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력주의와 불평등 - 박권일 , 홍세화 , 채효정 , 정용주 , 이유림 , 이경숙 , 김혜진 , 김혜경 , 문종완 , 공현 저자(글), 교육공동체벗 · 2020년
세상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는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과연 그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이 차별의 근거일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의 이면을 다루고 있다.
능력주의의 한 평가 방식이 시험이다. 한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정당한가를 이 책은 묻고 있다. 기존의 생각을 흔드는 관점이라 좋았다.
허구적인 능력주의의 논리
능력주의를 이루고 있는 논리들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 개인에게 속하는 고유한 능력(지능/재능과 노력 또는 성취)이 존재 한다.
• 능력은 시험과 같은 적절한 절차로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할 수(p. 19)있다.
• 현대 사회는 (학교교육 등을 통해) 동등한 출발선, 즉 성장과 능력 발휘의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한다.
• 각자의 능력은 오직 개인의 책임이다.
• 사회의 불평등과 차등은 (대부분)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는 것, 즉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는 정당하고 바람직하다.
이러한 명제들은 능력주의에서는 명백한 진실이거나 상식인 것 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 보면 결코 생각만큼 자명하지 않으며, 현실과 매우 어긋나는 허구적인 명제인 경우도 많다. 능력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부터가 그러하다.
먼저, 게임 캐릭터의 설정 수치마냥 개인에게 고유한 능력이란 존재할 수 없다. 유전적 요소나 소위 타고난 재능을 인정하더라도, 유전자의 요소가 발현되는 것이나 어떠한 능력이 발달하는 것은 성장 환경을 비롯하여 사회 경제•문화적 배경에 크게 좌우된다. 능력을 발휘하는 것 역시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일상적으로도 같은 사람이 컨디션에 따라, 누구와 같이 호흡을 맞추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성과를 보이는 사례들을 접하지 않던가. 또한 무엇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능력'인지 자체가 사회 상황과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도, 능력은 본질적으로 사회 제도(p. 20)와 구조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개념이다. 능력은 환경적 ·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란 환상이다. 그러므로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나 절차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잘 준비된 평가 도구들은 어떤 상황에서의 한정된 영역의 능력은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 사람의 능력을 정확하게 평가한 결과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측정 결과가 촘촘하고 '변별력' 있을수록 더 그렇다. 우리는 인지 능력을 평가하는 지필 시험 성적과 실제 작업 성과 사이에 괴리가 나타나는 사례를 자주 겪지 않던가. 평가의 방식이나 기준 자체에 내재된 차별, 편향이 유불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규모가 큰 회사에서 표준화된 성과 평가에 의해 급여를 정한 경우에도, 여성과 소수 인종은 편견 때문에 백인 남성보다 인상 폭이 더 낮게 정해졌다는 사례도 있다. 우리 사회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있고 능력의 차이도 불평 등도 모두 개인의 책임이라는 믿음은 어떨까? 한국 사회를 비롯해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기회의 평등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교육비의 격차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요소는 물론,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지, 주거 환경이 어떤지 등에 따라 배움의 기회부터 건강까지 격차가 생긴다. 개인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더 높은 성취를 목표(p. 21)로 노력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현실의 격차와 불평등은 능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인맥이나 상속 등의 요소를 더하면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는 과연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일까?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은 보상과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은 정당한가? 비록 우리가 이런 원리에 아주 익숙하긴 하나, 이는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은 아니다. 흔히 나오는 것은 '더 많이 노력한 사람에게 더 많이 보상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는 노력의 과정이 아닌 시험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차별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실상과는 다를뿐더러 앞뒤가 바뀐 논리이기도 하다. 개인이 어떤 노력을 했다고 해서 사회가 반드시 보상을 해 줘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교육을 예로 들면 만일 열심히 공부하며 노력했다면, 그 보상이란 성장하고 변화한 자기 자신 자체이다. 노력하니까 보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서 더 뛰어난 능력을 입증하면 더 많이 보상한다는 시스템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에 맞춰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나 기업 등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따르고 역량을 개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보상을 약속 한다.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우대하는 방식은 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이 직위와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되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가령 중국에서 시작된 과거 제도는 인재를 선발 하여 통치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능력주의의 정당성은 바(p. 22)로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서 나온다. 기업의 경우라면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고 승진시킴으로써 기업의 이익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이 노력한 사람에게 보상함으로써 노력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논리 역시, 다수의 사람들이 경쟁하고 노력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능력주의는 공정성과 개인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평가하고 선발하는 측, 국가나 기업 등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 전체에,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로 바람직한지를 얼마든지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p. 23).
