위시하여 삶과 죽음의 실존적인 문제까지 다루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찾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분야이다. 인간의 주체성 확립과 관계성의 회복을 주제로 하는 문학과 상담이 추구하는 목적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문학과 상담을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한다면 상담을 더욱 깊이 있고 차원을 높이며 상담의 지평을 넓혀주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의 내용에는 상담의 주제가 포함되어 있고 상담 과정과 내용에는 문학적인 특성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문학의 특성을 활용하는 상담을 '문학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p. 74). 그렇다면 문학은 상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문학은 상상의 이야기이고 상담은 실제 삶의 이야기인데 이 둘이 어떻게 서로 만날 수(상호보완) 있는가? 문학상담이 가능한 것은 문학작품 속에 상담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들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 가고자 하는 상담 과정의 내용이 문학작품 속에서는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다. 더 나아가 문학은 상담 과정에서 빠질 수 있는 경험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인생 체험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기술하는 문학은 구체적인 묘사로 우리의 몸과 감정, 정서를 건드리면서 우리의 체험을 일깨워 준다. 상담 과정에서는 상담 언어로 살아 있는 경험이나 구체적인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우리의 체험을 일깨워 준다. 문학상담에서는 상담 과정을 좀 더 깊이 있고 차원을 높이기 위한 매체로서 문학작품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문학감상이나 서평과는 다르다. 문학상담에서 문학작품을 활용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품의 내용에 반영되어 있는 저자 또는 주인공의 문학적 은유(p. 83)를 음미하고 문학적 담론을 상담적 담론으로 바꾸어서 자유로운 자기 성찰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상담의 접근은 문학적 사고와 표현력과 통찰력의 훈련을 위해서도 기능할 수 있다. 문학상담에서 '문학'이란 반드시 문학작품만을 뜻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학의 근본인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모든 언어활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김대행 교수는 그의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문학이란 일상이라고 설명하면서, 우리가 하는 말과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했다. 문학은 '우리가 쓰는 언어'를 쓰며, 문학 안에 담긴 삶은 '우리 삶', 즉 '일상적 삶'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보다 정교화되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문학상담은 그런 말과 이야기를 통해 상담을 하는 것이다(p. 84). 문학상담의 특성 문학상담의 특성은 상담의 과정과 내용에 있으며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설명한다. 첫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문학작품을 활용하는 것이지 문학작품을 비평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상담은 문학작품 속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내적인 갈등을 포함한 다양한 문제를 상담의 과정에 대입하여 문학작품의 은유를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는 상담의 모든 활동을 뜻한다. 둘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언어활동인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정교하게 문학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에서 언어활동을 활용하여 내재된 잠재력을 실현하며 성장하는 총체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돕는 모든 활동을 뜻한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로 구현되는 문학활동을 통해 한 인간의 자기서사(Self-narrative)를 재발견하고 재구성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세계-내-존재'로서의 의미를 새롭게 형성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p. 91). 셋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문학작품이나 언어활동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상담이다. 넷째, 문학상담은 문학작품을 매개로 자신의 감정과 신념이 녹아 있는 자기서사로 읽어내고 그 서사에 부여된 의미와 새롭게 부여할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 그리고 환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참자기를 찾는 것과 또한 위기와 갈등을 자기 됨의 필연적 부분으로 파악하고, 자기 자신을 언어화함으로써 삶의 부조화와 분열을 극복하도록 돕고 발달과 성숙을 통한 총체적 성장을 돕는 것이다. 다섯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내담자의 표면적인 증상을 뛰어넘어 실존 문제(죽음, 고독, 분노, 용서, 선택, 생의 의미 등)를 토의하고, 내담자를 '전체적인 인간'으로 대하면서 그 결과로 인생의 의미, 인간적인 성장, 자기다운 삶의 보람을 깨닫는 경험을 얻도록 한다. 내담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인간의 실존 문제를 고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문학상담은 인간중심상담이고 실존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적 수용, 공감, 명료화, 적극적 경청, 상호신뢰, 진정성, 한결 같음 등은 인간중심상담에서 추구하는 것을 문학정신으로 하는 것이다. 실존적 상담에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심리적 삶의 세계에 있는 추(p. 92)상적이고 철학적인 이슈들을 검토하고, 상담의 기술보다도 삶과 죽음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선호한다. 문학상담에서는 인간중심상담과 실존상담에서 추구하는 요소들을 융합하여 문학적으로 상담 과정과 내용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일곱째, 문학상담에는 특별한 매뉴얼이나 정해진 기술은 없으나 상담사례를 정확하게 기록하여서 문학상담의 효과를 검증한다. 문학상담의 과정을 통해서 내담자는 문학작품 속에서 얻은 '시간'과 '감정'과 '자기존재의 의미와 이해에 관한 새로운 지평'에 대한 '앎'을 '삶'의 현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학상담은 내담자에 따라 창의적인 방법으로 진행되며 결과는 다양하기 때문에 통계적 처리로는 그 결과를 측정할 수 없다(p.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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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상담의 흥미로운 접근 방법, 문학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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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의 지혜
- 이 책의 저자는 호스피스 의사이다. 수많은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일이 없는 것처럼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한다’는 것이 큰 울림을 줬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됐지만 찾아서 읽어볼만한 책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편안하게 삶을 끝내는 환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웰다잉 지도자 자격증도 보유하지 않았고, 입관 체험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전 의료 지시서나 유서 등으로 삶을 미리 정리해둔 사람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 가지는 '나쁜 소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고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한 가지는 '긍정적인 죽음관'이다. 죽음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죽음관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 보냈거나 죽음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자식을 앞세운 사람이나(p. 37) 장애인이 남들보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져서야 죽음에 대해 생각한 다. 긍정적인 죽음관도 나쁜 소식을 안 후에야 가질 수 있다. 나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죽음관도 없는 셈이다. 문제는 가족 사이의 정이 두터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쁜 소식을 알리는 걸 힘들어한다는 사실이다(p. 38). '나쁜 소식을 알면 빨리 죽는다'는 근거 없는 상식은 환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친다. 가족들은 자신의 병명을 모른 채 고통스럽게 떠나는 환자를 통해 죽음은 힘들고 무서운 것이라 인식하게 되고, 환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기회마저 놓 쳐버린다(p. 45). 죽음을 외면하는 진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등 뒤로 다가온 나쁜 소식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쁜 소식 그 자체가 불행은 아니다. 나쁜 소식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 않기 위해선 떠나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슬픔을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 머릿속이 하 얗게 화하는 것 같은 슬픔이 지나가면 평온이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떠날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에 서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응어리진 일에 관해 화해하며 서로의 슬픔을 애도하고 위로할 것이다. 그것이 진짜 해피엔딩이다(p. 49). 암 환자의 분노에 가장 좋은 대처 방법은 무조건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다. 분노가 사그라져야 삶도 보이고 죽음도 보인다. 그때 비로소 암(p. 75)성 통증도, 삶의 통증도 치유된다. 그래도 그에게 다가온 죽음을 내쫓아줄 수 없으니, 의사로서 나는 늘 미안할 뿐이다. "낫게 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아프지 않게 해드릴 자신은 있어요." "선생님이 미안해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 병이 원래 그런걸요. 아프지만 않으면 되죠." 환자는 미안해하는 의사를 도로 위로한다. 그들의 분노는 의료진을 향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향한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오면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멀어버리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그 한마디에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통찰력이 생기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오늘도 나는 나의 환자들에게 미안하다(p. 76).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어떤 경우라도 삶의 의미를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호스피스가 하는 일도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다. 사는 것이 서툴러 노숙자가 된 사람, 돌봐줄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 너무 일찍 찾아온 병마 때문에 생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사람.... 그가 누구든 어떤 삶을 살았든, 인생의 마지막은 석양처럼 눈부셔야 한다. 우리가 서로의 어둠에 물감이 될 때 마지막 남은 인생에 황금빛 석양이 비춰진다. 그때 컬러풀 호스피스가 완성될 것이다.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p. 129).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1964년에 발표한 《죽음의 춤》이라는 책에서 암과 싸우는 어머니의 고통을 차분하게 묘사했다. 마약성 진통제가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보부아르의 어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엄청난 통증과 맞서 싸워야 했다. 보부아르는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 며 "사람이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라고 썼다. 톱니바퀴로 배를 자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것은 보부아르의 말처럼 무엇으로도 정당(p. 173)화할 수 없는 폭력일 것이다. 나는 호스피스 의사로서 당부하고 싶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 모르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나는 신이 우리가 아프지 않게 죽어가기를, 그리하여 죽음의 맨얼굴을 응시 하기를 바랐을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죽음의 맨얼굴은 평화롭다. 다만 통증 때문에 죽음이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왜곡되었을 뿐이다.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p. 174). 과일에 씨가 들어 있듯 우리 안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죽음은 나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 함께 잉태된다. 그러나 철학적인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의학적인 죽음이 다가오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맥없이 휘말리고 만다. 흔적조차 없이 소멸될 육신, 흔 자 내던져진 듯한 외로움, 암성 통증의 공포, 돌아갈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향수.... 삶은 힘들고 암과 함께 가는 삶은 더 힘들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난 말 한마디, 따뜻한 스킨십이 환자의 절망감과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외로움을 치유해야 한다. 호스피스 활동은 우리가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고 타인의 외로움을 껴안는 방법이다. 우리가 내적 자아를 만날 때, 그리하여 스스로를 더 사랑할 때, 우리의 외로움과 타인의 외로움을 보듬어 안을 수 있다(p. 189). 돌이켜보면 참 극성스럽게 살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선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다그쳤다. 살다 보면 도움이 되려니 싶어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도 이것저것 배우게 했다.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여가며(p. 205)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끌고 다녔고, 애들이 피자나 햄버거를 먹고 있으면 당장 큰 병에라도 걸릴 것처럼 야단을 치며 현미 채식을 하게 했다. 내일 편하기 위해 오늘을 피곤하게 보내라고 강요했고, 내일 건강하기 위해 오늘 맛있는 음식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어리석은 엄마에게 모든 것의 초점은 내일이었다. 어쩌면 없을지 모르는 내일을 위해 지금 있는 오늘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는 집 안을 덜 쓸고 덜 닦는 대신 그 시간에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어도 영화를 보러 나간다. 아이들에게 성적표에 적힌 숫자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고 공부하는 동기에 대해 묻는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일을 줄인다.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일을 포기하면 뜨거운 오늘이 있다. 나중에 행복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게 아닐까. 오늘을 즐기는 사람은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삶도 즐길 수 있다. 이 순간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이다(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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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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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정신과 의사가 밝히는 ‘상담이란 무엇인가?’
-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때 정부가 이것을 어떻게 덮을려고 어떤 만행을 했는지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결국 박근혜는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탄핵됐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가한 집단과 인간 군상들이 있었다. 반면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아예 거처를 안산으로 옮긴 이 책 저자같은 정신과 의사도 있었다. 많이 동의하며 읽었다. 의사라는 절대적 권위가 보장된 곳에서 나는 사람에 대한 입체적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신과 진료실을 떠나고 한참 지나서야 그걸 알았다. 진료실에 있는 동안에는 사람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입체적인 탐구에 게을러도 그닥 불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신의학 지식과 약 물치료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상담도 잘하고 싶었고 어떤 사람의 핵심적인 문제를 빠르게 파악해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도 싶었다.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의 비대칭적 구도와 지나치게 의료(p. 10)적이고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한 인간의 핵심에 제대로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진료실의 환자는 의료적• 병리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철학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영적 존재이자 예술적 존재이고 물질적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정신과 진료실 구조 안에서 자신의 '환자'를 그렇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진료실 구조 안에 있을 때 나도 그랬다. 진료실은 내 의식과 인식을 제한했다. 물론 내담자도 제한당했을 것이다. 진료실 무용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진료실 안의 심리적 구도와 공기를 바꿔야만 그 안에 있는 의사나 환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극단적일 정도로 진료실 문제를 거론하는 건 진료실을 떠난 후 내가 정신의학 방면의 직업인으로서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그간의 경험 때문이다. 진료실이 아닌 세팅에서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면서 나는 삼십 대의 안개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섬세하고 더 과감한 상담도 가능해졌다. 그토록 원했던 상담 후의 개운(p. 11)함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내담자들이 느끼는 홀가분함도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고 피부로 느낀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용한 의사가 된 것 같다. 재벌 회장이나 대통령 후보인 정치인을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들을 때, 고문생존자나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서 촛농 눈물 같은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무차별하다. 한 개별적 인간에게만 집중한다. 그런 순간 나는 예전 진료실의 의사였을 때보다 유능하다. 나와 상담한 이들의 변화와 반응을 보면서 그 사실을 순간순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진료실 밖 현장은 나의 스승이다. 그런 스승들로부터 사사받고 있고 그래서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이제 나는 더 따뜻하고 더 편안하고 더 수월하게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정신과 후배들에게도 말하곤 한다. 진짜 실력을 키우려면 병원에 있지 말고 현장으로 나오라고. 흰 가운도 없고 전문가 아우라를 지켜주는 어떤 장치도 없는 곳에서 수평적인 관계의(p. 12) 개별적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는 이는 스승이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통찰이 생기는지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의사가 아니고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의사로서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람'이 될수록 탁월한 치유자는 절로 된다. 오랜 현장 치유자의 경험으로 가지게 된, 신념에 가까운 믿음이다. 나의 진짜 사람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공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p. 13). 상담이란 건 기본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 자기 고통에 집중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갖는 깊고 집요한 감정은 다름아닌 죄의식입니다. 내가 죽인 거다, 나 때문이다, 그런 감정과 생각에 마치 늪처럼 빠져들어요. 내가 수학여행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더 힘있는 부모였더라면, 내가 안산으로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 이런 끝도 없는 '내 탓'으로 초주검이 됩니다. 생존학생이나 유가족들 거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이죠. 그런 죄의식이 너무 크면 사람은 '자기처벌'을 합니다.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는 거죠. 자기를 보호하지도 않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심리상담도 하기 어렵고 몸이 아파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지요. 피해자들의 이런 어마어마한 죄의식을 심리적으로 잘 다루지 못한 상(p. 33)태에서는 심리치유가 한발짝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 점을 간과한 채로 이루어졌던 사고 초기의 심리치유 대책들은 그러니까 피해자 개인에게는 와닿지 않는 행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거죠(p. 35). 트라우마 피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트라우마 피해자는 '외부적 요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유지해오던 심적•물적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 처한 사람이에요. '심리내적 요인'(자기 상처 등)으로 인해 생긴 정신과적 질병을 가진 정신질환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퍽치기를 당해서 머리를 다쳐 중환자실에 입원(p. 42) 하게 된 사람이지 본래 고혈압 환자였다가 중풍으로 쓰러진 사람이 아니란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마치 원래부터 환자였던 사람 취급을 하면서 치료를 하려 들면 안 되는 거죠.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당장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상담을 받고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마음을 여는 행위는 당위적인 이유로 되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설득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환자화(化)하는 듯한 전문가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자아가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저는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봅니다. 멀쩡했던 아이가 하루 아침에 그렇게 돼버렸고, 내 삶은 진흙탕 속으로 처박혀서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버렸어요. 세상이 다 무너졌는데, 정신과 환자가 되어서 나조차도 다 망가져버린 느낌(p. 43)을 가지는 것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나요.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명백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너졌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나는 정신과 환자가 아니다, 단지 힘든 상태에 처한 것일 뿐이다, 라고 느껴야 무너져내린 세상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치고 일어날 최소한의 힘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남아 있는 힘을 확인할 수 없으면 트라우마 치유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갑자기 자신을 정신과 환자 취급하는 전문가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저는 건강한 자아가 작동하는 증거로 봅니다. 세상이 무너졌는데 나까지 망가졌다고 느끼면 피해자는 더 버틸 기력이 없어요. 결국엔 삶을 놓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트라우마 피해자, 생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이들을 대하는 모든 치유행위의 전제가 되어야 해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트라우마 피해자를 정신과 환자로 취급하는 모든 행위는 피해자 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건강한 자아의 힘에 상처를 입히(p. 44)는 거예요. 그 사람이 치유과정 중에 발휘해야 하는 자기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아요. 고백 하건대 정신과 의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환자로 치환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키워진 전문가들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을 치유하는 데 이런 시각은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고 장애물입니다. 나는 이 질병에 대해서 다 알고 깨우친 자, 너는 병들고 모르는 자,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와라. 이건 명백하게 반치유적인 시각이에요. 의사가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쉽게 그렇게 됩니다.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시작한 일이 거꾸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는 거예요. 저도 여태 죽을힘을 다해서 저항하고 성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p. 45). 그렇다면 트라우마 피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유가족들에게 상담받으라고 등 떠밀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극도의 혼돈 속에 있는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껏 자기가 구축해온 모든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지만 나 자신까지 무너진 건 아니라는 걸 확인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심리적•물리적 폐허 속에서도 그 사실을 최소한의 기반으로 삼아서 일어날 수 있습니(p. 46)다. 그 힘이 있어야, 그게 살아 있어야 전문가의 도움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자기면역력이 전혀 없으면 의 사가 아무리 좋은 항생제를 투여해도 병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p. 47).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상황에 대한 자기주도권을 찾을 수 있고, 그래야만 비로소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이 생깁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문제에 대해 전문가와 상의할 수도 있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요. 불안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자기 의지가 그때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람이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울 때는 예측 불가능할 때 입니다. 혼돈과 불안이 극심해지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일어나고, 그에 압도되면 마침내 탈진하고 말아요. 무력한 상태로 추락하는 거지요. 이런 상황으로 치닫지 않 도록 막는 것이 트라우마 현장에 있는 전문가가 할 일입(p.48)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서는 제대로 된 치유는 시작도 할 수 없어요(p. 49). '상담이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내 전공은 무슨무슨 심리치료 기법이다'라며 상황보다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몰입이 더 강한 경우가 현장에서 심리상담이나 정신의학이라는 학문을 더 쓸모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이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전문지식이 현장에서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다면 그때의 전문가란 무엇일까요. 그가 그간 공부해왔던 공부는 그럼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본래 지니고 있는 무의식적 건강성, 온전함이 있습니다. 저는 병원 상담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던(p. 55) 시절보다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들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확신이 더 또렷해졌어요. 끝 간 데 없이 추락하다 벼랑 끝 나뭇가지에 간신히 걸린 듯한 아득한 존재들을 만나면서, 어쩌다 한순간에 지옥 같은 곳에 처박힌 삶들을 접하면서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확인했어요. 그것이 궁극적인 치유의 동력이자 치유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젠 한톨의 의심도 없이 확신합니다. 그래서 치유란 그 사람이 지닌 온전함을 자극 하는 것, 그것을 스스로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그 힘으로 결국 수렁에서 걸어나올 수 있도록 옆에서 돕 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거죠. 내가 가진 전문가로서의 역량이 있다면 오로지 그걸 하는 데 모두 쏟아야 한다고 느껴요. 내 지식, 내 힘, 내 명민함, 나의 분석과 계몽, 내가 배운 치유기법 등으로 사람이 구해지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고 기능적인 존재가 아니니까요(p. 56). 아무리 빼어난 이론이라도 이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그것이 가장 근원 적인 치유적 태도라 생각해요. 울어야 할 상황인데 울지 못하면서 생기는 복잡하고 초조한 마음, 자신에 대해 드는 이상한 생각들, 그런 것들을 알아주고 공감해줄 수 있 어야 편안하게 울 수 있어요. 울어야 한다고, 안 우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고 채근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면 저절로 울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론 너머의 이론이에요. 그런데 치유라는 것이 어떤 것이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 이론적인 틀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접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공부한 것 때문에 방해를 받는 거예요. 공부가 덫이 되는 거죠. 사람의 마음을 공부한 사람들, 그런 지식이 많은 사람(p. 72)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p. 73). 사람 마음에 대한 진짜 공부를 원한다면 우선 자격증에 대한 이상화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짜 공부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요. 