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20(화)
 
  • 여자를 돕는 여자들 - 이혜미 저자(글), 부키 ·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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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다. 남성으로서 여성의 삶과 생각에 대한 글을 가끔 읽는다. 여성이기에 당하는 어려움도 있고, 부당함도 있다. 그럼에도 묵묵히 자기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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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부당한 공격, 혹은 다수의 공격을 받았을 때 누구나 위축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을 이겨내고 돌파하는 비법이 있을까요.

A 이렇게 말해도 되나요? 저는 남이 헛소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에요.(웃음) '좀 헛소리인데?' 싶으면 내가 왜 이렇게 공격을 받는지 고민하지 않아요.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건 내 손해니까요(p. 26).

 

Q 이공계 여성 연구자들은 '랩실' 이라고 불리는 실험실에 소속되어 연구를 하죠. 주로 남성 동료들과 함께하는데, 최근엔 페미니즘에 대해 격렬한 저항이 일기도 해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A 랩이라는 공간 자체가 폐쇄적이고 위계적이에요. 교수도 대부분 남성이고 연차별로 위계 질서가 짜여요. 예전에는 여성 연구자에게 '여자라서'라는 딱지를 붙여서 알게 모르게 배제했어(p. 82)요. 지금은 그에 더해 '페미(페미니스트)냐"라고 묻는다는 거예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이공계 여학생들에게는 더 숨 막히는 상황이 되는 거죠.

Q 진로와 생계가 달린 일인데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잖아요.

A 차별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똑똑한 이공계 여성이 흔히 취하는 선택 중 하나가 '내가 더 잘하면 되겠지'라고 마음먹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그걸로 많이 돌파해 왔을 테니까요. 그런데 저는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동료를 찾아 뭉치는 것으로 전환하는 방식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봐요. 목소리가 덩어리지면 권력이 생겨요. 하지만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는 개인을 고립시켜요.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 될 문제로 만들어 버리고요(p. 83).

 

Q 한동안 소식을 거의 못 듣다가 2021년 8월에 김 코치의 기사를 마주치게 됐어요.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민사소송 확정 판결이 났죠.

A 2018년 6월에 민사소송 고소장을 접수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는 형사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2018년 8월)이 나기 전이었고요. 민사 접수 때도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주위에서 많이 말렸어요. 이 어려운 싸움을 또 해야 되나 싶었어요.

Q 그렇기에 많은 소송이 합의로 끝나죠.

A 합의라는 게 너무 자존심 상하는 거예요. '내가 피해자인데 왜 합의를 해야 되지? 난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 합의라고 하면 형식적인 용서를 표면에 깔고 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조차 표현하기 싫었어요. 나를 성폭행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피해자들을 그렇게 합의로 자꾸 내모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니 민사 판결(p. 101)이 없다는 게 컸어요.

Q 하! 선례가 없어서였군요.

A 어떤 배상도 충분할 순 없겠지만, 성범죄 피해자들은 '이 정도의 손해배상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하는 판례가 없어요. 왜 없느냐? 다 합의로 끝나기 때문이에요. 민사소송 또한 이기기 쉽지 않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시간과 비용, 인내하고 감당해야 되는 것 등을 따졌을 때 합의를 하는 것이 피해자를 위한 것이 되는 게 현실이죠.

Q 원치 않는 합의가 피해자를 위한 것이라니...

A 그러면 '도대체 이건 왜 안 바뀌는 거지?'를 차근 차근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소송을 아무도 안 해서 판례가 없기 때문이에요. 다들 주위에서 힘들다고 소송을 만류해서 판결문이 없으니까요. '이것도 또 내가 해야 되나. 이 힘든 싸움을 또 해야 되나' 엄청 고민했어요. 게다가 민사소송으로 대법원까지 갔을 때 제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천 만 원이 넘는 거예요. 손해배상을 받아도 부족한 판에(p. 102).

Q 그럼에도 고민 끝에 소송에 돌입한 거네요.

A 판례가 있으면 다른 피해자들이 같은 일을 겪을 때 소송 기간이 줄어들 거잖아요. 비용도 줄일 수 있고. 모든 걸 손해 보고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내가 하는 게 맞다는 각오를 하고서 시작하게 됐던 거죠.

Q '내가'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냈군요.

