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11(목)
 
  • 설탕 전쟁 - 최광용 저자(글), 한겨레출판사 ·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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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건강을 위해 설탕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설탕을 먹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설탕은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 설탕이 불러온 세계의 여러 일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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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생산 공정의 상당 부분이 기계화되었지만,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기계가 없었던 수백 년 전(p. 7)에는 모든 공정을 사람이 직접 했기에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설탕 생산과 유통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륙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많은 설탕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탕 산업에 뒤따른 잔혹했던 노예제와 대규모 인구 이동은 오늘날 세계 인구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와 설탕 산업이 초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설탕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형성된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설탕으로 인한 이주의 역사가 있다. 바로 1900년대 초에 있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 주다(p. 8).

 

포르투갈은 일찍이 마데이라제도와 아소르스제도 같은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원주민보다 체력이 좋고 노동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섬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퍼뜨린 병원균에 면역이 거의 없어 각종(p. 54)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발을 들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렇게 흑인 노예를 동원해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방식은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점차 영국, 프랑스, 스페인으로 확산되었으며 훗날 미국의 흑인 노예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519년에서 1867년까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흑인은 무려 125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에서 약 15퍼센트가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107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강제 이주는 없었다(p. 55).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자원과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며 안정적으로 정착에 성공하면서, 브라질의 인구 구성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체로 남성 중심이었던 포르투갈 이주민과,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혼혈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는 현대 브라질의 인구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 브라질은 백인과 혼혈이 전체 인구 중 각각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둘을 합치면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한다. 흑인은 10퍼센트가량이며, 원주민은 1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에는 포르투갈 본토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원주민 인구가 브라질 땅에 거주했지만, 지금은 백인과 혼혈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인종 국가가 된 것이다. 브라질의 공용어 또한 포르투갈어를 기반으로 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다.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 식민 통치 영향으로 브라질 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농업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기도 한데, 심지어 설탕을 가공하여 에탄올을 추출해 자동차 연료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설탕이 화석 연료마저 대체한, '설탕 왕국' 브라질의 현재 모습이다(p. 124).

 

설탕이나 커피 생산뿐 아니라 광산업, 식량 농업 및 축산업, 운송업까지 성장해 브라질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자, 브라질은 더 이상 아프리카 노예 수입만으로 노동력을 충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노예 운송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이 상승했고,(p. 126) 배 안에서 많은 노예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조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브라질의 포르투갈인 고용주와 관리인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브라질 내륙이었다. 브라질에는 초기 플랜테이션에 동원되었던 해안 지역의 원주민 투피 족 외에도, 과라니 Guarani 족 등 여러 부족이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문제는 1755년 이후 브라질 내에서 법적으로 원주민 노예화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지 관리인들은 내륙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노예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원주민을 일부러 도발해 분쟁을 일으킨 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원주민 사회에는 '전투에서 이긴 자가 패배자를 포로로 삼아 부릴 수 있다'는 오랜 전통이 존재했다. 포르투갈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의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패배한 원주민을 포로로 삼은 뒤 노예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원주민을 몰래 납치해 광산이나 농장에 팔아 버리거나, 원주민에게 고리대금을 제공한 뒤 갚지 못 하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비열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원주민 착취가 이루어졌다(p. 127).

 

그러던 중 하와이 설탕 산업에 큰 변화를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 주들과 노예제 폐지를 원했던 북부 주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남부의 설탕 산업을 마비시켰고, 그 빈자리를 하와이가 채우게 되었다. 이에 가능성을 본 미국 투자자들이 금세 하와이 설탕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만 앞서 하와이의 농지를 점유하고 있던 이주민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이미 정치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외부 투자자들이 그들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1875년, 미국과 하와이 왕국은 '호혜 무역 협정 Reciprocity Treaty'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에 관세 없이 수출할 수 있게 되어, 하와이의 설탕 업자들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설탕 산업의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당시 난립하던 80여 개의 소규모 농장들은 자본력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 농장을 중심으로 통폐합되었다. 공급망 역시 간소화되며 불필요한 경쟁이 제거되 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 빅 파이브'로 불리는 다섯 개의 대기업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와이 설탕 산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며 사실상 하와이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경제력을 손에 쥔 이들은 곧 정치에(p. 223)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려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한 뒤 하와이를 미국에 병합하는 과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배경에도, 이처럼 설탕 산업이 깊숙이 얽혀 있다(p. 224).

