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2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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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중년에는 다르게 살자
    중년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많이 해주는 유익한 책이다. 내 나이에 걸맞은 삶의 팁들이었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은 나이가 됐다. 중천에 떴던 해가 급히 지고 있다. 이륙이 아니라 착륙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됐다. 물론 언제나처럼 열심히 살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 때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진다. 암 검진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이유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내용은 오랜 시간 고령의 암환자들을 지켜본 경험에서 나온 지극히 개인적(p. 140)인 생각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모두 몸 어딘가에 암세포를 품은 채 살아간다. 자신의 몸에 암세포가 있었다는 사실을 평생 모르다가 다른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내가 근무했던 요쿠후카이 병원의 고령 환자 중 3분의 2가 실제로 그랬다. 일반적으로 70대나 80대에 발견된 암은 중년 환자의 암세포보다 진행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환자가 수술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나이까지 생존하는 사례가 많다. 암은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어 대부분의 성인들은 정기적으로 암 검진을 받는다. 물론 나도 중년 환자라면 하루라도 빨리 암을 발견해 조기에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70대에 접어들면 빠르게 발견해서 서둘러 치료해도 큰 의미가 없다.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적어도 4~5년간은 별다른 증상 없이 평소와 똑같이 건강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 지병과의 공존 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기억하는가?(p. 141) 암과도 공존 의식이 필요하다. 점진을 받고 암이 발견되는 바람에 급히 수술을 받았다가 몸이 쇠약해지는 고령 환자들을 많이 보았다. 기력이 떨어져 거동이 힘들어지고 결국 다른 병에 걸려 예상치 못하게 일찍 삶을 마감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그러니 굳이 암을 찾아내려 하지 말고 ‘모르는 게 약’ 이라는 생각으로 주어진 삶을 끝까지 누리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 해버릴지 모르지만 암과의 공존은 나이가 들면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건강검진에 집착할 필요 없다 지금까지 내가 여러 저서와 기고문에 수없이 설파하고 다닌 만큼 이미 들어본 독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솔직히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암 검진은 물론이고 건강검진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p. 142) 마음 편하고 즐거운 것이 최고의 건강 관리법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내용을 요약해보자. 60대가 지나면 의사가 권하는 대로 무리해서 암 검사와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된다. 굳이 건강검진을 받을 필요도 없다. 더 오래 살게 해준다는 보장도 없는 각종 약을 매일 꼬박꼬박 복용할 필요도 없다. 독자분들 중 몇몇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의사들은 이런 조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프기 전에 건강검진을 꾸준히 받고 약을 잘 챙겨 먹으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게 유지하는 사람이 더 오래 산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일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규모 임상 시험 결과는 본 적이 없다. 즉, 건강검진에서 나온 수치 대부분은 질병과 명확한 인과관계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체중, 혈압, 혈당치, 콜레스테롤 수치를 열심히 조절한다. 그것이 건강한 삶을 위한 기(p. 152)본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상식처럼 알려졌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이런 의학 상식을 무조건 믿어도 괜찮을까? 세상에는 다양한 의사가 있다. 보통은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진료한다. 하지만 연구실에 틀어박혀 몰두하느라 고령 환자를 진찰해본 임상 경험은 적은, 논문과 연구에만 정통한 의사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특히 대학병원이 그렇다. 현재 의료계는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며 만들어왔다. 나는 솔직히 그런 의사들의 조언을 무조건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대학병원 교수라는 권위에 끌려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르는 고령자가 많다. 그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학병원에도 분명 환자의 상태를 배려하며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완쾌 후 삶의 질까지 신경 쓰며 진료를 보는 의사가 있을 것이다. 결국 의사와 치료법은 환자 스스로가 충분히 내담해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끌리는 쪽을 선택하면 된다. 다만 지금까지 내가 권한 조언(암 수술 받지 않기, 건강(p. 153)검진 받지 않기, 복용약 줄이기 등)을 따른다고 오래 산다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대학병원 의사들이 말하는 강수 비결에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겠다. 적어도 내가 권하는 건강 관리법은 오랜 시간 수많은 고령 환자를 지켜봐온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양쪽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면 연구실에서 동물 실험과 논문에 집중했던 의대 교수보다는 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를 만나며 임상 경험을 쌓은 나의 주장이 더 믿고 따를 만하지 않은가? 의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치료법과 지식은 아직 연구 중인 최신 이론일 뿐이다. 이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면 어떨까? 억지로 각종 수치를 조절하며 걱정하는 괴로운 건강 관리법보다 마음 편하고 즐거운 건강 관리법이 낫다. 나는 참고 억눌러도 건강과 장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지금의 즐거움과 활력을 우선시하는 관점이 낫다고 생각한다. 강박적으로 건강을 관리하겠다는 생각은 버리자(p. 154).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인생관이나 좌우명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마음에 품은 생각이나 기준 덕분에 나태해진 태도를 바로잡기도 하고 갈림길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줄곧 품고 살아왔던 생각과 기준을 바꿔야 할 때가 온다. 젊은 시절에 세우고 지켜왔던 인생관이나 좌우명을 60대 이후까지 그대로 유지하려 고집하다가는 그것이 자유와 행복을 속박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좌우명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인 사람이 있다고 치자. 젊은 시절에는 이 좌우명을 마음에 품고 열심히 일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나이가 들면 결국 일을 할 수 없는 때가 온다. 그때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p. 174). ‘일도 하지 않고 연금만 받으며 놀고먹어도 괜찮을까?’ ‘생활이 어렵기는 하지만....연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못했는데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지.’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노인을 위한 일자리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젊은 시절의 좌우명을 계속 고집해 스트레스를 받고 정신적으로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잠시 간략히 설명하고 지나가자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구절은 성경에서 비롯되었다. 신약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라는 구절이 있다. 타인에게 참견하며 나태를 부리지 말고 정직하게 일하며 나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표현을 가져다가 성경과 다르게, 이념적으로 활용한 이가 바로 소비에트연방을 수립한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Vadimir Lenin이다. 레닌이 가리키는 '일하지 않는 자'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었다. (p. 175) 나이 먹고 뒤늦게 후회하는 6가지 지금까지 고령의 환자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노년에 들어서 과거의 삶을 후회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다시 젊어질 수 있다(p. 190)면 다르게 살 것이라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사람들이 나이 들어 후회하는 것은 대부분 아래의 6가지로 나뉜다. 1. 좋아하는 일을 많이 하지 못했다. 2.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3. 개성을 억누르며 남에게 맞추려고 애썼다. 4. 주변에 적극적으로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다. 5. 돈 걱정만 하며 살았다. 6. 의사의 말을 과하게 믿고 따랐다. 읽다 보니 가슴 뜨끔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위의 6가지를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지금부터 반대로 살면 후회할 일이 적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6가지를 아울러 정리하면 '남의 눈치만 보지 말고 내 개성을 드러내며 원하는 대로 과감하게 사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당장 마인드를 리셋하고 지금부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자. 60대부터 남은 인생은 모두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p. 191) 6가지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후를 행복하게 보내는 비결이다(p. 192). 60세의 마인드셋 7계명 이 책의 서두에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마인드셋 7계명을 언급했다. 지금까지 나의 주장을 경청하고 공감해 준 독자 여러분이 삶의 중후반을 잘 보내고 행복한 고령자로 살아가기를 기원하며 마지막으로 60대를 위한 마인드셋 7계명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이기고 지는 일에 연연하지 말자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기 마련이다. 비교하다 보면 남들보다 앞서 나가(p. 204) 이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기고 지는 것만 생각하면 살면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타인을 인정하면 내가 지는 거라는 고지식한 가치관으로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당신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좁은 시야에 갇혀 점점 고립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승패에만 연연하며 편협한 사고에 빠지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고집을 내려놓자. 세상에 유일한 정답은 없다.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면 점점 더 지혜로워 질 것이다. 하지만 마음가짐을 바꾸지 못하면 점점 더 어리석어질 뿐이다. 2. 해보기 전에 지레 판단하지 말자 인생은 실험의 연속이다. 나는 50세쯤에 정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때 부터는 세상에 다양한 답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p. 205) 다양한 답을 찾고자 더 폭넓은 독서를 시작했다. 간혹 세상만사에 정해진 답안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직접 부딪혀보기도 전에 모범답안만 찾으려고 한다. 이미 마음속으로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입맛에 맞는 책만 골라 읽는다. 반대로 절대적인 정답은 없으며 실제로 해볼 때까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끝없이 넓어질 것이다. 내가 2장에서 주장했던 내용을 기억하는가? 상속세를 100퍼센트로 높이면 고령자들의 적극적인 소비 활동이 늘어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면 “전 세계적으로 상속세를 낮추는 추세인데 무슨 소리냐”, “어떤 경제학자의 이론에도 맞지 않는 허황된 생각이다”라는 반론이 즉각 튀어나온다. 당연히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과격한 주장임은 나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현재 일본은 전 세계에서 고령 인구 비율이 가장(p. 206) 높은 나라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정책을 시행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인생은 실험하듯이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오늘 점심으로 라멘을 먹고 싶다고 하자. 항상 가던 단골집에 가면 틀림없이 맛있는 라멘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단골집 옆에는 다른 라멘집도 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가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맛집인 모양이다. 왠지 꿀꿀하고 기분 전환이 필요한 날, 그 라멘 집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기대하지도 못한 색다른 인생이 펼쳐질 수도 있다. 아, 색다른 인생까지는 조금 과장되고 유난스러운 표현임은 인정한다. 아무튼 그 가게의 라멘이 맛있다면 당신이 종종 찾을 맛집이 하나 늘어난 것이다. 물론 맛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그저 ‘오늘 실험은 실패!’ 라며 가볍게 넘기면 된다. 이렇게 소소한 변화를 계속 시도하면 삶이 즐겁고 풍요로워진다. 일상에 작은 재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p. 207). 실제로 해보기 전에 지레 겁먹고 판단하지 말 것. 호기심을 갖고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보자. 3.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자 나이가 들수록 사고방식은 점점 보수적으로 변한다. 새로운 것이나 변화가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져 기존의 것을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많은 고령자들이 “이 나이에 무슨”,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나 듣지"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새로운 일은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 당연히 지켜야 할 나름의 선을 그어놓고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내딛으려 하지 않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제 그만 고정관념을 내려놓자! 쇼핑몰에서 진한 빨간색 셔츠를 발견했다고 하자. 디 자인도 독특하고 예뻐서 보는 순간 당신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옷을 입으면 너무 눈에 띄겠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웃음만 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주저한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을(p. 208) 바로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이 정말 많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생은 끝없는 실험의 연속이다. 비웃음을 받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뭐가 중요한가? 당신이 입고 싶다면 일단 입으면 된다. 오히려 잘 어울리고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입고 길을 나서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말이다. 4장에서 살펴본 당위적 사고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따르는 것을 일컫는다. 긍정적인 관점에서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좋게 받아들이는 자긍심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당위적 사고방식이 당신 삶의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의 문을 점점 닫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위적 사고는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데에서 시작한다. 빨간색 옷을 보고 당신이 주저했던 이유도 결국 주변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이 화려한 옷을 입으면 웃음거리만 될 테니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을 입어야 한다며 뻔하고 틀에 박힌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이다(p. 209) 당위적 사고와 고정관념은 당신의 행동 범위를 좁힌다. 그러니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감히 버리자. 타인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질지 고민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 점점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게 된다. 보청기를 끼는 것이 남들 눈에 이상해 보일까 걱정하기 시작하면 여러 사람과 대화 나누는 자리 자체를 피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이것저것 새롭게 시도해봐야 한다. 그래야 남은 인생을 활기차게 즐길 수 있고, 더불어 노년에 우울증에 빠질 위험도 낮출 수 있다. 4.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한동안 여론을 떠들썩하게 달궜던 '노후 자금 2,000만 엔'은 상당히 과장된 수치라고 생각한다. 각종 지표나 현재 상황을 보면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처(p. 210)럼 경제가 휘청이고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니 노후 자금에 손대지 않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 고 절약할 필요 없다. 그보다는 돈을 쓰고 풍요를 즐기며 지금 당장 행복을 느끼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노후 자금은 나중을 위해 아껴두자. 5년만 더 버텼다가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야지'라고 생각하며 절약하고 있는가? 미안한 말이지만, 5년 후에 당신이 여행을 갈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당신이 꿈꾸는 그 여행지가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고, 5년 안에 다른 일이 생겨 큰돈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갑자기 이상이 생겨 당장 내일부터 침대에 누워 간호를 받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당신은 5년 후를 기약하지만 그때 몸 상태가 지금만큼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 순간을 즐겨라.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지 않으면 나중에는 즐길 수 없다. 나이가 들어서야 이 사실을 깨닫고 후회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지금 참고 노력하면 언젠가 좋은 때가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p. 211)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그런 생각은 내려놔도 된다. 그보다는 지금 즐기지 않으면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부터 즐기며 충실하게 살길 기원한다. 5. 남과 비교하지 말자 2021년에 별세한 작가 하시다 스가코는 생전에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21세기북스, 2018) 라는 책을 펴내 화제를 모았다. 하시다 스가코는 이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죽음을 준 비하고 있는지, 어떤 죽음을 바라는지 담담하게 밝혔다. 만약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 주장이 알츠하이머병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는 차별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알츠하이머 환자에게도 생을 끝까지 누릴 권리가 있다(p. 212) 아직 치매에 걸리지 않은 고령자가 치매 환자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마치 자신에게는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는 듯, 치매 환자를 부정적이고 한심하게 보는 듯하다. 이는 고령자가 고령자를 차별하는 셈이다. 그들은 정신이 또렷하고 거동도 잘하며 암에도 걸리지 않았고 성인용 기저귀를 찰 필요도 없으니 비슷한 연배의 타인과 비교해 자신이 '승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면 그들도 언젠가는 노쇠해서 거동이 불편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패자가 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치매는 오래 살면 언젠가 걸리는 병이다. 나의 의지대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빨리 걸리냐 늦게 걸리냐의 문제다. 지금 당장 치매가 아니라고 안심하며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지나면 주변 사람이 당신을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니 다음 교훈을 항상 마음에 새기자.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제각각 태어나 모두 함께 나이 드는 존재가 아닌가(p. 213). 6. 답은 스스로 찾자 우리는 살면서 풍부한 인생 경험을 쌓아간다. 나이를 먹으며 실패와 성공을 수없이 반복하고 직접 피부로 느끼고 배운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언정 60대쯤 되면 몸으로 경험해 단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감각과 직감을 바탕으로 얻어낸 답은 옳다고 믿어도 된다. 특히 육체적, 심리적 상태에 관해서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시끄러웠을 때 감염병 전문의들과 정부, 언론은 모두 입을 모아 외출을 자제하라고 했다. 모두가 숨죽인 채 집에 갇히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집에만 틀어 박혀 있으면 신체 활동에 제한이 생기고,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았는가? 스스로 견딜 수 없고 힘들다고 느낀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물론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하고, 서로 거리를 두며 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각종 건(p. 214)강 방침을 무비관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스스로 가장 잘 지킬 수 있다. 생활 방식이나 건강과 관련해서는 직접 생각해서 내리는 답이 최선의 해답이다. 인생의 큰 결정들도 마찬가지다. 이혼하거나 사별하고 혼자가 된 당신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고 하자. 남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뜻이 잘 맞는다. 다시 결혼하고자 준비하며 주변에 알렸더니 자식들과 친구들은 분명 재산이 목적일 것이라며 반대한다. 이런 경우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새로 만난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믿고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결혼해서 생활하는 당사자는 바로 당신이다. 그러니 결론도 당신 이 마음 가는 대로 내려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무슨 일이든 타인의 생각보다 나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사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주지도, 책임져주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든 결정은 당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내려야 한다(p. 215) 7.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자 마지막으로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이 앞에서 말한 6가지 마인드셋을 아우르는 말이다. 이기고 지는 일에 집착하거나 고정관념, 당위적 사고 방식에 사로잡히는 이유도 남의 눈을 지나치게 신경 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다.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타인을 무시하고 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은 당연히 안 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즐기며 살자는 것이다.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싶으면 주저 말고 입자. 군데군데 하얗게 보이는 흰머리가 싫다면 과감하게 염색을 해보자. 그런 당신을 보고 어떤 이는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젊어 보이려고 애를 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다고 새치가(p. 216) 안 나는 것도 아닌데 자기만족이라며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당신의 마음이 흡족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자기만족을 자만심처럼 생각해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자기만족은 긍정적이고 행복한 심리 상태다.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때 분비되는 세로토닌은 기분, 행동, 신체 기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게 해준다. 감정과 애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햇살 좋은 날, 배우자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보자. 나잇값 운운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경험을 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당장 시작하라. 시인 가와다 준은 "황혼에 찾아온 노년의 사랑은 두려울 것이 없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나이가 들어도 새롭게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길 수 있다. 이는 꼴불견이거나 나잇값 못하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다. 인생의 절반쯤 왔으니 남은 절반은 원하는 대로, 후회 없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남이 뭐라고 하든 살고 싶은(p. 217) 대로 살아야 한다. 여기, 마인드셋 7계명이 이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p.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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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8