사실 자격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상당 부분 이런 자격증 중시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격증이나 학위, 자기 실력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가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심리상담과 관련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도 별도의 수련 기간이 따로 있고요. 그 끝에 얻는 것이 관련 자격증입니다. 그런데 자격증이 있어도 직업적 전망이 매우 암울한 수준인 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손에 잡히는 뚜렷한 열매가 없는 길을 다른 분야보다 더(p. 122) 오래, 더 많은 비용을 들이며 공부하다보니 자기가 가진 자격증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그 학문이나 이론에 대한 보수화 경향이 더 강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는 것에 매우 심하게 저항할 수밖에요. 그러다보니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한 공부, 내 자격증의 효용성 자체에 더 많이 몰두하기 쉽습니다.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 대한 생생하고 뜨거운 집중과 주목 없이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요. 전문가 집단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건 그동안 현장에서 이런 모습들을 너무 많이 접했고 그러면서 깨달은 경험칙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진짜 공부가 하고 싶다면 너무 고생스럽게 학위를 따는 건 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게 의미없다는 게 아니고 자격증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p. 123) 봐왔습니다. 학문과 학위에 대한 이상화 또는 불필요한 거품을 걷어낼 수 있다면 진짜 공부에 접근하는 것이 더 수월할 거라 생각합니다(p. 124). Q. 세월호 참사와 같은 트라우마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심리적 문제와는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트라우마에 대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은 없을까요? A. 유가족 부모들이 아이가 떠났다는 걸 빨리 인정해야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도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많은 분들이 합니다. 그런 얘기들 때문에 유가족들이 계속 상처를 받고요. 그게 왜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지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기억이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억이란 끊어낸다고 해서 끊어지는 게 아니죠. 사고가 나서 다리나 팔을 절단한 사람이 수술 후 마취에서 막 깨어나면 절단해서 없어진 부분에 통증을 호소한다고 했잖아요. 이런 걸 '환상통'이라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없어졌어도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붙어 있는 거죠. 기(p. 134)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종료되었다고 마음에서도 딱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나 컴퓨터죠.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서 영화를 보여주는데 한 집단은 영화를 끝까지 다 보여주고 다른 한 집단은 결말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수개월 뒤에 이 두 집단에게 그때 봤던 영화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집단이 더 분명하게 기억할까요? 영화의 결말을 보지 못한 집단이 영화에 대해 더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 집단은 처음부터 결말 까지 다 보았기 때문에 완성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단은 완성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결말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는 거죠. 사람은 욕구가 충족되면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거기서 계속 멈춰 있게 되고요. 모든 인간은 완료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갑자기 자녀와의 관계가 뚝 끊어져버린 거예요(p. 135). 그러니 완료되지 않고 도중에 중단된 그 관계를 마음 안 에서 충분히 완료할 수 있도록 곁에서 심리적으로 도와줘야 해요. 그래야 이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도의 과정이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애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애도하려고 하면 불안해서 막아요. '이젠 그만 울어야지, 이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말해요. 어떻게 보면 유가족 입장에서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만큼 하고 싶은 얘기가 또 없어요. 그런데 누구하고도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으면 혼자 생각하고 곱씹고 또 곱씹게 되죠. 결국 평생 그 기억 언저리에서 배회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한 한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가족들이 아이에 대해 더 얘기하고, 더 많이 느끼게 해서 마음속에서 완료되지 않고 중단된 것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해요(p. 136). Q. 전공서적을 모두 정리하고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만 남겼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는 데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이 도움이 되나요? A. 그럼요. 심리학 공부를 하다보면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 그들이 주창한 개념과 틀을 중심으로 사람을 분석 하고 해석하게 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이론과 개념이 전부인 것처럼 절대화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사고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전문가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아무리 탁월하고 근본적인 이론이라 해도 어느 한 학자의 개념과 틀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이 얼마나 많고 깊은데요. 사람을 깊이 접하는 시간이 많아 질수록 그런 사례를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p. 143).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니 이해하고 접근하기가 막연하고 모호합니다. 어둠 속을 걸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지팡이가 있으면 그에 의지해서 주위를 천천히 더듬으면서 감을 잡고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할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둠 속에서 내 시력으로도 주위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면 지팡이 끝으로만 세상을 인지할 필요가 없잖아요. 내 눈을 통해서 내 주변이 어떠한지 통합적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끝'으로 더듬어 세상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도구가 심리학 지식이라면, '내 시력'으로 세상을 '통합적으로 인지하는' 강력한 도구가 문학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분적이기보다 통합적이고, 분석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입체적 입니다. 인간을 유형으로 말하지 않고 한 인간의 개별성에 끝까지 집중합니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인간에 대한 치유적 접근에 적합한 도구입니다. 심리학 공부는 지팡이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p. 144). 정신의학, 심리학 분야도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 중심, 학문과 학파 중심의 전문가가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 중심의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전문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걸 치료가 아닌 치유의 영역이라 명명했습니다. 치유의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이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죽기 전날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특급호텔의 요리를 꼽는 사람은 없습니다. 엄마가 해주었던 김치찌개나 어릴 때 외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같은 것을 떠올리겠지요. 전문가(p. 149)적 치료가 칠성급 호텔의 요리라면 엄마나 외할머니의 밥상이 치유입니다. 우리가 모두 요리사 자격증을 가질 수 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요리를 못 먹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집밥을 오래 못 먹으면 심리적으로 황폐해집니다. 전문가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삶에 그닥 관계없는 분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일상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삶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빛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다, 그걸 아는 게 사람 공부의 끝이고 그게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그게 사람 공부에 대한 제 결론입니다(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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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자기 주변 물건에 대한 사색
-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물건들과 함께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물건들과 인간 사이에는 서사가 생긴다. 저자도 책에서 밝힌대로 나이를 먹으니 물건을 덜 사게 된다. 사람과도 사물과도 관계 맺는 것이 번거롭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과 관계 맺지 않고 심플하게 살고 싶다. 고대 철학의 역사를 가볍게 풀어낸 책 《그리스 철학사 1》에서 저자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는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페피노 루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소 할아버지는 대학교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쓰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인생철학'은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고대의 물활론의 연장선에 있다. "공장에서 만들어 낸 모든 장난감이 즉시 영혼을 갖는 것은 아니오. 천만의 말씀이지. 그 순간에는 그저 단순한 물건일 뿐이오. 그런데 어떤 어린애가 인형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의 영혼이 플라스틱 사이에 스며들어 생명을 가진 물건으로 바뀌어 가는 거요. 그렇게 되면 비록 부서지고 상처 난 인형이라 하더라도 버릴 수 없는 생명체 로 바뀌는 거고 말이오" 나는 이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사람이 홀로(p. 20)선다는 것이 나를 아껴 준 사람의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라면 곧 나를 아껴 준 사람의 영혼과 작별하는 일일 터이다. 그래서 단번에 할 수 없고 세월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물건과 오랜 시간에 걸쳐 나날이 작별할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나라는 사람. 나는 그 아침, 이 가혹하고 부조리한 진실을 깨닫고 눈앞이 빙빙 돈 것인지도 모른다. 늘어나는 책들을 입주시키기 위해 어떤 책장을 마련할 것이냐 하는 고민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그 고민은 고스란히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과정 일터. 나는 책이 든 상자를 성급하게 풀지 않겠다(p. 21). 친구들의 하소연에서 시작된 비공식 탐구에서 나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바람을 얻었다. 엄마가 물려준 살림살이가 우리의 주방을, 아니 집 전체를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에서 영영 멀어지게 만들어도 딸들은 살림살이를 모으며 취향을 키우고 만족감을 느꼈을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엄마들은 그 귀한 살림살이를 당근에 내놓자고 설득하는 딸들을, 혹은 몰래 내다 파는 딸들을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 저 나름대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터이다(p. 48). 마음에 꼭 들지 않으면 사지 않기,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워지는 물건을 사기, 그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물건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남에게 주거나 버리기. 가만 보니 이 원칙은 새 인연을 만들 때도 쓸 수 있겠다. 특히 폐기가 쉽지 않은 인연을 맺으려는 사람들은 꼭 참고 바란다(p. 107). 한편 부모 잘 만난 번역 프리랜서가 뜨끈한 방구석 책상 머리에 앉아 맥이 어쩌고 윈도우가 저쩌고 인간성이 어쩌고 주체성이 저쩌고 할 때, 다른 한편에는 화장실에 갈 시(p. 140)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터에서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하루 일해도 하루 먹을 임금조차 주어 지지 않는다. 인간은 때가 되면 먹고 때가 되면 배설을 해야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기계에 끼이면 팔다리가 잘리고 높은 데서 떨어지면 죽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 취급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으려는 세력은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하고 우리와 남을 구분해서 착취를 합리화한다. 이는 인간 역사에서 무수히 되풀이되었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1세기가 되면 로봇이 반란을 일으킬 줄 알았건만 반란은커녕 기계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날은 요원하고 일단은 인간의 밥줄을 위협하는 중이다. 한쪽에서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고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의 디자인을 따지는 사람이 있으며 또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에 사람이 깔려 죽는 지금, 지금은 2022년이다(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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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재미로 하는 독서가 행복을 준다
- 전직 판사 문유석 작가의 독서에 대한 책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독서가 쾌락이었다고 했다. 동감이다. 공부할 때는 억지로 읽어야 하는 책들도 있지만 나만해도 이제는 재미로 읽는다. 재미있는 게 많은데 굳이 재미 없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고역일 것이다. 내게 독서가 재미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쯤 되니 독서를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한 나 자신이 무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도대체 『책은 도끼다』 같은 책은 어떻게 쓰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 폭포수 쏟아지듯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당최 그 정(p. 83)도로 섬세한 감성이라고는 타고나지 못한 시큰둥한 나 자신을 잠시 원망해보았지만, 뭐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독서도 이런 독서도 있고 저런 독서도 있는 거다. 카프카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쳐서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는 거냐며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일갈했지만, 수사법은 수사법일 뿐, 책은 도끼일 수도 있고 심심풀이 땅콩일 수도 있고 잠을 재워주는 수면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책마다 사람마다 다양한 용법이 있기 마련이다. 심심풀이 땅콩 얘기를 하고 보니 내가 청소년기에 길고 긴 소설을 좋아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릴수록, 젊을수록 하루도 길고 일 년도 길고 남아 있는 살아갈 나날은 끝도 없어 보였다. 시간은 언제나 무한정 남아도는 백사장의 모래알 같은 것이었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재미있는 소설 하나를 발견하면 "우와, 한동안 재미있겠다!" 하며 신이 났고, 게다가 그 소설이 열 권 스무 권 밑도 끝도 없이 길기까지 하면 두고두고 퍼먹을 꿀단지라도 발견한 기분이였던 것 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달라져버렸다. 대하소설은커녕 조금만(p. 84) 두꺼운 책 앞에서도 멈칫거린다. 사실 읽자면 지금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텐데 지레 겁을 먹게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루도 짧고 일 년도 휙휙 지나가고 남아 있는 나날이 벌써 손에 잡히는 것만 같다. 내일이 없는 사람마냥 여가가 생겨도 그저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먼저 이리저리 찾다가 오 히려 아무 재미도 없이 흘려보내고 말 때가 많다. 열 권 스무 권짜리 책을 잔뜩 쌓아놓고 마루를 뒹굴거리며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던, 해가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던 8월 여름방학의 나날들이 그립다(p. 85). 편식 독서법 책 수다도 많이 떨고 여기저기 독후감도 올리고 하다보니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나의 답은 '대충 읽는다' '내가 재미를 느끼는 부분 위주로 읽는다'다. 편식 독서법이랄까. 엄마가 억지로 먹으라는 토란국은 국물만 몇 수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소시지야채볶음은 소시지만 쏙쏙 골라 먹는데, 운좋게 킹 크랩을 먹게 되면 마지막 다릿살 하나까지 꼼꼼히 발라먹기 마련이다. 모든 음식을 똑같이 정성스럽게 먹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부분만 먹고는 다음 음식으로 넘어간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부위는 천차만별. 난 내(p. 167) 취향의 책을 골라서, 그 책 중에서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휙휙 넘기며 읽는다. 어떨 때에는 한 책에서 단 한 장면, 단 한 구절만 맛있을 수도 있고, 기적같이 한 문장 한 문장 전부를 꼭꼭 씹어 먹으며 맛있어할 수도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계속해보겠습니다』, 『아랑은 왜』 『청춘의 문장들』이 쫀쫀하게 모두 맛있는 책들이다. 다만 내 취향의 '편식 독서'라도 많이 하다보면 점점 그와 연관된 다른 메뉴들도 찾게 되는 것 같다. 음식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같은 이치로 읽어봐도 선뜻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 책은 잘 읽지 않는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책도 백 번, 천 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 순간 뜻이 스스로 통한다고 믿었다는데,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랬던 것 은 아닐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지식과 정보가 쏟아져나오는 시대다. 꼭 그 책이 아니어도 비슷한 내용을 더 쉽게 설명하는 다른 책들이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책을 백 번 천 번 읽고 있는 사이에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세상 자체가 달라져버린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 원전 읽기'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에 회의적이다. 지금의 세계를 이루는 사상적 기틀인 『국부론』, 『자유론』, 『법의 정신』, 『통치론』 같은 명저들도 결국 그 책들이 쓰(p. 168)인 시대의 과제를 그 시대의 언어와 감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명저라도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고 그 시대에만 의미 있었던 부분도 많다. 우리가 취할 것은 그중에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진 몇몇 부분들인데, 그런 부분들은 실상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우리가 수업시간에 졸아서 그렇지 이미 다 배운 '상식'인 것이다. 그보다는 더 깊이 있게 알고 싶다면 현대의 연구자들이 고전의 핵심들을 알기 쉽게 현대의 언어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서들도 얼마든지 많다. 유시민 작가가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고 규정하는데,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왜 소비자들이 직접 도매상, 심지어 공장까지 가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물건을 떼와야 하나? 내 아이 밥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올리기 위해 직접 도축장에서 고기를 해체해야 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원전 목록이 아니라 그중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하지만 왜곡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지식 소매상들의 목록이다. 소매상일수록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잘 골라야 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도 필요하긴 하다. 그렇다고 소매상은 미덥지 않으니 소비자들이 직접 원산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무리한 이야기다(p. 169). 외국어 학습법에도 이런 이론이 있다. C.I.와 M.I.가 중요하다는 이론이다. C.I.는 Comprehensible Input, 즉 자기 수준에서 슥 읽어서 70~80퍼센트 쉽게 이해되는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면 나머지 모르는 20~30퍼센트는 뇌 속에서 유추가 가능하므로 학습이 되는데, 절반만 이해되는 걸 읽으면 정보 부족으로 나머지 유추가 불가능하여 아무것도 머리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서도 같은 원리 아닐까. 문돌이인 내가 갑자기 유체역학 책을 읽으면 아무런 '인풋'이 되지 않는다. M.I.란 Meaningful Interaction, 즉 유의미한 상호작용이다. 언어란 암기 등 단순 인풋만으로는 내 것이 되지 않고 그 걸 써먹어야 내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과도 연관 있을 것 같다. 책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몇 가지를 글로 적어보거나 남과 수다를 떨어보는 거다. 나는 페이스북에 독서노트 삼아 짤막한 독후감을 끄적끄적 올리곤 해왔는데 결국 그 책에서 내가 내 것으로 흡수한 것은 달랑 그게 전부인 것이다. 그거면 내겐 충분하기도 하고. 다시 요약하자면, 남들이 무슨 대단하고 있어 보이는 어려운 책을 읽든 신경쓸 필요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는 게 엄청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렵다. → 고민 말고 바로(p. 170)『피케티 쉽게 읽기』, 그것도 안 되면 『초딩도 읽는 피케티』 또는 『만화 피케티』를 읽는다. 능력도 안 되는데 『21세기 자본』 원전을 꾸역꾸역 읽은 사람은 노동만 했을 뿐 아무것도 기억 못하지만 『만화 피케티』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은 그중 몇 대목만큼은 기억하고 써먹을 수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유명하다고 해서 집었는데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공감이 안 된다. 자괴감 느낄 필요 없이 좀더 재미있고 수월해 보이는 딴 책을 집어 읽어본다. 한 50페이지까지만. → 그래도 진도가 안 나간다. → 표지가 만화 같은 『미스 함무라비』를 집어든다. 이건 초딩도 읽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나름 재밌네. → 유의미한 상호작용으로 기억에 남기기 위해 완독 후 독후감을 인스타에 올린다. 뭐 이런 얘기....(p. 171). 티브이, 인터넷과 책의 차이 독서에 관한 책을 쓰다보니 자괴감이 든다. 솔직히 어린 시절과 달리 책이 최우선순위가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여유 시간이 생길 때 뭘 제일 먼저 집어 드는지 스스로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1번이 스마트폰, 2번이 티브이. 책은 3번이다. 예열이 필요 없는 순서,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순서다. 티브이로 영화 하나 보려고 해도 백 분 정도 몰입해야 한다. 그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는지, 그 정도로 재미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예능 프로 다시보기를 틀게 된다. 이건 처음이든 중간이든 아무데나 틀어서 보다가 재미없(p. 172)으면 바로 다른 것으로 넘기면 그만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자막이 어디서 웃어야 할지를 대치동 강사처럼 딱딱 짚어주기 때문에 웃기 위해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 그보다 더 간단한 것이 스마트폰 집어들기다. 아무 생각 없이 엄지를 휙휙 움직이다보면 타임 워프라도 일어난 듯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버린다. 문제는 자괴감이다. 포털 기사 댓글이나 소셜미디어에서의 끝도 없는 그악스러운 말싸움을 보다보면 인류에 대한 마지막 애정도 식어버린다. 그걸 굳이 읽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만 남는다.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생활태도를 갖고 있는 나인데도 요즘 나의 이런 모습에 대해 고민이 많다. 이 나이를 먹고도 말이다. 고민하는 이유는 비생산적이어서가 아니라, 결국은 즐겁지조차 않아서다. 티브이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얼마 동안은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콘텐츠는 언제나 부족하고, 눈은 피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중독자처럼 끊임없이 다른 걸로 다른 걸로 넘기고 넘기고 넘기게 된다. 무한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인 것이다. 내가 무슨 권독사도 아니고 책이 다른 미디어에 비해 우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쓰레기 같은 내용의 책(p. 173)도 얼마든지 있고, 티브이나 인터넷으로도 훌륭한 콘텐츠를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래도 몇 가지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선 책은 단편적인 영상이나 인터넷 게시물보다 가볍게 시작하기 어려운 대신, 별 내용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단지 습관적으로, 중독적으로 계속 보게 되지는 않는다. 종이책은 두께와 무게라는 물리적 실체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무한정 넋 놓고 보게 되지는 않는다. 무한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적절한 순간에 멈추게 만드는 피로감도 필요한 것이다. 더 중요한 장점은 보다가 딴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티브이는 기본적으로 몰입해서 보는 매체다. 콘텐츠가 좋으면 좋을수록 더욱 몰입하게 된다. 나의 속도에 맞춰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콘텐츠의 속도에 내가 맞춰 수용해야 한다. 인터넷은 그렇지는 않지만 실시간으로 쏟아져나오는 무수한 게시글과 댓글들의 속도가 수용자를 수동적으로 만들기 쉽다. '웹서핑web surfing' 이라는 표현 그대로 링크를 타고 여기저기를 아무 생각 없이 둥둥 떠다니며 표류할 때가 많다. 이와 달리 책은 수용하는 속도를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자극받는다. 내 경우, 좋은 책을 읽(p. 174)을 때면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귀퉁이를 접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바로 이 멈추었던 순간들이 독서 경험의 핵심이다. 수동적으로 내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마는 것들은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 것이 된다. 단지 텍스트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기도 하다. 3D를 넘어 4D까지 제공하는 영상매체는 오감을 압도하는 정보를 쏟아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만도 벅차다. 여백이 없는 것이다. 책은 빈 공간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끊임없이 여백을 보충하게 만든다. 상상력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만든다. 트란 안 홍 감독이 영상화한 〈상실의 시대〉를 보며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원작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내 머릿속 이미지들이 훨씬 아름답고 풍성했던 것이다. 즉각적인 반응이 특징인 뉴미디어 시대에 멈추어 생각하게 만드는 독서의 특징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일단 유보하고, 의심하고,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는 지성적 사고의 훈련은 독서에서 출발하는 것이 여전히 정도라(p. 175)고 본다. 스마트폰의 보급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며 흥분하는 이들이 있는데, 자극적인 기사 몇 줄만 읽고 바로 화르르 불타올라 십자군전쟁에라도 나선 기사가 된 양 개인 신상을 털고 '집단 다구리'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래가 두려워질 뿐이다. 하긴 십자군전쟁도 대중의 열정을 악용한 사기에 가까웠으니 인간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남용하는 이들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나치 시대의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과연 집단 지성이 발동했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성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야만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의 직접민주주의란 공포일 뿐이다. 이야기가 좀 거창해졌지만,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충일감에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루종일 티브이를 본 날,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 날, 하루종일 책을 읽은 날의 느낌은 다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책의 우선순위를 높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하루의 시작인 출근길에 단 십 분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고, 내 주변 어디든 책을 흩어놓기도 한다. 집에도, 사무실에(p. 176)도. 노력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다. 티브이나 인터넷의 무수한 선택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수시로 서점에 들러 다양한 책을 구입해놓는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은 책꽂이에 꽂지 않고 보기에 너저분할 정도로 표지가 쉽게 눈에 띄게 눕혀놓는다. 서점에서도 서가에 꽂힌 책과 평대에 누워 있는 책의 생명력은 천양지차다. 책은 고이 모셔놓기 위한 물건이 아니다. 그 좋아하던 책을 읽기 위해 이런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의 라이벌들은 막강하다. 책 중독자였던 어린 시절 정도까지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책씨, 분발해주길 바라(p. 177). 그럴 만큼 책을 쓴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굳이 쓸 리 없다. 그 재미 중 첫번째는 의외성이다. 글 이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끝으로, 또는 엉덩이로 쓰는 것 같다. 