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8-16(일)
 
  • 궁극의 인문학-전병근(메디치미디어 ·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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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인터뷰한 여러 전문가들, 석학들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다. 책을 읽으면서 독서가 참으로 유익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책을 읽지 않으면 결국 우물안 개구리가 된다. 책은 다른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담고 있다. 더 많이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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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양 인문학을 공부한 것이 이제 반세기가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핥기'가 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양 고전의 뿌리부터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닌가 합니다. 마치 동양 문화를 공부하겠다면서 한문학을 안 하는 거랑 같아요. 서양 문화가 그리스 로마 문화를 계승한 것이라고 자처하고 실제로도 그 정신을 이어받은 문명인데,(p. 18) 그 뿌리에 해당하는 공부는 소홀히 한 채 16~17세기 이후 200~300년에 해당하는 서양 문명만 공부하고서 서양을 깊이 안다고 얘기해선 안 됩니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은 전공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서양 고전을 공부해야 한다고 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언젠가부터 우리가 옛것에 관해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게 됐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옛것'이라고 하면, 전부 버려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습니다. 불행한 역사 때문입니다. 19세기에 급작스럽게 국가철학과 개인의 인생철학이 다 바뀌어버려, 이전 것은 없애야 좋은 것이 돼버린 거지요. 서양은 자기 것을 발전시켜 지배적인 위치에 올랐기 때문에 과거에 대해 우리처럼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정치나 문화에 있어서 '보수'라는 것이 정말 의미 있는 집단입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재벌을 편드는 게 보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보수라고 하면 과거부터 지켜온 문화적 기초에 해당하는 것을 지켜가겠다는 철학을 말합니다. 우리 보수는 그런 철학이 없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한국 보수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진보에도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진보의 매력은 재벌 공격에만 있는 게 아니라 기존 가치와 질서 문화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새로운 대안을 얘기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p. 19).

 

인문학적 창의력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

요즘은 CEO나 창업자, 마케터들까지 인문학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인문학과 경제적 성공은 어떤 관계일까요?

그 문제는 오늘날 인문학의 또 다른 이슈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인문학에 보이는 관심은 어떤 점에서 보면 문명사적 전환에서 비롯한 필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능에는 여러 기능이 있습니다. 가령, 내가 요즘 집중해서 공부하고 있는 문명의 초기 단계, 그러니까 기원전 8세기경 인류가 문자를 쓰기 시작한 때에는 사람들의 기억력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문자가 나오기 전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머릿속에 담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는 머리가 좋다는 말이 곧 기억을 잘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자가 발명되면서 기억력이 마구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 시대에 와서는 머리가 좋다는 것은 빨리 배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억을 잘하는 것보다 빨리 배우고 계산하고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뒤 컴퓨터가 나오고부터는 이해하고 계산하는 능력의 중요도가 격(p. 29)감했습니다. 과거엔 배워야 했을 것도 이제는 검색해보면 되니까요. 이제는 패턴의 습득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의 조합을 어떻게 잘하느냐, 남이 못하는 구성을 어떻게 잘해내느냐 하는 능력이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오늘날 지능에서 중요한 것은 남이 못 본 것을 연결하거나 없던 것을 상상해내는 능력입니다. 아주 애매모호한 말이긴 하지만 '창의적 사고'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사실은 인문학이 해오던 사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근대 과학이 출현하면서 아주 느슨한 학문 취급을 잠깐 받았는데, 이제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더 생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은 예감 단계지만 그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나 창의적 사고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지요?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쓸모'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쓸모란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데서 뭔가를 찾아와야 실용이 생깁니다.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데서 찾아오면 이미 경쟁에서 뒤처지게 됩니다. 그 결과 지금은 지적 모험을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신화가 그런 데서 나온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면에는 이런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절대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내 경험을 예로 들어보자면, 독일에서 귀국할 무렵 투키디데스를 읽(p. 30)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박사학위를 1년 늦게 받더라도 이걸 읽는 강좌를 듣고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도교수가 투키 디데스를 공부하려면 히포크라테스 의학 전집을 같이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투키디데스는 히포크라테스 의학서에 쓰인 개념을 사회병리 현상으로 가져와서 진단한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결국 나는 '역사서를 공부 하는데 고대 의학서까지 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냥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다 보면 엉뚱한 길로 이끌릴 수 있습 니다. 그 길이 내가 미리 생각해본 적도 없는 길일 수도 있고요. 우리 때는 "그런 건 배워서 언제 써먹나"라고 했지만, 지금은 '써먹을' 비전이 없어 보이는 걸 많이 알수록 기회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가령 공학을 하는 사람 같으면 이태백의 시를 공부하는 게 오히려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남이 못하는 무언가를 해두면 거기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니까 요. 지금은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p. 31).