  • 【북토크】 번역의 무거운 짐을 진 번역가들
    외국 책을 쉽게 접하기 위해서는 번역가를 비롯한 출판사 등 여러 사람들의 수고가 필요하다. 요즘은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 직접 원서를 구해 읽기도 하고, 아마존 등을 통해 E book을 바로 구매해 보는 경우도 많다. 이제 AI시대를 맞아 퇴출 위기에 직면한 직업군이 번역가다. 최근 뉴스에 보니 AI를 도입한 한 회사는 외국어 번역 부서를 없앴다고 한다. 세상이 좋아지는 만큼 생계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중에 번역가는 곧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그리고 굳이 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AI를 통해 순식간에 외국 서적이 번역될 날도 멀지 않았다. 참 좋은 세상이 됐다(참 이 책은 절판됐는데 도서관을 통해 대출 받아 읽었다).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 언젠가 번역하는 사람들의 인터넷 카페에 어떤 남자분이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밖에 안 된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아마도 한 가정의 가장인 듯한 그는 열심히 일해도 가정을 꾸려 갈 만한 수입이 되지 않는 것을 한탄하며, 한잔하고 넋두리하듯 올린 글 같았다. 나는 그런 글을 올린 심경에 심히 공감하였는데, 뜻밖에도 다른 회원들의 득달같은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번역에 대한 모욕이며, 여자들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열화와 같은 비난에 한 줄이라도 그 가장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으나, 소심한, 혹은 귀차니스트인 나는 아무 댓글도 달아주지 못했다. 몇 년 전 나도 진지하게 했던 고민이다. 이게 부업이면 모를까, 번역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구나, 번역으로 돈 벌기는 힘들겠구나. 말이 좋아 프리랜서이지 일이 없을 땐 날백수이지 않은가. 남편이란 존재가 있을 때는 몇 달 일이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었으나, 이제 어엿한 아줌마 가장으로서 아이를 키우고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내게, ‘번역만으로 살 수 있을까’. 는 그 무렵 머릿속에 붙박혀 떠나지 않는 화두였다. 이렇게 벌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인형 눈알 박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지 않나, 종이봉투 풀칠하는 부업이 요즘도 있을까(p. 68) 길가다 ‘홀서빙 아줌마 구함’ 이라고 삐뚤삐뚤 쓴 글씨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딸랑 두 식구의 가장인 나도 그렇게 절박했는데, 처자식을 둔 그 남자 회원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어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밖에 안 되는' 것으로 스스로가 미리 단정짓고 하는 일은 평생 본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직업이 번역이라면 어떡하든 열심히 해서 가족들에게 넉넉한 의식을 공급하는 가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남편의 월급에 의존해 살 때의 작업 습관대로 책 한 권 들고 세월없이 번역하곤 했다. 한 권에 200만 원 정도 나오는 얇은 책을 두세 달씩 끌 때도 있었다. 그러면 한 달 수입이란 것은, 고졸 초봉과 비슷해진다. 배우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는 이 학원 보내 달라, 저 학원 보내 달라, 요구사항도 많은데, 그런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느 날 문득, 아, 이제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데 이렇게 나태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목표를 정하여 일을 하자, 내 능력의 한계까지 목표를 세워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 수입은 최소한 얼마까지, 하루에 작업시간은 몇 시간, 잠은 몇 시간씩.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예전보다 한 달 정도는 작업시간이 당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날림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빈둥거리며 노는 시간을 대폭 줄이고 바짝 긴장하여 작업을 하니, 완성도는(p. 69)더 높아졌다. 그러자, 비로소 부업이 아닌 본업으로서의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아무도 통제하지 않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기자신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번역은 본업이 되기도 하고 부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아직 번역 초기인 많은 분들은 이렇게 투덜거릴 것이다. 일이 있어야 하지. 맞는 말이다. 일이 있는 경우의 이야기이긴 하다. 하루에 몇 시간이 아니라 일만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하고 싶은데 번역 일은 빈익빈 부익부, 빈곤의 악순환, 좀처럼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고한 프리랜서이고 싶지만 내용물은 날백수인, 그런 생활을 나도 초보 시절엔 수없이 해보았다.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 많았던 나는, 번역 일을 시작해 놓고도 시장을 개척할 생각보다 마냥 나무의 감이 입 안에 떨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권남희는, 보이지도 않았다. 키가 작은 내가 높은 감나무의 감을 따기 위해 발악을 하지 않는 한, 감이 내 입에 떨어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물론 감을 먹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면야 그깟 감 따위, 어디로 떨어지든 상관없지만, 나는 절박했다.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들어온 애 아빠의 구직활동은 난항이었고, 한창 재롱을 떠는 아이는 세상모르고 밝기만 한데 잔고가 없는 통장은 내 목을 조이고 있었다. 그럴 때 생각했던 것이 기획이었다. 직접 일본에 가서 책을 구해와 기획서를 작성하여 출판사에(p. 70)소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나라에 유미리의 에세이집 《창이 있는 서점에서》가 처음 소개되었는데, 때마침 유미리가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는 바람에 출판사도 나도 서로 득을 본 작품이다. 그 이외에도 무라카미 류의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오디션》, 《실낙원》의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의 아포리즘, 추리소설집, 연애 에세이집 등등, 많은 작품을 스스로 기획하여 번역했다. 이제는 먹으라고 따다 주는 감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라,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러나 이런 건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라, 지금은 현실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번역은 하고 싶은데 인맥도 없고, 사방이 막혀서 도무지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거나, 이판사판 목숨 걸고 뚫어 보라. 압축기, 가끔 마시마로가 모자처럼 머리에 붙이기도 하는 그 압축기로 막힌 하수도를 뚫듯이, 막혀 있는 미래를 뚫어 보라. 일본어 번역을 하는 사람이라면(어느 언어권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인터넷에서 아마존 재팬 같은 일본 사이트를 찾아,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좋은 책들을 골라 보라. 검토서를 작성해서, 출판사에 보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니, 가장 보편적인 뚫기 방법이다. 열심히 뒤져서 좋은 책을 골랐으나, 알고 보니 이미 계약된 책일 수도 있고, 시장성이 없어 출판사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채택되어도 다른 기성 번역가에게 맡길(p. 71)수도 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 해서 ‘아, 삽질했네.’ 하는 좌절은 금지다. 번역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에서는 신간 검토할 사람들을 항상 찾고 있다. 고정적으로 맡기는 사람이 있다 해도, 검토서 작성을 깔끔하게 하고, 적극적으로 자료를 찾아오고 발췌 번역이 훌륭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아마 한번쯤 기회를 줄 것이다. 선임자가 친인척이 아닌 한은 말이다. 그렇게 기회가 찾아왔을 때마다 검토자 역할을 잘 해낸다면, 그 다음은 믿고 책 한 권 덜컥 맡겨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이 없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은 아마 실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딴에는 완벽한 조준이라 생각하며 감나무 밑에 누워 입만 벌리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일이 없는 동안에는 차라리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책을 읽어 국어실력을 키워라. 번역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음 번역은 매끄러워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자신에게 항상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번역을 한 권 마치고 나면, 뒤에 아무리 똥차 밀리듯 일이 밀려 있어도 반드시 국내소설 한두 권쯤 읽은 후,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일본식 문장에 익숙해진 머리를 조금이나마 원위치 시켜놓기 위함이다(p. 72). 보르헤스의 작품 번역을 수정하면서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의 번역본에는 옮긴이 각주가 많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었다. 어느 세계문학전집에는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이 적혀 있다. 보르헤스가 국내에 본격적으로(p. 147) 소개된 지는 불과 10년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지금과 그 당시를 비교하면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다. 가령 10년 전에는 많은 작가들과 독자들이 리얼리즘 양식에 집착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또한 보르헤스에 대한 관심도 상당하고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척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독자들은 보르헤스의 작품에 담긴 서스펜스나 극적인 반전과 같은 서사양식이 아니라 그의 현학적인 지식에만 관심을 보이며 그가 파놓은 미로에 빠져버린다. 번역가 역시 그의 현학적인 지식 때문에 많은 애를 먹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보르헤스의 현학적 지식에 담긴 사상이 현대의 과학적 패러다임의 허구를 밝히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확실성에 대한 의문은 그의 작품 구조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니 보르헤스의 현학적 지식을 설명하는 번역 각주가 이제는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차라리 독자들이 그런 지식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번역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보다 잘 이해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수정본이 결정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본이란 '화석'과 같은 죽은 존재라고 여긴다. 번역에서 결정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번역은 영원히 살아 있다. 번역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가능한 한 여러 번 번역되어야 한다. 번역은 변화이며 움직임이다. 더 이상 가야할 장소 없이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을 때 문학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p. 148).
    • 오피니언
    • 책소개
    2025-03-17
  • 【북토크】 어디서나 책을 읽자
    나는 요즘 지하철에서 책을 많이 읽는다. 취재 가방에 꼭 책 한 권을 넣어 간다. 그러면 여유가 생긴다. 시간이 남을 때 지루해하지 않고 책을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불현듯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에 관해 쓴 책이 있는지 궁금해 검색했더니 있어 대출해 읽었다. 매우 유익했다. 그런데 이미 절판됐다. 복잡한 지하철이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도서관이고 훌륭한 저자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만남의 현장이다.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을 잘 활용하면 엄청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래저래 내 차를 잘 안 타고 다니니 여러모로 유익하다. 자신이 출퇴근하는 시간대가 러시아워 시간이라면 지하철에 서 독서습관은 어렵다. 이때 출퇴근 시간은 죽는 시간이 되어버(p. 40)린다. 지하철 독서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아침에 러시아워를 피해 일찍 출근할 것을 권한다. 이른 아침의 지하철은 독서 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30분만 일찍 집을 나와도 러시아워는 피할 수 있다. 당신의 아침이 달라지면 하루가 달라지고 하루가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진다. 죽어 있는 출퇴근 시간만 살려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덜커덩덜커덩하는 흔들림은 오히려 책 읽기 좋은 진동이다. 독서습관이 완성되는 날까지 당신의 최선은 아직 실행되지 않았다. 지하철 독서습관이 완성되는 날까지 작은 행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조금 더 일찍 출근하는 작은 행동은 지하철 독서습관을 들이기 가장 좋은 방법이다(p. 41). 세계적인 동기부여가 찰스 존스는 “지금부터 5년 후의 내 모습은 두 가지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 읽고 있는 책과 요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슴 뜨거워지는 꿈을 갖고 싶은가? 그럼 바로 책을 읽어라. 너무나 쉽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독서다. 왜냐하면 꿈을 찾기 위한 독서는 꾸준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꾸준한 독 서는 마음을 열고 설레는 꿈을 찾게 한다. 지하철 독서로 독서(p. 69) 습관을 기르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날이 올 것이다. 단순히 ‘무엇이 되고 싶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독서이다. 나의 경우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작가 아니라 독서의 힘을 알리고 많은 사람에게 좋은 변화를 불러오게 하는 작가가 되는 꿈이다. 그 꿈을 실현하는 나의 첫 책을 2017년 3월까지 초고를 완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독서하고 책을 쓴다. 지금 이 글도 새벽에 쓰고 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독서습관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이것이 출판 기약도 없는 집필을 계속하게 하는 힘이다. 매년 독서의 힘을 알리는 좋은 책을 쓰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이어가는 작가가 될 것이다. 특히 아이들, 엄마들에게 독서의 힘을 전파하고 싶다. 난 그러기 위해 계속 책을 읽을 것이다.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누구나 부자를 꿈꾼다. 그렇게 되려면 만나는 사람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나를 성공한 사람이 만나 주지 않아도 괜찮다. 당신이 그의 책을 읽으면 된다. 오히려 직접 만나는 것보다 책을 통해 저자와 가까이서 만나고 대화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이지성, 하우석, 김송호,(p. 70)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그리고 고인이 된 사람들까지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철학자 데카르트도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성공한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생각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진다. 하우석의 〈5년 후〉에서 오로지 공부만 해온 카이스트 학생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최근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카이스트에서 잇달아 학생들이 자살한 사건이 우리 사회를 깊은 충격에 빠뜨린 적이 있다. 그즈음 나는 카이스트 학생 몇몇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은 말을 털어놓았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태까지 정말 공부만 해왔거든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공부에 소질이 있어 공부를 했을 뿐이지, 뚜렷한 목적을 품고 공부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1등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행학습을 하게 되었고 명문 중학교를 거쳐 과학고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선 오로지 '카이스트, 서울대, 포스텍'만 생각하게 됩니다.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그래요. 어쩌면 '당연하게(p. 71)도 저는 카이스트에 입학했습니다. 또 그곳에서 오직 공부만 했습니다. 석사를 목표로, 또 그 후엔 박사를 목표로, 드디어 박사과 정이 끝나갑니다. 그런데 정말 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현실은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남은 인생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선배들처럼, 친구들처럼 그냥 연구원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삶에 도전해야 하는 건지...., 연구원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런데 그게 과연 제가 원하는 삶일까? 하는 질문에 저는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길에 대한, 새로운 삶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정보도 없고요. 그래서 고민입니다. 후후 그냥 막연한 고민이죠.” 최고의 수재들이었지만, 공부보다 우선해야 할 자신의 인생 설계에는 너무나 취약했다.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지 말고 내 꿈을 위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리는 우리의 삶은 기업처럼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인생계획을 짜야 한다. 평범한 주부도, 은퇴를 앞두고 있는 직장인도, 중고등학생도 모두 자기 책임으로, 자기 주도하에 자신만의 인생계획을 수립해야 한다(p. 72). 책을 읽으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물론 책을 많이 읽었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자가 바뀌지도, 자녀의 태도가 달라지지도 않 는다. 직장에서 일거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달라지는 것은 바로 내 마음가짐이다. 내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러면 배우자,(p. 75) 자녀, 직장 동료를 대하는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진다. 오가는 대화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주어진 환경은 바꿀 수 없지만 내 마음은 바꿀 수 있다. 마음을 달리 먹는다는 것은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다. 생각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인격이 된다. 인격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운명이 된다. <마거릿 대처> 결국 운명을 바꾸는 근원은 생각이다. 생각은 씨앗이다. 씨앗은 뿌린 대로 거둔다. 자연의 섭리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빌은 “현재 우리의 모습은 과거에 우리가 했던 생각의 결과”라고 했 다. 생각은 힘이 있다. 심지어 김승호 대표는 생각은 ‘물리적인 힘’이라고 했다.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p. 76). 한국경제신문에 소개된 〈전쟁터로 간 책들〉의 독자편지한 대목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군인들은 책을 들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진창을 헤맨 이래로,...동료 병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던 이래로, .... 더 이상 사람이나 사물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열여(p. 104)덟 살에 입대해 2년간 전장을 돌아다니며 지옥을 겪었다는 한 미국 해병대원의 고백이 이어진다. ‘차가운 마음과 무뎌진 정신으로 저는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만난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읽으면서 뭔가 내부에서 꿈틀거렸다고 했다. '차갑던 마음이 다시 살 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책은 제게 웃음과 기쁨, 눈물을 가져다 줬습니다. ... 눈물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제가 인간임을 증명해 줬으니까요.' 내가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만 했다. 아무리 전쟁터이었지만, 처음에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정신적인 충격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내가 살인병기가 된 것인가?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렸을까 봐. 의문이 들었던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책을 읽었다. 끝없는 진창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빗물 고인 참호에서 불편하게 잠을 청해야 했던 군인들의 바지 뒷주머니와 상의 주머니에는 책이 있었다. 군인들은 책을 읽으면서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여전히 인간의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에 안도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책은 수많은 군인들의 삶에 위안을 주었다(p. 105) 다구치 미키토 서원이 쓴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동네서점〉의 일부를 소개한다. 2011년 3월 11일, 진도 9.0의 대지진이 일본의 도후쿠 지방을 덮쳤다. 건물 3층에 박힌 자동차,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기울어져 버린 주택, 대량 건물의 잔해들과 쓰레기...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시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삶의 흔적을 찾고 있었고,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찾는 소방대와 자위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 다. 그곳에 작은 동네서점이 있었다. 서점 안에는 책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설마 혼란스러운 와중에 사람들이 전부 책을 가져간 걸까? 그곳 직원의 말에 의하면 서점을 다시 열었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고 한다. '어떤 책이든 좋으니 아무튼 책을 좀 달라'며 다퉈 사 갔고, 그 후로 책이 들어오지 못해 서점이 텅 비어버렸단다. 전기며 수도, 가스도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책을 필요로 했다. 갑작스러운 대지진으로 인한 불안, 앞일에 대한 걱정으로 사람들은 겁이 나고 불안한 그때 왜 책을 생각했을까? 그렇다. 책은 사람들에게 평상심을 갖게 하는 대상이다(p. 106). 2011년 3월 일본 최악의 재난인 쓰나미가 발생했다. 쓰나미는 집, 자동차, 심지어 가족까지 앗아갔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생존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이 책을 사러 서점에 왔다. 그런 상황에서 왜 그들은 책을 사러 온 것일까? 그들은 책을 읽으며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로 인해 삶의 균형감을 얻으려고 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은 육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이 배고플 땐 책을 읽어야 한다. 내면의 배고픔은 책으로 채워진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보낸 8년 동안 거의 매일 밤 한 시간가량 짬을 내서 책을 읽었다. 그는 "일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정보가 어지럽게 오갈 때 독서는 속도를 늦추고 균 형감을 갖게 한다. 책 읽기가 나를 더 나은 대통령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난 8년간 균형을 잃지 않게 해준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분초 단위로 짜인 공적 생활의 압박감과 긴장감을 그는 매일 취침 전 한 시간씩 책을 읽으며 균형감을 잃지 않고 견뎌냈다(p. 107). 〈완벽한 공부법〉을 쓴 신영준 박사는 "우리나라 성인들의 문해력 수준이 토론할 수 없는 정도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어른들은 토론을 시작하면 싸움으로 변질하곤 한다.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말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문해력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을 해독하는 것을 넘어 복잡한 텍스트를 읽고 그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말한다.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나라 성인은 좀 복잡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평가하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자녀와 기본적인 토론을 하려면 부모부터 독서를 통해 문해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은 국영수 공부하기 바빠 독서를 할 시간이 없다. 시험에 나올 인문고전을 달달 외울 뿐이다. 독서 습관이 없는 학생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책을 읽지 않는다. 주입식 교육에 길들어진 대학생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독서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독서를 주입식 교육으로 외워 독서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한 권을 보더라도 제대로 읽고, 충분한 토론과 비판이 이뤄지도록 하는 방식의 새로운 독서방식이 필요하다(p. 117).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책은 인간이 마법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말했다. 책은 정말 마법의 도구이다. 헌책방에서, 서점에서, 도서관에서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보 물들이 잠자고 있다. 그 보물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멋진 인생을 위해서 계속 책을 읽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도 "남의 책을 많이 읽어라. 남이 고생한 것을 가지고 쉽게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현자들이 죽어가면서 남긴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책이다. 그 현자들은 지금 알려진 사람일 수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이 오랜 시간 걸려서 깨우친 것을 그가 남긴 책으로 아주 간단하고 쉽게 얻을 수 있다. 책보다 더 쉽고 빠르고 간단하게 남의 것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책만큼 인생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다(p.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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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3-16