능력의 측정 또는 입증 과정, 시험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단'을 요구 한다. 앞서 말했듯이 능력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개인의 전적으로 고유한 능력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른 차등적 보상을 약속하기 때문에, 개인의 재능이나 잠재적 능력, 최소한 특정 시점의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고 가시화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지능 검사 등의 평가 도구와 함께 발달해 왔다. 능력주의의 신뢰성은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평가 시스템 -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주요한 방식으로는 시험, 특히 인지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지필 시험 -에 의지한다. 개인이 홀로 시험지 앞에 앉아서 답을 적어 내고 채점을 받는 과정은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개인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믿음을 주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시험은 "교육할 의무는 묻지 않고 응시자 개인(p. 26)이 학습한 결과만 따지"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묻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한다. 이 때문에 능력주의를 강화하려고 할수록 시험이라는 방식도 강조되기 쉽다.
시험은 한국 사회의 불투명성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점수화되는 시험, 특히 지필 고사를 거치지 않은 채용은 그 자체로 특혜나 비리가 있었으리라는 의혹을 받곤 한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논거 중 하나는 기간제 교사들 중 일부가 인맥에 의해 채용되었으리라는 의심이었다. 일부 학교에서의 학교생활기록부 기록 과장이나 시험 부정 의혹 사건은 '대입 수능 비중 확대'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의심과 불신 때문에 비리나 주관이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한 방법인 시험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시험이야말로 가장 공정하고 확실하며, '흙수저'인 개인도 노력 하여 승리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각종 통계나 연구가 이를 부정하고 시험 역시 가정 환경이나 배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지적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어쨌건 승리하고 성공하는 개인이 존재하고 자신이 그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0%가 아니라면 실패는 자기 책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에는 학교는 물론 노동 영역에서도 '공정한 시험'에 의한 평가와 선발이 가장 정당한 방법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시(p. 27)험의 기회가 평등을, 성적에 따른 보상이 권리를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 사회에서 득세하고 있는 사고방식을 요약하면 이렇지 않을까. '존엄과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너의 자격과 능력을 증명하라. 되도록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험으로' 이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서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험을 준비하느라 고통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 담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력' 그 과정에서의 고생과 인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개개인에게 노력과 인내를 강조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공정한 능력주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서사를 들여다보면 보상 심리와 인지 부조화적 태도가 곧잘 발견된다. 자신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고생했으니 마땅히 그러한 고통에 충분한 의미가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그런 노력과 고생 없이 결실을 얻(으려하)는 것은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것 이다. 그러나 이처럼 노력과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하는 경우 역시도 능력주의 논리의 자장 아래 있음은 분명하다. 가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쌓은 경험과 경력은 물론,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감수하고 일한 고통과 인내 또한 합당한 대가로 인정받지 못 한다. 오직 시험이라는 능력을 입증하는 과정에 연결된 노력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을 천시하고 지능•학력을 숭배하던 관습 그리고 뿌리 깊은 '자기계발'의 논리와도 연관되어 있을 터이다(p. 28).