 

의기 쓰기와 뇌의 상관관계는 뇌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내 전문이 아니라서 조심스럽긴 한데, 무엇보다 이 세상에는 정보가 너무 많습니다. 이걸 있는 그대로 마구잡이로 뇌에 저장할 수는 없어요. 기억하고 정보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하게 되어 있죠. 선택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뇌과학적으로 봤을 때 저장이 가장 잘되는 방법은, 동일한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 입니다. 본 것을 만져보기도 하고, 생각도 해보고, 써보고. 다시 읽어보고 하면 그만큼 저장이 잘돼요. 밖에서 보는 행동의 차원에서는 똑같은 정보지만, 뇌 안에서는 눈으로 본 정보와 글로 쓴 정보가 다르게 처리됩니다. 정보가 입체적으로 저장되는 거예요. 따라서 책을 읽을 때는 가능하면 펜을 들고 여백에 메모를 하는 게 좋습니다. 특히 논픽션인 경우가 그래요. 소설은 내용보다 느낌이니까 그냥 읽으면 되지만, 정치나 역사, 과학책은 읽고 생각해야 합니다. 책에 담긴 것은 남의 생각이고, 읽기만 하면 그 생각에 세뇌당하는 꼴이 됩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뭔가 주석을 달면 그 방법은 글을 쓰는 거예요(p. 66).


삶의 의미는 꼭 있어야 하나

《빅퀘스천》에서 큰 질문을 많이 제기했습니다.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하나?"라고 묻고는 "삶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의미 없는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문제"라고 썼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걸까요? 제가 그 질문을 던진 이유는, 모든 인문학 강연이 다 '삶은 이거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의미라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과연 의미란 좋은 걸까. 청소년 시절에는 '삶에 의미가 없어', '자살하고 싶어'라고들 합니다. 이때는 의미가 없으면 나쁘다는 생각을 당연시해요. 의미가 없는 것도 나쁘고 나쁜 의미를 추구하는 것도 나쁘니까, 좋은 의미를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제 질문은 의미라는 게 진짜 그만큼 좋은 걸까, 의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그것의 의미가 뭐냐'라는 것은 '그것은 무엇을(p. 84)위한 거냐'라는 물음으로 바꿀 수 있어요. 가령 망치의 의미는 기능을 뜻합니다. 기능이 정해져 있다면 좋은 망치와 나쁜 망치를 구별할 수 있어요. 즉 못을 잘 박는 망치가 좋은 거죠. 그렇게 봤을 때,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좋은 삶은 무엇이냐'라는 것은 삶에 어떤 기능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종교적 해석을 배제하고 과학으로만 보자면, 현재로서는 진화론적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진화 생물학에서는 유전적 다양성과 나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 생명의 의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내 유전자의 보존과 확산이 인생의 의미일 겁니다. 특히 젊었을 때는 그런 의미가 뚜렷해요. 이때는 자연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어요. 계속 성공을 부추깁니다. 내가 가진 유전자를 많이 뿌리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식으로요.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나면 자연은 우리에게 무관심해집니다. 이제는 진화적 기능 면에서 쓸모가 없고 끝이 났으니까요. 원시 시대에는 서른다섯이면 다 끝납니다. 일부러 죽이는 게 아니라 자연이 돌보지 않는다는 뜻에서요. 그게 바로 노화죠. 노화는 몸을 많이 사용해서 늙는 게 아닙니다. 많이들 오해하는데, 생명체의 핵심은 재생 regeneration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도마뱀이 꼬리를 잘라도 또 자라듯이 말입니다.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어쩌면 인간도 노화와 함께 세포가 계속 생성될 수 있었을 거예요. 그쪽으로 진화만 했다면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얘깁니다. 이미 다 써먹은 사람이 계속 재생하도록 진화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죠. 그때부터 자연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둔 겁니다(p. 85). 요전대 삶의 의미가 젊었을 때는 뚜렷합니다. 뭐 그다지 좋은 것 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요. 왜냐하면 그건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의미니까. 하지만 우리가 나이를 먹은 후에는 달라집니다. 자연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니까 주름도 생기고 뇌도 망가지는데, 동시에 우리는 '애니씽 고즈 Anything Goes'가 됩니다. 우리 맘대로 하는 거죠. 마치 부모님이 나간 뒤에 집에서 파티를 여는 격이에요. 부모님 밑에서 살 때는 별 수 없이 말을 들어야 했지만, 노후에는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은 결국 삶의 (생물학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리 나쁜 게 아닙니다.