  • 【북토크】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자
    현직 일본 의사가 말기 환자의 의료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과연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다. 중환자실에서 가망 없는 연명치료를 하며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모두 죽은 것은 확실한데, 이에 대한 담론이 적다. 존엄하게 죽는 법을 함께 토론하고 준비해야 한다. 대부분의 의사나 간호사들은 죽을 고비에 이른 환자에 대한 인공호흡이나 심장 마사지 등의 소생술은 의료인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건강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이상을 일으켰을 때, 예를 들어 심근경색 발작 같은 양성 질환으로 갑자기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구급소생술을 적정하게 실시하는 것으로 죽음의 문턱을 한 걸음 넘어서버린 환자의 호흡을 되돌릴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의 치료에 따라 어느 정도 사회 복귀도 가능하다. 따라서 응급 시에 능숙하게 소생술을 실시하거나 각종 약제를 적합하게 사용할 줄 아는 것은 의사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p. 44) 능력이다. 또 상황에 따라 임사(臨死) 환자에 대한 인공호흡이나 심장 마사지 등의 소생술은 의료인으로서 당연한 의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환자의 경우는 과연 적절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환자와 같이 이미 손쓸 도리가 없는 사람에게, 그리고 본인조차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말기 암 환자에게 시행하는 소생술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설령 이 소생술이 성공해서 환자의 목숨이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 연장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만약 의식이 돌아온다고 해도 환자는 의료 기계에 둘러싸여 고통으로 가득 찬 시간만 다시 맛볼 뿐이다. 그리고 다시 곧 죽음에 이를 것이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환자의 심장이 기계적으로 몇 시간 움직일 뿐이고, 그 환자는 곧 소생술을 개시하기 직전의 임사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임사 상태에 있을 때 시행하는 소생술은 그때까지 불치병과 싸우느라 영혼까지 지쳐버린 말기 암 환자에게 겨우 찾아온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아무런 힘도 의지도 없는 환자의 육체에게 억지로 버텨보라고 강요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엔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경외도 애도의 마음도 없다. 그저 일분일초라도 환자의 목숨을 더 연장시키려고 하는, 연명지상주의의 현대 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의 의무감만 있다(p. 45)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의사 스스로 그 소생술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허락할 수 없는 소생술이 자행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의미가 없는 일을 임사 환자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런 상황에서의 소생술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바라는 사람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다. "자신의 죽음이 확실해졌을 때는 ‘절대로 무의미한 소생술은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죽게 해주세요.’ 라고 가족과 의사에게 반드시 말해두십시오." 그렇게 해두지 않으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환자처럼 당신의 죽음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최후의 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모두 통증을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동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암 환자는 전체의 3분의 2로 알려져 있다. 또 동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모두 극심한 통증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괴로움을 호소하는 환자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임상 현장에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의사들이 말기 암 환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동통 대책도 불충분하기 짝이 없는 게 현실이다. 아니 동통 대책이 불충분하다기보다는 다양한 제통법이 있는데도 그것들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든다. 예를 들면 암성 동통에 대한 모르핀의 유효성과 안전성은 충분히 입증되었고,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성격이 바뀔 정도로 통증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모르핀 중독의 미신을 믿는 의사들 때문에 환자의 고통이 방치되고 있다. 그러한 실태를 보고 있으면 의사들의 관심이 환자 자체가 아니라 암에만 가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러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말기 암 환자는(p. 90) 불쌍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런데 암 환자가 호소하는 고통이 모두 암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고통의 대부분은 암 종양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암 종양이 커지면서 주위 기관을 압박하거나 신경으로 차츰 퍼져 나가는 것 등에 기인한다. 그 밖에 호소하는 고통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육체적인 고통이라기보다 날로 약해져가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불안이나 고독, 공포 등에 따른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다. 그러한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호소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어느 대학병원에 여성 암 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그녀의 암은 말기 유방암이었고, 늘 심한 동통을 호소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진통제 주사를 요구했다. 그런 그녀가 더 이상 치료 수단이 없다는 이유로 시내의 다른 병원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를 그저 성가신 물건 처리하듯 다른 병원으로 보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병원을 옮긴 것이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병원에는 그녀와 같은 말기 암 환자도 여느 환자와 똑같이 간호해주는 간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병원을 옮긴 후에도 대학병원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주 동통을 호소하며 진통제 주사를 요구했다(p. 91) 그러던 어느 날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에게 어느 간호사가 진통제 주사 대신 한 잔의 뜨거운 커피를 들고 갔다. 간호사는 커피를 권하며 환자의 이런저런 호소를 진심으로 들어주었다. 그 다음 날부터 그녀가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진통제 사용도 격감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실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런 의료 현장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어느 병원이나 분주하게 돌아가는 데다 대부분 말기 암 환자가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같은 주장을 펼칠 생각이지만, 일반 병원은 사람이 죽기에 알맞은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우선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 싶다. 지금 잠깐만이라도 나의 이 생각에 동의 해주셨으면 한다(p. 92) 운명을 바꿔놓은 한 권의 책 이 조용한 남극 바다에서 승조원들은 곧장 해저의 지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무한한 자유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청정한 자연 속에서 뱃멀미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이럴 때를 대비해 일본에서 가져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독서에 지쳐 갑판으로 나오면 그곳에는 맑고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고, 눈앞의 빙산에서는 펭귄들이 침입자에 아랑곳 않고 자기들만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바다 속에서는 가끔 고래들이 포획 따위는 두렵지도 않다는 듯 물을 뿜어 올리면서 유영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처럼 태평스럽게 책을 읽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 책들 가운데 한 권이 내 운명을 바꿔놓게 되었는데, 일 본을 떠나기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산 책이 이렇게 내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한 권의 책이란 1926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미국 여성 정신 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이다(p. 126). 특이한 제목의 책이었지만, 의사 나부랭이인 나는 죽음에 관한 책을 읽어두면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가벼운 생각에 냉큼 사고 말았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예비지식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처음 책을 대한 순간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으려면 나름대로 노력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읽기 시작해서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내가 의사가 되고 8년이나 걸려서 얻은 몇 가지의 '바로 그런 것'이라는 상식이 너무나도 쉽게 뒤집혀버린 것을 내 가슴속에 차오른 뜨거운 감동 속에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몇 가지의 의료 행위가 급속도로 괴로운 과거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한 구절을 읽고 나서 잠시 동안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그 한 구절 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환자가 삶의 마지막을 정들고 애착이 가는 환경에서 보낼 수 있다면, 환자를 위해 일부러 환경을 조성할 필요는 거의 없다. 가족들은 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진정제 대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 잔의 포도주를 따라 줄 것이다. 집에서 만든 수프라면 그 냄새에 식욕을 느낀 그가 몇 모금 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수프 한 모금은 어쩌면 그에게 어떤 영양제보다도 훨씬 더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나는 그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다시 읽(p. 127)어봐도 아련한 감동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깟 거에 무슨 감동까지 느끼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나는 이 한 구절을 읽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온몸의 피가 역류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한 구절은 내가 의사가 되고 나서 배운, 또 당연한 것으로 알고 시행하던,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일분일초라도 더 연장시키려는 의료 행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본 후에 항상 느끼던, 열심히 치료했는데도 왠지 뒤끝이 개운치 않고 찜찜한, 뭐라 말할 수 없이 답답하던 내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구절이기도 했다. 그랬다. 그런 것이다. 혼자뿐인 선실 안을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대하는 내 자세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던 어느 환자의 임종 장면을 떠 올리고 있었다(p. 128). 병원에 돌아온 지 9일째 되는 날 그녀의 조용한 반응은 더욱 약해졌고, 10일째 되는 날 밤에 그녀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60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여러 튜브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평온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녀의 인생 대부분이 결코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마지막 10일 동안 그녀가 절망적인 불행의 한복판에 있었다고는 해도 스스로 납득하는 삶을 보낼 때, 그것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비통한 외침 속에서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최후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p. 197). 실제로 임종에 이르러 환자의 고통스런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 표정, 손발의 움직임 등은 병원에 있든 집에 있든 장소를 불문하고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이다. 그러한 증상들 대부분은(p. 222) 인간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시점에서는 병원에 있다고 해도 대처할 만한 방법이 거의 없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그런 상태의 환자 대부분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생각하듯 고통이란 걸 느끼지 못한다(p. 223) 나는 모든 말기 암 환자에게 환자 자신의 병명과 현재 상태를 알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암 고지처럼 무겁고 괴로운 정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극복하는 사람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p. 242) 내가 이처럼 말기 암 환자에게 병명과 병세를 전하는 데 얽매 이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환자 본인의 정보이고, 그 정보가 환자의 남은 인생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병명과 병세는 환자에게 괴로운 정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불치병이라는 이유로, 어차피 치료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쌍하다는 이유로, 의사나 가족의 판단 만 갖고 환자에게 진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 그러한 행위는 결국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올바른 정보를 근거로 직접 판단하고 결정해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자기 결정권'이라는 소중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방적으로 그 사람 인생의 가능성을 빼앗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그것이 설령 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함께 짊어지는 도움쯤은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의사가 가족과 함께 생각하면서 고민해야 하고 가족의 동의하에 진행되어야 하지만, 병명과 병세를 전하려는 노력을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면 환자의 인생을 모욕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당연히 잘못된 행위다(p. 243). 여기서 한 가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병명과 병세를 전했다고 해서, 즉 거짓이 없어졌다고 해서 깊은 교류 관계가 성립 되었다기보다는 깊은 교류를 맺었기 때문에 진실을 전할 수 있(p. 273)었고, 또 그에 따라 더욱 깊은 신뢰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의료인과 환자 그리고 환자 가족이 서로에게 우정을 느낄 정도로 교류를 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실제 의료 현장은 매우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환자에게 진실을 전하고, 환자가 자신이 처한 진짜 상황에 근거한 인생을 보내게 해준다는 것은 나름대로 각오하고 매달리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다. 즉 대부분의 말기 암 환자가 죽어가는 일반 병원의 경우,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그들에 대한 간호는 통상적인 업무 리듬과 맞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나는 지금 근무하는 병원에서 종말기 의료(터미널 케어)에 몰두했던 것인데, 그 성과는 아무리 노력해도 입원 중인 말기 암 환자의 2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이 일반 병원에서 할 수 있는 터미널 케어의 물리적인 한계임을 여실히 느꼈다. 결국 지금의 이 체제나 상황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80퍼센트에 가까운 환자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깨닫지 못하고, 설사 깨닫는다 해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환자나 그 가족은 불만을(p. 274) 터뜨리지 않는 것일까. 대부분의 말기 암 환자는 자신의 실상을 모른 채 투병하고 있고, 가족과 의료인은 환자에게 진실을 전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 한 의료 현장의 실상 또한 그리 쉽게 바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진실을 알고 나름대로 인생을 마무리 하려는 자립적인 사람들에게는 일반 병원만큼 최악의 장소도 없을 것이다(p. 275). 호스피스에 대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도움의 문제다. 영국과 미국의 호스피스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호스피스 간호를 제공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 모두 기독교라는 공통된 종교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래도 종교적 배경이 두텁고 같아야 환자의 종교적인 필요와 욕구에 부응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배경이 허술한 일본에서는 호스피스 간호가 곤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한다(p.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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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6
  • 【북토크】 전쟁 중에 벌어진 억울한 민간인 희생
    6.25 전쟁에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국군 전사자는 13만 7,899명, 부상자는 45만 742명, 실종자 2만 4,495명, 포로는 8,343명으로 총 62만 1,479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 민간인 사망자는 24만여 명, 양민 학살로 숨진 사람은 12만 8,000여 명, 부상자 22만여 명, 실종자는 30만 명이 넘어 총 99만여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는 억울한 죽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파헤치고 있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이 없어야 하는데 과연 그럴지 자신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표가 비대하게 몸집을 키워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1966년 추석의 그 만남은 내 사유체계의 바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형해화시켰다. 1992년, 파리에서 망명 중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찾아왔다. 나는 물었다. “왜 그때 동네 아이들까지 싹 다 죽였을까요?" 1950년 9•28수복 직후, 황골처럼 가족 단위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경우는 드물다. 한국전쟁에서 이런 유의 학살은 주로 1951년 1·4 후퇴 직후 벌어졌다. 아버지는 구원(舊怨)과 텃세와 이권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사적 감정, 가문끼리의 기싸움 그리고 가구 수에 비해 좁은 땅. 숨기고 있던 알력이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이라는 기회를 틈타 순식간에 타올랐다고 했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상대 집안 씨를 말려야 했다. 그래야 그 집과 땅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p. 222). 이승만 정부의 '부역자' 처리 양상과 규모 '부역(附逆)'은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행위를 말한다. 법에 처음으로 ‘부역’을 법률적으로 정의한 ‘부역행위 특별처리법’과 ‘사형금지법’ (1950년 12월 1일 공포)에서도 '부역자'는 "역도(逆徒)에게 협력한 자"로 기술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행위가 협력한 것인 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법률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임하에 따르면, 자발성이냐 비자발성이냐도 부역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역도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심판자가 일방적으로 판단하기만 해도 부역자로 간주되었다. 이런 부역 행위 규정의 자의성, 모호성, 불특정성은 그대로 부역자 처리, 처단의 잔혹성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부의 부역자 심사와 처벌의 법적 토대는 대통령 긴급명령이었다. 긴급명령 제1호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1950년 6월 25일 공포)은 단 한 번의 재판만으로 증거 설명도 생략한 채 부역 혐의자에게 사형 또는 중형을 내릴 수 있어서 적극 활용되(p. 360)었다. 이 명령은 제헌헌법 제57조가 규정한 긴급명령 제정과 공포의 절차와 형식도 어긴 것이어서 위헌적이었다. 수많은 무고한 국민들을 감금하고 처형했다. 긴급명령 제5호 '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 (1950년 7월 26일 공포)도 마찬가지였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하는 부역혐의자에 대한 군사재판을 신속하고 간략하게 처리하기 위해 민간법원의 판·검사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부역혐 의자들이 범죄처벌특조령으로 “사색 없이 사형, 사형” 당했다. 유병진 판사의 이야기다(본문 ‘소리 없는 도망’ ‘사색 없이 사형, 사형’). 마지막으로 긴급명령 제9호 비상시 향토방위령(1950년 8월 4일 공포)은 우익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마을 단위의 자위대가 인민군과 공비, "기타 이에 협력하는 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시 민간단체에게 '체포'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자위대나 치안대가 임의적으로 '즉결처형' 형식으로 대량 학살할 수 있었던 건 향토방위령을 제멋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치안대원들의 사적 원한과 보복, 욕망 등이 여기저기 참극을 만들었는데, 법은 이 사적 폭력들을 방조하고 묵인했다. 긴급명령 같은 국가긴급권 조치들은 국회마저 사후적으로도 통제 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전권이었다. 비상사태라는 미명하에 국민의(p. 361) 기본권을 유린한 법제화된 국가폭력이었다. 국회는 이를 견제해 부역 행위 처리에 신중을 가하고 극단적 처벌을 감면하도록 '부역행위 특 별처리법'을 제정했다. 국회는 전국 곳곳에서 부역자 학살의 서막이 올랐던 1950년 9월 29일에 제정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그 긴급성에도 불구하고 12월 1일이 되어서야 공포했다. 무분별한 사형을 금지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국회가 제정한 ‘사형금지법’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국회는 국민의 안전은커녕 스스로의 안전마저 도모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역혐의자로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았는지, 얼마나 많이 처형되었거나 징역을 살았는지, 또는 석방되었는지,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종합적인 통계는 없다. 다만 내무부 치안국이 1973년 발간한 《한국경찰사 1948.8-1961.5》에 주한미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한국정부의 부역자 처리에 관한 보고》 문건을 보면. 1950년 11월 8일까지 서울과 인천 지역의 부역자 재판 결과 통계가 있어서 처리 양상과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p.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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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5
  • 【북토크】 남을 함부로 단정 짓는 편견이 무섭다