A 형사소송을 할 때 누가 이렇게 말했어요. "그걸 꼭 네가 해야 돼?" 그때 제가 한 생각은요. 예전에 다른 누군가가 했으면 나도 안 해도 됐을 일이란 거예요. 그런데 그러지 않아서 결국 제가 하게 됐죠. 그러면 내가 하지 않으면요? 또 다른 누군가가 하고 있겠죠. 내가 나서지도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용기 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없잖아요.

Q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요?

A 사건만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손발에 힘이 다 빠져요. 일상생활을 잘 하다가도 사건과 관련한 연락을 받으면 몸에서 막 반응을 하는 거예(p. 103)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소송을 포기할까도 고민했는데, 형사소송부터 지금까지 저를 도와준 분들이 있잖아요. 그분들도 어렵고 힘든 삶 을 살면서 나를 도와줬는데, 내가 지금 여기서 힘들다고 그만두면 그 사람들의 노력이나 고생이 다 소용없이 끝나는 건가 싶더라고요. 내가 하는 결정은 나 혼자, 나만 고려해서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론은 보자. 그래야 다른 누군가가 나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갈 수 있다'라고 결정을 내렸죠(p. 104).

 

Q 마지막으로 성폭력 피해자 혹은 상처를 극복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내려는 여성들을 향해 한마디 해 주세요.

A 지금 용기를 낼까 말까 망설이거나, 희망을 가지(p. 110)고 싶은데 차마 두려워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내 행복과 내 미래를 위해서'라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용기와 희망을 내는 것이 결코 두렵지만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즐겁고 설레는 일이 될 수도 있어요.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p. 111).

 

Q 환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칸트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아야 한다" 라는 세계시민적 태도를 '환대'라고 했대요.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것, 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덕목일까요?

A 코넬리우스 플랜팅가라는 미국의 신학자는 '환대'를 "타인에게 우리 안에 머물 공간을 마련해 주고, 그 공간에서 그 사람이 꽃 피우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렸어요. 꽃 피우게 한다는 건 그 사람의 잠재되어 있던 정체성이 드러나고 발현되면서, 더 안전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도록 공간을 마련하는 거라고 봐요. 우리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잖아요(p. 189).

 

Q 그런 대표님도 조직 내에서 보이지 않는 촘촘한 차별을 당한 적이 있나요?

A 호주에서 일할 때 제가 담당한 브랜드의 포장이 잘못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동료 중 누군가가 "한승희 쟤가 잘못했어"라고 말해서 덤터기를 썼어요. 물론 나중에 제 잘못이 아닌 것이 밝혀졌지만요. 덤터기를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제가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동료 간 네트워크가 많았다면 그 상황에서 누군가는 '승희 잘못인지 한번 가려 보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억울한 것도 차별이라면 차별이죠(p. 238).

 

셀프 프로모션은 본인의 몫이에요

Q 직장에서 묵묵하게 열심히 일하는 여성을 많이 봐요. 그런데도 자신의 기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요.

A 공부하는 걸로 예를 들면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열심히'만으로는 안 되죠. 시험을 잘 봐서 성적이 잘 나와야 되잖아요.

Q 공감되는 비유예요.

A 일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하는데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느냐 아니면 헛된 일을 하고 있느냐를 먼저 봐야 되고요. 내가 잘한 것을 성과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해요. 보통은 '이거 얘기해서 뭐 하나' '결과 나오면 윗사람이 다 알아주겠지' 하는(p. 242) 경우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사람 수가 적은 조직이라면 일 잘하고 성과 나오는 사람이 눈에 확 띄지만, 경쟁이 치열하고 큰 조직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해요. 내가 한 일이 회사에 어떻게 기여했느냐를 알리는 것은 본인의 몫이에요.

Q 하지만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는 걸요.

다들 부담스러워하죠. '자기만 일하나, 다들 똑같이 일하는데 왜 저래?' '너무 튄다' '이기적이다' 이렇게 보는 시선이 분명 있거든요. 그런데 셀프 프로모션은 '나! 나! 나! 이거 한승희가 했어'를 알리기 위함이 아니에요. '내가 한 일이 이런 결과를 냈고, 회사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라는 것을 조리 있게 어필하는 일이에요. 개인적 측면에서는 내가 한 일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고, 나아가 팀원도 제대로 인정을 받도록 돕는 일이죠. 그리고 좋은 성과가 난 일이 다른 부서에도 도움이 될 수 있잖아요.

