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 - 양태자(이랑 · 2015년)
중세의 마녀사냥에 대해 처음 읽었다. 참으로 참혹하고 황당하다. 중세 카톨릭의 잘못으로 인해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해 카톨릭은 진정으로 사과했는지 모르겠다. 중세 카톨릭 시대가 왜 암흑의 시대인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변형된 마녀사냥은 계속되고 있다(아쉽지만 현재 이 책은 절판됐다.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고해성사로 영혼까지 조종하다
1215년경부터 그리스도교는 신자들의 영혼을 통제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해성사를 전면에 내세운다. 교회에서 정해준 규정대로 신자들은 신부에게 모든 죄를 고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부의 성관계까지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라야 했다. 즉 교회에서 "부부가 함께 잠을 자면 안 되는 날에 잠자리를 하였다면 지옥에 간다"라든가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 등의 어처구니없는 말로 사람들을 위협한 것이다. 중세의 부부는 교회법에 따라 어느 날은 부부관계를 해도 되었고, 어느 날은 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엄한 벌이 따랐는데, 이 모두를 고해 성사를 통해 통제하였다. 교회법을 어겼다면 반드시 고해성사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당시 유명 신학자들까지 교리와 학설로 이를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특히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p. 24)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교리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상은 철저하게 신과 악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주장한 그 덕분에 12세기 중세 유럽에서는 신의 성사와 마귀의 성사, 즉 그리스도교 의 이분법이 득세할 수 있었다(p. 25).
당시 마녀 희생자 중 여성이 더 많았던 것은 성서 해석의 차이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중세 사람들은 학자, 특히 신학자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만약 당시 신학자들이 주장한 학설이 진리였다면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되어 죄 없는 무수한 사람이 계속해서 마녀재판에 넘겨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래전에 마녀재판은 끝났고, 이는 많은 사람을 마녀로 몰고 간 중세 신학자들의 말이 진리가 아니었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시대를 주름잡았던 유명한 학자가 주창한 학설도 새 이론이 나오면 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에서 해가 지는 등의 자연의 법칙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마녀사냥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것처럼 설파되는 이념이나 사고는 어느 시대를 살더라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다(p. 27).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한계
종교개혁을 주장하면서 등장한 신교이기에 구교와 반대편에 서는 것은 당연했지만, 신교 역시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기보다는 시대에 상응하는 적절한 관습은 유지 하려고 한 온건파에 가까웠다. 이들은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부패하고 타락한 구교를 바로잡고자 했을 뿐, 민중이나 당시 사회문제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마녀에 관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견해 역시 구교와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마르틴 루터는 마녀는 동물로 모습을 바꿀 수 있으며 마귀와 사랑도 나누고 성적인 관계를 하는 존재라고 믿었다. 1526년 루터는 출애굽기 22장 18을 인용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녀는 살려두어서(p. 33)는 안 된다. 마귀와 교접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는 죽여야 한다. 제사는 반드시 야훼께만 드려야 한다." 루터는 마법으로 날씨를 바꾸는가 하면 주문을 외워 집이나 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자들 역시 마녀로 간주하였다. 더 나아가 마녀는 사람을 절름발이로 만든다고 설교했다. 1529년 6월 루터가 교인들에게 한 경고용 설교 중에 "여름에 차가운 강물에서 목욕하지 마라.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하라. 마귀는 숲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강에서도 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루터는 마귀가 곳곳에 숨어 인간을 해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또한 그는 구교에서 생각하는 두 종류의 마귀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는 인큐버스이고 다른 하나는 서큐버스(p. 34)이다. 인큐버스는 남자 형상을 한 마귀가 여자에게 다가가는 것이고, 서큐버스는 그 반대로 여자 형상을 한 마귀가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루터였지만 마녀에 대해서는 구교 못지않게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구교나 신교를 가릴 것 없이 선 아니면 악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이분법적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루터는 마녀를 심문할 때에 고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는 마법을 부리는 것은 죄 중에서도 몹시 나쁜 죄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고문 도구를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마녀에게 자백을 받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티칸의 부패를 겨냥했을 뿐 당시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루터는 독일에서 농민전쟁이 크게 일어났을 때도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농민들은 전쟁을 일으켰을 때만 해도 루터가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마르틴 루터는 끝까지 농민들을 외면했다. 루터는 종교 외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접근하는 것을 꺼렸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지배적인 해석이다(p. 35).