    어느 날 아빠가 몸과 정신에 병이 나 이 모든 것을 아들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때의 막막함과 사회의 허술함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때 꿋꿋하게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자신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말하고 있다. 이럴 땐 차라리 무관심이 났다고 말한다. 우리는 남의 인생에 관심이 많고 또 쉽게 말하는 버릇이 있다. 당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알 수 있다. 도시가스 검침을 받았다. 집을 둘러보던 검찰원이 물었다. "원래 계시던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이고,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대답했다. 검침원이 숫자를 입력하던 손을 멈추더니 목을 앞으로 쭉 뺐다. "무슨 병이라도?" "그냥 화상이에요. 약간 치매 초기라." "지금 할아버지가 아니라면 연세가?" "이제 쉰일곱.." "아니 어쩌다 벌써?"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이 밀고 들어왔다. 가족들은 어디 있느냐, 아버지의 과거는 어땠느냐, 당신은 지금 뭘 하느냐.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 계속되더니, 결국 종착지처럼 한 질문에 도착했다. "가족 중에 예수 믿는 사람 없죠?" 검침원은 내가 시험에 빠졌다고 했다.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큰 불행이 온다고, 더 큰 고난이 기다린다고, 저주처럼 전도를 했다. 지나친 사명감으로 나를 들들 볶더니 확실한 답을 얻으려는 듯 예수님 믿을 생각이냐고 되물었다. "우리 집에서 어서 나가세요."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맡게 되는 가난의 냄새, 오래되고 낡은 가구, 벽지, 문틀 같은 요소들이 사명감을 높여주나 싶었다. 집을 나가면서 검침원은 재빠르게 가방에서 팸플릿 하나를 꺼내 던졌다(p. 162) "언제든 도울 수 있으니 연락 주세요!" 난데없이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팸플릿은 소년 소녀 가장이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증오하다가 예수를 만나 구원받았다는, 꼭 나를 염두에 둔 듯한 내용이 채워져 있었다. 찢어버렸다. 사람들은 꼭 이랬다. 아버지하고 함께한 시간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세상이 다 권유하지만, 긍정하려는 노력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어쩌다 내 상황을 직접 듣거나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더군다나 내 나이 또래에게 질병이나 죽음은 너무 먼 이야기였다. 세상은 질병이나 죽음의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효자 났네, 효자 났어." 누군가는 나를 '효자'라고 불렀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버리고 버려지는 요즘 같은 세상에 병든 부모를 챙기는 일만으로도 용하다는 칭찬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효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병원 앞에서 안 가겠다고 떼쓰면 멱살 잡고 끌고 잤어요." "새벽마다 주절거리는 아버지를 잠재우려고 장롱 문을 발로 꽝 꽝 찼어요." 그렇다고 나는 ‘불효자’라고, '효자'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효자라는 말 앞에 서면 아버지를 돌보는 내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용해졌다. 부모 돌봄은 가(p. 163)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꽁꽁 싸매는 사람들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저 병든 아버지하고 함 께하는 나 같은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말이 딱히 없으니까, 가장 적당하고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단어를 쓸 뿐이었다. "으이구, 밥이라도 많이 먹어." 밥은 먹고 다니냐는 연민과 동정도 많이 겪는 반응이었다. 졸지에 비 맞고 있는 안쓰러운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힘들어도 스스 로 버텨냈다는 어떤 자긍심이 있었는데, 그런 마음이 짓밟혔다. 연민과 동정은 그동안 혼자 고민하고 행동한 내 삶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효자라는 말이나 연민과 동정은 차라리 무관심만 못했다. 한 번은 거기에 반박한답시고 이렇게 말해봤다. "아버지랑 함께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랑 함께하면서 겪은 사건들 때문에 사회과학 책을 피부로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에 관한 고민이 철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자들하고 맞닿은 계기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을 들은 누군가는 더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합리화할 필요는 없다고 나를 다독였다. 그러니까 나는 불행한 사람이었고, 무능한 부모를 원망해야 마땅했으며, 이 세상을 향한 증오로 가득해야 했다. 그런 내가 사람들이 허락한 내 모습이었다(p.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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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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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중년에는 다르게 살자
    중년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많이 해주는 유익한 책이다. 내 나이에 걸맞은 삶의 팁들이었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은 나이가 됐다. 중천에 떴던 해가 급히 지고 있다. 이륙이 아니라 착륙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됐다. 물론 언제나처럼 열심히 살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 때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진다. 암 검진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이유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내용은 오랜 시간 고령의 암환자들을 지켜본 경험에서 나온 지극히 개인적(p. 140)인 생각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모두 몸 어딘가에 암세포를 품은 채 살아간다. 자신의 몸에 암세포가 있었다는 사실을 평생 모르다가 다른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내가 근무했던 요쿠후카이 병원의 고령 환자 중 3분의 2가 실제로 그랬다. 일반적으로 70대나 80대에 발견된 암은 중년 환자의 암세포보다 진행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환자가 수술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나이까지 생존하는 사례가 많다. 암은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어 대부분의 성인들은 정기적으로 암 검진을 받는다. 물론 나도 중년 환자라면 하루라도 빨리 암을 발견해 조기에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70대에 접어들면 빠르게 발견해서 서둘러 치료해도 큰 의미가 없다.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적어도 4~5년간은 별다른 증상 없이 평소와 똑같이 건강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 지병과의 공존 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기억하는가?(p. 141) 암과도 공존 의식이 필요하다. 점진을 받고 암이 발견되는 바람에 급히 수술을 받았다가 몸이 쇠약해지는 고령 환자들을 많이 보았다. 기력이 떨어져 거동이 힘들어지고 결국 다른 병에 걸려 예상치 못하게 일찍 삶을 마감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그러니 굳이 암을 찾아내려 하지 말고 ‘모르는 게 약’ 이라는 생각으로 주어진 삶을 끝까지 누리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 해버릴지 모르지만 암과의 공존은 나이가 들면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건강검진에 집착할 필요 없다 지금까지 내가 여러 저서와 기고문에 수없이 설파하고 다닌 만큼 이미 들어본 독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솔직히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암 검진은 물론이고 건강검진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p. 142) 마음 편하고 즐거운 것이 최고의 건강 관리법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내용을 요약해보자. 60대가 지나면 의사가 권하는 대로 무리해서 암 검사와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된다. 굳이 건강검진을 받을 필요도 없다. 더 오래 살게 해준다는 보장도 없는 각종 약을 매일 꼬박꼬박 복용할 필요도 없다. 독자분들 중 몇몇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의사들은 이런 조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프기 전에 건강검진을 꾸준히 받고 약을 잘 챙겨 먹으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게 유지하는 사람이 더 오래 산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일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규모 임상 시험 결과는 본 적이 없다. 즉, 건강검진에서 나온 수치 대부분은 질병과 명확한 인과관계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체중, 혈압, 혈당치, 콜레스테롤 수치를 열심히 조절한다. 그것이 건강한 삶을 위한 기(p. 152)본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상식처럼 알려졌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이런 의학 상식을 무조건 믿어도 괜찮을까? 세상에는 다양한 의사가 있다. 보통은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진료한다. 하지만 연구실에 틀어박혀 몰두하느라 고령 환자를 진찰해본 임상 경험은 적은, 논문과 연구에만 정통한 의사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특히 대학병원이 그렇다. 현재 의료계는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며 만들어왔다. 나는 솔직히 그런 의사들의 조언을 무조건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대학병원 교수라는 권위에 끌려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르는 고령자가 많다. 그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학병원에도 분명 환자의 상태를 배려하며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완쾌 후 삶의 질까지 신경 쓰며 진료를 보는 의사가 있을 것이다. 결국 의사와 치료법은 환자 스스로가 충분히 내담해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끌리는 쪽을 선택하면 된다. 다만 지금까지 내가 권한 조언(암 수술 받지 않기, 건강(p. 153)검진 받지 않기, 복용약 줄이기 등)을 따른다고 오래 산다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대학병원 의사들이 말하는 강수 비결에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겠다. 적어도 내가 권하는 건강 관리법은 오랜 시간 수많은 고령 환자를 지켜봐온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양쪽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면 연구실에서 동물 실험과 논문에 집중했던 의대 교수보다는 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를 만나며 임상 경험을 쌓은 나의 주장이 더 믿고 따를 만하지 않은가? 의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치료법과 지식은 아직 연구 중인 최신 이론일 뿐이다. 이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면 어떨까? 억지로 각종 수치를 조절하며 걱정하는 괴로운 건강 관리법보다 마음 편하고 즐거운 건강 관리법이 낫다. 나는 참고 억눌러도 건강과 장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지금의 즐거움과 활력을 우선시하는 관점이 낫다고 생각한다. 강박적으로 건강을 관리하겠다는 생각은 버리자(p. 154).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인생관이나 좌우명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마음에 품은 생각이나 기준 덕분에 나태해진 태도를 바로잡기도 하고 갈림길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줄곧 품고 살아왔던 생각과 기준을 바꿔야 할 때가 온다. 젊은 시절에 세우고 지켜왔던 인생관이나 좌우명을 60대 이후까지 그대로 유지하려 고집하다가는 그것이 자유와 행복을 속박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좌우명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인 사람이 있다고 치자. 젊은 시절에는 이 좌우명을 마음에 품고 열심히 일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나이가 들면 결국 일을 할 수 없는 때가 온다. 그때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p. 174). ‘일도 하지 않고 연금만 받으며 놀고먹어도 괜찮을까?’ ‘생활이 어렵기는 하지만....연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못했는데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지.’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노인을 위한 일자리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젊은 시절의 좌우명을 계속 고집해 스트레스를 받고 정신적으로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잠시 간략히 설명하고 지나가자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구절은 성경에서 비롯되었다. 신약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라는 구절이 있다. 타인에게 참견하며 나태를 부리지 말고 정직하게 일하며 나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표현을 가져다가 성경과 다르게, 이념적으로 활용한 이가 바로 소비에트연방을 수립한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Vadimir Lenin이다. 레닌이 가리키는 '일하지 않는 자'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었다. (p. 175) 나이 먹고 뒤늦게 후회하는 6가지 지금까지 고령의 환자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노년에 들어서 과거의 삶을 후회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다시 젊어질 수 있다(p. 190)면 다르게 살 것이라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사람들이 나이 들어 후회하는 것은 대부분 아래의 6가지로 나뉜다. 1. 좋아하는 일을 많이 하지 못했다. 2.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3. 개성을 억누르며 남에게 맞추려고 애썼다. 4. 주변에 적극적으로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다. 5. 돈 걱정만 하며 살았다. 6. 의사의 말을 과하게 믿고 따랐다. 읽다 보니 가슴 뜨끔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위의 6가지를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지금부터 반대로 살면 후회할 일이 적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6가지를 아울러 정리하면 '남의 눈치만 보지 말고 내 개성을 드러내며 원하는 대로 과감하게 사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당장 마인드를 리셋하고 지금부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자. 60대부터 남은 인생은 모두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p. 191) 6가지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후를 행복하게 보내는 비결이다(p. 192). 60세의 마인드셋 7계명 이 책의 서두에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마인드셋 7계명을 언급했다. 지금까지 나의 주장을 경청하고 공감해 준 독자 여러분이 삶의 중후반을 잘 보내고 행복한 고령자로 살아가기를 기원하며 마지막으로 60대를 위한 마인드셋 7계명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이기고 지는 일에 연연하지 말자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기 마련이다. 비교하다 보면 남들보다 앞서 나가(p. 204) 이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기고 지는 것만 생각하면 살면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타인을 인정하면 내가 지는 거라는 고지식한 가치관으로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당신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좁은 시야에 갇혀 점점 고립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승패에만 연연하며 편협한 사고에 빠지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고집을 내려놓자. 세상에 유일한 정답은 없다.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면 점점 더 지혜로워 질 것이다. 하지만 마음가짐을 바꾸지 못하면 점점 더 어리석어질 뿐이다. 2. 해보기 전에 지레 판단하지 말자 인생은 실험의 연속이다. 나는 50세쯤에 정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때 부터는 세상에 다양한 답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p. 205) 다양한 답을 찾고자 더 폭넓은 독서를 시작했다. 간혹 세상만사에 정해진 답안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직접 부딪혀보기도 전에 모범답안만 찾으려고 한다. 이미 마음속으로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입맛에 맞는 책만 골라 읽는다. 반대로 절대적인 정답은 없으며 실제로 해볼 때까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끝없이 넓어질 것이다. 내가 2장에서 주장했던 내용을 기억하는가? 상속세를 100퍼센트로 높이면 고령자들의 적극적인 소비 활동이 늘어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면 “전 세계적으로 상속세를 낮추는 추세인데 무슨 소리냐”, “어떤 경제학자의 이론에도 맞지 않는 허황된 생각이다”라는 반론이 즉각 튀어나온다. 당연히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과격한 주장임은 나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현재 일본은 전 세계에서 고령 인구 비율이 가장(p. 206) 높은 나라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정책을 시행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인생은 실험하듯이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오늘 점심으로 라멘을 먹고 싶다고 하자. 항상 가던 단골집에 가면 틀림없이 맛있는 라멘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단골집 옆에는 다른 라멘집도 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가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맛집인 모양이다. 왠지 꿀꿀하고 기분 전환이 필요한 날, 그 라멘 집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기대하지도 못한 색다른 인생이 펼쳐질 수도 있다. 아, 색다른 인생까지는 조금 과장되고 유난스러운 표현임은 인정한다. 아무튼 그 가게의 라멘이 맛있다면 당신이 종종 찾을 맛집이 하나 늘어난 것이다. 물론 맛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그저 ‘오늘 실험은 실패!’ 라며 가볍게 넘기면 된다. 이렇게 소소한 변화를 계속 시도하면 삶이 즐겁고 풍요로워진다. 일상에 작은 재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p. 207). 실제로 해보기 전에 지레 겁먹고 판단하지 말 것. 호기심을 갖고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보자. 3.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자 나이가 들수록 사고방식은 점점 보수적으로 변한다. 새로운 것이나 변화가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져 기존의 것을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많은 고령자들이 “이 나이에 무슨”,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나 듣지"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새로운 일은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 당연히 지켜야 할 나름의 선을 그어놓고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내딛으려 하지 않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제 그만 고정관념을 내려놓자! 쇼핑몰에서 진한 빨간색 셔츠를 발견했다고 하자. 디 자인도 독특하고 예뻐서 보는 순간 당신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옷을 입으면 너무 눈에 띄겠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웃음만 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주저한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을(p. 208) 바로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이 정말 많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생은 끝없는 실험의 연속이다. 비웃음을 받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뭐가 중요한가? 당신이 입고 싶다면 일단 입으면 된다. 오히려 잘 어울리고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입고 길을 나서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말이다. 4장에서 살펴본 당위적 사고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따르는 것을 일컫는다. 긍정적인 관점에서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좋게 받아들이는 자긍심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당위적 사고방식이 당신 삶의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의 문을 점점 닫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위적 사고는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데에서 시작한다. 빨간색 옷을 보고 당신이 주저했던 이유도 결국 주변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이 화려한 옷을 입으면 웃음거리만 될 테니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을 입어야 한다며 뻔하고 틀에 박힌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이다(p. 209) 당위적 사고와 고정관념은 당신의 행동 범위를 좁힌다. 그러니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감히 버리자. 타인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질지 고민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 점점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게 된다. 보청기를 끼는 것이 남들 눈에 이상해 보일까 걱정하기 시작하면 여러 사람과 대화 나누는 자리 자체를 피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이것저것 새롭게 시도해봐야 한다. 그래야 남은 인생을 활기차게 즐길 수 있고, 더불어 노년에 우울증에 빠질 위험도 낮출 수 있다. 4.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한동안 여론을 떠들썩하게 달궜던 '노후 자금 2,000만 엔'은 상당히 과장된 수치라고 생각한다. 각종 지표나 현재 상황을 보면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처(p. 210)럼 경제가 휘청이고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니 노후 자금에 손대지 않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 고 절약할 필요 없다. 그보다는 돈을 쓰고 풍요를 즐기며 지금 당장 행복을 느끼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노후 자금은 나중을 위해 아껴두자. 5년만 더 버텼다가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야지'라고 생각하며 절약하고 있는가? 미안한 말이지만, 5년 후에 당신이 여행을 갈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당신이 꿈꾸는 그 여행지가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고, 5년 안에 다른 일이 생겨 큰돈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갑자기 이상이 생겨 당장 내일부터 침대에 누워 간호를 받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당신은 5년 후를 기약하지만 그때 몸 상태가 지금만큼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 순간을 즐겨라.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지 않으면 나중에는 즐길 수 없다. 나이가 들어서야 이 사실을 깨닫고 후회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지금 참고 노력하면 언젠가 좋은 때가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p. 211)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그런 생각은 내려놔도 된다. 그보다는 지금 즐기지 않으면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부터 즐기며 충실하게 살길 기원한다. 5. 남과 비교하지 말자 2021년에 별세한 작가 하시다 스가코는 생전에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21세기북스, 2018) 라는 책을 펴내 화제를 모았다. 하시다 스가코는 이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죽음을 준 비하고 있는지, 어떤 죽음을 바라는지 담담하게 밝혔다. 만약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 주장이 알츠하이머병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는 차별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알츠하이머 환자에게도 생을 끝까지 누릴 권리가 있다(p. 212) 아직 치매에 걸리지 않은 고령자가 치매 환자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마치 자신에게는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는 듯, 치매 환자를 부정적이고 한심하게 보는 듯하다. 이는 고령자가 고령자를 차별하는 셈이다. 그들은 정신이 또렷하고 거동도 잘하며 암에도 걸리지 않았고 성인용 기저귀를 찰 필요도 없으니 비슷한 연배의 타인과 비교해 자신이 '승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면 그들도 언젠가는 노쇠해서 거동이 불편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패자가 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치매는 오래 살면 언젠가 걸리는 병이다. 나의 의지대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빨리 걸리냐 늦게 걸리냐의 문제다. 지금 당장 치매가 아니라고 안심하며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지나면 주변 사람이 당신을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니 다음 교훈을 항상 마음에 새기자.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제각각 태어나 모두 함께 나이 드는 존재가 아닌가(p. 213). 6. 답은 스스로 찾자 우리는 살면서 풍부한 인생 경험을 쌓아간다. 나이를 먹으며 실패와 성공을 수없이 반복하고 직접 피부로 느끼고 배운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언정 60대쯤 되면 몸으로 경험해 단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감각과 직감을 바탕으로 얻어낸 답은 옳다고 믿어도 된다. 특히 육체적, 심리적 상태에 관해서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시끄러웠을 때 감염병 전문의들과 정부, 언론은 모두 입을 모아 외출을 자제하라고 했다. 모두가 숨죽인 채 집에 갇히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집에만 틀어 박혀 있으면 신체 활동에 제한이 생기고,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았는가? 