 

노화와 더불어 오히려 자연의 구속에서 해방된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 보듯, 밖으로 나갔다가 너무 밝아서 다시 들어오기도 합니다. 죄인들도 감옥에 오래 있으면 바깥보다 감옥을 더 편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 누구나 처음엔 외롭고 불편하다고 느끼겠죠. 하지만 전 그것을 받아들이고 좋게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끝으로, 뇌과학자로서 두뇌에 좋은 습관 몇 가지만 알려주세요.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뇌도 몸의 일부라는 점, 생물학적으로 몸에 좋은 게 뇌에도 좋습니다. 빤하지만 다양한 운동, 신선한 공기, 멀티비타민, 충분한 수면, 건강한 음식과 가급적 소식하는 방법들이 있어요(p. 86). 둘째는 뇌의 인지 기능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뇌는 예측한 정보와 현실을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으면 무시하거나 추가 정보처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복된 생활이나 빤한 생각들보다는 새로운 경험, 새로운 생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는 게 좋아요. 정보를 수동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각도에서 역동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뇌 인지능력에도 좋습니다(p. 87).

 

당신은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종이라고 썼습니다. 왜 그런가요?

수천 년 동안 호모사피엔스는 대부분의 다른 큰 동물들을 멸종에 이르게 했습니다. 4만5000년 전 사피엔스가 호주에 상륙했을 때, 그곳에 서식하는 큰 동물의 90% 이상을 멸종시켰습니다. 1만 5000년 전 사피엔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했을 때는 이 지역의 대형 생물 70% 이상이 몰살되었습니다. 결국 사피엔스는 밀을 경작하는 농경 문명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지구상의 대형 포유류 절반 가까이를 멸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 큰 동물의 90% 이상이 사피엔스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길들이고 노예화한 농장 동물들입니다. 세상에는 약 25만 마리의 침팬지와 70억 명의 사피엔스, 20만 마리의 야생 늑대, 5억 마리의 애완견, 90만 마리의 들소, 15억 마리의 가축, 5천만 마리의 펭귄, 250억 마리의 닭이 있는 것으로 추산합니다. 유럽만 봐도 모든 종을 합친 새는 16억 마리가 있고, 닭은 19억 마리나 됩니다. 오늘날 육가공업과 낙농산업계는 이 수십억 마리의 길들여진 동물들을 고통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생명체가 아닌 기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동물들은 종종 공장 같은 시설에서 대량생산되고, 몸도 산업적 필요에 맞춰 주형됩니다. 이들은 일생을 거대한 생산 라인의 톱니바퀴처럼 살아갑니다. 이들의 수명과 삶의 질은 기업의 이윤과 손실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호모사피엔스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동물들 중에서 단연 가장 치명적인 동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p. 98).

 

인류가 문명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주목했습니다. 종교를 중요한 예로 들었는데, 종교인들이 반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가 허구에 기초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쁘다거나 쓸모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 정복의 열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선, 종교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는 단순히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개별 인간을 초월하는 법칙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인간 사회의(p. 105) 규범이나 가치 체계라고 한다면 무엇이든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어떤 법률을 따라야 하며, 그것을 인간이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가령 이슬람교와 기독교, 힌두교 같은 일부 종교들은 이런 초인간적인 법률이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반면에 불교나 공산주의, 나치즘 같은 종교는 이런 초인간적인 법률이 자연적인 법칙이라고 믿습니다. 불교도들은 카르마의 자연법칙을 믿고, 나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이 자연선택의 법칙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며,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경제의 자연법칙을 따른다고 믿었습니다. 신적인 법을 믿든, 자연법을 믿든 상관없이 모든 종교는 똑같은 기능을 합니다. 인간의 규범과 가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가나 기업 같은 제도에 안정을 줍니다. 어떤 유든지 종교가 없다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신적인 법을 믿는 종교들이 쇠퇴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반면 자연법칙을 믿는 종교들은 전례 없이 힘을 얻어 가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더 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실리콘밸리는 오늘날 새로운 테크노 종교 techno-religions 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의 도움으로 지구상에 인류의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p. 106)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신화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자본주의의 성장 신화일 것입니다. 경제성장이 최상의 선이라는 생각. 경제가 계속 성장하면 다른 모든 문제들이 따라서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신화에 해당되며, 지금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자본주의는 불평등 심화와 주기적인 공황, 경기 침체 같은 만성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체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요?