당시의 수녀원은 오늘날처럼 성소(신의 부르심)에 의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가난한 귀족들이 딸들을 (강제로) 보내는 곳이었다. 당시에는 자식이 많아서 거두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딸을 시집보내려면 많은 지참금이 필요했다. 자식을 돌볼 여유가 없거나 지참금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딸들을 강압적으로 수녀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수녀원에 들어간 여자 중에는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선을 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의 수녀들을 오늘날의 경건한 수녀들과는 종교적으로 같은 선상에 두기 어려운 이유이다. 수도자 역시 본연의 모습을 잃고 있었다. 당시의 수도자들은 사람의 영혼을 보살피지 않고 단지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겼다. 예비 부부가 찾아오면 이들의 앞날에 대한 축복은 뒤로 하고 오직 돈만 을 밝혔다. 결혼식도 돈을 내야 교회에서 올릴 수 있었는데, 이 말은 돈이 없으면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당시는 예식장도 없었지만,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런 곳에서 한 결혼은 무효였다. 모든 예식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느님이 승낙하고 축복한 결혼으로 인정받았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이들은 사례비를 내지 못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더 큰 문제는 수도자가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규율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물론 철저한 규율을 지키며 수도자로 살아가는 사람도(p. 36)있었지만, 대부분의 수도자는 첩이나 자식을 데리고 살았다. 여기에 관해서는 문화사로서도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수도자의 독신 제도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Gregor X, 재위 1271~1276)가 정착 시켰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교황권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교황의 힘을 이런 방법을 통해 복원하려는 의도가 깔렸다고 볼 수 있다. 거듭 이야기했듯이 당시 가톨릭은 면죄부 판매와 폭력, 각종 음모로 인해 신망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수도자의 독신제도는 가톨릭이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개혁이자 구제책이었다. 그런데 당시 마녀사냥이 날뛴 여러 이유 중의 하나를 사제의 독신제도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독신제도에 갇힌 사제들이 억압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마녀사냥에 열심히 매달렸다는 주장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자연스러운 성적 본능을 강압적으 로 누르다 보니 민중, 특히 여자들에게 그 화살을 돌려 본능을 해소했다는 것이다. 여자 하나를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하고 나면 다시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서길 반복하면서 억압된 성욕을 분출 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마녀사냥을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들의 행동은 살인이나 다름없다고 사학자 로버트 마스터즈 (Robert Masters, 1713~1798)는 주장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마녀사냥의 또 다른 동참자들이 나타났다. 의사, 법률가, 공무원 등 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교가 터준 길과 신학자들이 제공해준 이론으로 무장하여 잔혹한 마녀사냥에 기꺼이 동참했다(p. 37).
다른 신학자들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신학자 에덜린은 마녀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편이 잠을 자는 동안 남편을 마귀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마녀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마녀연고'에 깊은 관심을 두었는데, 그가 연구 끝에 밝혀낸 사실(?)은 마녀연고를 만들 때에 죽은 아이의 손톱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녀는 몸의 한 부분에 이 연고를 바르고 마녀모임에 참석한다고 주장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녀는 자신이 만든 가루를 음식에 집어넣거나 아니면 옷 속에 넣어 사람을 괴롭힌다고도 말했다. 때로는 이런 가루를 가지고 어린이를 죽이(p. 62)는 악행을 저지른다고도 했다. 신학자인 이들의 주장은 후에 마녀사냥에 중요한 논거로 작용 한다. 마녀로 몰린 사람들이 법정에서 받는 심문 중에 신학자들의 의견이 첨부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학자들이 무책임하게 뱉어 낸 주장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변모한 셈이다. 다른 신학자들의 주장 역시 기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동물도 인간처럼 영혼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만약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면 마귀가 조종할 수 있다고 답했다. 실제로 이런 판결이 있었다. 1266년 퐁뜨네-오-호스라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인간이 아닌 돼지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살아 있는 채로 불에 태워졌다. 돼지가 아이를 죽였기 때문이다. 마귀가 들린 돼지이니 인간처럼 재판 후 사형시켰던 것일까? 1386년에는 시청 앞에서 돼지에게 옷을 입힌 후 머리와 다리를 자른 기록도 남아 있다. 1488년에는 쥐를 법정에 세운 일도 있다. 1604년 파리에서는 당나귀가 마법에 걸렸다고 법정에 세워 사형을 선고한 뒤 죽였다. 모두 인간이나 동물에 마귀가 깃들을 수 있다는 종교적인 견해에 따라 일어난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p. 63).