스스로 견딜 수 없고 힘들다고 느낀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물론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하고, 서로 거리를 두며 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각종 건(p. 214)강 방침을 무비관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스스로 가장 잘 지킬 수 있다. 생활 방식이나 건강과 관련해서는 직접 생각해서 내리는 답이 최선의 해답이다. 인생의 큰 결정들도 마찬가지다. 이혼하거나 사별하고 혼자가 된 당신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고 하자. 남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뜻이 잘 맞는다. 다시 결혼하고자 준비하며 주변에 알렸더니 자식들과 친구들은 분명 재산이 목적일 것이라며 반대한다. 이런 경우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새로 만난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믿고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결혼해서 생활하는 당사자는 바로 당신이다. 그러니 결론도 당신 이 마음 가는 대로 내려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무슨 일이든 타인의 생각보다 나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사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주지도, 책임져주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든 결정은 당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내려야 한다(p. 215) 7.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자 마지막으로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이 앞에서 말한 6가지 마인드셋을 아우르는 말이다. 이기고 지는 일에 집착하거나 고정관념, 당위적 사고 방식에 사로잡히는 이유도 남의 눈을 지나치게 신경 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다.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타인을 무시하고 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은 당연히 안 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즐기며 살자는 것이다.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싶으면 주저 말고 입자. 군데군데 하얗게 보이는 흰머리가 싫다면 과감하게 염색을 해보자. 그런 당신을 보고 어떤 이는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젊어 보이려고 애를 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다고 새치가(p. 216) 안 나는 것도 아닌데 자기만족이라며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당신의 마음이 흡족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자기만족을 자만심처럼 생각해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자기만족은 긍정적이고 행복한 심리 상태다.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때 분비되는 세로토닌은 기분, 행동, 신체 기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게 해준다. 감정과 애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햇살 좋은 날, 배우자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보자. 나잇값 운운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경험을 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당장 시작하라. 시인 가와다 준은 "황혼에 찾아온 노년의 사랑은 두려울 것이 없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나이가 들어도 새롭게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길 수 있다. 이는 꼴불견이거나 나잇값 못하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다. 인생의 절반쯤 왔으니 남은 절반은 원하는 대로, 후회 없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남이 뭐라고 하든 살고 싶은(p. 217) 대로 살아야 한다. 여기, 마인드셋 7계명이 이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p.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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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3-18
  • 【북토크】 번역의 무거운 짐을 진 번역가들
    외국 책을 쉽게 접하기 위해서는 번역가를 비롯한 출판사 등 여러 사람들의 수고가 필요하다. 요즘은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 직접 원서를 구해 읽기도 하고, 아마존 등을 통해 E book을 바로 구매해 보는 경우도 많다. 이제 AI시대를 맞아 퇴출 위기에 직면한 직업군이 번역가다. 최근 뉴스에 보니 AI를 도입한 한 회사는 외국어 번역 부서를 없앴다고 한다. 세상이 좋아지는 만큼 생계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중에 번역가는 곧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그리고 굳이 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AI를 통해 순식간에 외국 서적이 번역될 날도 멀지 않았다. 참 좋은 세상이 됐다(참 이 책은 절판됐는데 도서관을 통해 대출 받아 읽었다).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 언젠가 번역하는 사람들의 인터넷 카페에 어떤 남자분이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밖에 안 된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아마도 한 가정의 가장인 듯한 그는 열심히 일해도 가정을 꾸려 갈 만한 수입이 되지 않는 것을 한탄하며, 한잔하고 넋두리하듯 올린 글 같았다. 나는 그런 글을 올린 심경에 심히 공감하였는데, 뜻밖에도 다른 회원들의 득달같은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번역에 대한 모욕이며, 여자들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열화와 같은 비난에 한 줄이라도 그 가장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으나, 소심한, 혹은 귀차니스트인 나는 아무 댓글도 달아주지 못했다. 몇 년 전 나도 진지하게 했던 고민이다. 이게 부업이면 모를까, 번역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구나, 번역으로 돈 벌기는 힘들겠구나. 말이 좋아 프리랜서이지 일이 없을 땐 날백수이지 않은가. 남편이란 존재가 있을 때는 몇 달 일이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었으나, 이제 어엿한 아줌마 가장으로서 아이를 키우고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내게, ‘번역만으로 살 수 있을까’. 는 그 무렵 머릿속에 붙박혀 떠나지 않는 화두였다. 이렇게 벌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인형 눈알 박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지 않나, 종이봉투 풀칠하는 부업이 요즘도 있을까(p. 68) 길가다 ‘홀서빙 아줌마 구함’ 이라고 삐뚤삐뚤 쓴 글씨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딸랑 두 식구의 가장인 나도 그렇게 절박했는데, 처자식을 둔 그 남자 회원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어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밖에 안 되는' 것으로 스스로가 미리 단정짓고 하는 일은 평생 본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직업이 번역이라면 어떡하든 열심히 해서 가족들에게 넉넉한 의식을 공급하는 가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남편의 월급에 의존해 살 때의 작업 습관대로 책 한 권 들고 세월없이 번역하곤 했다. 한 권에 200만 원 정도 나오는 얇은 책을 두세 달씩 끌 때도 있었다. 그러면 한 달 수입이란 것은, 고졸 초봉과 비슷해진다. 배우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는 이 학원 보내 달라, 저 학원 보내 달라, 요구사항도 많은데, 그런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느 날 문득, 아, 이제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데 이렇게 나태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목표를 정하여 일을 하자, 내 능력의 한계까지 목표를 세워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 수입은 최소한 얼마까지, 하루에 작업시간은 몇 시간, 잠은 몇 시간씩.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예전보다 한 달 정도는 작업시간이 당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날림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빈둥거리며 노는 시간을 대폭 줄이고 바짝 긴장하여 작업을 하니, 완성도는(p. 69)더 높아졌다. 그러자, 비로소 부업이 아닌 본업으로서의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아무도 통제하지 않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기자신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번역은 본업이 되기도 하고 부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아직 번역 초기인 많은 분들은 이렇게 투덜거릴 것이다. 일이 있어야 하지. 맞는 말이다. 일이 있는 경우의 이야기이긴 하다. 하루에 몇 시간이 아니라 일만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하고 싶은데 번역 일은 빈익빈 부익부, 빈곤의 악순환, 좀처럼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고한 프리랜서이고 싶지만 내용물은 날백수인, 그런 생활을 나도 초보 시절엔 수없이 해보았다.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 많았던 나는, 번역 일을 시작해 놓고도 시장을 개척할 생각보다 마냥 나무의 감이 입 안에 떨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권남희는, 보이지도 않았다. 키가 작은 내가 높은 감나무의 감을 따기 위해 발악을 하지 않는 한, 감이 내 입에 떨어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물론 감을 먹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면야 그깟 감 따위, 어디로 떨어지든 상관없지만, 나는 절박했다.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들어온 애 아빠의 구직활동은 난항이었고, 한창 재롱을 떠는 아이는 세상모르고 밝기만 한데 잔고가 없는 통장은 내 목을 조이고 있었다. 그럴 때 생각했던 것이 기획이었다. 직접 일본에 가서 책을 구해와 기획서를 작성하여 출판사에(p. 70)소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나라에 유미리의 에세이집 《창이 있는 서점에서》가 처음 소개되었는데, 때마침 유미리가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는 바람에 출판사도 나도 서로 득을 본 작품이다. 그 이외에도 무라카미 류의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오디션》, 《실낙원》의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의 아포리즘, 추리소설집, 연애 에세이집 등등, 많은 작품을 스스로 기획하여 번역했다. 이제는 먹으라고 따다 주는 감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라,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러나 이런 건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라, 지금은 현실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번역은 하고 싶은데 인맥도 없고, 사방이 막혀서 도무지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거나, 이판사판 목숨 걸고 뚫어 보라. 압축기, 가끔 마시마로가 모자처럼 머리에 붙이기도 하는 그 압축기로 막힌 하수도를 뚫듯이, 막혀 있는 미래를 뚫어 보라. 일본어 번역을 하는 사람이라면(어느 언어권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인터넷에서 아마존 재팬 같은 일본 사이트를 찾아,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좋은 책들을 골라 보라. 검토서를 작성해서, 출판사에 보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니, 가장 보편적인 뚫기 방법이다. 열심히 뒤져서 좋은 책을 골랐으나, 알고 보니 이미 계약된 책일 수도 있고, 시장성이 없어 출판사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채택되어도 다른 기성 번역가에게 맡길(p. 71)수도 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 해서 ‘아, 삽질했네.’ 하는 좌절은 금지다. 번역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에서는 신간 검토할 사람들을 항상 찾고 있다. 고정적으로 맡기는 사람이 있다 해도, 검토서 작성을 깔끔하게 하고, 적극적으로 자료를 찾아오고 발췌 번역이 훌륭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아마 한번쯤 기회를 줄 것이다. 선임자가 친인척이 아닌 한은 말이다. 그렇게 기회가 찾아왔을 때마다 검토자 역할을 잘 해낸다면, 그 다음은 믿고 책 한 권 덜컥 맡겨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이 없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은 아마 실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딴에는 완벽한 조준이라 생각하며 감나무 밑에 누워 입만 벌리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일이 없는 동안에는 차라리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책을 읽어 국어실력을 키워라. 번역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음 번역은 매끄러워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자신에게 항상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번역을 한 권 마치고 나면, 뒤에 아무리 똥차 밀리듯 일이 밀려 있어도 반드시 국내소설 한두 권쯤 읽은 후,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일본식 문장에 익숙해진 머리를 조금이나마 원위치 시켜놓기 위함이다(p. 72). 보르헤스의 작품 번역을 수정하면서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의 번역본에는 옮긴이 각주가 많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었다. 어느 세계문학전집에는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이 적혀 있다. 보르헤스가 국내에 본격적으로(p. 147) 소개된 지는 불과 10년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지금과 그 당시를 비교하면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다. 가령 10년 전에는 많은 작가들과 독자들이 리얼리즘 양식에 집착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또한 보르헤스에 대한 관심도 상당하고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척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독자들은 보르헤스의 작품에 담긴 서스펜스나 극적인 반전과 같은 서사양식이 아니라 그의 현학적인 지식에만 관심을 보이며 그가 파놓은 미로에 빠져버린다. 번역가 역시 그의 현학적인 지식 때문에 많은 애를 먹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보르헤스의 현학적 지식에 담긴 사상이 현대의 과학적 패러다임의 허구를 밝히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확실성에 대한 의문은 그의 작품 구조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니 보르헤스의 현학적 지식을 설명하는 번역 각주가 이제는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차라리 독자들이 그런 지식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번역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보다 잘 이해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수정본이 결정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본이란 '화석'과 같은 죽은 존재라고 여긴다. 번역에서 결정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번역은 영원히 살아 있다. 번역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가능한 한 여러 번 번역되어야 한다. 번역은 변화이며 움직임이다. 더 이상 가야할 장소 없이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을 때 문학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p. 148).
    • 오피니언
    • 책소개
    2025-03-17
  • 【북토크】 어디서나 책을 읽자
    나는 요즘 지하철에서 책을 많이 읽는다. 취재 가방에 꼭 책 한 권을 넣어 간다. 그러면 여유가 생긴다. 시간이 남을 때 지루해하지 않고 책을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불현듯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에 관해 쓴 책이 있는지 궁금해 검색했더니 있어 대출해 읽었다. 매우 유익했다. 그런데 이미 절판됐다. 복잡한 지하철이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도서관이고 훌륭한 저자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만남의 현장이다.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을 잘 활용하면 엄청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래저래 내 차를 잘 안 타고 다니니 여러모로 유익하다. 자신이 출퇴근하는 시간대가 러시아워 시간이라면 지하철에 서 독서습관은 어렵다. 이때 출퇴근 시간은 죽는 시간이 되어버(p. 40)린다. 지하철 독서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아침에 러시아워를 피해 일찍 출근할 것을 권한다. 이른 아침의 지하철은 독서 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30분만 일찍 집을 나와도 러시아워는 피할 수 있다. 당신의 아침이 달라지면 하루가 달라지고 하루가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진다. 죽어 있는 출퇴근 시간만 살려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덜커덩덜커덩하는 흔들림은 오히려 책 읽기 좋은 진동이다. 독서습관이 완성되는 날까지 당신의 최선은 아직 실행되지 않았다. 지하철 독서습관이 완성되는 날까지 작은 행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조금 더 일찍 출근하는 작은 행동은 지하철 독서습관을 들이기 가장 좋은 방법이다(p. 41). 세계적인 동기부여가 찰스 존스는 “지금부터 5년 후의 내 모습은 두 가지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 읽고 있는 책과 요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슴 뜨거워지는 꿈을 갖고 싶은가? 그럼 바로 책을 읽어라. 너무나 쉽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독서다. 왜냐하면 꿈을 찾기 위한 독서는 꾸준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꾸준한 독 서는 마음을 열고 설레는 꿈을 찾게 한다. 지하철 독서로 독서(p. 69) 습관을 기르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날이 올 것이다. 단순히 ‘무엇이 되고 싶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독서이다. 나의 경우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작가 아니라 독서의 힘을 알리고 많은 사람에게 좋은 변화를 불러오게 하는 작가가 되는 꿈이다. 그 꿈을 실현하는 나의 첫 책을 2017년 3월까지 초고를 완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독서하고 책을 쓴다. 지금 이 글도 새벽에 쓰고 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독서습관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이것이 출판 기약도 없는 집필을 계속하게 하는 힘이다. 매년 독서의 힘을 알리는 좋은 책을 쓰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이어가는 작가가 될 것이다. 특히 아이들, 엄마들에게 독서의 힘을 전파하고 싶다. 난 그러기 위해 계속 책을 읽을 것이다.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누구나 부자를 꿈꾼다. 그렇게 되려면 만나는 사람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나를 성공한 사람이 만나 주지 않아도 괜찮다. 당신이 그의 책을 읽으면 된다. 오히려 직접 만나는 것보다 책을 통해 저자와 가까이서 만나고 대화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이지성, 하우석, 김송호,(p. 70)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그리고 고인이 된 사람들까지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철학자 데카르트도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성공한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생각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진다. 하우석의 〈5년 후〉에서 오로지 공부만 해온 카이스트 학생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최근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카이스트에서 잇달아 학생들이 자살한 사건이 우리 사회를 깊은 충격에 빠뜨린 적이 있다. 그즈음 나는 카이스트 학생 몇몇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은 말을 털어놓았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태까지 정말 공부만 해왔거든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공부에 소질이 있어 공부를 했을 뿐이지, 뚜렷한 목적을 품고 공부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1등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행학습을 하게 되었고 명문 중학교를 거쳐 과학고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선 오로지 '카이스트, 서울대, 포스텍'만 생각하게 됩니다.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그래요. 어쩌면 '당연하게(p. 71)도 저는 카이스트에 입학했습니다. 또 그곳에서 오직 공부만 했습니다. 석사를 목표로, 또 그 후엔 박사를 목표로, 드디어 박사과 정이 끝나갑니다. 그런데 정말 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현실은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남은 인생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선배들처럼, 친구들처럼 그냥 연구원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삶에 도전해야 하는 건지...., 연구원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런데 그게 과연 제가 원하는 삶일까? 하는 질문에 저는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길에 대한, 새로운 삶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정보도 없고요. 그래서 고민입니다. 후후 그냥 막연한 고민이죠.” 최고의 수재들이었지만, 공부보다 우선해야 할 자신의 인생 설계에는 너무나 취약했다.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지 말고 내 꿈을 위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리는 우리의 삶은 기업처럼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인생계획을 짜야 한다. 평범한 주부도, 은퇴를 앞두고 있는 직장인도, 중고등학생도 모두 자기 책임으로, 자기 주도하에 자신만의 인생계획을 수립해야 한다(p. 72). 책을 읽으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물론 책을 많이 읽었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자가 바뀌지도, 자녀의 태도가 달라지지도 않 는다. 직장에서 일거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달라지는 것은 바로 내 마음가짐이다. 내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러면 배우자,(p. 75) 자녀, 직장 동료를 대하는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진다. 오가는 대화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주어진 환경은 바꿀 수 없지만 내 마음은 바꿀 수 있다. 마음을 달리 먹는다는 것은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다. 생각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인격이 된다. 인격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운명이 된다. <마거릿 대처> 결국 운명을 바꾸는 근원은 생각이다. 생각은 씨앗이다. 씨앗은 뿌린 대로 거둔다. 자연의 섭리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빌은 “현재 우리의 모습은 과거에 우리가 했던 생각의 결과”라고 했 다. 생각은 힘이 있다. 심지어 김승호 대표는 생각은 ‘물리적인 힘’이라고 했다.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p. 76). 한국경제신문에 소개된 〈전쟁터로 간 책들〉의 독자편지한 대목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군인들은 책을 들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진창을 헤맨 이래로,...동료 병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던 이래로, .... 더 이상 사람이나 사물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열여(p. 104)덟 살에 입대해 2년간 전장을 돌아다니며 지옥을 겪었다는 한 미국 해병대원의 고백이 이어진다. ‘차가운 마음과 무뎌진 정신으로 저는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만난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읽으면서 뭔가 내부에서 꿈틀거렸다고 했다. '차갑던 마음이 다시 살 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책은 제게 웃음과 기쁨, 눈물을 가져다 줬습니다. ... 눈물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제가 인간임을 증명해 줬으니까요.' 내가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만 했다. 아무리 전쟁터이었지만, 처음에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정신적인 충격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내가 살인병기가 된 것인가?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렸을까 봐. 의문이 들었던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책을 읽었다. 끝없는 진창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빗물 고인 참호에서 불편하게 잠을 청해야 했던 군인들의 바지 뒷주머니와 상의 주머니에는 책이 있었다. 군인들은 책을 읽으면서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여전히 인간의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에 안도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책은 수많은 군인들의 삶에 위안을 주었다(p. 105) 다구치 미키토 서원이 쓴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동네서점〉의 일부를 소개한다. 2011년 3월 11일, 진도 9.0의 대지진이 일본의 도후쿠 지방을 덮쳤다. 건물 3층에 박힌 자동차,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기울어져 버린 주택, 대량 건물의 잔해들과 쓰레기...