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고-대항해 시대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저/육혜원 역 | 이화북스 | 2025년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지만, 죽는 날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었다. 이미 당시 과학자들은 지구의 크기와 아시아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발견한 땅이 아시아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콜럼버스는 그런 과학적 지적을 외면한 채 “지구는 서양배 모양”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한 사람만은 그 땅의 진정한 의미를 꿰뚫어보았다. 피렌체 출신의 항해자이자 관찰자, 아메리고 베스푸치. 그는 여러 차례 탐험 끝에, “이곳은 아시아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세계다”라는 역사적 인식을 기록했다. 유럽의 지성, 독일 최고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특유의 치밀한 관찰력으로 탐정과도 같이 역사의 진실을 밝혀낸다. 역사는 때로 사소한 착오 하나가 빚어낸 엄청난 아이러니를 남긴다. 15세기 말, 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대신 뒤늦게 등장한 피렌체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이 어쩌다 두 대륙의 이름으로 굳어졌을까? 츠바이크는 아메리고를 둘러싼 오해와 논쟁의 역사를 추적하며, 작은 편지 한 장과 지도 한 장에 깃든 우연이 어떻게 수세기 동안 굳어진 신대륙 명명의 비밀이 되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예스24
우연이 얽혀서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것이 세상살이며 인생이라는 것을 보게 됐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이 또한 헛된 일이다.
두 번째 장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도 이미 알고 있었던 세계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세계를 더 넓힌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에게 이를 처음으로 명확히 인식시켜 준 인물은 아메리코 베스푸티오Americo Vesputio였다고 말이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그가 새로운 지역의 발견자라고 확실히 공인된다. 그리고 일곱 번째 장에 이르러 갑자기 앞으로 수백 년 동안 결정적(p. 87)인 영향을 미칠 제안이 등장한다. 발트제 뮐러는 지구의 네 번째 대륙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제안을 덧붙인다. “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아메리쿠스Americus 이므로, 이제부터는 그 땅을 아메리쿠스의 땅 Earth of America 또는 아메리카 America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세 줄의 글이 사실상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출생 신고서나 다름없었다. 소책자의 종이 위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이 활자화되어 인쇄되었다. 만약 콜럼버스가 산타마리아 Santa Maria 호의 갑판 위에서 과나하니 해안이 멀리 반짝이는 것을 보았던 1492년 10월 12일을 신대륙의 생일이라고 부른다면, 이 『지리학 입문』이 출판사를 떠난 1507년 4월 25일을 우리는 신대륙의 세례 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27세의 인문주의자가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소도시에서 내뱉은 이 말은 그저 작은 제안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제안이 가진 매력에 도취되어 그것을 다시 한번 더욱 절실한 어조로 되풀이한다. 아홉 번째 장에서 발트제뮐러는 한 단락 전체를 할애하여 자신의 제안을 부연 설명한다(p. 88). "오늘날 지구의 세 부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는 이미 완전히 탐구되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네 번째 대륙을 발견하였다. 유럽과 아시아도 여자 이름이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을 총명한 사람 아메리고가 발견한 아메리고의 땅, 아메리카라고 부른다고 해서 반대할 이유는 없다.” 동시에 발트제뮐러는 '아메리카'라는 단어를 단락의 여백에도 인쇄했고, 이 책에 첨부된 세계 지도에도 적어 넣었다. 그 순간 이후로 유한한 존재였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 위에 불멸의 후광을 쓰게 된 것이다. 아메리카라는 땅은 이때부터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고, 영원히 그렇게 불릴 운명을 맞았다(p. 89).