예수회 신부이자 시인이었던 프리드리히 슈페(Friedrich Spee, 1591~1635)는 사회 전체가 마녀사냥 때문에 어지러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켰다는 사실에 경악하여 마녀재판과 고문을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재판관에 대한 경고Cauin Crminals』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재판 과정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했다가 수(p. 68)도원 안의 동료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다. 독일 파다본의 주교 펠킹 (Johannes Pelking, 1573~1642)은 이 책을 '신을 모독하는 불경한 저서'라로 간주했지만 그의 책 덕분에 유럽 곳곳에서 일어났던 마녀사냥의 광기가 차츰 누그러질 수 있었다. 만약 그의 책이 출간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며 후세의 학자들은 그의 행위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책의 출간 과정에 관한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자신이 다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처음에는 이 책을 익명으로 출간하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용기 있게 자신이 이 책을 썼노라고 이름을 밝혔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자기 이름을 내세워 책을 출간하였다면 이 책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전에 그 역시 마녀로 몰려 마녀재판에 넘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가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동기는, 그가 사제로서 직접 경험하고 체험한 일들 때문이었다. 그는 마녀재판에 끌려가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영적 지도신부로 동행한 적이 많았고, 마녀사냥으로 고통 받는 민중을 꼼꼼하게 살펴볼 기회도 있었다. 날씨 변동이나 흉년 등 자연재해로 사람들이 굶어 죽어도 마녀의 짓으로 돌리는 세상의 여론이 못마땅했고 종교 분파가 생겼을 때에는 이것 또한 마귀의 저주로 여기는 교회 사람들이 그에게는 온전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제로 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쓴 책의 내용처럼, 마녀재판은 억울한 사람에게 죄를 덤터기 씌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희생자의 약(p. 69) 팔십 퍼센트는 여자였고 그들 중 대부분은 과부와 가난한 사람, 또한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웃이 이웃을 고발하는 등 밀고가 점점 심해지자 그는 억울한 마녀사냥을 막기 위해 마녀재판 자료를 찾아 연구하였고, 마녀로 몰린 사람을 심문할 때나 재판할 때에 함께 참여하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료를 모았다. 그는 힘없는 사람들일수록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것을 통감했다. 또한 마녀재판관들이 혐의자를 고문할 때는 이미 시나리오를 짜 놓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목적에 합당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하여 갖은 악랄한 방법을 동원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가 밝힌 바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진짜 마녀가 아니라 그냥 술을 많이 마신다는 이유로 혹은 이웃의 시기나 질투, 복수나 해코지의 목적으로 밀고를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억울하게 밀고 당한 이가 처참하게 불에 타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신학자들이 탁상공론 속에서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이 마녀이고 마녀사냥이다. 이들은 이 가상의 인물이 실제로 있다고 믿고 의심되는 사람을 잡아다 심한 고문을 하느라 정작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지, 인간이 인간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도 경계선은 있다.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을 풀어주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행해지는 고문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자비하니 그것을 막자는 주장이다. 죄 없는 자들도(p. 70) 분명 있을 것이고 잘못된 심문도 분명 많을 터인데,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동반하여 심문한다면 그 고통을 참지 못해 허위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법 앞에서 무죄 고백을 할 기회가 없는 힘없는 사람들을 기득권의 심판에 따라 가차 없이 죽이는 제도를 바꾸자는 것이 그가 주장한 내용의 핵심이다.
그의 책은 제후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Alexandra Christina, 1626~1689)는 1649년 마녀사냥을 금지하라고 명하는 동시에 그 당시 진행 중인 모든 마녀재판을 중지 하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마녀로 몰려 잡힌 이도 모두 풀어 주었다. 1740년 프리드리히 2세(1712~1786)도 마녀재판에서 고문을 금지하는 한편, 아직 많은 여성이 억울하게 마녀라는 덫에 걸려있다며 이들을 풀어주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처했다. 한 스페인 신부가 저술한 책이 이토록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마녀사냥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슈페 신부의 말년은 안타깝게도 그리 좋지 못했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한 후 동료와 교회 수장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고 불리한 조건의 근무지로 이동을 지시받았다. 그가 마인츠에 근무할 때 페스트가 발병했는데, 그는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다 페스트에 전염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p. 71).