머릿속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을 옮겨(p. 180)적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아이디어 조금만 있는 상태에서, 때로는 그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자판을 두들기다보면 스스로도 생각 못했던 표현이나 명제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가끔 정말 뿌듯한 똥이 나오는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 스스로는 대견하게 느껴지는 구절이 튀어나올 때면 등골 이 짜릿하다. 그 맛에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두번째는 내 글에 반응하는 타인들을 발견하는 신기함이다. 나는 철저히 내가 좋아하는 글만 쓴다. 쓰기 싫은 글은 쓰지 않는다. 내 삶의 태도는 어릴 적부터 '재수없음'으로 요약 할 수 있다. 내가 왜?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난 그렇게 절박하지 않아. 구차하게 그렇게까지? 아님 말구. 너 아니어도 많아. 그래서 욕도 많이 먹어봤지만, 그게 나를 지키기 위한 자기암시이기도 했다. 스스로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게 차단하는 것이다. 보다 많은 것을 욕심내려면 타고난 그릇이 엄청나게 크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바꾸어 세상에 맞춰야 한다. 언제나 나 자신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덕에 내 그릇은 내가 잘 안다. 외부에서 요구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숨어버리는 체질이다. 죄송한데요, 제가 거리에 좀 민감해서요. 책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쓰면 보다 많은 이들의(p. 181)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내 셀링 포인트를 살려서 어떤 책을 쓰면 더 구매 욕구를 자극할지 출판기획자의 마인드로 생각해보면 여러 선택지가 나오지만, 우선 내가 쓰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쓰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잘 알면서도 그저 내 취향대로 쓴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묘한 친근감을 느낀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다.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굳이 사랑받고 싶지 않다. 무서운 사람도 많고 싫은 사람도 많거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편해서 좋은데, 그들로부터도 사랑까지는 부담스러우니 호감 정도 받으면 충분하다. 책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려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내가 쓰는 글을 좋아하는 취향의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님들아, 번식해라. 세번째는 스스로 책을 쓰다보면 책의 저자들이 어떻게 책을 쓰는지 그 신비의 베일 뒤에 가려진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짐작 되는 것들은 생긴다. 무엇보다, 글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건 속단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자학 취미가 있지 않고서야 숨기고 싶은 자기 위선과 추악한 치부 위주로 글을 쓸 사람은 없(p. 182)다. 어차피 글쓰기도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인스타에 셀카 올리기, 수컷 공작새의 꼬리 펼치기와 다를 바 없을 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기 장점을 어필하여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자원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인정욕구와 결부되지 않은 표현 욕구란 없다. 다른 점이라면 그걸 어느 정도로 노골적으로 하느냐, 세련되게 감추며 하느냐가 있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자기가 지금 잘난 척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는 있느냐,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바보냐 정도일 것이다. 다시 한번 겸손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고 싶기에 『판사유감』 때부터 언제나 일종의 경고문처럼 나는 원래 이기적이고 찌질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에 불과하고, 책에 나오는 글은 그런 나조차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때때로 느끼게 되는 기특한 생각들에 불과함을 밝히고 있다. 글이란 쓰는 이의 내면을 스쳐가는 그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공감을 받을 만한 조각들의 모음이다. 나는 그래서 책이 좋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이다. 그것도 쓴 사람 본인이 열심히 고르고 고른. 그게 싫고 인간들의 비열함과 어리석음, 그악스러움을 보는 게 좋다면 굳이 돈 들여서 책을 살 필요가 있나? 인터넷에만 접속해도 공짜로 무수한(p. 183)샘플을 구할 수 있는데. 그건 공기와도 같이 이미 세상에 가득차 있다. 글재주 좀 있는 자들이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걸 읽으라는 얘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구차한 자기 포장들도 있지만 아, 이건 진짜구나, 싶은 이야기들도 있다. 신기하게도 어떤 거창하고 화려한 이야기보다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시시하고 소박한 이야기더라도 말이다. 글이란 뛰어난 문장만으로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글은 결국 삶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장 하나하나가 비슷하게 뛰어나더라도 어떤 글은 공허하고,어떤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삶은 글보다 훨씬 크다. 열심히 살든 되는대로 살든 인간은 어떻게든 각자 살아야 한다. 되는 대로 살 때 더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저 솔직히 자기 얘기를 계속 쓰는 것 정도가 글쓰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그중 어떤 얘기는 좋은 글이 될 것이고 어떤 얘기는 시시한 글이 될 것이다. 그건 쓰는 이가 의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좋은 이야기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걸 더 잘 전달할 가능성이 높아질(p. 184) 뿐이다. 물론 그건 대단한 차이를 낳지만 그렇다고 돌멩이를 금덩어리로 바꾸는 연금술은 아닌 것이다(p. 185). 나는 간접경험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책을 통해 타인을 발견하고 세상을 발견해왔다. 직접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어릴 적부터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방인들 사이에 던져진 고립된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해왔다. 타인들이 성 큼 내게 다가오면 불쑥 겁부터 난다. 그것이 나의 한계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책이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이었다. 책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고통, 욕망을 배워왔다. 판사가 된 이후의 삶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 법정에서 재현되는 것은(p. 189) 실제 삶이 아니다. 재판 기록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삶이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읽고 바라보며 살아온 것 이다. 간접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 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공감이 기존의 세계를 부숴버릴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읽었던 순간, 1980년 광주에서 이른바 국가가 시민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 다. 나는 그때까지 '지금, 여기'가 아닌 먼 곳들에 대한 이야기만 읽어왔었다. 먼 옛날에 이미 시민혁명이 이루어졌고,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말이다. 교과서에서도 그게 인류 역사라고 배웠다. 그래서 난 그게 '상식'인 줄 알았다. 그 모든 믿음이 한순간에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난 그래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한다. 교과서에 몇 줄 추가된 설명만으로는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p. 190) 무서운 피물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 같아서다. 대학에 들어 간 후 접하게 된 대부분의 책들은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인간 세상이란 원래 그런 곳이 아니라는 책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그런 세상을 바꾸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책들에 대해서는 섣불리 믿음을 가질 수 없었지만(애초에 '믿음'과는 거리가 먼 체질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냉엄하게 존재하는 부조리와 타인들의 고통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점에 틀어박혀 교과서와 다른 실제 세계에 대한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내게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사당동 더하기 25』나 『힐빌리의 노래』처럼 빈곤이 가정과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책들, 『인구 쇼크』 같이 지구 곳곳에서 인구 집단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그 배경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알려 주는 책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같이 저성장시대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책들을 읽는다. 세상은 갈수록 빠르게 변화하고 복잡하게 분화되어가기 때문에(p. 191) 읽어도 읽어도 그 속도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이런 독서를 '쾌락'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의무감만으로 읽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본능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걷고 싶지는 않다는 생존 본능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몰라서 남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는 최소한의 윤리의식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잠시라도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게 해주는 책들은 나를 '눈 먼자들의 도시'에서 구원해준다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 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의 실체였다.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병균에 감염된다고 진심으로 믿은 미국 남부의 숙녀들,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 맡은 바 행정절차일 뿐 이라고 믿은 독일 공무원들, 미국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은 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킬킬대며 지껄이는 사람들, 여자의 '노'는 '예스'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믿는 남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p. 192)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말을 들으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무지는 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모든 언어가 소음으로만 들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느껴진다. 소음과 위협, 공포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불행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의외로 타협하고 수용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도 평화를 준다.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더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귀를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 나 빼고는 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p. 193) 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 '아파....' '억울해...'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어떻게 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성난 눈으로 부모를 노려보는 아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말을, 감기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신호다. 열이 펄펄 끓는 것도 우리 몸이 열심히 병과 싸우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사람은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은 실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다. 국론 분열이 사회를 살리기도 한다. 중간자들이 제 역할을 다한다면.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p. 194)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 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p. 195). 셰익스피어가 흉악범을 교화시킬 수 있을까? 여기, 독방에 갇힌 무기수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우연찮게 한 영문학 교수를 만나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게 된다. 이후 십 년간 이어진 수업의 결과, 무기수는 삶의 구원을 얻는다. 실로 놀라운 이 얘긴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라는 책의 줄거리다.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25세이던 1983년, 시카고 소재 카운티 단기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자원봉사 삼아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봉사는 2010년까지 약 삼십 년간 여러 교도소로 이어졌다. 저자는 2003년 가장 위험한 죄수를 장기간 격리수용하는(p. 196) ‘감옥 안 감옥’ 슈퍼맥스supermacx서 독방에 갇힌 적수들에게 강의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십대에 살인죄를 저질러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는 무기수 래리 뉴턴을 만난다. 이후 십 년간 그에게 셰익스피어를 가르친다. 이 책은 법관으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묘한 저항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그럴듯한' 얘기 아닌가!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면 흉악범도 교화될 거야. 어쩌면 이 역시 지식인의 선입견에 불과할 수 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지? 영문학에서 그가 갖는 위상 때문에 막연히 선택된 것 아닐까? 더구나 무기수라면 비단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뭐가 됐든 '외부 세계와 자신을 이어주는 한 줄기 통로'인 교수의 관심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을까? 교수 역시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라도 '죄수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쪽으로 애써보려 할 것이다. 실제로 사형수와 지식인 간 미묘한 관계 형성 과정을 다룬 문학도 있다.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실제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범을 장기간 인터뷰해 쓴 걸작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 주연의 〈카포티〉로 영화화되기도 했다(p. 197). 의심 많은 성격을 탓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엔 문체에서 벽을 만났다.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인데 역시 난 너무 선하고 건전하며 훌륭한 글엔 금방 지친다. 독실한 종교인이나 진실한 상담 전문가, 열정에 불타는 사회운동가의 좋은 글을 접하면 박수는 치면서도 재밌게 읽진 못한다. 내 취향은 살짝 삐딱하고(이때 포인트는 '살짝'이다, '열심히' 삐딱하면 지루하다) 느긋하며 가끔 비루한 글이다. 그래도 분명 참고할 만한 내용이었으므로 죽 읽어나갔다. 그런데 중반 이후 이런 구절들이 정신을 번쩍 나게 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범죄에 빠져들게 될까?'에 대해 너무도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살인은 열정적으로 계획한 게 아닙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멍청하게 저지른 행동일 뿐이에요." "살인을 저지 른 사람들의 상당수가 약간의 영향만 있어도 다르게 행동했을 겁니다." 책 속 경찰관 살해범의 말이다. 이는 내 재판 경험에 비추어봐도 틀리지 않다. 특히 '멍청하게'란 표현은 정말 적절하다. 악마 같은 흉악범이 계획적으로 벌이는 살인은 드물다. 평범한 사람이 사소한 분쟁에 휘말려 순간 울컥해 저지르는 범행이 더 많다. 심지어 동네에서 막걸리 내기 윷놀이를 하던 오십대가 옆에서 자꾸 귀찮게 훈수하는 이웃을 때려 숨(p. 198)지게 한 경우도 봤다. 이 책엔 비행청소년이 많은 한 고등학교에서 십대 때 살인을 저지른 죄수들의 충고를 녹화한 동영상이 상영되자, 그 어떤 교사 애기도 듣지 않던 소년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일화 도 등장한다. 해당 동영상을 본 소년들의 반응은 이랬다. "형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어떤 교사도 그 말을 더 낫게 얘기하진 못할 것 같아요."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얼마나 신세를 망칠지 당신들이 얘기하고 있었다는 거죠. 당신들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면 난 잠을 잤을 거예요. 그래서 절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던, 막가는 소년들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엔 귀기울인다. 저자는 살인 등으로 종신형을 받은 소년 죄수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각색 작업을 맡겼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이들은 사랑 얘기가 아니라 (로미오처럼 착한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압박하는) '또래 집단의 압력'에 작업의 초점을 맞췄다. 이들의 각색 희곡은 로미오가 '티볼트'를 죽이고 경찰에 체포되는 걸로 끝난다. 이 희곡으로 연극을 공연한 후 소년수들은 말했다. "전 열네 살에 살인으로 교도소에 들어와 199년형을 살고 있습니다." "전 열일곱 살에 교도소에 들어와 가석방(p. 199)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습니다. 절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 다." "우린 여러분이 로미오의 잘못에서 뭔가 배우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잘못에서도." 래리 뉴턴은 베이츠 교수의 '교도소 제자'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고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영문학자들이 놀랄 정도로 셰익스피어에 관한 독창적 글을 많이 남겼다. 오랜 수업 끝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가 저지른 폭력 행위와 이 모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칭찬받고 싶은 사고방식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어요. (....) 이젠 남들에게 인상을 남기는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제 지적 능력이나 뭐 그런 걸로요." 소외 계층 청소년이 그리도 쉽게 범죄에 빠지는 이유 중에는 '내 소속 집단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가정과 사회에서 이들의 인정욕구를 충족시킬, 보다 나은 집단에의 소속감을 제공해주지 못한 결과가 범죄로 연결되기도 하는 것이다. 소년범들과 대화를 나누던 베이츠 교수는 그들의 범죄 경험이 대부분 7~8세 때 시작된다는 얘길 듣고 놀란다. 한 소년범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곱 살부터 열 살까지의 아이의 경험이 십대와 성인으로서의 행동을 결정해요." 교육 전문가나 심리학자의 말이 아니라, 소년범의 말이다(p. 200). 실제로 베이츠 교수가 가르치던 소년수 한 명은 전학을 자주 다니던 아이였는데 가벼운 장난 몇 건 때문에 교사의 미움을 샀다. 교사는 그를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세워둔 채 한 학기를 보내게 했다. 이후 소년은 거리로 나섰고 그의 인생은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 소년수는 말했다. "학생을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두면 그는 자라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 거예요." 베이츠 교수와의 셰익스피어 수업을 통해 놀라운 지적 성장을 이룬 래리 뉴턴이 한 학술지에 기고한 에세이가 있다. 그중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수많은 죄수들이 결국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 어떤 종류의 죄수가 여러분 옆에 살길 원하십니까? (...) 여러분에겐 그들이 좋은, 혹은 나쁜 이웃이 되도록 도와줄 힘이 있습니다. 교육만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과학입니다." 그렇다. 죄수들 중 대부분은 결국 사회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들을 모두 사형시키거나 무기 복역시키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이 점을 쉽게 잊곤 한다. 그래서 범죄자들에게 어떤 고통을 가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고,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일 때가 많다. 범죄자들은 선천적으로 위험한 괴물이고, 장기간 사회(p. 201)로부터 격리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범죄자가 구제불능의 괴물일까. 히스 형제의 책 『스위치』에 어린 자녀를 구타해 골절상을 입히는 등 아동학대 부모들을 대상으로 행동치료를 수행한 사례가 나온다. 처음 부모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녀와 매일 단 5분씩만 놀아주는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은 아이들에게 완전히 집중해야 한다. 전화도 받지 말고, 뭘 가르치려 들지도 말고, 아이들이 놀이를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부모들은 명령을 내려서도 안 되고, 비평을 해도 안 되고, 질문을 던져서도 안 된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면 부모도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 아이가 부모의 크레용을 빼앗으며 "나 이거 할래!" 하고 외치면 마음껏 쓰라고 내주고 다른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다. 아이가 심술궂게 또 부모가 쓰는 크레용을 못 쓰게 하면 그에 순순히 따른다. "네 말이 맞아. 이 색은 어울리지 않는구나." 아동학대 부모들에게 이 5분은 무척이나 힘든 시간이었다. 자기통제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동 중심 상호작용이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칭찬하는 법,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면서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법 등을 배우게 된다. 110명의 학대 부모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p. 202) 절반은 일반적인 분노조절 요법 치료를, 나머지는 위와 같은 부모-자녀 상호작용 치료를 받았다. 치료 후 3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전자의 60퍼센트가 다시 아동학대를 한 반면, 후자의 20퍼센트만이 다시 아동학대를 했다. 아동학대 부모 중 상당수는 선천적인 괴물이어서 아이를 때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너 살짜리 아이들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이 교육 방법에 대해 무지했다. 제대로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교육받자 그들 중 80퍼센트가 아동학대를 멈추였다. 내 재판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범죄자 중 다수는 가정과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교도소에서라도 이들이 제대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이들 모두를 영원히 가두어 둘 수는 없고, 이들 중 대부분은 언젠가는 이 사회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래리 뉴턴의 에세이는 정확히 이 지점을 포착하고 있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라는 첫 의문에 대해서도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갱스터 생활을 하던 소년수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목한 지점은 (내가 생각조차 하지 못 했던)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또래 집단의 압력'이었다. 뉴(p. 203)턴의 셰익스피어 해석이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도 당연하다. 그는 일반인과 다른 지점에서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다양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시대는 바뀌어도 인간의 욕망과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간들의 오욕칠정을 풍부하게 담아낸 고전은 거울이다. 그 앞에 서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마는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난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을 발견, 탐독하면서 현란한 언어유희의 묘미에 빠졌었다.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그 정도였다. 반면, 소년 시절에 폭력• 마약• 살인을 저질러 지하 독방에 갇힌 무기수들은 교육 수준에 관계없이 셰익스피어를 통해 천국에서 무간지옥 바닥까지 경험한 것이다(p. 204). 일자리를 빼앗기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 거라는 공포의 밑바탕에는 '노동' '쓸모' '일' 등에 관한 오래된 관념이 있다. 하지만 이런 관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인간이 바꾸어온 것 아닌가. 영국의 1833년 공장법이 9세 미만 아동 고용 및 18세 미만 소년의 야간노동을 금지하자 공장주들은 시장 경제에 대한 부당한 개입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이들이 지금 시대의 의무교육을 보면 어리둥절할게다. 어린 녀석들이 자기 밥벌이를 하기는커녕 세금으로 공짜로 공부를 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하고. 탄광 노동자들에게 하루 열몇 시간씩 석탄을 캐도록 시키던 이들이 오후 네시에 퇴근하는 현대 유럽의 사무직 노동자들을 보면 이 미친 시대에는 그냥 앉아서 잠깐 놀게 하고는 공짜로 돈을 준다고 놀라(p. 227) 자빠질 거다. 시대가 달라지면 관념 자체도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알파고 이후 쏟아진 온갖 요란한 기사들 보다 '멍때리기 대회' 기사가 더 혁명적인 함의가 있다고 느꼈다. '미래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지?'라는 질문만 하지 말고 그런데 우리는 꼭 일을 해야 되나? 그런데 일이라는 게 뭐지?'라는 질문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기계에게 일을 빼앗기는 상상만 할 뿐 기계에게 일을 시키고 우리는 노는 상상은 하지 못할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시대에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과거 시대 사람들 눈에는 그냥 쓸데없는 놀이나 미친 짓일 뿐일 거다. 혀와 배꼽에 피어싱해주는 직업, 프로 스케이트보더, 먹방 찍어 돈 버는 유튜 버들,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유행의 패션 산업... 인간이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유희의 축적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곤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여전히 동굴 생활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쾌락은 우리를 단조로운 동굴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모험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쾌락의 카탈로그를 늘리고 늘리며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재미도 없는 성공충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엔 즐기는 자들이 이길 것이다(p. 228). 미래는 결국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다. 자기실현적인 예언이다. 다수가 공유하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것이 곧 법이 되고, 도덕이 되고, 가치가 된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 발전도 인간들의 무수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패턴화해 모방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현재의 사회부터 바꾸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쓸모'가 없어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지 궁금하면 지금 이 사회가 탑골 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편의점 알바 청년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의 눈부신 과학 발전이 낳을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의 분배 구조를 보면 된다. 더 먼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그와 결합한 신인류가 평범한 인간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 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p. 229). 통근길의 고통을 반전시킨 계기는 전철 승객들의 분포도 및 승하차 패턴 학습, 그리고 어디서 내릴지 관상 보는 법에(p. 248)서 비롯되었다. 상당 구간에서 앉아 갈 수 있게 되자 매일 책 을 들고 다니며 읽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전철은 도서관이 되었고, 통근길은 견뎌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끝나가는 것이 아쉬운 즐거움이 되었다.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다. 한가한 휴일에 집에서 뒹굴 거릴 때는 등허리는 소파와, 손은 리모컨과 합체하는 폐인이 되는 주제에, 통근길 전철에서는 세상 다시없는 독서광으로 변신한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더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통근길 전철은 책이 유일한 도피 수단이던 소년기로 잠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었다. 하루 세 시간에 가까운 독서 시간이 강제로 확보되자 참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책들 중 대부분이 전철에 앉아 흔들거리며 읽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워런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 『싸울 기회』, 경제 학계 두 거목의 일대기 『케인스 하이에크』, 심지어 900쪽이 넘는 벽돌책 『빈 서판』까지 전철에 앉아 읽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진지하고 무거운 책은 지하철에서 읽고, 만화책은 조용한 곳에서 정독하곤 했다는 점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한 책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기 때문에 주변(p. 249)이 어수선해도 불편하지 않은 반면, 감각적• 정서적 체험이나 기억과 연관된 책들은 조용한 곳에서 봐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통근길 전철에서 책 읽기는 독서 시간 확보 외에도 장점이 있었다. '각인 효과'다. 오리 새끼가 갓 태어나서 사람을 보면 엄마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각인 효과처럼,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단 십 분이라도 책 읽기를 하면 뇌의 모드 설정이 그쪽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연스럽게 계속하게 되더라. 