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7(월)
 
  • 최재천의 생태경영 - 최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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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는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그 중에 하나가 천안에 있는 국립생태원장을 3년 여간 맡은 것이다. 이 책은 그가 조직의 장으로서 그것을 어떻게 운영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경영 십계명으로 정리했다.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전의 책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로 읽었는데 최근 이 제목으로 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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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경영 십계명

하나, 군림(君臨)하지 말고 군림(群臨)하라

둘, 가치와 목표는 철저히 공유하되 게임은 자유롭게

셋, 소통은 삶의 업보다

넷, 이를 악물고 듣는다

다섯, 전체와 부분을 모두 살핀다

여섯, 결정은 신중하게, 행동은 신속하게

일곱, 조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치사하게

여덟, 누가 뭐래도 개인의 행복이 먼저다

아홉, 실수한 직원을 꾸짖지 않는다

열, 인사는 과학이다(p. 90).

 

아홉, 실수한 직원을 꾸짖지 않는다

나는 어려서 야단을 참 많이 맞으며 컸다. 아버지가 워낙 엄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야단맞을 짓을 많이 한 게 사실이다. 성인이 된 후로는 침착하고 꼼꼼하다는 평을 많이 받았지만 어렸을 때에는 산만하고 덤벙댄다고 늘 혼이 났다. 아버지는 산보하러 나가실 때 내게는 알리지 않고 동생들만 몰래 데리고 나가시곤 했다. 나를 데리고 나가면 땟국이 흐르는 손으로 자꾸 길 가 모든 가게의 쇼윈도를 문지르며 걷질 않나, 재래시장에서는 과일이나 채소를 죄다 만져보고 이리저리 옮기질 않나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단다.

나는 안다. 내가 만일 늦게 태어나 요즘 자라고 있으면 거의 영락없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고 약에 취해 살았을 것이다. 그 당시 통행금지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나는 새벽까지 싸돌아 다녔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게 종아리도 많이 맞았다. 때론 동생들이 잘못한 걸 대표로 맞기도 했지만 대부분 내가 잘못해서 맞았다. 반성문도 수없이 썼다. 아버지는 내가 반성문을 하도 많이 써서 글 솜씨가 늘었다고 공치사를 하신다. 하지만 나는 야단을 많이 맞고 반성을 많이 해서 지금 이렇게 멀쩡한 어른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학생이 됐을 무렵에는 개과천선했어야 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드디어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 자발적인 동기 부여가 이뤄진 다음에야 진정한 자기계발이 일어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야단치며 키우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 몇 번 버릇을 고친답시고 혼을 낸 적은 있지만 사춘기로 접어들 무렵부터는 모든 걸 대화로 풀려고 노력했다. 평생 대학 교수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학생들에게 욕을 하거나 그들을 닦달하지 않았다. 늘 존대하며 깍듯이 성인 대접을 했다. 논문이 잘돼 가냐고 물었지 왜 논문을 빨리 가져오지 않느냐고 야단하지 않았다. 언제 한번은 연구실을 공유하는 젊은 교수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들어와 내가 학생들에게 조금만 엄하게 하면 우리 연구실의 생산성이 몰라보게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의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내 아들도 혼내지 않는데 남의 아들 딸을 야단할 수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석 · 박사 과정 학생들을 호되게 야단치며 일하면 단기간에는 분명히 더 많은 연구 업적을 뽑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 까지나 연구실과 연구실 대표인 교수에게 좋은 일일 뿐 정작 학생의 발전에 좋은지는 명확하지 않다. 석사와 박사 학위는 사실 그 분야 최고 전문가가 되었다고 주는 게 아니다. 이제 혼자서도 연구를 수행할 능력을 갖춘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었다며 일종의 연구 자격증을 주는 것이다. 학생들이 내 연구실을 떠난 후에도 훌륭한 연구자로 서려면 스스로 연구하고 그에 따라 자기 삶을 운영할 능력을 길러야 한다. 야단을 많이 맞는 학생은 야단을 맞지 않으려 노력할 뿐 근본적으로 더 훌륭한 학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장은 남이 키워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크는 것이다.

찔레동산을 만들 때 일이다. 내가 조사해보니 우리 시인들 중에서 찔레꽃을 소재로 시를 쓴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퍽 많이 알려진 유명한 시인들도 여럿 조사됐다. 그래서 나는 관람객 유인 차원에서 해마다 시비를 하나씩 만들고 그 시인을 초청해 명명식과 더불어 시 낭독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우리나라는 시집과 수학책이 함께 팔리는 희귀한 나라다. 김용택 시인은 사람들이 시를 읽는 것은 사회가 흉흉해서 그렇단다. 어쨌든 우리는 찔레꽃 시비 건립 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 첫 타자로 장사익 노래 시비를 제작하기로 했다. 이 일을 담당한 직원은 수시로 내게 보고도 했고 명명식 전날에는 완성된 비석 사진도 메신저로 보내왔다. 하지만 막상 제막식을 거행하러 장사익 선생을 모시고 행사장에 당도한 나는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시비의 크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 키보다 훌쩍 커서 족히 2m는 돼보였다. 아니 첫 시비를 이렇게 크게 만들어 세우면 앞으로도 계속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다보면 찔레동산은 몇 년도 못가 찔레꽃 덤불 위로 희고 거대한 비석들이 삐죽삐죽 올라와 있는 을씨년스러운 곳으로 변할 게 아닌가? 내가 그린 찔레동산의 모습은 소담스레 피어 있는 찔레꽃 사이를 걷다 이따금 나지막한 어느 시인의 시비가 나타나면 걸음을 멈추고 시의 향내에 젖어보는 모습이었다. 그 직원이 내게 사진을 보내줄 때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곁에 다른 물건을 함께 두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냥 비석 사진만 덜렁 보내주는 바람에 나는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뒤늦게 내 기획을 알게 된 그 직원은 그야말로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나는 그를 야단치기는커녕 할 일을 줄여줘 고맙다고 덕담 아닌 덕담을 던졌다. 이제 다른 시인의 시비는 꿈도 못 꾸게 됐으니 일이 줄었다며 익살스럽게 고개까지 숙였다. 그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실수한 직원은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런 직원에게 너 왜 실수를 저질렀냐고 짓밟아본들 그가 갑자기 더 훌륭한 직원으로 거듭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귀엽게 나무랐을 뿐이다.