 

한인 이주 역사의 시작

미국의 의사이자 선교사 호러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처음 조선에 들어와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고종과의 친분을 쌓은 알렌은 대한제국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고, 미국 정부는 그를 주한 공사로 임명했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는 이 알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종을 설득했고, 결국 1902년 하와이 농장 이주를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하와이라는 곳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먼 이국으로의 이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이 주로 이주를 시도하던 곳은 만주나 연해주로, 모두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고 조선인들에게도 이미 어느 정(p. 230)도 알려진 지역이었다. 반면 하와이는 완전히 생소한 곳인데다 심지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고, 광고를 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 결국 인천 내리교회의 헨리 존스 선교사가 자신의 교회 신도들을 설득하여 약 50명의 남녀를 모집해, 이를 계기로 총 121명의 지원자가 겨우 모이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 유학생, 향리 출신 선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농부, 부두 하역 노동자, 군인 출신, 또는 무직자였다. 1902년 12월 22일, 이들 121명은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호에 탑승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배는 나가사키에 들러 그곳에서 신체검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p. 231)은 나가사키에서 미국행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13명, 유아 12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한인 출신 미국 이민자들이다. 나가사키를 떠난 갤릭호는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고, 102명의 조선인 이민자는 오아후섬 북 서쪽에 있는 모레이아 지역의 와이알루아 농장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이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총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조선인은 하와이 전역의 약 40개 설탕 농장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인원은 농장마다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00~300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점심시간 30분 정도가 휴식으로 주어졌고,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루나'라고 불렸던 농장 감독관은 소나 말을 다루듯 채찍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릴 정도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와이 이주 이후에는 멕시코로의 이민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자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해외 이민도 중단되었다. 그러는 동안 하와이 이주민 중 일부가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약 1000명이 귀국했고, 2000명 이상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민 대부분은 하와이에 남아 농장 노동자 또는 자영농, 소상인 등으로 정착했다(p. 232).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 바친 조선인 청년들

앞서 말한 대로 하와이 이주민 중 많은 수는 그대로 하와이에 남아 정착했다. 하지만 일부는 열악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며 미국 본토나 멕시코, 쿠바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약 260만 명 규모를 이루고 있는 미주 재외 한인의 출발점이다. 이주민 다수는 비참했던 삶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적은 수입의 일부를 기꺼이 떼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강한 민족적 연대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던 이주 조선인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사례인 유대인이 보여 준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p. 233).

한편,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이미 활동 중이던 안창호와 서재필 등 독립 운동가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던 미주 한인 독립운동은 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바로 하와이에서 이주해 온 두 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으킨 '스티 븐스 저격 사건'이다.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조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조선인은 무지하고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 덕분에 문명화되고 있다"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많은 미주 한인의 공분을 샀다.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가 여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일제를 옹호하고 조선을 비하하는 발언을 쏟아냈고, 이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소속의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이 그가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하며, "한국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백성은 무지하다"라고 발언했다. 스티븐스를 찾아간 공립 협회 회원들은 격분하여, 의자를 들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후 여러 한인 단체가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공립협회의 전명운이 그를 암살하겠다고(p. 234) 자청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보국회의 장인환 역시 "총만 구해 주면 내가 죽이겠다"라며 나섰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각자 권총을 챙겨 부두로 향했다. 전명운이 먼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격발되지 않아,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도착한 장인환은 전명운의 고함을 듣고 권총을 꺼내 발사했는데, 첫발은 전명운의 팔을 스쳤고 두 번째 총알이 스티븐스를 명중시켰다. 스티븐스는 함께 있던 일본 공사를 향해 쓰러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장 경찰이 출동해 두 사람을(p. 235) 체포했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 이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장인환은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구명을 위해 대동보국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변호사와 통역사 고용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인환은 10년 후인 1919년 가석방되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산재했던 10여 개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고,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장인환은 1876년생으로 당시 32세, 전명운은 1884년생으로 겨우 24세였다. 두 사람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이민 노동자 출신으로 장인환은 1904년, 전명운은 1903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두 젊은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철도 노동자와 어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중,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안고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스티븐스 저격 이후 두 청년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명운은 일본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이름을 '맥 필드Mack Fields'로 바꾸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이후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세탁소를 꾸리며 어렵게 살다가, 생활고로 귀국하지 못한 채 1947년 사망했다. 평양 출신이었던 장인환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왔다. 스티븐스(p. 236) 저격 이후 1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잠시 귀국해 평양에서 결혼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그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청춘을 불사른 이들의 마지막은, 마치 시대가 일부러 외면이라도 한 듯 지독히도 쓸쓸했다.