출근 때 책을 보면 퇴근 때도 보게 되고, 이어서 밤에도 뒤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되고. 반면 출근 때 페북질을 시작하면.... 이때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읽든 못 읽든 책을 들고 출근길에 나서려고 한다. 하루의 시작을 책과 함께한다는 것은 충실한 하루를 여는 좋은 방법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객차 안을 둘러 보아도 책을 들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엄청난 보물이라도 들어 있는 양 일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은 사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좀 무서운 모습이다. 사이비종교 의식 같기도 하고, 외계인이 전파로 사람들을 세뇌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을 보고 놀란 나머지 메모까지 해둔 일이 있다. 노량진에서 종합운동장 가는 9호선 안이었는데,(p. 250) 책 읽는 이가 무려 아홉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키위새나 갈라파고스땅거북을 떼로 만난 느낌이었다. 여덟 명이 사십대 정도의 양복 입은 남성이고 한 명은 영어회화책 보는 여학생. 책 제목은 『아프리카의 별』 『대장정」 『기업경영에 숨겨진 101 가지 진실』 등인데 객차 사이 통로에 서서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를 읽는 신사가 이채롭다. 아니 그거 지하철에 사린가스 살포하는 얘기.....(p. 251).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깊이 공감하는 구절을 만났다.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구아수폭포를 보고 싶다, 남극에 가보고 싶다 등 크고 강렬한 비일상적 경험을 소원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쾌락에 불과하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마치 동화 『파랑새』를 연상시키는 일견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은 굉장히 과학적인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복감에 관한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공통적으(p. 252)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어떤 '큰 것 한 방'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 생각을 확장해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 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 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멋진 몸매를 위해 굶고 운동하는 것이 유행이라 치자. 바뀌어 가는 몸매를 보는 기쁨이 이를 위한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맛집 찾아다니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 낫다. 남들 보기에 덜 번듯한 직장이더라도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을 내가(p. 253) 좋아하는 방식으로 꾸미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잘나가는 사람과 친해져보려 애쓰기보다 가족,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낫다. 습관처럼 내 곁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가 불행하면 내 삶 또한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끝에는 결국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좋아하는 책만 잔뜩 있다면 무인도에 있어도 행복할 것 같던 시절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욕심내면서 무엇에도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세상에는 크고 대단한 일을 이룬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가장 본받고 싶은 '습관이 행복한 사람'은 따로 있다. 한 세기,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고 계시면서도 아직도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분이다.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님이다. 언론은 교수님의 장수 비결에 관한 기사를 앞다투어 싣곤 한다. 사십 년째 매주 세 번은 꼭 수영을 하고, 아침식사로는 무엇 무엇을 드시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더 중요한 것들이 빠져 있는 것 같다. 교수님은 나의 처외조부 되신다. 내가 생각하는 교수님의 건강 비결은 먼저 '부지런함'이다. 이십 년째 댁에 갈 때마다 서재엔 언제나 읽고 계신 책이 있고, 쓰고 계신 새 원고가 있다. 사람들은 그동안 뭐하셨는지 묻지만 실은 언제나 똑같았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강연을(p. 254) 하셨다. 그중 어떤 것은 알려지고, 어떤 것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거리 두기'다. 총장이니 장관이니 남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탐내는 자리들에 한 점 관심조차 보인 적이 없다. 자식들 일도 그들이 묻기 전에는 먼저 말씀하지 않는다. 여기서 들은 얘기를 저기에 전하지도 않는다. 철없는 아들 걱정에 하소연을 늘어놓는 딸에게 그저 미소를 지으며 "네가 철이 나야 걔가 철이 들지" 한마디 하시더란다.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간섭하지 않는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지만 맹목적인 열정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교회나 목사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믿을 뿐이다. 뭔가에 열광하거나 뭔가에 분노해 소리를 질러대는 노인들이 가득한 시대에 그는 언성 한 번 높이는 일이 없다. 성공한 인생이라 아쉬운 게 없어 그럴 거라며 입을 삐죽일 이들을 위해 덧붙인다. 1947년 맨손으로 월남한 후 여섯 남매를 키우셨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부부싸움도 아이들이 못 듣게 방에 들어가서 하며 언제나 웃음으로 남편을 맞던 부인이 그의 기둥이었다. 그 기둥이 육십 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눈만 깜빡이며 이십 년 세 월을 자리에 누웠다. 그는 그런 부인을 차에 태워 돌아다니며(p. 255) 세상을 보여주고 맛난 음식을 입에 넣어주었다. 결국 부인을 떠나보낸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부인의 손때 묻은 낡은 집에서 홀로 지낸다. 하지만 아주 가끔 딸에게 울고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다. 정초에는 송추에 있는 이북 식당에 가서 평양냉면을 드시며 고향을 생각한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숭실학교를 다니던 고향이다. 어느 날 노교수는 딸에게 말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 감히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삶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이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습관이 행복한 사람, 인내할 줄 아는 사람, 마지막 순간까지 책과 함께하는 사람(p. 256). 에필로그 쓸데없음의 가치 내게는 큰 즐거움을 주었던 책들에 관한 기억을 신나게 써내려갔지만, 마칠 때가 되니 역시 읽을 분들의 책망이 두렵기도 하다. 독서에 관한 수많은 책들처럼 결국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책들을 소개해주겠지, 하고 기대했던 분들 말이다. 프롤로그에서도 밝혔듯이 언급한 책들은 그저 그 시기에 거기 있었기에 우연히 내게 의미가 있었다. 나는 단지 여러분에게도 그런 책들이 있을 것이니 스쳐 보내지 마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구체적으 로 책이 당신 인생에 무슨 쓸모가 있었다는 얘기냐고 묻는 분들께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p. 257).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야간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시간. 교수님이 처음에는 정해진 자료에 따라 강의하시다가 점점 관련 연구 이야기를 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에 간 구법승이 혜초 외에도 많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살아서 돌아왔는지가 궁금해졌단다. 그래서 온갖 고문헌을 추적하여 구법승들의 생환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 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 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 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p. 258). '인문학적 경영' 운운하며 문사철 공부하면 스티브 잡스같이 떼돈 벌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는 CEO들께는 죄송하지만, 잡스는 나중에 뭘 하려고 리드대학에 가서 인문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히피, 외톨이, 괴짜들과 어울려 쓸데없이 놀다가 한 학기 만에 중퇴한 후 예쁜 글씨 쓰기에 매료되어 서체학calligraphy 강좌를 청강했다. 대학 갈 때 써먹을 욕심에 논술학원 보내서 초등학생에게 어려운 책을 읽히고 있는 학부모들께 죄송하지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입시 때문에 마지못해 본 책은 한 줄도 기억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소설책,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보러 간 에로 영화는 방금 본 듯 생생하다. 글쓰기를 좋아하 여 책까지 내게 된 건 그 때문일 거다. 쓸데없이 노는 시간의 축적이 뒤늦게 화학 작용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 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물론, 슬프게도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언젠가 쓸모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실(p. 259)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또 긁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일을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면, 이 불확실한 삶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쓸모 있는 일을 이미 한 것 아닌가(p.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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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재미로 하는 독서가 행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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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제대로 된 상담이 필요하다
- 정혜신이라는 정신과의사의 책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다. 저자는 책과 책상에서 벗어나 슬픔과 고통의 현장에서 상담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롭게 경험했다. 그래서 삶을 더 깊이 있게 보고, 더 공감적인 상담과 조언을 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책머리에 누군가의 깊은 속마음을 듣고 난 후엔 꼭 묻는다. "오늘 이야기를 하고 나니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그 질문을 통해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몇발자국 떨어져서 또다른 자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속마음 말하기의 핵심이다. 속마음 털어놓는 일을 1부라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한 후의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2부다. 2부가 없다면 1부에서 생애 최초로 자신의 순정한 마음을 꺼내놓고 이야기를 했더라도 치유 효과는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고통을 치유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내 상처의 내용 자체를 드러내는 데서 비롯하지 않는다. 드러낸 상처에 대 한 내 시선이나 태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치유가 결정(p. 5)된다. 상사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사람이 그날 상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 상사와 관계가 어땠는지, 상사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등 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치열한 전장의 병사처럼 말할 때 나는 모든 체중을 실어 그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공감할수록 그는 더 격정적으로 생생하게 말한다. 그후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물으면 "내가 모멸감을 얼마나 많이 느꼈는지 알았다"거나 "내가 너무 측은하다"거나 "나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등 등 전투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지휘관의 말을 한다. 마음의 지휘관 기능이 자극되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시선이 생기면 그 전투를 어떻게 정리하고 마감할지 결론을 수월하게 내릴 수 있다.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조언을 할 필요도 없다. 상담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삶을 제대로 사는 것(1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내가 제대로 살았다는 것을 조망하고 확인하는 행위(2부)다. 병 사로서 성공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p. 6)은 나의 전투가 훌륭했고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의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인정, 그 모든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충분했다는 확인과 인정을 지휘관으로서 인식하는 2부의 행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기까지 가야 온전하고 편안한 삶, 죽음에 대한 준비를 마친 삶에 다다를 수 있다. 얼마 전 남편이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쓰러지는 일을 겪었다. 그후 두달여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죽음을 경험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더욱 절감한 것이 삶에 있어서 2부 시간의 소중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급작스럽게 이별을 한 사람들의 남은 삶이 주체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은 상당 부분 삶에 대한 정리와 확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을 때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충분히 해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해서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삶이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p. 7).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상담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은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생전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들을 기도를 통해서 아이에게 말해주고 마음을 전하고 나눌 수 있어야 부모들이 나머지 생을 이어갈 수 있어서다. 유가족 엄마들 중에는 눈을 뜨고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로 보내는 이들도 있다. 그 기도의 일부는 아이와 미처 나누지 못했던 것들을 확인하고 다시금 전하고 인정하는 일이 기도하다.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벼락같은 이별을 한 이들의 삶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벼락처럼 잃고 홀로 남거나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이별의 인사조차 남기지 못한 채 떠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둘 중 하나가 우리의 삶이다. 그동안 나는 내 삶의 전투에 매일처럼 참전하는 전투병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정지를 겪은 두달 전부터는 지 휘관의 시선으로 나의 하루를 돌아보고 그 느낌을 매일(p. 8)밤 그와 나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밤마다 정리하고 작별하고 아침이면 다시 새롭게 만난다. 삶과 죽음이 홀가분하게 동거하는 삶을 사는 중이다. 그 삶은 뜻밖에도 암울하거나 우울하지 않고 사랑이 넘치고 자유롭다. 삶과 죽음이 동거하는 삶을 또렷이 인식하기 시작한 후, 나의 매일은 꽃다발 같은 시간이다(p. 9). 세월호 참사 직후 저희 부부는 안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치유공간 이웃(이후로는 '이웃'으로 표기)이라는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긴 시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여러 치유 활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2년여가 지난 어느날 남편과 저 두 사람 다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검사 며칠 후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암이 의심되는 징후가 있다더군요. 남편은 간과 다른 한곳에 암이 의심되는데 간에는 직경 5센티미터나 되는 종양 덩어리가 보여서 전이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게는 신장과 유방에 암이 의심(p. 18)된다며 정밀진단이 필요하다고 했고요. 그 전화의 내용을 남편에게 전했더니 남편이 1분쯤 가만히 있다가 제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여한이 없다고 했지?" 제가 그렇다고 말하니 남편도 "그럼 됐어, 나도 여한이 없어" 하더군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서로 웃었습니다. 사실 그날 명동성당에서 3시간 정도 세월호 민간 잠수사들과 집단상담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잠수사들의 고통에 집중해야 하는 날이었지요. 그래서 '왜 하필 전화가 이 순간에 왔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전화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져서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못 할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담을 다 마치 고서야 알았습니다. 잠수사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제가 한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저희 부부의 건강검진 결과가 저를 심란하게 만들지 않았던 겁니다. 제 죽음을 연상케 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이 제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였습니다(p. 19). 다른 사람들 보기에 우리가 이타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도 우리가 그 일을 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 일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었던 일이 당시에는 바로 그 일이었기 때문에 한 겁니다. 언제나 그랬어요. 잘할 수 없거나 끌리지 않는 일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고 절박해 보여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개입한 일은 오래 할 수가 없으니까요(p. 21). 세월호 피해자가 아니라도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p. 26)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비난과 막말에 자기들도 똑같이 상처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상처 입힌 말이나 30년 전 아기를 잃은 엄마의 가슴을 찌른 비수는 같습니다.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다들 이제 그만하라는 말 때문에 피해자인데도 오히려 죄의식을 느끼고 있어요. '그만해라, 그 정도 했으면 됐다'라는 말 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 슬픔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극단의 고립감을 부추기는 무서운 말입니다. 슬픔 그 자체보다 더 힘든 것이 슬픔을 슬퍼하지 못 하는 거예요. 충분히 슬퍼하지 못하면 결코 그 슬픔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를 가슴 속에 묻어뒀던 많은 분들이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울고 그들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에도 딱지가 앉는 치유를 경험했습니다(p. 27).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벼락같은 이별 앞에 목 놓아 울 수 있어야 나머지 생을 비틀리지 않고 살 수 있어요. 슬픔을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슬픔에 대처하는 법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살면서 한번은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는 삶의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그만큼 압도(p. 31)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울고 있는 내 곁에 이제 그만하라고 재촉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남은 가족을 생각해야지 같은 어쭙잖은 조언 대신 내 눈물이 마를 때까지, 떠난 사람에 대해 더는 할 이야기가 없을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때까지 내 곁에서 산처럼 묵묵하고 바다처럼 먹먹하게 버텨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 수 있고 웃고 싶을 땐 마음껏 웃을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가장 빠르고 단단하게 슬픔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이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치유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진짜 사회안전망입니다(p. 33).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는 시간이 간다고 옅어지지 않지만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 슬픔은 상처의 통증과 함께 고름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그 슬픔이 충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면, 벼락같은 고통이 다 사라지진 않아도 그 상처가 피눈물이나 꽉 찬 고름 같 은 형태가 아니라 뼈저린 그리움 같은 형태로 남아요. 둘 다 아프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고름이나 피눈물 같은 상처는 사람을 뒤틀어서 이후에 맺는 관계를 꼬아놓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뼈저린 그리움은 사람을 뒤틀지 않아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상처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관계를 파괴하지도 않지요(p. 34). 가족을 잃은 고통과 슬픔을 제대로 대면하거나 치유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를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박근혜씨입니다. 그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트라우마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부모의 비극적인 사망 후 그는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슬픔을 삼키며 세월 을 보냈습니다. 정치를 시작하기 전 18년간 썼다는 일기를 보면 박근혜씨는 두문불출 집에만 있으면서 혼자 요가에 몰두하며 지낸 것 같습니다. 요가를 하도 열심히 해서 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설 정도였다고 합니다. 세상과의 관계가 모두 끊긴 채 홀로 지냈던 18년 동안 그는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공감받고 치유받지도 못했(p. 53)습니다. 슬픔이나 그리움, 무력감 등을 통제하기 위해 요가에만 집중했다고 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 사람의 감정은 서서히 마비됩니다. 결국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 단계까지 가면 겉으로는 고통을 이겨낸 듯 초연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극복이나 초월 같은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마비된 병적인 상태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씨가 보인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상처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도 그는 세월호 피해자의 슬픔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국민들이 결정적으로 분노한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씨는 오랜 세월 감정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세월호 피해자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없었을 수 있습니다. 슬픔이 넘쳐나는 경험에서 슬픔을 떼어내고 나면 뭐가 남나요? 감정을 배제했으니 정확한 사실관계만 남는 걸까요? 아닙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살만 떼어가라(p. 54)는 주문이 불가능하듯 슬픔을 유발한 상황에서 슬픔을 소거하면 그 상황을 구성하던 사실의 절반 이상이 사라집니다. 그건 이미 사실이 아닙니다. 상황에 묻어 있는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 채 그 현실을 정확하게 감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접하는 모든 상황에는 사실과 정서가 함께 존재합니다. 감정 기능이 마비되어 정서를 느끼지 못하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그러면 소통이 제 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관계는 당연히 꼬이게 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다음 단추들도 잘못 끼울 수밖에 없듯 감정을 느끼는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 대인관계든 현실감각이든 그 사람이 내리는 모든 판단이나 해석들이 줄줄이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통제하는 버릇이 가져오는 감정마비는 굉장히 큰 문제를 야기하고 끔찍한 일들을 연쇄적으로 불러옵니다(p. 55). 사고로 가족을 여럿 잃은 분에게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지금도 제 슬픔은 자주 드러내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고 후 줄곧 제 평생 다시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가족을 잃는 순간 제 삶에서 온전한 기쁨은 다 사라졌어요. 적극적으로 내 기쁨을 찾을 수는 없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 기뻐요. 그래서 누군가를 위로하는 삶을 살기로 했어요." 가족을 잃은 죄책감 때문에 내 기쁨은 용납할 수 없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 위로받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깊은 지하 동굴에 갇힌 사람이 자기 힘으로 길을 찾아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본 것처럼 울컥했습니다(p. 63).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각자가 처한 환경과 기질, 심리적 상황에 따라 다 다르지만 대개의 자살자들이 목숨을 끊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직면하는 감정은 자기모멸감과 무력감입니다. 죽을 만큼 외롭거나 자기혐오가 심할 때, 절박하게 돈이 필요하거나 통제되지 않는 통증으로 힘들 때 자기모멸감과 무력감은 극대화됩니다. 그럴 때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껏 움츠러들고 쭈그러진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모멸감과 무력감을 더 증폭시키기 때문입니다. 통장 잔고가 충분한 사람은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돈을 빌릴 수 있지만 잔고가(p. 76) 바닥인 사람은 그러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누가 잔고를 확인하자고 하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자기모멸감과 무력감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이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낄 만한 일을 하기란 어렵습니다. 당당하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힘들게 말을 꺼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하고, 세상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채 끝을 맞게 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생을 유지하는 것보다 버리는 쪽이 자기가 지키려 하는 것을 더 잘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p. 77).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 부부의 일상에 미친 영향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는 저축을 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돈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십여년 전 그간 매달 부어왔던 보험들마저 모두 해지해버렸습니다. 세월호 참사 후 안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생계를 위해 하던 일들도 다 그만두면서 가입한 실손보험 하나가 우리 부부의 미래를 대비한 유일한 장치입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생생한 삶의 현실은 노후나 미래를 대비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인지도 모른다는 자각이었거든요. 매 순간 우리 삶에 가(p. 117)장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들숨과 날숨 사이마다 죽음이 어려 있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늘 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돈을 모으는 일은 우리 부부의 삶에서 가 창 불필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지금 여기'만을 삶으로 여기고 살자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영영 못 보는 상황이 될지라도 덜 아쉽고 덜 후회스러운 삶을 사는 것 외에 미래를 대비하는 다른 방도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만 집중합니다. 많이 웃고 많이 느끼고 많이 나눕니다. 평소에 저는 "나는 한 300년쯤 산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그건 아마도 제가 선택한 제 삶의 순간들을 최대치의 밀도로 채웠기 때문일 거라 느낍니다. 두달여 전 어느날, 집에서 함께 이야기하던 저의 연인이자 친구, 반려이자 영원한 배후인 그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정지로 쓰러졌습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날 그 순간 나와 그의 동(p. 118)선이 3분만 어긋났어도 지금 이 시간은 저와 그에게는 없는 시간입니다. 반사적인 CPR과 응급시술, 입원치료를 거쳐 남편은 극적으로 회생했고 그 덕분에 우리의 일상이 다시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두달은 죽음 곁에서 지낸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고 나니 확실해졌습니다. 남편의 심정지 이후 우리 둘은 삶과 죽음에 대한 명료한 결론 하나를 얻었습니다. 죽음을 위한 대비는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없다는 것을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됐습니다. 이번 일을 거치면서 우리 부부는 거의 동시에 "이제는 진짜 죽을 준비가 된 것 같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죽어도 특별한 회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별의 위협 속에서 둘이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을 샅샅이 훑어보니 사랑하고 사랑받은 시간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확인해서입니다. 