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시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삶의 흔적을 찾고 있었고,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찾는 소방대와 자위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 다. 그곳에 작은 동네서점이 있었다. 서점 안에는 책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설마 혼란스러운 와중에 사람들이 전부 책을 가져간 걸까? 그곳 직원의 말에 의하면 서점을 다시 열었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고 한다. '어떤 책이든 좋으니 아무튼 책을 좀 달라'며 다퉈 사 갔고, 그 후로 책이 들어오지 못해 서점이 텅 비어버렸단다. 전기며 수도, 가스도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책을 필요로 했다. 갑작스러운 대지진으로 인한 불안, 앞일에 대한 걱정으로 사람들은 겁이 나고 불안한 그때 왜 책을 생각했을까? 그렇다. 책은 사람들에게 평상심을 갖게 하는 대상이다(p. 106). 2011년 3월 일본 최악의 재난인 쓰나미가 발생했다. 쓰나미는 집, 자동차, 심지어 가족까지 앗아갔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생존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이 책을 사러 서점에 왔다. 그런 상황에서 왜 그들은 책을 사러 온 것일까? 그들은 책을 읽으며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로 인해 삶의 균형감을 얻으려고 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은 육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이 배고플 땐 책을 읽어야 한다. 내면의 배고픔은 책으로 채워진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보낸 8년 동안 거의 매일 밤 한 시간가량 짬을 내서 책을 읽었다. 그는 "일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정보가 어지럽게 오갈 때 독서는 속도를 늦추고 균 형감을 갖게 한다. 책 읽기가 나를 더 나은 대통령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난 8년간 균형을 잃지 않게 해준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분초 단위로 짜인 공적 생활의 압박감과 긴장감을 그는 매일 취침 전 한 시간씩 책을 읽으며 균형감을 잃지 않고 견뎌냈다(p. 107). 〈완벽한 공부법〉을 쓴 신영준 박사는 "우리나라 성인들의 문해력 수준이 토론할 수 없는 정도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어른들은 토론을 시작하면 싸움으로 변질하곤 한다.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말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문해력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을 해독하는 것을 넘어 복잡한 텍스트를 읽고 그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말한다.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나라 성인은 좀 복잡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평가하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자녀와 기본적인 토론을 하려면 부모부터 독서를 통해 문해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은 국영수 공부하기 바빠 독서를 할 시간이 없다. 시험에 나올 인문고전을 달달 외울 뿐이다. 독서 습관이 없는 학생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책을 읽지 않는다. 주입식 교육에 길들어진 대학생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독서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독서를 주입식 교육으로 외워 독서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한 권을 보더라도 제대로 읽고, 충분한 토론과 비판이 이뤄지도록 하는 방식의 새로운 독서방식이 필요하다(p. 117).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책은 인간이 마법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말했다. 책은 정말 마법의 도구이다. 헌책방에서, 서점에서, 도서관에서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보 물들이 잠자고 있다. 그 보물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멋진 인생을 위해서 계속 책을 읽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도 "남의 책을 많이 읽어라. 남이 고생한 것을 가지고 쉽게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현자들이 죽어가면서 남긴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책이다. 그 현자들은 지금 알려진 사람일 수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이 오랜 시간 걸려서 깨우친 것을 그가 남긴 책으로 아주 간단하고 쉽게 얻을 수 있다. 책보다 더 쉽고 빠르고 간단하게 남의 것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책만큼 인생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다(p.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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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3-16
  • 【북토크】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자
    현직 일본 의사가 말기 환자의 의료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과연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다. 중환자실에서 가망 없는 연명치료를 하며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모두 죽은 것은 확실한데, 이에 대한 담론이 적다. 존엄하게 죽는 법을 함께 토론하고 준비해야 한다. 대부분의 의사나 간호사들은 죽을 고비에 이른 환자에 대한 인공호흡이나 심장 마사지 등의 소생술은 의료인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건강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이상을 일으켰을 때, 예를 들어 심근경색 발작 같은 양성 질환으로 갑자기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구급소생술을 적정하게 실시하는 것으로 죽음의 문턱을 한 걸음 넘어서버린 환자의 호흡을 되돌릴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의 치료에 따라 어느 정도 사회 복귀도 가능하다. 따라서 응급 시에 능숙하게 소생술을 실시하거나 각종 약제를 적합하게 사용할 줄 아는 것은 의사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p. 44) 능력이다. 또 상황에 따라 임사(臨死) 환자에 대한 인공호흡이나 심장 마사지 등의 소생술은 의료인으로서 당연한 의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환자의 경우는 과연 적절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환자와 같이 이미 손쓸 도리가 없는 사람에게, 그리고 본인조차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말기 암 환자에게 시행하는 소생술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설령 이 소생술이 성공해서 환자의 목숨이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 연장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만약 의식이 돌아온다고 해도 환자는 의료 기계에 둘러싸여 고통으로 가득 찬 시간만 다시 맛볼 뿐이다. 그리고 다시 곧 죽음에 이를 것이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환자의 심장이 기계적으로 몇 시간 움직일 뿐이고, 그 환자는 곧 소생술을 개시하기 직전의 임사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임사 상태에 있을 때 시행하는 소생술은 그때까지 불치병과 싸우느라 영혼까지 지쳐버린 말기 암 환자에게 겨우 찾아온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아무런 힘도 의지도 없는 환자의 육체에게 억지로 버텨보라고 강요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엔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경외도 애도의 마음도 없다. 그저 일분일초라도 환자의 목숨을 더 연장시키려고 하는, 연명지상주의의 현대 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의 의무감만 있다(p. 45)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의사 스스로 그 소생술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허락할 수 없는 소생술이 자행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의미가 없는 일을 임사 환자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런 상황에서의 소생술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바라는 사람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다. "자신의 죽음이 확실해졌을 때는 ‘절대로 무의미한 소생술은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죽게 해주세요.’ 라고 가족과 의사에게 반드시 말해두십시오." 그렇게 해두지 않으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환자처럼 당신의 죽음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최후의 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모두 통증을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동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암 환자는 전체의 3분의 2로 알려져 있다. 또 동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모두 극심한 통증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괴로움을 호소하는 환자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임상 현장에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의사들이 말기 암 환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동통 대책도 불충분하기 짝이 없는 게 현실이다. 아니 동통 대책이 불충분하다기보다는 다양한 제통법이 있는데도 그것들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든다. 예를 들면 암성 동통에 대한 모르핀의 유효성과 안전성은 충분히 입증되었고,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성격이 바뀔 정도로 통증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모르핀 중독의 미신을 믿는 의사들 때문에 환자의 고통이 방치되고 있다. 그러한 실태를 보고 있으면 의사들의 관심이 환자 자체가 아니라 암에만 가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러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말기 암 환자는(p. 90) 불쌍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런데 암 환자가 호소하는 고통이 모두 암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고통의 대부분은 암 종양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암 종양이 커지면서 주위 기관을 압박하거나 신경으로 차츰 퍼져 나가는 것 등에 기인한다. 그 밖에 호소하는 고통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육체적인 고통이라기보다 날로 약해져가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불안이나 고독, 공포 등에 따른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다. 그러한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호소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어느 대학병원에 여성 암 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그녀의 암은 말기 유방암이었고, 늘 심한 동통을 호소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진통제 주사를 요구했다. 그런 그녀가 더 이상 치료 수단이 없다는 이유로 시내의 다른 병원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를 그저 성가신 물건 처리하듯 다른 병원으로 보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병원을 옮긴 것이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병원에는 그녀와 같은 말기 암 환자도 여느 환자와 똑같이 간호해주는 간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병원을 옮긴 후에도 대학병원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주 동통을 호소하며 진통제 주사를 요구했다(p. 91) 그러던 어느 날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에게 어느 간호사가 진통제 주사 대신 한 잔의 뜨거운 커피를 들고 갔다. 간호사는 커피를 권하며 환자의 이런저런 호소를 진심으로 들어주었다. 그 다음 날부터 그녀가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진통제 사용도 격감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실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런 의료 현장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어느 병원이나 분주하게 돌아가는 데다 대부분 말기 암 환자가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같은 주장을 펼칠 생각이지만, 일반 병원은 사람이 죽기에 알맞은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우선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 싶다. 지금 잠깐만이라도 나의 이 생각에 동의 해주셨으면 한다(p. 92) 운명을 바꿔놓은 한 권의 책 이 조용한 남극 바다에서 승조원들은 곧장 해저의 지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무한한 자유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청정한 자연 속에서 뱃멀미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이럴 때를 대비해 일본에서 가져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독서에 지쳐 갑판으로 나오면 그곳에는 맑고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고, 눈앞의 빙산에서는 펭귄들이 침입자에 아랑곳 않고 자기들만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바다 속에서는 가끔 고래들이 포획 따위는 두렵지도 않다는 듯 물을 뿜어 올리면서 유영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처럼 태평스럽게 책을 읽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 책들 가운데 한 권이 내 운명을 바꿔놓게 되었는데, 일 본을 떠나기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산 책이 이렇게 내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한 권의 책이란 1926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미국 여성 정신 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이다(p. 126). 특이한 제목의 책이었지만, 의사 나부랭이인 나는 죽음에 관한 책을 읽어두면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가벼운 생각에 냉큼 사고 말았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예비지식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처음 책을 대한 순간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으려면 나름대로 노력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읽기 시작해서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내가 의사가 되고 8년이나 걸려서 얻은 몇 가지의 '바로 그런 것'이라는 상식이 너무나도 쉽게 뒤집혀버린 것을 내 가슴속에 차오른 뜨거운 감동 속에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몇 가지의 의료 행위가 급속도로 괴로운 과거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한 구절을 읽고 나서 잠시 동안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그 한 구절 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환자가 삶의 마지막을 정들고 애착이 가는 환경에서 보낼 수 있다면, 환자를 위해 일부러 환경을 조성할 필요는 거의 없다. 가족들은 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진정제 대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 잔의 포도주를 따라 줄 것이다. 집에서 만든 수프라면 그 냄새에 식욕을 느낀 그가 몇 모금 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수프 한 모금은 어쩌면 그에게 어떤 영양제보다도 훨씬 더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나는 그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다시 읽(p. 127)어봐도 아련한 감동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깟 거에 무슨 감동까지 느끼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나는 이 한 구절을 읽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온몸의 피가 역류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한 구절은 내가 의사가 되고 나서 배운, 또 당연한 것으로 알고 시행하던,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일분일초라도 더 연장시키려는 의료 행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본 후에 항상 느끼던, 열심히 치료했는데도 왠지 뒤끝이 개운치 않고 찜찜한, 뭐라 말할 수 없이 답답하던 내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구절이기도 했다. 그랬다. 그런 것이다. 혼자뿐인 선실 안을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대하는 내 자세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던 어느 환자의 임종 장면을 떠 올리고 있었다(p. 128). 병원에 돌아온 지 9일째 되는 날 그녀의 조용한 반응은 더욱 약해졌고, 10일째 되는 날 밤에 그녀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60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여러 튜브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평온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녀의 인생 대부분이 결코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마지막 10일 동안 그녀가 절망적인 불행의 한복판에 있었다고는 해도 스스로 납득하는 삶을 보낼 때, 그것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비통한 외침 속에서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최후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p. 197). 실제로 임종에 이르러 환자의 고통스런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 표정, 손발의 움직임 등은 병원에 있든 집에 있든 장소를 불문하고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이다. 그러한 증상들 대부분은(p. 222) 인간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시점에서는 병원에 있다고 해도 대처할 만한 방법이 거의 없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그런 상태의 환자 대부분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생각하듯 고통이란 걸 느끼지 못한다(p. 223) 나는 모든 말기 암 환자에게 환자 자신의 병명과 현재 상태를 알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암 고지처럼 무겁고 괴로운 정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극복하는 사람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p. 242) 내가 이처럼 말기 암 환자에게 병명과 병세를 전하는 데 얽매 이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환자 본인의 정보이고, 그 정보가 환자의 남은 인생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병명과 병세는 환자에게 괴로운 정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불치병이라는 이유로, 어차피 치료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쌍하다는 이유로, 의사나 가족의 판단 만 갖고 환자에게 진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 그러한 행위는 결국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올바른 정보를 근거로 직접 판단하고 결정해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자기 결정권'이라는 소중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방적으로 그 사람 인생의 가능성을 빼앗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그것이 설령 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함께 짊어지는 도움쯤은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의사가 가족과 함께 생각하면서 고민해야 하고 가족의 동의하에 진행되어야 하지만, 병명과 병세를 전하려는 노력을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면 환자의 인생을 모욕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당연히 잘못된 행위다(p. 243). 여기서 한 가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병명과 병세를 전했다고 해서, 즉 거짓이 없어졌다고 해서 깊은 교류 관계가 성립 되었다기보다는 깊은 교류를 맺었기 때문에 진실을 전할 수 있(p. 273)었고, 또 그에 따라 더욱 깊은 신뢰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의료인과 환자 그리고 환자 가족이 서로에게 우정을 느낄 정도로 교류를 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실제 의료 현장은 매우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환자에게 진실을 전하고, 환자가 자신이 처한 진짜 상황에 근거한 인생을 보내게 해준다는 것은 나름대로 각오하고 매달리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다. 즉 대부분의 말기 암 환자가 죽어가는 일반 병원의 경우,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그들에 대한 간호는 통상적인 업무 리듬과 맞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나는 지금 근무하는 병원에서 종말기 의료(터미널 케어)에 몰두했던 것인데, 그 성과는 아무리 노력해도 입원 중인 말기 암 환자의 2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이 일반 병원에서 할 수 있는 터미널 케어의 물리적인 한계임을 여실히 느꼈다. 결국 지금의 이 체제나 상황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80퍼센트에 가까운 환자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깨닫지 못하고, 설사 깨닫는다 해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환자나 그 가족은 불만을(p. 274) 터뜨리지 않는 것일까. 대부분의 말기 암 환자는 자신의 실상을 모른 채 투병하고 있고, 가족과 의료인은 환자에게 진실을 전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 한 의료 현장의 실상 또한 그리 쉽게 바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진실을 알고 나름대로 인생을 마무리 하려는 자립적인 사람들에게는 일반 병원만큼 최악의 장소도 없을 것이다(p. 275). 호스피스에 대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도움의 문제다. 영국과 미국의 호스피스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호스피스 간호를 제공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 모두 기독교라는 공통된 종교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래도 종교적 배경이 두텁고 같아야 환자의 종교적인 필요와 욕구에 부응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배경이 허술한 일본에서는 호스피스 간호가 곤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한다(p.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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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6
  • 【북토크】 전쟁 중에 벌어진 억울한 민간인 희생