Q 셀프 프로모션이 나를 알리는 이기적 수단이 아니라 회사의 경험을 축적하는 '공적인 프로세스'라는 거군요.

A 셀프 프로모션은 중요한 리더십 스킬 중 하나예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팀과 조직이 공정한 평가를 받게 하는 일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중요한 게 '청중'이에요. 알릴 콘텐츠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때 중요한 게 네트워킹이에요.

Q 쌓아 온 네트워크가 여기서 위력을 발휘하네요.

A "내가 하면 네트워크, 남이 하면 사내 정치"라고 얘기를 많이 해요. 어떤 사람이 네트워킹 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 너무 정치적이야'라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거죠. 현실에서 네트워크는 흔히 나쁘고 부정적인 모습이에요. 남을 험담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내 이익을 찾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잖아요. 하지만 좋은 정치도 분명 존재합니다. 회사에서 나 혼자, 내 부서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최대한 다른 부서와 협업하고 도움을 받아야죠. 다른 부서도 바빠 죽겠는데 "내거 빨리 껴서 많이 해 주세요"라며 도움을 받으려면 네트워킹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일을 하기 위한 자원을 끌어오는 것 역시 정치인 거죠(p. 244).

 

일과 커리어, 직장은 나의 도구일 뿐이에요

Q '커리어 만렙' 으로서 여성들이 경력 개발을 할 때 꼭 신경 써야 할 부분을 조언하자면요?

A 일에 대해 얘기할 때 역량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요. '하드 스킬'과 '소프트 스킬'이요. 하드 스킬은 업무와 관련한 기능적 역량을 의미하는데요. 이건 어떤 업무를 맡은 지 1년만 되면 어느 정도 체득해요. 인력을 관리하고 조직을 구성하고 네트(p. 250)워킹을 하고 셀프 프로모션을 하는 것은 모두 소프트 스킬에 포함돼요. 그런데 소프트 스킬은 계발하는 데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려요. 교과서에 나온 대로 되지 않거든요. 하지만 어떤 조직을 가더라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더욱 신경 썼으면 좋겠어요.

Q '커리어' 라는 분야를 커리어로 둔 삶은 어떤 걸까요. 한 대표님께 커리어와 일은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합니다.

A 처음엔 회사에서 일하고 성장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욕심이 났어요. 커리어가 내 모든 것이었죠. 그런데 10년 차쯤 됐을까. 일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사건이 있었어요. 제 친구가 난소암에 걸렸어요. 친구는 평소 일로 인한 스트레스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어린 나이에 깨달았죠. 일, 일, 일만 해서는 안 되겠다고요. 그 이후로 저는 일, 커리어, 직장은 내게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지, 일이 더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또 미국에서 일할 때 구조조정을 정말 많이 봤는데요. 한눈팔지 않고 20~25년 동안 회사만 바라보던 사람이 박스를 싸서 사무실을 나가는 모습을 본 거예요. 회사에 모든 걸 바치면 인생이 같이(p. 251)무너져요. 나 자신이 아니라 어느 회사의 누구로 존재한 것이니까요. 일 잘하는 것 중요하고, 성과 내는 것도 중요한데요. 목숨 걸지 않아야 자신감이 나옵니다. 본 모습을 잃지 마세요.

Q 마지막으로 직장에서 분투하는 여성들 혹은 지금 커리어를 막 시작하는 여성들을 위해 한마디 해 주세요.

A 제 멘토가 해 준 말인데요. "희생자가 되지 말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돼라"라는 거예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피해자의 상황에 놓일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상황을 바꾸기 위한 첫 스타트를 끊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에요. '나는 피해자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악순환 속에서 에너지가 계속 떨어져요. 악순환에서 벗어나서 다른 시각으로 지금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건 무엇일지 적극적으로 찾으세요. 해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Q 힘을 주어 '일 잘하는 법'에 대해 말하던 한승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린 순간이 있었다. 커리어를 업으로 둔 이에게 '일'은 어떤 의미냐고 물은 질문에서였다. 명쾌한 커리어 해법을 말하던 그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목숨 걸지 말아라." 무엇을 잘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어디서든 통용된다. 그것이 일이든, 사랑이든, 관계든, 스스로 욕망하는 그 무엇이라면(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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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성과 다른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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