교육 문제의 해결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더불어 가야 한다. 불공정에 항의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경성제국대학 입학 시험의 불공정성에 항의 하는 언론 보도가 있었고, 1961년 쿠데타 직후에도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에도 입학 비리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문제는 불공정에 분노하는 걸 넘어 불평등 해소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경과학자이자 의사인 킴블리 노블은 한 가정의 소득이 아이의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며 저소득층 가정에 소득을 더 보장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였다. 경제적 불평등은 삶의 모든 영역에 불평등을 낳는다. 가난 속에서도 능력을 한껏 펼치는 일은 전교 꼴찌가 어느 날 갑자기 서울대 의대에 합격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직장 규모와 학벌, 성별, 지역 등 유무형의 암묵적인 기준으로 층층이 차별화된 임금 제도를 교정해서, 전체 사회에서 노동자의 몫을 높이며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고 평등한 삶을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더불어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여, 혹시 직장을 갖지 않았더라도 인간으로서 죄악은 아니게 해야 한다. 직장을 갖지 않았어도 인간이 할 일은 차고 넘친다. 독립운동가들이 어디 직장을 제대로 가진 적 있었던가. 인간 사회의 변화는 사실상 직장 밖에서 더 많이 만들어져 왔다. 그러려면 우선 단기적으로는 복지의 기반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복지 정책은 개인별 복(p. 61)지보다 소속 직장별 복지에 가까워서 열악한 직장일수록 복지조차 매우 빈곤하다.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고 그들의 휴식과 임신·육아마저 헐값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모든 시민들이 공적 활동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누구나 희망한다면 몇 년쯤 공공 기관에 근무하거나 공적 활동에 참여하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그러면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고 삶에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참여하게 될 것이다. 사회 전체의 공공성도 높일 수 있다. 세금 내고 4~5년에 한 번씩 하는 선거로 끝나는 '민주 공화국'이 아니라, 공적 활동에 직접 참여할 기회가 한평생 동안 얼마 동안은 있는 사회, 그래서 모두가 공적 시민이 되고, 공적 시민으로서 기본금과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국가를 상상해 본다. 당장 실현 될 리는 없으나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만약 이런 상상이 작동하는 사회라면, 듀이와 파커 파머가 강조했듯이 학교교육은 더욱 중요한 공적 사회 기구가 되어야 한다. 학교교육은 시민교육을 강화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비판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고 직접 시민으로서 적절한 제도적 제안 과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교육 기관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p. 62).
결론적으로 아시아의 시험 문화는 빠른 산업화 전략에 따른 엘리트의 양성, 민주주의에 대한 희생 속에서, 근대화가 전근대적 신분의 해체가 아니라 '나도 노력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평등'으로 변형되면서 강력해졌다. 따라서 아시아의 시험 문화는 교육 현상이라기보다는 정치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시험 문화는 사회 상황이 왜곡되면서 형성된 지위 상승의 평등주의이고, 사회 진화론적 관점에서 개인적 적응과 지위 상승 전략을 추구하는 연대 없는 평등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이들 나라(p. 78)에서 진행된 불균등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교육을 통한 지위 경쟁의 행위 주체는 개인이 아닌 가족이 되었다. 그래서 물질적 부와 사회적 지위 획득을 둘러싼 격렬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가족 수준의 자원 결속과 지원, 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구조화된 한국 등의 나라에서는 특별히 '헬리콥터 맘'과 같은 현상으로 대표되는 온 가족이 동원되는 입시 문화가 나타난다. 문제는 이처럼 가족이 동원되는 평가 집착적 시험 문화가 사회적으로 보다 좋은 삶을 위한 연대를 해치고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lism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시아의 시험 문화를 특징짓는 가족 교육열이며, 지위 상승을 향한 열병이 국가 차원의 종교 의식처럼 치러지는 이유이다. 요컨대, 신분제적인 직업 위계와 불평등, 능력주의적 교육과 시험이 시험 문화를 초래하는데, 이러한 시험 문화는 오히려 개인의 능력이 아닌 가족의 배경과 자원이 동원되는 양상을 띠게 되며 능력주의의 발현을 저해한다(p. 79).