    6.25 전쟁에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국군 전사자는 13만 7,899명, 부상자는 45만 742명, 실종자 2만 4,495명, 포로는 8,343명으로 총 62만 1,479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 민간인 사망자는 24만여 명, 양민 학살로 숨진 사람은 12만 8,000여 명, 부상자 22만여 명, 실종자는 30만 명이 넘어 총 99만여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는 억울한 죽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파헤치고 있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이 없어야 하는데 과연 그럴지 자신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표가 비대하게 몸집을 키워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1966년 추석의 그 만남은 내 사유체계의 바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형해화시켰다. 1992년, 파리에서 망명 중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찾아왔다. 나는 물었다. “왜 그때 동네 아이들까지 싹 다 죽였을까요?" 1950년 9•28수복 직후, 황골처럼 가족 단위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경우는 드물다. 한국전쟁에서 이런 유의 학살은 주로 1951년 1·4 후퇴 직후 벌어졌다. 아버지는 구원(舊怨)과 텃세와 이권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사적 감정, 가문끼리의 기싸움 그리고 가구 수에 비해 좁은 땅. 숨기고 있던 알력이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이라는 기회를 틈타 순식간에 타올랐다고 했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상대 집안 씨를 말려야 했다. 그래야 그 집과 땅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p. 222). 이승만 정부의 '부역자' 처리 양상과 규모 '부역(附逆)'은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행위를 말한다. 법에 처음으로 ‘부역’을 법률적으로 정의한 ‘부역행위 특별처리법’과 ‘사형금지법’ (1950년 12월 1일 공포)에서도 '부역자'는 "역도(逆徒)에게 협력한 자"로 기술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행위가 협력한 것인 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법률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임하에 따르면, 자발성이냐 비자발성이냐도 부역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역도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심판자가 일방적으로 판단하기만 해도 부역자로 간주되었다. 이런 부역 행위 규정의 자의성, 모호성, 불특정성은 그대로 부역자 처리, 처단의 잔혹성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부의 부역자 심사와 처벌의 법적 토대는 대통령 긴급명령이었다. 긴급명령 제1호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1950년 6월 25일 공포)은 단 한 번의 재판만으로 증거 설명도 생략한 채 부역 혐의자에게 사형 또는 중형을 내릴 수 있어서 적극 활용되(p. 360)었다. 이 명령은 제헌헌법 제57조가 규정한 긴급명령 제정과 공포의 절차와 형식도 어긴 것이어서 위헌적이었다. 수많은 무고한 국민들을 감금하고 처형했다. 긴급명령 제5호 '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 (1950년 7월 26일 공포)도 마찬가지였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하는 부역혐의자에 대한 군사재판을 신속하고 간략하게 처리하기 위해 민간법원의 판·검사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부역혐 의자들이 범죄처벌특조령으로 “사색 없이 사형, 사형” 당했다. 유병진 판사의 이야기다(본문 ‘소리 없는 도망’ ‘사색 없이 사형, 사형’). 마지막으로 긴급명령 제9호 비상시 향토방위령(1950년 8월 4일 공포)은 우익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마을 단위의 자위대가 인민군과 공비, "기타 이에 협력하는 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시 민간단체에게 '체포'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자위대나 치안대가 임의적으로 '즉결처형' 형식으로 대량 학살할 수 있었던 건 향토방위령을 제멋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치안대원들의 사적 원한과 보복, 욕망 등이 여기저기 참극을 만들었는데, 법은 이 사적 폭력들을 방조하고 묵인했다. 긴급명령 같은 국가긴급권 조치들은 국회마저 사후적으로도 통제 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전권이었다. 비상사태라는 미명하에 국민의(p. 361) 기본권을 유린한 법제화된 국가폭력이었다. 국회는 이를 견제해 부역 행위 처리에 신중을 가하고 극단적 처벌을 감면하도록 '부역행위 특 별처리법'을 제정했다. 국회는 전국 곳곳에서 부역자 학살의 서막이 올랐던 1950년 9월 29일에 제정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그 긴급성에도 불구하고 12월 1일이 되어서야 공포했다. 무분별한 사형을 금지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국회가 제정한 ‘사형금지법’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국회는 국민의 안전은커녕 스스로의 안전마저 도모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역혐의자로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았는지, 얼마나 많이 처형되었거나 징역을 살았는지, 또는 석방되었는지,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종합적인 통계는 없다. 다만 내무부 치안국이 1973년 발간한 《한국경찰사 1948.8-1961.5》에 주한미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한국정부의 부역자 처리에 관한 보고》 문건을 보면. 1950년 11월 8일까지 서울과 인천 지역의 부역자 재판 결과 통계가 있어서 처리 양상과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p.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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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5
  • 【북토크】 남을 함부로 단정 짓는 편견이 무섭다
    어느 날 아빠가 몸과 정신에 병이 나 이 모든 것을 아들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때의 막막함과 사회의 허술함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때 꿋꿋하게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자신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말하고 있다. 이럴 땐 차라리 무관심이 났다고 말한다. 우리는 남의 인생에 관심이 많고 또 쉽게 말하는 버릇이 있다. 당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알 수 있다. 도시가스 검침을 받았다. 집을 둘러보던 검찰원이 물었다. "원래 계시던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이고,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대답했다. 검침원이 숫자를 입력하던 손을 멈추더니 목을 앞으로 쭉 뺐다. "무슨 병이라도?" "그냥 화상이에요. 약간 치매 초기라." "지금 할아버지가 아니라면 연세가?" "이제 쉰일곱.." "아니 어쩌다 벌써?"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이 밀고 들어왔다. 가족들은 어디 있느냐, 아버지의 과거는 어땠느냐, 당신은 지금 뭘 하느냐.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 계속되더니, 결국 종착지처럼 한 질문에 도착했다. "가족 중에 예수 믿는 사람 없죠?" 검침원은 내가 시험에 빠졌다고 했다.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큰 불행이 온다고, 더 큰 고난이 기다린다고, 저주처럼 전도를 했다. 지나친 사명감으로 나를 들들 볶더니 확실한 답을 얻으려는 듯 예수님 믿을 생각이냐고 되물었다. "우리 집에서 어서 나가세요."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맡게 되는 가난의 냄새, 오래되고 낡은 가구, 벽지, 문틀 같은 요소들이 사명감을 높여주나 싶었다. 집을 나가면서 검침원은 재빠르게 가방에서 팸플릿 하나를 꺼내 던졌다(p. 162) "언제든 도울 수 있으니 연락 주세요!" 난데없이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팸플릿은 소년 소녀 가장이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증오하다가 예수를 만나 구원받았다는, 꼭 나를 염두에 둔 듯한 내용이 채워져 있었다. 찢어버렸다. 사람들은 꼭 이랬다. 아버지하고 함께한 시간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세상이 다 권유하지만, 긍정하려는 노력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어쩌다 내 상황을 직접 듣거나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더군다나 내 나이 또래에게 질병이나 죽음은 너무 먼 이야기였다. 세상은 질병이나 죽음의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효자 났네, 효자 났어." 누군가는 나를 '효자'라고 불렀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버리고 버려지는 요즘 같은 세상에 병든 부모를 챙기는 일만으로도 용하다는 칭찬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효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병원 앞에서 안 가겠다고 떼쓰면 멱살 잡고 끌고 잤어요." "새벽마다 주절거리는 아버지를 잠재우려고 장롱 문을 발로 꽝 꽝 찼어요." 그렇다고 나는 ‘불효자’라고, '효자'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효자라는 말 앞에 서면 아버지를 돌보는 내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용해졌다. 부모 돌봄은 가(p. 163)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꽁꽁 싸매는 사람들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저 병든 아버지하고 함 께하는 나 같은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말이 딱히 없으니까, 가장 적당하고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단어를 쓸 뿐이었다. "으이구, 밥이라도 많이 먹어." 밥은 먹고 다니냐는 연민과 동정도 많이 겪는 반응이었다. 졸지에 비 맞고 있는 안쓰러운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힘들어도 스스 로 버텨냈다는 어떤 자긍심이 있었는데, 그런 마음이 짓밟혔다. 연민과 동정은 그동안 혼자 고민하고 행동한 내 삶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효자라는 말이나 연민과 동정은 차라리 무관심만 못했다. 한 번은 거기에 반박한답시고 이렇게 말해봤다. "아버지랑 함께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랑 함께하면서 겪은 사건들 때문에 사회과학 책을 피부로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에 관한 고민이 철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자들하고 맞닿은 계기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을 들은 누군가는 더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합리화할 필요는 없다고 나를 다독였다. 그러니까 나는 불행한 사람이었고, 무능한 부모를 원망해야 마땅했으며, 이 세상을 향한 증오로 가득해야 했다. 그런 내가 사람들이 허락한 내 모습이었다(p.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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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3-15
  • 【북토크】 타인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의 저자 노라 노는 2025년 현재 96세의 현역 디자이너다. 지금의 나이까지 자기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대단한데 그의 지나온 생은 더 경이로웠다.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공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자화자찬의 자서전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이혼을 비롯한 좌절과 도전은 읽는 이로 하여금 빠져들게 만든다. 부디 평생 현역으로 사시기를 기원한다. 내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동시에 긴 인(p. 6)생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심경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지난날 마음 아팠던 일, 힘들었던 모든 일들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은 것을 알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p. 7). 아버지가 우리를 야단치거나 벌주시는 일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첫째는 거짓말이 들통 났을 때, 둘째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괴롭혔을 때였다. 우리가 자랄 때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는 먹고 잘 수만 있다면 서울로 아이들을 보내서 보릿고개라도 넘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많은 소녀들이 만주와 중국으로 팔려가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에 있던 아이들은 말귀를 잘 못 알아들어 가끔 남동생 대전이한테 주먹으로 몇 대 맞기도 했다. 이 아이들을 울린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면 난리가 났다. 우리 남매는 모두 일렬로 서서 군대식 기합을 면치 못했다. "너희들과 저 아이들이 다른 점은 단 하나, 부모를 잘못 만난 것뿐이다. 울린 사람은 물론이고 그것을 보고도 말리지 않은 너희도 똑같이 잘못을 한 거야." 아버지는 이렇게 우리를 혼내고는 회초리로 때리셨다(p. 28)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불우한 사람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일찍부터 내 머릿속 깊숙이 뿌리박혀 일생 동안 지켜온 원칙이다. 또 한 가지 아버지가 몸소 모범을 보이신 교훈은 궂은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 말고 스스로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p. 29). 시댁과 결별한 이후 나는 오히려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명랑해졌다. 직장은 다닐 만했지만 젊은 상관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거북하게 느껴져 새 직장을 찾고 있었다. 남편과 헤어져 있는 상태가 행동을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마침 알고 지내던 분이 미군 피엑스에서 직원을 채용한다고 일러주어 사무실을 찾아갔다. 미군 장교가 나의 영어 실력을 테스트하겠다며 뭐라고 말을 했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내가 한 말은 아주 심한 비속어라서 미국인들도 알아듣기 힘듭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이 솔직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했던 겁니다. 당신은 솔직하군요. 게다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미덕을 가졌습니다. 좋습니다. 우리와 함께 일해주세요." 나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지금 하신 말씀은 전부 다 알아들었다고 얘기했다(p. 65). 또 한국 유학생들이 돈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매주 토요일마다 학생들을 불러 저녁을 먹이기도 했다. 열댓(p. 94)명씩 몰려온 학생들을 위해 나는 곰국을 끓였다. 다행히 미국에서 소 내장은 공짜였다. 내가 끓인 곰국은 늘 베스트 메뉴였다. 그리고 가장 싼 햄버거 고기에다 파, 마늘을 다져 넣고 불고기 양념을 해서 1인치 두께로 오븐에 구워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그러면 고향 냄새 같은 불고기 냄새에 학생들이 군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나도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보다는 형편이 나으니 봉사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처럼 쉬는 날 하루 종일 주방에서 일하고 새벽 두 시까지 설거지를 해야 했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 유학생들 중 단 한 명도 나중에 인사 온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섭섭하다. 하지만 나 자신도 긴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지고도 그 은혜에 일일이 보답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섭섭해 할 일도 아니다(p. 95). 아버지의 충고 하루는 미국의 NBC 방송이 나를 찾아왔다. 전쟁 중에도 굴하지 않는 한국의 문화적인 면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내가 만드는 의상들을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홀을 빌려서 간단히 미니 패션쇼를 준비했다. 가수들과 고객 중 몇 사람을 모델로 선정해 걸음걸이와 포즈를 연습시켰다. 쇼는 비공개였으며 NBC 방송 관계자들과 나의 고객들 중 몇 명만을 초대했다. 그런데도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쇼를 보겠다고 찾아 왔다. 쇼를 시작할 시간이 되자 나는 출입문을 닫아걸라고 했다. 쇼가 진행되는 도중에 몇몇 외국 기자와 국내 기자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했지만 나는 열어주지 않았다. 이 쇼에서 나는 미국 시장과 다를 바 없는 최신 스타일의 의상을 선보였다. 여름철을 위한 쇼트 팬츠에 브라 톱, 그 위에 재킷, 허리가 노출되는 선드레스sun dress, 스커트 길이가 긴 맥시maxi 이브닝드레스 등등 구색도 갖추었다. 객석에서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동아일보》 하단의 가십난에 기막힌 기사가 실렸다.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일선에서는 총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후방에서는 여성들이 웃통을 벗고 날뛴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문전박대를 당한 기자가 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상식 밖의 표현에 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몹시 흥분하자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마음이 상했다며? 이 정도 일에 흔들린다면 네 앞길이 염려스럽다. 칭찬이란 소문이 잘 나지 않지만 비판이란 날개(p. 137)를 달고 떠다니는 법이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네 존재를 알리는 데 그 이상 좋은 기회가 없다는 걸 왜 모르니. 우선 알려져야 뭐라도 시작되지 않겠니. 그렇게 마음이 약하다면 차라리 지금 그만두는 게 좋겠다." 그날 아버지의 말씀은 내 인생에 등불이 되었다. 그렇다, 남의 비판에 마음 쓰지 말자. 문득 열아홉 살에 이혼을 결심했을 때가 떠올랐다. 모두들 색시가 바람이 나서 이혼당한 거라고 수군댔었다. 그런 참을 수 없는 누명을 쓰고도 이혼을 강행한 뒤 사회에 뛰어든 내가 아닌가. 이제 무엇이 두려우랴. 미국이든 한국이든 패션업계는 어디에서나 ‘말이 많은’ 곳이다. 나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떠돌았던 것으로 안다. 요즘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원은 잘 되시나요?"라고 묻는다. 나는 일평생 양재학원을 차린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도용했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아버지의 그 말씀 이후로 오늘날까지 나는 한 번도 남의 말에 좌우된 적이 없다. 오로지 내 양심과 믿음에 따라 원리원칙을 지키며 살아왔을 뿐이다(p. 138). 어느 날 아침 문안을 드리는데 아버지가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명자야, 참으로 미안하다. 너에게 모든 짐을 지우고 떠나게 됐으니.... 네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고 동생들은 다 어리니 너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구나." 나는 아버지에게 식구들을 책임지겠다고 말하고 그 약속을 반세기 넘게 지켜왔다. 소학교 시절 선생님이 아버지 없는 아이들은 손을 들라고 하면 몇몇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며 손을 들곤 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사람도 있나하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내 동생들이 그와 같은 처지가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마음 아팠다. 아버지의 5일장을 치른 바로 다음날, 나는 검정색 치마에 검정색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했다. 그날부터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일곱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p. 148). 스페인으로 떠나기 며칠 전 오랜만에 파리에 사는 한국인들이 모두 모인다고 해서 나도 약속 장소인 중국 식당으로 갔다. 화가 몇 분과 영사관 사람들, 그리고 뉴욕에서 왔다는 비즈니스맨이 한 명 와 있었다. 오랜만에 다들 서울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날의 주제는 한국 사회 에서는 실력이 있어도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의견을 별로 내세우는 편이 아니지만 그날은 한마디 거들었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어디서나 어려운 일이죠. 세상 어느 곳에서도 실력이 비슷비슷하면 중상모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뛰어난 실력을 갖추는 게 방법이겠지요." "미스 노의 말이 맞아요"(p. 166). 샤프론 1958년 어느 날 한국일보사에서 연락이 왔다. 미스코리아 대회를 주관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열릴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출연할 미스코리아의 의상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개회식에 입을 전통 의상과 마지막 콘테스트에 입을 롱 드레스를 비롯해서 행사 기간 동안 입어야 할 모든 의상을 빠듯한 일정에 맞춰 디자인해야 했다. 그 해의 미스코리아 오금순은 경북 출신의 미녀였다. 그러나 대구 출신의 그 아가씨는 국제대회에 출전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걸음걸이부터 무대 매너, 서양식 식사 예절 등을 틈 날 때마다 지도했다. 그 소문이 한국일보사 창립자인 장기영 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가 어느 날 장 사장이 나를 보자고 했다. "미스코리아 사업은 이제 시작 단계입니다. 우리 회사가 주최하는 대회에서 선발된 미스코리아가 매년 미스 유니버스 본선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노 여사께서 오 양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이것저것 가르쳐주며 수고를 좀 해주시지요. 저희가 경비의 반을 부담하겠습니다." "사장님, 그건 신문사에서 할 일이지 제 일이 아닌데요. 게다가 저로서는 살다 은 미국에 가는데 여비를 보태가며 갈 이유가 없지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명동 사무실로 돌아오니 곧바로 한국일보사 사업부장이 뒤따라왔다. "사장님께서 다시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나는 신문사 차를 타고 다시 한국일보사로 갔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장 사장이 문 쪽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p. 194) “아까는 실례를 했습니다. 이번 유니버스 대회에 노 여사를 정식 샤프론(젊은 여성이 사교계에 데뷔할 때 따라가서 그를 돕는 보호자)으로 위임하고 저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수고 좀 해주시지요.” 디자이너로 이름이 알려지기는 했어도 내가 그 전해 이매리 여사의 뒤를 이어 미스코리아 샤프론으로 결정된 것은 가히 파격이라 할 수 있었다. "사장님, 그런 중책을 맡기시겠다니 우선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간다고 해도 오금순 양이 좋은 성과를 내기는 힘들 것입니다." "노 여사, 걱정 마세요. 금년에는 가서 보고만 오시면 됩니다. 내년 대회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래서 나는 거절도 못하고 샤프론이라는 명예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인생에서도 성공하려면 우선 두드러진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금순 양은 로스앤젤레스의 롱비치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무사히 치렀다. 나는 대회의 진행 과정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두고 메모했다. 한국 여성이 국제대회에서 미모나 몸매로 겨루기에는 당분간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p. 195). 대체로 일은 잘 풀려가고 있었지만 염색과 프린트 분야만은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프린트가 정확한 색상으로, 제 시간에 맞춰 나와주지 않으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 프린트 과정 때문에 몇 번의 어려움을 겪은 뒤 나는 해결책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노라 노 디자인을 베낀 제품이 뉴욕 7번가에서 공공 연하게 팔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샘플로 옷을 사가서 홍콩에 있는 공장에 보내 싼 값에 만들어 온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남들이 쉽게 베낄 수 없도록 특수 프린트로 차(p. 256)별화하자’ 그러나 우리만의 프린트 공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프린트 공장을 세우려 하자 주위 사람들 모두가 나를 말렸다. 프린트 공장은 여자가 손을 댈 만한 종류의 사업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시작하기로 한 일인데 해보는 데까지는 도전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공장 부지를 수소문했더니 마침 반월에 공단이 새로 조성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반월로 가서 토지를 매입하고 공장을 설립할 준비를 했다. 은행에서 일부 융자를 받고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쳐 프린트 공장을 세웠다. 반년 만에 아담하고 기능적인 공장이 완공되었다. 내부 시설은 모두 국산 기계로 채웠다. 설비 자금은 은행에서 장기 저리로 대출해주었다. 국산 기계를 장려하는 기금이 따로 마련돼 있어 자율적으로 기계를 선택, 발주할 수 있었다. 프린트 디자이너이자 공장 설계자였던 이광복 실장과 각 분야 기술자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 이상적인 공장이 탄생했다. 직원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설계된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공장이 완공된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여느 해처럼 파리로 시장조사를 떠났다(p. 257). 그러나 패션업이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업종이다. 미국 유학 시절 일했던 의류 회사의 디자이너 두 명이 모두 50대에 심장병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디자이너로 일하려면 재미와 보람외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예다(p. 260). 남과 북으로 나뉘어 완전히 딴 세상에서 살아온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반세기를 지내며 연구는 북쪽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나는 남쪽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왔다. 인생의 숱한 갈림길에서 한순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남쪽에서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늘 하느님께 감사한다(p. 280). 강연이 끝나고 30분이 넘도록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 너무 긴장해서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지금은 거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 '그 시절 한국 언론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했느냐?', ‘패션 디자이너로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느냐?’ 이다. 첫 번째 질문에는 아버지에 관한 얘기로 답변했다. 어떤 혹평이든 마음에 두지 않고 소신대로 살 것, 그리고 호평보다는 혹평이 나를 빨리 알리는 길이라는 아버지의 충고대로 살아왔다는 얘기를 했다. 두 번째 질문에는 까다롭고 호감이 가지 않는 손님을 대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초기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모로 고민하다가 방법을 찾아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므로 아무리 한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구석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자는 것이었다. 우선 손님을 대하면 그 사람의 단점을 보지 않을(p. 299)것. 빨리 장점을 찾아내서 마음에서부터 칭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내 진심이 손님에게 전해졌고, 힘든 상대와도 어느새 정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오랜 세월 이런 훈련을 하다 보니 싫은 사람이 별로 없었고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반세기 넘도록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자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p. 300). 몇 해 전 브라운 대학의 신임 총장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그 대학 관계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어쩌다 내 얘기가 다시 나오기에 이렇게 말했다. “일평생 일하면서 큰 뜻을 이루고자 했거나 어떤 대가를 바란 건 결코 아닙니다. 그저 모든 일을 '도전'으로 생각했어요. 한번 해보는 거죠. 재미있잖아요. 하지만 나 혼자 그냥 열심히만 한다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진 않아요.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 지켜보다가 구원의 손길을 뻗어 나를 한 단계 올려주더군요.” 신임 총장이 동감을 표하며 브라운 대학에서 그런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달라고 했다. 어쩌면 그녀는 흑인 여성으로서 브라운 대학 총장이 되기까지 눈물겹게 노력했을 자신의 모습을 나에게서 발견했는지도 모른다(p.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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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5