이후 장인환과 전명운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p. 237).

 

설탕 재벌의 섬에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섬으로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경제의 근간이었던 설탕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 이주민의 노력으로 하와이에서도 설탕 산업이 성공하자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고래잡이 어부들이 모두 사탕수수 산업에 매달렸고, 설탕 정제 공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즙을 끓이는 데 필요한 땔감은 산의 나무를 베어 마련했고, 하와이의 울창했던 숲은 차차 민둥산으로 변해 갔다. 또한 미국 본토에서는 하와이산 설탕을 구매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 건너와 하와이에 직접 회사를 차렸고, 해운사들은 물류망을 구축했으며, 산업 규모가 커지고 정교화되자 금융, 보험, 투자 서비스도 잇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동력 부족 문제가 더욱(p. 243) 심각해졌다.

하와이에서 생산된 설탕은 모두 미국 본토에 수출되었기에, 미국이 부과하는 수입 관세는 하와이 설탕의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해 준다면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남부나 카리브해에서 생산된 설탕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초기 하와이는 미국 영토가 아닌 원주민들의 왕국이었기에 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하와이 왕국이 1875년 미국과 호혜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잠시 해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협정으로 인한 무관세 혜택은 조약 갱신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임시적 특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가 아예 미국으로 편입되길 원했다. 이에 하와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출신 이민자들 중심으로 하와이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미국 본토 정치가들의 하와이 병합 야욕 또한 작용해, 하와이 주재 미국 공사였던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는 하와이에서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 했다. 당시 하와이 왕국의 군주는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으로, 오빠이자 전 왕인 칼라카우아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사망하면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카메하메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1891년 1월 29일 53세의 릴리우오칼라니 공주가 여왕이 된 후, 그는 미국인 자본가가 왕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하와이 왕국은 영영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인의 왕국(p. 244)내 참정권을 제한하고 설탕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려 했다. 당연히 이는 미국 출신 이주민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변호사 샌퍼드 돌Santord Balard Dole과 롤린 서스턴 Lorm A Thuston이 189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임시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하와이 왕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존 스티븐스는 호놀룰루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보스턴호에 해병대 상륙을 지시 했으며, 무장한 미 해병대 164명은 이올라니궁에 진입해 여왕을 체포하고 유폐시켰다. 여왕은 미국 정부에 특사를 보내 쿠데타가 무효임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 성립이 공식 선포되며 릴리우오칼라니는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으며, 쿠데타에 앞장선 샌퍼드 돌은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은 1894년부터 1898년까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존속했는데, 하와이 공화국 자체가 미국에의 병합을 위해 임시 성립된 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의 미국인들이 그토록 합병을 원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설탕 등 각종 농산품을 미국 본토로 수출할 때 관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또한 하와이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는데, 1898년 쿠바의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터지자 하와이는 필리핀과 괌으로 향하는 이상적인 중간 기착지로 하와이를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로 편입되었다.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이자 유일한 대통령을 지낸 샌퍼드 돌은(p. 245) 1900년 미국 정부에 의해 하와이 준주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03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명으로 하와이 연방 법원의 판사로 재직하다가 1915년 은퇴했다.

한편, 그의 사촌인 제임스 돌은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며 파인애플 통조림을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돌Ddle' 통조림이다. 이후 돌은 하와이 파인애플 산업의 상징이자 세계 과일 통조림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하와이를 마음껏 주무르던 설탕 재벌 '빅 파이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1875년 하와이 왕국과 미국 간의 호혜 조약 체결 이후, 하와이산 농산물 무관세 혜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p. 246)두며 독점적 지위를 누려 왔다. 그러나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자, 그들만의 특혜였던 관세 면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설탕은 더 이상 '수입품'이 아니게 되어, 관세 면제의 의미가 아예 사라졌기 때문 이다. 게다가 합병 후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내 다른 주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미국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에 비하면 하와이 설탕은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본토로의 운송비 부담도 컸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하와이의 설탕 재벌과 설탕 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상실하고 쇠락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영구히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미국과의 합병이 자신들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하와이는 이제 소수 재벌의 손아귀에 놓인 섬도, 설탕 산업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매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섬이다. 여전히 섬 곳곳에서 과거 성행했던 설탕 산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하와이의 진면목은 풍부한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그리고 따뜻한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p.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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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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