자본주의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어떤 현실적인 대안도 알지 못합니다. 가장 최근까지 진지한 대안이던 공산주의는 스스로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시도 할 배짱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주된 도전이라고 한다면, 현실적인 대안의 공식을 만(p. 110)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럴듯한 대안을 내놓아야 할 필요성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입니다. 자본주의는 정말이지 지금 또 한 번 큰 위기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21세기에 직면하게 될 가장 주된 경제 문제가 쓸모없어진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보세요. 컴퓨터 알고리즘은 점점 더 많은 인지 영역에서 인간을 따라잡거나 능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의식에 관한 한 컴퓨터가 그 비슷한 것이라도 갖게 될 가능성은 극도로 낮습니다. 하지만 경제 활동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하는 데 의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능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역사를 통틀어 지능은 언제나 의식과 함께 갔습니다. 유일한 지적인 개체가 의식도 있는 개체였습니다. 체스를 두고 차를 몰고 전쟁을 치르고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 바로 의식과 지능을 함께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능은 이제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습니다. 곧 체스도 두고 차도 몰고 전쟁도 하고 질병 진단도 인간보다 더 잘하는 무의식 알고리즘이 개발될 것입니다. 사실 지능이 뛰어나다면 의식은 필요 없습니다. 예컨대 자율 주행 차나 의사 로봇에게 의식이 없어도 기능적으로 인간 운전수나 의사보다 더 뛰어나다면 지구상의 수백만 운전자와 의사들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의 쓸모는 무엇일까요? 경제적으로 무용한 수십 억 명의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답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상황에 대해 우리는 어떤 경제 모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p. 111).

 

현재 인류 사회가 직면한 최대의 도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막대한 힘을 가지고 뭘 할 것인지 찾아내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류는 힘을 얻는 데는 대단히 우수한 종입니다. 하지만 그 힘을 행복으로 바꾸는 데는 그리 뛰어나지 못합니다. 장차 21 세기에 우리는 과거 신과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창조와 파괴의 힘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뭘 해야 할지는 정작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술 발전의 속도는 나날이 빨라져 인간의 대처 능력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의 유효기간이 점점 만기에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정보가 흐르고 기술이 발달하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앞으로 100년 혹은 최대 200년 안에 인류는 멸종하거나, 아니면 인간을 신의 수준으로 격상시킬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보입니다.

 

인류는 이렇게 해서 점점 더 행복해지는 걸까요?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보다 분명 더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조들(p. 120) 보다 훨씬 더 '행복' 한지는 의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 꾸었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는 낙원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과거보다 더 행복하다고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첫째,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에 의존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기대라는 것은 주어진 조건에 이내 적응하기 십상입니다. 상황이 좋아질 경우에는 덩달아 기대도 높아집니다. 결과적으로 조건이 극적으로 좋아져도 우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기대와 행복이라는 것도 궁극에는 신체 내부의 생화학 체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화학적인 체계 자체는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생존과 재생산의 확률을 높이기 위한 진화에 의해 프로그램화되어 있을 뿐입니다. 진화의 원리는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든, 영원히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남게 해서 끊임없이 추구하게 만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 있어서 쾌락에 대한 우리의 기본 반응은 만족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많이 추구하도록 돼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든지 상관없이, 우리의 만족이 아닌 갈망을 증가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세상을 정복하는 데는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반면, 그 힘을 행복으로 바꾸는 데는 성공적이지 않았던 원인입니다(p. 121).

 

서양사학자이면서 대중 교양 역사서도 많이 써오셨습니다. 그런 중에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은 일본의 역사 교양서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를 강하게 비판하신 적이 있지요? (주 교수는 신입생들이 감명 깊게 읽은 역사서로 〈로마인 이야기〉를 손꼽은 데 대해 충격을 받고 어떤 책인지 꼼꼼히 리뷰한 적이 있다.)