그걸 확인하니(p. 119) 이제는 언제 헤어져도 준비가 됐다는 마음이 듭니다. 여한이 없다, 미련이나 아쉬운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공포까지 밀어낼 수 있는 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더 정교하게 말하자면 '사랑하고 사랑받았다'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은 삶을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진정한 대비인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여유롭게 자신의 삶을 통째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텐데, 우리는 이번 일을 겪으며 그 시간을 기적처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축복이었습니다(p. 120). 따돌림 피해로 아들을 잃은 엄마에게 주변 사람들이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합니다. Q: 저는 40대 평범한 주부입니다.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으로 중3 아들을 잃은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의 아들을 죽음까지 몰고 간 가해 학생 중 한명은 평소 집에 놀러 오기도 하고 친구가 차려준 밥도 먹고 갈 만큼 아들과 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아들을 잃고 고통과 절망에 빠진 제 친구에게 주위의 사람들 몇몇이 "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가해 학생인 아들 친구를 용서해줘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용서하면 친구가 조금이라도 더 편 안해질까요?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요? A: 우리는 보통 슬픔,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나쁘고 자제해야만 하는 것, 결국은 나를 상하게 만드는 것이(p. 124)라는 생각을 합니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립니다. 남을 해치는 분노도 있지만 나를 지키는 분노도 있습니다. 갑질을 일삼는 사람의 일상적 분노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상대방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일방적으로 자기 감정만 분출하는 행위, 그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심각하게 더럽히고 훼손하는 것이 남을 해치는 분노입니다. 이것은 감정 표현이 아니라 감정 배설이며 심리적 폭력이고 범죄입니다. 절대 하지 않아야 하는 나쁜 일이 맞습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를 지키는 분노는 표출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그 사람 자신이 병이 들거나 망가질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침범당했을 때나 인격적 모욕을 당했을 때의 분노는 표출하는 것이 건강한 행위입니다. 충분히 표출하도록 주변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그 사람의 내면이 훼손되지 않고 지켜집니다.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엄마가 가해자에게 갖는 분노는 정당합니다. 더할 수 없을 만큼 끝까지 분노하고 증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감정을 바닥까지 다 끄집어낼 수(p. 125)있도록 누군가 전적으로 공감하고 함께 분노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분노할 수 있으면 마침내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이 더 쉬워집니다. 그러나 그런 정당한 분노를 막으면서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이미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진 사람을 다시 짓밟는 일입니다. 슬픔에 잠긴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충분히 공감해주지도 못한 상태에서 가해자를 용서하는 숙제까지 안겨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가 당장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마음껏 분노하고 그 마음을 충분히 공감받는 날들이 켜켜이 쌓이면 어느날 가해 학생에 대한 연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줘야 합니다. 용서는 그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용서를 말하는 사람은 트라우마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입니다(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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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제대로 된 상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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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상담의 흥미로운 접근 방법, 문학상담
- 문학상담은 더 넓은 인문상담의 한 분야이다. 인문상담은 철학과 문학을 포함한다. 흥미롭게 읽었다. 상담과 문학,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됐다. 6년간 상담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인본주의 심리학과 인문학적인 토대 위에서 상담에 대한 신념을 구축하게 되었다. • 상담은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인간 능력이 도달할 수 있는 무한한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지향하는 인간들의 노력으로 성장하는 학문이다. • 상담의 기초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인간 전체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에 있다. • 상담이론의 근간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도움을 받으면 개인은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성장심리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 상담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인식하는 주(p. 37)체성을 확립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행자이며 격려자의 역할을 하는 전문가여야 한다. • 결론적으로 상담은 인간의 인간되기를 도와주는 노력 그 자체이다. 인간이 각각 천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독특한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존엄성과 가치를 극대화하면서 성숙한 삶을 이끌어 주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의 시작은 상담이다(p. 38). 나는 더 넓은 지평을 향하는 상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상담은 한정적이고 표면적인 다양한 병리적 증상의 치료와 사회적 적응에 국한하기보다 개인의 전인적 성장을 도모하고 통합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여 행복한 인간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다. • 상담은 개인의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하여 자기 성찰을 통한 자신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주체성을 구축하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넓은 지평을 열어 가야 한다. • 상담 과정에서는 용기를 잃고 좌절하는 사람에게 인문적 자기성찰을 통하여 그에게만 독특한 잠재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여 용기와 도전 정신을 일깨워 주고 격려하여야 한다. • 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선한 본성을 깨닫게 하여 잃어버렸던 자신의 언어와 정서를 찾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형식적이고 수량적인 기준에 얽매여 갈등을 겪는 사람에게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자기를 표현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 상담은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결과가 서서히, 막연하게, 특이하게 나타나는 학문이다. 상담자는 상담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과 사유의 힘을 길러주고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문학적인 통찰력과 표현력을 쌓아 가도록 내담자(p. 53)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상담에 대한 나의 근본 신념과 상담의 특성을 종합하여 '나의 상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상담은 전문적 훈련을 받은 상담자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내담자와 상담 관계에서 상담 언어로 내담자로 하여금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도록 인간과 인간관계의 내면을 인문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다." 이 정의가 상담에 대한 나의 믿음을 잘 나타내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허한 말장난 같기도 해서 나는 나의 믿음대로 상담을 실천할 수 있는 학문적, 실질적 내공이 나에게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청소년대화의 광장 원장을 지낸 박성수 교수가 "상담은 20세기 인류 지성이 발전시킨 최고의 지적 결정이며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정밀하고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상담은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개발해내는 힘과 지혜와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고 표현한 말에서 큰 용기를 얻으면서 '나의 상담'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p. 54). 상담의 핵심목표 : 삶 속의 삶을 찾아서 그동안 상담과 관계되는 다양한 일을 해오면서 나는 '내담자들이 왜 상담을 받으러 오는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내담자들은 두 가지 이유로 상담을 받으러 온다고 확신한다. 첫째는 '되고 싶은 자기가 되기 위해서', 즉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싶어서 상(p. 56)담자를 찾는다. 둘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하고 싶기 때문에', 즉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하여 자기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인식하기 위하여 상담을 받으러 온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 '되고 싶은 자신'이 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상담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상담은 의미 있는 삶을 찾으려는 인간의 가치 지향적인 목적에서 출발하여 인문적 자기성찰 과정을 통해 그 목적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나아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본성과 잃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언어를 찾도록 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상담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천착하는 인문학의 기본 가치'를 토대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과정은 언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언어의 예술인 문학의 효율성'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급변하는 현대사회는 인간을 무한 경쟁의 세계로 몰아가면서 광속의 속도로 인간이 움직여 주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본인의 능력과는 관계도 없이 쓸데없는 열등감과 쓸데없는 우월감에 시달리고 고통받으면서 자신의 주체성이 흔들리고 타인과의 관계성은 메말라 가고 있다. 튜더는 한국인들은 엄청난 경쟁 속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고 있는 열등감과 우월감 속에서 기적을 이루(p. 57)기도 했고 그 경쟁 때문에 기쁨을 잃어 가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상담은 경쟁 세계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인문적 자기성찰을 통해 삶 속의 삶을 찾을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특별한 상담 관계를 통해서 내담자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재능을 인식하고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벗어나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고 자신의 언어를 찾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p. 58). 인문상담의 근본 핵심목표는 인문적 자기성찰을 통한 자기성장에(p. 68)있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상담의 근본이라고 믿고 있다. 상담자는 내 담자로 하여금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문적 자기성찰을 하도록 이끄는 안내자이며 격려자이며 동행자 역할을 하는 전문가이다. 그래서 나는 상담에 인문학을 접목하여 인간을 보다 입체적이고 다각적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상담의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인문상담'이라고 부른다. 인문상담은 각자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개인의 참자아를 탐색하고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담 과정이다. 인문상담은 개인의 다양한 병리적 심리 상태를 해소하고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존의 상담 수준을 넘어서 개인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문상담의 이러한 창의적인 상담 방법은 우리나라 상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인문상담의 대상은 다양한 이유로 일상생활에서의 적응이 어려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인존재의 의미와 가치, 죽음, 소외, 고독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통찰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인문상담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인문상담의 이러한 특성은 바로 인간은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무궁무진한 잠재능력과 인간만의 존엄성과 가치와 권리를(p. 69) 내부에 간직하고 있으며, 이 요소들을 찾아서 충분히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존중 상담의 원리, 목표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상담의 각 영역, 예컨대 발달단계별, 대상별, 주호소(증상)별로 실시하는 상담의 이론과 실제에 인문적인 정신, 곧 심리 문제보다 더 큰 인간 실존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을 근본 원리로 하여 진행하는 상담이 곧 인문상담이다(p. 70). '문학적인 상담'은 '문학적으로 상담을 한다'는 의미이다. 언어의 예술인 문학은 허구적인 삶의 다양한 형태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사람이 처한 환경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독자들의 예술적인 감동을 자아내고 그 은유의 빛으로 독자들이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는 예술이다. 언어를 매체로 하는 상담은 실제적인 삶 속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신체적, 심리적, 사회(p. 73)적 문제를 위시하여 삶과 죽음의 실존적인 문제까지 다루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찾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분야이다. 인간의 주체성 확립과 관계성의 회복을 주제로 하는 문학과 상담이 추구하는 목적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문학과 상담을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한다면 상담을 더욱 깊이 있고 차원을 높이며 상담의 지평을 넓혀주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의 내용에는 상담의 주제가 포함되어 있고 상담 과정과 내용에는 문학적인 특성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문학의 특성을 활용하는 상담을 '문학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p. 74). 그렇다면 문학은 상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문학은 상상의 이야기이고 상담은 실제 삶의 이야기인데 이 둘이 어떻게 서로 만날 수(상호보완) 있는가? 문학상담이 가능한 것은 문학작품 속에 상담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들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 가고자 하는 상담 과정의 내용이 문학작품 속에서는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다. 더 나아가 문학은 상담 과정에서 빠질 수 있는 경험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인생 체험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기술하는 문학은 구체적인 묘사로 우리의 몸과 감정, 정서를 건드리면서 우리의 체험을 일깨워 준다. 상담 과정에서는 상담 언어로 살아 있는 경험이나 구체적인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우리의 체험을 일깨워 준다. 문학상담에서는 상담 과정을 좀 더 깊이 있고 차원을 높이기 위한 매체로서 문학작품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문학감상이나 서평과는 다르다. 문학상담에서 문학작품을 활용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품의 내용에 반영되어 있는 저자 또는 주인공의 문학적 은유(p. 83)를 음미하고 문학적 담론을 상담적 담론으로 바꾸어서 자유로운 자기 성찰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상담의 접근은 문학적 사고와 표현력과 통찰력의 훈련을 위해서도 기능할 수 있다. 문학상담에서 '문학'이란 반드시 문학작품만을 뜻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학의 근본인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모든 언어활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김대행 교수는 그의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문학이란 일상이라고 설명하면서, 우리가 하는 말과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했다. 문학은 '우리가 쓰는 언어'를 쓰며, 문학 안에 담긴 삶은 '우리 삶', 즉 '일상적 삶'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보다 정교화되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문학상담은 그런 말과 이야기를 통해 상담을 하는 것이다(p. 84). 문학상담의 특성 문학상담의 특성은 상담의 과정과 내용에 있으며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설명한다. 첫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문학작품을 활용하는 것이지 문학작품을 비평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상담은 문학작품 속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내적인 갈등을 포함한 다양한 문제를 상담의 과정에 대입하여 문학작품의 은유를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는 상담의 모든 활동을 뜻한다. 둘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언어활동인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정교하게 문학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에서 언어활동을 활용하여 내재된 잠재력을 실현하며 성장하는 총체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돕는 모든 활동을 뜻한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로 구현되는 문학활동을 통해 한 인간의 자기서사(Self-narrative)를 재발견하고 재구성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세계-내-존재'로서의 의미를 새롭게 형성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p. 91). 셋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문학작품이나 언어활동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상담이다. 넷째, 문학상담은 문학작품을 매개로 자신의 감정과 신념이 녹아 있는 자기서사로 읽어내고 그 서사에 부여된 의미와 새롭게 부여할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 그리고 환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참자기를 찾는 것과 또한 위기와 갈등을 자기 됨의 필연적 부분으로 파악하고, 자기 자신을 언어화함으로써 삶의 부조화와 분열을 극복하도록 돕고 발달과 성숙을 통한 총체적 성장을 돕는 것이다. 다섯째, 문학상담은 상담 과정과 내용에서 내담자의 표면적인 증상을 뛰어넘어 실존 문제(죽음, 고독, 분노, 용서, 선택, 생의 의미 등)를 토의하고, 내담자를 '전체적인 인간'으로 대하면서 그 결과로 인생의 의미, 인간적인 성장, 자기다운 삶의 보람을 깨닫는 경험을 얻도록 한다. 내담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인간의 실존 문제를 고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문학상담은 인간중심상담이고 실존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적 수용, 공감, 명료화, 적극적 경청, 상호신뢰, 진정성, 한결 같음 등은 인간중심상담에서 추구하는 것을 문학정신으로 하는 것이다. 실존적 상담에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심리적 삶의 세계에 있는 추(p. 92)상적이고 철학적인 이슈들을 검토하고, 상담의 기술보다도 삶과 죽음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선호한다. 문학상담에서는 인간중심상담과 실존상담에서 추구하는 요소들을 융합하여 문학적으로 상담 과정과 내용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일곱째, 문학상담에는 특별한 매뉴얼이나 정해진 기술은 없으나 상담사례를 정확하게 기록하여서 문학상담의 효과를 검증한다. 문학상담의 과정을 통해서 내담자는 문학작품 속에서 얻은 '시간'과 '감정'과 '자기존재의 의미와 이해에 관한 새로운 지평'에 대한 '앎'을 '삶'의 현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학상담은 내담자에 따라 창의적인 방법으로 진행되며 결과는 다양하기 때문에 통계적 처리로는 그 결과를 측정할 수 없다(p.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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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상담의 흥미로운 접근 방법, 문학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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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의 지혜
- 이 책의 저자는 호스피스 의사이다. 수많은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일이 없는 것처럼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한다’는 것이 큰 울림을 줬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됐지만 찾아서 읽어볼만한 책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편안하게 삶을 끝내는 환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웰다잉 지도자 자격증도 보유하지 않았고, 입관 체험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전 의료 지시서나 유서 등으로 삶을 미리 정리해둔 사람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 가지는 '나쁜 소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고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한 가지는 '긍정적인 죽음관'이다. 죽음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죽음관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 보냈거나 죽음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자식을 앞세운 사람이나(p. 37) 장애인이 남들보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져서야 죽음에 대해 생각한 다. 긍정적인 죽음관도 나쁜 소식을 안 후에야 가질 수 있다. 나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죽음관도 없는 셈이다. 문제는 가족 사이의 정이 두터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쁜 소식을 알리는 걸 힘들어한다는 사실이다(p. 38). '나쁜 소식을 알면 빨리 죽는다'는 근거 없는 상식은 환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친다. 가족들은 자신의 병명을 모른 채 고통스럽게 떠나는 환자를 통해 죽음은 힘들고 무서운 것이라 인식하게 되고, 환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기회마저 놓 쳐버린다(p. 45). 죽음을 외면하는 진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등 뒤로 다가온 나쁜 소식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쁜 소식 그 자체가 불행은 아니다. 나쁜 소식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 않기 위해선 떠나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슬픔을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 머릿속이 하 얗게 화하는 것 같은 슬픔이 지나가면 평온이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떠날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에 서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응어리진 일에 관해 화해하며 서로의 슬픔을 애도하고 위로할 것이다. 그것이 진짜 해피엔딩이다(p. 49). 암 환자의 분노에 가장 좋은 대처 방법은 무조건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다. 분노가 사그라져야 삶도 보이고 죽음도 보인다. 그때 비로소 암(p. 75)성 통증도, 삶의 통증도 치유된다. 그래도 그에게 다가온 죽음을 내쫓아줄 수 없으니, 의사로서 나는 늘 미안할 뿐이다. "낫게 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아프지 않게 해드릴 자신은 있어요." "선생님이 미안해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 병이 원래 그런걸요. 아프지만 않으면 되죠." 환자는 미안해하는 의사를 도로 위로한다. 그들의 분노는 의료진을 향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향한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오면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멀어버리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그 한마디에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통찰력이 생기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오늘도 나는 나의 환자들에게 미안하다(p. 76).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어떤 경우라도 삶의 의미를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호스피스가 하는 일도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다. 사는 것이 서툴러 노숙자가 된 사람, 돌봐줄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 너무 일찍 찾아온 병마 때문에 생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사람.... 그가 누구든 어떤 삶을 살았든, 인생의 마지막은 석양처럼 눈부셔야 한다. 우리가 서로의 어둠에 물감이 될 때 마지막 남은 인생에 황금빛 석양이 비춰진다. 그때 컬러풀 호스피스가 완성될 것이다.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p. 129).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1964년에 발표한 《죽음의 춤》이라는 책에서 암과 싸우는 어머니의 고통을 차분하게 묘사했다. 마약성 진통제가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보부아르의 어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엄청난 통증과 맞서 싸워야 했다. 보부아르는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 며 "사람이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라고 썼다. 톱니바퀴로 배를 자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것은 보부아르의 말처럼 무엇으로도 정당(p. 173)화할 수 없는 폭력일 것이다. 나는 호스피스 의사로서 당부하고 싶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 모르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나는 신이 우리가 아프지 않게 죽어가기를, 그리하여 죽음의 맨얼굴을 응시 하기를 바랐을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죽음의 맨얼굴은 평화롭다. 다만 통증 때문에 죽음이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왜곡되었을 뿐이다.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p. 174). 과일에 씨가 들어 있듯 우리 안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죽음은 나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 함께 잉태된다. 그러나 철학적인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의학적인 죽음이 다가오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맥없이 휘말리고 만다. 흔적조차 없이 소멸될 육신, 흔 자 내던져진 듯한 외로움, 암성 통증의 공포, 돌아갈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향수.... 삶은 힘들고 암과 함께 가는 삶은 더 힘들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난 말 한마디, 따뜻한 스킨십이 환자의 절망감과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외로움을 치유해야 한다. 호스피스 활동은 우리가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고 타인의 외로움을 껴안는 방법이다. 우리가 내적 자아를 만날 때, 그리하여 스스로를 더 사랑할 때, 우리의 외로움과 타인의 외로움을 보듬어 안을 수 있다(p. 189). 돌이켜보면 참 극성스럽게 살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선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다그쳤다. 살다 보면 도움이 되려니 싶어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도 이것저것 배우게 했다.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여가며(p. 205)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끌고 다녔고, 애들이 피자나 햄버거를 먹고 있으면 당장 큰 병에라도 걸릴 것처럼 야단을 치며 현미 채식을 하게 했다. 내일 편하기 위해 오늘을 피곤하게 보내라고 강요했고, 내일 건강하기 위해 오늘 맛있는 음식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어리석은 엄마에게 모든 것의 초점은 내일이었다. 어쩌면 없을지 모르는 내일을 위해 지금 있는 오늘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는 집 안을 덜 쓸고 덜 닦는 대신 그 시간에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어도 영화를 보러 나간다. 아이들에게 성적표에 적힌 숫자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고 공부하는 동기에 대해 묻는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일을 줄인다.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일을 포기하면 뜨거운 오늘이 있다. 나중에 행복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게 아닐까. 오늘을 즐기는 사람은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삶도 즐길 수 있다. 이 순간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이다(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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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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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정신과 의사가 밝히는 ‘상담이란 무엇인가?’