이 이름을 가장 열심히 따랐던 사람들은 지도 제작자들이었다. 곧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모든 지구의와 모든 판화 그리고 모든 책과 모든 지도에 등장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지도만이 예외였다. 그것은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발트제뮐러의 지도가 나온 지 불과 6년 뒤인 1513년에 출간된 지도였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이름 사용을 거부한 고집스러운 지도 제작자는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그는 바로 그 이름을 처음 제안했던 발트제뮐러 자신이었다. 그는 괴테의 시에 등장하는 마술사의 제자처럼, 마른 빗자루에 생명을 불어(p. 99) 넣었다가 자신이 불러낸 존재를 잠재울 마법의 주문을 알지 못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누군가의 지적을 받고 콜럼버스에게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발트제뮐러가 왜 자신의 손으로 붙인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다시 없애려 했는지,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정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진실이 한 번 전설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일은 거의 없다. 말이란 세상에 한 번 퍼져나가면 자신만의 힘을 얻어,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유롭고 독립적으 로 존재를 이어가기 마련이다. 최초로 '아메리카'라는 말을 입에 올렸던 젊은 지리학자는 후회하며 그 말을 거둬들이려 했으나, 이미 헛된 일이었다. 그 말은 이미 허공을 가르며 책과 책 사이, 활자와 활자 사이, 입과 입 사이를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불멸의 존재가 되어 끊임없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현실이자 동시에 하나의 이념이 되었다(p. 100).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치열하게 진행된 논쟁에서 제기된 증거와 반론들을 일일이 제시한다면, 그 분량 만으로도 책 한 권이 될 정도다. 간단히 말하자면, 학자들의 절반 이상은 첫 번째 항해가 허구라고 주장했다. 반면 베스푸치를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나머지 학자들은 이 기회를 빌려 베스푸치가 플로리다 혹은 아마존강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스푸치의 엄청난 명성이 주로 이 첫 번째 항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문(p. 124)헌학적 증거로 그 기반을 흔드는 순간 오류와 우연,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남을 따라 한 행위들로 쌓아 올린 바벨탑은 흔들리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인물은 에레라Herrera였다. 그는 1601년 자신의 저서 『서인도제도의 역사』에서 일격을 가했다. 스페인의 역사가가 증거를 찾기 위(p. 125)해 오랜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당시 아직 출간 되지 않은 라스 카사스의 원고를 열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레라는 라스 카사스가 제시한 근거들을 토대로 「네번의 항해」에 기록된 날짜가 실제와 다르며, 베스푸치가 오헤다와 함께 항해에 나선 시점은 1497년이 아니라 1499년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피고의 변론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로부터 아메리카 발견자의 영예를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교활하고 의도적으로 보고문을 위조했다고 말이다. 이 같은 폭로의 파장은 엄청났다. 학자들은 경악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이 베스푸치가 아니라니? 절제되고 겸손하며 현명한 행동으로 귀감이되던 그가, 멘데스 핀투처럼 파렴치한 사기꾼, 거짓말쟁이였다니? 이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한 번의 항해라도 거짓으로 밝혀(p. 126)(페르낭 멘데스 핀투(Fernao Mendes Pinto, 1509~1583)는 포르투갈의 탐험가이자 여행기로 유명한 저술가로, 1537년부터 1558년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지역(인도, 아라비아, 중국, 일본 등)을 여행하며 13번 포로로 잡히고 17번 팔려가는 등 극적인 삶을 살았다. 사후 출간된 『핀투 여행기』 (1614)는 과장된 모험담으로 오랫동안 '허풍쟁이'라 불렸지만, 최근에는 그의 여정이 실제 역사와 부합한다는 연구를 통해 신뢰를 얻고 있다.) 지면 나머지 항해들도 사실로 믿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프톨레마이오스로 여겨졌던 인물이 영웅이 되고 자 범죄를 저지른 파렴치한이라니!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비열한 범죄로써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교묘하게 명예의 전당에 침입한 자라니! 그의 허풍에 속아 신대륙에 그의 이름을 붙였으니, 학자들의 입장에서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지금이야말로 이 수치스러운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1627년 프라이 페드로 시몬Fray Pedro Simon은 매우 진지하게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포함된 모든 지리 서적과 지도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p. 127).