역사서의 경우 전문 역사학자가 쓴 책과, 학계의 연구 성과를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전달해주는 책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의 경우 후자의 영역이 크게 발달해 있는데, 시오노 나나미도 그 분야의 저자에 해당합니다. 이런 사람도 나름대로 전문성이 있습니다. 박사학위가 있고, 거기서 출발해 글을 잘 써서 독자를 확보하는 식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전문 역사학자의 영역도 완벽하지 않거니와 대중 역사서 작가 영역도 부재하다시피 했어요. 그 틈새를 시오노 나나미가 때맞춰 들어와서 아주 매력적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거지요. 그러다 보니 우리로서는 비판적 안목이 미처 갖춰지기 전에 너무 쉽게 받아들인(p. 136)게 아닌가 합니다. 그게 돌풍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굉장히 좋게 받아들였는데. 전문 역사가 입장에서 보자면 허점도 많습니다. 그분이 글을 유려하고 재미있게 쓰긴 하는데, 그 재미있는 부분들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해석하기 어렵거나 자기 생각과 맞지 않을 때는 아주 격언조로 '남자는 이런 법이다.' '지배자는 이런 법'이라는 식으로 풀어 넘깁니다. 언뜻 멋있어 보이긴 한데 그런 부분이 대개 증거 부족인 경우가 많습니다. 증거가 부족할 때 오히려 화려한 언사를 통해서 비약을 해 버리곤 하죠. 전문 연구자들이 그렇게 멋있게 못 쓰는 것은 필력 탓도 없지 않겠지만, 실제로는 사실 관계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증거가 없는데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반면 시오노 나나미 같은 저자는 그런 꼼꼼함에서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지식을 보기 좋게 이야기로 엮는 과정에서 도약해서 상상도 해보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하는 게 굉장히 멋있지요.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부실한 측면이 있습니다. 나아가 더 큰 문제는 그 부실함을 문학적 표현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데, 그게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이에요. 여기에는 일본 극우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 부분에서 사관의 문제가 제기되는 거지요. 제가 볼 때는 일본 여류 작가가 필생의 업적으로 로마를 연구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자기 생각에 로마를 일본의 근원으로서 찾고 있는 거지요. 과도한 일반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에는 자기들이야말로 또 다른 유럽이라고 생각하는 기묘한 사상 같은 게 있습니다. 원류로서 유럽사가 있고 원류의 원류로서 로마제국이 있는데, 그 로마가 붕괴된 후 되살리려 했던 게 르네상스이고, 그걸 이어받아 크게 발전시킨 것이 대영제국, 그 영향을 받은(p. 137)게 일본이라는 거지요. 그런 것이 시오노 나나미에게 영향을 준 계보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로마를 묘사하는 것을 보면 강력한 지배 채제에 의한 식민지적인 제국 지배를 미화하는 게 보입니다.

 

실제로 시오노 나나미는 일제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는 글을 써서 구설에 올랐지요.

그런게 로마를 이야기할 때는 얼른 드러나지 않지만 시사 문제를 이야기 할 때는 곧바로 드러나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녀의 위안부 발언이 나왔을 때 "실망했다", "그럴 줄 몰랐다"고들 했는데, "그럴 줄 몰랐다"는 게 잘못이지요. 극우의 논리로 로마제국을 보고 비교했는데(p. 138).

 

당신의 분석은 자본 축적이 오래 진행돼온 선진국 사례를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자본축적이 더 필요한 신흥국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자본 축적이 더 필요한 곳은 한국뿐만이 아닙니다. 프랑스나 다른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나라든 자본 축적은 필요합니다. 저는 자본 축적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자본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아주 유용한 것이니까요. 자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그 부는 소수 상위층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에서 나와야 합니다. 다수 중산층과 하위층에 의해 자본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본 축적을 위해서 부의 불평등이 극단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최상층 억만장자 부자들의 부가 더 늘었습니다. 선진국뿐만 아닙니다. 신흥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부자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같은 신흥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컨대 러시아의 경우(중국도 어느 정도는 그러하고) 부의 불평등이 극심해지는 것을 그냥 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흥 부자들을 부정 축재나 부패 같은 이유로 갑자기 재산을 몰수하고 감옥에 넣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이지 않을뿐더러 여러 가지 문제를 낳을 수 있습(p. 172)니다. 그보다는 부에 대한 과세를 통해 분배하는 방식이 효율적입니다. 좀 더 예측 가능하고 법치주의에 따른 것이니까요. 동시에 정부로서는 부에 관한 통계와 정보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과세야말로 부의 평등 문제를 다루는 가장 평화로운 (폭력을 동원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제가 볼 때 부에 대한 누진 과세야말로 가장 민주적이고 문명화된 불평등 규제 방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p. 173).

 

옳고 그름을 따질 때도 이성보다 감정이 우선

전공이 사회심리학입니다. 전통적인 윤리학이나 도덕철학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사회심리학은 아주 넓은 학문 분야입니다. 그중에서 저는 문화심리학, 진화심리학, 긍정심리학, 도덕심리학을 연구합니다. 도덕철학이나 전통 윤리학과는 아주 다릅니다. 인간 행동의 도덕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둘 다 같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는 주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p. 187) 관심을 갖는 반면,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또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제가 볼 때 인간의 심리를 모르고 도덕적 질문을 논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잘못된 가정 위에서 논의를 진행하기 십상입니다. 가령 인간이 도덕적 의무에 대해 '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고 믿는 가정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어떤 개인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도덕률은 이성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률을 이성 위에 세웠고, 공자를 비롯한 동양 사상가들도 인륜을 이성과 결부시켰습니다. 당신은 다른 입장인 것 같군요.