-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때 정부가 이것을 어떻게 덮을려고 어떤 만행을 했는지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결국 박근혜는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탄핵됐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가한 집단과 인간 군상들이 있었다. 반면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아예 거처를 안산으로 옮긴 이 책 저자같은 정신과 의사도 있었다. 많이 동의하며 읽었다. 의사라는 절대적 권위가 보장된 곳에서 나는 사람에 대한 입체적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신과 진료실을 떠나고 한참 지나서야 그걸 알았다. 진료실에 있는 동안에는 사람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입체적인 탐구에 게을러도 그닥 불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신의학 지식과 약 물치료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상담도 잘하고 싶었고 어떤 사람의 핵심적인 문제를 빠르게 파악해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도 싶었다.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의 비대칭적 구도와 지나치게 의료(p. 10)적이고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한 인간의 핵심에 제대로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진료실의 환자는 의료적• 병리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철학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영적 존재이자 예술적 존재이고 물질적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정신과 진료실 구조 안에서 자신의 '환자'를 그렇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진료실 구조 안에 있을 때 나도 그랬다. 진료실은 내 의식과 인식을 제한했다. 물론 내담자도 제한당했을 것이다. 진료실 무용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진료실 안의 심리적 구도와 공기를 바꿔야만 그 안에 있는 의사나 환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극단적일 정도로 진료실 문제를 거론하는 건 진료실을 떠난 후 내가 정신의학 방면의 직업인으로서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그간의 경험 때문이다. 진료실이 아닌 세팅에서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면서 나는 삼십 대의 안개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섬세하고 더 과감한 상담도 가능해졌다. 그토록 원했던 상담 후의 개운(p. 11)함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내담자들이 느끼는 홀가분함도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고 피부로 느낀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용한 의사가 된 것 같다. 재벌 회장이나 대통령 후보인 정치인을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들을 때, 고문생존자나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서 촛농 눈물 같은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무차별하다. 한 개별적 인간에게만 집중한다. 그런 순간 나는 예전 진료실의 의사였을 때보다 유능하다. 나와 상담한 이들의 변화와 반응을 보면서 그 사실을 순간순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진료실 밖 현장은 나의 스승이다. 그런 스승들로부터 사사받고 있고 그래서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이제 나는 더 따뜻하고 더 편안하고 더 수월하게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정신과 후배들에게도 말하곤 한다. 진짜 실력을 키우려면 병원에 있지 말고 현장으로 나오라고. 흰 가운도 없고 전문가 아우라를 지켜주는 어떤 장치도 없는 곳에서 수평적인 관계의(p. 12) 개별적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는 이는 스승이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통찰이 생기는지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의사가 아니고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의사로서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람'이 될수록 탁월한 치유자는 절로 된다. 오랜 현장 치유자의 경험으로 가지게 된, 신념에 가까운 믿음이다. 나의 진짜 사람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공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p. 13). 상담이란 건 기본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 자기 고통에 집중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갖는 깊고 집요한 감정은 다름아닌 죄의식입니다. 내가 죽인 거다, 나 때문이다, 그런 감정과 생각에 마치 늪처럼 빠져들어요. 내가 수학여행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더 힘있는 부모였더라면, 내가 안산으로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 이런 끝도 없는 '내 탓'으로 초주검이 됩니다. 생존학생이나 유가족들 거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이죠. 그런 죄의식이 너무 크면 사람은 '자기처벌'을 합니다.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는 거죠. 자기를 보호하지도 않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심리상담도 하기 어렵고 몸이 아파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지요. 피해자들의 이런 어마어마한 죄의식을 심리적으로 잘 다루지 못한 상(p. 33)태에서는 심리치유가 한발짝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 점을 간과한 채로 이루어졌던 사고 초기의 심리치유 대책들은 그러니까 피해자 개인에게는 와닿지 않는 행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거죠(p. 35). 트라우마 피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트라우마 피해자는 '외부적 요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유지해오던 심적•물적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 처한 사람이에요. '심리내적 요인'(자기 상처 등)으로 인해 생긴 정신과적 질병을 가진 정신질환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퍽치기를 당해서 머리를 다쳐 중환자실에 입원(p. 42) 하게 된 사람이지 본래 고혈압 환자였다가 중풍으로 쓰러진 사람이 아니란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마치 원래부터 환자였던 사람 취급을 하면서 치료를 하려 들면 안 되는 거죠.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당장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상담을 받고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마음을 여는 행위는 당위적인 이유로 되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설득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환자화(化)하는 듯한 전문가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자아가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저는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봅니다. 멀쩡했던 아이가 하루 아침에 그렇게 돼버렸고, 내 삶은 진흙탕 속으로 처박혀서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버렸어요. 세상이 다 무너졌는데, 정신과 환자가 되어서 나조차도 다 망가져버린 느낌(p. 43)을 가지는 것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나요.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명백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너졌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나는 정신과 환자가 아니다, 단지 힘든 상태에 처한 것일 뿐이다, 라고 느껴야 무너져내린 세상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치고 일어날 최소한의 힘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남아 있는 힘을 확인할 수 없으면 트라우마 치유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갑자기 자신을 정신과 환자 취급하는 전문가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저는 건강한 자아가 작동하는 증거로 봅니다. 세상이 무너졌는데 나까지 망가졌다고 느끼면 피해자는 더 버틸 기력이 없어요. 결국엔 삶을 놓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트라우마 피해자, 생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이들을 대하는 모든 치유행위의 전제가 되어야 해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트라우마 피해자를 정신과 환자로 취급하는 모든 행위는 피해자 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건강한 자아의 힘에 상처를 입히(p. 44)는 거예요. 그 사람이 치유과정 중에 발휘해야 하는 자기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아요. 고백 하건대 정신과 의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환자로 치환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키워진 전문가들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을 치유하는 데 이런 시각은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고 장애물입니다. 나는 이 질병에 대해서 다 알고 깨우친 자, 너는 병들고 모르는 자,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와라. 이건 명백하게 반치유적인 시각이에요. 의사가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쉽게 그렇게 됩니다.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시작한 일이 거꾸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는 거예요. 저도 여태 죽을힘을 다해서 저항하고 성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p. 45). 그렇다면 트라우마 피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유가족들에게 상담받으라고 등 떠밀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극도의 혼돈 속에 있는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껏 자기가 구축해온 모든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지만 나 자신까지 무너진 건 아니라는 걸 확인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심리적•물리적 폐허 속에서도 그 사실을 최소한의 기반으로 삼아서 일어날 수 있습니(p. 46)다. 그 힘이 있어야, 그게 살아 있어야 전문가의 도움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자기면역력이 전혀 없으면 의 사가 아무리 좋은 항생제를 투여해도 병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p. 47).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상황에 대한 자기주도권을 찾을 수 있고, 그래야만 비로소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이 생깁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문제에 대해 전문가와 상의할 수도 있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요. 불안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자기 의지가 그때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람이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울 때는 예측 불가능할 때 입니다. 혼돈과 불안이 극심해지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일어나고, 그에 압도되면 마침내 탈진하고 말아요. 무력한 상태로 추락하는 거지요. 이런 상황으로 치닫지 않 도록 막는 것이 트라우마 현장에 있는 전문가가 할 일입(p.48)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서는 제대로 된 치유는 시작도 할 수 없어요(p. 49). '상담이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내 전공은 무슨무슨 심리치료 기법이다'라며 상황보다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몰입이 더 강한 경우가 현장에서 심리상담이나 정신의학이라는 학문을 더 쓸모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이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전문지식이 현장에서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다면 그때의 전문가란 무엇일까요. 그가 그간 공부해왔던 공부는 그럼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본래 지니고 있는 무의식적 건강성, 온전함이 있습니다. 저는 병원 상담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던(p. 55) 시절보다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들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확신이 더 또렷해졌어요. 끝 간 데 없이 추락하다 벼랑 끝 나뭇가지에 간신히 걸린 듯한 아득한 존재들을 만나면서, 어쩌다 한순간에 지옥 같은 곳에 처박힌 삶들을 접하면서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확인했어요. 그것이 궁극적인 치유의 동력이자 치유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젠 한톨의 의심도 없이 확신합니다. 그래서 치유란 그 사람이 지닌 온전함을 자극 하는 것, 그것을 스스로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그 힘으로 결국 수렁에서 걸어나올 수 있도록 옆에서 돕 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거죠. 내가 가진 전문가로서의 역량이 있다면 오로지 그걸 하는 데 모두 쏟아야 한다고 느껴요. 내 지식, 내 힘, 내 명민함, 나의 분석과 계몽, 내가 배운 치유기법 등으로 사람이 구해지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고 기능적인 존재가 아니니까요(p. 56). 아무리 빼어난 이론이라도 이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그것이 가장 근원 적인 치유적 태도라 생각해요. 울어야 할 상황인데 울지 못하면서 생기는 복잡하고 초조한 마음, 자신에 대해 드는 이상한 생각들, 그런 것들을 알아주고 공감해줄 수 있 어야 편안하게 울 수 있어요. 울어야 한다고, 안 우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고 채근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면 저절로 울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론 너머의 이론이에요. 그런데 치유라는 것이 어떤 것이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 이론적인 틀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접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공부한 것 때문에 방해를 받는 거예요. 공부가 덫이 되는 거죠. 사람의 마음을 공부한 사람들, 그런 지식이 많은 사람(p. 72)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p. 73). 사람 마음에 대한 진짜 공부를 원한다면 우선 자격증에 대한 이상화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짜 공부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요. 사실 자격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상당 부분 이런 자격증 중시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격증이나 학위, 자기 실력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가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심리상담과 관련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도 별도의 수련 기간이 따로 있고요. 그 끝에 얻는 것이 관련 자격증입니다. 그런데 자격증이 있어도 직업적 전망이 매우 암울한 수준인 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손에 잡히는 뚜렷한 열매가 없는 길을 다른 분야보다 더(p. 122) 오래, 더 많은 비용을 들이며 공부하다보니 자기가 가진 자격증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그 학문이나 이론에 대한 보수화 경향이 더 강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는 것에 매우 심하게 저항할 수밖에요. 그러다보니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한 공부, 내 자격증의 효용성 자체에 더 많이 몰두하기 쉽습니다.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 대한 생생하고 뜨거운 집중과 주목 없이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요. 전문가 집단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건 그동안 현장에서 이런 모습들을 너무 많이 접했고 그러면서 깨달은 경험칙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진짜 공부가 하고 싶다면 너무 고생스럽게 학위를 따는 건 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게 의미없다는 게 아니고 자격증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p. 123) 봐왔습니다. 학문과 학위에 대한 이상화 또는 불필요한 거품을 걷어낼 수 있다면 진짜 공부에 접근하는 것이 더 수월할 거라 생각합니다(p. 124). Q. 세월호 참사와 같은 트라우마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심리적 문제와는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트라우마에 대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은 없을까요? A. 유가족 부모들이 아이가 떠났다는 걸 빨리 인정해야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도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많은 분들이 합니다. 그런 얘기들 때문에 유가족들이 계속 상처를 받고요. 그게 왜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지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기억이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억이란 끊어낸다고 해서 끊어지는 게 아니죠. 사고가 나서 다리나 팔을 절단한 사람이 수술 후 마취에서 막 깨어나면 절단해서 없어진 부분에 통증을 호소한다고 했잖아요. 이런 걸 '환상통'이라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없어졌어도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붙어 있는 거죠. 기(p. 134)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종료되었다고 마음에서도 딱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나 컴퓨터죠.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서 영화를 보여주는데 한 집단은 영화를 끝까지 다 보여주고 다른 한 집단은 결말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수개월 뒤에 이 두 집단에게 그때 봤던 영화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집단이 더 분명하게 기억할까요? 영화의 결말을 보지 못한 집단이 영화에 대해 더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 집단은 처음부터 결말 까지 다 보았기 때문에 완성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단은 완성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결말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는 거죠. 사람은 욕구가 충족되면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거기서 계속 멈춰 있게 되고요. 모든 인간은 완료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갑자기 자녀와의 관계가 뚝 끊어져버린 거예요(p. 135). 그러니 완료되지 않고 도중에 중단된 그 관계를 마음 안 에서 충분히 완료할 수 있도록 곁에서 심리적으로 도와줘야 해요. 그래야 이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도의 과정이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애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애도하려고 하면 불안해서 막아요. '이젠 그만 울어야지, 이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말해요. 어떻게 보면 유가족 입장에서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만큼 하고 싶은 얘기가 또 없어요. 그런데 누구하고도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으면 혼자 생각하고 곱씹고 또 곱씹게 되죠. 결국 평생 그 기억 언저리에서 배회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한 한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가족들이 아이에 대해 더 얘기하고, 더 많이 느끼게 해서 마음속에서 완료되지 않고 중단된 것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해요(p. 136). Q. 전공서적을 모두 정리하고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만 남겼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는 데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이 도움이 되나요? A. 그럼요. 심리학 공부를 하다보면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 그들이 주창한 개념과 틀을 중심으로 사람을 분석 하고 해석하게 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이론과 개념이 전부인 것처럼 절대화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사고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전문가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아무리 탁월하고 근본적인 이론이라 해도 어느 한 학자의 개념과 틀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이 얼마나 많고 깊은데요. 사람을 깊이 접하는 시간이 많아 질수록 그런 사례를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p. 143).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니 이해하고 접근하기가 막연하고 모호합니다. 어둠 속을 걸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지팡이가 있으면 그에 의지해서 주위를 천천히 더듬으면서 감을 잡고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할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둠 속에서 내 시력으로도 주위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면 지팡이 끝으로만 세상을 인지할 필요가 없잖아요. 내 눈을 통해서 내 주변이 어떠한지 통합적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끝'으로 더듬어 세상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도구가 심리학 지식이라면, '내 시력'으로 세상을 '통합적으로 인지하는' 강력한 도구가 문학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분적이기보다 통합적이고, 분석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입체적 입니다. 인간을 유형으로 말하지 않고 한 인간의 개별성에 끝까지 집중합니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인간에 대한 치유적 접근에 적합한 도구입니다. 심리학 공부는 지팡이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p. 144). 정신의학, 심리학 분야도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 중심, 학문과 학파 중심의 전문가가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 중심의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전문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걸 치료가 아닌 치유의 영역이라 명명했습니다. 치유의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이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죽기 전날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특급호텔의 요리를 꼽는 사람은 없습니다. 엄마가 해주었던 김치찌개나 어릴 때 외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같은 것을 떠올리겠지요. 전문가(p. 149)적 치료가 칠성급 호텔의 요리라면 엄마나 외할머니의 밥상이 치유입니다. 우리가 모두 요리사 자격증을 가질 수 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요리를 못 먹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집밥을 오래 못 먹으면 심리적으로 황폐해집니다. 전문가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삶에 그닥 관계없는 분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일상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삶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빛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다, 그걸 아는 게 사람 공부의 끝이고 그게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그게 사람 공부에 대한 제 결론입니다(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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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자기 주변 물건에 대한 사색
-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물건들과 함께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물건들과 인간 사이에는 서사가 생긴다. 저자도 책에서 밝힌대로 나이를 먹으니 물건을 덜 사게 된다. 사람과도 사물과도 관계 맺는 것이 번거롭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과 관계 맺지 않고 심플하게 살고 싶다. 고대 철학의 역사를 가볍게 풀어낸 책 《그리스 철학사 1》에서 저자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는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페피노 루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소 할아버지는 대학교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쓰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인생철학'은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고대의 물활론의 연장선에 있다. "공장에서 만들어 낸 모든 장난감이 즉시 영혼을 갖는 것은 아니오. 천만의 말씀이지. 그 순간에는 그저 단순한 물건일 뿐이오. 그런데 어떤 어린애가 인형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의 영혼이 플라스틱 사이에 스며들어 생명을 가진 물건으로 바뀌어 가는 거요. 그렇게 되면 비록 부서지고 상처 난 인형이라 하더라도 버릴 수 없는 생명체 로 바뀌는 거고 말이오" 나는 이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사람이 홀로(p. 20)선다는 것이 나를 아껴 준 사람의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라면 곧 나를 아껴 준 사람의 영혼과 작별하는 일일 터이다. 그래서 단번에 할 수 없고 세월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물건과 오랜 시간에 걸쳐 나날이 작별할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나라는 사람. 나는 그 아침, 이 가혹하고 부조리한 진실을 깨닫고 눈앞이 빙빙 돈 것인지도 모른다. 늘어나는 책들을 입주시키기 위해 어떤 책장을 마련할 것이냐 하는 고민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그 고민은 고스란히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과정 일터. 나는 책이 든 상자를 성급하게 풀지 않겠다(p. 21). 친구들의 하소연에서 시작된 비공식 탐구에서 나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바람을 얻었다. 엄마가 물려준 살림살이가 우리의 주방을, 아니 집 전체를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에서 영영 멀어지게 만들어도 딸들은 살림살이를 모으며 취향을 키우고 만족감을 느꼈을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엄마들은 그 귀한 살림살이를 당근에 내놓자고 설득하는 딸들을, 혹은 몰래 내다 파는 딸들을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 저 나름대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터이다(p. 48). 마음에 꼭 들지 않으면 사지 않기,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워지는 물건을 사기, 그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물건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남에게 주거나 버리기. 가만 보니 이 원칙은 새 인연을 만들 때도 쓸 수 있겠다. 특히 폐기가 쉽지 않은 인연을 맺으려는 사람들은 꼭 참고 바란다(p. 107). 한편 부모 잘 만난 번역 프리랜서가 뜨끈한 방구석 책상 머리에 앉아 맥이 어쩌고 윈도우가 저쩌고 인간성이 어쩌고 주체성이 저쩌고 할 때, 다른 한편에는 화장실에 갈 시(p. 140)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터에서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하루 일해도 하루 먹을 임금조차 주어 지지 않는다. 인간은 때가 되면 먹고 때가 되면 배설을 해야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기계에 끼이면 팔다리가 잘리고 높은 데서 떨어지면 죽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 취급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으려는 세력은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하고 우리와 남을 구분해서 착취를 합리화한다. 이는 인간 역사에서 무수히 되풀이되었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1세기가 되면 로봇이 반란을 일으킬 줄 알았건만 반란은커녕 기계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날은 요원하고 일단은 인간의 밥줄을 위협하는 중이다. 한쪽에서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고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의 디자인을 따지는 사람이 있으며 또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에 사람이 깔려 죽는 지금, 지금은 2022년이다(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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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자기 주변 물건에 대한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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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화가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렸는가?