생태원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 그가 수줍게 원장실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내게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네주였다. 그 안에는 그가 정성스레 만든 브로치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은행을 주워 예쁘게 색칠하고 핀을 달아 만든 브로치는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그는 외국 출장을 갈 때마다 공항 검색대에서 늘 '특별 대우'를 받는 사람이다. 일행은 모두 아무 문제없이 통과하는데 그는 거의 언제나 따로 불려가 짐 수색을 당한다. 그는 말하자면 임꺽정이 살아 돌아온 듯한 그런 사람이다. 밤을 새우며 그 예쁜 브로치를 만드는 그의 모습이 상상하기 어려웠다. 내가 생태원을 떠나며 받은 선물 중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을 선물이다.

완벽한 결과를 얻으려고 직원들을 닦달하지 말고 과정을 완벽하게 다듬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자신의 임기 동안에 업적을 남기는 게 목적이라면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는 게 방법일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조직의 성장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성장하는 시기를 늦추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당장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되는 기업도 중장기를 위해 과정에 대한 노력을 쏟을진대, 대학이나 정부의 산하기관처럼 정해진 예산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추진해야 하는 기관의 장이라면 반짝 업적보다 기관의 미래를 담보해줄 체력을 갖추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조직이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향상되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적당한 용도에 적절한 재목을 써야 한다는 사자성어였는데 어떤 일에 적절한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적합한 지위나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로 더 자주 쓰이는 적재적소(適材適所)는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다. 적재적소만 이룰 수 있으면 성공은 맡아놓은 일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적어도 조직의 리더에게는 적재적소를 넘어 과재적소(過材適所)를 제안한다. 자격도 없는 리더가 이른바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조직을 망치는 경우가 많은 마당에 적재적소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겠지만, 그저 그 정도의 그릇인 사람이 조직의 리더가 되면 그저 그 정도의 일만 할 수 있을 뿐 조직을 더 높은 단계로 이끌 수 없다. 능력이 넘치는 사람이 조직을 맡으면 주어진 임무는 임무대로 완수하면서 남는 시간에 혁신을 이뤄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적재적소도 되지 않아 탈이지만 능력이 가작인 사람은 늘 허덕이며 겨우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그런 리더는 대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능력이 향상된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높은 다음 자리를 탐하기 마련이다. 지금 조직을 자신의 영달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려 한다. 본인의 업적에 연연하지 않고 조직의 미래를 걱정하는 리더가 필요하다.

조선왕조는 500년 이상이나 지속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장수 국가다. 후기에 와서 명분과 당파로 빠지는 붕당정치의 퇴행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조선은 기본적으로 힘에 따른 패 도정치가 아니라 명분과 의리로 국민을 설득하고 포용하는 왕도정치를 펼쳤다. 강제적인 법 집행에 의지하는 법치보다 이해와 포용의 덕치를 우선하는 성리학적 통치철학이 장수 비결이다. 국사학자인 정옥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저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2002)에 따르면, 조선 시대 지식인인 선비는 오늘날의 가벼운 지식인과 달리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사약 등 죽음도 불사하는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 있는 청청한 마음"을 지녔다.

나는 국립생태원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시대 선비로 생각하고 그들을 규율과 무사안일의 틀 속에 가두지 않고 자율과 도전의 장으로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일터를 놀이터로'라는 구 호를 내걸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려 애썼더니 엉뚱한 효과가 나타났다. 사내결혼이 장난 아니게 많아졌다. 점심식사 후 둘이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싶으면 얼마 후 청첩장을 들고 원장실에 나타났다. 과학 실험실에서는 종종 결혼이 성사되는데 이상하게 내 연구실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어 의아했다. 다른 연구실에서는 흔한 일인데 왜 그럴까 싶었는데 내 연구실 출신 두 여성 연구원도 생태원에서 짝을 찾았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국립생태원을 '번식생태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오랫동안 세계 최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살기 편해지면 출산율은 저절로 오르기 마련이다. 조선왕조가 내내 태평성대를 누린 건 아니겠지만 500년 이상 존속된 것을 보면 다른 왕조에 비해 민초들의 삶이 늘 팍팍했던 것은 아닌 듯 싶다. 나는 딱히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직원을 덕치로 섬기는 원장이 되고 싶었다(pp. 14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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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조직을 운영하는 나름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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