도덕의 기반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따져봐야 합니다. 관련 증거들을 검토해보면, 도덕적 판단이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성보다는 직관이나 감성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오늘날 여러 경험적인 연구 결과에 비춰보면 철학자들은 인간 본성이나 심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비현실적이거나 비인간적인 이론을 내놓기도 하지요. 칸트의 유명한 도덕적 정언명령에 따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나치가 문을 두드리며 유대인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이것은 터무니없는 요구입니다. 저는 그런 도덕적 명제는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p. 188).

 

'이성주의자의 착각raltonalist delusion' 이란 표현도 썼더군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도덕적 성향은 같은 편의 사람들을 결속 bind 시키기도 하지만 자기 믿음에만 빠져 눈을 멀게도 합니다. 종교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지요. 종교적 열정은 집단을 하나로 묶고, 신앙을 중심으로 뭉쳐 적에 맞서 싸우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같은 급진적인 '신무신론자'들은 종교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아주 적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문제는 이들도 종교를 대적해서 싸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는 겁니다. 이들에게 '신'이란 바로 이성이지요. 무엇이든 하나의 운동이 되면 뭉치는 동시에 눈이 멀게 됩니다.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죠. 진실을 찾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데만 골몰하게 되는데, 착각입니다. 물론 인간은 이성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 차원에서 가능한 게 아니라, 제도를 아주 잘 구축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과학이 단연 좋은 예입니다. 과학이 이성적으로 전진하는 것은 과학자 개인들이 대단히 이성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과학자들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이론을 편애합니다. 하지만 과학 제도 전체를 놓고 보면 양상은 달라집니다. 다른 과학자들이 동료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 하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려면 동료 리뷰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합리성이 발현되는 거죠. 사회가 이성적이 된다는 것은 개인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통(p. 189)해서가 아닙니다. 상호 토론과 검증을 통해서 좀 더 이성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 사람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며, 따라서 감정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뒤집어서 직관 (감정을 포함)과 이성을 각각 덩치 큰 코끼리와 그 위에 올라탄 기수의 관계에 비유했지요.

인간의 마음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코끼리 (자동적 인지 과정)의 등 위에 기수(통제된 인지 과정)가 올라타고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기수에 해당하는 이성은 어디까지나 코끼리와 같은 직관의 시중을 들어주도록 진화했을 뿐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먼저 '직감'하고, 그 느낌을 사수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애써 사후 정당화의 근거를 만들어내는 거지요. 제 연애 시절을 예로 들어볼까요. 친구에게 고민을 상담받는데, 헤어지라고 하더군요. 그때 그는 "이성에 귀를 기울이고, 어리석게 굴지 마" 라고 했습니다. 이때 제3자가 되어 조언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 입장에서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그 무렵 불교 서적을 읽고 있었는데, 부처의 어록 중에 "기수가 코끼리를 길들이듯 마음을 길들여라"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미 부처는 충동적인 마음의 엄청난 위력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의 수련이 필요하다고 한 것입니다(p. 190).

 

'도덕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고 썼더군요. 또 '우리 모두는 직관적으로 정치인'이라고도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치는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결속을 맺는 것입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간에 서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요. 도덕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은 서로가 어떤 원칙 위에서 행동하기로 결속하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서로 어떻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이느냐(약속을 지키는지 어기는지)에 신경을 씁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글라우콘이 이런 주장을 하지요. 자기 모습이 안 보이게 하는 반지(기게스의 요술 반지)가 있다면 사람들은 다들 마음대(p. 191)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냉정하게 보면 그의 말이 맞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도덕률을 따르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평판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도덕이란 사회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진화해온 심리 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덕의 핵심은 정치적이라는 거지요. 인류는 수백만 년 진화 과정에서 소규모 집단에 속해 생활해오면서, 다른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느냐의 여부가 생존을 좌우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서로를 볼 때 인간관계의 파트너로서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평가받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도덕 철학자라기보다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에 가깝다는 뜻입니다(p. 192).