  • 【북토크】 춤을 통한 장애 · 비장애 극복과 더불어 삶
    선천적 장애를 가진 저자는 어느 날 춤을 추고 싶어 한다. 그 이후 벌어진 이야기들과 사상의 전개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이다. 장애란 무엇인가?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신체 기관에만 장애가 있다. 그래서 공부를 통해 서울대를 졸업했고 변호사가 됐다. 그런 그가 장애인에 대해 말하고 주장하기에 더 설득력이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모든 인간의 평등함에 대해 말한다. 아울러 신체, 정신의 조건에 따라 차별적일 수밖에 없음도 말한다. 차별은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차별”이라는 말에는 없다. 그래서 저자가 이 단어를 기꺼이 썼는지도 모르겠다. 장애인은 평등한 대상이며 또한 구별, 차별이 필요한 대상으로 더불어 살아야 할, 같은 인간이다. 필요한 건 〈유아 낫 얼론〉도 고양이 요리도 백일기도도 커다란 바위를 피해 이사를 가는 것도 아니다. 공부다. 세상에 나가 살아남아야 하니까. 눈을 감고 혼자 도취한 채로 삶을 살아서는, 몸을 움직여서는, 춤을 추어서는 안 된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울컥한 진실은 우리를 기만한다. 눈을 뜨고 문을 열고 바깥에서 비추는 저 빛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곳에서 내 몸은 차별과 비하와 멸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숨기고, 덜 움직이고, 잘 통제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문화적 교양을 쌓고, 세련된 말솜씨를 구사하고, 수학과 영어를 알고, 역사와 사회제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해서 생존에 필요한 무기를 갖춰야 한다. 그때는 훨씬 거칠고 어설프고 모호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만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나 혼자만의 생각에 도취하면 안 된다. 객관적 세계와 연결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받는 지식을 공부해야 한다, 장애로 변형된 몸을 최대한 위장해야 한다는 정도의 삶의 원칙을 세웠던 것은 분명하다(p. 37). 이른바 소수자로서 주류의 시선 앞에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은 최승희가 직면한 딜레마를 피할 길이 거의 없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장애인의 삶을 알리며 사회적인 인식을 개선하려는 사람들도 같은 고민에 직면한다. 장애를 '팔아서' 구독자 수를 늘리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은 어떤가? 나는 장애인의 몸, 장애가 있는 몸들의 이야기를 그저 글로 '팔아먹고'(p. 96) 있는 건 아닌가? ‘프릭쇼’와 '장애 무용‘ 사이를 가르는 명확한 선은 없다. 단지 희미하고 넓게 펼쳐진 경계 지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달리 본다면, 모든 소수자의 춤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 자체로 기예art의 본질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포획하고 매매하고 조롱하고 착취하고 혐오하고 동정하고 욕망하는 시선 앞에서 기묘하고 창조적으로 예상치 못한 어떤 순간을 만들어낼 때, 즉 도저히 포획, 매매, 조롱, 착취, 혐오, 동정, 욕망 할 수만은 없는 어떤 몸으로서 그것이 발견될 때, 우리 모두는 이전까지 상상한 적 없는 세상을 향한 문을 연다. 바라보는 사람과 바라봄을 당하는 사람은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관계로 진입한다(p. 97). 공연을 현장에서 직접 보지 않고 행하는 비평은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장애화된 몸을 연상시키므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비난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신춤이 장애가 있는 몸을 통해 진정한 화합과 해방의 장으로 나아간다는 일련의 해석을 수긍하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 춤의 역사에서 실제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 춤추는 자로서 참여한 기록을 확인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왜일까? 누군가가 진짜 ‘히줄래기’ ‘꼽추’ ‘절름발이’에게 그 춤을 같이 추자고 초대했지만, 그들이 도저히(p. 119) 그 자리를 같이 즐길 자신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히줄래기, 꼽추, 절름발이도 기꺼이 축제에 참여해 춤추고자 했지만 ‘히줄래기’는 ‘히줄래기’ 춤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병신춤을 춘 병신의 존재가 없다면, 이 춤이 억압에서 벗어나 다 같이 신명에 이르고 해방과 화합의 장을 만들기에 장애를 그저 조롱하는 춤은 아니라는 해석을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병든 몸이 결코 병신춤을 출 수 없다는 논리대로라면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국회의원의 질의에 제출한 답변 내용이 비로소 이해된다. “이성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라 신체적•지적 장애학생은 실행하기 어렵다”는 그 의견이 ‘병신춤’ 전통의 핵심에 있다. 히줄래기 춤을 추기 위해 서는 고된 시간을 이성적으로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병신춤은 모든 인간의 위계질서를 뒤흔들며 신분-사회-계급 질서를 규정하는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원초적 해방의 몸짓을 표현하지만, 그 춤은 오직 특정한 사람만이 출수 있는 정교한 테크닉의 총체다. 병신춤은 결코 병신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문화적, 지적, 예술적 기교의 일부 다(p. 120). 히틀러의 제삼제국은 우리를 지킨다는 '정치적인 것'을 앞세워, 바이마르공화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창조적이고 개성 강한 예술가들을 쫓아냈다. 1933년 5월 10일 나치 소속 독일학생연합은 여러 도시에서 '독일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무수한 책을 불태웠다. 나치는 모더니즘 계열 작가들의 그림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전시회까지 연다. 이 작품(p. 286)들 가운데는 다양한 정신적 : 신체적 장애인들의 초상이 있었다. 나치는 이상적인 독일 민족의 순수한 아름다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독일 땅에서 추방하고 제거했다. 19세기 말 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세를 불려가던 우생학이 나치 정권에서 공식적이고 광범위한 힘을 얻었다. 나치는 바이마르공화국이 참전용사를 홀대했다고 비판하며 전쟁에서 다친 영웅적인 군인과 ‘열등하고 자격 없는’ 장애인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히틀러는 상이군인들을 만나 그들이 민족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그동안 휠체어에 앉은 군인들의 절단된 다리부분은 모두 담요로 가렸다). 나치 집권 직후인 1933년 7월에는 「유전질환자의 자녀 방지를 위한 법률」(일명 단종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은 선천적인 발달장애, 조현병, 만성 우울증, 유전성 시각장애와 청각장애, 신체기형과 중증의 알코올중독을 가진 사람 등에 대해 불임 시술을 강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우생사상이 국가 및 사회제도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맹학교와 농학교, 지체장애학교 등 특수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이 사상의 주요 표적(p. 287)이 되었다. 특수학교에 대한 국가의 교육비 지출은 비판을 받고(열등한 학생에게 돈을 지출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이유였다), 1938년에는 특수학교 가운데서도 학업능력이 없다고 여겨진 발달장애학생들을 별도로 분리하는 법률이 시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59년 유전질환이 있는 3세 미만 아동에 대한 안락사(학살)가 집행되었다. 같은 해 9월 정신병원에 수용된 환자 가운데 재활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된 사람 7700명이 총살당했다. 나치에 의해 체계적으로 집단학살을 당한 첫번째 희생자는 장애인들이었다. 1940~1945년 약 20만 명의 장애인들이 나치에 의해 체계적으로 살해당했다(p. 288). 몸을 온전히 드러내고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춤을 추기로 한 것은 말하자면 정면승부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춤을 준다는 건 인권, 평등, 교양, 문화 등의 이름으로 구조화된 삶의 밑바닥을 가장 노골적으로 들춰 내는 것이다. 나는 장애를 주제로 삼아 (지금처럼) 꽤 그럴듯한 글을 쓰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강의를 할 수도 있다. 이 활동들이 가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장애가 있는 몸을 진실로 긍정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언어와 규범, 각종(p. 320) 상징을 통해 장애에 거대한 휘장을 두르고 그곳에 빛을 쏘아 로이 풀러처럼 춤추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춤을 춘다면 장애를 숨기거나 가릴 방법이 없다. 파멸의 위험을 감수하고 삶의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고 믿었고, 두려웠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장애가 있는 몸을 온전히 드러네고 춤을 춘다는 건 사실 특별히 위험한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휠체어에서 내려 지하철 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장애인들을 마주하면 더 그렇다). 우리 모두 남보다 더 용기를 내야 하는 삶의 영역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공연. 그중에서도 신체적 표현을 주요한 방법으로 삼는 춤이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여기에 거창한 실존적 의미는 없었다. 나는 점점 그냥 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잘하고, 어느 날은 못했다. 다리에 착용했던 벨크로와 파일 커버를 떼어내는 일은 막상 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휠체어에서 처음 내려오기는 어려웠지만 곧 익숙해졌다.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법>을 공연할 때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공연을 했을 때 관객은 앞으로 나와서 손을 잡아주었다.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한 <무용수-되기)에서는 바닥 움직임을 정밀하게 안무했다. 안무가 라시내, 최기섭은 바닥에서 내가 잘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 가장 적합한 좋은 춤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감수해야 할 무슨 실존적 위기나 거대한 창조적 도약 같은 것은 없었다. 지루하고 때때로 흥미로운 연습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장애가 있는 몸이 분투하는 모습은 종종 절박하고 처절한 인정투쟁의 상징으로, 혹은 인간의 우스꽝스럽고 무용한(p. 321) 시도로 해석된다. 이 의미와 상징들에 사로잡혀야 할 필연적인 이유란 없다. 토마스 만이 프리데만을 묘사한 방식이 얄팍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이 소설이 지닌 주제의식과 그 소설적 상징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건 나 자신이었다. 공연과 춤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오히려 그 안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작은 훈련의 방식을 마주한다. 그렇다고 "가슴아 불거지지 마라"라는 오래된 명령을 그저 자연스럽고 사소한 계기들을 거치면 누구나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 하나의 공동체를 지배적으로 규율하는 사회적 안무의 영향을 받으며, 그 힘에서 벗어나기란 간단하지 않다. 외줄 앞에서 추락을 감수하는 결의까지 필요하지는 않지만, 기존의 ‘안무’에 저항하고 새로운 춤을 추기 위해 우리 몸은 변해야 한다. 그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아마도 우리가 만난 구체적인 몸들이 얼마나 우리에게(p. 322) 깃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여러 한계와 논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펴본 춤의 혁신가들을 떠올려보라. 공옥진의 춤에 깃든 몸들, 니진스키에게 깃든 실재하는 유령들의 흔적을. 최승희는 그저 제국의 타자로서만 훌륭했던 것이 아니라 제국의 주변부에 연결되어 있었기에 춤을 혁신할 수 있었다(p. 323). 〈현실원칙〉에서 나는 공연이 끝난 후 바닥을 기어서 그대로 밖으로 퇴장했다. 나가는 중에 무대를 가로질러 설치한 고무줄을 피하려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여 그 밑으로 통과했다. 관객들은 그저 박수를 치며 웃었다. 거기에 나를 ‘추락’시키는 어떤 필연적인 운명의 힘도 없었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는 30년 전쯤 불거진 가슴으로 바닥을 기어다니는 아이를 기이하고 의심스럽게 바라볼 무수한 시선들을 우려했다. 2020년대는 달랐다. 어떤 시선들은 여전 하지만, 약간 시선을 바꾼 몸들이 그 약간의 시선에 힘을 받아 더 빨리 바뀌었고, 그렇게 바뀐 몸이 더 많은 시선을 급진적으로 바꾸고 있다. 자신에게 맡겨진 그 몸으로 책임을 다해 잘 추려는 사람들이 좋은 춤의 의미를 확장했고, 확장된 좋은 춤의 기준 속에서 더 잘 추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며, 그 사(p. 342)람들이 다시 좋은 춤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시대의 가치관을 재구성한다.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고, 기꺼이 사랑하고, 마음껏 춤추더라도 당신과 나의 삶이 파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과제만이 우리 앞에 있다(p.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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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4
  • 【북토크】 장애는 실격인가?!
    이 책의 저자는 장애인으로 서울대를 나와 변호사가 됐다. 그것이 그나마 장애인 차별이 심한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이 책을 썼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가 있다는 것은 ‘실격’을 말한다. 변호사로서 그러한 자들을 위한 변론으로 이 책을 썼다. 사실 이 세상에는 이런저런 장애인들이 많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말이다. 그러한 자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비장애인들은 그러한 경험이 없기에 본인이 당하기 전에는 이에 대한 생각을 갖기가 쉽지 않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다 잠재적 장애인 아니겠는가? 어차피 노환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피포먼스로서의 삶: 기호화된 인간 2016년 7월 26일 새벽. 일본 도쿄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사가미하라시에 위치한 장애인복지시설 쓰구이야마유리엔에 스물 여섯 살의 우에마쓰 사토시가 침입했다. 조용한 산속 마을, 모 두가 잠들어 있던 시간이었다. 그는 사건이 있기 한달 전까지 이곳에서 직원으로 근무했기에 내부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한밤중 시설 관리 직원들도 모두 잠을 자던 시간에 사토시는 먼저 관리 직원들을 급습해 손발을 묶고, 시설 전체를 돌며 칼 세 개로 마흔 명을 찔렀다. 그 가운데 열아홉 명이 그 자리에서 죽거나 병원 치료를 받(p. 36)다가 죽었다. 죽은 사람은 모두 장애인이었고, 절대 다수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사토시는 범행 후 "세계에 평화가 오기를! 뷰티풀 재팬"이라는 트윗을 올리고 스스로 경찰을 찾아갔다. 그의 트윗 내용, 그리고 경찰차량에 탑승했을 때 보인 환한 미소는 섬뜩했다. 그는 범행을 저지르기 전부터 지인들에게 자신이 장애인들을 죽일 거라고 말했고, 도쿄 도의원에게는 장애인 470명을 죽이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이 사건이 있기 두 달여 전, 서울의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에서 한 여성이 화장실에 숨어 있던 남성의 칼에 수차례 찔려 죽었다. 범인은 "여자들에게 화가 났다"라고 범행 동기를 진술했다. 두 사건은 특정 사회집단에 혐오감을 품고, 그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 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혐오 범죄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건 발생 이후 그것을 '정신질환자의 묻지 마 살인'으로 해석하려는 당국의 시도도 닮았다. 일본 정부는 사토시가 범행을 저지르기 전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p. 37) 두 사건은 이처럼 유사한 쪽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인 이가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의 범인과 달리 우에마쓰 사토시는 단지 장애인을 혐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애인을 죽이면서 자신이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했다. 더 중요하게는 자신이 (형사처벌과 도덕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구원했다는 그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하기를 원했다. 그는 단지 장애인이 혐오스러워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구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공연(퍼포먼스)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토시의 살인과 그 전후의 행적은 물론 충격적이고, 다른 어떤 사건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이다. 하지만 특정한 욕망을 가진 개인이 장애인들을 자신의 퍼포먼스에 동원했다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우리는 유사한 맥락을 다른 사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2011년 당시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였던 나경원 의원은 장애인복지시설에 찾아가 장애 아동 목욕 봉사를 했다. 장애가 있는 남자 청소년은 벌거벗은 채 욕실 바닥에 누워 있었고, 나의원은 그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열심히 도왔다. 그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우연히 카메라에 잡힌 것은 물론 아니다. 문 열린 욕실 앞에는 카메라 기자들이 진을 쳤고 한편에는 조명판이 놓여 있었다. 정치인의 활동 대부분이 그렇듯 잘 기획된 퍼포먼스였다(p. 38). 하지만 그 차이란 역시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품격주의자임이 확실해 보이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2015년 7월 20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 노인종합복지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복지관 측은 노인들의 엘리베이터 사용을 막고 황총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별명은 '의전왕'이었다. 엘리베이터를 붙잡아두고 복지관 이용자들이 계단을 이용하게 만든 정부 서열 2인자는 품격을 강조하는 속물이었을까? 품격을 강조하는 이들이 속물성의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내달리는 노골적인 속물이 나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품격주의자는 고상한 척 공연을 만들고 권력과 권위, 지위, 경제적 이익을 교묘하게 추구하는 기획자에 가깝다. 그에 반해 속물은 필요하다면 노골적으로 잔인하고 야한 연극을 만들어 경제적 이익을 좇는 기획자와 유사하다. 둘은 하나의 철학을 공유하면서 삶이라는 공연의 장르만을 달리한다(황교안 총리는 그 후에도 의전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오른다. KTX 오송역 플랫폼 앞까지 총리의 차량이 진입했고, 12초 구간을 지나가기 위해 7분간 교통신호를 통제하기도 했다)(p. 63). 이동권 투쟁의 역사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는, 장애인이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위 과정 자체가 장애인을 자꾸 이동시켰다는 점이다. 이동권 투쟁을 위해 시위를 하려면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러, 지하철을 타러 밖으로 나와야 했다. 시위에 자주 참가했던 한 장애인은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집을 나서면서 "계단 30개를 오르는 데 30분이 걸릴 때도 있고 1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는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고 집에 있어 봐(p. 230)야 누워 있기밖에 더 하겠느냐"면서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신나는 일인 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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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2
  • 【북토크】 여성 평등 사회를 향한 절규
    이 책의 부제는 “여성 잔혹사에 맞선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 열전”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여성의 삶은 팍팍하다. 남성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세기라 그나마 남자들이 개선되었다하지만 여성이 바라볼 때 하세월이다. 과거 남성 중심, 여성 억압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미쳐야”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은 “규방의 미친 여자들”이다.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한 여성의 투쟁은 과거의 관점에서 보면 “미친” 짓이었다. 미개한 남성이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는 기득권을 조금씩 부숴가며 여성의 자리를 세우려고 하는 그 역사는 참으로 지난했고 앞으로도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가부장제에 굴복한 친어머니 〈바리데기>는 버림받은 딸의 이야기였다. 그는 전제적이고 폭압적인 가부장인 아버지, 오구대왕의 명령으로 버려졌다. 그가 인물과 재주가 출중하고, 길대부인을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묘사되지만, 그것은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돌아가는 동안의 일일 뿐이다. 그는 결혼생활 내내 아이를 내(p. 62)리 일곱을 낳는 동안 길대부인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종용해왔다. 그리고 일곱 번째 아이가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게 딸로 태어나자, 그는 내다 버리면 죽을 게 틀림없을 갓난아기를, 그 어미의 손으로 내다 버리는 잔인한 명령을 내린다. 바리의 친어머니인 길대부인은 가부장에게 감히 거역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어머니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길대부인 혼자의 문제였을까. 가부장이 가족 구성원을 지배하고, 나아가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던 시대였다. 특히 돌봄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갓난아이의 인권이란 없다시피 했다. 현실에서도 입을 줄인다며, 혹은 쓸모도 없는 딸이라며 갓 태어난 어린 딸을 방치해 죽게 만들고 호적에도 올리지 않거나, 산모에게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내다 버리는 일들은 불과 몇십 년 전에도 있었다. 그렇게 내다 버린 어린 딸이 해외에 입양되어 40년 만에 친부모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미담이 아니라 서글픈 여성 잔혹사이자 차별의 역사였다(p. 63). 《심청전》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지금처럼 평균수명이 길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했다. 심청의 어머니 곽씨 부인도 아마 그랬으리라. 스무 살 전에 심학규와 결혼한 곽씨는 마흔 살이 넘도록, 20년 이상 고된 노동과 가사를 도맡으며 심학규를 먹여 살리고, 적으나마 재산도 모았다. 그런 곽씨에게 심학규는 조종향화와 사후흠향(조종향화는 조상과 종묘에 향불을 올린다는 뜻, 사후흠향은 죽은 뒤 신명이 제물을 받는다는 뜻으로, 심학규가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줄 자식을 원했다는 뜻이다)을 할 자식을 요구한다. 그동안 모 은 재산을 헐어 정성을 다해 자식 얻기를 기원한 끝에 곽씨는 딸인 심청을 낳았지만, 아이를 낳고도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남편의 수발을 들다가 산후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만약 곽씨가 임신 기간 동안, 그리고 출산 후 한동안 몸을 돌볼 수 있었다면, 집에 다소나마 재물이 있어 다른 사람의 도(p. 96)움을 받을 수 있었거나, 혹은 심학규가 제 앞가림만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곽씨는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애처롭게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심학규는 정말로 아내를 돌볼 능력이 없었을까. 그는 양반 출신이지만 한미했고, 스무 살 무렵 눈이 멀며 벼슬길에 나아갈 가능성을 영영 잃었다. 재산도 친척도 벼슬도 없는 그는 20년 이상 곽씨의 노동에 의지해 살아갔다. 하지만 곽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젖동냥을 다니는 한편, 마을 사람들에게 동냥해 얻은 쌀과 돈으로 먹고살며 아내의 제사를 지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적어도 곽씨가 몸을 회복할 동안만이라도 제 한 몸 건사는 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곽씨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어린 딸을 안고 다니며 젖동냥을 해 키웠다는 이유로 심학규를 부성애가 강한 인물이라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 부성애가 강한 인물은 딸이 예닐곱 살이 되자마자 어린 딸의 노동에 의지해 살았다. 지금으로 치면 겨우 유치원이나 다닐 나이일 어린 심청이 고사를 인용하며 자신이 밥 을 빌어 아버지를 봉양하고 어머니 제사를 올리며 효도를 해 부모 은덕을 갚겠다 나서는 것은, 청이 하늘이 낸 효녀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학규가 어린 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은연중 강요했는지를 보여준다. 설마 심학규가. 노년에 자신을 수발들 사람이 필요해서 동냥까(p. 97)지 해가며 어린 딸을 키웠다고까지 해석하고 싶지는 없지만, 그날 이후 심학규는 “딸의 덕에 몇 해를 가만히 앉아 먹어노니 도량출입이 서툴”다는 말이 나올 만큼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는 청을 딱하게 여기기는 하나, 청의 생각을 알려 하지 않고, 딸이 더 장성하면 혼인을 해 자신의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그는 안정적인 부양자를 찾아낸 것에 만족하고, 따뜻한 밥을 먹고 구멍 나지 않은 옷을 입는 것에 만족할 뿐, 그 모든 노동을 제공하는 청의 심정이나 딸의 앞날에 대해서는 더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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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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