-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삶의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데 화가가 그림으로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고 표현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글이 아니라 그림이기에 더 강렬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시간을 내어 미술관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가봐야겠다. 신화 속 인물인 이카로스(Icaros)의 추락을 내용으로 하는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Pieter Brueghel the Elder, 1525-1569년)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은 같은 주제의 다른 여러 그림 중에서도 독특합니다. 다른 화가들은 대부분 하늘을 날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카로스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는 전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림의 제목을 보지 못했다면, 대부분 여기서 이카로스를 찾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무관심 또는 거리두기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은 한가롭고 목가적인 풍경화 정도(p. 41)로 보입니다. 농부는 짐승에 의지해 밭을 갈고 그 아래로 보이는 가축들은 평화롭습니다(도판 A). 저 멀리 바다에는 배가 오가는 모습이 보입니다(도판 B). 어촌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전경입니다. 그런데 그림 오른쪽 아래, 배 앞을 유심히 보면 이상한 물체가 보입니다. 사람의 다리입니다. 화가는 숨은 그림처럼 추락해 바다에 빠진 이카로스의 다리를 그렸습니다(도판 C). 하늘을 날거나 날다가 떨어지는 모습이 아닌, 떨어져 물속에 빠진 순간을 그렸으니 힌트가 없으면 알기 어렵지요. 여기에 하나 더해 주변 그 누구도 물에 빠진 이카로스를 의식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 그림은 매정해 보입니다. 브뤼헐은 자신의 그림 곳곳에 네덜란드(p. 42) 속담을 남겼는데, 이 그림에는 "사람이 죽어도 쟁기질은 쉴 수 없다" 는 속담을 남겼습니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발명가 다이달로스(Daedalus) 의 아들로, 크레타섬의 미노스 왕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미궁에 갇힙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크레타를 탈출할 방안을 마련합니다. 그것은 새의 깃털을 모아 실로 엮고 밀랍을 발라 날개를 만들어, 날아서 섬을 탈출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날개를 달아주며 비행연습을 시키고 탈출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줍니다.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의 열에 의해 밀랍이 녹을 수 있으니 너무(p. 43) 높이 날지 말고, 반대로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물기에 의해 날개가 무거워지니 하늘과 바다의 중간으로만 가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탈출하는 날,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카로스는 자유롭게 날게 되자 기분이 좋았던 나머지 너무 높게 날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밀랍이 녹고 맙니다. 하늘을 나는 것은 이카로스의 평소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미궁을 탈출했다는 것이 더없는 기쁨 이었겠지요. 하지만 하늘을 날며 탈출을 경험하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날개를 잃고 바다로 떨어져 죽고 맙니다. 이때 이카로스가 떨어져 죽은 바다는 '이카로스의 바다'라는 뜻의 '이카리아 해'로, 오늘날 에게 해의 일부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이카로스이지만, 사실 이카로스와 그의 죽음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 그림이 오늘날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무관심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멀리, 저 멀리 밀어두거나 숨겨둡니다. 보고도 못 본 척, 나와 전혀 상관없는 척,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사는 모습이 바로 이 그림에서 이카로스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무언가 하늘에서 떨어져 바다로 '풍덩'하고 빠졌는데 모를 수 없겠지요. 모르는 척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와 같습니다.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며 여기고, 보이는 반응은 무관심입니다(p. 44).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어찌 해볼 수 없는 일입니다(p. 55). 그래서 죽음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두렵습니다. 물론 그런 반응은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바꾸어 오히려 마주하고 가까이하여 친구가 된다면, 죽음은 오히려 성장의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삶에서 죽음을 마주할 때면 슬픔과 두려움, 안타까움이 몰려 옵니다. 나는 살아 있고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니 서로 분리되는 관계에 슬픔이 찾아옵니다. 또 질병 등으로 인해 고통 중에 죽어 가는 이를 바라보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아쉬운 죽음,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이들을 볼 때면 불쌍한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데 시선을 바꾸어 죽음에서 삶을 볼 때면 간절함과 신중함에 새로운 열망이 생깁니다. 삶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갈급함, 삶의 유한함에서 느끼는 삶의 소중함은 더욱 커집니다. 지금까지 허락되었던 삶에 고마운 마음도 들고요. 그리고 이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삶이 계속 이어지길 소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p. 56).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삶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다시금 확인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란 결국 시간을 먹으며 이어가는 삶이기에, 주어진 시간 이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마지막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늘을 사는 것이 삶의 지혜이겠지요. 지금의 건강도 재산도 지식도 관계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때로는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소멸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 존재가 안고 있는 실존적 특성이며 또 우리 삶의 시간, 인생입니다. 그래서 남은 삶이라는 시간의 빈 그릇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아는 것은, 죽음의 때를 알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허락된 삶의 지혜입니다(p. 90). 남녀노소, 신분이나 그 무엇에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어디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알아내려 했고 또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런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반면 죽음과 관련해 아는 것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 대신 죽어줄 수 없다는 것, 미리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것 말이지요. 그런데 이 역시 모른다는 것과 일맥상통해 보입니다. 죽음 준비가 필요하고, 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수 있음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르는 일이 갑자기 일어났을 때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경감시킬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죽(p. 100)음을 알 때 오늘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이야말로 내가 누구인지 깊이 성찰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삶의 현장입니다. 이 성찰로부터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존엄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p. 101). '지나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안에서 두 가지 함축된 상징을 발견합니다. 먼저는 앞서 이야기한 지금의 영광과 즐거움이 사라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있음을 알기에, 오늘을 겸허히 살게 됩니다. 동시에 지금의 고통과 슬픔이 사라질 때가 있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기에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의 어려움을 감당하는 것(p. 118)이지요. 일부러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짐이고 일이라면, 지나갈 때를 기대하는 중에 기다리며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이나 고통이든, 영광이나 즐거움이든 지나갈 것임을 깨달을 때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고통의 때라면 지나갈 때를 기다림으로 또 다른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끝나고 이전과는 다른 순간이 펼쳐질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두 가지 상징을 동시에 가집니다. 슬픔과 고통의 끝이라는 것과 함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요. 절망과 단절만이 아니라, 또 다른 특별한 만남이라는 차원에서 말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무조건 도망치려 하거나 모른 척만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죽을 존재인 것을 인정하며 삶을 살 때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삶의 시간이 지나고 다가 올 죽음을 인식함으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됩니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순간은 바로 죽음을 품은 인간 본연의 존재와 만나는 때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t)에서 "현존재는 세계 속에 존재하자마자 죽음을 떠맡는 하나의 존재양식이 된다."고 합니다. 즉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죽음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p. 119). 그래서 인간에게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인 죽음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비롯해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상황에 자신을 둘 때 거기에서부터 내가 누구이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직하게 묻게 됩니다(p. 120). 죽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첫 걸음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어진 삶의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죽음의 속성을 알아야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생각할 때마다 오늘, 이곳에서 함께하는 이들과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만일 지금 나의 죽음 이후를 보았다면, 오늘 어떤 결정과 선택 속에서 삶을 살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시간은 모아둘 수도 없고 잡아둘 수도 없기에 매 순간이 소중하고 귀합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p. 175). 어느 날일지 모르는 내 삶의 마지막 언제일지 모를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칠 때,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봅니다. 그때 일상에 찾아온 죽음이 너무 낯설어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중에 맞이하고 또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평안한 가운데 이르는 죽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여전히 따스함을 전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샬롯(Charlotte)에 가면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기념도서관이 있습니다. 2018년 2월 이곳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99년의 일기로 모셔졌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2007년 먼저 세상을 떠난 빌리 그레이엄의 아내 루스 그레이엄(Ruth Graham)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 앞 비석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End of Construction - Thank you for your patience. 공사 끝!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묘비명을 정하게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남편과 자주 운전하며 가던 길에서 늘 보던 "공사 중입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공사(p. 183) 표지판이 "공사 끝. 그동안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라는 표지판으로 바뀌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든 루스 여사는 남편에게 그것을 묘비명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 이 묘비명이 되었습니다. 하나 더 특별한 것은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하던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난 루스 여사는 좋아하던 중국어 '의'(義) 자를 묘비에 크게 써 넣었습니다. 자신의 인생 즉 '공사구간'에서 적지 않은 허물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셨고 또 자신을 아는 많은 이들이 잘 참아주어 감사하다는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잊고 살았던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p. 184). 삶과 죽음은 둘 다 공통적으로 일상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삶과 죽음은 매일 이어집니다. 죽음은 언제라도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단절로 엉망이 되는 건 아닙니다. 놀랍게도 죽음의 순간은 나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특별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이 질문은 삶의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이때이며, 그런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닫혔던 삶의 지평이 열리면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함축적인 시간이 펼쳐지고 농밀한 삶의 순간과 만나는 때입니다(p. 217). 오늘 나의 삶은, 죽음으로 인해 다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고 소중한 자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이유는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생각할 때 더욱 선명히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죽음이 삶에 들려주는 잊지 말아야 할 대답입니다(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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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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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화가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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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그 무엇보다 큰 상실감, 사별
- 이 책의 저자는 40년간 결혼생활을 해오던 남편은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사별하게 된다. 이후 생겨진 마음의 굴곡을 책으로 남겼다. 그런데 이때 당시 결혼한 딸이 아팠었는데 그 딸도 몇 년 후 사망하게 된다. 작가도 2021년 작고했다. 사망으로 인한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다. 남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옅어지는 가운데 함께 가야 한다. 그런면에서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되었으나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이름으로 출판됐다. UCLA에서 몇 주를 지내는 동안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뉴욕에서건 캘리포니아에서건 아니면 다른 곳에서건, 내가 알게 된 수많은 친구들은 아주 성공한 사람들 특유의 사고방식 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은 자신의 수완을 전적으로 신뢰 했다. 그들은 손에 쥔 전화번호와 알맞은 의사, 주요 장기 기증자, 정부나 사법부에서 편의를 도모해줄 수 있는 사람의 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들의 수완은 사실상 어마어마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화번호의 힘은 사실상 천하무적이었다. 나도 거의 평생 동안 그들처럼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만약 어머니가 튀니스에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면 나는 미국 영사를 통해 어머니에게 영자신문을 보내고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타고 파리에서 오빠를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었다. 만약 퀸태나가 니스공항에서 갑자기 발이 묶이면 브리(p. 130)티시 에어웨이의 누군가에게 연락해 그 회사 여객기를 타고 런던에서 사촌을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항상 어느 정도 불안감에 시달렸다. 내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일도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천성 때문이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사건이었다. 저녁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나는 것(p. 131). 나는 1년 내내 작년 달력을 보며 날짜를 따졌다. 작년 이날에는 무슨 일을 했더라? 어디에서 저녁을 먹었더라? 작년 이날에 퀸태나의 결혼식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날아갔던가? 작년 이 날에 파리에서 돌아왔던가? 작년 이날에? 작년 이날의 기억에는 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난생 처음으로 깨닫는다. 작년 이날은 2003년 12월 31일. 존은 1년 전에 이날을 겪지 못했다. 존은 고인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렉싱턴가를 건너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는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서다. 살려면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고인을 단념하고, 떠나보내고, 저승의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테이블 위의 사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신탁계좌의 이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물속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물속으로 쉽게 떠나보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내 일상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질(p. 283)거라는 깨달음이 오늘 렉싱턴가에서는 어찌나 선명한 배신으로 느껴지던지 나는 달려오는 차들을 잊어버렸다(p. 284). 역자 후기 나는 집착하기 쉬운 내 성격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집착할 만한 대상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지만,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이것 역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집착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며, 이로 인한 괴로움이 생긴다. 집착은 원래 독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집착 중에서도 가장 독한 것이 인간에 대한 집착이며, 가장 나쁜 것 또한 인간에 대한 집착이다. 태생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 만의 하나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니까. 하지만 과연 인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상실』은 조앤 디디온의 집착과 그로 인한 슬픔에 관한 책이다. 40여 년을 함께했던 남편을 떠나보내며 마지막으로 건네는 작별의 인사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들이 느낄 수 밖에 없는 집착과 죄책감이 이 책에서 유난히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랜 결혼 생활 동안 거의 날마다 한 공간에서 보낸 이들 부부의 남다른 이력 때문이기도 하고, 장영희 선생님도 극찬한 저자의 필력 때문이기도 할 텐데, 아무튼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막막하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쓸쓸하고 아득하고(p. 286) 외로운 그 단어가 이 책의 냄새를 표현하는 데 가장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행간을 고스란히 옮길 수 있는 역자가 되고 싶었다. 이 책에서 행간은, 냉정으로 무장한 저자의 가면 뒤로 드러나는 시뻘건 생살과 같았다. 의연한 표정 사이로 터지는 흐느낌과 같았다. 나는 원서를 읽었을 때 처음에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로 그런 분위기를 전할 수 있는 디디온의 능력에 놀라워했고, 그 다음으로는 그 느낌을 과연 제대로 살릴 수 있을까 두려워했다. 원문의 느낌을 완벽하게 살려 옮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을 읽고 내가 원서를 접했을 때 경험했던 막막함을 느낀 독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6월 이은선 덧붙임: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난 뒤 어느 서평에서 그녀의 딸 퀸태나가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님을 알기에 섣부른 위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 책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할 따름이다(p.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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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그 무엇보다 큰 상실감, 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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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 내가 관심 있는 책 분야 중 하나는 독서법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입장에서 남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독서하는지 관심이 많다. 그래서 눈에 띄는대로 읽고 있다. 이동진 작가를 통해서도 한 수 배웠다. 그런데 왜 책을 읽으세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은 더 이상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필요할 때마다 구글링을 통해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하고 필요한 내용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것이 용이하고 빠르다는 점은 이제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런데 빠른 검색 결과로 나온 정보는 잘게 잘라진 것이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맥이나 전체적인 체계까지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보와 정보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위계나 질서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파편화된 정보에만 의지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정보를 얻는 주요한 매체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책의 중요한 용도가 정보의 제공이라는 점은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책의 정보는 신뢰할 만하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정보 중 조작되거나 잘못된 것을 일일이 다 거르기는 아주 어렵지요. 게다가 책을 읽는 것이 정보 습득에 오히려 더 빠른 방법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정보는 상대적으로 파편화되(p. 22)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구성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말하자면 미처 꿰지 못한 서 말의 구슬 들인 거죠.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보를 얻는 더 빠른 방법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맥락과 위치를 아는 게 정보의 핵심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첫 번째로 꼽는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또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주 '있어 보이니까'라고 농담처럼 답하기도 합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이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일까요.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p. 23)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 일 거예요. 오늘날 많은 문화 향유자들의 특징은 허영심이 없다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각자 본인의 취향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있어 보이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 지적인 허영심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것을 지지합니다(p. 24).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다시 한번 누군가가 "이동진 씨, 왜 책을 읽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사실 제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있어 보이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목적 독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 사라지면 독서를 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지속적이지 않죠.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책을 읽는다면 책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오래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니, 책을 읽는 게 뭐가 재미있어,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수십, 수백 가지 예를 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사람마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기준은 다를 텐데요, 제 경우는 이렇습니다. 하루에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딱 두 가지예요. 일과 독서. 저는 영화평론가 이지만 영화를 매일 집중적으로 많이 보게 되면 일종의 체증이 생깁니다. 영화를 보는 제 일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래도 하루에 3편 이상 보기는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매일 12시간씩 한 달도 읽을 자신이 있어요. 그래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p. 26). 우리는 매일 하루 8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하죠. 그게 불행이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매일 반복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게 일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기도 하죠. 여기에 저는 책 읽기도 더 해서 매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재미있으면서 덜 지치는 일이니까요. 게임이 더 재미있지, 영화 보는 것이 더 재미있지, 책 읽는 게 뭐가 재미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죠. 맞아요.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죠. 그런데 저는 재미의 진입 장벽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몸에 안 좋고 정신에 안 좋은 재미일수록 처음부터 재미있어요. 상대적으로 어떤 재미의 단계로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재미라기보다는 고행 같고 공부 같은 것일수록 그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신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독서가 그러한데요, 책을 재미로 느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단위 시간이 있습니다. 화학에서 용액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어요. 불포화용액, 포화용액, 과포화용액이죠. 예를 들어 1리터의 물에 설탕을 100그램까지 녹일 때, 1그램을 녹이든 10그램을 녹이든 처음에는 보기에 차이가 없어요. 포화용액에 이르기 전까지 불(p. 27)포화용액일 때는 아무리 많이 녹여도 다 녹아버려서 겉에서 보기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100그램에서 조금만 더한 후 유리병을 유리막대로 살짝 긁어주면 결정이 침전된단 말이에요. 그다음부터는 용질을 넣으면 그대로 다 가라앉게 돼요. 그게 과포화용액인 거죠. 책을 읽을 때의 효과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억지로 계속 책을 읽는 것 같은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넣는 족족 가라앉듯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죠. 어떤 일이라는 건 어떤 단계에 가기까지 전혀 효과가 없는 듯 보여요.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효과가 확 드러나는 순간이 오죠. 양이 마침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게 독서의 효능, 또는 독서의 재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독서의 재미가 바로 얻어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책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그 재미가 한 번에, 단숨에 얻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욱 의미가 있고 오래갈 수 있는 겁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은 인생이 즐거운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호기심이라는 건, 한 번에 하나가 충족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을 갖고 있거든요. 한(p. 28)가지 호기심이 충족되는 단계에서 너덧 가지로, 그다음에 또 더 많은 것으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가장 편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이에요. 그러니 책을 좋아하고 책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 한 권으로도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요(p. 29) 문학을 읽어야 하나요? 가끔 "소설은 전혀 읽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문학 자체에 흥미를 못 느껴서이기도 하고 소설을 읽는 것이 역사서나 경영서를 읽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낭비로까지 생각하는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문학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말해요. 하나는 인간이 한 번밖에 못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천 번 만 번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다양한 삶을 경험해보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한 번밖에 살 수 없어요. 그러 니까 인생에서의 모든 것은 시연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딱 한 번 시행하는 연극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타인이라면 다양한 상황과 특정한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주고 감정을 이입하게 해 줍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p. 35).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완벽하게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겠어요. 인생에는 변수가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그런 변수들을 통제하고 정리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관계에 대한 문제인지, 인간이 고독을 즐길 수 없는 무능력에 관한 문제인지, 과연 어떤 문제인지를 보게 해주죠. 그러니 우리는 직접적인 체험보다 책, 특히 소설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으로 삶의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됩니다. 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 관한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거죠. 미국에 직접 가보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죠.