 

다른 한쪽을 악마'로 내몰아서는 곤란

한국 사회도 보수-진보 간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걸까요?(p. 204)

각 나라들을 살펴보면 어디나 유사한 경향이 나타납니다. 기성세대의 우선 가치는 안전과 번영이었습니다. 그러다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가 부유해지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점차 개인주의적이 되지요. 자기표현과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대체로 건국 세대는 외적에 맞서 싸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국가 이익에 충성스러운 경향을 보입니다. 반면 그런 경험이 없는 세대는 내부의 투쟁에 더 골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이 그렇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참전해 싸운 경험이 있는 세대는 공화당원이든지 민주당원이든지 서로 협력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한편 지금 사회 주도층인 베이비부머 세대는 외부 적과 싸워본 경험 없이 안으로 싸우면서 커온 세대라 둘 사이에 극명한 세대 차를 보이는 것입니다. 한국 상황은 잘 모릅니다만, 일반 원칙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국가가 당면한 위급한 사안부터 우선 서로 인정하고 이야기를 접근시켜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먼저, 정치제도적으로 온건한 목소리가 더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거법이나 정책을 통해 극단적인 세력의 영향력을 줄이고 온건파를 강화해야 합니다. 중도적인 유권자들은 대체로 투표율이 낮은데, 이걸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극으로 갈라진 보수와 진보 진영 인사들 간에 접촉과 친교를 늘릴 필요도 있습니다. 그저 한자리에 모아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만으로는 부족 합니다. 민주주의는 차이를 없애는 게 아니라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생 · 공영하는 것입니다. 모든 분파의 지도자들이 서로 간의 견해차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또 어느 한쪽을 '악마'로 내모는 태도에 대해서도 다 같이 반대할 수(p. 205)있어야 합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어느 누구 입에서라도 인종주의적인 발언만 나오면 정파를 막론하고 배격합니다. 그처럼 어떤 극단주의에 대해서는 모두가 금지선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206).

 

‘목사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맘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적인 여정에서 신앙의 문제로 영향 받은 것은 없나요?

그건 여전히 매듭 짓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제 인생은 아버지와의 정신적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목사 아들은 대개 '모 아니면 도'거든요. 저 자신에 대해 지금은 그 문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굉장히 기특하게 여겨요. 자라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게 '목사 아들이 왜 이래'라는 소리했어요. 안 겪어보면 몰라요. 엄청난 스트레스이고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됩니다. 저는 다행히 그 투쟁을 잘 해냈어요. 부모님한테 감사한 이유도 그(p. 240) 투쟁의 시간을 잘 참아주셨다는 거예요. 제가 자라면서 유기정학, 무기정학, 제적을 다 당해봤거든요. 대학 제적은 시대적인 이유, 학생운동과 관련도 있지만. 개인적인 성장사로 보면 목사 아들로서 가진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봐요.

 

학생운동 과정에서 제적이나 도피 유학, 교수 임용의 좌절 같은 걸 보면 의외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군요. 언제가 가장 힘들었나요?

제 또래가 겪을 만한 어지간한 고생은 다 겪었다고 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힘든 일들인데,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물론 괴롭고 힘들었지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지요. 지금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특히 군대에 강제 징집된 기억이 그래요. 폭력에 내가 무너지고 비겁해지는 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거든요. '목사 아들' 이란 말처럼 누구 아들로 불리는 것도 짜증나지만, 그거야 견딜 만한 자존심의 문제예요. 어느 누구나 누구의 아들이니까요. 하지만 폭력 앞에서 자신이 비겁해지는 것은 정말 창피한 일이지요. 그다음으로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었어요. 혼자 독일 유학 갔을 때 너무 외로웠어요. 제가 일본행을 택한 것도, 사실 독일에 가면 지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게 지낼 수 있겠지만, 외로워서 한국으로 다시 오고 싶을 때 시간이 너무 걸릴까봐 그런 거예요(p. 241).

 

의외군요. 혼자서도 재밌게 잘 지내실 타입 같은데요.

아니에요. 견딜 만한 외로움을 택한 거지요. 결국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외로움을 잘 관리하는 것 같아요. 외로움에서 도피하기 위해 관계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어요. 나중에 더 외롭지요. 인생에서 한 순간은 격하게 외로운 시간을 가져야 외로움한테 호되게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p. 242).

 

책도 꾸준히 내시고 여기저기에 칼럼도 연재하시고, 늘 장단기 작업을 병행하는 것 같습니 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으로는 또 뭐가 있나요?