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학벌이 전근대적이고 봉건주의적인 문벌 시스템과 유사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학벌과 패거리 문화를 사회적 합리화와 합리적 개인주의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연고주(p. 107)의, 정실주의, 파벌주의에 대한 대응 논리로 개인주의, 합리주의, 능력주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동문'으로서의 '학연'이 다 '학벌'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IMF 사태 이후의 한국 사회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모든 공동체적 관계와 사적 친분과 연결을 통한 사회 안전망이 다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개인주의가 새로운 사회 윤리로 구축되고 있던 시기였다. 가족, 친구, 이웃 관계가 다 무너지고, 개인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가 왔음에도 학벌없는사회는 '학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말하곤 했다. 우리가 꿈꾼 것은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건강한 시민사회'였고, 학벌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접받는 것이 공평하다 생각했다. 이런 화법은 결과적으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분명 있다. 학벌주의는 능력주의에 의해 패퇴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에 의해 무너졌어야 했다. 능력주의는 민주교육•평등교육의 이념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었음에도, 능력주의가 학벌주의의 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점은 우리의 한계였고 오류였다. 당시에도 '스펙'이라고 불리는 사회 현상은 문제가 되고 있었고, 성적 경쟁이 스펙 경쟁으로 변질된 것을 비판했지만, 그것이 총체적인 사회 통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위력을 발휘하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2016년 해산까지 학벌없는사회의 경험은 민주화 이후 한국(p. 108)사회의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재편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투쟁과 패배, 한계와 오류의 경험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p. 109).
현재의 계급 위치를 지키려면 결국 지금과 같은 불평등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에겐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가 희망이 되지만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에겐 급격한 변화는 불안의 요인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시장 질서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 위에서 일정한 기득권과 지분을 갖고 있는 '범민주 시민'이라 불리는 계급이 현재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가장 강력히 갈망하는 것이며, 그 임무를 수행할 정권을 중심으로 가족주의적으로 결속하여 체제 변화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가 전적으로 자신의 실력 덕분이라고 믿으며, 이 믿음을 다른 계급들에게 주입시킨다. 이 믿음은 기득권을 세습한 보수 기득권층보다 자력(?)으로 취득한 자유주의 진보 기득권층에서 더 강하다. 능력주의는 고소득 전문직의 '강남 좌파'나 능력 있는 '민주 시민'들이 추종하는 자기 신앙이 된다. 이들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 등에는 민감성을 보이지만 능력 차별과 계급 차별은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회피한다. 능력주의 신화가 계급 차별을 가려 주기 때(p. 112)문이다. 능력주의는 상층부의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은 완화한다. 하지만 계급의 진입 장벽은 더 높아진다. 지배자들이 평등을 깨트리고 서열화를 추구하는 이유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데 서열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평등은 인민을 다수로서 단결하게 한다. 서열화는 피지배 계급 서로가 서로를 착 취하도록 만든다. 자기 위의 사람은 복종하고 동경하며, 자기 아래의 사람에 대해서는 군림하고 무시한다. 위계는 지배자로부터 받은 차별과 멸시를 힘을 합쳐 되갚는 대신 아래로 향하도록 만든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너보다는 낫다는 것이 사회적 심리의 기저를 이룰 때 지배자들은 손쉽게 전체를 다스릴 수 있다. 지배자에게 두려운 것은 사다리를 오르려는 상승의 욕망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평평해지려는 사람들이다. 저들보다 못하지만 이들보다는 낫다는 것은 중간 계급의 심리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중간 계급에 대해 '상류층에 대해서는 도덕적 우월감과 문화적 열등감을 가치고 하층 계급에 대해서는 도덕적 열등감과 문화적 우월감을 갖는 집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중간 계급에게 이 쌍방의 열등감으로부터의 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지적 우월감'이다. 지식 자본은 그 누구보다 중간 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자본이다(p. 113).