따라서 오랫동안 베스푸치가 사기를 저질렀다고 비난받았던 첫 번째 항해보고서의 조작과 그 밖의 모든 모순들은 결코 베스푸치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항해보고서에 각종 거짓 정보를 덧붙이고 과장해 출판한 파렴치한 편찬자와 인쇄업자들의 잘못임이 이제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설명은 복잡했던 상황을 분명하게 정리해준다. 그러나 모든 것을 깔끔하게 해명해주는 이 견해에 대해 베스푸치의 비판자들은 마지막 반론을 제기한다. 베스푸치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이 자신이 하지도 않은 항해에 대해 허위로 기술했다는 소문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 왜 한번도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또한 묻는다. 베스푸치가 세상을 향해 분명히 밝히는 것이 의무가 아니었을까? "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 대륙이 내 이름을 가진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이다.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사기 행위에 침묵하는 사람은 결국 그 사기의 공범이 아닌가? 이러한 비판은 언뜻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베스푸치가 당시 어디에 항의할 수 있었겠느냐(p. 169)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법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는가? 그 시대에는 문학 작품에 대한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일단 인쇄되거나 필사된 글은 모두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Abreche Direr가 수많은 동판화가들이 형편없는 작품에 자신의 인기 있는 서명 'A, D.'를 찍어 팔았다고 해서 어디에 항의할 수 있었겠는가? 『리어왕』이나 『햄릿』의 원본 작가는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을 마음대 로 고쳤다고 해서 어디에 불만을 표할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셰익스피어 역시 남의 작품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 되었다고 한들 항의할 길이 없었다. 한때는 볼테르의 이름을 빌려 누구든 자신이 쓴 그저 그런 무신론적이거나 철학적인 글들을 마치 그의 저작인 양 출판하려 들지 않았던가? 그러니 베스푸치라고 한들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변형된 글들에 어떻게 맞설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그가 쓴 원본을 끊임없이 왜곡하면서 부당하게 얻은 그의 명성을 세상 속에 퍼뜨렸다. 베스푸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자신의 무죄를 입에서 입으로 설명하는 것뿐이었다(p. 170) 그가 실제로 그렇게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508년이나 1509년 무렵, 그런 책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가 스페인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전에 모든 의혹을 개인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면, 왕이 굳이 탐험에 대한 허위 보고서를 책으로 출판한 사람에게 선원 교육과 정확한 보고서 작성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겼겠는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스페인에서 『지리학 입문』을 최초로 소유한 사람들 중 한 명은 콜럼버스 제독의 아들 페르난도 콜럼버스Fernando Columbus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 었다(그의 메모가 적힌 책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는 베스푸치가 콜럼버스보다 먼저 본토에 발을 디뎠다고 주장하며, 신대륙을 아메리카라 부르자고 처음으로 제안한 그 책을 읽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나름대로의 메모까지 남겼다. 그런데 페르난도는 콜럼버스의 전기에서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이라면 시기심에 불타는 인물로 비난했지만, 베스푸치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의 비난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침묵에 대해 이미 라스 카사스는 놀라움을 표시한 바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놀랐다. 제독의 아들이자 탁월한 판단력을 가진 인(p. 171)물인 페르난도가 분명히 아메리고가 쓴 「네 번의 항해」를 소장하고 있었음에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부정과 강탈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르난도가 아버지의 영광을 빼앗고 그가 발견한 신세 계를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만든 그 불행한 명명의 사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 베스푸치의 결백을 더 명확히 말해주는 것은 없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이 베스푸치의 의도와 무관하게 붙여졌으며, 베스푸치가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가로채려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p. 1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명성의 햇살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를 향해 비춘 것은 단순히 여러 가지 상황이 우연히 겹쳐진 결과였다. 오류와 사고, 오해가 빚어낸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햇살이 바로 그에게 비춰진 것은 그가 특별한 공로를 세웠거나 특별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운명이나 착오, 우연, 또는 오해 때문이었다. 그 영광은 같은 항해에 참여했던 다른 누군가가 쓴 편지에 돌아갔을 수도 있었고, 옆 배에 탔던 조타수에게 주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누구도 항의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다. 역사는 바로 그를 선택했다. 역사의 결정은 아무리 잘못되거나 부당하더라도 결코 번복될 수 없다. 편지에 적힌 두 마디 말, '문두스 노부스'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고 그가 실제로 모두 다녀왔는지조차 불확실한 「네 번의 항해」라는 제목 덕분에 그는 결국 불멸이라(p. 184)는 항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이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기록 속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이 되 었고, 그가 인류 역사 속에 남긴 업적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멋지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전환점을 만드는 것은 발견 자체가 아니라 발견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는 않았지만, 최초로 그것이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단 하나의 업적이 그의 삶과 이름에 영원히 결부된 것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행위를 이야기하고 설명한 사람이 그것을 실제로 해낸 사람보다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종종 아주 작은 계기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역사에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역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종종 역사는 평범한 인물에게 불멸의 업적을 안겨주고, 진정으로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이름조차 남기지(p. 185)않은 채 어둠 속에 던져버린다(p. 186).
