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다음 - 희정 저자(글), 한겨레출판사 · 2025년
흥미롭게 읽었다.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죽음 이후에 여러 단계의 장례 절차가 있다.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라 관심있게 읽었다.
좋은 죽음을 원한다. 하지만 어떤 죽음이 올지 모른다. 불확실하기에 바람은 더 간절하다. 그런데 무엇을 좋을 죽음이라 할 수 있을까. 2020년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들이 바라는 죽음은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신체적•정신적으로 고통이 없는, 스스로 정리하는, 가족과 함께 맞이하는 죽음이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 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바라지(p. 29) 않는 죽음은 이런 것이겠다. 외로운 죽음, 비참한 죽음, 갑작스러운 죽음. 이 세 종류를 피한 죽음을 두고 나이가 제법 있는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부른다. 젊은 사람들에겐 여기에 존엄사라는 상상력이 더해진다.
호상(好喪). 천수를 누린 복된 죽음. 살 만큼 살다가 때가 되어 잠을 자듯 맞는 죽음을 뜻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수를 누린 이라도, 그의 장례에 가서 함부로 '호상'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다. 고인 본인에게 좋은 죽음(호상)은 있을지라도, 남겨진 이들에게 좋은 죽음은 없기 때문이다. 곁에서 지켜보는 죽음은 늘 갑작스럽다. 물론 현실은 이리 애틋하지만은 않다. 내가 한때 머물던 지역엔 유명한 요양병원이 있었다. 입소 예약이 줄을 이었다. 시설이나 치료 효과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 반대다. 그 병원에 들어가면 노인들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증명이라도 하듯 병상이 빠르게 비었다. '회전율'이 이토록 좋은데도 예약 대기자가 늘 많아 병실이 금세 채워진다고 했다. 요양병원 입원 비용은 월 200만 원 선, 간병인 하루 비용은 10만 원을 웃돈다. 죽으면 끝이라 하지만, 빚은 대를 이어 남는다. 현실은 현실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병원이나 시설에서 죽고, 그건 생의 마지막 까지 돈을 쓰다가 간다는 말이기도 했다(p. 30).
비석과 마을
세상의 잔혹함은 곳곳에 있다. 부산의 비석마을도 그중 하나다. 지금은 비석문화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 이야기를 하려면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개항 직후 조선에 온 일본인들은 가까운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이주 규모는 더 커졌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이주 권장 정책이 있었다. 화장이 주된 장법인 나라 사람들인지라 일본인들만이 사용하던 화장터도 세워졌다. 처음에는 민간업자들이 작게 운영하던 것을 총독부가 주도해 최신 설비를 갖춘 화장장과 유골 무덤으로 조성한 것은 1928년. 임시 거주가 아니라 대를 이어 일본인들을 조선에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렇게 공동묘지와 화장터가 부산 서구 아미동 일대에 세워진다. 아미동은 지대가 높은 언덕에 자리한 마을인데, 공동묘지가 이토록 고지대에 세워진 까닭은 거주민 조선인들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사람들의 주 거주지인 부두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공동묘지가 밀려 올라간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물러가면서 일본인 묘지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묘를 쓸 돈이 없는 사람들이 몰래 시신을 놓고 가는 일이 적지 않았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에 피란민들이 몰린다. 당시 47만여 명이던 인구가 순식간에 84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곳곳에 피란민들의 임(p. 214)시 거주지가 생기자 부산시는 1953년 도시 정비 계획을 앞세워 빈민촌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부두 주변에 거주했던 이주민들은 터전을 잃고 언덕을 오른다. 오르고 올라 도착한 곳이 아미동 공동묘지 터다.
"피란민들이 전부 그쪽으로 와서 기거를 하고 있으니까 시에서 천막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쪼그마한 천막이 아니고 아주 큰 거를 갖다가 옛날에 거기가 공동묘지 산등성이었잖아요. 근데 글로 올라가서 인제 살아라. 이 천막 세 개를 주고 살아라 하니까 이 사람들이 참 기구하잖아요. 공동묘지에 가서 이거 천막을 그냥 치고 살으라 하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인 무덤 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화강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무덤은 단단한 벽과 바닥이 되어주었고, 유골함이 자리했던 광중은 아궁이 역할을 했다. 비석이 지천에 널려 있어 자재 걱정이 없었다. 다만 죄책감과 두려움이 따라올 뿐이었다. 비석의 이름을 페인트로 덧칠해 그 흔적을 지워보았지만, 그 이후 수십 년간 아미동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 귀신과 도깨비불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죽은 이의 자리에 산 사람의 자리를 만든, 불편하고도 체념적인 공존이 귀신 이야기가 되어 돌아왔다. 대를 잇는 빈곤이야말로 사건•사고를 불러오기 좋은 조건이었는데도, 어떤 집에 우환이 닥치면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가 어느 무덤 자리였는지를 떠올렸다. 1990년대, 아미동 주민들은 남은 묘석들을 모아 5층 석탑을 세우고 천도재를 지낸다. 이후로 사고가 줄었다고 했다. 실제 줄어든 것은 마을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일 거라 짐작해본다.
죽은 이의 자리 위에 산 사람 집터를 닦는 일이 흔하진 않지만,(p. 215)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이와 산 사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작고한 이어령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리컵 안의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확히는, 이어령 선생에게 마지막 수업을 듣겠다고 찾아간 김지수 작가의 입을 빌려 정리 된 문장이다). 선생은 빈 곳을 모른 채 유리컵에 물을 가득 채우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범인들을 안타까워했다. 그렇지만 사람은 유리컵이 넘치도록 찰랑이는 물 때문에 살아간다. 찰랑대는 마음이 없다면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생존을 도모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물은 곧잘 넘쳐흘러, 비석마을은 숱한 재개발을 겪으며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비석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나이 든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 한 집 걸러 빈집이다. 귀신은 그들을 그곳에 살게 했지만, 사람은 그들을 그 곳에 살 수 없게 했다. 물은 언제나 가득 차 찰랑인다. 한편으론, 애초 물이 가득 찬 컵 같은 것은 없다. 가득 채워진 것처럼 보이는 물조차 그 안에서 분자들은 저마다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 틈 사이로 도깨비불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광중에 아궁이를 짓고 그 아궁이에 물 한 바가지 올려 조왕신에게 비는 기도가, 비석으로 5층 석탑을 쌓아 올려 한숨 돌리던 얕은 위안이 담긴다. 그저 공존할 뿐이다(p. 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