식민지에서 자행된 마녀사냥
유럽 바깥의 식민지에서 마녀사냥이 자행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찾을 수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새로운 유토피아라 불리는 신대륙을 찾아 나서는 탐험가가 많았다. 새로운 부를 축적하겠다는 욕심으로 신대륙을 찾아 나선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중에는 당시 마녀사냥 등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언젠가 자신도 마녀 혐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유럽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자신들이 도착한 신대륙에서 자국의 마녀사냥과 유사한 방법으로 마녀재판과 고문(p. 86)을 행하며 본토인들을 괴롭히는 가해자가 되었다. 유럽 내에서는 마녀사냥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또 다른 마녀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이들을 비판했던 성서 구절은 마태오복음 23장 15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을 떠나 신대륙으로 건너간 사람이 약 500 만 명 정도에 이르는데, 이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에서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p. 87).
중세 유럽에서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아이가 수두룩했다. 살기 힘든 시기이기도 했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열린 수많은 마녀재판 때문에 부모를 잃은 아이도 많았다. 보호해 줄 어른 하나 없이 거리에서 살 때에는 서로를 챙기던 이들이었지만 한두 명씩 붙잡혀 재판에 넘겨지자 이제는 너 나 없이 고발하는 통에 연쇄적으로 동료가 붙잡혀 들어왔다. 1677~1678년에 이 재판에 든 법정비용 만 8000플로린이었지만 이들은 재판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전혀 없었기에 전부 잘츠부르크 시가 비용을 떠맡았다. 이 재판은 혐의자 대부분이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대다수 자백이 상상에서 나온 판타지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시에서는 이런 자백을 기반으로 하여 아이들의 부모까지 잡아들여 그들이 원하는 자백을 할 때까지 고문을 계속했다. 심문의 끝은 이제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감옥에서 살거나 아니면 죽임을 당하거나(p. 193).
마녀사냥의 광기, 어린이에게까지 번지다
어린이 마녀사냥에 대해서는 독일의 라우Kut Rau 교수와 베버Harig weber 교수가 많은 연구를 남겼는데, 그중 라우 교수는 1618~1730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일어난 어린이 마녀사냥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7~10세의 남녀 어린이 45명이 마술을 부린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려 재판에 넘겨졌는데, 훈계 차원의 가벼운 벌을 받은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베버 교수는 1660년경 독일 로이트링겐Reuingen에서 일어난 마녀사냥과 1675~1689년에 잘츠부르크에서 일어난 어린이 마녀사냥을 연구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는데, 특히 이 책은 17세기 유럽의 어린이 마녀재판에 대해 소상히 밝혀낸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그 외에도 다른 많은 사료가 남아 있고 연구 또한 계속되고 있(p. 200)다. 독일 뷔르츠부르크 기록 보관실에는 1627~1629년에 10세 미만의 어린이 27명을 마녀로 몰아 불에 태워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슈투트가르트의 기록보관실에도 비슷한 내용의 문서가 남아 있다. 17세기에 열린 마녀재판에서 192명이 마녀로 몰려 재판에 넘겨졌는데, 대다수가 7~10세의 아이였고 가장 어린 아이가 5세였다. 대부분 고아이거나 편부모 가정 또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마녀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이었다. 정상적인 가정의 아이는 드물었고 고아 아니면 찢어지게 가난 한 집 아이가 대다수였다. 마녀로 몰린 아이 중에는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족이 있든 없든 가리지 않았으며 독일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그 근거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는 14~15세기 초까지는 어른(특히 여자) 위주의 마녀사냥이 진행되었지만 15~16세기로 넘어갈 즈음에는 서로 원수지간이 된 사람들이 조금만 싸워도 이웃을 마녀라 고발할 정도로 마녀사냥이 난무했고 급기야 8~12세 가량의 어린이들에게까지 그 광기가 번졌다(p. 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