〈차의 세계〉에 연재하는 글이 있습니다. 동다기와 동다송인데, 예전 차 문화에 관한 글이지요. 추사와 초의선사, 다산이 얽힌 이야기입니다. 앞서 차 문화의 중요 고전인 《동다기》를 제가 발굴해서 글을 썼는데, 당시 우리 차계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어요. 그 문헌에서 찾아낸 내용이 그동안 차계 주류 얘기와 180도 달랐거든요. 지금은 설록차 같은 잎차를 우려서 마시지만, 옛날에는 빻아서 만든 떡차였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러자 그전까지 자신들이 초의선사의 전통 차법대로 만든다고 얘기했던 사람들의 권위가 무너지게 된 거예요. 반발이 굉장히 심했어요. 처음에 한 사람이 잘못 해석해놓으면 30년이 답습됩니다. 가령, 《동다기》에 '구방지상마'라는 말이 나와요. 이걸 '아홉 방향으로 서로 말을 몰고'라고 번역을 해놨어요. 하지만 '구방'은 구방고'라는 옛 사람 이름이거든요. 말 감별의 최고수였어요. '상마'는 말의 관상을 본다는 뜻이 고요. 그러니까 원문은 '구방고가 말 관상 보듯이' 차를 알아본다는 뜻이지요. 문하생들이 엉터리 해석을 수십 년간 들어오다가 '그게 아니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떤 느낌을 받겠어요(p. 305).

 

독서론도 여러 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은가요?

독서에서 가장 착각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다독의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송나라 때 구양수(1007~1072)가 말한 다독, 다상량, 다작을 얘기합니다.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다독을 그저 이 책 저 책 많이 읽는 거라 생각하고, 1년에 백 권 읽기 같은 운동도 하는데, 저는 그런 것이 독서법 중에 가장 나쁘다고 생각 합니다. 같은 책도 여러 번 읽어야 할 책이 있고, 그냥 한번 보고 지나가야 할 책이 있습니다. 또 목차만 봐도 대개 알 만한 책이 있고, 한두 장만 읽어 보면 더 볼 것도 없는 책도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다 똑같이 읽습니까. 1년에 백 권이면 사흘에 한 권씩 해치우는 각오로 읽는다는 건데, 그렇게 억지로 읽는 독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를 읽어도 곱씹어서 읽을 책과 되풀이해서 읽을 책이 있고, 소리 내어 읽을 때 훨씬 위력이 있는 책도 있습니다. 아무 데나 가까이 두고 틈날 때마다 읽어서 환기해야 할 책도 있고(p. 314)요. 종류별로 갈라서 읽어야지 획일적인 방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한 책을 되풀이해 읽는 것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너무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어도 몇 권 정도는 그런 책을 읽어야 합니다. 멘토가 될 책들이지요. 이를테면 《논어》가 바로 그런 책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할 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이니까요. 어떤 것은 외워가며 읽으면 더욱 좋은 책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사라진 것 중 하나가 낭독의 즐거움입니다. 소리 내 읽는 독서 습관이 없어졌어요. 그냥 눈으로 쫙 읽어 내려가는 경우가 많은데, 글의 결을 익힐 때 좋은 글을 소리 내 읽는 것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다산이 가장 강조한 것은 초서였습니다. 베껴 쓰면서 읽는 것이지요. 제가 학생들과 학술답사를 가면서 급하게 박사 논문 하나를 가져갔어요. 버스 안에서 필요한 대목을 밑줄 치면서 읽고는, 그날 밤 회식 후에 숙소로 들어와서는 밑줄 친 부분을 노트북에 타이핑했어요. 그다음 날 아침에 마저 하고 나니 책 한 권의 주요 부분이 다 입력됐어요. 그러는 동안 무수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집적이 되더군요. 다산이 즐겨 찾던 강진의 정원에 관한 글을 쓰는 중이었는데, 그 논문을 참고한 거지요. 그 논문의 전문성과 제가 가진 구체적인 콘텐츠가 결합해 강력한 새로운 글이 나온 겁니다. 암튼 책도 종류에 따라 읽기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 소리 내 읽기와 베껴 쓰기의 중요성, 이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p. 315).

 

요즘 책 말고도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그래선지 독서 인구가 갈수록 줄고 있습니다. 일반인이 굳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뭔가요?

삶의 가닥을 잡아주는 하나의 마지막 보루라고나 할까요. 책을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의 차이는 굉장히 큽니다. 그 점은 분명합니다. 그 차이는 겉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요. 하지만 아주 치명적인 차이입니다. 책을 손에서 놓은 사람 또는 안 읽고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책을 통해 자기 삶을 보듬어가는 사람은 차이가 대단히 큽니다. 그 차 이가 얼마나 막강한지 잘 모르니까 안 읽는 건데, 그걸 알면 책을 안 읽을 수가 없어요. 자기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장치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p.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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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64】 전문가들을 통해 얻는 여러 통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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