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문학은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보통 언어는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말이라는 것은 자꾸 쓰다 보면, 특히 좋은 말일수록 먼지가 내려앉게 되어 있어요. 내가 정말 곡진하게 마음을 표현 하기 위해서 '사랑해' 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은 워낙(p. 36) 감정적으로 강력하고도 유용한 말이기 때문에 상업적 이유를 포함해서 지나치게 과용되고 있죠. 심지어 114 전화안내원조차 한때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시작하고는 했으니까요. 그러면 그 말을 진짜로 하고 싶어도 멈칫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문학은 오랜 세월 말에 쌓여 있는 수많은 먼지 같은 것을 털어서 그 말의 고유한 의미나 다른 의미를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 자체이면서 표현 방식이기도 한 언어를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문학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봐요(p. 37).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다 '내 인생을 바꾼 책'에 대한 원고 청탁이나 질문을 받으면 난감합니다. 저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떤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예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조차 그 책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책을 읽을 때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 있을 겁니다. 저는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이 내 인생까지 바꿀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숙제처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베스트셀러들도 물론 그렇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어떤 책들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무엇이 결여되었다고 느끼는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책들을 주로 읽는 사람들은, 책이라는 것을 돈이든 성격이든 관계든 삶에서 뭔가를 급하게 허겁지점 욕망할 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도깨비방망이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책을 읽는다고 삶의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그 책이 약속한 천국이나 금은보화는 현실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살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과 읽어봤자 시간 낭비만 되는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읽었더(p. 44)니 좋았던 책이 있고, 내가 읽어보았지만 좋지 않았던 책이 있으며, 내가 아직 펼쳐 들지 않은 책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넓고 내 손을 기다리는 좋은 책은 많습니다(p. 45). 한 번에 열 권 읽기 『오두막』(윌리엄 폴 영), 『감각의 제국』(문강형준),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김혜리), 『사랑의 생애』 (이승우), 『스페이스 크로니클」 (닐 디그래스 타이슨), 『모던 팝 스토리」 (밥 스탠리),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애슈턴 애플화이트), 『온』 (안미옥), 『영국 남자의 문제』(하워드 제이콥 슨), 『존재의 수학』(루돌프타슈너), 『국기에 그려진 세계사』 (김유석). 지금 현재 제가 읽고 있는 책들입니다. 시집인 『온』은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가지고 다니고 있고, 차에 있는 책은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와 『감각의 제국』입니다. 가방 안에는 『스페이스 크로니클』이 있고요, 사무실에서 읽는 책은 『존재의 수학』이고, 나머지 책들은 집 안 여기저기에 두고 읽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책 여러 권을 읽고 있습니다. 이건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제가 자연스럽게 갖게 된 스타일인데, 보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육지책으로 갖게 된 습관 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렇게 읽으면서 몸에 배니 장점이 많습니다. 첫 번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여러 권씩 늘어놓(p. 69)고 읽게 되면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기적 유전자』가 좀 어렵고 지겨워지면 잠깐 덮고 『인 골드 블러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책들이 놓여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가면 거기 있는 책을 읽는 거예요. 물론 이 책들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책을 빨리 읽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 괜찮습니다. 책만 재미있으면 되는 거죠. 또한 서로 다른 분야의 책들을 읽으면 상승효과를 일으켜서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진화심리학에 흥미가 있으니까 그에 관한 책 열 권을 두고 읽으면 진화심리학을 체계적으로 파고들어 정말 좋을 것 같잖아요. 저의 경험으로는 그것보다는 진화심리학과 역사에 관한 책, 지리에 관한 책을 동시에 읽으면 그것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데 그게 뇌에 자극을 주기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영화평론가 입장에서 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영화에 관한 게 아닙니 다. 오히려 문학, 교양과학책들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한 가지 팁을 더 드리자면, 책과 책을 읽을 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주목하는 게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예로 들어(p. 70)볼까요. 만약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고 싶다면 데이비드 버스의 책으로 시작하면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또 책들이 대체로 쉽고 재미있습니다. 데이비드 버스의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헬렌 피셔의 책을 읽어보는 겁니다. 이 둘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 매우 상이한 면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은 지적으로도 더 자극이 되고 만약 겹치는 내용이 있다면 그건 중요한 핵심이라는 뜻도 되지요. 문학 분야가 아닌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저서를 집중적으로 읽는 것보다는 유사한 스펙트럼에 있는 다른 사람의 책을 비교하면서 읽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저처럼 동시에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방법을 '초병렬 독서법'이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방법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한 번에 한 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이 더 맞을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한테 맞는 독서법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는 독서가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니까요(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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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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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장례식장과 연관된 듣기 힘든 이야기들
- 대만 장례식 직원이 겪은 일을 쓴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다. 죽음에 대한 책을 보다 소개되어 읽었는데 재밌었다. 그런데 이미 절판됐다. 관심 있는 분들은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시기를.. 그러니 경고하건대 이 글을 보고 있는 고도 비만 오타쿠들은 체중을 감량하는 게 좋을 것이다. 비만인 채 이곳에 오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른다. 옆으로 누운 채 관에 들어간 시신도 있었다. 너무 뚱뚱해서 바로 뉘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시신의 몸집이 너무 커 관이 부서진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관을 너무 크게 짜 화장터의 화장로 안으로 집어넣지 못한 경우도 있다. 화장로 입구는 정해진 규격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터에 대해 잘 모르는 업자들이 이런 문제를 소홀히 하다가 뒤늦게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러다 시신에 지방이 너무 많아 화장로에까지 불이 붙기도 하는데, 이럴 때 가장 난감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가뜩이나 상심해 있는 가족들 아니겠는가(p. 30). 남의 차 안에서 힘든 현장을 말하자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차 안 번개탄 자살 현장이다. 이런 사건 현장은 정말 힘들다.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시신이 앞좌석에 있는지 뒷좌석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뒷좌석은 그나마 수월한데 앞좌석에 있으면 무척 힘들다. 거기에 시신이 늦게 발견됐다면 차 안은 번개탄 냄새, 시신 냄새, 차량 방향제 냄새로 진동을 한다. 앞좌석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냐고? 체구가 작다면 좌석을 뒤로 젖히고 곧장 끌어내리면 된다. 체구가 크다면 일단 좌석을 뒤로 젖혀 평평하게 만든 다음, 한 명은 발을 들고 다른 한 명은 뒷좌석으로 가서 몸을 잡고 뒤쪽으로 끌어 당겨 바로 누이고 나서야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이 설명만으로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p. 43)지만 상상해보라. 차 안에서 고약한 냄재를 쌓기는 시신을 꺼낼 때 체구가 작아서 곧장 끌어내리든 체구가 커서 뒤로 끌어당기든 시신의 얼굴과 얼마나 가깝게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며 눈알을 파먹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면 아마 그 장면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p. 44).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나는 시신 복원 과정에 참여해본 적은 없지만 운 좋게도 그 과정을 지켜본 적은 있다. 그 시신은 손자가 내려친 향로에 머리를 맞고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백수인 손자는 할머니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런 짓을 저질렀다. 휴가 중일 때여서 내가 할머니를 직접 모시지는 못했지만 시신 복원사가 왔을 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동의하에 복원 작업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저녁 5시가 넘어서도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안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복원사는 브이넥의 얇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그녀는 커다란 눈과 보조개, 그리고 치명적으로 귀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바늘을 들고 할머니 시신을 봉합하기 위해 허리(p. 46)를 숙이는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목을 지나서 가슴팍의 타투에 닿던 그 장면이. 이런, 이 장면이 아닌데! 할머니는 머리의 반쪽이 없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충전재를 얼마나 넣었는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은 채 온몸이 땀에 젖도록 한 땀 한 땀 봉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70퍼센트쯤 복원이 됐다. 그런 다음 곱게 화장을 마치고 유가족들을 불렀을 때, 드디어 할머니의 생전 모습으로 복원됐다는 생각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유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복원사가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 앞을 지나다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우연찮게 들었다. '나는 심하게 훼손된 시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작업하던 분이 뭘 보고 이렇게 놀랐을까?' 궁금해하며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녀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퀴벌레!"(p. 47). 가장 잔인한 일 요양보호사로 일할 때 치매에 걸린 한 할아버지를 보살핀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아내는 매일 남편을 보러 왔다. 문자 그대로 매일을 말이다. 딸도 한 명 있었는데 그녀 역시 자주 찾아왔다. 할머니는 여성 요양보호사보다 힘이 센 내가 와서 일하는 걸 반겼다. 할아버지가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는데 문득 할머니가 말씀 하셨다. "이봐, 젊은이. 치매의 가장 잔인한 점이 뭔지 알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할머니의 말만 기다렸다. "가장 잔인한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한평생 살 부대끼고 살던 사람이, 하루하루 나를 천천히 잊어가다가 어느 날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야. 봐봐, 내가 그렇(p. 192)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날 봐도 사랑은커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남편은 나를 잊어버렸지만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지. 이게 가장 잔인한 일이야." 나는 용감하지 못해서, 만약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 할머니처럼 용기 있게 견뎌내지 못하고 분명 도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용감한 할머니도 그리고 딸도 나중에 우울증에 걸렸다는 얘기를 간호사들한테 전해 들었다. 놀라진 않았다. 병간호를 오래 한 가족들에겐 흔한 일이니까(p. 193). 죽었으니 다 벗어난 걸까? 이 사건은 라오자이가 연락을 받았다. 기둥에 사람이 '달려 있다'는 경찰의 말에 라오자이는 밧줄을 자를 칼과 사다리 등을 챙겨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서 라오자이는 의사소통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경찰이 말한 건 기둥 위로 '떨어졌다'는 말이었다. 투신자살이었던 것이다. 온갖 도구를 챙겨서 간 라오자이는 조금 민망해졌다. 라오자이는 내장이 배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두 눈을 부릅뜬 시신을 어떻게 옮길지 고민했다. 다행히 현장에 도착 한 구조대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은 탓에 구조대원들은 시신을 바닥으로 내린 후 재빨리 사진을 찍은 다음 서둘러 시신을 가져왔다. 사실 나는 시신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많이 알(p. 232)지 못한다. 내가 본 그 시신은 배에 난 구멍으로 내장이 쏟아져 나온 상태로, 그저 너무나 끔찍했을 뿐이다. 게다가 유가족 대기실 문 앞에는 임신한 부인이 두 아이의 손을 붙들고 망연히 서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아직 어렸는데, 내가 문을 열어줄 때 한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리 여기 왜 온 거야?" 엄마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 다른 가족이 하나둘 도착하고, 의사와 검사가 도착해 검시가 시작됐다. 그때 검시실 앞을 지나던 도박꾼 사부님을 만나 내가 물었다. "사부님, 이 경우처럼 6층에 살던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 가 뛰어내려 죽였으면, 그 사람이 살던 6층 집은 흉가라고 해야 되나요?" "이론적으로는 그가 6층에서부터 자살을 생각했기 때문에, 옥상이 아니라 6층에서 그 기둥 위로 떨어지는 윤회를 매일 겪고 있을 거야. 그 집을 사고 싶으면 불사를 지내는 게 좋을걸." "지금 저한테 불사 비용 뜯어가려고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죠?"(p. 233) "세상에,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솔직히 내 법력으로 불사는 아직 무리야. 하지만 다른 경쟁이를 소개시켜줄 순 있지. 꽤 실력 좋은 분으로." "공짜로요?" "중개비는 받아야지." 나는 사부님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사부님은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영혼이 생전에 살던 집에 머무는 건 익숙함 때문이지. 그러니 집 안의 칸막이를 다 허물고 문을 전부 열어서 이삼 일쯤 통풍을 해준 다음 리모델링을 해봐. 그럼 영혼이 돌아 와도 다른 집에 들어온 줄 알 거야!"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내게 사부님이 덜컥 명함 한 장을 찔러 넣어줬다. "내 작은 처남이 인테리어 일을 하는데 말이야....." 다시 유가족 이야기로 돌아와, 자살한 남자와 부인은 원래 지방 사람인데 타이베이로 상경해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집 대출금이며 아이들 양육비를 감당치 못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걸로 모든 짐을 벗어던진 것이다(p.234). 그렇게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부인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집을 팔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고 한다. 대출금도 많이 남아 있다니 결국 집을 팔고도 손해를 본 셈이다. 고별식 당일, 초췌해진 부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관을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담배를 물며 라오자이에게 말했다. "죽은 저 남자는 이제 다 벗어난 걸까요?"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 라오자이는 이렇게 말했다. "저 이기적인 놈은 모든 문제를 가족들에게 떠넘긴 것뿐이야."(p. 235).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자살하지 마라. 자살은 남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건의 자살을 목격했다. 먼저 요즘 가장 각광받는 번개탄으로 자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보겠 다. 번개탄 자살 건수는 진심으로 너무 많다.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심한 성격이다. 이런 유형은 대개 생전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친구도 없다. 그래서 한참 후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이미 온몸이 까맣게 부패하고 냄새도 고약한,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발견자는 대부분 집주인이거나 불쌍한 이웃이다. 그중 80 퍼센트는 집 안에서 발견되고 15퍼센트는 차 안, 나머지는(p. 248) 여관에서 발견된다. 자살한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만 가족에게 남겨진 번거로움은 굉장히 크다. 일단 업체를 불러 청소하고 유품을 처리 하는 데 비용이 든다. 정리할 게 별로 없는 경우 약 8천 위안 부터 시작해, 현장이 엉망이고 시신이 늦게 발견돼 흔적이 깊이 남은 경우에는 요금이 증가한다. 그다음 경쟁이를 불러 자살 장소에서 송경을 해야 하는데 중부에서는 한 번에 최소 4만 위안부터 시작하고 다른 지방에서는 더 비싸다. 차 안에서 죽은 경우는 그나마 낫다. 만약 죽은 지 얼마 안 됐다면 차를 청소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래됐다면 폐차 시키는 외에 도리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방법은 목을 매 죽는 것이다. 발견 장소는 집 안과 야외가 반반이다. 이들은 번개탄을 피운 사람들보다 자살 의지가 더 확고한 것 같다. 집 안에서 목을 맨 경우 발견자는 모두 똑같다. 바로 가만있다 똥 밟은 처지의 집주인이다. 그러고 보면 집주인도 참 못할 짓인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월세가 한참 밀린 세입자와 연락이 안 되거나 옆집에서 악취가 심하다는 연락을 받고 문을 열어보면 이미 온몸이 썩어가는 시신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집주인을 반긴(p. 249)다. 이보다 비참할 수 있을까. 야외를 선택한 사람들은 의외로 외진 곳보다는 누군가 지나다닐 만한 길목을 선택한다. 아무래도 쉽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깊은 산속 같은 외진 곳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예전에 초등학교 정문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 공원 정자에서 목을 매단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목을 매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혀를 길게 빼고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부 대변과 소변을 지린 상태다. 다음으로 투신자살이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투신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가장 용감한 것 같다. 지금까지 세 번의 투신자살 현장을 봤는데, 첫 번째 사망자는 6층에서 뛰어내린 후 머리가 다 깨져 뇌까지 보였다. 두 번째 사망자는 8층에서 뛰어내려 기둥에 꽂히는 바람에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세 번째 사망자는 훨씬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보디 백 안에 사방으로 흩어진 뇌를 주워 담은 비닐봉지도 함께 넣었다. 이 정도면 가장 흔한 자살 방법에 대한 묘사를 충분히 한(p. 250)것 같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온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그 견디기 힘든 순간을 정말로 견디지 못하면, 당신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의사와 검사가 장례식장에 와 검시를 진행할 때, 나는 유가족들을 휴게실로 안내하는데 어떤 가족들은 매우 슬퍼한다. 언젠가 경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자마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남겨진 네 명의 딸은 영정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가족들도 있다. 어떤 사망자는 친척들에게 4백만 위안을 빌려 흥청망청 써버린 다음 집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또 어떤 가족들은 어리둥절해한다. 한 번은 20년 동안 본 적 없는 동생이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유가족이 있었는데, 시신을 보여줘도 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허망한 눈빛으로 앉아 한없이 울기만 하는 부류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제일 절망적인 경우다. 그들은 유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을 못 찾았거나 찾았지만 시신 인계를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온 집주인들이다. 내가 만난 가장 멀쩡한 시신은 어느 오타쿠였다. 그는 자(p. 251)살이 아니라 돌연사였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대답이 없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죽은 지 3시간이 지난 후였다는 것이다. 당시 의사는 시신을 보자마자 "죽기 전에 한 발 쏘셨네" 라고 했다. 어떻게 보자마자 그런 걸 아시는지 눈으로 묻자, 의사는 사망자의 중요 부위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자 젠장, 그곳엔 여전히 휴지조각이 붙어 있었다.....(p. 252). 에필 로그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으니까요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내게, 어쩌면 편집장님 말씀처럼 일종의 '제사'의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는 전부 내가 요양보호사와 장례식 정직원으로 일하면서 직접 겪은 일이다. 만약 내 아버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요양보호사가 되지 않았을 테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장례식장에서 일할 생각 역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교육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나자 내 인생은 그로 인해 완전히 변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한 건 모두 아버지를 위해서였으니까. 아버지는 정말이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어린 시절, 선생님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이를(p. 266) 가슴 깊이 새긴 나는 모르는 아저씨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계시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매질이었다. 나중에야 그 아저씨들이 빚쟁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로는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나는 왜 어떨 땐 아버지가 집에 있다고 대답해도 되면서 또 어떨 땐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저씨들이 아버지의 친구였다가 또 갑자기 빚쟁이로 둔갑하는 것도 이상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누가 와서 자길 찾거든 집에 없다고 하라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한 아저씨가 집 앞으로 찾아와서 나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했다. 하지만 그 아저씨 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아버지를 찾아냈다. 그날 두 사람은 크게 싸웠다. 그런 다음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어떤 서류를 들이밀고 서명을 받아냈다. 떠나기 전 그는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하고. 나중에 커서 네 아빠처럼 되고 싶냐?" 집으로 들어갔더니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내게 말(p. 267)했다. "망 하나도 제대로 못 보는 놈!” 나는 힘들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어째서 선생님 말씀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욕을 먹는 걸까? 어째서 아버지 말씀대로 거짓말을 했는데 역시 욕을 먹는 걸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한 번은 중간고사를 망친 후 성적표를 감췄다가 아버지께 들킨 적이 있다. 아버지는 왜 자신을 속이려 드느냐고, 왜 감추려고 하느냐고 나를 혼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그 말, 빛쟁이들 앞에서 할 수 있어?"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허리띠로 나를 때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 시절은 집 앞에 늘 빚쟁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한 명이 가면 또 한 명이 왔다. 어머니는 그 모든 수모와 노동을 묵묵히 견뎌냈고,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사고를 치고 도망쳤다가 일이 해결되면 돌아오고는 했다. 우리 집은 늘 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삼촌과 고모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교 학(p. 268)비도 고모가 대신 내줬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경제 사정 때문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릴 수 없었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맥도날드에 갔다. 그날은 지갑에 5백 위안이 있으니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마친 후 지갑을 열었는데, 그 5백 위안은 이미 아버지가 가져가고 없었다. 하하. 나는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다 큰 남자가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하다 전 재산을 아버지에게 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니! 하하하! 너무 웃겨서 흘린 눈물인지 너무 슬퍼서 흘린 눈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친구가 돈을 대신 내준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친구에게 밥을 산다. 그 친구에게 입은 은혜는 절대 잊을 수 없다. 그때의 굴욕도. 내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든 건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는 늘 일을 하다 밤늦게 오셨는데 이를 두고 아버지가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것도 화가 나는데, 외할머니까지 욕하는 모습에 나는 폭발해버렸다. 우리는 경찰이 오고 나서야 겨우 싸움을 멈췄다(p. 269). 이 일로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있었다. 갈 데 없어진 아버지가 어머니께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도 화가 났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빼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왜 스스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 일까? 나는 아버지께 말했다. 우리 집에서 지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이 일로 우리는 몇 번이나 싸웠고, 아버지는 중풍에 걸렸다. 처음엔 심각하지 않았다. 몸의 왼쪽 반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른쪽 반은 문제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할 의지가 없었다. 자기가 중풍에 걸려도 결국 고생하는 건 나와 어머니일 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아버지를 병원에 데려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택시 안에서 자꾸 바지 뒤를 잡아당겼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도착해서 내리려고 보니 차 안이 배설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히고 기사님께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드렸다. 재수 없게 똥 밟았다고 한탄하던 기사님은 천(p. 270)위안을 더 받고 가셨다.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아버지의 배설물이 복도를 따라 똑똑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내내 크게 웃으며 내가 너희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말했다. 화장실에 도착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고, 나는 직원에게 대걸레를 빌려 바닥을 닦았다. 바닥을 다 닦은 후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울 일이 아니야. 얼른 웃어! 웃는 거 잘하면서 왜 지금은 못 웃는 거야?"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어머니에게 방금 택시 기사 아저씨 표정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그의 오늘 일진이 얼마나 사나울지 떠들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는 없는 사람 취급 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그게 가장 아쉽다. 나 역시 어릴 땐 어른이 돼서 아버지와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날을 꿈꿨다. 그날이 오면 이렇게 묻고 싶었다. "내 인생에 무슨 짓을 하신 건가요?"(p. 271) 굳이 꼽아보자면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두 번째 중풍이 와 식물 인간이 됐을 때였다. 나는 병상 옆에 앉아 옛날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만약 아버지 치료를 포기하면, 당신은 이 불효자를 어떻게 할 셈이냐고. 또 한 번은 아버지의 발인 전날이었다. 나는 복원을 마친 아버지 옆에 앉아 말했다.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났으니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겠다고. 진심이었다.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 이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상태, 그뿐 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처참하게 우셨다. 나는 내 부모에게서 진짜 사랑을 봤다. 물론 평생을 싸우며 지내느라 어머니가 다정하게 "여보"라고 부르는 건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후 처음 들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다정한 손길로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아버지를 정성스레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 주는 모습을 보는 게 나는 좋았다. 그제야 나는 부부는 싸워도 진짜 싸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는 둘 중 한쪽이 말을 하지 못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비로소 보인다는 것도(p. 272). 아버지가 어머니께 의지한 만큼,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를 후회 없이 보살피고 깊이 사랑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버지가 중풍에 걸리기 전, 그날도 나를 흠씬 두들겨 팬 후 씩씩대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아냐? 넌 나랑 닮았어. 너도 나중에 나처럼 친구도 없고 놀기만 좋아하다 도박에 빠질 거야. 너도 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어쩌면 아버지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친구도 없고 사귈 생각도 없으며 놀기 좋아 하고 도박을 했으며 무엇을 끝까지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책을 쓸 결심을 했을 때, 반드시 이 책을 완성해 아버지의 영정 앞에 놓아드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다짐했다. "아버지, 당신이 틀렸어요. 나는 아버지와 조금은 달라요.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거든요."(p.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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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장례식장과 연관된 듣기 힘든 이야기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