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7(월)
 
  • 미안함에 대하여 -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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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대한민국은 “확증 편향”으로 갈라져 있다. 확증 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기존의 신념 혹은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과 태도를 말한다. 쉽게 말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심리로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여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이다. 인지심리학에서 확증 편향은 정보의 처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지 편향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성향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간절히 바랄 때, 어떤 사건을 접하고 감정이 앞설 때,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가 싫을 때, 저마다의 뿌리 깊은 신념을 지키고자 할 때 나타난다. 따라서 확증 편향에 빠진 사람은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생각은 듣지 않으려 하며,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거나, 어떤 것을 설명, 해석, 주장할 때 편향된 방법을 동원한다(나무위키 인용).

이 확증 편향에 근거해 독단적으로 아군과 적군, 진보와 보수로 편가르기를 한다. 말을 들어보면 모두 자기 생각이 없이 주입된 정보에 휘둘린다.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말이다. 남에게 놀아나는 마리오네트가 되지 않을려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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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회의(懷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글 쓰기와 토론을 거의 하지 않는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 대신 암기를 한다. 그것도 정답이라는 고정된 형태로. 생각하는(=회의하는) 과정 없이 고정된 정답을 의식 세계에 주입한 우리가 고집불통이 되는 만큼 확증편향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한국 사회는 설득이란 말은 있어도 설득은 되지 않는 사회다. 가령 부부 사이는 어떨까? 애정으로 맺어지고 계급적 처지도 동일한 사이지만,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지닌 채로 평생 한집에서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 이것이 한국의 부부 대다수가 보여주는 서글픈 자화상 아닌가. 이렇게 부부 사이에도 설득이 되지 않는데 누구를 설득하겠는가. 실상 우리는 누구도 남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나 또한 아무한테도 설득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것처럼 살아간다. 이런 사회 구성원에게 확증편향이 한번 빠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함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또 '나'로서 생각한 적이 없으므로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지혜도 갖기 어렵다. 나의 자리에서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겠는가. 한국인의 확증편향을 강고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확증편향에서 벗어나기. 그것은 나부터 '회의하는 자아'가 되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런 전제 아래 어렵더라도 이웃을 설득하는 수밖에.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교육이 펼 쳐지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pp. 70-71).

 

아이들이 안쓰럽다. 특히 석차와 등급 경쟁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무척 안쓰러운 것은 학습에 지친 그들에게서 불법 파견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최근 〈한겨레21〉은 자해 행위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초중등 학생이 적지 않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수월성 경쟁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대다수 학생은 자긍심, 자존감을 갖 기 어렵고, 잉여적 존재로 취급받기 쉽다. 당연히 학교생활이 행복할 리 없다. 1등급은 2등급 이하를 차별하고 2등급은 그 이하 등급을 깔보고 9등급 남학생은 여학생을 혐오한다. 이런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난민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공부 시간은 세계 최장인데도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논어에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구절이 있다. 중국의 각급 학교에 붙어 있다는 글 귀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 바로 우리 모습 아닌가! '배움'과 '생각하기'는 어우러져야 한다. '배움'이 모든 학생이 같은 내용 (이론, 용어, 연대, 인명 등 객관적 사실)을 숙지하는 것이라면, '생각하기'는 배움의 토대 위에서 '나'가 사유하는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배움만 있고 생각하기가 없는' 우리 교육이 '나' 없는 전체주의 교육임을 일깨워준다. '조반(造反, 창조적 반란)'이나 상상력을 기대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 교육에 배움만 있고 생각하기가 없는 것은 서열화된 대학에 조응하기 위해 학문을 왜곡한 데서 비롯되었다. 학생들을 줄 세워야 하는데 '생각하기'로는 그럴 수가 없어서 '배움'으로 마감한 것이다. '배움'으로 마감하니 '나' 가 없다. 나가 없으니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질 수가 없고, 나의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으니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는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다. 또 나가 없으니 비판 의식이나 계급의식 형성도 애당초 불가능하다.

우리는 곧잘 우리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 교육이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갖도록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유는 곧 언어이고 언어는 곧 사유다. '생각하기'는 언어로써, 즉 글쓰기와 말하기(토론)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우리 학교와 교실에는 학생들의 글쓰기와 말하기가 거의 없다. '생각하기'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니 얻는 것이 없게 된다. 공부 시간은 세계 최장이고 대학진학률은 세계 최고인데, 민도가 높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랑스인들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철학 공부를 한다는 사실에 은근한 자긍심을 갖는다. 매년 6월 중순에 치러지는 대학입 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의 철학 시험 문제는 많은 언론 매체에 소개된다. 수험생들은 세 개의 논제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네 시간 동안 논술하게 되어 있다. 필수과목인데다 가중치도 높아 인문계의 경우 프랑스어가 5학점이라면 철학은 7학점이다. 최근에 출제된 논제들을 보면 "모든 진리는 확정적인가?", "예술에 무감 각할 수 있나?", "욕망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징표인가?", "부당한 일을 겪어야만 무엇이 정당한지 알 수 있나?", "알기 위해서는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예술 작품은 꼭 아름다워야 하나?" 등이 있다. 잠시나마 이 논제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네 시간 동안 뭐라고 쓸 것인지 고민해보면 좋겠다. 르몽드〉와 인 터뷰에 응했던 한 학생은 일곱 장을 썼다고 했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이 논제들을 던져본 적이 있는데, 가장 많이 들은 답변은 "아닌 것 같은데요"였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학습노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앞에서 『논어」를 언급하며 '얻는 것이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배 세력에겐 이로운 부수적 효과가 적어도 두 가지는 있다. 첫째, 세계 최장의 학습시간으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 익숙하게 하고, 둘째, 비판 의식과 계급의식은 형성하지 않은 채 등급과 석차로 서열을 규정함으로써 머리가 좋거나 부모의 경제력이 좋은 학벌 엘리트 집단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총총한 눈빛의 아이들 앞에서, 참된 교육자라면 이와 같은 교육 현실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pp. 7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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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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