'경쟁력'이라는 시장 논리로 대학을 도태시키고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성'의 논리로 대학을 모두의 것으로 탈환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지식과 금융의 결탁을 끊어 내고 학벌의 자본화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벌의 가치를 무가치화하고 반대로 학벌주의/능력주의가 무가치화한 것들의 가치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 노동에 대한 가치와 능력에 대한 가치, 양자의 교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와 재협약이 필요 하다. 학벌이 개인의 자산이 아니게 하려면 대학교육 공공화가 필수적이다. 대학 등록금 무상화는 대학 공공화를 위한 필수 정책이다. 교육에서 수혜자 비용 부담 원칙은 교육을 투자로 보는 관점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막대한 등록금과 교육비를 개인이 부담 하는 제도하에서는 개인들에게 공공의 책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기 어렵다. '당신들을 교육시키는 데 드는 돈은 국민이 부담했다. 그러(p. 126)니 국민을 위해 일하라'라는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에 요구 되는 비용과 노력의 값이 커질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진입 장벽도 그 만큼 높아진다. 비싼 교육 비용은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 기회를 차단하고 계급 간 불평등을 초래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이것은 원한다면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을 위배하는 것이다. 독일은 전국적 위헌 소송으로 대학 등록금을 무상화했다. 반값 등록금이나 학자금 대출, 소득 분위에 따른 차등적 국가 장학금 제도가 아니라, 대학 무상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대학 등록금 무상화는 빈자를 위한 복지 정책을 넘어서는 계급 간의 정치 협약이다(p. 127).
2020년 '인국공 사태'도 서울교통공사 사례와 유사한데, 하나 차이가 있다면 주로 정규직을 목표 삼은 취업 준비생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공격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주장도 서울교통공사 사태 당시 반발했던 정규직들의 주장과 판박이처럼 똑같다. '깜냥도 안 되는 비정규직이 감히 우리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인천국제공항 보안 요원은 공사 공채 시험을 통해 선발 하는 직원과 직무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며 기존 정규직의 몫을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취준생들은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들고 일어났다. 무엇이 그들의 '역린'을 건드린 것일까. 그 멘탈리티를 투명하게 드러낸 글이 있다(p. 139).
연대숲 #68384번째 외침: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인재를 찾는가?
- 취업과 엘리트주의의 담론에 대한 견해
이번 인국공 사태와 소위 '지방 인재'의 취업 할당 법안 발의 이후로, 대한민국은 노동의 가치, 경쟁의 가치 등을 놓고 의견 대립을 보이는 듯싶다. 그러나 그 대립의 과정에서 어이없는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긴 제보를 적어 보려 한다. 그 어이없는 담론이란, 기업이 '학벌과 무관한' 실무 능력을 중시해 개인의 고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주장이다. 그러나 개인의 실무 능력 및 자질과 학벌이 정말 무관한가? 바로 그 학벌을 얻어 내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했으며, 그 이상으로 특출나게 '뛰어나야' 했다. 누가 인재인가? 필자의 주변에는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1년을 꼬박, 자는 시간만 빼고 20시간가량을 서서 살았던 누나가 있다. 지방에서 3수를 해 입학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누구보다 유식한 형도 있다. 가장 힘든 전공 과목과 복수 전공까지 챙기면서도 취미로 작가 수준의 유화를 그리던 누나도 있다. 이들의 노력에 대해 보상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들의 역량을 보자. 집중력, 끈기, 저변 넓은 배경지식, 다재다능함. 정말 기업이 요구하는 능력과 학벌이 무관한가? 필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뛰어난 우리의 역량을 발굴하고 증명했기에 소위 학벌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입을 위해 경쟁하던 전체 인구의(p. 140) 상위 5% 안에 우리가 있었던 것은, 그저 머리 좀 좋아서가 아니다. 총체적인 역량의 우수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트가 스스로를 엘리트라 칭하는 것에 거리낄 이유가 뭐 있을까. 우리가 뛰어나다는 사실은, 우리와 함께 경쟁했던 이 사회의 그 누구도, 태연히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현 정부는 어디에서 지방 인재를 찾는가. 어디에서 여성 인재를 찾는가. 지방에서 3수 해서 기어코 꿈에 한 발짝 다가간 그 형이 진짜 지방 인재다. 사람 몸에 저 정도 재능이 다 들어가나 싶은 그 누나가 진짜 여성 인재다. 현 정부의 고질적인 병폐인 포퓰리즘과 대중주의는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대학, 시민단체 등에서 소위 인재를 발굴하겠다는 모순을 야기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학우들은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제쳐 놓고 인재를 논할 수 없다. 이는 오만한 말이지만 동시에 사실이다.
아직 직무에서 역량을 발휘해 보지도 못한 일개 취업 준비생이 지닌 자의식치고는 지나치게 비대하다. 그 자의식은 오직 대학 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소위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저 글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개인의 실무 능력과 자질과 학벌이 정말 무관한가?"라고 물은 다음 어떤 논증도 없이 '나는 특출(p. 141) 나게 뛰어나다'라는 선언으로 비약하는 부분이다. 근거처럼 제시한 게 "집중력, 끈기, 저변 넓은 배경지식, 다재다능함" 인데, 정작 글쓴 이는 이것이 왜 학벌 좋은 사람만의 자질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논리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 또는 '화용론적 모순'이라 부른다. 화자의 주장과 행동이 상충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저 횡설수설하는 주장은 글쓴이가 사실관계나 추상적 개념을 분석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 본인이 원하는 업무를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p. 142).
시험은 능력을 제대로 검증해 주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한 번의 시험이 지속적인 차별을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 코레일에서 매표 업무를 하는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 노동자들과 동일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 역무원의 차별은 지속된다. 설령 정규직의 노동 조건이 더 나은 것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는 것은 정당한가. 게다가 근속이 길어질수록 격차는 더 확대되고 있다. 입직 통로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평생에 걸쳐 격차가 벌어지는 이 현실은 과연 정당한가. 이러한 격차의 확대를 설명할 정당한 근거는 과연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 능력주의는 답을 할 수 없다. 능력주의의 근거가 되는 시험 자체의 공정성에도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많은 노동자들은 이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생각 한다. 흔히 말하는 '수저론'은 젊은 노동자들이 능력주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점차로 공개 채용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사회가 더 불안정해질수록 안정적인 노동 조건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시험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안정적으로 시험공부를 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과 그런 조건이 되지 않는(p. 174) 사람들 간의 경쟁이 과연 공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시험'을 매개로 한 능력주의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에서의 능력주의는 단지 '시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직무급제'라는 형태로 이어진다. 그 사람이 어떤 직무에서 일을 하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해 주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능력주의 요소가 있다. 병원을 예로 들면 의사와 간호사, 의료 인력과 비의료 인력 사이에 격차가 있고 이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승진과 승급, 임금 체계를 달리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금 직무급제는 여기에 더해 직무에 따라 고용 형태를 세분화하고 위계를 만든다. 어떤 직무는 시험을 통해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그보다 하위 위계의 직무는 면접을 통해 무기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등 시험과 직무와 고용 형태를 연계 하면 그러한 능력주의 구조는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된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이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고, 노동 조건에서 차별을 당한다. 이런 경우를 차별이라고 말하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면 문제가 되지만, 직무에 따른 차별은 잘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여성이 주로 하는 직종인 돌봄 노동은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잘 인정받지 못한다. 이때 돌봄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가 받는 차별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가 낮은 일을 하니까 받는 대우로 간주된다. 즉 차별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차별이 마치 '차이'인 것처(p. 175)럼 인식되고, 차별의 책임도 개인에게 전가된다. '네가 능력을 키워서 더 좋은 자리에 가면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p. 1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